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癸亥】十七年秦王聞孟嘗君之賢使涇陽君爲質於齊以請孟嘗君來入秦 秦王以爲丞相或謂秦王曰孟嘗君相秦必先齊而後秦秦其危哉秦王乃以樓緩爲相囚孟嘗君欲殺之孟嘗君使人求解於秦王幸姬姬曰願得君狐白裘孟嘗君有狐白裘已獻之秦王無以應姬求客有善爲狗盜者 入秦藏中盜狐白裘以獻姬姬乃爲之言於王而遣之王後悔使追之孟嘗君至關 關法鷄鳴而出客時尙早追者將至客有善爲鷄鳴者野鷄聞之皆鳴孟嘗君乃得脫歸

○ 趙王封其弟勝爲平原君平原君好士食客常數千人

진왕이 맹상군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양군(동생)을 제나라에 볼모로 있게 하고 맹상군에게 요청하여 진나라에 맹상군이 들어온다. 진왕이 맹상군을 승상으로 삼았는데 어떤 이가 ˝맹상군이 진나라에 재상이 된다면 반드시 제나라를 먼저 하고 진나라를 나중으로 할 것이니 진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에 진왕은 누완을 재상으로 삼은 뒤 맹상군을 가두고 죽이고자 했다. 맹상군은 탈출을 위해 사람을 시켜 진왕에게 총애받는 여인을 이용해 자신을 풀어줄 것을 구했다. 마침 객 중에 손 수완이 좋은 사람이 있어서 진나라 창고로 들어가 훔친 호백구는 진왕의 여인으로부터 최종 진왕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하지만 훔친 것이 탄로나 쫓기게 된 맹상군은 성문을 통과못할 뻔 하다가 닭 울음 소리를 잘하는 자가 닭 소리를 내어 무사히 성문이 열려 탈출할 수 있었다(성문은 닭 소리가 울려야 열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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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채소공(蔡昭公: 채도공의 아들 채후 申)이 패옥(佩玉) 두 개와 갖옷 두 벌을마련해 초나라로 가 패옥 하나와 갖옷 한 벌을 초소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이를착용하고 채소공을 위해 향례를 베풀었다. 마침 채소공도 나머지 갖옷과 패옥을착용하고 향례에 참석했다. 이를 본 초나라 영윤 자상(子常)이 이를 갖고 싶어 했

으나 채소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이 채소공을 3년 동안이나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마침 이때 당성공(成公)도 초나라에 왔는데 그는 숙상마(馬) 두 필을 갖고있었다. 이에 자상이 이를 갖고 싶어 했으나 당성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은당성공 역시 3년 동안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이때 당나라 사람들이 서로 숙의한 뒤 우선 초나라에 전에 당성공을 수종하던 자들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초나라가 이를 허락하자 교대 차 간 사람들이 이전의 수종자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만든 뒤 당성공의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쳤다. 그러자 자상이 당성공을 귀환시켰다.
당성공이 귀국하자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친 자들이 스스로 몸을 묶은 뒤 자진해서 사패(敗:사구)에게 나아가 이같이 말했다.
"군주가 농마(馬 : 말을 애호함)로 인해 곤경에 빠지고 나라와 군신들을 버리게되었습니다. 청컨대 저희들이 말을 키우는 자를 도와 장차 말을 배상할 수 있도록해주기 바랍니다. 그리되면 두 마리의 숙상마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은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당성공이 이같이 후회했다.
"이는 모두 과인의 잘못이었소. 그대들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그들에게 두루 상을 내렸다.

"채군(蔡君)이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머문 것은 그대들이 전별의 예물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예물이 완비되지 못할 경우 그대들을 사형에 처할 것이다."
이에 채소공이 귀국하게 되었다. 채소공이 귀국 도중 한수에 이르러 옥을 꺼내 강물에 내던지며 맹서했다.
"내가 다시 이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 대천(大川)이 내 다짐의 증거가

될 것이다."
얼마 후 채소공이 진나라로 가 아들 원(元)과 대부의 자제들을 인질로 바치면서 초나라 공벌을 청했다.

초소왕이 수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 구원병을 청하면서이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봉시(封: 덩치 큰 멧돼지)와 장사(長蛇큰뱀처럼 욕심을 부려 중원의 제후국들을 천식(食: 병탄)하고 있으니 초나라가 가장 먼저 그 침해(害)를 입었습니다. 과군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현재 재초망(越在草: 원래는 잡초가 우거진 곳으로 몸을 옮긴다는 뜻으로 민간의 궁벽지로 피해 다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에 과군이 하신을 시켜 고급(告急)하게 하기를, ‘이덕무염(夷德無厭: 오랑캐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뜻으로 夷는 오나라, 德은 탐욕, 厭은 만족을 의미)하니 만일 오나라가 초나라를 점령해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 진나

라의 변경도 그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나라가 아직 우리 초나라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을 타 즉시 출병하여 초나라 땅의 일부를 점거하십시오. 만일초나라가 멸망하면 그 땅은 곧 군주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만일 군령(君: 군주의 은덕)에 기대어 초나라를 무사히 안정시키게 되면 초나라는 반드시 대를 이어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애공(아들)은 사람을 보내 완곡한 어조로 이같이 사절景公의하게 했다.
"그대가 걸사(師)하는 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대는 우선 잠시 객관으로 가쉬도록 하오. 우리가 잘 생각한 뒤 회답하도록 하겠소."
그러자 신포서가 이같이 말했다.
"과군은 월재초망 중이어서 안신(身)할 곳조차 찾지 못한 형편입니다. 어찌 감히하신인 제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궁정 담장에 기대어 밤낮으로 통곡하며 작음(飮: 물 한모금)조차 입에 넣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7일 동안 계속되자 이에 감동한 진애공이 <시경> <진풍·무의(無衣참전 용사를 칭송하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그러자 신포서가 진애공에게 9돈수(九首:아홉 번 머리를 땅에 댄 채 조아리며 극도의 사의를 표시함)한 뒤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진나라 군사가 드디어 출병하게 되었다.

이때 초나라 대부 자기가 균 땅에 화공을 펴려고 하자 자서가 만류했다.
"작년에 오초 양군이 교전할 때 전사한 초나라 부형의 친속들이 아직 균 땅에 폭골(暴骨:뼈가 들판에 나뒹굴고 있음)되어 있소. 우리는 이를 수습조차 못하고 있는데 또 이곳에 불을 질러 뼈까지 태우려 하니 이는 안 될 일이오."
그러자 자기가 반박했다.
"나라가 장차 망할 지경이오. 만일 우리의 부형의 친속들이 죽은 뒤에도 지각이 있다면 적을 이겨야만 흠구사 : 자손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는다는 뜻으로 ‘흠’은 ‘후‘, ‘구사‘는 전래의 제사를 의미)할 수 있게 되니 어찌 불에 타는 것을 두려워하겠소."
그러고는 곧 불을 지르면서 오나라 군사와 싸웠다. 이에 오나라 군사가 패하게 되었다.

"대덕(大德)을 베풀고자 하면 응당 소원(怨 작은 원한)은 괘념치 말아야 하오.
이것이 옳은 도리요."
그러자 신포서가 주위 사람에게 이같이 말했다.
"내가 진나라에 걸사(師)한 것은 군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내가 상을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군주의 자리가 안정되었으니 내가 더 이상 무엇을바랄 것인가. 게다가 나는 전에 자기(子: 투성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어찌 내가 그와 똑같은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초소왕이 내리는 상을 받지 않으려고 몸을 피했다.

"양호는 노나라에서 계손씨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오히려 계손씨를 죽이려 했고, 이제 또 노나라를 불리하게 만들려고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유한 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어진 사람은 멀리하는데 군주는 어찌하여 그를 쓰려는 것입니까. 군주가 계손씨보다 부유하고 제나라가 노나라보다 강대하자 양호는 이를 뒤엎으려는 것입니다. 노나라는 이제 그의해를 면하게 되었는데 군주가 오히려 그를 거두게 되면 장차 그 해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제경공이 양호를 체포해 동쪽 변경에 수금하려 하자 양호는 스스로 동쪽 변경으로 가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자 제나라에서는 오히려 그를 서쪽 변경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읍내 사람의 수레를 모두 빌려 계축(軸:바퀴의 축을 칼로 깎아 망가뜨림)한 뒤 이를 삼끈으로 묶어 돌려주었다. 이어 총령(옷가지를 싣는 수레에다 짐을 가득 실은 뒤 짐 속에 몸을 숨겨 달아났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이 곧바로 그를 추격해 잡아서는 제나라 도성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다시 총령에 몸을 숨겨 마침내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진나라로 가 조씨趙氏조간자)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를 두고 중니가 말했다.
"장차 조씨 집안에 대대로 화란이 있을 것이다."

위나라 군사가 회군할 때 대부 활라(羅)가 전군교郊 :(殿軍:후군)이 되었다. 그러나 조나라 국경을 넘어서기 전에 활라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어자가 이같이 말했다.
"후군이 되어 대열 속에 있으면 어찌 용기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활라가 이같이 대답했다.
"소려(素厲:헛된 勇名)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무용(無勇: 용기가 없음)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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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0 - 3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0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0권을 읽으면서 머릿 속을 비집고 들어온 역사적 배경은 다름 아닌 '물산장려운동'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의 중요성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일까.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것쯤으로 간단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헌데 토지 10권에서는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시각과 방향이 당시 무산자 계급 운동과 맞물려 있었던 만큼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이상현과 선우일은 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물산장려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 한한 것이야? (...) 인도식이다, 중국식이다, 남의 형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에게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겠느냐, 그 말이야. 중국과 다르다 하며 반대하는 놈들, 별 무소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설사 일본놈 자본에 눌리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가정하더라도 3.1운동 이후, 이 시기에, 어떻게 일으킨 불꽃인데? 그걸 끄려고 덤비는 놈들은 다 반역자다! 몇 사람의 기업가가 돈 좀 벌게 된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구. 새 발의 피라구. 그걸 못 새겨서, 아 그래 초가삼간 타는 것보다 빈대 타 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심보 아니고 뭐겠냐 말이야. 일본놈이건 조선놈이건 착취당하기론 마찬가지라구. 길가에 쫓겨 나앉아서 집 찾을 생각은 않고 싸움질하는 꼴밖에 더 되겠느냐 말이다. 계급투쟁을 나쁘다 하는 게 아니야. 계급투쟁 그 자체도 투쟁대상은 일본이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엔 말이야."
"(...)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비난을 퍼붓는 이곳 좌파 과격분자들의 이론과 의돈형님의 이론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형님 말씀이 영세한 자본, 불리한 조건으로 풍부한 자본, 유리한 조건, 그리고 뿌리를 깊이 내린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존립하는 것조차 그들 뜻대론데 자본이 최소한도 유통을 유지하려면 노동자들 임금에서 재주부릴밖에 달리 길이 있겠느냐는 거지. 일본인 업체나 일본인에게 고용되면 일자리 잘 얻었다 하는 것이 일반의 인심 아니야? 왜냐, 든든하고 조선인들보다 임금이 후한 때문이 아니겠어? 일자리는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고 결국 남아나는 노동력은 임금이 싸도 흡수되게 마련인데, 불평불만은 싼 곳에 있지. 비싼 곳은 적어도 싼 곳이 쓰러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 아냐? 장차 노사문제로 혼란을 겪게 될 때 제일 먼저 칼끝에 올려지는 것이 조선인 기업가인 것은 뻔한 일이지. 그러니 몇 사람을 살찌우는 대신 그들은 일본자본가의 방패로 삼는 동시 민족분열의 원천도 될 수 있다는, 나는 의돈형님이 말한 중에서 이 한가지만은 경청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착취하는 데 일본놈 조선놈 다를 것이 없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란 말이야. 일본이 지금 사회주의의 물결을 두려워하고 골머릴 썩이는 것도 사실이지." (P332~335)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여파로 유화 정책(물론 기만이지만?)으로 정책을 전환한다.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고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철폐문제가 가시화되자 한국인 자본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은 같아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홍보가 진행, 확산되며 물산장려운동은 대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우리 손으로 만든 제품을 쓰자는 운동은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었던 만큼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측면이 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923년 이후 물산장려운동은 쇠퇴하는 흐름을 보인다. 한국인 지주들은 물산장려운동 초반만 해도 그것이 자신의 밥그릇을 지켜줄 수 있다 생각했지만 일본 자본에 비해 규모나 기술 면으로 취약했던 국내 자본은 수요를 따라갈 생산력과 기반을 애초에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가와 상인은 수요를 맞추어야 했던 데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값을 터무니 없이 올리기도 하면서 국내 경제는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또 이 때 러시아 혁명 이후 국내에도 공산주의 비밀결사 단체들이 속속들이 만들어지는 상태였다.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조선은 현재 일본 제국주의이자 자본주의의 노예이기 때문에 이를 깨부수어야만 민족 해방 및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다 주장했다. 이들 중 일부는 물산장려운동이 자본가와 중산층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기심을 조장한다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던 것이다.

3.1운동으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반향은 컸다. 이로 인해 상해 임시정부가 생겨났으나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구를 비롯하여 각종 파들의 내분과 갈등으로 체계적인 정부 운영 및 독립 운동 지원이 이어지지 못했다. 또 러시아에 가 있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코민테른에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공산당 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로 나누어 대립하였고 거기에 러시아 내전(볼셰비키 적군 VS 민족주의 백군)에 일본군이 참여하여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이 발생하면서 그 곳에서도 더 이상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국내에서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 변경으로 일부 지식인들 중 개량주의자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친일의 길을 걷는 사람이 생겨났다.


10권에 특히나 마음이 아팠던 것은 야무네와 딸인 푸건의 이야기였다. 시집 가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자신이 들어와서 남편이 아프게 되었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너무하지 않나. 또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된 홍이와 명희도 있었다.
수녀가 되었어야 했나 생각하던 명희도 마음이 아팠고 끝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앉은 홍이와 장이도 있었다.

'어째서 우리 조선여자들은 결혼 못하는 것을 그렇게 수치스럽게 여기는 걸까. 독신주의를 이단시하며 모멸과 조롱으로 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몽달귀신이니 처녀귀신이들 하고 사후까지 액신으로 처우하는 것은 결국 독신자를 사악한 존재로 보기 때문일 게야. 중을 보고 흔히 중놈이라 하는 것도 독신자를 경멸하는 의식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P456)

"저는 저 나름대로 복음전도에 있어서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는가 많이 생각해보았고, 또 체험에서 얻어진 것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애국사상과 복음을 함께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간벽촌에 있어서 기독교란 아주 생소하고 서양사람 종교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미신적으로 믿어지는 불교며 무당들, 점쟁이를 통한 귀신신앙도 뿌리깊은 것입니다. 유교에서 오는 조상숭배도 그렇고요. 그러나 아무리 몽매무지한 사람에게도 내 나라를 잃었다,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심정적으로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조선에 있어서 독립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전도정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P460)

종교는 인간을 향한 구원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사회 개혁을 위한 목소리는 낼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여옥이 말했던 것처럼 종교가 개인의 구원만을 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나라는 뺏겼는데 신에게 빌어 자신만 구원받으면 무얼 하겠나?

당시 종교계에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친일에 몸담은 자들도 많았기에 뼈아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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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1-19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독립운동가도 있고 친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거겠죠 그래도 종교인은 좀 낫기를 바라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19 09:01   좋아요 0 | URL
종교 노선들도 분열과 갈등이 존재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종교로 인하여 여전히 세계는 갈등 중이잖아요. 당시에도 기독교 내부에서 폭력 노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나라가 이 모양인데 종교인이라고 신에게 귀의하는 전도 운동만으로 되겠느냐, 그런 독립운동을 하는 대중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구요.

독서괭 2023-01-19 04: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부분 들으면서 물산장려운동, 화가님이 나중에 써주시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반갑습니다😆 이리저리 복잡한 역사적 상황들이 펼쳐지는데 운전하며 듣다보니 가끔 흐름을 놓치기도 하고;; 그냥 박경리선생님의 깊은 공부와 입체적인 논쟁 묘사에 감탄할 뿐입니다.
저도 아무네 너무 맘 아팠어요 ㅠㅠㅠㅠ 그 시대 딸 가진 어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에효 ㅠㅠ
덕분에 역사 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3-01-19 09:01   좋아요 2 | URL
읽으면 바로 써야 하는데 한 번 놓치니까 계속 지나가게 되더라구요. 저도 이번 편은 꼭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썼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뻐요^^
저도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에 감탄하고 놀라곤 합니다. 들으면서도 소름이 돋을 때가 몇 번씩 있어요. 어쩌면 그렇게 그 시대를 살다간 인물을 마치 지금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처럼 적어놓으셨을까 싶은 생각이요. 덕분에 저도 역사, 사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진짜 푸건이 시어머니 너무했어요ㅜㅜ 자기 자식만 소중한지 쩝! 저도 감사합니다.
 

【庚戌】四年張儀說楚王曰夫爲從者 無以異於驅群羊而攻猛虎不格明矣今王不事秦秦劫韓驅梁而攻楚則楚危矣楚王許之張儀遂之韓說韓王曰夫戰孟賁烏獲之士以攻不服之弱國無異垂千勻之重於鳥卵之上必無幸矣大王不事秦秦下甲據宜陽塞成皐則王之國分矣爲大王計莫如事秦而攻楚韓王許之張儀歸報秦王復使東說齊王曰從人說大王者必曰齊蔽於三晉地廣兵彊雖有百秦將無奈齊何今秦楚嫁女娶婦爲昆弟之國韓獻宜陽梁效河外趙王入朝 割河間以事秦 大王不事秦秦驅韓梁趙攻之雖欲事秦不可得也齊王許之
張儀去西說趙王曰大王收率天下以擯秦秦兵不敢出函谷關十五年大王之威行於山東今楚與秦爲昆弟之國而韓梁稱東藩之臣齊獻魚鹽之地此斷趙之右肩也夫斷右肩而與之鬪失其黨而孤居求欲無危 得乎爲大王計莫如與秦王面約常爲兄弟之國趙王許之張儀乃北說燕王曰大王不事秦秦下甲雲中九原驅趙而攻燕則易水長城非大王之有也燕王請獻常山之尾五城以和 張儀歸報未至咸陽秦惠王薨子武王立武王自爲太子時不說(悅)張儀及卽位群臣多毁短之諸侯聞儀與秦王有隙皆畔(叛)衡復合從

【辛亥】五年張儀相魏一歲卒儀與蘇秦皆以縱橫之術遊諸侯致位富貴天下爭慕效之又有魏人公孫衍者號曰犀首亦以談說顯名其餘蘇代蘇厲周最樓緩之徒紛紜徧於天下務以辯詐相高不可勝紀 而儀秦衍最著

장의의 연횡 정책을 위한 설득은 4국에 이어서 조나라, 연나라까지 이어진다. 이들 제후국은 진에 토지 등 물자를 바치면서 화친을 청하게 된다.
합종을 마무리하고 장의가 진으로 이제 돌아가려는 찰나 아직 함양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진나라 왕이 죽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태자가 무왕으로 즉위한 후(본래 장의를 좋아하지 않았음) 장의에게 대신들이 때맞춰 험담을 한다. 6국의 제후들은 둘 사이에 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는 합종으로 정책을 돌아가게 된다(장의가 힘써온 연횡 정책은 이렇게 흐지부지된다).

본문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이 때문에 장의는 진나라에서 설 길이 없어진다. 때문에 장의는 무왕에게 진나라를 위해서 힘써보겠다는 의견을 표시하면서 위나라로 간다(제나라 군대를 위나라로 끌어들여서 나라 간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면서 제나라 군대를 출동시킬 것이다. -> 제나라는 자신을 싫어하니 내가 간 곳으로 제나라에서 위나라로 군대를 반드시 출동시킬 것이다.). 장의는 위나라 제후를 설득하면서 본인의 계획대로 제나라에 군사를 물리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장의는 자신의 가신을 초나라로 몰래 보내면서 초나라에서 정식으로 사신을 보낸 것처럼 위장한다. 사신 노릇을 한 가신은 초나라에 가서 제나라는 너무 장의를 잘 도와주고 있다라고 말을 건넨다(장의의 계획대로 진나라에서는 장의의 실력을 믿게 되었다고). 이 때문에 제나라에서는 군대를 물리게 된다.

위기에서 벗어난 장의였으나 위나라에서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죽고 만다.

이 시기 설득의 대가는 소진, 장의, 공손연(서수) 세 명이 자타공인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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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三年燕人共立太子平是爲昭王昭王於破燕之後卽位弔死問孤與百姓同甘苦卑身厚幣 以招賢者謂郭隗曰齊因孤之國亂而襲破燕孤極知燕小力少不足以報 然誠得賢士與共國以雪先王之恥孤之願也先生視可者得身事之郭隗曰古之人君有以千金 使涓人求千里馬者馬已死買其骨五百金而返君大怒涓人曰死馬且買之況生者乎 馬今至矣不期年 千里之馬至者三今王必欲致士先從隗始況賢於隗者 豈遠千里哉於是昭王爲隗改築宮而師事之於是士爭趣燕樂毅自魏往劇辛自趙往昭王以樂毅爲亞卿任以國政

곽외(郭隗)가 연 소왕에게 말하길 인재들을 부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부터 대우해준다면 자신보다 더 똑똑한 자도 연나라에 찾아올거라 말한다. 자신도 높이면서 인재를 모여들게 한 방법인데 소왕은 인재가 필요했으므로 곽외의 조언을 받들고 그를 위하여 집을 고쳐 지어주고 스승으로 섬긴다. 혼란스러웠던 연나라는 소왕의 정책으로 반짝 중흥한다. 역시 어떤 나라든 사람을 잘 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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