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불학 (하)

진·수(陳隋) 무렵의 지(智顗, 538-97)는 불학의 한 종파의 대사로서 지자 대사(智者大師)로 일컬어졌다. 그 종파는 지의가 천태산(天台山)에 살았으므로 천태종(天台宗)으로 일컬어졌고, 또『법화경(法華經)』을 근본 경전으로 삼았으므로 법화종으로도 일컬어졌다. 이 종은 혜문(文)이 제1조(祖), 혜사(慧思, 515-77)가 제2조, 지의가 제3조이다. 지의는 이 종을 선양 발전시켰고 저술도 매우 많지만 그 내용은 주로 수행방법이고 철학적 흥취가 있는 것은별로 없다. - P355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중생(衆生)은 다같이 이 깨끗한 마음(淨心)이그 본체이다. 범성(凡聖)*의 제법은 그 자체로 차별되고 상이한 모습이 있으나, 이 진심(眞心)은 차별도 모습도 없기 때문에 "여(如)"라고 했다.
또 "진여(眞如)"란 일체의 존재가 진실(眞實)로 그와 같다는 말이다. (일체의 존재가) 오직 진실로) 그와 같은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에[三界唯心 그하나의 마음을 일컬어 "진여"라고 한다. - P356

여래장과 그 안에 포함된 염·정의 여러성과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아니고, 매 하나의 부분이 곧온 전체이다. 따라서 여래장 안에 일체의 성품들이 갖추어져 있지만 잡다한 성의 차별이 없다. 이 방면에서 보면 "여래장 본체는 평등하여 실제로 차별이 없으니 곧 공여래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체의 성품들을 갖추고 일체의 일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여래장 속에도 또한 "차별이 있으니 곧 불공여래장이다." - P359

삼성은 다음과 같다. 출장진여(眞如)와 부처의 청정한 공덕을 진실성이라고 한다. 재장진[在障眞]와 번뇌 성품이 화합한 것이 아뢰야식인데이것이 의타성이다. 6식, 식은 망상 분별을 하는데 이것이 분별성이다. - P360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 진실성이 현현한 것이니 즉 마음 밖에 존재가 없다(心外無法)는 말이다. - P363

모든 범부와 성인이 동일한 업을 만들어 그 공상성을 훈습하기 때문에공상식이 성립된다. 또 하나하나의 범부와 성인이 저마다 각각 다른 업을 만들어 저 불공상성을 훈습하기 때문에 불공상식이 성립된다.………그러나 이똑같이 수용되는 땅(산하대지)은 오직 마음의 형상이기 때문에 공상식인 것이다………이른바 불공상식이란 모든 범부와 성인의 신체 안의 별보(別報)가그것이다. 각각의 범부와 성인은 다른 업을 지어 진심을 훈습하기 때문에, 진심의 불공(不共)의 성이 훈습에 의해서 흥기하여 별보로 현현하기 때문에저마다 차이가 되어 자타가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이 차이 난 응보(報)는 오직 마음의 형상이기 때문에 불공상식인 것이다." - P364

불법(佛法)은 이와 다르다. 일체 존재는 모두 마음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나 심성의 연기는 모습의 차별이 없지 않다. 다시 모습의 차별이 있기는 하나 오직 한 마음을 본체로 삼고 본체를 작용으로 삼기 때문에 실제(實際)는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이것은 (외도처럼) 마음 밖에 실재 사물이 있고 마음이 그속에 편재한다는 것을 일컬어 이른다고 부른 것이 아니다."21)AEMB 190마음 밖에 실재 존재는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다 마음이 현현한것이지만 마음이 모든 곳에 편재한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설과보통 말하는 범신론(神論)과의 차이점이다. - P369

현상세계에 대해서 집착의 마음(執情)이 없으면 다시 현상세계에 머물더라도 지장이 없다. - P373

즉 중생과 제불은 본성 측면에서는 전혀 구별이 없다. 그 차이는 중생은 염업에 의해서 염성을 훈습하므로 생사 등의 염사가 생기고,
제불은 정업에 의해서 정성을 훈습하므로 열반 등의 정사가 생긴다. 그러나 중생은 염사 안에 머물더라도 정성은 전혀 파괴되지 않기에 수시로 정업을 일으켜 정성을 훈습할 수 있고, 제불은 정사 안에 머물더라도 염성은 전혀 파괴되지 않기에 수시로 생사의 세계에들어가 염용(染用 : 염성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 P374

"지혜를 지닌 부처는 정심을 깨닫기 때문에 부처인가? 정심이 자각(自覺)하기 때문에 부처인가?" 1
"두 의미가 다 있다. 하나는 정심을 깨닫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심의자각이다. 두 의미를 논했으나 본질적인 구별은 없다. " - P376

천태종의 교의는 『대승지관법문』에 표현된 것처럼 실로 유식종과 화엄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화엄종은 하나하나의 사물은 모두 진심 전체의표현으로 여겼는데, 『대승지관법문』도 그렇게 보았으며 또 각각의사물이 존재하는 까닭은 여래장 안에 이미 그것의 성이 구비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래장 안에 모든 법의 성이 구비되어 있으므로 일체 법의 성은 하나하나가 모두 여래장 전체이고 영원히그러하고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 P377

무정의 사물도 불성이 있다는 말이다. - P378

남북조시대에 중국에는 자체로 "돈오성불"설이 있었고 당대(唐代)에 이르러 그 설이 크게 성행한 점은 사실이지만, 그 동안의 전수의 자취는 선종 내에 전술된 선종 역사의 주장처럼 정연하고획일적일 수은 없었다. - P381

"무념"은 "모든 대상 앞에서마음이 오염되지 않는 것"이고 "항상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것"을 뜻한다. - P383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고 진여는 생각의 본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념을종지로 세운 것이다. 무념을 이해한 사람은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항상공적(空寂)에 머문다." - P386

"무념"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으면" 오직 "자성은 동요하지 않을" 뿐임을 통찰할 수 있다. - P388

선종의 7가에 대해서 종밀은 말했다.
티끌을 떨어내고 깨끗한 마음보고 방편으로 경을 이해한다는 종파, 계·을정·혜 세 마디에 마음을 쓴다는 종파, 교의와 행실에 얽매이지 않고 식을 멸한다는 종파, 감촉하는 것은 모두 도이니 마음 가는 대로 맡긴다는 종파, 본래부터 일은 없으니 감정을 잊는다는 종파, 향을 전함에 의지하여 부처를 보존한다는 종파가 있다. 고요(열반)의 지혜는 본체를 지칭하니 무념을 종지로 삼는다는 종파는이전의 그릇됨을 모두 벗어나 모두 옳은 점만 총괄하여 수렴했다. - P391

종밀은 나아가 불교 중의 각 파별에서 논한 인생의 기원에 대한이론을 고찰하여 "불교는 천박한 것에서 심오한 것에 이르기까지대략 다섯 등급이 있으니, 첫째 인천교, 둘째 소승교, 셋째 대승법상교, 넷째 대승파상교, 다섯째 일승현성교이다"85)고 주장하며, 앞의 네 종파는 "치우치고 천박하다"고 여겨 척편천(斥偏淺)」장에배열하고, 끝의 한 종파는 "부처의 궁극적 진리의 참된 가르침(佛了義實敎)"으로서 「직현진원(直顯眞源)」장에 배열했다. - P405

타고난 기는 그 근본을 추론하면 합일된 원기(元氣)이고, 일어난 마음은그 근원을 궁구하면 진일(眞一)의 영명한 마음(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마음 바깥에 다른 존재가 있지 않으니 원기 또한 마음에서 전변된 것이다. - P413

종밀은 위로 이전의 불학에 하나의 결산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 이후의 도학에 하나의 서막을 세웠다. 송명 도학의 출현은 이미 점차 준비되고 있었다.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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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설득, 에마,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
1787년부터 1809년-1811년
제목발간년도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1811년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1813년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1814년
엠마Emma1815년
노생거 사원Northanger Abbey1817년
설득Persuasion1818년
사랑과 우정 Love and Friendship1871년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1797년부터 1851년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1818년부터 1848년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빌레뜨, 교수
1816년부터 1855년
  • 조지 엘리엇: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사일러스 마너, 아담 비드, 다니엘 데론다,
1819년부터 1880년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마녀의 마법에는 계보가 없다,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
1830년부터 1886년
  • 이디스 워튼: 석류의 씨, 징구
1862년부터 1937년





정리 차원에서~


이 중 못 읽은 것들이 태반이다. 


작가별로도 시기별로 읽는 게 좋을 것 같아 읽을 때 독서 시 고려해야겠다.

일단 제인 오스틴의 초기 시기 두 작품은 읽었다. 다음은 맨스필드 파크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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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3 14: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책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읽기 전에 읽을 책들이죠. 에휴.... 저 중에서 프랑켄슈타인 하나 읽었다는.... 제인에어나 폭풍의 언덕은 어릴적 축약본.... ㅠㅠ
언제 읽을까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8-23 14:59   좋아요 2 | URL
저도 계속 자꾸 놓치게 되는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정리해놓아야 읽을 듯하여^^; 일단 제인오스틴은 작품 수가 많아서 다 읽으려면 시간이...ㅎㅎ 브론테 자매도 하나 둘씩 읽어두어야 할텐데 저도 마음이 급해집니다.

책읽는나무 2022-08-23 17: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전 이디스 워튼의 <징구> 하나 읽었네요 쩝~
주니어 시절 축약본 이성과 감성인지? 오만과 편견인지? 암튼 기억도 안나는...폭풍의 언덕이랑 읽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다 기억이 어렴풋합니다.
이래갖곤 다락방 여자 책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로군요?
하반기는 여성작가들 고전 소설 읽기로 쭈욱~ 좋긴한데(읽고 싶었거든요^^) 부담도 팍팍입니다ㅜㅜ

거리의화가 2022-08-23 17:10   좋아요 2 | URL
전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프랑켄슈타인 3권 읽었습니다~ 그나마 올해 2권 읽어서 3권을 채운 거네요. 저도 위기감을 느껴서 한달에 한두권이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강제 뽐뿌질을 좀 해야할듯 싶습니다!ㅎㅎㅎ 나무님도 같이 화이팅해요!

mini74 2022-08-24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7권 정도 읽었어요. 그런데 제가 제대로 읽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8-24 13:58   좋아요 1 | URL
미니님. 7권이라니 멋지십니다! 저는 오만과 편견을 예전에 읽어서 기억이 희미하구요. 그때는 리뷰도 안 쓰고 그냥 읽고 끝이라 그런지 더 기억이 안납니다. 아무래도 다시 읽어야 하는게 아닌지~ㅠㅠ 근데 문학 감상은 누구나 주관적일 것 같아요. 작가가 생각하는 의도를 캐치하지 못해도 독자는 다른 데 꽂혔을 수도 있는거고. 이런건 나쁠 것은 없다 봅니다.

새파랑 2022-08-26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저 중에 여덟권 읽었네요 ㅋ 신기하네요 ^^

거리의화가 2022-08-26 17:19   좋아요 1 | URL
와 역시 문학을 많이 읽으셔서!^^👍👍👍👍
 


정희진은 글쓰기를 위한 방법론으로 융합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융합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융합은 더하기도 아니고 하나로 합치는 것도 아니고 전문성의 반대말도 아니다. 이는 crossing, 경계넘기다. 그녀는 횡단의 정치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융합은 객관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사유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을 '트랜스버설(trans/versal)'이라고 하며, 횡단(橫斷)으로 번역한다. 단어 그대로 가로지르는 것이다. 가로지름(crossing)은 수직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 재생산하고 다른 의미의 생명체를 만드는 일이다. - P21





서문과 1장을 읽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글쓰기는 어떤 사고방식 때문에 가능했는가." -P10


해당 질문이 머릿 속에 맴돌았다. 내가 하는 공부를 정리하고 나누는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는 생각했지만 사실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과거를 되짚었다.

처음 내가 역사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았다. 일제 시기,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분노였고, 그 다음에는 좌절과 혼란이 찾아왔다. 이후에는 비판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했던 공부는 점점 더 확장 중이다. 다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게 정리되는 것 같지는 않다.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할 것 같다.


'지금 여기'에서 내게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면 '고전'과 만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려면 우선 현재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알고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게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면 다음에는 어떤 공부가 필요한지 깨닫게 된다. - P53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 그 사회의 운명이 달라진다. - P16


나는 누군가 도태되고 소외되어 설움받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더 나은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생각이다.


'생각의 자유'는 희망, 욕망, 망상 같은 비현실을 연속으로 쌓아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는 일이다. 요즘 세상에는 '소름끼치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인프라 온라인이 있다. - P29

생각의 자유는 권리가 아니다.(확실히 해 둘 것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자유일 때만 성립하며, 혐오는 사상이 아니다.)  - P30


생각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와는 다르다는 것. 본인이 하는 생각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되는 발상이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위험하다. 


백인 남성은 자신이 새, 조물주, 신의 대리자라고 착각하고 비서구의 식민지 남성 지식인은 조감하지 못해 안달이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 드론으로 건물은 볼 수 있겠지만 인간과 사회 현상은 볼 수 없다. 드론으로 건물을 관찰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건물의 모습은 각기 다르며, 볼 수 있는 것은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 P57


내가 보는 인식은 결코 전체일 수 없다. 따라서 타인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인식은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작년 11월 정도부터 종이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2개의 신문을 구독한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시간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한 개의 신문을 구독중이다. 덕분에 아침 시간을 조금 더 앞당기고 훓어읽기를 한다. 다른 면은 몰라도 사설 면과 국제 면은 꼼꼼하게 읽는 편이다. 사설 면은 다양한 필진들의 글을 읽는 맛을 느낄 수 있다. 국제 면은 기사가 항상 적어서 아쉽지만 덕분에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매주 시사인을 읽는 것도 있다. 얘도 주간지지만 종이로 받고 있으니까 포함시킨다면 주간지로는 1개, 일간지로는 1개를 읽는 셈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온라인에 올라온 자극적인 이슈 등으로 선택되어진 뉴스를 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글쓰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라는 말에 위안이 되었다. 나는 늘 내 글이 못나 보이고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쓸 글을 주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시간에 쓰는 데 집중하면 될 것을 애써 핑계나 구실을 찾는다. 생각해보니 쓰면서 읽은 것이 정리되고 생각이 승화되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때, 말문이 막힐 때,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곤란은 '작가'의 일상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나의 경우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쓰는 것이 관건이다. - P18



무언가 중구난방의 글이 된 것 같지만 어쨌든 정리하는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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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2 17: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분들의 리뷰를 여러차례 읽었고 거기에서 ‘융합‘이란 단어를 만났어요. 그리고 거리의화가 님의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제가 생각한 융합은 ‘더하기‘ 였습니다. 크로씽, 경계넘기라니. 융합이 그런 뜻을 가져올지 몰랐지만 정희진 쌤이라니, 그렇겠구나! 싶어지네요. 저도 얼른 읽어야 되는데 읽을 거 너무 많아서 자꾸 밀리네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8-22 17:22   좋아요 2 | URL
융합이라는 단어의 오독에 대해서 여러 번 책에서 강조하더군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더하기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실은 학문간 통합 정도로 생각했어요. 완전히 다른 개념이더군요. 읽을 거리는 언제나 많고~ 저는 시간 더 지나면은 시들해질 것 같아서 이참에 읽으려고 꺼냈습니다. 짧은 글 속에도 다양한 주제들이 들어 있어서 생각할 거리가 많네요.

독서괭 2022-08-22 17: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종이신문도 잘 골라야 하긴 하지만, 인터넷 뉴스보다는 훨 나은 것 같습니다. 전 얼마전 유튜브에서 우영우를 검색했다가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박은빈에 관한 가짜뉴스 영상이 버젓이 떠서.. 진짜 뉴스처럼 편집해서요. 이상해서 검색해보니 기사도 났더군요. 좋은 매체와 옥석을 골라낼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이 중요한 시대 같습니다.
이 책 아직 안 사고 버티고 있어요..ㅋㅋ

거리의화가 2022-08-22 21:13   좋아요 2 | URL
종이신문 좌우 두 계열로 보면 좋을텐데 그렇게까지는 여력이 안되더라구요. 어떤 종이신문이든 인터넷 뉴스보다는 나을겁니다ㅎㅎㅎ 유튜브도 그렇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가짜 뉴스가 퍼지는 건 순식간인것 같습니다. 근데 사람들이 이런 뉴스를 봐도 검증을 안하고 그대로 믿고 퍼뜨리니 더 확산되는 문제가 생기죠-_-; 종이신문을 읽는 것이 어쨌든 본인이 읽을 거리니 어떤 것을 선택할 지 고르는 과정도 있어서 도움이 되더군요^^
ㅎㅎㅎ 언제가 됐든 이 책 사실 것 같은데요ㅋㅋㅋ

mini74 2022-08-22 1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어린이신문 받아보는 애들이 정말 부러워서 ㅎㅎ 아이 어릴때 꽤 오래 어린이신문을 받아봤어요. 어른신문 받으면 무료로 주더라고요 그래서 어린이신문 받으려다 어른 신문을 구독한 ㅎㅎ 전 어린이신문애 나오는 아이들 기사가 참 좋더라고요. 줄 그으며 읽는 맛, 두번 다시 보진 않겠지만 오려서 스크랩하는 재미 ~ 화가님 글 읽으니 종이신문 넘기는 소리가 그립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21:16   좋아요 2 | URL
오. 어린이 신문~에 나오는 아이들 기사 굉장히 궁금합니다! 저는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지하철에서 나오는 무가지도 한 때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젠 뭐 그런것도 다 없어지고 오로지 온라인 뉴스만이 판치는 세상이 되버렸네요. 꼼꼼히 읽는다면 스크랩하고 줄긋고 생각도 적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모자라고요. 기사 읽는데 겨우 1시간 남짓이라~ㅎㅎ 그래도 읽는게 도움이 되지요^^*

바람돌이 2022-08-22 19: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융합은 경계넘기라는 말 정말 좋네요. 내가 또는 주변 환경이 내게 쳐놓은 경계를 뛰어넘는건 늘 쉽지만은 않은데 이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서 읽고 쓰야하는거 같아요.
이렇게 열심히 읽고 쓰시는 화가님 그 와중에 일간지까지.... 아 저는 주간지 두개 구독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읽을 때가 더 많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2 21:20   좋아요 3 | URL
저도 저 융합이라는 말이 좋더라구요. 근데 사실 융합 글쓰기보다 더 와닿게 하려면 경계넘기라고 아예 써주는 게 나았을 것 같기도 해요. 저도 저 말이 좋아서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얻을 용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일간지 읽기는 저도 이제 몇 개월 남짓인데 그냥 읽고 마는데 아까운 것 아닌가 생각이 들때도 있으나 역시 종이신문으로 읽는것하고 온라인으로 읽는 것하고 차이가 나더군요. 집중도도 그렇고요^^ 확실히 직접 넘기며 보는 게 더 잘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주간지는 저도 매번 시기를 놓쳐서 뒤늦게 읽곤 합니다ㅜㅜ

청아 2022-08-22 2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에드워드 O.윌슨의 통섭을 읽으려고 빌려왔다가 조금 보고 다시 반납했었거든요. 두껍기도 하고 어려워서요.(하지만 화가님은 뚝딱 읽으실듯한 느낌ㅎㅎ) 이 책을 읽다가 안읽기를, 아니 못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ㅎ
뒤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 와중에 계속 융합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임신중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것 같아요. 저도 종이신문 구독하고 싶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21:23   좋아요 2 | URL
근데 그 책은 굳이 읽으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책에서 그 책을 얘기하길래 뭔가 싶었어요.ㅋㅋ 인문학에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일단 제가 눈길이 가야 하는데 그 책은 가지 않았었습니다~ㅎㅎ
중간 중간에 페미니즘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때 속시원했어요. 이 부분은 제가 정리가 안되어서 쓰지는 못했습니다만~ㅎ
종이신문은 여력이 되신다면 한 번 고려해보셔요!^^

2022-08-22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3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3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3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당의 불학(상)

법사는 "이 네 논서들이 이름과 내용은 다르지만 그 대요는 모두 ‘이제’에 총한 그 내용괄되고 ‘불이(不二 : 두 극단을 피함)‘의 중도를 밝힌 것이다. 만약 이제를 이해하면 네 논서는 명확히 파악되고, 이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네 논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를 해명하면 네 논서를 깨우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뭇 경전을 다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제불(諸佛)이 모두 이제에 의거하여 설법한다고논서는 말하기 때문이다. - P294

불가의 학자들은 홍황사의 도랑의 가르침을 받들어 세 단계의 이제 이론을 수립했다. 제1단계 이제는 유(有)라고 말함은 세제이고, 무(無)라고 말함은 진제임을 밝힌다. 제2단계 이제는 유라고 말하고 무라고 말함은 모두 세제이고, 유도 무도 아니다고 즉 둘이 아니다고 말함이 진제이다.……제3단 - P294

계 이제의 의미는 이제란 ‘유’·‘무’는 둘(二)이면서 또 ‘불이(不二)’도 아니다는 것이니, 둘이라고 말하고 둘이 아니다고 말함이 세제이고 ‘둘이 아니고‘ ‘불이도 아니다‘고 말함이 진제이다. 이렇듯 이제는 세 단계가 있어서모든 설법은 반드시 이제에 의거하고, 모든 발언은 이 세 단계를 벗어나지않는다. - P295

현장의 일생 사업은 세친(世親,400-80?,바수반두)과 호법(護法, 530-61) 일파의 불학을 중국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가 창도한 종파는 중국적 사상 경향이 가장 적다. 그러나 그의 교의는 극히 철학적 흥취가있다. - P299

현장이 서술한 유식 사상의 핵심은 "환화인은 참된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있었다. 각각의 핵심이 달랐던 만큼 강조한 내용도 달랐다. 현장 역시수행자의 성불 이후의 활동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언급하지않았는데 강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단지 일부의 사람에게만 부처의 무루종자가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람마다 모두불성이 있고 사람마다 모두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식(識)이 "의타기(依他起 :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남)"이니 그 속의 종자도의타기일 것이므로 한 번 생성되어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수는 있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성불할 가능성은 다르다. 또 그가 말한 수행은 반드시 일정한 단계가 있었으니 돈오(頓悟)가 아닌점수(漸修)를 주장한 셈이었다.
당시에 현장이 논한 불학을 그르다고 여긴 사람이 있었는데 법장(法藏, 643-712)이 그 대표자이다. - P334

법장은 하나의 영원불변한 진심을 세워 일체 현상의 근본으로 여겼으니, 그의 설은 하나의 객관적 유심론이다. 주관적 유심론보다 객관적 유심론이 [소박한] 실재론에 가깝다. 그 설에 따르면 객관적 세계가주관을 떠나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객관적 세계 속의 각각의사물은 모두 진심 전체의 현현이므로 그것의 진실성은 상식에서 진실로 여기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우월하다. 법장이 말한 공은 현장이 말한 공의 공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법장의 말에 따르면 "사(事)" 역시 당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은중국인의 사상 경향이기도 하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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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임신중지에 다가가 이를 경험하고 기억할 때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철저히 제한돼 있다. 여성의 선택을 분명히 제한하자고 호소해서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수사가 제한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선택이라는 개념은 임신중지의 맥락에서 규범화된다.

임신중지의 탈정치화는 선택이라는 수사를 통해 이뤄진다. 임신중지에 들러붙은 감정은 임신중지의 사회적 의미를 자연적인 것처럼 만들고, 임신중지에 대한 가정을 진실로 유통하는 주요 수단이다.

임신중지를 선택한다는 의미에 들러붙어 그 의미를 바꿔 놓는 감정들은 이미 ‘줄 세워진’ 행동 규범에 여성을 복귀시켜 ‘일직선으로 정렬하는 장치’다. ‘어려운 선택’이라는 서사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함으로써, 자연히 또 자동적으로 ‘행복의 대상’인 태아에게 이끌리던 발걸음을 반대로 돌린다고 전제한다. 이때 여성이 임신중지를 하는 여러 이유(대학을 마치지 못해서,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없어서, 독신이어서 등등)가 강조된다. 이런 식으로 임신중지를 정당화하는 일은 흔하다.

감정경제는 충돌하는 두 여성성을 화해시키려 한다. 하나는 여성의 자유를 ‘선택’을 통해 설명하는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이다. 다른 하나는 ‘모성’을 여성의 정박지로 고정하는, 엄격히 제한된 젠더규범이다. ‘어려운 선택’과 ‘태아중심적 애통함’을 인용하는 일은 임신중지 여성에게 ‘모성적 주체’라는 문화적 생명력을 복구해 준다.

임신중지를 숨기는 여성 비율이 높다는 것은, 임신중지를 겪어 본 적 없는, 더군다나 임신중지는 고사하고 임신도 하지 않을 남성들이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장본인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떻게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고, 이를 경험해야 하는가’라는 기대가 재현의 영토를 지배해, ‘좋은 여성’에 관한 젠더 전형ㆍ이미지ㆍ이상에 길을 터 준다.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은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길 거부한 ‘이기적인 어머니’. 임신중지에 어떤 일이 따르는지, 그 심리적ㆍ감정적 후유증이 어떠한지도 모른 채 아이를 죽인 ‘불운하고 취약한 희생자’. 이와 반대로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것을 지지하는 이들은, 여성에게 임신중지를 ‘강요하는’ 경제적ㆍ사회적 상황을 강조한다.

나는 임신중지가 축하받을 일이라고 본다. 임신중지는 의도치 않게 임신을 한 여성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재생산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 재생산과 분리된 이성애 섹스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다. ‘의도치 않게 임신한 여성’이라는 위치는 담론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다.

‘좋은 어머니’는 젠더ㆍ인종ㆍ계급ㆍ섹슈얼리티 등 정체성이 교차하며 형성된 주체로서, 그 정체성들의 역학관계를 떠받치고 강화했다. 다른 말로 하면, 임신중지 재현은 고정된 사회질서를 만드는 수단, 즉 고정된 질서와 그 안에 자연화된 역학관계가 도전받을 때 거기에 대응하는 수단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무언가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비쳐야 한다. 그래야 규제가 유지된다. 이 책에서 보았듯, 반임신중지 운동 역시 ‘정보를 갖춘’ 선택이라든지 ‘진정한 선택’을 옹호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정책의 목표는 (물론 이게 바로 그 효과이기도 한데)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오히려 여성이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게끔 방지하는 정책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택의 주체는, 이를테면 여성이 무한한 선택지를 가졌고,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모성을 선택한다고 하는 식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여기서 그 주체는 여성의 재생산적 신체라는 차원에서, 선택에 깃든 긴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균형은 깨지기 쉽다. ‘자율성’과 ‘선택’이 있는 곳에 ‘제약조건’과 ‘의존’이 있다. 개인의 선택은 정치적이다.

임신중지 법이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근원은 아니다. 법은 젠더ㆍ임신ㆍ모성 규범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자유’를 ‘선택’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평등의 구조적 양식을 은폐하는 일이다. 재생산 정의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 법을 내세울 때 비슷한 효과가 난다.

괴로움ㆍ애통함ㆍ수치라는 지배적인 각본과 그 대안이 되는 문화적 서사는 늘 같이 존재해 왔다. 이 책의 경우 전자에 주목했고, 그런 각본에 따라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영토는 획일성을 띤다. 그러나 문화 지형을 살펴보면 이질성이 뚜렷하다. 이를테면 몇몇 프로초이스 활동가는 임신중지로 여성에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심리적ㆍ감정적 효과란 없다고 꾸준히 말해 왔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룬 임신중지 서사 헤게모니는 기본적으로 ‘반임신중지’ 입장이다. 이는 소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 서사에 근거한 임신중지 정치는 개별 경험의 정치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임신중지 정치가 임신중지를 하려는 혹은 하고 난 여성의 느낌으로 환원되면, 그 느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광범위한 사회ㆍ구조ㆍ정치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를테면 양육에 대한 결정, 또 그런 결정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평가와 판단을 손쉽게 하거나 감추는 ‘젠더화된 노동분업’과 ‘계급ㆍ인종에 기반한 불평등’, 임신중지와 피임의 구별이나 원치 않은 임신을 막기 위해 여성에게 부여되는 책임 등 역사사회학적 질문, 임신의 조건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 등이 있다.

임신중지의 감정 경험을 획일적으로 재현하면 자연화된 여성 주체가 만들어진다. 그 감정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말이다. 여성의 삶과 열망의 이질성은 임신중지의 단일한 서사에 포착될 수 없다.

‘무엇이 행복한 임신중지의 가능성을, 가장 좋게 봐서 규범을 위반한 것, 가장 나쁘게 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임신을 원치 않은 여성의 관점에서 임신중지를 바라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이 있고 그 수단이 비교적 직접적이며 고통을 주지 않는데도 자꾸만 불행으로 재현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터무니없다.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캠페인은 프로초이스 운동과 학계에 반드시 필요하다.

임신의 불확정성을 인정한다면 유산 혹은 임신중지에 뒤따르는 다양한 경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산한 여성, 한때 원했던 임신을 중지한 여성, 원치 않은 임신을 중지한 여성은 다양한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런 경험들은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이 아무리 임신을 ‘아이와 어머니’라는 단일한 재현에 묶어 내려 하더라도, 서로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임신중지 여성을 평가하려는 고정된 규범이 없을 때, 수치나 죄책감은 임신중지의 정동적 지형에서 사라질 것이다. 모성을 해체해 여성에게 행복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임신중지를 분명 여성의 선택으로 새롭게 프레이밍하되 자율적 행위자가 내린 선택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획에는 오늘날 임신중지의 감정으로 인식되는 것들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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