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태평천국의 바람이 외국인들을들이지 않으려는 만주족의 오래된 노력과 극명하게 대조되던 시기에,
영국이 중국에서 원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청나라 당국보다 반란군에게서 얻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점이 분명해 보였다. 분명 청나라 정부에는 영국인을 "형제"라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첫 번째는 중립의 원칙이었다. 즉, 태평천국과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은 청나라에 더큰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가뜩이나 엘긴이 이미 입힌 피해를 안타까워하는 마당에), 내전에서 한쪽 편을 들면 영국이 스스로 선언한 원칙에 위배된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중립은 영국이 만주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 동시에 태평천국과 우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실상 규정하고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태평천국이 영국과 동일한 의미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인지 여부였고, 이는 선교사들이 여전히알아내려 애쓰고 있던 문제였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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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란 자연스러운 활동과전통적인 사건들의 조용한 흐름, 계절과 하늘의 장엄한 질서를 말한다. 자연이란 모든 시내와 바위, 별로 예증되고 구현된 도다. 자연이란 사람들이 지혜롭고평화롭게 살려면 반드시 순응해야 하는 행동 법칙을 지닌 사물들의 공정하고비인격적이지만 합리적인 법칙이다. 이 사물들의 법칙이 바로 우주의 도다. 이는 행동 법칙이 삶의 도인 것과 같다. 사실 노자의 생각에 의하면 도는 하나이며, 인간의 생활은 본질적이고 전체적인 리듬이라는 면에서 보면 세계의 리듬중 일부다. - P356

온 천하에 최고의 미덕을 보여 주고자 한 선조들은 나라를 먼저 질서 정연하게 만들었다. 나라를 질서 정연하게 만들려고 한 선조들은 먼저 가족을 다스렸다. 가족을잘 다스리려고 한 선조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렸다. 자신을 다스리고자 한 선조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바르게 했다.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 선조들은 먼저 생각을 성실하게 가다듬으려고 했다. 생각을 성실하게 가다듬으려고 한 선조들은 먼저-지식을 최대한 넓혔다. 그렇게 지식을 넓히는 길은 사물을 살피는 데 있다.
사물을 살피다 보면 지식이 완벽해졌다. 지식이 완벽해지면 생각이 성실해졌다. - P371

생각이 성실해지면 마음이 바로잡혔다. 마음이 바로잡히면 자신이 다스려졌다. 자신이 다스려지면 가족이 다스려졌다. 가족이 다스려지면 나라가 올바로 다스려졌다.
나라가 올바로 다스려지면 온 천하가 평온하고 행복해졌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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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연구법
양계초 지음, 한성구 옮김 / 생각과종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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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인물을 평가하고 세상을 논한다"라는 원칙을 제시했는데, 세상을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적 언어로 옮기자면 시대적 배경을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인류는 횡적으로는 사회적 존재이고 종적으로는 시대적 존재이다. 만약 사회와 시대를 떠나 사람이나 집단을 관찰한다면 사상과 행위의 껍데기만 보게 되므로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경솔하게 비판하면 오류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배경을 먼저 그려야 하며, 역사를 읽을 때도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배경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 P319


양계초는 청말 지식인이자 사상가로 당시 빠르게 변하는 대외 정세를 배경으로 부패한 내부 정치 및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강유위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에 참여했고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다양한 글을 남긴 사람이다. 내게도 정치가이자 지식인, 사상가로 익숙했는데 이 책을 보면 그가 역사학자로서도 큰 몫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역사연구법>은 1922년 저작으로 전통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역사의 개념과 의의, 연구 범위, 사료의 수집과 감별, 역사 서술의 체계 등을 담아 미래 역사학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담은 책이다. 신해혁명이 있고 10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 무렵 중국은 역사 방법론 붐이 일어 관련 저작이 다양하게 쏟아져나왔다. 이 책은 양계초가 1921년 남개대학에서 한 강의 내용을 같은 해 잡지에 연재 형식으로 발표했던 것을 다듬어 1922년 발간한 것이다. 당시 역사 방법론 관련 저작들이 그렇겠지만 양계초는 청말 개혁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으로 근대 서양 역사학의 방법론을 적극 수용하되 청에 맞게 개조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연구 방법을 내세웠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인간의 활동(활동의 생산물이자 정태)으로 사회성을 지니며 시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온 것을 말한다. 양계초는 전통의 역사는 군주 중심의 정사 위주로 쓰여졌음을 비판하며(사마천 이후 중국의 역사서는 황실 중심의 역사로 관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관에서 여러 저자가 맡아 저작을 펴내다보니 편차가 있고 일관성이 없는 한계가 있었음) 현대는 역사에서 교훈을 삼아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역사서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져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서는 더 이상 군주, 학자나 지식인만의 전유층이 아닌 개인과 사회의 이해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는 어떤 사람이 읽어야 하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사람은 국민의 일원으로 국가 안에 존재하며, 동시에 인류의 일원으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이들이 과거의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공감할 때 역사에 대한 필요성이 생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필요한 역사는 "국민 자치통감" 혹은 "인류 자치통감"이다. - P20


양계초는 앞서도 말했듯 기존의 역사 서술 방식을 비판하면서 사회진화론, 국민국가, 사회발전론 등 서양의 여러 이론을 받아들였음에도 지나친 발전론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4장과 5장은 사료와 사료를 검증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개인적으로도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사료는 문자 기록 뿐 아니라 문자로 쓰여지지 않은 기록도 포함된다. 옛 역사서, 당안, 서신 등의 교류사 문헌, 철학서나 문학, 일반 가정의 장부, 족보나 가보, 경적, 원본이 사라진 발췌본, 불경 등의 고문서, 갑골문, 금석, 석화, 외국인이 기록한 이야기 등... 생각 이상으로 양계초는 사료의 범위를 넓게 다루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사료를 수집할 때는 예리한 감각으로 냉철하게 끈질긴 태도로 관찰한 끝에 얻어내야 하며 수집한 사료는 유력한 반증을 찾고 의심하는 태도로 바라보다 실마리를 얻었을 때 가설을 세워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동일한 역사 기록에서도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경우는 시기적으로는 사건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택하는 것이 좋고, 역사를 기술한 사람과는 가급적 가까운 것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그렇다고 맹신해서도 안 된다). 역사를 기술한 사람의 태도와 지식을 고려하되 편찬 시기는 사건의 중대성 때문에 나중에 편찬된 경우도 있으니 이도 고려해야 한다. 사료에는 수많은 위서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예 오류인 경우도 있으나 그럴듯하지만 일부러 거짓말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양한 위서 검증 방법을 제시하면서 과거 편찬된 역사서를 예로 들어 설명해준다. 


인류의 사건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단편적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복합적인 인과 관계가 고려하여 기술되어야 함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비교적 최근인 위화단 사건을 예시로 언급하며 당시의 국제적 배경과 중국 정부의 대응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간접적으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기도 한다. 다만 그의 중화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글 속에 스며 있고 중국의 소수 민족 편입에 대한 생각도 불편한 점이 있어 그 점은 감안하고 읽는 것이 좋겠다. 


옮긴이는 이 책을 2017년부터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초벌 번역은 일찍 끝냈으나 책이 나온 것은 지금에서야 나왔으니 시간이 제법 걸린 셈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신간을 훓어보다 얻어걸린 책이다. 평소 구입 목록을 바탕으로 한 추천 알고리즘이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책이리라. 제목을 보고 뭔가 궁금했다가 저자를 보고 '양계초? 설마 그 양계초?' 했고 목차를 보고 '이런 책을 썼다고?' 하면서 주워담았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역사학자로서 중국의 역사학에 대해 가졌던 비판 의식과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학에 대해 가졌던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이지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유효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구체적 지침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를 읽거나 공부하는 사람, 역사와 역사학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가져야 할 문제 제기와 의식에 대해서 곱씹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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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체계 혹은 다르샤나(논증) 가운데 여섯 체계는 크게 부각되어 브라만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든 힌두 사상가는 곧 이 학파들 중 이런저런 학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 여섯 학파는 모두 힌두 사상의 토대인 특정한 가정을 받아들인다. 베다는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라는 가정과, 추론은 실재와 진리에 이르게 하는 지침으로는, 오랫동안 가르침에 복종하며 수행하여 영적인 감수성과민감성을 제대로 갖춘 개인의 직접적인 지각과 감각보다 신뢰성이 떨어진다는가정, 지식과 철학의 목적은 세상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해방되려는 것이라는 가정, 사고의 목적은 욕망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욕망이 좌절됨으로 인해 나타나는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는 가정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야망과 투쟁, 부, 진보, 성공에 싫증이 나면 다음과 같은 철학들을 찾는다. - P202

힌두 철학은 유럽의 철학이 끝나는 곳, 즉 지식의 본성과 이성의 한계를탐구하면서 시작한다. 그 출발점은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자연학이 아니라로크(Locke)와 칸트의 인식론이다. 힌두 철학에 의하면 정신은 가장 직접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오직 정신을 통해서만 그리고 직접적으로만 알려진다. 그러므로 정신은 물질로 해소되지 않는다. 힌두 철학은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지만 우리의 감각이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과학은 도표로 표현된 무지이며 마야에 속한다. 과학은 항상변하는 개념들과 말로 세상의 원리를 표현하지만 이성은 그 세상의 일부일 뿐이며 끝없는 바다를 떠도는 해류일 뿐이다. 심지어 이성을 지닌 인간조차 환영인 마야일 뿐이다. - P225

천성적으로 시적인 심성을 타고나는 힌두인이 볼 때는 기록할 만한 것은 모두 시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자연히 시적인 형태로 이끌리게 된다. 힌두인은 문학이란 큰 소리로 낭독되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자신의 작품도 기록된 형태보다는 구전 형태로 유포되어 존속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낭송하고 암기하기 좋은 시적 혹은 경구적 형태를 부여했다. 그 결과 인도의 거의 모든 문헌 - P259

은 시적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과학과 의학, 법, 예술 분야의 글도 운율이나 리듬 혹은 그 두 가지 모두의 형태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문법과 사전까지도 시의 형태로 바뀌었다. 우화와 역사도 서구의 경우에는 산문 형태로만족하지만 인도에서는 선율이 아름다운 시의 형태로 발견된다. - P260

인도 건축을 간단히 뒤돌아보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힌두적인 것과이슬람적인 것 두 개의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인도의 건축 교향곡은 이 두 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대부분의 유명한 교향곡에서 처음에 망치를 치는 것 같은 소리로 깜짝 놀라게 한 직후 무한히 섬세한 선율이 이어지는 것처럼, 인도의 건축에서도 힌두의 천재들이 보드가야, 부바네슈와, 마두라, 탄조르에 세워 놓은 대단히 힘 있는 기념물들에 이어서 파트푸르와 델리, 아그라에서우아한 멜로디가 등장한다. 그리고 두 개의 주제가 정교하게 뒤섞여 끝까지 이어진다. 무굴 제국에 대해서는 거인들처럼 건축하여 보석 세공인처럼 마무리짓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인도 건축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나을 것이다. 힌두인은 거인처럼 건축하여 보석 세공인처럼 마무리 짓는다고말이다. - P303

인도의 영혼 자체인 종교적 신념을잃어버린 서구화된 힌두인들이 미망에서 깨어나 슬픈 모습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신들이 죽은 모습으로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후에는 유토피아가 천국의 자리를 채웠고 민주주의가 열반의 대체물이 되었으며 자유가신을 대신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18세기 후반부에 진행된 일이 동양에서는 이제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상은 느리게 발전했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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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시대의 1세기에는 투르크족과 비슷한 중앙아시아 부족인 쿠샨족이 카불을 점령한 후 그곳을 수도로 삼고는 인도 북서부와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들이 낳은 가장 위대한 왕 카니슈카의 치세에는 예술과 학문이 발전했다. 그레코불교(Greco-Buddhist)의 조각은 불교의 가장 위대한 일부 걸작들을 낳고, 페샤와르와 탁실라, 마투라에는 훌륭한 건물들이 세워졌으며, 차라카는 의학을 발전시켰다. 나가르주나와 아슈바고샤는 마하야나(Mahayana, 대승) 불교의 토대들을 놓았는데, 이 불교는 후에 가우타마가중국과 일본을 얻도록 돕게 된다. 카니슈카는 많은 종교에 관용을 베풀며 다양한 신들을 실험한 후에 결국은 신화론적인 새로운 불교를 선택했다. 신화론적인 새로운 불교란 부처를 신으로 삼고 보디사트바와 아르하트로 하늘을 가득채운 불교를 말한다. - P92

이 지배자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으며 그들의 추종자들도 용맹한 용기와 근면함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적대적인 민족들 속에서 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활동적인 면에서는 군국주의적이지만 금욕적인 단일신론이라는 면에서는 인도의 어떤 대중 종교보다 훨씬 뛰어난 종교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힌두 종교들의 대중적인 활동을 불법으로 간주함으로써자신들의 종교가 지닌 흡인력을 감추었고 또 그를 통해 힌두의 정신세계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갔다. 정복욕에 목마른 이런 폭군들 중에는 능력과 문화를 겸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술을 후원했으며 (일반적으로 힌두적 배경 - P106

을 지닌) 예술가들과 장인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을 위해 이슬람 사원과 무덤을건축하게 했다. 그들 중에는 학자들도 있어서 역사가들 및 과학자들과 대화를즐기기도 했다. - P107

그는 총회를 소집하고 주변 도시들에 있는 학계의 거장들과 군사령관들을 모두 초청했다. 이 초대에 리돌포(Ridolfo) 신부만 제외되었는데, 이 신부에게서는 왕의 불경스러운 목적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 외에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자기 앞으로 불러 모아 놓고는 영악하고 무례하게 말했다.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의 머리이다. 그러므로 그 지체들이 편을 갈라 서로다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 그런데 종교의 수만큼 많은 파벌이 등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그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 그 방식은 모든 종교가 ‘모두 하나‘가 되되, 어떤 종교에서도 선한 것은 하나도 잃지 않는반면에 어떤 것을 얻든 다른 종교도 나아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이런 방식이라면신에게도 영광이 될 것이고, 백성들에게도 평화를 안겨 주고 제국도 안전하게 될 것이다. " - P118

어째서 위대한 인물들에게서는 평범한 후손들이 나오는 경우가 그토록많을까? 그들을 만들어 낸 유전인자들의 도박, 즉 조상들의 특질들과 생물학적가능성들을 혼합하는 도박은 확률 게임일 뿐이어서 반복되길 기대할 수 없기때문일까? 아니면 천재는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힘과 사상을 완전히 소진하여 상속자들에게는 묽어진 피만 남기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 후손들은안락함 때문에 쇠약해지고, 어렸을 때 행운을 얻었기 때문에 야망과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자극을 박탈당했기 때문인가? - P120

이 제도는 베다 시대부터 점점 더 엄격해지고 복잡해졌다. 제도들은 본성상세월이 흐르면서 경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 질서가 불안정하고 이방 민족들과 종교들이 인도를 유린하게 되자, 카스트가 이슬람인과 힌두인의피가 섞이는 것을 막는 보루가 되어 위상이 강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베다시대에는 카스트가 베르나(색깔)로 구분되었으나 중세 인도에서는 자티(출생)로 구분되었다. 카스트 제도의 요점은 두 가지였다. 신분을 세습시키고 다르마, 즉 자신의 타고난 카스트에 따르는 전통적인 의무들과 직종들을 받아들이게 - P136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 P137

베다 시대 이후에 여자의 위상이 낮아지게 된 것은 이슬람 사상이 유입된 것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결혼한 여자를 격리시키는) "푸르다(purdah)"(장막)관습은 페르시아인 및 이슬람인과 함께 인도로 들어왔으므로 남부보다는 북부에서 더 강하다. 힌두인 남편들은 아내를 이슬람인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푸르다" 체계를 매우 엄격하게 발전시켰으므로, 예의 바른 여자라면 자기 남편과아들에게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으며 공공장소에서는 두꺼운 베일을 써야만이동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의사가 여자를 진찰할 때도 휘장을 통해서 했다. 145 일부 집단에서는 타인 아내의 안부를 묻거나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갔을때 그 집 여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좋은 예절이 아니었다. - P149

운명은 인간이 자신의 운을 결정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함축한다. 반면에카르마는 인간을 (자신의 모든 생들을 하나의 전체로 보고) 자기 운명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만든다. 또한 극락과 지옥으로 카르마의 효력이나 출생과 죽음의 사슬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영혼은 몸이 죽은 후에 특별한 형벌을 받기 위해 지옥으로 가거나 신속하고 특별한 상을 받기 위해 극락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옥에서 영원히 머무는 영혼은 없으며 극락에서 영원히 머무는 영혼도 극소수다. 극락이나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의 모든 영혼은 조만간에 이 땅으로 돌 - P176

아와 새로운 환생들 속에서 카르마에 따라 살아야 한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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