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문학 선집 4 - 1960년대 세대교체와 저자성 투쟁 한국 여성문학 선집 4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외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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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시민이 등장하면서 공론장의 자각 변동이 이루어진 때이다. 그러나 ... 냉전주의는 시민의 자유를 납작하게 짓눌렀고, 개발과 진보는 신화적 가치로 자리 잡아 신분 상승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한편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는 불가피한 선택인 양 호도되었다. 또한 서구와 구별되는 한국적 근대화를 향한 이상은 여성을 사적 영역과 전통 속으로 밀어넣어 시민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성 작가들은 여성에게 할당된 모성의 위상을 수락하며 여성의 시민적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성역할, 가족, 전통, 연성, 문화에 갇히는 역설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진 여성 작가들은 자율적 개인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가부장제의 여성성 규범을 내파하는 여성 성장을 도모하고, 냉전 권력의 금기를 깨는 ... - P37


한국여성문학선집 4권은 1960년대를 다룬다.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 이제 좀 자신을 알아가면서 자각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는 한편 4.19 이후 목소리를 봉쇄당하는 감시 사회의 단면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또 이 시기가 되면 여성의 몸과 욕망에 대한 주제가 담긴 글이 늘어난다. 여성 작가들은 여성 문학이 한국 문학의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 중심에 떠오를 수 있도록 서서히 시동을 건다는 것도 눈에 띈다.


박순녀는 태어난 곳은 함흥이었으나 학업을 위해 홀로 월남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소설만 쓴 것이 아니고 번역도 하고 드라마도 집필하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작품 활동까지 병행했다고 한다.  

<아이 러브 유>에서는 일제 말 여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식민 체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당시 학교는 여학생들을 근로 봉사라는 미명 아래 방공모를 쓰고 몸빼 바지를 입힌 뒤 전시 훈련 교육을 시켰다. 선생과 교사 간의 갈등은 전시 말에 갈수록 극에 달한다. 일본 출신 선생님과 조선 출신 선생님 간의 비교와 갈등이 눈에 띄게 보이지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떤 한 개인과 집단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눌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과 상황이 존재함에도 한쪽으로 매도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기에.

<어떤 파리>에서는 술집에서, 학교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했다가 감시를 당하거나 쫓기는 일이 일상적이었음을 경험하게 한다. 선생이 인사 조처를 당하자 아이들이 선생님은 아무 죄가 없으니 돌려달라 말하는데 정부 조사원이 아이들 집을 모두 찾아다니며 배후를 추궁하는 부분에서는 무엇이 사회를 이렇게까지 만드는 것인가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이웃이 간첩이 될 위기에 처하자 증언을 하기로 결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선택을 나라면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했다.


난 도무지 너흴 믿을 수 없단 말야. 순진하다면 순진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바보라고도 할 수 있지. 아니 너무나 모른다. 결국 모르기 때문에 불쌍한 거야. 넌 지금 일본 사람이라는 것에 폭발적인 불신과 증오를 느끼게 된 모양이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우리 모든 사람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눠져 있는 거란다. 말하자면 일본 사람만이 가해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만이 피해자랄 수도 없어. 너는 알 수 없겠지만 나도 역시 피해자의 한 사람일 따름이야. - 아이 러브 유, P113


빛과 색, 내 앞으로 내 뒤로 꽉 들이차 있는 그 빛과 검은색, 빛과 색-내 사고력은 온통 빛과 색에 동원됐고 나는 그 빛과 색에 묻혀 앗! 하는 내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 어떤 파리, P153


이정호는 한국 전쟁 때 김일성을 찬양한 일로 교사를 그만두고 국군에 입성한 뒤 대한청년단 선전부원이 되는 등 놀라운 선택을 했다. 흥남 철수 때 가족과 헤어지는 바람에 이북인 고향을 떠나와 남한에 정착해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흥남 철수 작전에 대한 뒷 이야기를 글로 써 냈다. 전쟁의 서사는 대부분 남성의 시점에서 쓰여지는 경우가 많은 만큼 소중한 기록이라 여겨진다.

<잔양>이 바로 흥남 철수 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철수 전 긴박한 상황이지만 군인들은 자유 시간을 갖게 되자 이 때를 만끽하기 위해 마지막을 불태우듯 노는데 열중한다.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타락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는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야 따분하게 방에 박혀 있지 말구 밖으로 나가자. 그래. 나는 선뜻 밖으로 나왔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아무 데나 쏘다니고 싶었다. … 엄의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꺼리낌 없이 짐승이 된다는 건 참 유쾌한 일이야. 자넨 그래 의식적으로 그걸 맛보았는가? 의식적이라기보다 오늘 저녁 같은 때는 자연 그렇게 돼 있지 않은가. 평생에 몇 번 없을걸, 이런 챤스는. 죄악이네. 죄악? 짐승이 되고 난 뒤 사람은 더 선량해지는 것이 아닐까? 침묵, 빛나는 눈, 거센 숨결,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 가자!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들어가는 패배와 굴육들, 쓰라림, 나는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모른다. - 잔양, P177


정연희는 보수적 시각에 반대하는 불륜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정점>에서 중산층 부부가 등장한다. 지영은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심장판막증으로 작품 활동을 강제 중단한 뒤 발레리나를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결혼은 생각했던 이상이 아니었고, 그녀는 남편과 자신이 동화될 수 없음을 깨닫는데, 그 때 마침 내연녀가 등장한다. 완벽한 행복 뒤에는 불안한 서사가 존재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하긴 결혼이란 선택지가 당시로서는 정상 범위에 속하는 것이었을테니. 

결혼 생활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들고, 주름은 늘고 거울을 보는 것이 싫어질 때가 온다. 지영은 거울을 보며 무신경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 좀 서글펐다. 


꿈과도 같은 황홀한 젊음이 거울 속에 있다. 그것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사십이 넘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십 대의 팽팽한 살갗이다. 차가웠지만 총명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댕그마니 거울 속에 따올라 있었다. … 그 얼굴을 보면서 뜻하지 않았던 희망과도 같은 감동이 살아 움직인다. 무거운 몸에 날개라도 돋아나는 듯한 기분이다. 지영은 손으로 그 얼굴을 쓰다듬는다. 

쓰다듬으며 보니까 그 팽팽하던 얼굴에 갑자기 잔주름이 무수하게 생겼다. - 정점, P248


허영자는 1963년 한국 최초의 여성 시인 동인인 ‘청미회’ 결성에 참여하여 1998년까지 활동을 했다. 그는 서정시를 쓰지만 이성 한 스푼이 들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녹음>에서는 무당춤을 추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억제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광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살면서 단 한번도 미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여성은 없을 것이다. 돌아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미쳐버리면 안 된다는 주문을 외우며 억지로 이성으로 잠재우던 때가 나도 꽤나 있었던 것 같다. 


후루루 몸을 털곤

천지는 또 한 번

무당의 활옷을 챙겨 입었다


다스려 다스려

반눈이나 붙였던 핏물

치오르는 곤두박질을

어쩌면 좋아,


칠칠 흘러내려

비릿내 도는

화냥기를

참말 어쩌면 좋아,


가슴 불꽃을 온통 내쏟아

짱짱한 목소리의

노래를 부르리라


미쳐나는 춤

시퍼런 칼춤을

전신만신으로

또 춤추리라.

- 녹음, P288~289


박시정은 재미 한인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을 주로 썼다. 이는 미 한국어 교사로 근무한 경험, 미 평화봉사단 활동 등 자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날개 소리>에서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장 선생이 등장한다. 그는 타자로서 외국에 철저히 생활해야 하는 고립감과 열등감이 노이로제가 되어 정신병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당시 해외에 나간 많은 한국인은 이방인으로 생활하면서도 잘 해내고 싶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가부장적 문화의 배경을 가진 한국과 다른 외국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비쳐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내 옷을 벗어 보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들은 때로 한국 문화에, 또는 습관에 충격을 받아 훈련 생활을 포기하고 떠나 버린다. 한국적 상황에서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떠나보내기 위해서 그들이 한국에 가기 전에 한국을 적나라하게 소개하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싫다. 그들이 극히 일부분, 그 일부분의 껍데기만 보고 한국을 단정해 버리면 그들의 뇌리엔 평생 잿더미 변소가 한국의 인상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 나는 뭔가 잔뜩 기분이 일그러져서 슬라이드가 새것으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 날개 소리,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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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세트 - 전7권 한국 여성문학 선집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외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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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시작부터 말까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했다. 문학 중 소설 이외의 장르도 포함되어 있으며, 논설, 평론, 에세이 등 비문학 장르도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국한문 혼용의 글인 경우 원문과 현대어를 함께 실어 두었다. 특정 기준을 따지지 않은 작가 구성이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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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3 - 1945년~1950년대 전쟁과 생존 한국 여성문학 선집 3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외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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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부터 1950년대까지는 한민족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이념 갈등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진 분단의 시작점인 시기이다. 한국사의 흐름은 여성의 인간(시민)적 자유를 턱없이 제한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여성 해방의 의제는 먼 미래로 유예되었고, 남성을 민족적 개발 전사이자 방위군으로 내세운 초남성적 근대화가 본격화한 1960년대에 이르면 여성들은 지극히 사인화사인화된 존재로 위치 지어지기 때문이다(P24).

해방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해외에서 갖은 수난을 겪다가 돌아온 남성 망명객의 감격으로 묘사되고, 한국전쟁의 비극은 어머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남자의 훼손된 몸으로 은유된다. 이러한 묘사나 재현은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안전하며 이러한 안전은 남성의 희생에 빚진 것이라는 가정을 은밀히 유도한다(P26). 전후 여성 작가들은 남성중심적인 증언과 기억으로 인해 망각의 수렁에 빠진 여성들을 건져 내는 방식으로 기억 투쟁을 시도했다(P27). 


전후 1950년대 여성문학은 오늘날 페미니즘의 백래시와 비슷한 상황으로 남성 문단 속에 인정을 받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그럼에도 여성 작가들은 펜을 꺾지 않고 문예지 대신 상업지에 글을 싣는 것을 선택했는데 활로 중 하나였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 여성 작가들은 시간이 흐른 만큼 신구 작가들로 세대 교체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 등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구 작가들이 한편에 있었다면, 새롭게 등장한 신진 작가들은 여성과 타자의 삶을 문학을 통해 구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시기 작품들은 전쟁 후 삶의 터전을 복구하고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는 주제들이 많다. 캐릭터적으로 본다면 가부장제에 도전으로 비춰질만한 양공주의 등장, 이후 도전을 거듭하는 마녀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가부장제의 허례허식을 꼬집고 그 속에서 여성들의 주체적인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 여성 문학이 진정으로 시작된 시점은 이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정희는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구 작가를 대표한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는 친일로, 해방 후에는 친미-반공의 색채를 담은 글을 발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앞선 2권에도 작품이 등장했지만 내가 리뷰에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데 이 작품 <풍류 잡히는 마을> 때문이다. 이 글은 몇 달 전 우연히 알게 되어 읽고는 싶었으나 오래 전 작품이라 지금은 읽기 어려워서 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리즈에 수록되어서 정말 반가웠다.


해방 후 남북은 각기 토지개혁을 한다. 일찍부터 토지 개혁을 한 북한과 달리 남한은 전쟁 직전에 가서야 부랴부랴 토지개혁을 했다. '개혁'이란 이름은 보수 집단에게는 위험한 명칭일 것이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본래 땅을 가진 지주는 자신의 땅을 내놓아야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을 법하다. 땅 한 줌도 가지지 못한 소작인들은 평생 자신의 땅 한 번 못 가져보고 인생이 끝나나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때는 토지가 중요했고 지금은 집으로 바뀐 것만 다르지 않을까. 


토지개혁이니 뭐니 뭐니 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소란할 뿐 우리 정부가 설 날도 막연한데 토지개혁이란 그리 쉽게 올 리 없을 게라고 지주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래도 어쩔 줄 아나 하는 마음에서 파는 땅이라 상답을 막우 내여놓지은 않었다. 따지고 본다면 토지개혁이란 최후의 선고장이 내리자면 아직 한참 될 것 같으니까 그동안에 나쁜 놈만 처분해서 그 돈으로 달리 이득을 볼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겠고 좋은 놈은 그대루 두었다가 토지개혁이 될 무렵에 땅이 좋으니만큼 욕심낼 자가 말겠으니까 그때를 봐서 할 일이고 혹시 그리 못되는 경우가 생기드라도 아직 그동안이 한참 될 상싶으니까 그새에 거기서 소출을 많이 내여서 가장 적은 폐해를 받자는 것이 지주의 생각이었다. - P70~71


서흥수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나 면 소재지에 떡고물을 돌리다가 해방 후에는 군정청에 잘 보이기 위해 굽실거리면서도 소작인 등 자신의 일꾼들에게는 가혹하게 대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고 그만큼 처세에 능했기에 군정청 관리까지 거머쥔다. 하지만 그런 만큼 주변에 원한을 품은 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회갑 잔치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끝없는 낭만>에서는 미군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을 선택한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사랑으로 그를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주변의 말과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끼게 한다. 


"아버지 말씀을 믿어요?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어요. 돈 까닭에... 살 수가 없어서 미군하구 결혼했다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지요? 절대로 돈 때문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살 수가 없어서 미군하구 결혼했다면 양갈보지 뭐예요? 나는 양갈보가 아닙니다. 「캐리·죠오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겁니다."

"그렇던가요? 그렇담 나 개인으로선 할 말이 없읍니다. 그러나 한국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으로선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차래 씨는 양갈보가 아니라고 자신을 변명합니다만 양갈보들에게 이야길 시켜 보더라도 역시 차래 씨와 똑같은 말을 할 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산다고. 딸라가 탐나서, 호화로운 생활이 좋아서... 말하자면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따위 짓을 한달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라거나 혹자는 부모 동기를 멕여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할 겝니다." - P92


지하련에 대해서는 지난 2권 리뷰에서도 언급했던 작가인데 선집에서 만난 작가들 중 근대 초기 김명순과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한 명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도 여러 작품들을 남겼지만 해방 후 작품인 <도정>이 특히 인상적이어서 꼭 언급하고 싶었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개인의 내면은 단단하기 어려웠을 것인데 그 상황에서의 심리 묘사를 잘 표현해내었기 때문이다. 


이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무엇인지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반다시 울어야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튼 무슨 감동이든 한 번 감동이 와야만 할 판이었다. 어찌하여 나에겐 이것이 오지 않을까? 언제까지나 오지 않을 것인가? 온다면 언제 무슨 형태로 올 것인가? - P153

이 잠 오는 건, 어제 드러 새로 생긴 병이다. 무얼 생각하면 할수록 홀란하여, 갈피를 못 잡게 되면, 차츰 머리가 몽농하여지고, 그만 조름이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 P154

노량진행 전차를 타고 섰노라니, 입속에서 뱅뱅 도는, 맴쟁이가 있다. 자세히 알어보니 별것이 아니라, 고대 막 조히우에 쓰고 나온 "소뿌르조아"라는 말이다. 그는 육 년 징역을 받은 적이 있는 과거의 당원인 자신에 대하여 무슨 보복이나 하듯, 일종의 잔인한 심사로 무심코 피식이 고소를 하는 참인데, 대체나 신기한 말이다. 과시 탄복할 정도로 적절한 말이다. ... 이 "심판" 아래, 이제 그는 고시라니 항복하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이 헛전하도록 마음의 후련함을 깨닷는다-통쾌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무엇인지 하나 가슴 우에 외처, 소생하는 것이엇다. - P165

주인공은 공산당 최고 간부인 지인을 만나 어떠한 결정을 하기 전까지 극도의 혼란을 겪는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에서 자아 뿐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압박,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생에서 어떠한 선택은 그 판을 뒤집을 수 없을 만큼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한국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어떠한 이유에 의한 선택으로) 월북을 하거나 월남을 했고 이는 평생 더 이상 다른 땅을 밟아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작가 정충량도 남편은 북에 가고 아이를 데리고 월남한 경우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사회 운동가이자 문화부 기자, 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여전히 수많은 이산 가족과 그 후예들이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다 생각하면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다.


강신재는 나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작가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한 편의 글도 읽어보지 못했는데 시기적으로 좀 애매하게 걸쳐 있다는 생각이었다(그 이전 시기의 작가에 비해서는 새롭겠지만 내 나이에서 생각해보면 구시대적으로 느껴지는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읽어보니 박경리 선생님의 작품과 비슷하게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의 억압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으나 그 표현 방식이 달라서 흥미로웠다.


「나두 이전 들어누어서 얻어먹을 신세가 되었구나. 허 참」

「예편네 덕택에 시인 박형식도 일약 유명해지겠군. 어디 덕 좀 톡톡이 봅시다」 

성혜를 힐끔힐끔 바라다보며 입을 삐뚜리고 말을 한다. 그러다가 그의 눈은 차츰 더 붉게 되어 가면서

「집이라구 옛 참 방구석에 발을 부칠 수 없게시리 느러놓구서응? 문학이다? 것보담두 우선 양복바지에 푸레쓰나 한번 똑똑이 해놔 봐」

「.....」 - P230

길에는 한 사람의 행인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과 자옥한 안개에 쌓여서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형식은 불 밑에 책을 바싹 드려대고 그저도 정신없이 책장을 넘겨 재킨다.

성혜의 눈에 비친 형식의 모습은 한 개의 기괴한 피에로였다. 언제나 하듯 그대로 생각 밖에 흘려 버리기에는 너무나 우열한 피에로였다.

(싫어! 소설도, 공부도, 남편도, 사는 것도 다 싫어! 싫어!) - P246, 247


아내는 소설을 쓰는데 남편은 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깎아내리는데 골몰한다. 비단 소설가라는 직업에 국한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기혼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 가정에 충실해야(소홀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기혼 남성들이 여전히 있다. 아내의 전문성을 깎아내리려는 태도에서는 열등감을 표출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3권 중 인상적인 작품을 고르라면 최정희의 <풍류 잡히는 마을>, 지하련의 <도정>, 강신재의 <안개>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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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7-24 1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민하다가 세트 펀딩은 못했는데 화가님 글 읽으니 부릉부릉 시동이 걸리려합니다.
작년 한국근대여성문학을 읽었을 때 이 시리즈가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런지.. 아쉽네요.

소뿌르조아가 쁘띠 부르주아 인가보네요 ^^


친구한테 지하련의 <이따금 난 네가 몰라져서 쓸쓸탄다>를 선물받고 조금 보다가 말았는데, 이 사실을 잊고 있었어요. 지하련이 친구이자 애정의 대상인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있답니다. 생각난 김에 휴가 때 읽어보게 꺼내둬야 겠어요.

거리의화가 2024-07-25 08:01   좋아요 2 | URL
책 타이밍이라는 것이 맞추기가 어렵죠^^; 원하는 책이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품절된 책을 중고로 샀는데 복간되거나 재판되어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가지고 있던 것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더 나은 책이 나올 때는 저는 고민하다 정말 원하는 경우 사기도 합니다.

지하련 작가의 글 더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한 두 작품으로 판단할 수는 없으나 심리 묘사가 탁월한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작품은 저도 궁금해지네요. 정보 감사드립니다. 장마에 폭염이 기승을 부려 요즘은 부피 차지하는 무거운 책을 잠시 내려두고 가벼운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이네요. 수하 님께도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페크pek0501 2024-07-24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신재 작가의 ‘젊은 느티나무‘라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그에게서 비누 냄새게 난다, 로 시작한 것 같습니다. ㅋㅋ

거리의화가 2024-07-25 08:02   좋아요 2 | URL
ㅎㅎ 페크 님 비누 냄새! 왠지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첫 문장이군요^^ 저도 강신재 작가의 대표작이라 제목은 알고 있습니다. 읽어보고 싶네요.

자목련 2024-07-25 0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정신의 잇다 시리즈에서 김명순의 소설을 만났어요. 지하련 작가 소설도 궁금합니다.
저도 강신재는 <젊은 느티나무>만 알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4-07-26 08:11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 김명순 소설은 이미 만나셨군요. 지하련 소설 저는 느낌이 좋았답니다. 다른 소설도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강신재는 대표작부터 읽어야하겠죠?ㅎㅎ
 
한국 여성문학 선집 2 - 1920년대 후반~1945년 계급·민족·여성의 교차 한국 여성문학 선집 2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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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2권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의 여성 문학을 다룬다. 특히 중점적 시기는 1930년대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1920년대가 되면 사회주의 사상 유입으로 독립 운동은 반제국주의, 반식민 운동으로의 성격이 강해진다. 1925년 보안법 강화, 1928년 조선공산당 해체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은 쉽게 꺾이지 않았고 계급 차별 운동 등으로 이어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 민족, 계급은 근대문학 형성기를 특징 짓는 키워드들로서 좌와 우로 진자 운동을 하며 어떤 범주를 우선시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편소설, 장편소설, 서정시, 서사시와 같은 근대적 양식이 본격적으로 실험되고 정착한 시기이기도 하다. …

여성문학 역시 1930년대 들어서면서 근대 초기 여성의 자각과 계몽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식민 현실과 교섭하면서 계급과 민족, 성 간의 교차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 P17


1930년대는 여성문학이 식민 현실을 젠더의 시각을 통해 본격적으로 그려 낸 시기였다. 난민이나 유민이 된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공감과 연대의 윤리로 포착하는가 하면 남성 중심의 가족 로망스와 윤리를 내파했다. 남성 중심의 문학장이 여성에게 부과한 '여성적' 글쓰기라는 틀과 '여성성'의 개념을 영리하게 전유해 여성성, 여성적 글쓰기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해석자와 가치 부여자에 따라 유동적이고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 P34


박화성은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을 잇는 제2기 신여성 작가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여성 문제에 대한 의식은 다소 약하다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다수의 작품에서 여성을 주인공이나 화자로 내세워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목도하고 부딪치면서 제 나름의 현실 의식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그리며 보수적 성 규범을 탈피한 여성상을 창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록된 '추석 전야'는 노동 수탈과 성적 수탈을 함께 보여주는 소설이라 개인적으로 눈길이 많이 갔다. 


영신은 전일부터 빈부와 계급에 대한 반항심을 잔뜩 가지고 있었으며 더구나 감독의 평소 행위를 몹시 미워하던 터이라 떨리는 입술로 "그러면 당신이 왜 먼저 그따위 짓을 하느냐 말이야. 감독이면 점잖게 감독이나 하지 어린애들 머리를 잡아당기며 부인들을 건들며 그따위 못된 짓을 하니 누가 좋다고 하겠소. ... 우리는 개만도 못하게 보이오? 우리도 사람이야 사람.

주인에게 갑시다. 내가 당신이 하던 짓을 다 말하고 결단을 낼 터이니..." - 추석 전야


공장 감독은 여성 노동자를 희롱하고 이를 본 동료 영신은 분노하여 감독에게 따진다. 애당초 기본 자금이 있을 리 만무한 가난한 계급의 노동자, 그것도 여성들은 계급 차별 뿐 아니라 성차별까지 감내야 하는 현실에 내몰렸다. 이를 보면서 1960년대 가발, 1970년대 의복 공장의 노동자들의 사진이 떠올랐다. 이 때의 여성들은 가장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제목처럼 하필 추석이라는 시점이 절묘하다. 가족들이 모여서 화기애애해야 할 명절이지만 주인공은 사치와 여유 따위는 부릴 수가 없다. 자본주의란 이들에게 험난함의 대명사 같은 것이다. 일하다 어깨를 다친 영신은 밀린 아이의 월사금과 붉은 댕기를 사달라 조르는 아이의 마음을 내칠 수 없어 급하게 일거리를 찾는다. 

어릴 적 공과금, 급식비, 회비 등을 내지 못해서 자주 불려나간 경험이 있었다. 당시는 부모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으나 나중에 내가 직접 돈을 벌어보니 부모님이 그 때 마음이 결코 편치 않았겠구나를 느끼게 되었다. 


강경애는 빈농의 딸로 태어났기에 무산 계급에 대한 차별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의식이 작품에서 눈에 띤다.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여성 단체였던 근우회에도 참가했다. 결혼해서 용정으로 이주한 뒤 조선인들의 현실을 담은 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만약 1944년 병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해방 후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참 궁금하다. 


소금은 예로부터 모든 양념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식재료 중의 하나로 귀한 취급을 받아왔다. 조선의 장 문화도 소금이 없으면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당시 국경 근처에는 밀수입업자들이 목숨을 걸고 소금 거래를 위해 오갔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은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해 친일 무장 조직을 만들었고 이는 독립운동 뿐 아니라 당시 근처에 거주 중인 조선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는 하나하나의 메주 덩이를 들어 보며 간장이나 서너 동이 빼고 고초장이나 한 단지 담그고... 그러자면 소금이나 두어 말은 가져야지 소금... 하며 그는 무의식간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 또다시 고향을 그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향서는 소금으로 이를 다 닦았건만... 달리는 데도 소금 한 줌이면 후련하게 내려갔는데 하였다. 그가 고향 있을 때는 하도 없는 것이 많으니까 소금 같은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는지는 모르나 이곳 온 후로는 그는 소금 때문에 남몰래 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소금 한 말에 이원 이십 전! 농가에서는 단번에 한 말을 사 보지 못한다. 그러니 한 근 두 근 극상 많이 산대야 사오 근에 지나지 못한다. - 소금, P216 


봉염의 어머니는 소금 밀수입을 위해 뛰어든다. 스산한 가을 바람이 몹시 부는 날, 그녀는 다른 남성 밀수업자들의 대열을 따라 붙었다. 솜옷을 입은 다른 밀수업자와는 다르게 봉염 어머니는 홑옷을 입은 데다가 발가락 나온 고무신을 신은 채 걸어야 했다. 남성 밀수업자들은 여섯 말의 자루를 든다고 하길래 호기롭게 네 말을 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움을 견딜 수 없다. 가다가 순사를 만나거나 활동가들을 만날까봐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일본은 1925년 보안법 행사 이후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소설의 결말은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흘러간다. 


모윤숙은 당시 친일 행위에 대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작가다. 1940년대 조선임전보국단에 간사로 활동하면서 조선 여성을 적극 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후에는 친미, 반공주의 입장에 뛰어들었다. 노천명도 식민지 말 친일 부역을 한 이력이 있으나 해방 후에는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두 작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작품적으로도 노천명은 모윤숙의 강렬함과는 다르게 감수성이 더 느껴지는 편이다. 


해여진 치마보고 간난을 슬퍼할 때

어대선지 그얼굴은 가만히나타나

깨여진창틈으로속삭입니다

너는조선의딸이아니냐고.

그리운사람있어 눈물질때면

내억개 가만히 흔드는이있어

자비한목소리로들여줍니다

인생의전부는사랑이아니라고.

- 조선의 딸, P362


산넘어지나온저촌엔

은반지를사주고싶은

고운처녀도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네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남사당, P368


이들을 비롯해 송계월, 지하련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송계월은 짧은 삶을 살다 가서 참 안타까운 작가인데 이전에 전집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못해서 더는 미루지 말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송계월도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등 계급과 여성 문제에 천착한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지하련은 일제 시기 지식인의 내면에 대한 심리 묘사를 다룬 작품을 여럿 남겼다는 점이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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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작가 등단 4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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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소설 <인생>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고 해야 하겠지. 중국어 오디오북을 들으며 번역본으로 함께 읽었다.


어느 청년이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원어 제목은 活着(활착: 살아간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원어 제목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대략 1940년 후반 무렵부터 1960~1970년대 무렵까지 중국이 배경이므로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국공내전, 문화대혁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비중을 높게 두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사건은 밑밥 역할만 할 뿐이고 그걸 맞닥뜨린 개인의 역경과 감정들을 표현하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겪게 될까. 아직 많은 시간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나름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고 여겼다. 그러다 사회 생활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구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어도 개인의 환경에 따라, 사건을 맞닥뜨리는 태도와 자세, 행동력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젊은 시절 푸구이는 노름과 여자에, 폭력까지 쓰니 비호감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그래도 끝까지 캐릭터를 품기는 어려움). 아내인 자전, 딸인 펑샤, 아들인 유칭이 갈수록 안쓰러워 독서하면서 계속 눈물이 나 혼났다. 보통 슬퍼도 눈물 찔끔 흘리고 마는데 펑펑 울고 말았다.


어릴 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많다. 그래서 그 소중함을 잘 몰라 쉬이 지나쳐버리고 뒤늦게 후회를 하곤 한다. 지금 만나는 사람 중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학교 친구는 학교를 떠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 각자 일이 바빠 소원해져서 헤어지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직장을 떠나면 그만이다(한 직장에 오래 붙어 있는 적이 거의 없다보니 더 그런 것 같기도). 결혼 여부도 변수가 된다. 친한 친구들도 각각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아무래도 각자 배우자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까. 그저 주기적으로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이 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부고를 듣는 경우가 참 많아졌다. 


위화의 부모님이 의사 출신이라 죽음을 간접적으로 많이 봐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용상으로 특별한 순간보다는 일상과 평범함의 소중함에 대한 강조가 은연 중에 드러나있다. 살면서 대박을 만난 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내 몸 하나 누울 곳이 있고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고, 몸이 아프지 않다면 1차적으로는 다행이라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 먹고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면 더 좋겠지만 이는 부가적인 사항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아무리 힘겨워도 견디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인생>을 통해서 남은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폐 끼치지 않고 죽느냐, 죽을 때 내가 먼저 죽느냐, 나중에 가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자전의 삶을 통해 얻었다. 결국 매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에게 잘 하고 논란 만들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무척 어려울 듯).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원래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는 상황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제는 물음표가 생긴다. 내가 먼저 죽는다면 그가 살아야 할 짊도 만만치 않겠구나, 그가 먼저 죽는다면 나도 또한 그리할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살아온 세월만큼 그 그리움이 더해지지 않겠는가. 


사람도 때가 되면 익어야 하는 법이라네. 배가 다 익으면 땅으로 떨어지듯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지.


천천히 들판은 고요 속에 잠기고, 사방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노을빛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평범해서 좋았던 문장들이 꽤나 많아서 필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운명'론자는 아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이 다를 뿐이고 이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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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7-23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이 본래 제목 쓴 거 보고 생각났어요 예전에 그 제목으로 나온 적 있다는 거... 그때 봤는지 ‘인생’으로 바뀌고 봤는지 잘 모르겠지만... 책을 보기는 했지만 꽤 예전에 봐서 거의 잊어버렸네요 예전에 영화로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자기 삶을 어디로 끌고 갈지는 자신이 정해야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7-23 17:18   좋아요 1 | URL
영화가 나온 지는 몰랐네요^^
내용만으로 보면 단조로운 이야기일수도 있는데 인물의 상황에 이입되어서인지 감정을 끌어올리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갈수록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게 되네요^^; 희선 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