천로역정 고전의 숲 두란노 머스트북 1
존 번연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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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좋아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모든 걸 누리려고 하는 자들이지요. 바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그와 같지요. 그들은 지금 당장 좋은 것을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입니다. 도무지 내년까지, 곧 다음 세상까지 기다릴 줄 모르지요. 63쪽


그동안에 나름대로 정욕을 다스리고 있다고 여겼다. 내 형편대로 살아가자고, 넉넉하지 않지만 형편대로 살고 있으니 내가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내 기준으로 멋대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절대 정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동안 스스로 다스렸다 여겼던 정욕에서 결코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정욕을 좌지우지 한다고 여겼을 뿐 결국엔 스스로 합리화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군. 날씨가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길을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 뭐야. 나는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네. 186쪽

‘사심’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동안 내 마음 한 가운데 자리한 생각을 들켜버린 것 같아 뜨끔했다. 편안한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조금만 불편해도 투덜댔던 나의 모습이, 환경이 바뀌고 나에게 헌신과 봉사를 요구하는 일들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하지 못했던 날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저 십일조 하고 주일, 수요 예배에 참석하면 내 할 일이 다 끝난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크리스천의 순례길을 따라가면서도 이렇게 만나는 이들이 모두 내 모습인 것 같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나는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 모든 수고에 대한 위로를 받고 모슨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왕을 위해 뿌린 모든 기도와 눈물, 고통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금 면류관을 쓰고 거룩하신 분의 ‘참모습’을 영원토록 볼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섬기고 싶었지만 육신의 연약함 탓에 온전하게 섬길 수 없었던 하나님을 찬양과 감사로 영원토록 섬길 것입니다. 288쪽

그럼에도,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결국 천성문에 들어오게 해주셨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면서 수많은 반성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결국 들어온 천성문 앞에서는 오직 감사함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뿐이지만, 마치 내가 순례길에 오른 것처럼 편한 과정이 하나도 없었다. 수없이 바뀌는 내 마음과 걍팍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국 나를 천성문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저 감사하고 감사했다.

한 권의 책을 만날 때마다 이 시기에 나에게 이 책이 왔을까 곰곰 따져본다. 꼭 하나님에 내게 주신 메시지 같아서 허투루 읽을 수 없으면서도 읽는 동안 수많은 내가 만들어졌다 사라지곤 했다. 순례자의 길에 오른 크리스천이 내가 되었다가도, 그가 만나는 고집, 변덕, 세속현자, 신실, 무지가 누구의 모습인가 끊임없이 대입해보곤 했다. 깊은 반성과 탄성, 회개와 기도가 절로 나오면서도 마치 지금껏 나의 신앙생활을 낱낱이 되짚는 것 같아 많은 생각이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그리고 나의 미래까지 경험한 것 같았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고 싶지만, 하나님은 믿기만 하면 들어올 수 있다 했지만 세상의 온갖 것들에 유혹당해 하나님 나라를 익히 알면서도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자가 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님 나라를 명확히 보여주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알려 주면서도, 구원에 이르기까지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매일 온갖 것들에게 유혹을 당해 하나님을 등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려준다. 늘 실천이 어려울 뿐,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늘 곁에 있는 분임을 ‘그리스도께서 벽 뒤에 서 계신 것은, 우리가 시험을 받는 동안에는 우리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에 대해 알기가 힘들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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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옹이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15
노석미 글 그림 / 시공주니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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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저녁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베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창문 밖으로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울어서 데리고 나왔나 싶다가도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라 좀 의아했다. 그런데도 계속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방충망을 열고 봤더니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고기 냄새를 맡고 왔나 싶어 괜히 고양이한테 말을 걸어봤는데 나를 보자마자 베란다 창문 아래 틈으로 휙 숨어버렸다. 길고양이를 돌봐준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신비로운 초록 눈으로 마치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지만 봐도 기분이 묘해진다. 눈을 보고 있기만 해도 빨려들 것 같은데 이 고양이는 길 고양이다. 그래서 늘 배가 고프다. 사람들은 길에 사는 이름 없는 고양이가 싫어 빗자루로 쫓으며 저리 가라고 하니 고양이도 사람들을 싫어한다. 수다스러운 새도 싫고, 방정맞은 개도 싫고, 특히 소년들은 더 싫어한다. 짜증 가득한 고양이는 ‘정말이지 모든 게 다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한 소년이 고양이를 향해 ‘냐옹아!’ 하며 말을 건다. 고양이는 그저 귀찮다고만 여긴다. 그러다 비가 오는 날 벤치 밑에 웅크리며 비를 피하고 있는데 초록색 곰돌이 우산을 쓴 소년이 또 ‘냐옹아!’하며 말을 걸어온다. 고양이는 누가 냐옹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소년은 고양이에게 우산을 씌워주고는 비를 맞고 돌아간다. 모든 게 귀찮고 새침한 고양이는 그제야 처음으로 눈빛이 바뀐다. ‘왜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하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소년의 마음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고양이는 소년에 대한 마음이 달라졌다. 궁금한 게 싫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소년의 집 앞에 가게 된다. 소년은 다정한 목소리로 냐옹이에게 인사를 한다. 고양이는 쑥스러운 게 싫으면서도 소년의 시선을 완전히 피하지는 않는다. 그런 고양이에게 소년은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해준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던 고양이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저 길에 사는 고양이에 늘 배가 고프고 사람들이 모두 싫어했는데 소년에게는 예쁘고 특별한 고양이가 되었다. 늘 사람들에게 멀찍이 떨어져서 모든 게 귀찮았던 고양이는 그제야 소년을 제대로 바라본다. 냐옹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년이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여는 법을, 새로운 존재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 같다.

소년과 고양이를 보더라도 새로운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데 먼저 좋다는 표현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먼저 다가와준 소년을 보며 길에 살던 고양이가 서서히 마음을 여는 모습은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엄청난 일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누군가의 말을 비유해보자면 소년이 고양이에게 마음을 연 것이 모든 길고양이들에게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냐옹이’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에게만큼은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꼭 끝까지 한결 같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시도조차 안 하는 것보단 마음이 열리는 대로 해 보는 것도 용기다. 다음에 또 우리 집 베란다에 고양이가 찾아오면 어떻게 할까? 그때의 마음을 따라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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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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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도 봤고, 소설『시라노』도 읽었다. 그럼에도 원작은 희곡이기에 꼭 읽어보고 싶었다. 영화와 소설과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했고, 8년 전에 읽는 소설의 감정이 되살아날지도 지켜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희곡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라 소설처럼 깊게 집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희곡의 특징 때문인지 정신이 없긴 해도 생생함은 충분히 전해졌다. 이미 접한 이야기고 알고 있는 결말임에도 희곡은 마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동감이 넘쳤다.


 

8년 전에 소설『시라노』를 읽었을 땐 짧은 연애가 끝난 뒤였고, 현재의 남편을 만나기도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시라노에게 완전 몰입해서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이성과의 사랑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지금 접한『시라노』는 달랐다. 그 사이 나는 사랑의 쓴맛(?)을 본 건지, 사랑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버린 건지 시라노가 그저 답답했다. 그렇게 절절하게 느껴졌던 시라노의 사랑이 이렇게 달리 보일 수 있는지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아무래도 소설을 읽었을 때와 상황이 달라진 탓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랑의 결이 다른 것뿐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코가 못생긴 인물로 나오는 시라노는 록산을 사랑하지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시라노는 그런 이유보다 록산을 사랑하는 자체를 그저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고백을 듣는 순간부터 시라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처럼 혼신을 다해 그들의 사랑을 돕는다. 시라노에겐 그것도 록산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그의 마지막 고백을 통해서 어렴풋이 깨달을 정도로 나는 시라노에게 눈에 보이는 사랑만 강요했던 것 같다.

 

크리스티앙 대신 록산에게 진심 가득한 편지를 쓰고, 크리스티앙이 죽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녀가 혼자가 된 뒤에도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키고 그녀에 대한 마음이 한 번도 거짓인 적 없고, 변한 적이 없었던 사람 시라노. 옮긴이는 ‘결국 록산을 -동시에 관객이나 독자를-감동시키는 것은 잘생긴 외모나 재치 넘치는 말솜씨가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지킨 사랑, 그리고 침묵과 헌신이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시라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당당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의 정신을 실현한다.’고 했다. 그게 안타까움을 넘어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는데, 그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시라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이 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가 그의 사랑을 부정할 것이며, 왜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지 못했냐고 탓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온전히 몰입해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럼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록산과 이제 시작할 수 있는데 그의 생명이 끝난 버린 것이, 록산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또 잃어버린 것이 안타깝고 안타깝다. 시라노는 록산을 혼신을 다해 사랑해서인지 이상하게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후회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 막 시라노의 사랑을 알게 된 록산이 가여웠고, 시라노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그제야 록산의 남겨진 시간이 염려되었다. 사랑의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감히 논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부디 시라노가 없는 록산의 시간들이 외롭지 않길, 쓸쓸하지 않기를 시라노의 걱정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결국 시라노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나 보다. 나의 시선도 그가 사랑했던 록산에게 향해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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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서관 국민서관 그림동화 161
가즈노 고하라 글.그림, 이수란 옮김 / 국민서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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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가 넘은 시각, 낚시 프로그램을 배경음악처럼 켜 놓은 채 노트북을 켜놓고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재운 뒤 밀린 집안일도 하고, 간식도 먹고 오랜만에 내 시간을 갖고 있다. 내 시간은 낮에도 가질 수 있지만 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결코 같은 시간일 수가 없다. 오후 내내 두통에 시달려 누워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이 시간이 참 좋다. 그러다 마음을 내내 괴롭히던 밀린 리뷰를 쓰고 있는데, 편하게 쓸 수 있는 그림책들을 잔뜩 꺼내 다시 보니 또 새롭다. 이미 읽은 책이지만 이 책도 깊은 밤에 읽으니 또 다른 느낌이다. 한밤중에만 문을 여는 도서관의 이야기인데, 정말 존재한다면 지금 찾아가고 싶어지는 도서관이다.


한밤중에만 문을 여는 도서관이라 꼬마 사서 외에 세 마리의 올빼미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밤이 되면 근처에 사는 동물들이 도서관을 찾았고, 꼬마 사서와 올빼미들은 바빴지만 늘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책을 읽는 시간이 늘 평화롭고 조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북적이는 도서관에서 그들이 열심히 일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람쥐 밴드가 도서관이 떠나갈 듯 연주를 해댔고,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사과를 하면서 다음 콘서트 때 연주할 멋진 노래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꼬마 사서는 음악을 맘껏 연주할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해 주었고 책을 읽는 방에는 다시 고요함을 찾을 수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나는 조용히 하고 있다는 이유로 예의를 지키지 못한 사람을 볼 때마다 속으로 불만을 토해낼 때가 많다. 하지만 꼬마 사서가 다람쥐 밴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존하는 것에 대해 새롭게 배우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함께 공간에 머무르기보다, 나만의 편의만 살필 때가 얼마나 많았던지! 꼬마 사서가 책장 꼭대기에 앉아 울고 있는 늑대 아가씨를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슬퍼 울고 있는 늑대 아가씨의 손을 잡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방으로 데려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함께 책을 읽었다. 꼬마 사서와 세 마리의 올빼미는 그 이야기가 아주 행복하게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을 잘 표현한 단순한 색 때문에 판화처럼 느껴지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밤의 도서관의 느낌이 물씬 살아난다. 해가 떠올라 모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즐겁게 도서관을 나서고 꼬마 사서는 그들을 배웅하는 모습에서 여전히 밤이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거북 청년은 모든 동물들이 돌아간 뒤에도 느릿느릿 책을 읽고 있었다. 500쪽 밖에 안 남았다며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북 청년에게 도서관 카드를 만들어 책을 빌려갈 수 잇게 해준다. 꼬마 사서와 올빼미들의 도움으로 카드를 만들고 등에 책을 선물처럼 싸매고 가는 거북이의 모습이 참 행복해 보인다. 그렇게 마지막 동물 친구까지 모두 보낸 뒤 꼬마 사서와 올빼미들은 도서관 청소를 한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책을 찾아 들고 꼬마 사서와 올빼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날이 밝았으니 올빼미들이 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기 위해서였다.


한때 책이 너무 좋아 사서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며 무조건 책만 좋아해야만 사서가 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책을 함께 읽는 이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것도 필요하고, 당연하게도 다양한 일들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함을 느낀다. 한밤의 도서관을 여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 모든 일을 싫은 소리 없이 해 내는 모습을 보며 책만 좋아하는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 나누는 건 어쩌면 그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라 서로 도울 때 가능하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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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모자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로트라우트 수잔네 베르너 지음 / 보림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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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렇게 글씨가 하나도 없는 그림책을 만나면 즐거워진다. 그림책을 봐도 글씨에 치중에 읽는 나에게 오로지 그림만 보게 만드는 것도 좋고, 내 맘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읽는 것도 좋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설렘 가득한 마음을 안고 책을 펼쳤다. 제목에서처럼 바람에 날리는 모자가 등장한다. 등장인물 모두 모자를 쓰고 있지만 모자가 날리는 주인공은 바람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듯 이제 막 날아가기 시작한 모자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날아가는 모자를 따라가 보지만 허사다. 그때부터 모자의 여행 아닌 여행이 시작된다. 겨울에 날아간 모자는 이제 막 싹이 트고 꽃이 피는 봄에 거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다. 비오는 날 강아지의 입에 물려 있기도 하고, 강아지의 주인은 모자를 쓰고 동물원에 갔지만 원숭이에게 뺏기기도 한다. 원숭이가 모자를 쓰고 있을 때 동물원 담 너머로 처음에 등장했던, 바람에 날리는 모자와 크기만 다른 모자를 쓴 책을 읽은 신사가 등장한다. 무언가 이 신사와 모자가 인연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던 사육사가 그 모자를 쓰고 비오는 날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짐칸에 모자를 올려놓은 사육사 뒤로 책을 읽는 신사가 보이고 신사도 짐칸에 모자를 올려놓았다. 기차에서 모자를 두고 내린 신사는 여전히 책을 읽으며 걷고 있지만 모자의 크기가 다르다. 책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신사는 모자를 내려놓다 염소에게 씌워 준 것도 모르고, 염소는 모자를 쓴 채 숲으로 간다. 그렇게 모자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주변의 동물들이 항상 등장하는데 동물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하거나, 모자를 쓴 주인공을 힐끔 쳐다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염소가 쓰고 있던 모자는 어느새 토끼에게 옮겨가 있고, 역시나 책의 처음에 등장했던 두툼한 옷을 입은 소년에게 발견된다. 소년은 눈사람에게 그 모자를 씌워주는데 어느새 모자를 처음 잃어버렸던 시점에서 일 년이 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자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바라보고 있다. 드디어 오랜 시간이 지나 모자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일까? 모자의 주인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눈사람에게 씌워주고 모자를 찾아 쓰고는 눈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책의 처음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똑같이 등장하는데 이번엔 좀 다르다. 바람에 모두의 모자가 날리지만 주인공은 모자를 꼭 붙들고 있어서 바람에 날리지 않는다.

모자의 긴긴 여행 뒤에 되찾은 모자를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빙긋 웃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 괜히 나도 웃음 짓게 된다. 그러면서 며칠 전 즐겨 쓰던 모자를 버렸던 씁쓸한 기억이 떠오른다. 2년 전 구입한 모자를 한 번도 빨지 않아 세탁을 하려고 화장실 선반에 모자를 올려 두었다. 이제 막 기저귀를 떼기 시작한 둘째가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화장지를 조금씩 뜯어서 넣더니 급기야 내 모자도 변기에 넣어버렸다. 도저히 다시 쓸 수가 없어 모자를 버렸다. 그리곤 너무 아쉬워서 똑같은 모자를 주문했다. 이 책처럼 오랜 시간 동안 여행하고 올 모자가 아닌 똑같은 상품의 모자지만 주인공처럼 나도 모자를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다시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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