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통의 말은 곧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였다. 당시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은 혈투에 혈투 - P305

를 거듭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타격을 입어 힘이 약해졌다. 이 두 거두(巨頭)의 힘이 약화되면 제삼 세력이 진출하여 그들과 대등한 입장이 될가능성이 있었다. 제삼의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제의 왕이 된 한신뿐이었다. 당시 한신의 힘은 물론 두 거두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가 초에붙으면 초는 천하를 취할 수 있으며, 한은 그 없이는 패업을 이룰 수가없었다. 이런 그에게 괴통은 초에도 한에도 붙지 말고, 음천하를 삼분하여 정(鼎足, 다리가 셋인 정(鼎)에 비유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권했다.
그러나 한신은 한왕 유방의 은덕을 배신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괴통은,
용략(勇略)으로 주인을 떨게 하는 자는 몸이 위태로우며, 공이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
는 속담을 들려주었다. - P306

유방은 처음부터 함께한 부하들의 힘만으로는 천하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한신, 팽월, 경포세맹장이 필요했다.
한왕 신과 같은 지방 세력의 도움도 얻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단 천하를잡은 뒤에는 야심만만한 이들 맹장들에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고조는 결국 가장 간단한 방법, 즉 모반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씌워 주살하는 똑같은 패턴으로 그들을 정리했다. - P318

지금의 왕조가 멸망하면 자신들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주어진 지방을 열심히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지방, 즉 ‘제후국‘은 너무넓어서도 안 된다. 요소요소에 적당한 크기의 나라를 만들어 거기에 황족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한나라의 국책이었다. 물론 천하의 대부분은군현이었다. 군현제를 주로 하고 거기에 봉건제를 약간 가미한 절충적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군국제(郡國制)라고 한다.
한신이 강등된 뒤, 초를 둘로 나누어 회동(東)의 3군 53현에 형왕(荊王) 유가(劉賈)를 세웠으며, 설(薛), 동해(東海), 팽성(彭城) 336현에 초왕유문(文)을 세웠다. 제후국을 가능한 한 작게 하려 했다.
※ 이들 나라에는 각각 상(相, 승상)을 비롯하여 중앙 정부 관료기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했다. 독립성이 매우 강해서 한 제국은후에 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게 된다. 제왕은 당연히 그 나라에 머물면서 가끔 입조(상경)하게 되어 있었다.
황실의 번병이기 때문에 왕의 나라도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그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황제뿐이었다. 또 나라의 상(相) 등도 중앙 정부가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제도상으로는독립 왕국이 되어 중앙에서 이탈할 수 없는 구조였다. - P323

여태후는 차근차근 여 씨 일족의 천하를 구축해 나갔다. 무력 이외에정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 조왕인 여록을 상장군으로삼아 북군을 지휘토록 했으며, 여왕(王)인 여산으로 하여금 남군을 통솔케 했다. 조왕과 여왕양(梁)을 개명하여 여라 칭했다)은 영국(國)이 있으면서도 그곳으로는 부임하지 않고 장안에서 군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여태후가 있었기에 여 씨 일족이 득세할 수 있었다. 혜제가 재위했던 8년 동안을 포함해서 여태후가 집권한 것은 거의 15년 동안이었다. 여후 일족의 천하는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혜제의 죽음이후 명목상의 황제는 있었지만, 여태후가 만들어 낸 가짜였기 때문에사가들은 이 15년 동안의 후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한 끝에 고후(高后) 몇 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P358

살아남은 역전의 호걸들이 어째서 여 씨 일족의 전횡을 용납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자. 가장 큰 이유는 여 씨일족 진영에는 그리 대단한 인재가 없었기에 그들의 전횡도 어차피 여태후가 죽고 나면 끝이라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나이 많은 여태후의 죽음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 P360

삼족죄와 요언령 등은 법률지상주의, 엄벌주의였던 진나라 제도의 잔재와도 같은 것이었다. 진나라의 색채가 점차 사라지면서 그것이 백성의휴식에도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 두 개의 악법이 폐지되었을 때, 특히 그것이 혜제의 유지강조되었다.
혜제 유영은 나약하기는 했지만 인도주의자 휴머니스트였다. ‘혜‘라는시호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가 유약했기 때문에 여후가위험한 공신들의 숙청에 목숨을 걸다시피 열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 여후본기」속에서,
여민(黎民, 서민)은 전국(戰國)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군신(君臣) 모두 음가 무위하게 휴식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혜제는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고후는 여주(女主)로서 제(制, 칙서)를 칭하고, 정(政)은 방호(房戶, 후궁의 문)를 나서지 않아 천하가 평온했다. 형벌을 드물게 썼고, 죄인 역시 드물었으며, 산업에 힘써 의식은 더욱 늘었다.
라고 높이 평가했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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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설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
오며 가며 차가 많이 막혔고 설겆이의 홍수에 허리가 나갈 뻔 했으나 무사히 잘 넘기고 돌아온 것 같다.

최소 매달 하루는 휴일을 보내자 해서 오늘은 휴가를 내고 쉬고 있다.
사실은 다른 날 내고 싶었으나 오늘 저녁에 온라인 강연이 있는 바람에…
예전에는 오프라인 강연도 자주 갔었으나 이제는 사는 곳이 서울과 거리도 멀어지고 해서인지 온라인 강연만 찾게 된다.

아무튼 오늘 강연은 역사비평 141호 컨텐츠와 관련된 것이다.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라고 해야겠다. 강연에서 얻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역시 개인적으로 읽고 끝내는 것보다 교류 속에서 나오는 확장성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강연 때문에 부랴부랴 읽었는데 좀 더 일찍 읽고 정리하면 좋았을걸 싶다.

잃.시.찾 을 읽기 시작했다. 책에 흔적이 있는 걸 보면 과거 분명 읽었던 것일텐데 왜 기억에는 전혀 없을까. 그 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읽었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문장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다만 주석에 달려 있는 내용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고 있다. 그것까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침부터 이 곳은 눈이 많이 내렸다.
오늘 회사를 나갔다면 출퇴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은 그나마 그쳤는데 더 이상 오지 않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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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3-01-26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날엔 온라인 강의로 들어야 😄
오늘은 스노우 랜드
낼은 빙판길 ㅠㅠ
화가님 역사 수업 응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6 18:4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내일은 무조건 빙판길일 예감이죠? 그래도 내일만 나갔다 오면 주말이라는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스콧님 응원 감사해요^^

바람돌이 2023-01-26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밤에 부산에도 드디어 눈이 온대요. 1cm정도? 저런 눈은 낮에 내리면 절대 안쌓이고 날리고 끝이지만 밤에 내리면 아마 아침에는 쌓여 있을 듯요. 내일 부산분들 출근길이 지옥길이 될테지만 그래도 눈온다니 좋은 이 마음은 부산 울산쪽 사람들만이 가지는 마음이겠죠. ㅎㅎ
시민을 위한 한국사 2권을 샀는데 책이 두꺼운건 알고 있었지만 판형이 커서 와 진짜 장난 아닌 벽돌책이 왔어요. 아 이거 언제 읽나하면서 2권 다 읽으신 화가님 생각 했어요. ㅎㅎ(물론 땡투도 했어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3-01-26 21:13   좋아요 1 | URL
부산에도 눈이 오는군요^^ 여기는 눈이 녹으니 또 눈이 와서...ㅎㅎ 쌓이지 않았으면 했으나 굵은 눈발로 내린데다 양도 제법, 날이 추워서 쌓여서 얼었네요. 내일도 어김없이 빙판길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남쪽 지방에 눈이 왔을 때 제설 장비가 잘 안 갖춰져 있어서 시민들 출퇴근길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요. 모쪼록 내일 나가신다면 조심해서 다니시길!ㅎㅎ
시민의 한국사 두툼하죠. 커버 재질 때문인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재미나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땡투도 감사하구요^^*

2023-01-26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6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1-28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연휴에 설거지 많이 하셨군요 그때가 지나갔네요 큰 명절 하나... 명절 지나고 하루 쉬셔서 다행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바로 듣는 것도 좋지만, 추울 때는 온라인 강연도 괜찮겠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23년에 다 만나시기 바랍니다 2023년이 끝날 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만난 거리의화가 님이 되시겠네요

거리의화가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28 20:07   좋아요 0 | URL
네. 요리를 못해서 음식을 해도 도움이 안되고 해서 결국 설겆이 담당이 되네요^^; 식구들이 많다보니 음식의 양이 많고 그러다 보니 설겆이 양도 같이 늘어나는게 힘듦이라면 힘듦일까. 명절 바로 다음날 쉬지 않고 그 다음날 쉬는 것도 괜찮던데요?ㅎㅎ
올해 마무리할 때쯤 되었을 때 잃.시.찾 완독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좀 설렙니다!
감사해요 희선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부국강병 경쟁으로 각국은 앞다투어 유능한 인물을 등용했으며 정치개혁을 꾀했다. 그러나 가장 유효한 정치개혁을 단행한 것은 서쪽의 진(秦)나라였다.
진나라는 동주(東周)가 된 뒤에 비로소 제후에 봉해진 새로운 국가였다. 삼진(三晋)과 전제(齊)는 찬탈 정권이기는 했지만, 나라 자체는 오래되었으며 예전의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계승했다. 여러 가지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한 개혁도 마음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진나라는 고려해야 할 오래된 관습도 없었고, 개혁에 대한 반발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비교적 적었다. - P87

무령왕은 감정의 기복이 격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미인 맹요를 얻자그녀와 함께 틀어박혀 몇 년 동안이나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정열적인 사람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이른바 ‘호복기사‘를 도입해 조나라 군제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 것은 그것의 좋은 면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애정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데 정열적인 사람의 비극이 있었다. 그의 격렬한 감정의 기복은 왕족과 중신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이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후 조나라는 염파(廉), 인상여(如) 등과 같은 현명하고 재능있는 사(士)를 배출했기에 무령왕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진다. - P106

전국사군에게서는 ‘협(俠)‘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임협은 미묘한 차이로 난폭함이 되기도 하고 무뢰함이 되기도 한다. 맹상군이 ‘계명구도‘
무리들의 도움으로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돌아가던 도중, 조나라의 평원군에게 들렀을 때 길가에 있던 사람이 "뭐야, 소인배잖아"라고 말하자,
화를 내며 주위에 있던 수백 명을 죽이고 한 현(縣)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은 폭력집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왕의 밑에 있었던 사군은 행동대원이나 자객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있으면서 왕의 이름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왕의 별동대 같기도하고, 때로는 그 세력에서는 왕을 능가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경우도있었다. - P114

초나라의 회왕은 굴원의 반대파들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친진 정책을 취하기로 했다. 굴원은 왜 그것을 막지 못했을까? 그렇게도 표현력이 풍부했던 그가 왕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상관대부인 근상이나 자란(蘭) 등과 같은 반대파 사람들이 굴원보다더 뛰어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 뒤에 무시무시할 정도의 책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책사에게 놀아났던것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장의(張儀)라는 괴물이 있었다.
전국 시대에 제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유세하던 책사들을 ‘종횡가(縱橫家)‘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 때부터 이런 부류의 유세외교가들이 있었는데, 고전을 인용하여 의(義)를 주장하고 예(禮)를 주장했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오로지 이해(利害)에 관한 것만을 주장했다.
장의는 전국의 종횡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32

변설가에 대한 사마천의 비평은 상당히 가혹한 편이다. 『사기』는 오기에 대해서,
각폭(刻暴, 각박하고 잔혹함) 소은(少恩, 인정이 없음)함으로 자신의몸을 망쳤다. 슬프다.
어라고 기록했고 상앙에 대해서는,
상군(商君)은 천자(天資, 타고난 자질)가 각박한 사람이다.
라고 평했으며 소진과 장의를 묶어,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참으로 경위(傾危, 위험한 사(士)이다.
라고 단정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매우 감탄을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귈 수는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P150

천하가 통일되어 하나의 커다란 강국이 태어나는 것이 과연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일까? 모략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프리오리(설명이 필요 없는 선험적 원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사람들이 있었다. 때때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노장사상(老莊思想)이었다. - P151

순자는 진나라가 왕자(王者)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판단했다. 다른 6개국보다는 뛰어나지만 순자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왕도는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진나라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순자는,
대부분에 유(儒)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추론했다.
보기에 모든 것은 훌륭하지만, 거기에 하나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없었다. 유가에 속한 순자에게 있어서 그 중심이란 유(儒)의 정신이었다.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 P196

유자는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다. 한비가 보기에 이는 말로써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협자는 힘으로 억지를 부린다. 이는 무로 금을 범하는것으로 양쪽 모두 절대적이어야 할 ‘법‘에 위반되는 것이다. 무례한 무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사람들은 유자(儒者)와 협객(俠客)을 앞다투어 예우한다는 것이다. 식객이 3천 명이라 일컬어졌던 전국사군의 빈객들도 대부분 유자나 협자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군주는 비생산적이고국가의 근본인 법에 반하는 무례한 자들을 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한비는 주장했다.
시황제의 입맛에 꼭 맞는 학설이었다. 후에 나타나는 시황제의 반유가적 행동은 한비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208

지금은 위청과 곽거병의 인물됨을 비교하는 자리다. 위청은 부하에게자비롭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전장에서 그들을 토개처럼 부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곽거병은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틀림없이 부하를 토개처럼 부렸을것이다.
무제가 보기에는 곽거병이 더 믿음직했을 것이다. - P259

진승이 왕위에 머문 것은 겨우 6개월에 불과했다. 그 전까지는 징용된일개 병사였는지 인부였는지도 잘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새로운 시대의 막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진승이 먼저 일어난뒤 항우가 나타났으며, 다시 유방이 나타나 역사가 바뀌었다. TOUS한나라의 천하가 된 뒤, 진승 무덤 가까이에 그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른 집이 배치되었으며 제사가 계속 올려졌다.
당시의 상태로 봐서 진나라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그때 진승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나라가 진나라의 후계자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 10년만 더 늦었더라도 유방은 나이 때문에천하를 다투지 못했을 것이다. 진승이 거병했을 때, 유방은 채 마흔이 되지 않은 가장 좋은 연령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진승은 한 왕조의 은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270

소수정예의 부대만을 거느린 항우는 양면전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항우의 약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소수정예이기 때문에 전쟁이 오래지속되면 어려움을 겪었다. 정병은 그렇게 간단히 보충할 수 있는 것이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은 줄어든다. 게다가 본거지의 생산력이 약했기 때문에 보급에도 문제가 있었다.
유방 자신은 연전연패였지만, 우군(軍)인 한신이 제를 평정하고 남하를 시작하여 초를 위협하고 있었다. 팽월(彭越)은 활발하게 게릴라전을전개했다. 그리고 보급에 대해서는 소하라는 그 방면의 천재가 있었으므로 유방은 그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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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四十五年魏人范雎亡入秦說秦王曰以秦國之大士卒之勇以治諸侯譬如走韓盧而搏蹇兎也而閉關十五年不敢窺兵於山東者是穰侯爲秦謀不忠而大王之計 亦有所失也王跽曰願聞失計睢曰夫穰侯越韓魏而攻齊非計也今王不如遠交而近攻得寸則王之寸也得尺則王之尺也今夫韓魏中國之處而天下之樞也王若欲霸必親中國以爲天下樞以威楚趙楚趙皆附齊必懼矣齊附則韓魏因可虜也王曰善乃以范睢爲客卿與謀國事

위나라 사람 범저가 진나라에 가서 진앙에게 유세하기를 진국의 강대함과 사졸의 용맹함을 가지고 다른 제후들을 다스리는 것이 비유하자면 한로(사냥개의 이름)를 달리게 하여 절름발이 토끼를 잡는 것과 같거늘 관문을 닫은지 15년에 감히 산동에서 병사를 엿볼 수 없었던 것은 양후(진나라 재상)가 진나라를 위하여 계획하는 것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그런 재상을 둔 왕도 잘못된 계책을 부려서 그런 것이다.
양후가 말한 한, 위나라를 넘어서 제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왕께서는 원교근공(먼 곳에 있는 나라하고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펼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한, 위나라는 대륙에 한 가운데 있고 천하의 중심이니 그 나라들을 가까이 하여 초, 조나라를 위협한다면 그들이 따르게 될 것이니 제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제나라가 따르게 되면 한, 위나라도 사로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범저의 말을 듣고 그를 객경으로 삼아 나라 일을 함께 도모하게 하였다.

수가의 부하였던 범저. 제나라로 사신으로 갔던 범저. 사신의 임무를 못하고 있던 수가, 범저에게 눈독을 들였던 제나라. 돌아와서는 범저를 초주검이 될 정도로 때려서 방치. 지키던 수하를 꼬여서 탈출하여 진나라로 간 범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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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등과 같은 기마민족이 ‘철의 문화‘를 각지에 전파한 사실은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철에 기마민족의 그림자가 그렇게 짙게드리워지지는 않은 듯하다. 만약 기마민족이 철을 전파했다면 중국의 철의 고향은 북방이 될 터였지만, 실제로는 오, 월, 초등 남방이 철의 선진지역이었다.
세계에서 철의 고향이 오리엔트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그 제조방법은 단철법(鍛鐵法)이었다. 두드려서 불리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철은 처음부터 주철법(鑄鐵法)으로 만들어졌다. 유럽에서 주철법이 시작된 것은 중세(14세기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 P32

춘추 시대의 제후는 주나라로부터 토지를 받은 봉건영주들이었다. 농업기술의 진보로 새로이 토지를 개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주나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 내었다.
새로이 개간된 땅은 영지의 변경이었을 테니, 영주 스스로가 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신하들의 일이었다. 명령을 받아 하는경우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이익을 가져다줄 새로운 토지가 생기는 일은 담당한 가신의 공적이니 그들이 권리를주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후를 섬기는 유력한 신하들이 더욱 유력해져서 드디어는 군주를 능가하게까지 되었다. 이것이 전국 시대의 양상이었다. - P33

위나라의 문후 밑에 모인 사람들은 자하를 비롯하여 유 - P48

가 출신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승 격인 세 사람을 제외하면, 유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유가 출신자답지 않은 사람들이많았던 듯하다. 예를 들어서 오기는 증자의 문하생이었지만, 그의 품행을 살펴보면 유가적인 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유가에서 파문을 당했다. 누가 분류를 하더라도 오기는 병가(兵家)라고 할 수밖에 없다.
법률, 경제, 산업에 열성적인 것은 법가(法家)라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이극과 서문표는 유가인 자하의 문하생이었지만, 그 업적을 보면 법가라고 분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은 전향한 사람들이었다.
위나라의 문후가 구한 것은 부국강병에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실무가였다. 먼저 몸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가는 눈앞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다. 문후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들은 전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 전향을 한 사람이 아니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나라 직하의 학사들은 위나라 문후 밑에 모였던 무리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실무가가 아니었다. - P49

직하의 백가쟁명 시대는 중국의 학문, 사상의 황금시대였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논쟁으로 인해서 학문과 사상은 한층 더 깊어졌으며, 또 새로운 것도 태어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나라 위왕과 선왕의 공적은 침략 당했던 땅을 되찾고 제나라의 위광을 천하에 알린 것보다 직하에 학자를 모아 놓고 백가쟁명을 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할것이다. - P58

이 두 사람은 서로 양극에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맹자는 인간의 성(性)은 원래 선한 것이며, 악해지는것은 후천적인 환경이나 습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배제하면 인의(仁義)가 나타나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순자는 후천적인 것이야말로 선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원래 악인 인간을 개조하면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순자가 후천적인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유가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禮)‘가 있었다. 성선설에 따르자면, 자연 그대로 두는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데도 성인은 어째서 ‘예‘를 정한 것일까? 예는 인위적인 것이다. 성인은 틀림없이 인간을 자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예를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은 원래 악한 것이 되는 셈이다. 이것이 성악설의 기본 사상으로 순자가 얼마나 예를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 P74

맹자는양과 묵의 도가 끊기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탄했다.
지금 우리들은 도가라고 하면 노자와 장자의 이름을 떠올리지만, 맹자 시절에는 양주가 대표자였다. 하지만 이 사람의 저서도 전기도 남아있지 않다. 『맹자』나 『한비자』, 또는 『열자(列子』 등에 흩어져 있는 글을통해서 그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노자의 제자였다고도 하며 실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양주에 대한 것으로는 『맹자』 「진심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유명하다.
양자양주는 자신을 위해서 행동을 취한다.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할지라도 하지 않는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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