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벽지>

갇혀있는 여자들

저들도 나처럼 다들 벽지에서 나왔을까?
하지만 꽁꽁 숨겨놓은 노끈으로 나를 단단히 묶었으니, 절대 저 바깥 길가로 날 내보내지는 못할걸!
밤이 오면 다시 무늬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건 정말 힘들어!
이 커다란 방에서 맘껏 기어다니니 정말 기분이 좋은데 말이지!
밖으로 나가지는 않을 거야. 제니가 부탁한다 해도 절대 안 한다고.
밖으로 나가면 땅바닥에서 기어다녀야 하는데다 모든 게 여기처럼누런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잖아.
그런데 여기서는 반질반질한 방바닥에서 기어다닐 수 있고, 벽을 빙둘러 있는 저 긴 얼룩에 어깨가 딱 맞으니까 길을 잃을 걱정도 없다고.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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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 한국 사회 마지막 비전향 장기수를 기록하다
민병래 지음 / 원더박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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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은 오늘, 공교롭게도 북한에서 동해상으로 일본을 넘어 미사일을 쏘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전히 남북은 지리상으로 붙어 있음에도 먼 존재가 되어 있다. 마음으로는 오가고 싶다 해도 내 발로 휴전선 너머를 향해 갈 수 없다. 월북, 탈북 이런 단어는 이따금 듣지만 나와는 어느새 먼 단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는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사회안전법(보안관찰법) 등으로 구속되어, 수십 년간 징역을 살면서 잔혹한 고문과 협박 등으로 사상전향 공작에 맞서 투쟁한 분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실상이 드러났다. 1988년 12월 21일 양심수 대사면으로 시국 사범이 사면 석방될 때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관련자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또, 1989년 5월 29일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다. 사회안전법은 좌익수가 사상전향을 하지 않고 출소하면 '보호소'라는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외부로 나온다 해도 거주와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골자다.

이들은 대부분 고향과 가족이, 살았던 동네가 북쪽인데다 자유의사로 귀향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시대도 변하고 국제사회에도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그들을 가두어두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1999년 12월 31일까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이들 모두가 석방되었고 자연스레 송환 운동까지 이어졌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 두 정상은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을 합의했고 1차 송환으로 63명이 북을 향해 갈 수 있었다. 다만 비전향장기수 102명 가운데 일부는 송환에서 제외되었는데 북쪽에 가족의 생사 여부와 거주지를 알 수 없는 경우나 교도소에서 강제전향한 경우였다. 말은 강제전향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갖은 고문과 협박으로 사상 전향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굶주림에, 회유에, 협박에, 고문을 받다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강제전향이 될 수 있는가?

총 11분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구순이 넘은 분들이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분은 두 분인데 지리산 빨치산 여전사인 박순자 선생님과 강담 선생님이다.

지리산 빨치산 활동은 태백산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는데 생생한 묘사 덕분인지 지리산 안에서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백선엽을 비롯한 대한민국 온갖 부대들이 총출동했으니 이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마치 제주 4.3의 토벌처럼, 그 한참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일제 의병의 대토벌처럼 잔혹하게 느껴졌다.

박순자, 박수분, 설봉이라는 세 개의 이름을 지닌 박순자. 그에게 두 가지 소원이 있다. 첫 번째는 뇌성마비 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고 눈을 감는 것이다. 서른여덟 살에 품은 첫딸인데 노산인 데다 산고가 심해 출산 과정에서 다소 뇌에 손상이 있었다. 아이가 한참 예민한 다섯 살 때 경찰의 가택침입과 계속된 불법 수색에 경기를 앓았고 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꾸준히 재활치료가 필요한 상태였건만 남편의 재판과 면회를 챙기느라 딸아이를 제대로 돌 볼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북쪽이 고향이 아니고 연고도 없지만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동지들과 손을 잡고 북녘 길에 올라 남북이 평화롭게 걸어가는 길을 열겠다는 뜻이다. - P145~146

강담 선생님은 북쪽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상태였으나 출소 후 57세의 나이에 교회 권사의 주선으로 새 장가를 들었다. 아내 분은 초혼에 실패하고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그렇다 해도 북에서 내려온 전과자를 받아준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친지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으나 선생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었나보다. 하지만 자신을 받아준 남쪽의 아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뇌경색 을 앓은 후 폐암까지 생긴 후로 아내 분께서 혼자 돌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결국 요양원에 가게 된다.
이 사연에서 너무 슬퍼서 눈물이 많이 났다. 남은 이도, 떠나갈 이도, 북쪽에 있는 가족도 모두 다 가련한 것이다.

"나는 괜찮으니 당신 북으로 가라, 고향 아니냐? 당신 맘 다 안다. 그랬더니 이 양반이 내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 고맙다 하는 거야. 60년간 기다렸을 북쪽 아내에게 '여보, 나 돌아왔어. 고생 많았지' 그 말 한마디만은 하고 싶다는데 그 모습이 짠했어요. 사실 난 속으로 서운했지. '당신 두고 내가 어딜 가냐' 그런 소리 듣고 싶었는데 오만 정이 다 떨어지더라구. 그때는 이 양반이 나를 두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이 양반을 여기 두고 떠나는 셈이 되었네."
"여보, 나 이제 올라갈게. 당신은 이제 여기서 여생을 마쳐야 하고 나는 집에서 죽어야 해"
코로나로 모든 요양원에 면회금지 명령까지 내려진 상황이라 이날 올라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인 셈이다.
"그동안 고마웠어 사랑해." - P191~193

20, 30대에 감옥에 들어가 20년, 30년 이상을 지나고 나와보니(심지어 초반에 정해진 복역 기간에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복역 기간이 늘어난 경우도 많다) 어느덧 50, 60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사회에 나오니 먹고 살 길은 막막하고 할 줄 아는 것은 없고 교도소에서 알게 된 사람이라고 믿었다가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도 모았던 돈을 날려먹고 길거리를 떠돌다 이제 더는 살 수 없다 생각한 분들도 있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라면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지... 그저 고향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마음이 너무 아픈 책이다. 하지만 내가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서 미처 몰랐을 테고 이분들의 삶을 알 기회가 있었을까.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비전향 장기수 분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북이 대결 구도로 치닫고 북미 관계는 물론 대만을 두고 미중 관계도 좋지 않은 지금 긍정적인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책을 내려놓고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이분들의 한은 어떻게 풀어드릴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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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4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00년에 비전향장기수분들이 북으로 가셨을 때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남은 분들이 있었군요.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부분들을 살아내신 분들의 삶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10-05 09:09   좋아요 1 | URL
네. 2000년 북으로 간 게 끝이 아니더라구요ㅠㅠ 그 이후 송환 과정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보수단체들의 항의와 반대 등과 정부가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 지금까지 왔더군요. 결국 연세가 구순이 훌쩍 넘으셔서 이 책 인터뷰하시는 도중에도 4분인가가 돌아가셨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그렇고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왜 이리 힘들까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페넬로페 2022-10-04 2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확히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비전향장기수가 나이 들어 감옥에서 밖으로 나오면 적응하기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몇 십년을 좁은 곳에 있다가 뻥 뚫린 곳에 적응을 잘 못한다고요.
도대체 그 주의라는 것이 뭐길래 이렇게 인간을 고문하고 오랫동안 가둬놓는지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10-05 10:50   좋아요 2 | URL
그분들이 북에서 살다 내려오신 분들이라 남한의 체제 자체에 적응을 못했을것 같구요. 철저한 자본주의 경제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북에서 인권이 문제가 되지만 이분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대한민국이 과연 말할 자격이 있나 싶습니다. 누가 누굴 나무라는지 모르겠어요ㅠㅠ 이념이 참 지긋지긋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말이죠.

희선 2022-10-05 0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과 북으로 나뉜 게 슬픈 일이군요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면 하나가 되리라 여겼을 텐데 생각이 다르고 나라가 둘로 나뉘고 말았네요 아니 그건 소련과 미국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죠 언젠가 통일할 날이 올지... 지금은 통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0-05 09:13   좋아요 2 | URL
20대 이하는 통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할 것 같습니다. 북한이 당연히 다른 나라라고 생각할테니까요. 통일은 둘째치고 사람은 살리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비전향 장기수분들이 워낙 고령이라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말이죠ㅠㅠ

mini74 2022-10-05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전향 장기수분들 모두 북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ㅠㅠ 체제나 이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라도 보수층의 반대라는게 참 잔인하다는 생각듭니다 ㅠ

거리의화가 2022-10-05 13:09   좋아요 2 | URL
어제 리뷰 쓰면서도 자꾸만 분노가 치밀어오르는겁니다. 너무 화가 나요. 그분들 삶을 보면 어느 하나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 인생을 살다 가면 세상에 대한 회의만 있다 가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 죽기 전 소원이라는데 그걸 못들어주는지~ 참 씁쓸해요 미니님ㅜㅜ

얄라알라 2022-10-07 0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순자님께서 구순 넘으신 어르신이라면 38 출산은 그 시절, 더욱 늦은 출산이었을텐데 아기돌봄을 할 수도 없이 휘둘려진 삶을 사셨나봐요....말씀하신 것 처럼, 그 ˝한˝을 감히 상상도 못하겠네요. 이를 갈아도 이가 갈리지 한은 갈리지 않을 것 같은....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리의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2-10-07 08:57   좋아요 1 | URL
˝한˝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해 보였어요. 어떻게 해도 응어리가 풀릴까 싶습니다ㅠㅠ 청춘이 감옥에서 한 세월을 보내고 나와서도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삶을 사신 분들이니... 박순자 선생님 노산이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아이에게 미안함도 있는 걸 고백하실 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게 선생님 잘못은 아니고 사회가 그리 몰아간 것을요. 저도 이 책에서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알라님께도 울림을 주는 책이길^^
 

Greece, across the Aegean Sea, was a completely different kind of country. Ahtens and Sparta were the largest Greek cities, but the people of these two cities lived in very different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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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350~1750 - 세계 제국과 대양 하버드-C.H.베크 세계사
볼프강 라인하르트 지음, 이진모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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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룰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세계'는 아직 아무런 교류 없이 서로 분리된 채였다. 심지어 '대서양 세계'는 이 시기에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대서양의 동쪽 세계와 서쪽 세계는 서로 역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상호작용은 계속 증가해 점차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다루려는 다섯 세계의 역사는 전 지구적인 오늘날 세계의 전사(前史)다. 그리고 이 다섯 세계의 역사에 관한 서술은 모든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각각 그 지역들의 현재적(정치적·경제적) 관심사의 영향을 받게 된다. - P14

이 책의 목차를 먼저 살펴보자.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해 이슬람 세계, 남아시아와 인도양, 동남아시아와 대양, 가장 마지막이 유럽과 대서양 세계를 다룬다.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하는 것이 낯설 수 있지만 시기를 주목하면 이해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18세기는 몽골이 지나간 자리에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고(유럽까지) 서양이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찾으면서 대서양까지 확산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순서가 이렇게 배치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섯 세계의 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키워드는 상호성과 교류, 소통이다. 세계는 이어지고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때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만 주목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거나 도태된 많은 부족과 국가를 다룬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피해가 있었던 점을 보여주어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한 점이 좋았다.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친 어떤 과정들로 인해 이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 과정에는 공통의 기후 조건, 서로 연결된 지리와 농업 및 상업 생산방식, 공통의 사회적 상호작용 및 가족생활 관행이 포함된다. 가장 두드러지고 일반적인 두 경향은 제국들의 확장과 독립국가들의 강화였으며,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항하거나 도피한 사람들이 살던 국경 지대가 없어졌다. 또한 이에 수반해 핵심 지역과 변경 지역 모두를 향해 상업망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이 지역 전체는 신대륙에서 유래해 유입되는 은에 의해 추동되는 전 세계 교역망으로 연결되었다. - P77~78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이 지역을 하나의 전체로 논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19세기 및 20세기 민족국가의 국경에 의해 규정된 단위들에 집중해 왔다. 우리는 이 기간의 중국, 러시아, 일본의 수많은 개별 역사(역사 서술)와 한국과 베트남의 몇몇 개별 역사를 알지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개별 역사(역사 서술)들 중 이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연구는 이 더 큰 규모(이 지역 전체)의 변화를 묘사하는 중요한 개념적인 도구들을 실제로 제시했다. - P78

지금의 중앙유라시아 및 동유라시아라고 부르는 광대한 지역은 시베리아 삼림지대에서 아열대 농경 지대까지 뻗어 있고 세계 인구의 30퍼센트에서 40퍼센트가 살았다. 중국의 명과 청 두 제국은 중앙집권화 관료 체제로 주도적 위치를 점유했다.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모스크바 공국(후에 모스크바 국가가 됨)이 형성된 후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동방과 서유럽으로의 팽창을 이어간다. 중앙유라시아는 중국의 정책과 이슬람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사회를 일구었다. 일본은 16세기 이후 유럽의 해양 세력 및 육상 세력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발전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조공 체제를 받아들여 관료제적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안정을 꾀했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제 정부는 전 지역에 걸쳐 가차 없이 진보해, 행정 절차의 표준화를 심화하고 엘리트 문화와 대중 문화를 불러왔으며 광범위한 상업적 교환을 지지했다. 광대한 제국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더 작은 국가인 한국과 일본, 베트남은 더욱 효율적으로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영토 면적을 넓히고 대체로 인구 증가와 문화적 역동성을 경험했다. 그 나라들 중 그 어떤 나라도 정체해 있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제도는 탄력적이고 적응성이 있었으며, 신민들은 대부분 번성했다. 그러나 이는 군사적·환경적·문화적 상호작용 등 수많은 다양한 요인이 조건부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으며, 뒤이은 시기의 반전에 취약했다. - P262

터키의 역사 서술에서는 (프랑스의 관례와 비슷하게) '근대'로 표현되는 시기가 1453년에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1453년이 바로 그 시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기반이 되는 시대구분인 1350년에서 1750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들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일반적인 시대 구분에 따라, 아직 '중세적' 성격을 갖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초기 역사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이 제국은 대략 1300년 무렵에 북서아나톨리아 지방의 지역 군후국으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언제 끝나는가? 1768년에서 1774년까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이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바라볼 수 있다. 퀴취크 카이나르자 평화조약(1774)에서 오스만 제국은 이전까지는 금지했던 외국 선박의 흑해 운항을 허용해야 했다. 그 외에도 이 조약을 통해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와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몇 년 후 1783년에 러시아가 크림을 합병하며 종식되었다. - P265~266

이제는 오스만 제국 역사에 수백 년에 걸친 '지속적인 위기'가 있었다고 더는 전제하지 않는다. (...) 오늘날에는 다양한 지방 세력들이 18세기에 비교적 순탄하게 오스만 제국의 국가조직 안에 통합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18세기 후반의 위기 동안에 제국이 생존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0년대에조차 일상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방의 명망가들과 세력가들이 지배하던 지역을 근대 국민국가의 초기 형태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상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과 유럽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터키의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도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가 정치사에서 가장 발전된 통치 유형이라는 주장이 더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 P268

아나톨리아 지역에 티무르 제국이 무너진 이후 등장한 후계 제국들 중 오스만(수니파 이슬람)과 사파비(시아파 이슬람) 왕조는 군주가 왕권 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방지하고,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체제를 개발함으로써 안정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사파비 군주인 샤는 캅카스 출신 굴람들을 동원해 키질바시 에미르들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하게 하여 17세기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여 지배를 안정화하는 중요 토대를 만들었다.
오스만은 술탄이 나머지 형제들을 '예방 차원'에서 살해함으로써 후계 전쟁을 줄였고 15세기 후반 이후 베지르와 총독들을 배출했던 준노예들도 이란의 굴람에 해당하는 체제 안정 요소였다.
또 사파비와 오스만 군주는 아들들을 궁전 안에 가두고 성장하게 하면서 반란을 애초에 방지하여 왕위를 안정시켰다.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1400년을 전후해 유럽의 지위는 오히려 대단히 어둡게 나타난다. 세계무역을 지배했던 것은 무슬림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조직은 이 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그 형체가 조금도 파악되지 않은 정치적·문화적 통일체였던 중국이었다. 하지만 1480년에서 1620년까지의 시기에 유럽적 시각에서 팽창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의 이러한 팽창은 지구사의 관점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 유럽의 도약은 이 시점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된 무력이라는 현상 외에 별로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다주지 않았다. 후추 무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이후에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인도양에서 낯선 이방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역할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무제한적인 통행권을 보장해주는 이른바 보호장을 받음으로써 생겨난 역할이었다. - P460

근대 초기의 세계화 단계에서 인도양은 대서양을 거쳐 매우 광범위한 교환 체계에 연결되기는 했지만, 이 네트워크는 일차적으로 간접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런데도 이 단계는 일련의 방향 제시적인 변화를 수반했다. 기독교의 확산, 교역 언어로서 포르투갈어의 확산, 인도-포르투갈 공동체의 형성, 유럽인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를 띤 항구도시(예를 들어 고아, 마닐라, 바타비아, 퐁디셰리)의 대두, 희망봉을 거치는 유럽 교역의 증가가 이 변화에 속한다.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귀금속, 특히 은의 수입을 통해 유럽이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공간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유럽인들은 인도양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 P465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는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유럽에 관련된 아래에서 서술되엇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이래로 이루어진 세계의 발견과 정복, 지속적인 점유가 역사의 주요 골격이었다. 1494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이 시기 획기적인 경제 발전과 함께 유럽이 가진 무한 권력의 환상과 오만의 상징과도 같았다.
유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만큼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다르게 보였다. 남아시아가 북아프리카로 상품을 수출하고 여러 항구들이 개설되면서 인도양을 오갔다. 유럽은 당시까지만 해도 중심이 아니었고 이제 막 그 흐름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남아시아가 직물, 후추, 설탕 같은 상품을 레반트와 북아프리카로 수출한 것이 양 지역 사이의 교역에서 기본적인 구조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초지역적인 연결들이 이루어지는 심장부로서 기능했다. 인도양에서 이루어진 원거리 무역은 소규모의 해양 공간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던 무역로를 기반으로 했다. 이러한 무역 관계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던 항구도시들 사이의 해상무역로가 계속 엮인 것과 같았다. 근대 초의 세계 체제가 근대의 세계 체제와 달랐던 점은 근대 초에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핵심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비슷한 상업적 가치를 지닌 생산지가 도처에 많이 있었으며, 중심 역할을 하는 교역 중심도 여럿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위계적으로 조직된 생산 절차나 그 절차의 중심지도 없었다. 모든 지역은 각자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 알아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 P632

자연 공간적인 측면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볼 때 동남아시아와 대양들을 규정하는 특징은 언뜻 보면 다양성과 복합성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 지역을 하나씩 소개하며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지역들을 서로 연결하는 요소들은 매우 뚜렷하기 때문에 지역 간의 차이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유사성을 강조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일련의 공통성을 가지는 공간으로서, 내적으로는 서로를 결속시키면서 외적으로는 경계를 설정하는 공간으로서 남아시아와 대양들이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 P637

동남 아시아의 역사는 탈식민화 이후에도 지역에 있던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의 역사에 머물렀다. 동남아시아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에 독일의 민족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로베르트 폰 하이네겔데른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네겔데른은 1923년에 이 지역이 갖고 있는 민족적·언어적·문화적 공통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했다. 19세기에는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정복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로 명명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그의 일행들이 신대륙과 아시아 사이를 항해했을 때 바다가 너무 고요해 죽을 뻔 했던 것에서 '고요한 바다' 혹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을 가진 태평양의 명칭은 이것에서 나온 것이다. '오세아니'아라는 명칭도 바다의 엄청난 넓이와 규모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 최근의 연구 경향은 동남아시아를 점차 발전하던 세계 체제 안에 존재한 하나의 중요한 독자적인 지역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 P695

동인도,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태평양, 오세아니아라는 명칭 자체가 유럽인들의 인식과 용어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동남아시아에 있던 국가들은 인도양, 태평양을 아우르는 지역에 위치하면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의 나라와 수많은 교류를 이어갔다. 특히 1570년에서 1630년까지 동남아시아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유입된 은이 유럽 경제를 활성화하고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 상품을 구매하는 순환 고리를 만든 것이다. 과연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한가. 같은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술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유럽 역사학의 패러다임에서 분리하려는 시도에까지 이르는 여러 혁신적인 연구와 노력에도 그 지역들의 역사학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앞선 위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역사학의 초석을 놓은 선구적 학자들조차 유럽에서 교육받은 학자이거나 주로 유럽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연구를 주도해 가는 핵심 연구소나 중요한 연구 서적 대부분의 출판지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있으며, 아프리카 연구의 중심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인 상황이다. '대서양의 역사'라는 연구 주제도 미국과 유럽 사이의 학술 교류에서 대두했다.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와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는 연구를 위한 제도적 연속성과 재정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 - P840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유럽 출신이 대부분이고 사료들도 남아 있지 않거나 유럽이나 미국에 존재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유럽/북아메리카 시각의 서술에 입각해 있다.
이 시기 대서양 연안 아프리카의 역사는 인구 밀도가 증가하고 교역이 증가하면서 많은 제국이 건설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이 오기 훨씬 이전에 지중해까지 이르는 교역망을 구축하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당시에 남동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아직 인근 다른 세계와의 접촉 지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의 서술은 '라틴 유럽'으로 제한할 것이다. 오직 라틴 유럽만이 대서양의 공통점을 건설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인데, 우선은 서쪽의 식민 세력인 포르투갈, 카스티야, 네덜란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해당하며, 이들보다 좀 더 간접적으로는 그 밖의 남부, 중부, 북부의 유럽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17세기와 18세기에 형성된 유럽의 세계무역 체제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국가가 한편으로는 쿠를란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트리에스테에 있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 P874

서술하듯 여기서 말하는 라틴 아메리카는 남동 유럽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은 대서양을 누비며 교역을 이어갔다. 대서양을 통한 교류는 원거리를 거치는 접촉을 빈번하게 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영토를 점령하고 수많은 원주민 집단의 맥이 끊기게 함으로써 언어적·인종적·문화적 차이를 잃게 했다는 것이다. 식민 지배는 주민들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재조직하고, 새로운 부족들을 탄생시켰다.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고 부족의 고유성을 빼앗아가는 것은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5장은 아무래도 남아 있는 자료나 책이 유럽 중심이라 아무래도 제한이 있다.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

뒤에 주석을 빼고도 내용이 1058페이지에 달하여 거칠게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책은 직접 읽어봐야 내용 파악은 물론 자체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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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3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인 교류에 의해 세계사가 형성되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것 같은데 이 시기와 분야의 역사는 사실상 너무나도 방대하여 그걸 제대로 연결짓고 전체를 조망하는게 개인 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진짜 어려울듯해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통합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진짜 안되는게 일단 그런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ㅠ.ㅠ
요즘 공부사기 싫어하는 저는 보관함에 이 책을 넣어두지만 언제 읽을지는 솔직히..... ㅠ.ㅠ
화가님의 열공을 항상 응원합니다. ^^ 저는 음..... 반성만 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2-10-04 09:33   좋아요 0 | URL
시기의 범위도 넓은데다 세계 전체를 다루다 보니 역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챕터마다 저자가 다른 이유가 되는 것일테구요.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한국사와 세계사의 분리가 너무 심각하여 이를 조금씩이라도 통합하는 과정이 있어야할텐데 역시 사람이 없는 거군요^^;;; 하긴 통합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모두 공부해야 가능한 일일테니ㅎㅎ 저는 근대 이후 역사를 주로 읽어와서 이 시기에 대한 역사는 덜 주목한 측면이 있었는데요. 이 시기의 역사를 읽으니 근대의 시작과 자연스레 이어져서 공부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보관함에 담아둔 책 저도 너무 많아서 사실 죽을 때까지 읽고 갈까 싶어요. 그러니 읽고 싶어질 때 읽으시면 되죠. 그리고 그런 계기가 올 때가 오더라구요^^
 
전쟁과 목욕탕 - 일제가 남긴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야스다 고이치.카나이 마키 지음, 정영희 옮김 / 이유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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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을 가 본지 오래이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목욕탕을 몇 차례 가 본 뒤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에는 더 이상 목욕탕을 가지 않았다. 왜였을까. 목욕탕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우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에 노출한 몸으로 많은 이들과 부딪치는 게 어색했다. 특히 친구라도 만나는 날은 기분이 찜찜했다. 목욕탕에서는 주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이 탕에 들어가 내뱉는 소리는 놀라웠다. 그 때만 해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데 시원하다니 놀랍게만 생각했다.

이 책은 30대 이상이면 알 법한 목욕탕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은 목욕탕보다 찜질방이 훨씬 많아졌으나 예전에는 목욕탕 간판 기호가 길거리에 흔했다. 그만큼 우리 기억에 친숙한 존재가 목욕탕이다.
작가가 글을 쓰고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쓴 책이다. 최초에는 세계 곳곳에 있는 목욕탕을 기획했는데 첫 방문지였던 태국 노천 온천에 얽힌 사연을 알고 이후 여러 방문지를 경험하면서 제목처럼 기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만약 이 책을 최초의 기획처럼 출간했다면 나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뀐 의도가 내게 들어맞았던 셈이다.

카나이 마키 사마귀가 앞발을 치켜든다. 야스다 씨가 웃으며 말한다. "같이 만들까요?" 둘 다 목욕탕을 좋아하니까 이런저런 탕을 경험해보는 책은 어떨까? 수증기 너머에 있는 역사의 진실을 펼치는 거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역사수정주의! - P16~17

(작가 두분의 그림)


인터뷰를 한 이들, 방문한 장소들 담은 그림들은 아기자기하고 귀엽다. 다만 전쟁과 관련한 장소들은 아기자기한 그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목욕탕이라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으리라. 탕에 몸을 담그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처럼 인터뷰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열대 우림이 가득한 정글 노천탕 힌다드 온천으로 태국 중부 칸차나부리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녹음이 짙은 계곡과 미지근하고 질 좋은 온천수로 유명하다.
칸차나부리까지는 일반적으로 버스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들은 태국 국철 '남톡 지선' 철도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과거에는 '타이멘 철도'라 불렀는데 2차 세계대전 일본군이 인도 침공을 계획하면서 태국과 버마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철도였다. 일본군은 연합군 소속 포로들과 아시아 각국에서 징용된 노동자들을 비롯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공사 현장에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기아, 피로, 전염병, 감독관의 학대로 수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힌다드 온천은 일본군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와트 완카나이 온천은 사찰 안에서 솟는 온천을 뜻하여 기도도 하고 온천욕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장소다.

두 번째 목적지는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 마지막 남은 대중목욕탕인 나카노탕이다. 오키나와는 종전 후 귀향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고,전후 부흥기의 분위기에 맞물려 1960년대 초기 공중목욕탕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주택의 현대화로 가정용 욕조가 보급되고 1973년 오일쇼크로 연료비가 급등하면서 공중목욕탕의 숫자는 줄어든다. 그렇게 2014년을 기점으로 나카노탕은 오키나와현 내에 남은 마지막 공중목욕탕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듯 나카노탕은 몸 씻는 곳과 탈의실의 구분이 없다. 이것이 오키나와 스타일이란다. 그리고 수도도 온수와 냉수의 수도꼭지가 호스 하나로 연결되어 합류되어 나오는 구조로 특이하다. 약 알칼리성 광천수로 약간의 미끄덩한 느낌이 있어서 손님들 중에는 아무리 씻어도 비눗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기도 한다고 한다. 목욕비는 370엔, 하루 손님은 20명 남짓이고 관리비는 늘어만 가서 언제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계속 영업을 잇고 있는 주인장의 신념이 느껴졌다.
나카노탕에서 작가들이 만난 인상적인 이는 샤미센을 연주하는 다쿠시 야스마쓰 씨 이야기였다. 그는 매일같이 특공기가 오키나와에서 하늘을 향해 나는 모습을 보았다.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종전 후 1945년 미군이 만든 이시카와 수용소에서 가족들과 함께 수용되었다. 수용소에서는 미군이 버린 빈 깡통으로 몸통을, 낙하산의 가는 끈으로 줄을, 야전 침대 다리로 다리를, 젓가락으로 이음새를 만든 샤미센 연주 소리가 밤마다 울려퍼졌다고 한다. 수용소를 나와서도 샤미센을 잊지 못해 그는 샤미센을 배웠고 50년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가 샤미센의 연주 소리와 겹쳐 들린다. 평화의 목소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목적지는 한국이다. 한국은 목욕탕 문화가 급변한 곳이다. 오키나와처럼 가정에 욕조가 보급되면서 대중목욕탕의 숫자는 급격히 줄었다. 그 대신 찜질방 문화가 등장했다.


부산 해운대 일대는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진행되면서 온천지로 정비됐고 해방 후 외국 자본의 호텔이 진출하면서 리조트지로 성장했다. 해운대 온천센터는 일대 중 규모가 가장 큰 온천 시설로 그곳에서 만난 인터뷰이 최병대씨의 단골이기도 했다. 이 분의 인터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는 1929년생으로 일본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중앙정보부 전신인 CIC에 직장을 얻어 근무했다. 1965년 한일조약 체결로 일본 영사관이 개설된 후 현지 직원 1호로 채용되어 29년간 근무했다. 광주 항쟁이 벌어졌을 때 광주 일본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하는 임무도 하는 등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여러 가교 역할을 했다.
패전 후 약 5,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일본인 아내들을 위해 '부용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녀들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에 괴롭힘을 당하고 막상 한국에 오니 남편은 본처나 정혼자가 있어 훼방꾼 취급을 받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과거와 원한은 흘러간대도 흘려보낼 수 없는 은혜가 있지
남이 베풀어 준 인정 덕분에 내일로 노 저어 나가는 배도 있지
"이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산 내 심정이랄까." - P183~184

엔카를 부르고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이 분의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 분의 인생도 어렵게 살아왔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타일에 차이는 있겠지만 대중탕의 때밀이 문화는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때밀이가 적어도 일본의 산스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결이 거친 이태리타월로 때를 '모조리 벗겨내는' 모습에는, 똑같이 몸을 씻는게 목적인 슨스케에는 없는 박력이 존재한다. 뭐랄까, 공세를 가하는, 적극적인 돌파의 느낌이랄까. 이태리타월은 세포를 자극해 각성시킨다. 말하자면 모종의 '전투'와도 같다. - P209

한국 공중목욕탕에 가 본 사람 치고 때밀이를 경험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나도 몇 번 받았는데 그 때마다 무척 아팠던 통증만 뇌리에 떠오른다. 때밀이에 사용하는 이태리 타월은 부산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여러 설이 있는데 책에도 소개된다.

네 번째 목적지는 사무카와정이다. 가나가와현 코자군 사무카와정은 동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데 전쟁 후 수많은 귀환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귀환자들의 주택에 욕실이 없어 공중 목욕탕을 개설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만들어졌다. 작가들은 '스즈란탕'을 가려고 했으나 2014년까지 운영한 끝에 폐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설마 하며 갔지만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이대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어서 사무카와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과거에 귀환자 주택이 있기 전 해군 군수 공장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사가미 해군 군수 공장에서는 총 5,000톤의 독극물, 폭탄으로 치면 4만 3000여 개의 이페리트 폭탄이 제조됐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많았을 때는 3,000명 이상의 노무자가 군수 공장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 P265

"조선에서 온 소년공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독가스 공장에 있었을 거예요. 처음에는 지나칠 때마다 '안녕.' 하며 밝게 인사도 해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들은 땅만 보고 걸었습니다. 눈두덩이는 퉁퉁 붓고 얼굴은 검붉은 색깔로 변하고 옷도 완전히 누더기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들었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모습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사무카와 지역사 연구》 제6호(1993년) - P271


이페리트는 벨기에의 도시 '이페르'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이자 독일군이 처음으로 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던 곳이다. 피부에 닿으면 문드러지고 들이마시면 기관지와 폐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는 독가스다. 1차 대전 후 제네바 의정서에서 화학 무기 사용을 금지했지만 일본군은 아랑곳 않고 이페리트 폭탄을 제조했다.


다섯번 째 목적지는 오쿠노시마 섬이다. 히로미사 현 다케하라 시 항구에서 페리로 15분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토끼가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풍경에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과거 이 섬에는 거대한 독가스 무기 공장이 있었다. 여기서 만든 무기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작전에 사용됐다.


1938년 육군참모본부에서 작성한 근처 지도에 오쿠노시마는 지워지고 없다. 비밀 유지를 위해 지도에서 지운 것이다. 오쿠노시마는 종전 후 미군에 점령되었다가 1956년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그 후 방치되다가 1963년 대규모 휴양 시설로 문을 열면서 과거의 독가스에 대한 기억은 철저히 지운다.

"도쿄 신주쿠에 있던 육군 화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섬에서 토끼를 200마리 정도 기르고 있었습니다. 완성된 독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토끼의 털을 밀고 이페리트나 루이사이트를 피부에 발랐어요. 독약은 피부에 스며들었고, 토끼들은 보라색으로 변하며 죽어갔습니다. 사방 5미터 정도 되는 유리 가스실도 만들었습니다. 가스실에 토끼를 집어넣고 독을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게 하며 어느 정도의 살상 능력이 있는지 실험한 거지요."
패전 직후 제일 먼저 처분된 것도 바로 그 실험 결과들이었다. - P310~311

관동군 731부대가 실시한 생체 실험이 떠올랐다. 대체 이 광기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오쿠노시마 섬은 토끼가 뛰어나니는 자연 휴양지로만 소개되지 과거에 독가스 공장이 있었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오쿠노시마에서 생산된 독가스는 중국의 북동지역인 베이탄촌에서 학살 무기로 이용되었다.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이 곳은 지하도들이 많았는데 일본군은 이곳에 독가스를 던졌고 연기에 뛰쳐나오는 이들을 칼로 베고 총으로 쏘아 학살했다. 베이탄촌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민병과 촌민을 합쳐 8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종전 후 독가스 공장이 있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관련 시설물들을 태평양 바다 수중에 매장한 것이다.

오쿠노시마 섬 독가스 공장에서 일했던 한 후지모토 야스마 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잊지 않습니다. 괴물로 만들어진 것, 범죄자로 길러진 것,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만들어야 했던 것,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화학 방정식은 사람을 죽이는 방정식입니다. 독가스는 저의 몸을 파먹어 들어갔을 뿐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중국인을 죽였습니다. 그걸 위해 필요한 방정식이었습니다." - P360~361

그는 2004년 중국에 가서 피해자들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죄의 말을 건넨다고 해서 죽은 피해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내내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고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의 진정한 사과를 듣고 피해자들은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작가 모두가 일본이 전쟁 가해에 대한 책임을 사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는 태도를 갖고 있어 이해하는 데 편했다.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책이 목욕탕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아서 좋았다. 관련 역사, 지역에 대한 소개, 나아가 일제가 남긴 전쟁 피해에 대한 장소와 인물을 찾는데 이르기까지 여정을 보여주고 인물에 대한 인터뷰로 400여페이지인데도 불구하고 술술 읽히는 장점이 있다. 전쟁과 목욕탕에 대한 교집합이 궁금하다면 그렇지 않아도 동네 어른이 전해주는 옛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편안함으로 접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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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02 2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포시 데려갈게요^^ 부산 해운대 온천과 동래온천 쪽 녹천탕까지. 반가운 이름이 지도에 보이네요.

거리의화가 2022-10-03 06:55   좋아요 3 | URL
부산 분들은 반가우실 것 같아요. 저는 목욕탕 뿐 아니라 찜질방도 좋아하지 않아서 갈 일은 없을 듯한데도 이야기를 보니 궁금해지더라구요. 특히 녹천탕은 궁금해요ㅎㅎ 동래하면 온천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프레이야님도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희선 2022-10-03 03: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목욕탕이라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목욕탕만 하지 않고 거기에 전쟁을 넣어서 더 좋은 책이 됐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는 증거를 다 없애려 했다니... 그때 사람도 많이 죽였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0-03 06:57   좋아요 3 | URL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전쟁하고 목욕탕하고 무슨 상관이지 했거든요^^; 근데 목욕탕만 있었다면 제가 읽지를 않았을 겁니다. 전쟁 후 증거인멸의 사례는 수두룩하죠. 특히 일제는 철저했습니다ㅠㅠ 지금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는 없애고 입막음중이죠.

Vanessa 2022-10-03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사랑해요

Vanessa 2022-10-03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뽐뿌 해요

mini74 2022-10-03 12: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년들 이야기 너무 먹먹합니다. 그나마 양심있는 작가들이네요. 저도 이 책에 관심 많았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10-03 12:30   좋아요 2 | URL
일본 작가라 좀 걱정했는데 번역이 됐다는 것이 아무래도 그런 걱정을 덜게 했습니다^^; 이런 양심 있는 작가와 언론인들이 많아야 할텐데 극우주의자가 늘어나고 차별과 혐오가 심각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미니님 이 책 강추해요!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scott 2022-10-05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국 엄청난 노역 착취 무고한 청춘들을 희생시킨 온천 목욕탕
대만 온천들이 일제점령기에 만들어졌다고 대만친구들이 이야기 해줬는데 ...
일본 집요할정도로 악랄 ㅜ ㅜ

거리의화가 2022-10-05 17:00   좋아요 2 | URL
태국 목욕탕도 군인들 피로 푼다고 만들어졌는데 대만도 역시 그렇군요ㅠㅠ 물자 동원을 위해서 만들어진 태국 죽음의 철도 이야기가 너무 섬뜩했어요ㅠㅠ 거기서 얼마나 많은 인명의 희생됐는지... 일본제국주의의 그늘은 여전히 많은 곳에 남아있는 듯 싶습니다. 반성이라도 하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