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벌써 오래전부터자기의 몸속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 식물의 지극히 은밀한 성장을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 식물의 형태를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람이 제 몸속에 자라는 암을 언젠가는눈치를 채듯이 그도 속의 부스럼이 자라고 있는 기척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심란하게 스스로 의심해보기도 했다. 나는 정신병의 초기나 혹은 상당히 깊어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런데 몸의 탈과는 달리 마음의 그것인 바에야 환자가 스스로를 진단하는 힘이 있는 동안에는 아직 그의 정신은 파멸까지에는 이르지 않은 것일 테지. 그리고 나는 파멸은 원치 않아. 그리고 아니, 나는 행복을 원한다. 다만 그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 P37

이광수의 임은 민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민족 같은 것을 업고 나설라치면 단박 바지저고리 소리를 들을 테니 이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세대. 무슨 일을 해보려 해도 다절벽인 사회, 한두 사람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아니다. 나는 시대를 걱정하는 건 아니다. 실상은 시대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민족 같은 것도 아무래도 좋다. 다만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걸 이용한다는 것뿐이다. - P40

그가 머릿속에서 쌓아둔 온갖 재물과 인물, 강과 산은 그에게 외계外界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왔다. 희고 빛나는 시멘트의 굴뚝을 빼놓는다면, 인민위원회 건물이 넘어지는 것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자기네 도시가 망하는 것을 거꾸로 선 기쁨, 어떤 마조히즘의 눈으로 바라본 심정도 소년 독고준의 태도보다 그렇게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른들 눈에 보지 못한 동화—남쪽 나라에서 번영하고 있다는 태극기와 이승만 박사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파괴를 눈감아버렸기 때문이다. - P47

폭격은 계속되었다. 폭탄이 떨어져오는 그 쏴 소리와 쿵, 하는 지동 소리는 한결 더한 것 같았다. 준은 금방 까무러칠 듯한 정신 속에서 점점 심해가는 폭음과 그럴수록 그의 몸을덮어누르는 따뜻한 살의 압력 속에서 허덕였다. 폭음, 더운 공기.
더운 뺨. 더운 살. 폭음. 갑자기 아주 가까이에서 땅이 울렸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웅성거렸다. 폭음. 또 한번 굴이 울렸다. 아우성 소리. 폭음, 살냄새··· - P62

야합이란 현실의 논리다. 점잖게중용中庸이네, 해보아도 속은 마찬가지다. 기승해서 달려들면 기계는 고장 나고 사람은 멍이 든다. 지금 생각하면 북에서 ‘동무’들이해방 후 벌여놓은 일 가운데는 무리가 많았다. 무엇인가 잘못된데가 있었다. 그들은 조직을 이루고 있는 낱낱의 에고들이 저마다그 조직 자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허무의 ‘점‘들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사회의 무겁고 따분한 공기가 생긴다. - P74

태양은 하늘에 있고 잡초는 게으르게 숨 쉬며 나독고준은 포대경 속에 100미터의 길을 지켜보며 취생醉生해서는안 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마다 그는 당황해진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물음은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된다는 요청을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무엇을… - P75

이북에 있는 과수원에서 가족들과 같이 사상이고 뭐고 아무도 다치지 말고 살 수만 있었다면 그는 그쪽을 택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동무‘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아서 넘어온 것이지만, 부모덕에 공부를 하고, 물려받은 과목밭이나가꾸고 주재소 주임이 보여준 존경 비슷한 것 속에 살아온 그는 나이까지 들고 난 지금은 아주 약하디약한 생활자였다. 게다가 남한사회는 한국이 여태까지 겪지 못한 새 사회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돈이면 그만인 사회, 적당한 겉치레와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전통도 없는 채 자본주의의 가솔린 냄새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속에서 그는 낙오자가 되었다. - P77

청년 시절에 흔히 있는 대로 독고준도 체계에의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계를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하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소속체계를 잃은 에고가 자기 분열을 막기 위해서 환경과의 사이에 벌이는 본능의 싸움일 것이다. 여러 가지 구불구불한 잡담을 다 제하고 간단히 말한다면 그는 외로웠기 때문에 별하늘을 사랑하게되었고 뒤늦게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졌다는 말이 되겠지만, 간단한 일을 간단히 생각지 못하는 것이 그 나이의 병일진대 그런 호걸스런 충고는 독고준에게 아무 쓸모도 없다. - P81

그와 마주 앉아서는 준은 그래도 세상을 생각하면서 살자는 사람같이 보였다. 학은 친구의 그런 겉모양에 속고 있었다. 한번 홀로가 되면 독고준은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렸다. 애써도 추어올릴 수 없는 이 허물어진 마음. 회색의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서 몽롱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자는 이 몸가짐. 그러면서도 학의 말에 반발하고 싶고 그들이 만들고 있다는 모임에 퍼뜩 생각이 미치곤 한다. 나라는 놈은………… - P84

문제는 미래의 시간에 있어. 미래만이 진정한 시간이 아닌가. 과거는 시간이 아니야. 그건 셈이 끝난 계산서 같은 거야. 이제 어떻게도 할수 없는 일이야. 우리의 문제는 미래의 문제야. 우리가 인간답게사는 건 그것을 알아내야 해.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도 도를 지나치면 비겁하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말이야, 내말은 내의견으론 우리 조상이 잘못했던 점에 대해서 너무 깊은 감정적인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거야." - P92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길만 허용되고 다른 길은 용납되지 않아. 요 먼저어느 야당의 국회의원이 남북통일은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아? 그랬더니 어떻게됐어? 국시를 어겼다, 용공容共이다, 괴뢰들에게 동조한다고야단이더군. 앵무새처럼 한 가지 말만 하라. 이것이 정부의 요구야. 인생과 정치를 좀 다원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터부에 속해. - P94

개인끼리든 사회나 국가에서든유혹에 지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뉘우치고 근신해야 하고, 어려움에 이긴 사람은 상을 받아야지 않겠어? 그래야 정의가 실현되지. 해방 후에 우리는 정치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때 사기를 당했어. 이승만 씨가 친일파들을 끌어들였을 때 비극은 시작된 게아냐? 한국이란 참 이상한 나라야. - P101

지금의 서울은촌놈의 서울이지, 서울 사람의 서울은 아니다. 서울뿐만 아니라어느 도시건 도시란 원래 그런 것이다. 새로운 힘과 허영을 가슴에 품은 지방 사람이 도시에 와서는 그들의 정력과 끈기로 그것을살찌게 하고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학의 경우에는 그래도 유학을온 셈이지만 자기 손으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들에게는 서울은다란 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분주하게 속이고상대방을 넘어뜨리고 허세를 부리면서 화폐를 한 장이라도 더 긁어모을 생각에 바쁠 뿐 이웃을 즐기고자 동네를 치장하는 그런 겨를은 없다. 서양의 도시 발달을 보면 그들은 봉건 귀족들에게 맞서서 한 가지씩 권리를 주장해서, 끝내는 시민의 권리와 신분을만들어낸 것이지만, 서울은 이도저도 아닌 그저 오가잡탕의 추악한 도시였다. 돌아가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렇게 차를 타고 보니 그의 마음은 점점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 P113

나갈 길 없는 지평선, 그렇더라도 우리들의 집념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온건한사람들이지만 우리들은 속으로 미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아무도모른다. 우리는 울부짖지 않는다. 가끔 농담도 하고 잡담에도 끼어든다. 우리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다. 남들이 우리들을 수상쩍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평범의 탈을 쓰고 사는고독한 망명자다. 그래서 우리들끼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우리는서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거기다 공동의 낙인을 찍는다. 그렇게 해서 이 세계에 우리들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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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상반기 책 목록을 정해두었으나 현재 읽고 있는 책들로 인해 변경될 가능성을 생각하여 미루어두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변경은 없었다.

- 대한계년사 9
-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
-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 역사의 원전
-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뽑고 보니 역시 문학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대한계년사나 역사의 원전,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이야기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대한계년사 시리즈는 총 10권이다. 하지만 9권이 내용으로는 마지막 권이다.
대한계년사는 개화기부터 대한제국이 망하는 그 때까지를 다룬다.
예상할 수 있듯이 《대한계년사 9》는 대한제국의 마지막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슬프고 감동적이었다.
우리에겐 지난한 역사였지만 많은 개인들의 희생으로 결코 멈춰서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떤 이야기보다도 감동적인 우리의 역사였다.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은 일제의 천황제 파시즘을 이끈 인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요시다 쇼인 이외에 나카 미치요, 도쿠토미 소호를 다루고 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구미의 기술을 배워 주변국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던 인물이고, 나카 미치요는 동양사 과목 신설을 제안하면서 요시다 쇼인이 말하는 주변국을 역사교육 연구에 적용한 공을 세웠다.
도쿠토미 소호는 시기마다 변신을 잘한 귀재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는 종국에 일제의 군국주의와 황도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삶을 살았다.
이 책을 통해서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다양한 인물의 일대기와 일본 내의 역사의 흐름, 그들의 논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는 두만강과 간도를 둘러싼 조선, 청, 일본 간의 이해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두만강과 간도에 얽힌 역사는 알고 있다고 해도 결과론적으로, 지극히 자국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 책은 마치 다각도의 렌즈처럼 단면이 아닌 사실을 독자가 파헤쳐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국경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영토 중심적인 관점에서 나아가 시공간적인 연속선 상에서 이해가 이루어져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은 식민지 조선 청년이 일본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 청년들이 차출당하게 되어 남방으로 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증언이나 기록을 통해서 꽤 알게 되었지만 조선인 포로에 대한 내용은 잘 모르거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포로는 전범으로 분류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중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있을텐데 최대한 중립적으로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한 것이 엿보였다.
이 때문에 개인이 한 역사를 통과한 기록이면서 사료적인 가치로서도 가치를 지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원전》은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목격자들이 현장을 보고 겪은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총 181개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르포르타주로 현장성을 느낄 수 있어 생동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글을 쓴 이들을 보면 투키디데스, 플라톤, 아메리고 베스푸치, 귀스타브 플로베르, 알렉상드르 뒤마, 폴 고갱, 조지 버나드 쇼, 로자 룩셈부르크,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들의 글도 담겨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한 목격자의 기록', '정부 첩자의 보고', '어느 독일 사병', '《타임》 특파원'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2500년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한 글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독자로서는 감사한 책이었다.


상반기 읽은 책들 중 한두 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좋았다.
많은 책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읽기였다고 생각한다. 균형 있는 독서를 지향하고자 하는 마음에 읽었던 책들도 있었는데 내공 부족을 경험했던 것 같다.
하반기에는 좀 더 내가 읽고 싶은, 공부하고 싶은 책들을 더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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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2-06-28 22: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대한계년사>를 읽으며 마치 서서히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거리의화가님 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동시에,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암울함 속에서도 빛나는 선조들의 모습 속에서 전성기의 역사에서는 배울 수 없는 또 다른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상반기에 읽으신 좋은 책들 소개 감사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29 09:36   좋아요 2 | URL
대한계년사 뒤늦게 읽었지만 정말 좋은 읽기였고 경험이었습니다~ 근대사를 공부하다보면 암울해서 들여다보기 싫을 때가 있는데 그 와중에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민중들과 지식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전율을 느끼곤 합니다. 겨울호랑이님도 공감하신다니 좋은 책은 역시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scott 2022-06-28 23: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골라 주신 책들
- 대한계년사 9
-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
-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 역사의 원전
-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알라딘 엠뒤들이 참고해서
메인 페이지에 띄어 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류 역사책들 출판사에서 천부 찍기 힘들다고 합니다(한국 독자들 역사책 잘 안찾아 읽는다공)

거리의화가 2022-06-29 09:39   좋아요 3 | URL
스콧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ㅎㅎㅎ
개인적으로 뽑은 책들이지만 이 책들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역사책을 읽고 경험하는 분들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이런 류의 서적은 2쇄는 커녕 1쇄도 몇 천부면 많이 찍는거더군요. 그마저도 몇 년 안에 품절되서 나중에 구하려 해도 구할 수가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희선 2022-06-30 02: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한계년사는 10권이군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10권이니 그때 역사를 자세하게 알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은 역사책 좋아하시고 자주 보시는군요 지나간 일이라 해도 거기에서 배울 점도 많지요 그렇게 생각해도 저는 잘 못 보기도 하네요 거리의화가 님 유월 마지막 날 잘 보내주시고 칠월 첫날과 잘 만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6-30 09:08   좋아요 2 | URL
네 정교라는 조선 말의 지식인이 쓴 책입니다. 10권인데 10권은 부록인 셈이라 9권이 내용상으로는 마지막이에요~ 역사책은 제가 그나마 가장 많이 보는 분야의 책입니다^^ 책을 그동안 많이 읽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 분야는 꾸준히 접하고 있어서 지력을 키우는 중이에요.
오늘이 마지막 6월이네요~ 남은 하루 잘 보내시고 7월 힘차게 출발하시길^^*
 

문학사와 작가 연구를 한 사람이 아니면 대뜸 작품 하나만 가지고는 뜻이 오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렇다면 예술은폐쇄 사회를 만든 게 아닌가? 내 말은 유행가를 쓰라는 게 아니야.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는 동시대인들에게만은 적어도 알수 있는 형태와 감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야. - P14

하늘을 나는 모포와 사이렌의 피리는 살아 있다. 그러나 손오공의 여의봉은 어디있는가? 그들의 경우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있으나 우리는 끊어져있다. 전위前衛, 보수(保守란 말은 우리들의 경우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어. 우리들에게도 전위란 여전히 서양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정작 그 상대는 보수적 서양과 동양이라는 두 겹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저들은 단단한 벽돌 위에 얹힌 풍차와 싸우고있으나 우리는 허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허깨비와 싸우고 있어. 우리는 돈키호테도 될 수 없어. 저들은 낡은 신화를 부수고 새 신화를 세우기 위해 시를 쓰지만, 우리에게는 부술 신화가 없고, 서양의 그것은 서양 시인들이 부술 것이며 동양의 그것은 이미 폐허가돼버렸으니 부술래야 부술 수 없어.우리들은 패배한 종족이야. - P18

여러분의 조국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자매는 마의 38선을 넘어서 그리운 당신들을 우리들의 품에 안을 날을 고대합니다. 자유로운 조국.
민주주의의 나라. 유토피아………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였으며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 집안에서 그 목소리가 전하는 말을 의심할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준에게는 그것이 진리보다 더한 것이었다. - P26

죄의 기쁨 속에서도 이야기의 세계는여전히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거꾸로 선 세계, 물구나무선 마음의 나라였다. 이야기가 더 현실적이고 현실이 더 거짓말같은 질서였다. 이 같은 죄의 기쁨을 위해서 그는 나중에 값을 치러야만 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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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르테미시아 -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
메리 D. 개러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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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르테미시아> 라는 제목을 보고 아르테미시아라는 화가를 이 시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등의 의미로 정한걸까 짐작했었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묘비명이라고 한다. 알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이유보다 제목이 잘 선정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르테미시아 하면 으레 떠올리는 대표작이 있다. <유디트> 시리즈. 나는 그 중에서도《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라는 작품을 보고 어딘가 낯선 느낌이 있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벌써 10여년 전 일이지만 이탈리아에 여행을 갔을 때 우피치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봤던 것이다. 수면 위에 잠자고 있다가 기억이 떠오른 것. 우피치 미술관에서 유명한 작품은 사실 보티첼리의 <봄>이나 카라바조의 그림들, 라파엘로의 <성모 승천> 등이지만 나는 아르테미시아의《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를 보고 당시에도 강렬한 느낌을 받아서 기억 속에 박혔었던 것 같다. 심지어 내가 그 때 한국어판 도록을 샀었는데 확인해보니 그곳에도 이 작품이 들어가 있어 반가웠다. 이건 마치 운명이랄까. 소름의 연속이었다.



이 책에는 아르테미시아 개인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야기만 담겨져 있지 않고 당시의 환경에서 활동한 다양한 작가들과 화가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시기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마치 당시를 여행하듯 탐사하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다양한 여성 지식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당시의 환경 속에서 남성 지식인들에 대항하여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활동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와 예술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외국인 이름들이 줄기차게 나오는지라 너무 그 이름에 의식하다보면 힘들 수 있으니 적당히 넘어가는 센스를 발휘하기를 권고한다.


이쯤에서 그녀의 개인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녀는 아버지의 동료로부터 그림을 도와주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재판정에서 자신이 당했던 수치를 밝혀야 했다. 아버지의 동료라는 작자도 열받지만 나는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딸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1620년 이후에 아버지와 말도 섞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둘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달랐던 게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얼마 전 <완전한 이름>을 읽으면서 생각한 바가 있었다. 사람들이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의 서사에 함몰되어 그녀의 작품에 정작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그녀는 예술가이자 화가이다. 개인사가 극적이라고 해서 그것에 주목하다보면 작품은 상대적으로 뒷전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정말 그녀의 개인사보다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책에는 다양한 그녀의 그림들을 만날 수가 있다. 직접 보고 오롯이 느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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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6-27 2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녀의 그림 너무 훌륭한데 그녀의 삶의 서사에만 집중하고, 또 <유디트>만 떠올리는 것 같아요.
저도 갖고 있는 책이예요!

거리의화가 2022-06-27 21:49   좋아요 3 | URL
네 맞습니다. 이야기보다는 예술가니까 그의 작품으로 평가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다양한 작품이 많으니 좀 더 그것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책 역시 좋았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도 보여주고 또 당시의 사회상도 알려주어서 좋았습니다^^

희선 2022-06-28 03: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르테미시아 몰랐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밑에 그림 다른 데서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고도 잊어버렸겠지요 아르테미시아를 말하는 책이 이게 처음은 아닐 텐데... 한번 보고 잊어버리면 다른 걸로 만나도 괜찮겠지요 거리의화가 님은 저 그림을 실제 보셨군요 보고 기억에 남았다니... 그 사람 삶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남긴 그림이나 글도 중요하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6-28 07:45   좋아요 4 | URL
아마 희선님도 한 번쯤은 본 그림일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본 그림을 책에서 만나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개인의 삶이 승화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파랑 2022-06-28 06: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글에서 자주 보던 그림이군요~!! 역시 예술의 영감은 개인적 경험에서 오는건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화가님의 닉네임에 딱 어울리는 책이군요 ^^

거리의화가 2022-06-28 07:47   좋아요 4 | URL
ㅎㅎ 10년 전 그림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 신기합니다. 그만큼 강렬한 느낌이었던 거겠죠. 아르테미시아의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만날 수 있어 좋은 책이었습니다^^*

mini74 2022-06-28 13: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름 전문화가로서 운영도 잘 하신거 같아요. 저도 리뷰 남겨야 하는데 ㅎㅎ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만 하죠 ~

거리의화가 2022-06-28 16:08   좋아요 2 | URL
지난 번에 올리신 게 리뷰 겸 올리신 거 아니에요?ㅎㅎ 미니님 글 읽으면서 이 책 찜했던 기억이 나네요~^^ 유익했던 책이었습니다. 늦었지만 감사해요~
 

지난 주말에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챙겨먹고 6시쯤 나와서 동네 산책을 했다.

토요일에는 햇볕이 나서 그나마 뽀송했는데 일요일은 후텁지근해서 끈적끈적하니 별로였다.

물론 막상 걷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

점점 더워지니 아침저녁 시간에 운동을 하러 나오는건지 사람들이 많아짐을 느꼈다.

오늘 아침 출근길도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불고 끈적대는 공기에 불쾌지수가 저절로 높아진다.


주말까지 연이어 3권의 책을 읽었다.

한 권은 연구서라 하루 종일 읽어야 했지만 나머지 두 권의 책은 짧아서 긴 시간 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세 권의 책들이 모두 성격이 다르다.

한 권은 워낙 유명한 소설인 <프랑켄슈타인>

다른 한 권은 <여기, 아르테미시아>

마지막은 <구술로 본 한국현대사와 군>




<구술로 본 한국현대사와 군>은 6월에 읽을 책으로는 더 없이 적절한 책이었다. 지난주에 읽은 <와다 하루끼의 북한현대사>에 연이어 읽으려고 했던 의도였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 <여기, 아르테미시아>의 주인공인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모두 선구안을 지닌 인물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둘은 작가와 화가로 직업도 다르고 살았던 시기도 다르지만 머무르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조건이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도전 의식을 가지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역사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사건도 수없이 일어나는 마당에 한낱 개인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묻히기는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틈새를 조금씩 깨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온다.

어른들이 보내는 메시지란 그 인터넷에 떠도는 시나 좋은 문장이 적혀 있는 이미지 그런 것이다.

어쨌든 무응답은 아닌 것 같아서 답장을 보낸다.

헌데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기계적으로 응답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쳐서 민망함이 일 때가 많다.

부모님께 잘해야지 하는 생각은 드는데 나는 살가운 표현이 너무 간질거려서 무뚝뚝함으로 흐르기만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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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6-27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저희 엄만 자꾸 아파트 놀이터 근처에 있는 비둘기를 그렇게 찍어 보내세요 ㅠㅠ 저 비둘기 무서워하는데 ㅎㅎ 저도 애교란 사전에만 있다고 한평생 살아와서 ㅠㅠ 살갑기는커녕 밥은? 안 아프남? 병원은? 알았다. 밥 무라엄마 끝 ㅠㅠ 화가님 맘 알거 같아요 ㅠ

거리의화가 2022-06-27 10:33   좋아요 2 | URL
자식들에게 뭐라도 보내고 싶은 부모님 마음일텐데 저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어렸을 때도 무뚝뚝하긴 했는데 점점 가면 갈수록 더 무뚝뚝해지는 느낌이. 여동생이 있는데 저와는 반대로 아주 살가운 편이거든요~ 맨날 비교당합니다^^; 표현도 갑자기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네요ㅠㅠ

바람돌이 2022-06-27 1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책 3권이라뇨. 심지어 저 두꺼운 연구서까지 끼워서 말입니까? 와 진짜 대단.
저는 책 보려고 앉아도 주의 산만으로 내내 이거하다 책보다 저거하다 책보다 결국 얼마 못보고마는데 말이죠. ㅎㅎ
방금 댓글 달다가도 청소기 돌리고 왔음요. ㅎㅎ

제가 아프니까 시어머님이 내내 전화하셔요. 걱정이 되시고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런건 알지만 온갖 민간처방들을 자꾸 알려주시면서 해봐라 해봐라 하시니까 대답은 네네 하면서도 스트레스 약간 올라오는 중.... 부모님들의 마음은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고, 삶의 방식도 서로 다르니 그 간극은 어쩔수가 없는거 같네요. 그저 마음상하지 않으시게 대답만 잘..... ㅎㅎ

거리의화가 2022-06-27 11:12   좋아요 3 | URL
ㅋㅋ 연구서이긴 하지만 페이지 수가 그리 많진 않습니다. 3권인데 따지고 보면 목요일부터 읽었구요. 암튼 저는 오히려 연구서 읽는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재미는 없는데 그 재미없음 속에서 찾아오는 묘한 평화랄까.ㅋㅋ 문학 읽기가 저는 더 어려운 것 같아요~ㅋㅋㅋ

안 그래도 병원 다니신다는 거 봤는데 넘어지셨다는 글 보고 마음이 안 좋더군요ㅠㅠ 저도 안경을 쓰는지라 안타까움이 더 컸어요. 그래도 타박상 정도라고 하셔서 다행입니다.
어른들 마음은 다 그런가봐요~ 걱정되시겠죠. 잔소리로 듣지 않도록 노력은 하는데 그 마음을 따라가기는 역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몸조리 잘하셔요!ㅎㅎㅎ

그레이스 2022-06-27 1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ㅠㅠ
방금 엄마랑 전화통화했는데,,,
찔리네요.

거리의화가 2022-06-27 13:04   좋아요 3 | URL
아이고 그레이스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자식들이 살갑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후회할 걸 알면서도 왜 이리 살가운 표현이 어려울까요ㅠㅠ 그래도 요즘은 감사하다는 말은 꼭 전하고 있어요. 의무적이든 기계적이든 어쨌든 부모님은 그런 메시지 하나에 고맙다고 느끼시더군요~^^;

레삭매냐 2022-06-27 19: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날이 꿉꿉하네요.
장마철이 드디어 몰려온
모양입니다.

어른들이 보내 주시는 톡
을 보고 성심성의껏 덧글
을 달아야지 하면서도 잘
되지 않더라구요 ㅠ

거리의화가 2022-06-27 21:51   좋아요 2 | URL
3~4일 정도 됐나요~? 공기가 아주 물기가 가득하네요~^^;

표현이라는 게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더 진심어린 표현이 될텐데 별다른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책하게 되더군요~^^ 좀 더 마음을 써야겠습니다.

희선 2022-06-28 03: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났지만 주말에 책 많이 보셨군요 저는 유월엔 더 못 보는데... 마음이 잡히지 않는 건지, 얼마전에는 책 잘 좀 보자고 했는데... 실천이 안 됩니다

기계처럼 응답한다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보다 나을 듯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06-28 07:4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희선님 어쨌든 부모님은 어떤 말이든, 표현이든 해주면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막판에 읽은 책들은 아주 두꺼운 책들은 없어서 그리 읽을 수 있었던 듯합니다. 주말에 책 읽을 시간이 나다보니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