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9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9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먹는 데서 인심 나더라고 밥 한술, 술 한잔 나누어 먹을 것이 없게 된 세상,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의지할 남정네 없는 젊은 아낙들 아이들, 이슬같이 서글픈 명줄이나마 잇기 위해 식량배급에만 매달려 있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원시세계로 돌아간 듯 일체를 생략하고 살았으며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례하는 것이 예사요, 장례식인들 무슨 수로 조문객 대접을 하겠는가. 징용 나가는 아들 남편을 위해 주먹밥이라도 몇 개 뭉치고 나면 식구들 죽그릇에서 푸성귀만 돌아야 했다. 극도로 이기적인가 하면 극도로 외로워하고 거리에서 직장에서 혹은 집 마당에서 기둥 뽑아 가듯 젊은이들을 잡아가지만 그것도 거의 일상화되어 울음소리 한숨 소리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배급을 받아 절반은 팔아서 다음 배급 탈 돈을 마련해놓고 배급의 절반으로 연명하는 기막힌 처지도 있었고 생산량이 날로 줄어만 가는 양조장의 술 찌꺼기, 두부공장의 비지조차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식량 배급소의 유세는 대단했으며 배급계 관리들은 살림이 윤택하여 태평성세였다. - P42

인간이란 의식주가 모름지기 중요한 법이다. 그 중에서도 먹는 행위가 가장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먹을 것을 뺏긴다? 먹고 살 길이 없어진다? 막막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먹을 수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 내 것을 뺏기지 않으려면 최소한 지키거나 남의 것을 뺏어야 하니 인심은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하층 계급의 이야기고 상층 계급은 없는 사람들을 더 착취하고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년도는 안 나와서 알 수 없지만 전시 체제 막바지임이 느껴진다. 아마도 1944년 무렵이 아닐까 싶다. 학병제는 진작 시작되었고 조선인 징용제가 시작된 것을 보면 말이다.

상부층은 협력을 해야만 조선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 논리를 리코딩하여 되풀이 되풀이하여 판을 돌리고 있었다. 열혈의 조선 청소년들이여! 국가 위난을 보고만 있을 쏜가,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라! 대군(大君)의 신금을 우리는 보위해야 하느니, 펜을 버리고 총을 들라! 오오 감읍(感泣)의 극(極)이로소이다. 폐하의 적자로 조선 백성을 안으신 그 크나큰 성은을 어찌 우리가 잊을 쏜가! 저 하늘의 태양이 영구불멸이듯 우리의 인군 또한 그 영광이 무궁하리, 오오 조선의 청소년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라! - P63

이광수가 每新에 새해 첫 날 발표한 시로 조선인들이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일장 연설해놓았다. 한문 해석하면서도 부들부들했다. 대체 그 좋은 머리 갖다 무얼 했는가. 그러면서도 나중에 본인은 억울하다, 해방이 될 줄 몰랐다 세례라니. 1940년 이후의 신문 기사를 찾고 싶었으나 이 무렵은 이미 조선, 동아일보 폐간으로 기사 자체가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광수를 비롯한 친일 지식인들은 연설회나 강연, 논문 등을 통해 친일 행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학병들을 동원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찬다.

<새해>(1944년 1월 1일 『每新』)
새해가 왔네.
地球(지구)가 처음 보는 偉大(위대)한 새해
貪慾(탐욕)의 地獄(지옥) 舊世界(구세계)가 무너지고
仁義(인의)와 禮(예)의 새 世界(세계)의 터를 닦는 새해.
太平洋(태평양)의 물결에 잔잔함이 돌아오고
亞細亞(아세아)의 天地(천지)에 復興(부흥)의 萬歲(만세)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날 새해.
기뻐라. 나는 이 새해를 보았어라
開闢 以來(개벽 이래)에 처음오는 偉大(위대)한 새해를
노래하는 나의 幸運(제군)이어
그러나 一億(일억)의 同胞(동포)여
이 해 새해는 또 땀을 많이 흘려야할 해.
農夫(농부)는 논밭을 갈기에 가꾸기에 일구기에 鑛夫(광부)는 땅속에서 파기에 깨뜨리기에 저내이기에
工夫(공부)는 공장에서 갈기에 두들기기에 漁夫(어부)는 바다에서 그물치기에 낚기 끌기에 男,女,老,少, 一億一心(남,녀,노,소,일억일심) 쉬일새없이 흘리는 땀이 日本의 國土를 흠씬 적실 때에- 오직 그 때에만야
榮光(영광)의 勝利(승리)는 오는 것이다.
이를 일러 一億 戰鬪配置 戰力增强(일억 전투배치 전력증강) 빛나는 새해 偉大(위대)한 새해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銃(총)을 메고
戰場(전장)으로 나가고
어여뿐 우리 딸들은 몸빼를 입고
工場(공장)으로 農場(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느들이 아닌가
千年和平 道義世界(천년화평 도의세계)를 세우랍신 우리 임금님의 命(명)을 받자와 ‘예’ ‘예’하고 집에서 뛰어 나오는 무리 이 날 설날에 半島三千里(반도삼천리)도 기쁨의 日章旗(일장기) 바다.
無限(무한)한 榮光(영광)과 希望(희망)의 偉大(위대)한 새해여! ;

징용은 처음에는 모집 방식이었으나 반응이 없자(시, 도에서 인원을 배분받았을텐데 인원 충족수에 거의 미달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강제 차출 방식이 되었다. 길에 가다가도 눈에 띄면 끌려가는 형편이었는데 이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을 원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어린 나이에 강제로 시집을 가는 경우도 빈번했다.

"조선인들 징용에 비하면 일본인 징용은 천국입니다. 조선인 노동자는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계지요. 일본은 언젠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도시락 싸들고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젊은 여자들, 그들이 불만에 차서 못 견디겠다, 못 견디겠다 하고 있을 때 전선에서는 마구 무차별로 끌고 온 조선 처녀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 심할 때는 오십 명 이상의 군인 놈들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유키코 얼굴에 피가 모여들었다. 수치와 분노였다. - P152~153

유키코의 수치와 분노, 오가타의 분노를 넘어선 절망 어린 반응을 보면서 이것은 식민지인 조선의 상황을 떠나 인권, 인류애로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졸지에 가해자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씁쓸함과 참담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말이야 차차 지 맘 내킬 때 하것지마는 지가 걱정하는 것은 핵교를 그만두는 일보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도 큰일이기는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 만치로 정신대에 뽑혀가지 않을까 그기이 걱정입니다." 정신대라 했을 때 남희는 강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어쩌면 그는 정신대 내막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대라 카믄 여자 보국대 말가."
"예, 수을찮이 처녀 아이들이 뽑히 나간 모앵인데, 이 동네서도 더러 나갔을 걸요?" - P35

국민징용령은 저항을 우려한 ‘모집’형식 노무동원이었는데 직업소개령에서는 이를 구체화시켜 6개의 관영직업소개소를 설치하고 보다 대대적인 노동력 동원을 강행하였다. 이때 조선인 노동자들은 「종업자이동방지령」「국민노무수첩법」등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39년부터 조선노무협회가 만들어지는 1941년 6월 이전까지의 강제동원은 명목상 ‘모집’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 모집에는 시종일관 국가권력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가해졌다. 즉 조선총독부, 경찰당국, 직업소개소 등의 긴밀한 연계와 계획 아래 사실상의 연행이 실시된 것이다.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행선지도 모르고 연행되었으며 연행된 후에는 강제적 노무관리에 의해 육체와 정신까지 구속되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때의 모집지역은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7개도였다. 1942년 3월 이후, 종래의 연행형식은 모집에서 이른바 관알선(官斡旋)으로 바뀌었다. 본부는 총독부에 있었고 지부는 각 도청에, 분회를 부·군·도에 둔 조선노무협회는 관청과 경찰, 일본 사업주가 파견한 노무지도원 등과 협력하여 강제연행을 수행하였다. 관알선은 44년 9월, 징용령이 적용되어 명실공히 강제연행이 시작되기까지 시행되었고 이 시기의 대상지역에는 ‘모집’시기의 7개도에다 강원도와 황해도가 추가되었다. 연행된 노무자들의 생활은 비참한 것이었다. 일본의 탄광노동조건을 예로 보면, 일본의 노동자들이 비교적 조건이 좋은 군수공장으로 이동하자 일제는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고 조선인 노동자의 도입, 여자 및 연소광부의 갱내 사용허가, 심야작업 금지의 완화, 광부의 취업시간 제한의 완화에 의하여 재생산을 꾀했기 때문에 그 악조건은 이입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대로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이 조선인 강제연행은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 또는 인하시키는 정책으로 이용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토지관리란 명목하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갖가지 훈련이 가해졌다. 그것은 조선현지훈련, 취로지 도착훈련, 황민훈련, 일본어 훈련, 작업훈련, 생활훈련, 체력훈련, 취로 후의 재훈련, 불량자 특별훈련 등 9가지 종류가 있었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10~12시간이었으며 아침밥을 먹은 후 갱내에 들어가면서 점심을 먹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을 때 “감독님, 죽여주십시오 일어설 수가 없어요”하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주(九州:큐우슈우 도요스)탄광의 한국인 합숙소 벽에 남아 있는 한글 낙서 중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는 절규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독립운동사 중 3)강제연행 中)

報道特別挺身隊(보도특별정신대)의 結成式(결성식)이 朝鮮神宮(조선신궁)에서 거행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침략 한국 36년 사 13권 매일신보 1944.2.1 기사 中)

"국민을 제물로 삼으려는 의도가 뭡니까?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본능 아니겠어요? 그 본능 때문에 눈이 어두워 이미 사리판단을 못하고 있어요. 만일 자신들이 죽겠다 한다면 국민은 살릴 수 있겠지요. 군부나 황실이나."
어쨌든 이들은 좋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다. (...) 침략과 약탈 덕분에, 저변의 그 많은 생명들이 남의 산하에 뼈를 묻어준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좋은 시절, 그렇다고 본다면 이들 역시 나라의 은공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숱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들 아닌가, 미묘한 심리적 딜레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를 성토하고 비난할 것인가. - P162~163

요시에이와 오가타의 대화는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졸지에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국민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은 자국을 욕하면서도 국가가 전쟁과 약탈에 힘을 쏟아 얻은 이익으로 특수를 누렸기 때문에 제 얼굴에 침뱉기라는 것을 느낀다. 내가 두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나라면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어서 술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오가타는 쇼지의 반쪽이 이 나라, 가난하고 핍박받는 조선의, 그 민족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 내 아들아! 너의 어머니는 바로 저 불쌍한 동족을 위하여 북만주, 네가 보고 싶어하는 황량한 벌판에서 지금 싸우고 있단다. 가해자로서 괴로워하고 있는 일본인, 나를 언제인가 아버지로 네가 받아들이듯 동족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의 여성도 언젠가는 네가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민족과 민족의 투쟁이 없어지고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투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지상에는 식민지라는 존재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 어머니와 나의 슬픈 사랑, 비극도 없어질 것이다.' - P192~193

오가타는 아들인 쇼지와 여행을 하면서 인실을 떠올린다. 어디선가 조국을 위해 독립 운동을 하고 있을 인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부군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경심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인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 마지막 권에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고통스럽고 힘든 세월이지만 이 때 인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조선의 민중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정면대결 해보아야 뭐 나오는 것 있어? 피장파장인데, 갈 때가 되면 가는 거고, 올 때가 되면 오는 거고, 팔다리에서 힘을 빼버리고, 바다 위에 떠다니는 해파리같이 사는 거지 뭐. (...) 온갖 잡신들이 한낮에 한길을 활보하는 세상, 평범하게 저속하게 진담 반 농담 반 그렇게, 아암 그렇게 살아야지." - P110

유인배는 나일성(송영광)에게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힘을 빼고 생활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광이 양현과의 관계에서 갖는 아픔만이 아니라 전선에 있는 위문 공연을 가서 웃으며 연주를 해야 하는 고뇌까지 적용되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더 나아가서 조선 민중들에게 건네는 메시지로도 읽혔다. 어느 편이든 극단은 살기 힘들었을 시기가 아니었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쥐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미친 것처럼 모든 것에 일희일비하고 목숨을 걸기에는 36년이란 세월은 참 녹록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곱씹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토지 19권은 큰 사건들이 있으나 모두 스포가 될 만한 사건이라 거론하기에는 그렇다. 대부분은 무거운 사건이었지만 스파이가 암살되기도 하고 동네를 쥐새끼처럼 훼방 놓던 놈은 쫓겨나는 일처럼 빛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 얼마나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그 둘도 죽어도 싸다, 맞아도 싸다 하기에는 찝찝함이 남는다. 어쨌든 그들이 해방 후까지 살아 남았다면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늘어놓는 이야기와 비슷한 변명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3년 07월 18일에 저장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3년 07월 18일에 저장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17,800원 → 16,020원(10%할인) / 마일리지 8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3년 07월 18일에 저장

해석에 반대한다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2023년 07월 18일에 저장
품절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지난 금요일 오전 남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두통약을 찾았기 때문이다. 함께 출근하면서 병원에 가보라 신신당부했다. 역시나 출근하고 얼마 안 되서 "코로나 양성이래." 라는 씁쓸한 메시지가 날라왔다. 수액 주사를 맞고 집으로 간다 했다.

문제는 연이어 일어났다. 오후 4시쯤 시할머님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하필 이 시기에 돌아가시다니 우연 치곤 너무 기가 막혔다. 사실 며칠 전 우리 내외는 시할머님을 찾아뵈러 다녀왔었다. 고령의 나이에 코로나 확진으로 상태가 무척 좋지 않으셨기 때문에 얼마 버티기 힘드실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시할머님을 뵙고 온 뒤에 남편이 확진이 되었고 나도 사실 잠복기일 수도 있어서 결국 시할머니 장례식장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마음은 계속 무거웠고 어디 돌아다닐 수도 없는 형편이라 방콕하며 주말을 보냈다. 책을 읽는 것만이 이 복잡한 기분을 떨쳐버리게 하는 해방구였다.

남편은 토요일에는 괜찮았는데 어제부터 또 몸이 안 좋은지 하루종일 잠만 잤고 오늘도 출근하지 못했다. 점심 먹고 나서 상태를 물어보니 퇴근 때 인후통 약을 사다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상태가 여전히 별로인 것 같다.
KF 마스크를 쓰고 다시 종일 생활하게 된 것이 좀 어색하다. 기존에도 대중교통 이용할 때는 썼지만 사무실에서는 쓰지 않았는데 혹시나 몰라서 남편이 코로나 기간 끝나기까지는 써야겠다.


#2

토요일에 <여전히 미쳐있는> 이 도착했다. 주말에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미국인>을 읽으면서 어제 <베트남 전쟁>을 주문했다. 이 책은 진작부터 읽어야지 했는데 얼마 전에 개정판이 나왔더라. 더는 읽는 것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소설 읽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직도 앞부분을 헤매는 중...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3-07-17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은 언제나 그렇듯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

‘책이 해방구다‘라는 말씀이 아주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모쪼록 힘겨운 시기를 잘 이겨내시
길 기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7 17:58   좋아요 1 | URL
삶에서 가장 힘겨운 부분이 역시 이별인 것 같습니다.
위로의 말씀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3-07-17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정말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아요. 할머님의 명복을 빌며,
남편분 빨리 쾌차하시길 바래요~~

겨울호랑이 2023-07-17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건수하 2023-07-17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분 마음이 무거우시겠어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편분 얼른 완쾌하시고 화가님은 넘어가시면 좋겠구요.. 할머님께 나중에 인사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우끼 2023-07-17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락방 2023-07-17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거리의 화가 님도 남편분도 몸과 마음 모두 잘 추스르시길 바랍니다.

희선 2023-07-18 0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이 돌아가신 것도 슬프겠지만, 장례식장에 가지 못하는 것은 더 마음 아프겠습니다 할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뵙기라도 해서 다행입니다 나중에 다른 곳으로 할머님한테 인사하러 갈 수 있겠지요 남편분 건강 좋아지시면 거리의화가 님과 함께 가시면 되겠네요 할머님 명복을 빕니다


희선

책읽는나무 2023-07-18 0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편분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곁에서 지켜보시는 화가 님도 더욱 힘드실 것도 같구요. 두 분의 몸과 마음 잘 추스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자목련 2023-07-18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 가지로 힘든 여름을 보내고 계시네요.
그럴수록 잘 드시고 건강도 잘 챙기시길 바라요.
어떤 시간에는 할 수 있느 걸 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요.

독서괭 2023-07-18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구 힘드시겠습니다 ㅠㅠ 시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도는군요. 요즘 신경을 안 썼는데.. 고생 많이 안 하고 빨리 나으시길, 그리고 화가님 옮지 않으시길!!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 - 주안전
차오리화 지음, 김민정 옮김 / 파람북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루쉰이 '문학가∙사상가∙혁명가'로 규정되면서 주안의 지위가 어정쩡해졌다. 루쉰은 문학혁명의 선구이자, 외치는 자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였지만, 그의 혼인이 중매결혼이었던 것이다. 루쉰 세대에게 중매결혼은 보편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루쉰이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1949년 이후 루쉰 연구가 전례 없이 중시되며 연구자들이 자료 발굴과 정리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유독 주안만큼은 배제되어 관심을 끌지 못했다. 특히 극'좌'의 시대에 루쉰이 신단(神壇)에 오르며 우상으로 봉해지자 주안은 더욱 기피 대상이 되어 루쉰 연구의 금기(禁忌)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루쉰 전기에서 주안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 P36

최근 들어서야 주안의 이름은 알려졌을 뿐 그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은 잊힌 존재였다. 루쉰의 문학, 사상적 위치 때문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녀는 왜 그동안 잊힌 존재여야 했을까.


중국 다섯 개 왕조의 옛 도읍이었던 베이핑(北平)도 떠들썩해서 고관대작이 구름처럼 모여 있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 곳곳에 널려있다. 하지만 베이핑 궁먼커우(宮門口) 시쌴타오(西三條) 골목은 떠들썩한 세상의 적막한 구석이다. 이곳은 연탄을 실어 나르는 차가 오가는 푸청먼(阜成門) 성벽 부근에 있으며 인력거꾼과 장인, 빈민이 뒤섞여 사는 곳이었다. 이 시싼탸오 21호의 작은 사합원(四合院)에 한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몸집이 왜소하고 얼굴이 좁고 길었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전족(纏足)을 하고 있어서 걸을 때 조금씩 비틀비틀헸다. 그녀는 명목상의 남편과 각방을 썼고 하루에 거의 세 마디만 나누었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부르면 '응'하고 대답하고, 자기 전에 북쪽 방 통로의 중문을 닫을지 말지 물으면 '닫아라' 또는 '닫지 말아라'로 대답했다. 간혹 생활비를 요구하면 '얼마나 필요한가?' 하고 묻고는 달라는 대로 주었다. 되도록 불필요한 말을 줄이기 위해 명목상의 남편은 갈아입을 옷을 버들고리의 뚜껑 위에 놓고 자신의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하인을 시켜 깨끗이 세탁한 후 버들고리 안에 잘 개어놓고 위에 흰 천을 덮어 자신의 침실 문 옆에 두었다. 이 여성은 바로 루쉰(魯迅)의 본처 주안(朱安)이다. - P6


주안의 주변의 사람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바느질과 자수에 능숙했으며, 예법을 잘 지켜 부모가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사랑했다." 주안 집안의 여자아이들은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는 것이 권장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규훈(조선 시대 '가훈' 같은)을 조금 읽을 뿐이었다. 1916년, 주안의 처가가 있던 사오싱에 간 쑨중산(孫中山)은 "사오싱에는 세 가지가 많다"라고 개탄했는데, 석패방(관아에서 절부와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많고 무덤이 많으며 분뇨통이 많다고 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주안이 살던 사오싱에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루쉰은 친한 친구인 쉬서우창에게만 다음과 같이 침통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어머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네. 나는 그를 잘 부양할 뿐 사랑 따위는 모르는 일이네."
가문과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루쉰은 주안과 결혼했지만 그는 며칠도 되지 않아 둘째 동생 저우쭤런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고 주안은 독수공방 처지가 된다.


루쉰의 어머니인 루 부인은 그들 사이에 정이 없고 부부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들이 왜 며느리를 탐탁치 않아 하는지 궁금해 했다. 루쉰은 "그 사람과는 대화가 안 통합니다"라고 말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가치를 지닌 환경에서 살아온 주안과 일본 유학을 하는 등 당시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혁과 진보를 외치던 루쉰은 맞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주안 입장에서는 외부의 잘 모르는 이야기만 하는 루쉰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을 테고 열등감은 커지지 않았을까.


루쉰은 일기에서 단 두 차례 주안을 직접 언급했는데(앞서는 1914년 11월 26일자 일기) 모두 그녀를 '부인[婦]'이라 지칭했다. '婦'의 본래 의미는 '결혼한 여자'로, '아내', '며느리' 등을 지칭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여성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婦'는 복종의 뜻을 지닌다. '婦'에도 아내라는 뜻이 있지만, '妻'가 가리키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다. 루쉰은 편지나 글에서 주안을 언급하며 '우처[賤內](천한 안사람)', '안사람[內子]', '부인[太太]', '큰마님[大太太]' 등의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제3자에게 주안을 언급할 수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자조적인 말투였다. - P185


루쉰은 초기 소설에 '신여성'에 대해 별로 쓰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이런 부류의 여성과 교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베이징은 신문화의 발원지로서 수많은 지식인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중에는 각지에서 배우기 위해 베이징으로 온 여학생들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는 5∙4신문화 운동 초기보다 '자유연애', 남녀의 사교에 대한 사회적 포용이 더 커졌다. 이때의 루쉰은 더 많은 여성과 접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루쉰이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의 강사를 맡은 후에는 여학생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녀들은 주안과는 사뭇 다른 신여성들이었다. 이 중 루쉰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게" 한 여성은 쉬광핑이었다. 그는 1926년 8월 26일 베이징을 그렇게 떠나 쉬광핑과 동거를 시작했다.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쉬광핑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남녀가 함께 살면서 당사자 외에는 그 어떤 부분도 구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의기투합해서 동지처럼 대하며, 서로 친밀하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를 신뢰한다면 어떤 상투적인 격식도 필요 없다. 우리는 일체의 봉건 예교를 타파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 자신은 항상 자립해서 먹고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니, 함께 살 필요가 없어진다면 곧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주안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아파했고 주변 사람이 그녀에게 앞으로 어떡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그분 뜻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좋아질 날이 올 줄 알았단다. 나는 담장 밑에서 조금씩 조금씩 위로 기어 오르는 달팽이처럼, 느리긴 해도 언젠가는 담장 위로 오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구나. 더 이상 기어오를 힘이 없어." - P233


루쉰은 상하이에서 쉬광핑과 10여년 간 동거한 끝에 1936년 10월 19일 사망한다. 루쉰의 장례식은 상하이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사망 당일 오후 만국(萬國) 장례식장으로 이송되어 빈소가 마련되었다. 각계 인사들이 루쉰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으며, 22일 오후 수천수만 명으로 구성된 장례 행렬이 그의 영구가 만국공묘로 운구되어 천천히 매장되는 것을 목송했다. 베이핑 집에도 20일부터 빈소를 마련해 조문 온 친지와 친구들을 맞이했다. 주안은 소복을 입고 향을 피우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 속에서 남편의 영혼을 추모했다. - P269


루쉰이 세상을 떠난 후 쉬광핑은 루쉰 전집의 출판과 편집에 전력을 다하여 그의 작품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이를 위해서 루쉰 전집을 출판하기 위한 저작권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부탁했고 루 부인은 동의했다. 주안은 쉬광핑이 저작권 수입의 일부를 부쳐 자신의 생계를 부양하는 것에 고마워했으며, 문제가 생기면 그녀를 찾아 상의하는 등 가족으로 여겼던 것 같다. 쉬광핑도 전쟁 막바지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모든 사람의 형편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방법을 강구해 생활비를 부쳐 그녀의 생활을 보장했다. 두 여성은 다른 삶을 살았으나 루쉰에 대한 애정만큼은 공통적이었다.


1947년 6월 29일 주안은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유언으로 남편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시즈먼 밖의 보복사에 임시 묘소에 묻혔다. 쉬광핑은 "노부인의 묘소 옆에 땅을 사서" 그녀를 루쉰의 어머니와 함께 반징촌에 있는 묘지에 매장하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 곁에도, 시어머니 곁에도 묻히지 못한 그녀의 묘는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의 '사구(四舊)'(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타파 운동 때 훼손되었다. 죽어서도 이런 취급을 받다니 참 너무한다 싶다.


주안은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우 선생은 나한테 결코 나빴다고 할 수 없어요. 서로 다투지도 않았고 각자의 삶을 살았을 뿐이죠. 저는 선생을 이해해야 해요." 그녀는 쉬광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쉬 선생은 제게 정말 잘해주었어요. 제 생각을 이해하고, 저를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부쳐주었죠. 그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주안이 루쉰과 차라리 붙들고 싸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둘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억지로 맺어진 연인지 모르겠다. 집안의 명에 따라 결혼을 한 주안은 평생을 시부모를 봉양하며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루쉰은 형식적으로만 그녀를 대했을 뿐 애당초 그를 부인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까운 그녀의 운명에 가슴이 쓰라린다. 이런 여성들이 당시에 얼마나 많았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7-1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안의 삶이 역시나 처연합니다. 봉건적인 결혼제도는 참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것 같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쉬광핑 저 여자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군요.

거리의화가 2023-07-17 17:24   좋아요 2 | URL
저희 부모님도 중매결혼이셨어요. 몇 십년전만 해도 중매결혼이 흔했던 걸 보면 그 당시 분들은 참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 보고 자란 경험 때문인지 꽤 오랜동안 독신을 꿈꿨답니다.

청아 2023-07-17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의 변증법>에서 ‘사랑‘에 대한 대목을 읽다가 이 글을 보니 화도 좀 나고 마음이 복잡하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7 17:26   좋아요 1 | URL
이 책 읽는 동안 저도 좀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구요. 같은 여성으로서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어쨌든 이 책 덕분에 루쉰의 주변 인물들과 가정사 등에 대해서 알게 되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7-18 0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도 다르지 않았겠습니다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도, 공부한다면서 다른 데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 많았겠죠 남성은 그렇게 하는 건 비난하지 않아도 여성이 그러면 비난했겠네요 이런 건 지금도 아주 달라지지 않았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8 13:35   좋아요 0 | URL
네.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이 꿈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 너무 길었네요.
 
중국의 역사 : 송대 중국의 역사
스도 요시유키 외 지음, 이석현 외 옮김 / 혜안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송 시기의 역사를 훓어 읽다가 당, 송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확인해보니 번역되어 나와 있는 책들 중 마땅한 것이 없었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나 <신당서>, 송나라의 역사인 <송사>는 당시 쓰인 한문이나 오늘날의 중국어 번역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지만 차마 도전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당나라의 태종과 고종은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한데 고구려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서 엿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이번에 당나라의 문학 주요 장르였던 당시를 잠시나마 엿보았던 것은 수확이었다.
하지만 송나라의 역사는 뭐 하나 짚히는 것이 없이 두루뭉술했다. 그래서 찾아보다 만난 것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스도 요시유키와 나카지마 사토시다. 스도 요시유키는 1907년 생으로 동경대 문학부 교수를 거쳐 동양대 교수를 역임했다. 나카지마 사토시도 1907년 생으로 동경교육대 교수를 거쳐 대동문화대 교수를 역임했다. 둘 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연이 닿은 것인지 같은 책을 썼다는 게 공교롭게 느껴졌다. 일본 저자가 쓴 책이라 끌리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이 책은 2004년도에 현지에서 출간되었으나 번역은 2018년에 되었다. 2004년 한국을 생각해봐도 책에 고어나 한문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쉽게 쓰여진 책을 찾는 것이 드물던 시기다. 이 책도 그 무렵 편찬이 되었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 용어들이 해석되어 있지 않고 한문 그대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아 읽기가 까다롭다. 그래도 한글 옆에 한문이 있으니 원문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는 있다.


송나라의 역사를 생각 이상으로 세세히 다루고 있어 만족스러웠는데 특히 경제 파트가 그렇다. 송이 성립하고 남송 정권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다양한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중 압권은 지방 지주층들의 토지 점유 과정, 화폐 경제의 구조에 대한 설명,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개혁 내용이다. 기존에 읽었던 책들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지도와 표, 이미지 등을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 별점 3을 생각하다가 4를 준 이유)


송은 문인관료체제였다. 문인관료는 주로 과거시험을 통해서 발탁된 자들로 응시자는 지주층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황제의 권력 기반이었으므로 황제는 그들의 바람에 따라 (굳이 필요하지 않은) 관료들의 숫자를 늘렸고 다른 때보다도 관료에게 주는 대우가 후한 편이어서 국가 재정에 문제를 일으켰다. 문관 중심의 정치로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요와 서하, 뒤이은 금과 원까지 대응하는 동안 병사 수가 급증하여 국가 재정에 심한 압박을 가하게 된다.


신종 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은 생산력을 증진하고 재정난을 타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시행되었다. 신법은 주례 정신으로의 복귀를 표방하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사회진보의 방향과 합치되는 것들이 많았고 고위 관료와 결탁한 대지주, 대상인의 힘을 억제하고 군주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왕안석은 우선 청묘법을 시행하여 농민과 소작인에게 낮은 이자로 청묘전을 빌려주어 보릿고개 기간 동안 농민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지주의 고리대적 수탈을 방지하였다. 다음으로 면역법을 실시하여 차역의 무거운 부담으로 농민이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면역전을 징수하여 차역 담당자를 모집하고 지주들로부터도 조역전을 징수하여 겸병을 억제하고자 했다. 또 보갑법을 시행하여 농촌에서 보갑을 조직하고 도적을 잡아 농촌의 치안을 유지하고, 중요 지역에서는 교련을 실시하여 향병으로 활용했다. 보마법을 실시하여 말을 사육하여 군마로 이용했다. 조세 불평등에 대해서는 방전균세법을 시행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그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과세함으로써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했다. 또 농전수리법으로 강남에서 수리전을 대규모로 개발하고 제방을 축조하여 농업생산의 증대를 꾀했다. 북방에서는 어전법을 시행하여 많은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꾸었다. 균수법은 대상인이 상품값을 조작해서 이익을 챙기는 일을 막고 운수비를 줄여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실시된 시역법에서는 상인에게 낮은 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방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채경의 악정은 금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다. 송의 황족은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갔고 포로 신세를 면한 강왕이 송의 부흥을 지향하는 이들을 이끌고 남송을 세운다. 남송의 중심 세력들은 구법당 정치가들이었다.
남송시대가 되면 금과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주전파와 주화파 간에 의견 대립이 정치 주요 의제가 된다. 송은 종래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오랑캐라 천시했던 여러 국가들에게 압박을 당하고 여러 차례 화해를 해야 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한쪽에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이들, 다른 한쪽에서는 민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들로 나뉘게 된다. 서하, 금이 망하고 몽골이 등장하면서 남송도 멸망한다.


송대는 중국 사상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유교는 전통유학에서 새로운 유학인 신유학(송학)이 생겨났다. 송학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또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인쇄술이 발달하고, 나침반을 항해술에 사용하였으며, 화약을 병기로 사용하는 등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