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의 목적은 명마를 얻는 데 있었다. 국방력의 중요한 부분을 말에의존하고 있던 시대이니 무제가 명마를 원했던 것은 한나라의 주인으로서 당연했다. 그러나 무제가 개인적으로 말을 좋아했다는 이유도 이 원정에 영향을 주었다.
장건의 서역 여행으로 인해 한나라와 서역 간의 길이 열려 교역도 점차로 활발해졌다. 대완으로부터의 주요한 수입품은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가장 좋은 말은 이사성이라는 곳에 숨겨 두고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무제가 사절을 보내 이사성의 말을 청해봤지만, 대완의 왕은 이를 거절 - P486

했다. 이때 한나라의 사절이 욕을 하며 비난을 하는 등 그 태도가 매우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나라의 사절은 돌아오는 길에 욱성성(郁成城)이라는 곳에서 대완 군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대완 원정의 원인이었다. - P487

"무릇 주나라 문왕은 사로잡혀서 『주역(周易)』을 풀었고, 공자는 재액을 만나 『춘추』를 지었고, 굴원은 방축(放逐)되었기에 <이소>미를 지었고, 좌(左丘)가 실명하였기에 『국어』가 있으며, 손자는 다리를 잘렸기에 『병법(兵法)』을 편찬했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었기에 세상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한비가 진에 사로잡혔기에 <설난(說難)>, <고분(孤憤)>(『한비자』를 말함)이 있고, 시 300편은 무릇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만들어 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뜻한 것에 막힘이 있어 그 길이 통하지 못했기에 옛일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생각했다." - P499

무제가 황태자 거에 대해서 약간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황실에가까운 사람이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황태자의 됨됨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기질적으로 아버지인 무제와 맞지 않은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안세에 의한 무고의 대옥은 제1차 무고의 난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정화 원년이었으며, 공손하의 일족 및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이듬해인 2년의 일이었다. 같은 해에 제2차 무고의 난이일어 그 화가 마침내 황태자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 P509

참으로 강충은 피에 굶주린 괴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전공작을펼친 뒤에 궁중에도 ‘고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올리게 했다. 후궁 여성들의 거처, 황후, 태자의 궁전을 파헤치자 나무 인형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의 궁전에서 나온 인형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황태자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지금까지 강충이해 온 방법으로 봐서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죄를 모면할 수가 없었다. 쿠데타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가신이 사자라고 속여 강충을 체포해, 황태자 앞으로 끌고갔다.
조려(趙慮, 조나라 놈), 전에는 네 녀석의 국왕 부자를 어지럽히더니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우리 부자까지 어지럽힐 생각이냐?
황태자는 이렇게 호통을 치고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강충의 목을 치게 했다. 이것이 수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요물의 최후였다. - P512

황태자가 무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무제는 강충 일가를 전부 죽이고 환관 소문을 위수에 걸린 다리 위에서 불태워 죽였다. 호현에서 황태자에게 칼을 휘둘러 ‘의상(賞)‘이지만 열후가 된 자들은 그것을 물론박탈당하고 일가 몰살이라는 형을 받았다.
황태자의 무죄를 용감하게 상서한 전천추는 대홍(鴻臚, 외무부장관)로 승진되었으며 다시 승상에 기용되었다. 그는 무제에서 소제(昭시절에 걸쳐서 승상에 머문 햇수가 12년에 이르렀고, 나이가 들어서는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거승상(丞相)이라고 불렀다. 『한서』에는 거천추(秋)라고 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 P520

여덟 살인 불릉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딸린 식구가 적으니 강력한 ‘내조‘를 붙여 준다면 틀림없이 무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 - P525

문이다. 어른이 된 후계자, 예를 들어서 연왕인 유단 등은 연의 작은 궁정에 이미 자신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제가 되면 틀림없이 그무리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들어와 무제 체제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물론 어린 불릉에게는 아직 신하가 없었다. 무제 체제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불릉의 어머니인 권 부인은 하간의 비천한 계층 출신인데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의 모계 세력이 궁정으로 들어올 염려가 없었다. - P526

스물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소제재위 10여 년동안은 궁정 내의 권력투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컵 속의 폭풍에만 그치지 않고 국민의 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끼쳤다.
고조 유방이 제위에 오른 뒤부터 무제가 즉위하기까지의 60년 동안은무제 시대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제가 죽은 뒤전한이 멸망하기까지의 90년 동안은 무제의 여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무제 사망 직후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여운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궁정내의 권력투쟁은 여러 방면에서 일었는데 그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 P528

백성은 피폐했다. 거듭되는 외국 정벌 때문에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차출되어 전쟁터로 갔다. 커다란 건조물 조영을 위한 인부로도 징용되었다. 농민뿐만 아니라 상인과 운송업자도 일을 잃었다.
정부는 독점 기업이 되었고 그 폐해는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당연히사회 불안이 조성되었다. 각지에 도둑이 창궐했다. - P537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에는 상관걸 부자가 연왕과 손을 잡고곽광을 제거한 뒤 소제를 폐하고 연왕 단을 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이 들통 나서 일망타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곽광이 정적을 쓰러뜨리고 연왕의 야망을 꺾기 위해서 기선을 제압했을 가능성도 있다. 상관 일가는 황후이자 곽광의 외손녀이기도 한 어린 여자 한 사람만을 남겨 놓고 전부 주살당하고 말았다.
연왕 단은 천자의 새서(書)를 받고 원통하게 자살을 했으며, 후에 부인 등 연왕을 따라서 죽은 자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어사대부인 상홍양도 주살당했다. 상홍양은 외조의대표자로서 내조의 대표자인 곽광과 대립하고 있었다. 염철회의는 상황양에 대한 곽광의 첫번째 공격이었으며, 두 번째 공격은 상서(尙書천자에 대한 상주권(上奏權)을 가진 자의 직권으로 심복 양창(楊)을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한 일이었다. 대사농은 지금의 재무부 장관에 해당하는요직으로 상홍양이 부수상인 어사대부가 된 후에도 그것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곽광이 그 자리에 전임을 둔 것이었다. 정책적으로도 상황양과 곽광은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상홍양이 반 곽광 진영인 상관 부자에게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곽광이 그 일을 계기로구실을 만들어서 나이 든 정적을 말살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인해서 외조는 곽광이 기대한 대로 명목뿐인 사무실로 전락했다. - P542

민간에서 자란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백성을 구제하는 이른바 휼민(民)은 아마도 이상이었겠지만, 그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선제의 황태자이자 후에 원제(元帝)가 되는 유석은 유교에 지나치게경도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황제인 아버지에게 거듭 유가에 의한 국가 운영을 주장했지만 그에 대해서 선제는,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섞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대답했다.
선제의 정치는 그랬다. 소제에 이은 선제 시절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무제 55년간을 끼고 문제와 경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휴식의 시대였다. 무제 말기에 유민이 되었던 사람들도 다시 농민이 되었다. ‘무위로 화한다‘는 무리를 하지 않는 정치가 생산력을 회복시켰고 그것을 높였다.
그러나 이상적인 세상이 왕도만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선제는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민간에 있어 봤기 때문에 구제할 길이 없는 악당이나 도둑이나 변질자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협을 좋아하여 각지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일반서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치안의 유지라는 사실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 P554

왕망은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한나라가 시작된 이래생전에 공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경우는 없었다. 거기에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도 더해졌다. 주나라 성왕을 보좌했던 주공을 태재(太宰)라고 부르고, 은나라 탕왕을 보좌했던 이윤을 아형(阿衡)이라고 불렀는데, 그 두 - P562

사람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
머지않아 그는 스스로를 가황제(假皇帝)라 칭하고, 사람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평제의 후계자로는 선제 계열의 황족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린 자영(子嬰)이 선택되었다. 두 살짜리 젖먹이였다. 연호는 거섭(居攝)으로 삼았다.
이렇게 된 이상 왕망은 이미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는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거섭 3년(8), 왕망이 드디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천명이 내렸다는증거가 여기저기서 보고되어 올라왔지만, 이것은 물론 왕망이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조작해 낸 것이다.
그해 12월 1일을 시건국(國) 원년 정월 1일로 삼고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한나라는 이로써 멸망했다. - P563

왕망의 복고적 신정책은 전부 백성을 혼란시키고 외교를 정체 상태에빠뜨렸으므로,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왕망이 국책 헌법으로 삼은 것이 『주관』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주관』그 자체도 왕망이 창작했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고대에서부터 그와 같은 저작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왕망이 꾸며 냈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상서로운 조짐 등도 그가 만들어 내었다. 왕망의 덕을 칭송하는 자가 48만여 명에 이르렀다는 것 역시 그가 만들어 낸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태고의성천자가 시행한 제도를 기록했다는 『주관』도 그가 그렇게 말했을 뿐 의심스러운 것이다. - P566

한나라가 건국된 지도 이미 200년이 지나 있었다. 각지에 제후왕으로봉해졌던 사람들과 열후왕으로 봉해졌던 사람들의 자손이 결코 적지는않았다. 그들은 각지에서 호족이 되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호족에게 있어서도 왕망의 정책은 좋지 않았다. - P568

먹을 것만 주면 따라올악소년(少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악(惡)은간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말이다. 소년이란 젊은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광리의 대완 원정에도 수많은 악소년들이 종군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밥을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술도 마실 수 있었으니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모가 모은 것은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여든 악소년이 또 다른 친구를 불러들였기문에 그 수는 수천에 달했다.
한편 여모는 가진 돈을 아끼지 않고 무기를 사들여 결국에는 재산을전부 써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소망을 이루었다. 일당이 해곡현을 습격하여 현재를 잡아다 그 목을 베어 버렸다. 여모는 그 목을 자기 자식의무덤 앞에 바쳤다.
소망을 이루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그 무리들을 해산할 수는 없었다.
-> 적미군의 탄생 - P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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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력과 상상력의 결핍 탓에 쇄신의 원동력을 자신에게서 끌어낼 수 없는 사람들은, 앞으로 올 시간이나 초인종을 울릴 우편배달부가 설령 나쁜 소식일지언정 뭔가 새로운 것을, 어떤 감동이나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면 하고 바라며, 또는 한가한 하프 소리처럼행복이 침묵하게 한 감수성이 설령 난폭한 손에 그 줄이 끊어질지언정, 다시 한 번 울려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법이다. 또는욕망이나 고통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권리를 아주 어렵게획득한 의지는, 비록 아주 잔혹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런 급박한 사건들의 손아귀에 고삐를 맡기고 싶어 한다. - P206

숲은 이미 어둡고, 하늘은 아직 푸르도다.
"젊은이, 자네에게는 하늘이 항상 푸르기를 바라네. 그러면지금 내게 다가오는 이 시간처럼, 숲은 이미 어둡고 밤이 빨리 저무는 시간이 와도, 내가 지금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러듯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을걸세." - P214

내가 황홀감에 사로잡힐 때는 특히 아스파라거스를 마주할 때였다. 아스파라거스는 짙은 군청색과 분홍빛이 감돌아, 꼭지 부분이 벼이삭처럼 보랏빛과 하늘빛으로 어우러져 아래로 내려갈수록 ㅡ밭의 흙이 아직 묻어 있는 땅 색이 아닌 무지갯빛으로 아롱거리며 그 빛깔이 조금씩 연해져 간다. 이러한 천상의 빛깔은어떤 감미로운 존재들이 즐겨 채소로 변신해서는, 먹을 수 있는 단단한 살로 변장해, 해 뜰 무렵 여명의 색깔이나 짧은 무지갯빛 출현, 푸른빛 저녁이 사라져 가는 과정에서 그 귀중한정수를 드러내는 듯 보였다. 저녁 식사 때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자는 날이면 나는 밤새 그 정수를 느꼈는데, 그것은 마치셰익스피어 요정극에서처럼 시적이면서도 외설적인 소극을연출하여 내 방의 요강을 향수병으로 바꾸어 놓았다. - P215

파브르가 관찰한 막시류 곤충인 땅벌은 죽은 후에도 유충이 먹을 신선한 먹이를마련하려고, 해부학의 힘을 빌려 자신의 잔인성을 키워 바구미나 매미를 포획하고는, 다른 생명 기능은 그대로 둔 채 다리 운동을 주관하는 신경중추를 놀라운 지식과 솜씨로 찔러, 그 마비된 곤충 주위에 알을 갖다 놓고는 알이 부화해서 유충이 되면 그 유충에게 온순하고도 무해하고, 도망치거나 저항할 수없는, 그렇지만 조금도 썩지 않은 먹이를 제공하게끔 한다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랑수아즈는 어떤 하인이라도 우리 집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도록 그 끈덕진 의지로 매우 교묘하고도 가혹한 술책을 썼는데, 그해 여름 우리가 거의 매일같이 아스파라거스를 먹어야만 했던 것도,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도맡아 벗기던 부엌 하녀가 냄새 때문에 심한 천식 발작을 일으켜서 마침내 우리 집을 떠날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해가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 P220

"우리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나라로부터 나그네가 보내 주는 꽃다발처럼, 아주 오래전에 내가 지나온 봄날 꽃향기를 그대 젊음에서 맡게 해 주게나. 앵초, 민들레, 금잔화와 함께 오게나. 발자크의 식물군에 나오는, 순수한사랑의 꽃다발을 만든 꿩의비름*과 함께 와 주게나. 부활절 아침의꽃 데이지**와 함께 오게나. 그리고 부활절의 우박 섞인 마지막눈송이가 아직 녹지 않았을 때, 그대의 고모할머니 댁 오솔길에향기를 풍기기 시작한 정원의 불두화***와 함께 와 주게나. 솔로제비몬 왕에게 어울리는 백합의 영광스러운 비단옷을 입고, "****제비 - P223

꽃의 다채로운 빛깔과 함께 와 주게나. 특히 마지막 서리로 아직은 싸늘하지만, 오늘 아침부터 문에서 기다리는 두 마리 나비를 위해서 예루살렘의 첫 장미꽃을 피우려는 산들바람과함께 와 주게나." - P224

"아아! 그렇게 나를 아프게 하지 말게. 난 정말로 게르망트네 사람들을 모른다네. 내 평생의 상처를 건드리지 말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말썽꾸러기 르그랑댕,
이 사기꾼 르그랑댕에겐 또 다른 르그랑댕처럼 아름다운 언변은 없었지만, 대신 아주 순발력 있는, 소위 ‘반사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말솜씨가 있었으므로, 달변가 르그랑댕이 그에게 침묵을 부과하면 또 다른 르그랑댕이 이미 말을 해 - P228

버린 뒤여서, 우리 친구인 르그랑댕 씨는 그의 ‘알테르 에고’*가 폭로한 나쁜 인상을 유감으로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저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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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五十六年秦之始伐趙也魏王問諸大夫皆以爲秦伐趙於魏便孔斌曰不然秦貪暴之國也勝趙必復他求吾恐於時魏受其師也先人有言燕雀處堂子母相哺呴呴焉相樂也自以爲安竈突炎上棟宇將焚燕雀顔不變不知禍之將及己也今子不悟趙破患將及己可以人而同於燕雀乎當今山東之國敝而不振三晉割地以求安二周折而入秦燕齊楚已屈服矣以此觀之不出二十年天下其盡爲秦乎

진나라가 조나라를 정벌할 때 위나라 왕이 대부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의 대부들은 찬성의 의견을 보였으나 공빈은 반대 의견을 보였다(선인은 ‘제비가 당에 살면서 새끼와 어미가 서로 먹여 주어 다정하게 서로 즐거워하여 스스로 편안하다고 여긴다. 부엌 굴뚝에서 불길이 올라와 집이 장차 타려 하는데도 제비는 낯빛을 변치 않고 장차 자신에게 미칠 줄 알지 못한다’고 했다면서 조나라를 정벌하면 그 다음은 위나라 차례 아니냐고 말한 것).

【癸卯】五十七年秦以王陵攻邯鄲武安君曰邯鄲實未易攻也且諸侯之救日至破秦軍必矣辭疾不行乃以王齕代王陵
趙王使平原君求救於楚平原君約其門下食客文武備具者二十人與之俱得十九人餘無可取者毛遂自薦於平原君平原君曰夫賢士之處世也譬若錐之處囊中其末立見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勝未有所聞是先生無所有也毛遂曰臣乃今日請處囊中爾使遂蚤(早)得處囊中乃穎脫而出非特其末見而已平原君乃與之俱十九人相與目笑之
平原君至楚與楚王言合從之利害日出而言之日中不決毛遂按劍歷階而上謂平原君曰從之利害兩言而決爾今日出而言日中不決何也楚王怒叱曰胡不下吾乃與而君言汝何爲者也遂按劍而前曰王之所以叱遂者以楚國之衆今十步之內不得恃衆也王之命懸於遂手吾君在前叱者何也今以楚之彊天下弗能當白起小竪子爾一戰而擧鄢郢再戰而燒夷陵三戰而辱王之先人此百世之怨而趙之所羞而王弗知惡焉合從者爲楚非爲趙也楚王曰唯唯誠若先生之言謹奉社稷以從毛遂謂楚王之左右曰取鷄狗馬之血來毛遂奉銅盤而跪進之楚王曰王當歃血而定從次者吾君次者遂遂定從於殿上毛遂左手持盤血而右手招十九人歃血於堂下曰公等碌碌所謂因人成事者也平原君已定從而歸至於趙曰勝不敢復相天下士矣遂以毛遂爲上客於是楚王使春申君將兵救趙

진나라가 왕릉으로 한단(조나라 수도)를 공격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왕은 무안군에게 뒤를 잇기를 요청하였지만 무안군이 말하기를 ‘한단은 쉽게 공격할 수 없고 그 곳을 공격한다면 주변에서 모두 도우러 쳐들어올 것이니 진나라 군대는 격파당할 것이다’고 말하고 병을 핑계 삼아 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왕흘로 대리자를 삼았다.

조왕이 평원군을 시켜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평원군 수중에 부하 19명은 갖춰졌으나 1명이 갖춰져 있지 않고 있었는데 모수가 자신을 내세우며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어서> 그동안 쓰이지 못했으니 써달라 하였다. 평원군이 이에 받아들였다.

평원군이 초나라에서 담판을 벌이고 있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모수가 칼을 만지작거리면서 평원군에게 협박을 하니 초왕이 평원군과 서로 합종 맹약을 맺을 수가 있었다. 모수는 상대부에 올랐고 초왕은 춘신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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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과 후한을 합쳐서 400년 동안이나 ‘한(漢)‘이라는 이름을 쓰는 왕조가 계속되었다.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바탕으로 문자가 ‘한자(漢字)‘라불리게 되었으며, ‘한문(漢文)‘, ‘한시(漢詩)‘, ‘한족(漢族)‘ 등과 같이 한(漢)이라고 하면 곧 중국을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을 중국의 국명으로 의식하는 곳은 일본을 비롯한 한자권뿐이다. 서방 사람들은 한(Han)이라는 명칭에 익숙하지 못하다.
한이 일어나기 전에 진(Chin)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먼저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영어의 China는 말할 나위도 없이 ‘진(秦)‘에서 나왔다. 인도와 이란에서는 Chin 자체가 지금도 중국을 의미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한보다 잘 알려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황제가 통일하기 이전부터 진이라는 국명이 서방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전국칠웅 가운데서도 진나라는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서방사람들이 동쪽과 교역을 하려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진나라였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뒤를 이었지만 이미 잘 알려진 ‘진‘이라는 국명을
‘한‘으로 고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방과 진 사이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역사는 상상 이상으로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382

지금 백성을 몰아 농(農)으로 돌아가게 해서 모두 본업에 종사하게 하여, 천하로 하여금 각자 그 힘의 성과)을 먹게 하고, 떠돌이 상공업자로 하여금 남무(南, 남쪽으로 향한 밭)로 모이게 한다면, 곧 풍족하게 축적되어 사람들이 그곳을 즐거워할 것이다.
강제 귀농을 권한 것이다.
가의의 진언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농본주의는 한나라의 건국이념이었다. 그것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다. 건국 당초 고조는 상인에게 농민들보다 무거운 세금을 매겼으며 비단의 착용을 금지했다. 그런데 문제 시절에는 상인들이 연회를 열면 화려한 비단옷을 담장에 걸었다고 하니, 상인들에 대한 차별조치는 폐지되었거나 아니면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상인들의 경제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문제는 가의의 말에 감동을 받아, 처음으로 ‘적전(籍田)‘을 만들 - P401

고 친히 경작하여 권농의 모범을 보였다고 『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천자가 몸소 농사를 짓는 적전 의식은 예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주나라의 선왕(王)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부활시킨 것이지만, 600년 동안이나 행하지 않아 그 형식을 알 수 없었을 테니 부활이라기보다는 창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 P402

여 씨 일족 토벌은 궁정 안에서만 일어난 싸움이었지만, 오초칠국의난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나고말았다.
주아부가 적절하게 대처했으며, 노장인 오왕의 작전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이 거병이 3개월 만에 평정된 것은 그런 문제보다 민중들에게 전혀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힘든 일도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보자면 민중들에게 있어서 당시 상태는 평온한 휴식기였다.
"그것이 혼란스러워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제후왕의 나라가 삭감되고 나라가 없어진다 해도 민중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고조 말년에 경포를 토벌한 이후 40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없었다.
오왕 유비는 대 경포전에 20세의 나이로 출진했으며, 오초칠국의 난을일으켰을 때는 60세가 넘어 있었다. 대부분의 장병에게 있어서 이 난은첫 번째 전쟁 경험이었다.
일곱 명의 제후왕이 자멸하여, 제후왕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조조의 정책이 그가 처형을 당해 죽은 뒤에야 실현되었으니 얄궂은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P416

고대 궁정에서 ‘여성의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했다. 경제의 궁정에서 두 태후의실권은 매우 강한 것이었기에 경제는 어머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앙의 맹렬한 반대에 경제는 내심 마음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원앙은 양왕과 그 측근 모사들의 미움을 사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두 태후는 경제와 양왕 외에도 표(標)라는 딸을 낳았다. 장녀였다. 그녀는 장(長) 공주라 불렸다. 당읍후(堂邑侯) 진오(陳)라는 신분의 격이아래인 사람에게 시집을 갔는데, 종종 궁정에 나타나서 어머니 두 태후와 함께 ‘여성의 힘‘을 발휘하곤 했다. 경제는 어머니와 누나 두 여성에게휘둘렸다고 할 수 있다. - P418

무제 때에 처음으로 연호(年號, 원호(元號))가 등장했다. 즉위한 이듬해가 건원(建元) 원년이다. 건원이 6년 동안 이어지다 원광(元光)이 되었고, 원악(元朔), 원수(元狩), 원정(元鼎), 원봉(元封)으로 6년마다 개원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무래도 보(寶)을 얻어 ‘원정‘
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최초인 듯하다. 그 이전의 연호는 추명(命)이라고 해서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원정 6년의 이듬해를 원봉원년이라 삼은 것이 개원의 시초인데, 기원전 110년에 해당한다. 당시제는 47세로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한 해이다. - P438

월왕 구천의 월나라는 전국 시대에 멸망했지만, 그 후에도 월이라는 부족은 중국의 남동부에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할거했다. 그 월 부족 중에서 동쪽에 있던 것을 동월, 민강(江, 복건) 연안에 있던 것을 민원, 광동 방면에 있던 것을 남월이라고 불렀다. 편의상 동월이라고 불렀지만, 후에 정식으로 동월이라는 나라가 생겼기에 동우(절강성 우강(甌江)연안에 있는온주(溫州)지구)에 도읍을 둔 부족을 동우라고 고쳐 불렀다고 생각된다.
중원 사람들은 남방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의 정권 밑에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막연하게 백월(越)이라고 불렀다. 진나라 말기의 난 때, 그들은 파군(君)인 오예(鳴)에게 귀순하여 진나라 토벌을 위한 응원군을 보냈다. - P439

무제 시절에는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도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면바로 착수하려는 기풍이 있었다.
당몽이 야랑국으로 간 것은 진 황후가 무고 사건으로 실각한 원광 5년(기원전 130)의 일이었다. - P443

이렇게 해서 한나라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서남 각 지방도 드디어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남의 소국인 야랑에서는 한나라에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한나라의 사절에게,
한나라와 우리 야랑국 중 어느 쪽이 큰가?
라는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야랑자대(夜郎大, 야랑은 스스로를 크다고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고사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들 서남의 군소국에서 한나라로 사절이 파견되자, 드디어 한나라의실정을 알게 되었다. - P444

한나라의 흉노 대책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충실해진 한나라의 국력, 명장의 활약, 흉노의 약화 등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가 흉노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성공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건의 서역 여행은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없다. - P453

상업국가인 대하가 중국과 교역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건은 현지에 가서 알았다. 그러나 당시 서역으로 가는 길은 전부 흉노에 의해서 막혀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 서남부에서 인도를 경유하는 교역로를 개척한다면 한나라의 물산을 대하나 대완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실제로 촉의물산이 인도를 경유해서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서남이 공작이 재개되었다.
이것은 단지 교역을 통한 이득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흉노의세력권을 경유하지 않는 경로를 확보해 두면, 대하, 대월지, 강거, 오손 등과의 동맹 공작이 훨씬 더 손쉬워지는 셈이다. 장건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 P459

한나라는 남월에 9개 군을 두고 직할령으로 삼았다. 담이(瞻耳), 주애(珠崖), 남해(南海), 창오(蒼梧), 울림(鬱林), 합포(合浦), 교지(交附), 구진(九眞),
일남(日南) 등의 군이다. 이 중에서 담이와 주애는 해남도(海南島)에 있고,
교지, 구진, 일남 3개 군은 베트남 북부에 속해 있다.
남월은 월나라 부족과 이주해 온 한족의 잡거지(地)로 당시는 이중 구조를 가진 사회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남월국의 관리 중에는 한족이 많았는데 여가를 사로잡은 것도 한나라 군이 아니라 남월의 낭(郞, 관이었던 도계(都稽)였다. 도계는 공로를 인정받아 한나라의 임채후(臨蔡侯)가 되었다. 남월의 평정이 의외로 빨랐던 것은 지방정권으로서 독립성을 - P466

유지하는 메리트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월의 관리는그대로 한나라의 관리가 되고, 의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활약의 무대가넓어지니, 그러는 편이 더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한 셈이다. 남월국을 사수하려 했던 것은 여가 등 일부 소충한 사람들뿐이었다.
동월의 여선도 이때 멸망했다. 한나라가 남월로 출병할 때, 한나라를도와 여가를 치겠다고 말해 놓고 실제로는 병사를 내지 않고 남월로 밀사를 보내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여선은 황제를 칭했다고 한다. 그러나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흉노에 대한 준비를 예전처럼 할 필요가 없게 된 한나라가 그 힘을 합병정책에 쏟아부은 결과일 것이다. - P467

흉노가 강성했을 때, 조선은 한나라의 압박을 받지 않았다. 남월과 ㅁ
‘찬가지로 조선은 한 번도 입조한 적이 없었다. 주위의 소국이 한나라의천자를 만나고 싶다고 청해도 그 상서를 전부 묵살했다고 한다. 이것은어쩌면 한나라의 트집이었을지도 모른다.
흉노의 힘이 후퇴하자, 조선도 드디어 한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나라는 섭하(涉何)라는 자를 사자로 보내서 조선왕 우거를 회유하려 했다. 회유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월에 대한 것과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제후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 번은 입조를 하고, 한나라로통하는 길을 막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왕은그것을 거부했다. 할아버지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은독립국으로 할아버지조차 입조한 적이 없지 않은가, 각 만이에게 길을내주는 것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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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五十五年
秦左庶長王齕伐韓攻上黨拔之上黨民走趙趙廉頗軍於長平以按(遏)據上黨民王齕因伐趙趙軍戰數不勝廉頗堅壁不出趙王以頗失亡多而更怯不戰怒數讓之應侯使人反間曰秦之所畏獨畏馬服君之子趙括爲將爾廉頗易與且降矣趙王遂以趙括代頗將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鼓瑟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王不聽

왕흘이 조나라를 정벌하도록 시켰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염파가 성벽을 지키면서 출전하지 않자 조왕은 화를 내었다. 이 때 진나라 응후(범저)가 간자를 보내 조왕이 조괄(趙括)을 염파 대신 쓰도록 만든다. 재상 인상여는 조괄을 써서는 안된다고 간언했으나 조왕이 듣지 않았다.

○ 初趙括自少時學兵法以天下莫能當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括母問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趙若將括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其母上書言括不可使王曰吾已決矣母曰卽有不稱妾請無隨坐王許之

○ 秦王聞括爲趙將乃陰使武安君爲上將而王齕爲裨將令軍中有敢泄武安君將者

○ 趙括至軍悉更約束易置軍吏出兵擊秦武安君佯敗而走張二奇兵以劫之趙括乘勝追造秦壁堅拒不得入奇兵絶趙軍之後趙軍食絶四十六日皆內陰相殺食趙括自出銳卒搏戰秦人射殺之趙師大敗卒四十萬人皆降武安君乃挾詐而盡坑殺之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조괄이 어린 나이에 자신이 잘났다 여겼다. 부모는 이를 알아보고 그를 장수로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조왕은 듣지 않았다. 진나라 왕은 조괄이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안군을 상장군으로, 왕흘을 비장군으로 삼아 군을 이끌게 했다. 경험이 부족한 조괄은 무안군의 꾀에 제대로 넘어가 죽고 병졸들은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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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7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평대전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모친도 말린 조괄을 사령관으로
기용했다가 일패도지한 고사인
가 보네요.

수십만 포로를 학살한 무안군의
말로도 참 그렇네요.

거리의화가 2023-01-27 21: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매냐님 딱 그 부분입니다^^ 무안군 말로는 내일 나오는 것 같네요. 병사들을 40만이나 학살한 것은 좀 그랬습니다. 그냥 돌려보내주지~ㅠㅠ

여울목 2023-01-28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괄의 경우를 음미하면 서적을 읽어 공부한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합니다.
촉한의 제갈량과 전진의 왕맹은 많지 않은 나이에 출사하였으나, 중국사를 통틀어 위대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마 출사당시의 나이가 장평대전에서 총대장이 된 조괄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명장 조사가 아들인 조괄에 대해 몹시 우려한것에 대해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료로 근무한 적이 없었던 제갈량이나 왕맹이 등용되자마자 능력을 인정받을 수있는 요인중 하나는 서적을 통한 공부를 할 때 매우 통찰력이 있게, 피상적이지 않게, 실제에 와닿게끔 독서를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재료를 갖고 있어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는 전혀다릅니다.

독서를 제대로하는 것이 어떤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으나, 조괄은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제갈량이나 왕맹은 제대로 독서를 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물론 좌전의 자산, 안영,숙향도 제대로 한 사람이고요.

거리의화가 2023-01-28 19:59   좋아요 0 | URL
조괄의 근자감은 같은 나이여도 독서 등을 통한 간접 경험의 부족이 있어서일수도 있겠지요. 어린 나이여서 사회 경험이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니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