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ying in H Mart: A Memoir (Paperback) - 『H마트에서 울다』원서
Knopf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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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쉘은 부모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다 사춘기 이후가 되자 공부를 열심히 하길 원하는 부모의 기대와는 다르게 음악과 밴드 활동에 심취했다.
부모와의 갈등이 극에 달한 어느 날 엄마에게 병환이 닥친다. 밴드 활동도 중단하고 하던 일도 그만두고 미쉘은 엄마의 간호에 뛰어들게 되었다.

미쉘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과거의 나와 수없이 대면했다.

나의 어머니도 끊임없이 일하셨다. 불과 1~2 년전까지 바쁘게 일하셨지만 이제 더는 함부로 몸을 쓰면 큰일난다고 경고성 메시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일을 그만두셨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제발 좀 일은 그만하시라며 수차례 말씀드렸었다.
그치만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은 남동생들과 투병하는 아버지까지 계셔서 많은 돈이 드니 조금이라도 일을 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던 것이다.

책 초반부에 미쉘이 엄마에게 하는 어떤 집착 같은 감정이 나는 좀 부담스러웠고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미쉘과 다르게 나는 부모의 기대를 거스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첫째였고 책임감이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살림 때문에 대학 진학을 원하는 곳으로 못하게 된 이후로 쌓여 있던 내적 불만이 있었고 10년 넘게 내가 번 돈은 집안의 생활비와 빚 청산으로 투입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일로를 걸었다. 사실 이 불편한 감정은 지금도 현재지속형인지 모른다. 지금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지긋지긋한 마음이 인다.

어머니는 20년 전쯤 뇌출혈로 한 번 쓰러지신 후 마비 증세가 와 회복이 되기까지는 5년이 넘게 걸렸다. 아버지는 사고로 다리를 잃은 이후 의기소침해지셨고 몇 년전 전립선에 문제가 생겼다가 최근에는 전립선암으로 2년 가까이 투병했다 겨우 회복되었다. 두 분 다 병마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회복을 하셨다는 것이 다행일 것이다.

부모님께 전화드려야 하지 하면서도 솔직히 그러지 못한다(가 아니라 안한다). 부모님과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고 사실 어색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거의 매일 같이 카톡 메시지를 보내신다. 메시지를 받으면서도 답장조차 하지 않는 내 마음은 어쩌면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스스로 부모님과의 관계에 경계선을 긋고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는 방증이겠다. 잘 될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는 어머니의 문자에 답장을 짧게라도 보내고 가끔은 먼저 메시지를 보내보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엄마!˝라는 외침 이외에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음식과 음악이 향수를 부른다는 생각이었다.

미쉘과 엄마 사이에는 김치 등 많은 한국 음식들이 있다. 내 어머니도 요리를 잘 하시는 편이었는데 결혼 후에도 이상하게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맑은 콩나물국이 생각나곤 했다. 옆지기가 콩나물국을 몇 번 끓여주었지만 결코 어머니가 끓여주신 그 맛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과거에 제사를 지낼 때는 갈 때마다 콩나물국이 먹고 싶었다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누구나 이처럼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음식 하나 쯤은 있을 것 같다.

중학교 즈음부터 노래방 문화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나를 노래방에 데려가셨다. 그 무렵 장사 손님과 아버지를 상대하는 일로 스트레스를 풀고자 함이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애창곡인 남진, 나훈아의 곡들을 나도 알게 되었고 덩달아 나도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를 알게 되었다. 장미의 미소, 처음 그 느낌처럼, 신인류의 사랑 등 애창곡을 불렀던 그 시간은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10대 시절 어머니와의 좋은 추억이 있다면 그 때일 것이다. 미쉘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부르는 커피 한 잔을 보며 나도 그 시절 어머니와의 시간을 자연스레 생각했다.

죽음(과 병마)이라는 것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고 과거 현인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미쉘의 엄마에게도 갑작스레 찾아왔던 것처럼 내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사고와 병환이 찾아왔었다.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사실 닥칠 일을 생각하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싶고 도무지 감정을 추스리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준비한들 완벽히 준비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결국 감내해야 할 일이고 마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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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01-26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두 번째 읽는데요. 첫 번째보다 더 불편하고 힘든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예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그런거 같아요.
죄책감을 갖는 동시에 억울한(?) 마음도 있고요.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이 힘을 갖게 되었다는 생각도 합니다. 거리의화가님 이야기 읽다가 저도 엄마 생각을(어제 엄마한테 짜증 많이 냈거든요) 해보았습니다. 저는 반 정도 읽었어요. 얼른 읽으려고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님!

거리의화가 2026-01-27 08:04   좋아요 0 | URL
부모, 특히 엄마와의 관계에 관한 글과 책은 늘 감정을 자극하게 하는 법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대로 이 책에 5별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엄마와의 여러 복잡다단한 관계성을 잘 그려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너무 냉담하다고 말씀하시거든요. 왜 그리 쌀쌀하냐면서... 죽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하라는 이야기를 매번 듣는데 참 어렵네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반성했습니다.
2번째 읽으신다니 더 여운이 깊으실거라 생각해요. 완독을 응원합니다!
 

이사야가 등장하기 전의 유대인들은 야훼를 모든 부족의 유일한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모든 히브리인들의 유일한 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모압인들에게는그들의 신인 그모스가 있었으며, 나오미는 룻이 계속 그모스를 충실하게 섬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바알세붑은 에글론의 신이었으며, 밀곰은 암몬의 신이었다. 이 민족들은 경제적 정치적 고립주의를 택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학적 독립성을 낳았던 것이다. 모세는 그의 유명한 노래에서 "야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며, 솔로몬은 "우리의 신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탐무즈는식자층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그를 섬기는 의식이한때 유대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에스겔은 탐무즈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의적인 울음소리를 신전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유대인 부족들은 이처럼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심지어 예레미야의 시대에도 그중 다수는 자체의 신들을 갖고 있었다.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그러므로 이 음울한 예언자는 그의 백성들이 바알과 몰록을 섬기는 일에 계속 저항한다.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에 정치적 통일성이 점점 견고해지고 예루살렘의 신전이 종교의 중심지로자리를 잡아 가면서 신학이 역사와 정치를 반영하게 되자, 야훼는 유대인들의 유일한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이 등장할 때까지는 이런 단일신교(henotheism)를 넘어 유일신교(monothcism)의 방향으로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브리 - P506

아모스와 이사야는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의 모태이며, 가난과 전쟁이 인간의 형제애와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없는 유토피아의 물줄기가 흘러나온 원천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현세적인 권력을 다시 확립해 주고, 무산자들이 인류를 통치하는 독재 시대를 열어 줄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초기 개념을형성해 준 근거다. 이사야와 아모스는 호전적인 시대에 단순성과 온유함, 협력과 우정이라는 덕목을 높이기 시작했으며, 예수는 이런 덕목들을 자신이 내세우는 신조의 기본 요소로 삼았다. 그들은 "만군(萬軍)의 주"를 "사랑의 주"로다시 만들어 내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한 최초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야훼를내세워 인도주의를 펼쳤다. 19세기의 급진론자들이 그리스도를 내세워 사회주의를 펼쳤던 것처럼 말이다. - P515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전은유대인의 생활을 묘사해 놓은 기록이라기보다는 율법(사실상 "신관들의 유토피아"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법전들처럼 그 법전 역시 어기는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대단히 존중되었고 위반되는 경우마다 새로운 칭송을 받았다. 그법전은 사람들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유대인들이 2000년간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에게 무형의 정신적 국가, 즉 하이네 (Heine)가 말한 것처럼 "이동식 조국"을 주었다. 온갖 이산(離)을 겪었어도 그들에게 통일성을 유지시켜주었고, 온갖 패배를 당했어도 자부심을 유지시켜 주었으며, 우리 시대에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강인한 불멸의 구성원들을 안겨 주었다. - P539

제국은 본성상 곧 무너지기 마련이다. 제국을 세웠던 활력이 그 제국을 물려받은 사람들에게서 사라지는 순간, 식민지의 민족들은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울 힘을 비축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 종교, 도덕, 전통이 서로 다른국가들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한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 통일체에는 유기적인 끈이 없으므로 인위적인 결속력을유지하려면 강압이 계속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은 이런 이질성과 원심력을 완화시킬 수 있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결속력이 없는 여러 국가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는 그 국가들을 하나의 통일 국가로 만들려는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통일체를 보존하는 일은 해마다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의 구속력이 느슨해지면서 태수들의 대담함과 야망도 점점 커졌다. 태수들은 자신들과 권력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 장군들과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위협하여 임의로 군대와 자금을 키워 나가면서 왕과 맞설 음모에 계속 가담했다. 반란과 전쟁이 계속되면서 왜소해진 페르시아는 활력이 고갈되었다. - P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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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ssons she imparted, the proof of her life lived on in me, in my every move and deed. I was what she left behind. If I couldnot be with my mother, I would be her.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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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영혼은우리 인류의 지식과 기억 속에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집트는 농경, 야금술, 산업, 토목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유리와 리넨, 종이와 잉크, 달력과 시계,
기하학과 알파벳을 처음 발명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의상과 장식품, 가구와 집, 사회와 생활에 세련미를 더했으며, 질서 정연하고 평화로운 통치 기구, 인구조사 및 우편 업무 제도, 1·2차 교육 기관, 심지어 공직과 행정을 위한 전문 교육•제도까지 만들어 내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글과 문학, 과학과 의학도 발전.
시켰으며, 개인 및 공공의 양심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명된 곳도 이집트였다.
-사회 정의를 처음으로 부르짖은 곳도, 일부일처제가 처음 널리 퍼진 곳도, 일신 - P380

교를 처음 채택한 곳도, 윤리적인 글이 처음 등장한 곳도 이집트다. 이집트만큼건축과 조각, 비주류 예술이 발달해 최고의 기량과 힘을 자랑하는 곳을 우리가아는 한) 이전 역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 이후에도 이집트에 필적하는 곳을 찾기 힘들다. 이집트의 정신을 담은 최고의 작품들이 사막 아래 묻혀버리거나, 지구가 일으키는 경련에 무너져 내린 와중에도 이집트의 이러한 공헌은 사라지지 않았다. - P381

바빌로니아의 문명은 이집트 문명만큼 인류에게 많은 열매를 안겨 주지 못하고, 인도 문명만큼 다양하고 심오하지 못했으며, 중국 문명만큼 섬세하고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문학적 재능을 통해 유럽의 종교적 전승에 - P442

서 떼어 낼 수 없는 매혹적인 전설들을 전해 준 곳이 바로 바빌로니아였다. 그리스인들이 수학, 천문학, 의학, 문법, 사전 편찬술, 고고학, 역사, 철학의 토대를 자신들의 도시 국가로 들여와 로마와 우리들에게 전해 주었을 때도 그 모태가 된 곳은 이집트가 아닌 바빌로니아였다. 금속과 별자리, 중량과 도량형 단여러 악기와 많은 약품들의 그리스식 이름은 바빌로니아식 이름을 번역한것이며, 때로는 단순히 소리를 그대로 옮겨 적기도 했다. 그리스의 건축은 이집트와 크레타 섬에서 양식과 영감을 얻었지만, 이슬람 사원의 탑과 중세 예술의첨탑과 종탑, 미국 현대 건축의 단형(形) 양식은 지구라트를 거친) 바빌로니아의 건축을 통해 발전한 것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모든 고대 사회의 유산이되었으며, 이는 로마가 현대 사회에 안겨 준 질서와 통치라는 선물만큼 소중했다. 아시리아는 바빌론을 정복하고 그 고대 도시의 문화를 받아들인 후 넓은 제국 전체로 보급했다. 유대인은 오랜 포로 생활을 하며 바빌로니아의 생활과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바빌로니아를 차례로정복하면서, 이오니아, 소아시아, 그리스의 신흥 도시들과 바빌론 사이에 통신과 교역이 전례 없이 충실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길이 열렸다.
이런 방법들과 그 밖의 다른 많은 방법들을 통해 두 강 사이에 자리 잡은 땅의문명은 우리에게 전달되어 인류의 문화적 유산이 되었다. - P443

아시리아는 너무 성급하게 외국에서 경제적 활력을 끌어왔다. 그 결과 아시리아의 경제는 부와 교역을 안겨 주는 수지맞는 정복 사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이든결정적으로 패배하게 되면 그 순간에 끝날 수 있었다. 아시리아의 군대를 무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던 몸과 성격적 특성들은 그들이 거둔 바로 그 승리 때문에 점점 약해졌다. 승리할 때마다 가장 강하고 용감한 사람은 죽어 나간 반면, 연약하고 소심한 사람들은 살아남아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늘려 나갔다. 이런 과정 덕분에 문명은 잔인한 자들을 솎아내 더 강해졌을지 모르나, 아 - P468

시리아는 바로 그 때문에 힘의 원천이었던 생물학적 기반을 잃고 말았다. 아시리아가 벌인 정복 활동의 범위 역시 아시리아를 약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정복활동으로 인해 만족을 모르는 군신(軍神)에게 전사들의 목이 바쳐졌을 뿐 아니라, 수백만 명의 몰락한 이방인이 아시리아로 들어왔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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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ould think ofhow my mother always used to tell me never to fall in love withsomeone who doesn‘t like kimchi. They‘ll always smell it on you,
seeping through your pores. Her very own way of saying, "You arewhat you eat."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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