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9일의 참사를 일컫는 ‘피의 일요일‘의 대학살을 규탄하는파업과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그 한 달 동안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40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연장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노동자 시위였다. 그러나 파업은 제대로 조직되지 않았다. 파업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작성됐다. 게다가 사회주의 정당들은 아직도 대단히 허약했고,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정당 지도자들은 경찰로부터 지나치게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은 자력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차르 정부 권위에 대한 혁명적 위기로 전환시킨것은 자유주의적인 중간계급과 귀족의 반응이었다. 1903년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직 종사자들과 젬스트의 활동가들은 국민의회에 대한 - P45

요구를 포함해 정치 개혁에 찬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 P46

레닌이 보기에, 1905년은 세 가지 사안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첫째,
‘부르주아의 파탄 및 전제정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들의 파탄. 둘째, 농민층의 어마어마한 혁명적 잠재력. 셋째, 제국의 기반을 치명적으로 허물 수 있는 국경지역 내 민족주의세력의 잠재력.
그리고 그런 결론에 이르자 레닌은 근본적인 볼셰비키의 사상(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할 때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을 전개했다. 즉 노동계급의 ‘전위대‘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농민들 및 여러 민족들과 연합체를구성하는 경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우선적으로 거치지 않고도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 P60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세워질 노동자들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생각했다. 러시아에 들어설 노동자 국가의 존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발전에 좌우될 운명이었다. - P61

스톨리핀은 구 엘리트 정치인의 전통적인 특권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멀리 떠나가게 했고, 두마가그의 앞을 가로막자 두마를 억압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을 멀어지게 했다. 이런 정치적 단호함은 그의 관료로서의 좁은 안목과 차르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됐다. 스톨리핀은 행정적 지시를 통해 개혁을 이룰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층을 동원하기 위해 관료사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만약 개혁의 수혜자인 농민들을 조직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자신의 고유한 정당을 세우는 일에 실패했다. 스톨리핀 개인은 존재했지만, 스톨리핀 추종자들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스톨리핀이 숨을 거두자, 그의 개혁 또한 그를 따라서 소멸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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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겐치아가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렸던 이유는 그것의 ‘과학적‘인성격 때문이었다. 리디아 단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빈곤과 후진성의고통에 "객관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성의 진로"로 비쳤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가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슷해질 것이라고마르크스주의에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운동에 가담했던 어느 활동가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의 마르크스주의의 유럽적 성격에 매혹됐다. 그것은 우리의 토속적인 외형과 지방적 편협성의 냄새와 맛을 풍기지 않았으며,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절반은 아시아적인 나라로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자유 - P33

주의적 정치체제의 문화와 제도와 속성을 가진 서유럽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제시했다. " - P34

레닌은 훗날 그의 수사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될폭력론으로 경제주의를 공격했다. 레닌은 경제주의의 전략이 사회주의와 혁명을 파괴할 것이며, 사회주의와 혁명은 인민의 의지당의 형태를 따르는 잘 훈련된 전위당의 중앙집권화된 정치적 지도 아래에서만 성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 정권을 타도하려면, 당 또한 중앙집권화되고제대로 된 규율 아래 놓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즉, 당은 차르 정부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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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운동 제1차 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흥선대원군을 받들고 새 정부를 세우려 했다. 동학군의 1차 진주성 전투 성공을 계기로 조선 조정은 청군에 파병을 요청한다. 동학군은 군사적으로 일본군의 맞수가 되지 않았지만 나약한 조선 조정은 그런 농민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21) 1885년 맺은 텐진조약의 조항에 따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유폐, 대원군을 옹립한 뒤 조선에 개화 정권이 들어선다. 일본은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주한 외교관을 보호하고 공사관 피해를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한 고종 보호 예방 조치에 대한 지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선을 가설하면서 경비를 이유로 현지에서 인부를 구하고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사유지에 함부로 전신주를 시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 


그동안 남접과 북접 동학군은 따로 움직였는데 이제는 각 지도자 측에서도 힘을 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동학 북접 교단과 연합작전을 모색하면서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접촉한 사실이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동학교도 장두채라는 인물이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군과 합세해 일본군을 격퇴하기로 뜻을 맞춘 뒤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앞으로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사자를 보낸 사실도 포착되었다. 1894년 8월에 전봉준이 태인에 있을 때 두 사람이 찾아와 흥선대원군의 친서를 내밀었다. 서찰에는 "서울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야 하니 곧바로 서울로 진격해달라"고 쓰여 있었다. 

또 8월에는 흥선대원군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농민군에게 겉으로는 효유문을 보내 해산을 종용했으나 뒤이어 재봉기를 당부하는 글을 은밀하게 보냈다. 흥선대원군의 수족들도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며 양쪽의 뜻을 전했다. 9월 초 무렵 전봉준은 송희옥의 편지를 받았고 이어 흥선대원군의 밀사인 박동진과 정인덕이 전주로 내려와 전봉준에게 재봉기를 당부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76~77)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친서를 보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전봉준 계열의 동학 인사가 흥선대원군과 정말 접촉을 했을까.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는 부분이 걸린다. 다만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연락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보여진다.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역사넷 '동학농민운동' 中)


위 사료를 보면 책의 전개 내용과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정말 대원군은 효유문을 내려서 표면상으로는 동학군의 봉기의 흐름을 억제하려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봉기를 계속 가져다주길 바랐을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대원군이 설사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고 해도 온전한 마음이었을지는 회의적이다. 아무리 무너져 가는 조선 왕조였다고 해도 왕조 국가의 최고 수장자의 눈에 동학군의 봉기가 곱게 비칠리 없기 때문이다(2차 봉기 때 공주에서 일어난 전투 상황을 보면 조선 조정은 관군과 일본군과 함께 지방 사족과 유생에 힘을 빌어 농민군을 탄압하는데 혈안을 올렸다).  


남접집단이 9월 10일 삼례 재기포를 단행하고 북접교단이 9월 18일 기포령을 발하였으나, 두 집단 모두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를 막아낼 방법이 묘연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원군 효유문과 더불어 고종의 선참후문 교서 등이 삼남일대에 전해지자 갑오변란 이후 척화거의를 도모했던 척사유생들조차 항일연대는 커녕 도리어 반동학군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 몇몇 호남 지역의 북접계 지도자들이 남북접 연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남접계 동학군의 집요한 ‘동참 요구’ 때문이었다. ... 9월 18일 기포령 이후 북접교단 휘하의 동학군도 관아를 습격하여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무장대를 편성하기 시작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9월 그믐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 中)


호남에 속한 김낙철 등은 남북 교단의 조화방법을 모색해 김방서, 유한필, 오지영 등을 먼저 전봉준에게 보내 화해를 건의했다. 고대하던 전봉준을 이를 받아들여 전라도 지역 북접 인사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세 사람을 최시형에게 보내 타협을 모색했다.

신중을 기하던 최시형은 이들을 만난 뒤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등 교단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했다. 여러 북접 지도자는 논의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조정에서는 집강소 기간에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남접 북접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통속으로 보아 탄압했고 교단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포교들을 풀어놓은 상황이었다.

최시형은 손천민을 전봉준에게 보내 진의를 확인했고 손천민은 이를 최시형에게 알려 연합전선을 펴야 한다고 건의했다. 손병희는 대세를 거론하며 남북접이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최시형은 마침내 전국의 교도들에게 남북접이 손을 잡고 항일전선에 나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대동원령이라 한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85)


북접 선봉장 이종훈은 10월 중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내리에 도착하여 사흘 동안 진을 치고 머물렀다. 해월신사께서 군사 지휘부를 정할 때 의암 선생에게 대통령기호를 받게 했다. 전규석을 선봉으로 삼고, 나는 중군으로, 이용구를 후군으로 삼았다. 의암 선생의 말씀을 준칙으로 받들어 논산으로 내려가 전봉준과 군대를 합했다. 두 군이 진용을 합한 지 사흘 만에 의암 선생께서 해월신사를 모시고 오셔서 진중에 주둔하고 머물러 계셨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97~98)


남북접 연합의 세력은 차이가 있지만 그 과정은 비슷하게 기술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의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도 역시 삼례 봉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이에 반해 <198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에서는 삼례 봉기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기에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했다. 첫째로, 일본군과 관군이 우금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고 공주로 들어오는 통로를 봉쇄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시켰다. 농민군은 같은 포위 작전을 폈지만 일본군과 관군에 비해 그 변경 범위가 넓어 압박하는 효과가 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무기의 열세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의 사족이나 유생들 대부분은 관군과 일본군에 협력했다(물론 일부는 동학군의 편에 서기도 했지만). 동학군이 내건 기치가 그들에게 먹히지 않았기에 혁명을 위한 탄력을 받기에 부족했다. 그리고 남북접 내부 세력의 충돌과 갈등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북접과 남접 간에만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같은 북접끼리, 같은 남접 끼리도 세력 다툼이 있었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는 패전의 원인 중 가장 먼저 2차 봉기 준비 과정에서 삼례에서 시일을 너무 끌었던 이유를 대었다. 북접 지도자와의 호응과 동의를 얻는데 시간을 빼앗겨 정작 일본군과 관군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면서 우위에 서게 했다는 이유다.  


공주 전투 후 전봉준은 포기하지 않고 물러나 다시 몇 차례 공격했으나 원평, 태인 전투에서 패한 것을 끝으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청일전쟁을 치르는 일을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운동이 실패하고 전봉준이 재판을 받는 결과까지가 그려진다. 이 책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전국적인 관점에서 일어난 봉기 내용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느꼈다. 전라, 충청 지역 뿐 아니라 경기, 황해 등 다른 지역의 상황도 다룬다.

<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은 제목과 노선의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급진적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적어도 2차 봉기 중 북접 진영의 더 상세한 상황과 공주 중심의 전투 과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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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4
이아리.권혁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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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엄마(또는 할머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회고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는 매우 오랜 기간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도모하고 살길을 찾아온 역사였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여성들은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동을 했다. - P11~12

의미 있는 내용의 신간이 나왔다. <역사 속 여자 OO하다> 시리즈다. 우선 4권의 책이 나왔는데 덜컥 한꺼번에 사기보다는 한 권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1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권이었다는. 다른 무엇보다 4권의 제목과 내용이 가장 먼저 끌렸다.
이 시리즈가 왜 기획되었는지 독자들 입장에서 대부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일하는 여성학자들은 역사 속 사료를 보고 읽으며 여러 번 한계를 마주한다. 남아 있는 사료와 기록은 대부분이 남성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료 속에서 아무리 이를 잡고 헤집어봐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근현대 이후 시기부터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는 그런 경우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이 시리즈는 2024년 여성 사학자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다 의기 투합하여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4권의 내용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여자, 식모 살다>를 통해서 근대 시기 행랑어멈과 식모에 주목을 했다면 <여자, 회사 가다>는 여성이 회사에 취직하고 맞닥뜨린 현실을 다룬다. 여러 사료를 접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독자가 당시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랑은 본래 근대 이전 하인들이 주인이 사는 안채와 분리되어 사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정권의 개혁 내용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노비들이 차차 주인을 떠나자 그들을 대신해서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상경하게 된 농민들이 서울 양반집의 행랑채를 채우게 되었다.
식민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단기간만 조선에 머물던 재조일본인들이 가족을 이끌고 상당수 들어오며 서울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확산 중이던 서울의 행랑살이는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쇠퇴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호황을 누린 일본은 젊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식모 일을 할 만한 젊은 여성이 크게 부족해졌다. 반면 조선의 재조일본인 가정들은 달랐다. 조선인 식모가 일본인 식모에게 주는 급료의 6활 정도만 주어도 기꺼이 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조선인 식모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진고개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발에는 일본식 게다를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조선인 여성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식모살이를 하려는 여성들이 어떻게 재조일본인 가정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에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들일테니 서울에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다름 아닌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 주요 도시에 국가적으로 인사상담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인사상담소가 전문 ‘직업소개소‘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다. 직업소개소에서 부르던 공식 명칭은 ‘호내사용인‘으로 여러 직업 중 식모가 전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라니 놀랍다.
그러나 당시 식모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별로 곱지 않았다. 언론도 그렇고 남성들의 편견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영심 있거나 유혹하는 여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범죄에 연루되거나 성폭력 및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이 많았음에도 사회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웠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인 것 같다.

대학을 간다 했을 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 나라 경제도 어려웠고 살림이 팍팍했을 때니 말이다. 그래도 여성이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던 때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과외 과열 해소를 명분으로 1981학년도부터 각 대학에 기존 졸업정원의 30퍼센트를 추가 선발하되, 그만큼을 중도에 탈락시키도록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겐 당장 눈에 띄는 치적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입시 지옥을 해소하겠다며 과외 금지와 함께 졸업정원제를 내세운 것이었다. 졸업정원제는 대학생 수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 여대생 수 역시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학생이 점차 고등교육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모가 딸에게도 대학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 P102~103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를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졸업정원제를 시행했다는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늘어난 대학생 정원만큼 여학생의 수도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1993년 8월 서울대에 심상치 않은 대자보가 붙었다. A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였다. 대자보를 붙인 여성은 조교로 불쾌한 일을 겪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를 느꼈는데 전임 조교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은 상습범이구나.‘느꼈다. 짐작하겠지만 대자보를 붙인 후 논란과 더불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또한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부서 전환과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 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성을 채용 공고에서부터 배제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이제 직장 안에서의 성희롱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작고 얇은 책인데 쉬우면서도 알차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며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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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와이비 아카이브 2
지수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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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점거투쟁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크게 달라진 정세와 조건 가운데서 전개된 assembly/occupy(이하 A/O 투쟁으로 줄여 씀)이었다. 이 책의 표제로 ‘모이고 모으자! 점거하고 담판하자!‘라는 슬로건을 특기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공동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호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과거(의 이야기)이든 후대의 독자는 기존에 누군가가 정리해놓은 역사를 만나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정리는 여러 번의 논란과 재고를 거쳐 가장 최근에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굳어진 정설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감히 그런 도전을 감행했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동학혁명 등등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이것이 교과서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것이라 이걸 택하겠다)은 관련 자료와 데이터가 방대히 축적된 만큼 이미 충분히 많은 저서들이 나와 있다.

이 책은 동학군의 2차 봉기로 초점을 맞추었다. 장소는 호남이 아닌 호서, 충청 지역의 공주다. 공주라는 지역 이름만 보면 우금치 전투를 말하려 하는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갑오년 항쟁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한 호서 지역의 역할이 간과되었기에 이를 복원해야 한다 말한다. 기존에는 지나치게 전봉준 중심의 호남, 남접 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는 기존의 농민 전투(전쟁)이 아니라 임술년 이래 항쟁의 역사에서 어셈블리(도회)라는 말로 상징될 수 있는 비폭력적인 연대와 소통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내용들이다.

기존 동학농민운동의 서술은 보통 호남 배경으로, 전봉준 중심으로 서술된 측면이 많다. ‘전라도 고부 군수의 학정에 못이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전주성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새로 파견된 안핵사의 농간에 다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의 발효로(구실이겠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에 농민들은 반봉건에 반외세 구호를 걸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군 구식 무기에 밀린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렇게 말이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저자가 말하려고 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군의 2차 봉기는 남접 집단의 8월 27일 남원 도회나 전봉준의 9월 10일 삼례 재기포령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임기준과 이유상 등 공주와 충주 등 호서 지역의 척사유생들이 대원군 밀지나 고종 명의의 「조가밀지」를 받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의려를 결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둘째, 기존 연구는 남북접 지도부 사이의 연대가 먼저 이루어진 후 최시형의 9월 18일 기포령이 나왔으며, 이에 의해 북접이 남접 전봉준과 협력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고 본다. 공주를 점거하는 투쟁에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시기는 9월 그믐경이고, 그들이 연대한 이유는 일본군과 관군의 탄압 및 동학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셋째, 기존 연구는 11월 8일~11일의 우금치싸움을 포함한 일련의 투쟁을 공주 점거투쟁의 절정으로 이해하였으나 저자는 우금치싸움이 아닌 10월 23일∼25일 공주를 둘러싸고 금강 남북 양안에서 전개된 효포 싸움이 더욱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넷째, 남북접 동학군의 사망자 통계 사상자의 숫자가 과장되었으며 기존 연구는 공주 점거투쟁에서 동학군이 대규모로 참여하고 대규모 살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동학군의 대규모 사망은 그들이 정식으로 해산한 11월 중순 이후 집단 학살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섯째, 저자는 동학 연합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기존 연구에서 말하는 “병력을 몰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호서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 공주를 점거한 상태에서 애국적 사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와 무장 시위(도회와 의거)를 통해 중앙군·감영군, 향리·군교·상인들의 호응을 유도하여 조선 왕조나 일본 정부와 정치 담판을 하려 한 최종 단계라고 했다.
여섯째, 공주 점거투쟁의 성격을 논하면서 저자는 이 투쟁의 주역이 농민군이 아니라 동학군이며 혁명군이 아니라 (무장)시위대/의려이므로, 이들을 전사라고 부르거나 이 사건을 내전이나 혁명, 심지어 전투로 부르는 것도 역사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에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으며 중요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호남 중심의 배경 중심에서 호서 지역 배경으로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하려한 점이 엿보인다. 또 기존에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제를 뒤엎고 공주 점거를 위한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공주점거 투쟁 시기 지방수령이나 척사 유생들이 동학군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나 동학군의 무기 열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 등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새로운 의견 제시이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반침략 반봉건 민중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을 어셈블리(도회 또는 의거)라고만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거와 전투를 그렇게 무자르듯 구획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또 어셈블리라는 용어도 좀 난해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굳이 어셈블리라는 용어를 쓰면서 기존에 도회라는 단어가 사어가 됐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서 어셈블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선뜻 와닿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말 호서 지역의 유생들이 고종 명의의 밀지를 받았는가. 저자도 이 부분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다 그런 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전봉준이 우금치 싸움을 결행(및 실패)하면서 정말 교단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었다. 전봉준은 호남 남접 기반의 대장군이었고 호남 남접은 당시 자료를 마땅히 기록하지 않았다(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해당 자료는 북접 동학교단에서 생산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비롯하여 저자가 전개한 논지가 추론에 기대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아쉬웠다.

이렇듯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엿보이는 책이다. 근래 들어 읽은 책 중 가장 도발적인 책이었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뒤 여러 건의 서평이 올라와 논쟁이 되었다고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는 1980년 이후 민중 중심의 역사 담론이 유행하고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봉건제도 개혁과 국권 수호에 기여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며 민족정기를 선양하기 위해 위한 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된 이후 민족적 측면이 강조되고 혁명화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이 시간이 흘러 그냥 묻히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시선의 물꼬를 트는 책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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