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학은 언제나 극히 기민한 이데올로기였다. 우생학은 스스로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동원되기도 한 운동들, 즉 국가주의, ‘개혁 지향‘ 자유주의, 절대적인 동성애 혐오, 백인우월주의, 여성 - P56

혐오, 인종주의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우생학이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어떤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운동들과공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생학이 모든 유형의 편견에 호소력이 있다는 것은 배제나 유전적 추정이나 외과 수술의 대상으로 지목된 개인들이 대부분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며,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표적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이야기 1-2 - 동양문명, 수메르에서 일본까지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1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한상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명 이야기 동양 두 번째 편을 읽었다. 1편이 초기 인류 문명 중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부근을 다루었다면 2편은 인도, 중국, 일본 문명을 다루고 있다. 이것으로 사실 동양 문명을 포괄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2편은 인도, 중국, 일본 문명을 꽤나 공들여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분량으로만 따지면 사실 인도가 가장 비중이 높고 그 다음이 중국, 일본 순인 것 같다. 


인도는 아라비아 숫자가 탄생하고 십진법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음수 개념도 찾아내 수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라비아 숫자는 인도에서 아랍을 거쳐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로 향한 것이다. 

인도의 종교는 불교에서 출발하여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거쳤다. 불교를 탄생시킨 부처는 극단적 금욕주의를 실천하고자 했다.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욕망에서 비롯되기에 지혜는 모든 욕망을 잠재우는 데 있다는 것이다. 

부처 사후 불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뉘어졌다. 이후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대체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주변 국가들로 불교가 확산되며 그 명맥을 이었다. 

힌두교는 창조를 뜻하는 브라만(여기서도?), 보존을 뜻하는 비슈누, 파괴를 뜻하는 시바를 3대 신으로 모신다. 

이슬람교는 쿠샨 족 등 이슬람인들이 들어오면서 상당 기간 동안 인도를 지배하며  다양한 문화를 낳게 했다. 


인도에서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카스트 제도는 계급에 따른 일상 생활의 모든 규범과 의무를 규정해놓은 것으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세습된다는 특징을 가졌다.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계급인 브라만 관점에서 규정이 정해졌기 때문에 하위 계급은 브라만을 존중하는 등의 조항도 들어가 있다. 

인도의 철학은 대표적으로 베다, 우파니샤드에서 출발했다. 베다는 '지혜들'을 뜻하며 지혜에 관한 책에서 기원했다. 베다는 네 가지 내용(만트라, 브라마나, 아라냐가, 우파니샤드)으로 되어 있다. 

'우파니샤드'란 '우파'(가까운), '샤드'(앉다)로 스승에게 가까이 앉아 있음을 뜻하는 말로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놓고 한 가르침의 내용이다. 그곳에는 BC 800~500년 활동하던 다양한 성인과 현자들의 강론이 실려 있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가르침이다. 1단계는 아트만으로 자아의 본질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형의 침묵하는 존재이며 2단계는 브라만으로 어떤 것에든 자리하며 중성의, 인격과 무관한,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무형의 세상의 본질이자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혼이다. 3단계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통합을 지향한다. 

브라만 철학 체계는 사실 읽었지만, 읽어도 무슨 말인지 어려웠다(발음이 어려운 탓도 있는 듯). 그래도 이 중 부처 시대에 번성했다는 요가 체계(요가는 지금 요가 교재로도 사용하는 그 요가 맞다. 요가 경전인 요가수트라에는 요가 체계의 실천사항과 전통을 담고 있다)와 우파니샤드 철학에 논리를 제공하고자 탄생한 베단타 체계는 기억에 남는다. '베단타'란 '우파니샤드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과 영혼은 하나이니 브라만과 합일되려는 열망으로 우리는 탐구하고 생각하려는 자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제력과 평정심을 꾸준히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사시로 지금도 알려져 있는 것은 아마도 마하바라타와 바가바드기타가 아닐까. 마하바라타는 폭력과 도박,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바가바드기타는 개개인이 나라를 위해 일어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예전에 바가바드기타는 발췌본으로 읽어서인지 그런 메시지는 느끼지를 못했던 것 같다.

인도 관련하여 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정도로 하는 것으로 한다.


중국은 역시 철학 체계가 가장 흥미로웠다. 예전에 읽었던 중국철학사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책의 비중도 철학 쪽에 치중되어있다는 느낌이었다. 고대 분열과 통합의 시기가 끊임없이 오갈 때 혼란의 시기마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 철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역시 공자의 영향은 막강했다. 공자 사후 공자를 주해한 책들이 쓰여지면서 중국 내 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도 공자의 사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공자를 추존하는 사당이 여기 저기 만들어진 것은 물론이다. 

여러 시인이 탄생된 시기는 당나라였다. 당시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표현과 절제된 감정이 특징이다. 이태백, 두보, 도연명, 백거이 등 유명한 시인들이 있고 이들의 당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송나라는 종이, 먹, 도장이 개발되고 목판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학문이 전수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시기다. 옥과 돌을 다루는 기술이 최상급이었으며 특히 칠공예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림에는 북종화와 남종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두루마리 형태도 있었지만 병풍 형태도 있었다. 서양화와는 달리 원근법이 무시되었으며 선과 먹의 농담으로 사물과 자연을 암시하여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상 동양 수묵화가 시작된 것이 이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들의 영향은 한반도의 고려, 조선에도 이어져 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가 정착되면서 하늘을 숭배하던 이들이 조상을 숭배하게 되었으나 점술을 비롯한 신비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역경을 바탕으로 한 도교의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쇼군, 영주, 가신, 무사 계급으로 중세 이후 체계가 근대 시기로 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중 사무라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 받는 것 말고는 노역을 받지 않았고 검을 소지하면서 하층민을 죽일 권한을 가졌다. 

일본은 9세기 가타카나 문자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한자를 사용했다. 현재도 명맥을 잇고 있는 대중 연극인 가부키 시바이는 18세기 승려들이 의식에 합창곡을 더하고 연기자에게 연기를 하도록 한 3부작 연극을 기본으로 막간인 소극이 더해져 지금의 형식이 만들어졌다. 단카와 하이쿠 문화도 있다. 중국, 조선에서 건너간 도자기 문화는 현재도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 작품으로 남았다. 건축은 소담한 정원이 떠오른다. 아기자기한 멋으로 일본의 차와 함께 대표적인 문화 예술이 되었다. 호쿠사이, 히로시게를 대표 작가로 하는 우키요에 판화는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후지와라 세이가, 하야시 라잔, 무로 규소, 가이바라 엣켄에 의해 주자학이 전래되고 일본 내 정착되었다. 나카에 도주 등에 의해 양명학이 수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친중국적인 학자들이 있기도 했지만 근대 시기로 갈수록 친일본 경향으로 애국(심)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수가 늘어난다. 마부치, 모토오리 노리나가, 히라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일본과 일본성의 우월을 주장했다. 이는 일본이 사실 메이지 이후의 근현대 시기 봉건 사회를 탈피하여 산업 사회로 이행하면서 걸었던 제국주의의 기치의 모습과도 연결된다.


아무래도 한반도와 더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교류가 많았던 지역이어서인지 그 역사도 조금 더 익숙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정치사보다는 사회, 철학, 종교, 문학을 다룬 쪽이 더 재밌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 시인들은 중국 철학의 엄숙주의에 대해 속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었다. - P420

무대에는 소품이나 무대 장치가 거의 없었으며 출구도 없었다. 엑스트라를포함한 모든 출연 배우가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대 위에 앉아 있다가 차례가되면 일어나 연기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조자가 그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은 관객 사이로 다니면서 담배와 차, 과자를 팔기도 하고여름밤에는 얼굴을 닦을 뜨거운 수건을 제공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례적으로 훌륭한 연기가 이루어지거나 큰 소리가 나면 무대에 집중했다. 배우들은 대사가 들리도록 큰소리로 고함치듯 해야 하는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사람들이 배역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면을 썼다. … 배우들은 곡예와 춤의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 P439

중국에서 지혜 추구란 공허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개인 계발과 사회 질서를 목표로 삼는 실증 철학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이란 인간사와 무관하게 예술 형태만 추구하는 어설픈 예술 애호주의나 비전적(的) 예술 지상주의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현실적으로 접목시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물건이나 도구를 장식하려는 노력이었다. 중국은자체의 이상들을 굽히고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예술가와 장인 혹은 장인과 일꾼을 구별하지 않았다. - P454

말이 변하고 다양해졌음에도 동일한 글자체가 이렇게 계속 유지된 덕분에 중국은 사상과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보수주의가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 덕분에 유서 깊은 사상들이 중국을 지배하며 젊은 세대의 정신세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중국 문명의 특징을 상징적으로보여주는 것이 바로 독특한 글자체가 지닌 이런 현상적 특성인데, 다양성과 성장 속에서의 통일성과 철저한 보수주의, 짝을 찾을 수 없는 연속성이 그것이다.
이 글 체계는 어떤 의미에서 보더라도 대단한 지적 업적이었다. 그 체계는 (사물과 활동, 속성으로 이루어진) 온 세상을 뿌리가 되는 "부수"라는 몇 백 개의 부호로 분류해 놓았고, 그 부수들을 1500개 정도의 서로 구별되는 표지들과 결합시켜 완성된 형태를 통해 문헌과 삶 속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모두 표현할 수있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 P498

그들은 조상을 존중하지만 도교와 불교의 사원에 대해서는 승려들과 일부 여자들만 관심을 보일 뿐이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세속적 정신을갖고 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생이다. 그들이 기도할 때 구하는 것은낙원의 행복이 아니라 여기 이 땅의 복이다. - P515

그들은 서양의 과학과 방법론, 역사, 사상 등을 가르치는 신식교육을 감사하고 흠모하며 마음껏 받아들였다. 주변에서 보는 편의 시설과 활기찬 생활, 서양인의 개인의 자유, 국민들의 참정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양철학을 공부했으며 조상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아울러 조국의 문명이 지닌 모든 요소에 반기를 든다는 면에서 교육자로서의 위상과 새로운 환경의 격려받는 존경스러운 진보론자라는 위치를 즐겼다. 해마다 국적을 잃은 이런 수천 명의 젊은이가 중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느린 속도와 물질적 퇴보에 대해 불만을 쏟아 놓으며 모든 도시에 연구와 반항의 씨앗을 뿌렸다. - P540

이 나라는 화려함과 몰락,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하며 3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가장 창조적이었던 여러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활력을 지금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세상에서 이들보다 더 활기차거나 보다 지적인 민족은 없다. 여건에더 잘 적응하거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더 크거나 고통을 더 잘 이겨 내거나, 역사를 통해 차분하게 인내하고 끈질기게 회복하는 법을 더 잘 배운 민족은 없다. - P556

신도는 어떤 신조도 정교한 의식도 도덕률도 없었다. 특별한 제사장 제도도, 불멸의 존재나 하늘에 비위를 맞추는 교리도 없었다. 신자에게 요구된 것은 이따금의 참배, 조상과 천황과 지난 과거에 대한 숭상이 전부였다. - P566

일본 봉건 사회를 움직인 기본 원리는 신사(神)는 모두 병사이고 병사는 모두 신사라는 것이었다. 신사는 병사이기보다 학자여야 한다고 생각한 평화 시대 중국과 일본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 P583

이 고대와근대 간의 전쟁에서 근대는 고대인을 드높여 찬미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간가쿠샤, 즉 (친)중국적인 학자들은 자기 나라를 야만으로 폄하하고 모든 지혜는 중국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문헌과 철학을 해석하고 주석을 다는 것으로 자족했다. 와가쿠샤, 즉 (친)일본적인 학자들은 이런 태도를 반계몽적이며 비애국적이라 비난하고, 국민에게 중국을 배격하고 자체의 시와 역사 속에서 힘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 P616

이들 판화는 처음에는 손으로 색깔이 덧입혀지다가 1740년경에 세 개의 목판이 사용되었는데, 첫 번째 목판에는 무채색을 두 번째는 일부분 장밋빛 붉은색을 그리고 세 번째는 군데군데 초록색을 칠해 종이를 눌러 찍었다. 그리고 1764년에 마침내 하루노부가 최초로 다채색 판화 제작에 성공해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생기 넘치는 소묘를위한 초석을 닦고, 문화적 병목 현상에 걸려 새로움을 갈구하던 유럽인에게 시사적이며 자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우키요에(浮世), 즉 풍속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 P655

한 민족의 제도와 관습, 예술, 도덕은 수많은 시행착오가자연스럽게 정선되고 전 세대의 정형화되지 않은 지혜가 축적된 결과로서, 한철학자의 지성이나 연구자의 지력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 P6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들은 황제와 함께 도피 길에 올랐던 바로 그 참모들이었고, 청나라 안에 유럽인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한 바로 그 만주족매파였다. 그들은 새로운 조약의 폐지를 꿈꾸었고, 외국인들에 대한공친왕의 온순해 보이는 태도를 의심스러워했다. 그들이 권력을 잡게되자, 외교 기관을 신설하려는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는 유럽인들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고 전담 기관을 따로 만들어놓고 청나라의 남은 힘을 태평천국과의 전쟁에 다 쏟아붓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게는 그 섭정들이 정부를 맡는 것이 매우좋은 징조였다. 황제의 궁에 있는 그의 주요 후원자 숙순이 새 섭정의일인자였기 때문이다. - P411

양쯔강에서는 외국 증기선이 돛과 노를 사용하는 중국인들의 배보다 경쟁에서 훨씬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미국남북전쟁의 발발로 중국의 조약항들이 영국의 무역 경제 붕괴를 막아줄 수 있는 미개발 자원으로서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어쩌다보니 그 항구들은 중국 전쟁 지역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미국이 점점 더 깊은 혼란에 빠지면서, 이 상황은 영국이 이전에 중국에서 취했던 느긋한 정책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했다. - P426

1861년 4월 17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부연합의 모든 항구를 봉쇄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하나의 전쟁 행위로서, 국제법상 이분쟁이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내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영국정부는 5월 13일 남부연합의 교전국 지위를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 P426

것은 영국이 미국 남부를 불법적인 반란군이 아니라 권력을 다투는별도의 정부로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은 자국민들에게 양측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 P427

그에게 굉장한 지위와 명예를 내린 것은 중앙 정부가 그로 하여금 목숨 바쳐 청나라를 반란군으로부터 지키게 하려는 가장 강력한유인책(사실 유일한 유인책)이었다. 그리고 난징은 가장 큰 상이었다.
난징은 단지 반란군의 수도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장쑤성, 안후이성,
장시성을 관할하는 총독의 권좌가 위치한 곳이었다. 태평천국이 패배한다면 그곳은 증국번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생 증국전이 난징을 치기 위해 후난성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할 때, 그리고 제자 이홍장이 새로운 안후이군을 조직할 때, 증국번은 태평천국 수도의 탈환과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개인적 영광(자기 자신과사랑하는 형제들과 자기 가문과 그 가문의 후손들을 위한)에 온 마음이 쏠려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증국번으로 하여금 청나라에 계속충성하게 하는 이유였다. - P464

겨울 중에 태평천국의 공격이 있을 게 거의 확실시되고 영국과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가운데, 상하이의 부유한중국인들은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 휘하의 돈이 많이 드는(그러면서도 거의 효과가 없는) 외국인 용병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세일럼태생의 ‘필리버스터‘ 워드는 높은 보수와 무제한적 약탈에 대한 계속된 약속에 이끌려, 그의 용병 활동을 멈춰 세우려는 영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했다. - P470

증국번과 상하이 향신은 마침내 일치점을 찾았다. 향신은증국번의 군대가 강 하류로 내려와 자신들의 집과 생계를 지켜주기를바랐고, 증국번은 상하이를 난징 원정을 위한 자금 조달 수단이자 쑤저우 공격의 거점으로 여겼다. 양측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당면 목표는 같았다. - P486

그들이 목표로 삼은 언덕은 꼭대기의 석축 요새에 의해 지켜지고있었고,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누대"라는 뜻의 ‘위화타이‘로 알려져 있었다. 이 이름은 옛날, 숲이 우거진 언덕에서 설법하던 한 승려가 하늘을 크게 기쁘게 하자 하늘에서 꽃잎들이 떨어져 화사한 소나기처럼 그의 주위에 나부꼈다고 전해지는 행복했던 시절에 붙여진것이다. 이제 나무들은 울타리와 감시탑을 세우는 데 쓰이느라 모두베인 상태였다. 꽃은 없었다. 비라고는, 후난군 병사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기슭에 참호를 파기 시작할 때 그들 발밑의 갈색 흙을 진흙으로만든 축축하고 우중충한 보슬비뿐이었다. - P524

파머스턴은 5월 20일 하원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중국과의 무역이 우리에게 상업 활동의 광대한 장을 열어주리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며, 무엇보다 대중국 무역이 크게 확대된 덕분에 우리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인해 우리의 상업과 제조업이 받은 불행한 방해를 재앙 없이 헤쳐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78 즉, 한쪽 문이 닫혔을 때 다른 쪽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관리인과 하인들이 국가적 양심을 놓고 갈등할 때도, 또한 그 갈등이 지구 반대편에서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정책들로 표출될 때도(중국에서 전진했다가, 후퇴했다가, 용병처럼 되었다가.
원칙을 따랐다가, 만주족 왕조를 응원했다가, 그 왕조를 매도했다가), 증국번과 그의 군대는 단일한 불굴의 목표에 끊임없이 집중했다. - P590

7월 28일 증국번이 심문을 넘겨받았을 때, 마침내 내전의 두 총지휘관, 비바람을 견뎌낸 백발의 두 총지휘관이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한쪽에는 떡 벌어진 어깨의 증국번이 있었다. 그는 피곤한 눈의 학자였고, 그의 긴 수염은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른쪽에는 강단 있어 보이고 안경을 쓴 이수성이 있었다. 그는 숯 굽는일을 하다가 한 나라의 군대를 지휘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던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 대등한 두인물 사이에는 회한과 존중의 애틋한 분위기가 감돌지 않았다. 패배자에게 그것은 화해의 서곡도, 굽이치는 농장에서의 황혼기의 서곡도아니었다. 이 전쟁은 항복이 아니라 전멸로 끝났다. - P617

결국 외세의 개입과 태평천국의 몰락은 잘못된 확신에 대한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는 문화와 거리를 초월하여 우리가 인지하는 관련성(근본적으로 인간의 덕성은 매한가지라는 우리의 바람, 내면으로들어가면 우리는 어쨌든 모두 같다는 우리의 믿음)이 때로는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또한우리는 우리를 다른 문명과 분리하는 어두운 창문을 꿰뚫어보는 것을기뻐하고, 저편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익숙한 형상들을 발견하며 신이 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의 반영을보고 있을 뿐임을 깨닫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 P6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트널의 개입은 전투의 흐름을 거의 바꾸지 못했다. 미국 군대의 주된 공헌이라면, 그 파멸적 상륙 작전에서 영국 해병 예비대를 더 많이 죽음으로 이끈 것이었다. 그의 군사 일부는 영국포들을 가지고 포대들을 포격했고, 태트널은 영국 제독을 돌봤다. 미국 군사 한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태트널의 중립 위반이 그날 벌어진재앙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미미했건, 그 일은 미국 군대에게 중국에서피 맛을 보게 해주었고, 영국과 미국 간의 우호적 관계를 위한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 P118

그는 태평천국 측 관리든 청나라 측 관리든 중국의 다른 어떤 관리보다 외국인과 많이 접촉해보았고, 그들의 관습과 신앙을 잘 알고 있었다. 천왕은 홍인간의 경험이 제공하는 기회를 즉시 붙잡았다. 홍인간이 수년간 외국인들과 함께 살고 일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기때문만은 아니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홍인간이 외국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 홍인간이 외국인들의 종교 행위, 학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중국 유일의 인물이라는 것을 외국인들 스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P149

에드킨스는 이렇게 썼다. "장발 반란군들‘의 잔혹에 대한 이야기가 숱하지만, 여기에는 과장과 잘못된 표현이 많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이 살인이나 약탈 같은 전쟁 범죄를저질렀다 해도 그것은 오직 생존을 위해서였고, 게다가 그런 범죄들은 아직 상관으로부터 적절한 종교 교육을 받지 못한 신병들의 소행일 뿐이었다. 그 범죄자들은 태평천국군 고위 지도자가 올 때마다 즉시 처형되었다. 그는 점령 도시 쑤저우의 사망자들(그의 악몽에 나타나는 운하의 사망자들을 포함해) 대부분이 살해가 아니라 자살에 의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청국군이 훨씬 더 나쁜 범죄자들이었다.
시간이 가면(그의 정보 제공자 중 한 명의 예측에 따르면 2년 안에) 태평천국이 승리를 거두어, 중국의 유혈 사태와 무질서를 종식시키고 평화와 도덕의 새 시대를 열 것이다. - P174

이제야 비로소영국인들은 태평천국 반란군의 실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었던것 같다. "태평천국은 신화가 아니라" 권력이라고 이 필자가 선언하고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눈에 때로는 제국의 문턱까지 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의 잊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10년간의 변화무쌍한 운명을 겪은 후 그들은 이제 수천만명이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 가장 좋은 땅의 지배자들이다. 그 땅에서 난 차가 우리 식탁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그땅에서 난 비단이 우리의 몸치장을 세련되게 만들어준다. 그들은 대운하와 양쯔강을 장악하고 있고, 제국의 옛 수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베이징의 외세 왕조를 치려고 위협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현재 중국에서,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동아시아 해안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토착 세력이다. - P180

황제는 후문으로 빠져나왔고, 하인, 궁녀, 만주족 참모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행단과 함께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가 향한 곳은 북쪽 산악 지대의 안전한 곳이었다. 공식적으로 어떤 언질도 없었고, 황실의 경극 공연장에서는 아무 일도없다는 듯 그날 저녁에도 여느 때처럼 공연이 계속되었다.
이튿날, 황제가 떠났다는 말이 결국 새어나왔고, 베이징의 관리들은 만주족이든 한족이든 다들 허둥대면서 수레에 소지품을 가득 싣고 수도를 빠져나가려는 데 필사적이었다. 수레를 빌리는 가격이 두배로 뛰었고, 남은 수레가 하나도 없을 때까지 값은 계속 올랐다. 관리들이 자리를 버리고 떠나면서 정부는 해체되었고, 민간 방위를 담당하는 부서는 베이징 주민 누구든 약탈자를 발견할 경우 즉시 때려죽여도 된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게시했다. - P215

확산되는 큰 화재로 첫 연기 기둥이 하늘로 올라갈 때, 그날 일어난 일을 좀더 깊이 돌아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파괴와 방화의 고삐 풀린 기쁨이 누그러지면서 두려움과 후회가 뒤섞인 이상한 기분이싹텄다. 어떤 이의 표현에 따르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파괴해놓고기뻐하는" 자신들 내면의 본성이 보여준 어두움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이었다. 붉은 화염 속에서 춤추는 악마들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그러나 황제, 청 왕조, 중국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불길한 순간이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착잡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왕조의 종말을, 그리고 어쩌면 한 문명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220

이 우연한 승진은 오히려 그를 더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중국역사에는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지휘관들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장군이 수도 밖에 있을 때 통치자의 명령이 모두 이행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리고 증국번이 노련한 지도자로 발전해 전쟁수행에 대한 더 확고한 통제력을 갖게 되면서, 그가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높은 권위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듯 보일 때가 있었다. 전쟁 전 수도 베이징에서 봉직하던 시기에 그는 중앙 정부의 관료들이 얼마나 무능할 수 있는지, 얼마나 경험이 부족하고 자기 만족적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들의미숙함이 자신의 전쟁 수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계속 발전하고 있는 자신의 전략 감각만을 믿었고, 자기 군대의 한계를잘 알고 있었기에, 베이징에서 내려온 명령 가운데 많은 것을 거의 무시했다. - P260

프레더릭 브루스는 반란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고수했지만, 형 엘긴 경은 그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엘긴 경은 동생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이 시기에 동생 브루스는 대사가 되어 있었고, 베이징에 거처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톈진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청나라와 태평천국 "둘 다 나쁘지만‘ 둘 중 태평천국의 미래가 더 밝다고생각한다고 말했다. 엘긴은 태평천국 통치 지역들에 가본 경험을 통해(브루스는 가본 적이 없었다) 반란군에게서는 "정직함과 힘"이 드러난다고 느꼈다. 그리고 브루스가 태평천국군의 상하이 도착에 앞서 받은 충왕의 서신을 읽길 거부했던 일에 대한 질책일 수도 있는 내용으로서, 엘긴은 반란군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청나라의 어떤 요청에도응하지 말라고 브루스에게 경고했다. - P290

홍인간은 오직 종교만이 아니라 태평천국의 종교적 신념과 중국의 유구한 역사 사이의 조화에 근거해 지지를 호소했다. 그것은 증국번의 틀과 경쟁하는 또 다른 틀의 주장이었다. 즉, 그는 유교 - P304

대 기독교가 아니라 한족 대 만주족이라는 틀을 내세운 것이었다. - P3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