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미술 순례 1 - 일본 근대미술의 이단자들 나의 일본미술 순례 1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연립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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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으나 역시 재미 있었다. 원래 여행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에 하나의 주제를 기반으로 정리한 책을 좋아하는 탓이다. 또 서경식 선생님의 디아스포라적 위치, 자기 재인식의 사유를 담은 문장들이 있으니까.

얼마 전 펀딩을 한 2권을 읽기 전 이 책을 먼저 읽기 위해 집어 들었다. 


저자는 일본 근대 미술을 언제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 소개된 미술가들은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나 보편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는,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이단자’들이 표현한 미술이다. 또 자신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조선보다 일본에 아무래도 더 친숙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쓸 당시 코로나로 전 세계가 시름하고 있을 때였던데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된 상태였기에 개인적인 안타까움도 덧붙여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일본 미술을 미화하자는 것도, 비난하자는 것도 아닌 일본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거울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총 일곱 명의 미술가를 다루는데 이중 아이미쓰와 마스모토 슌스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카무라 쓰네의 <두개골을 든 자화상>은 두개골을 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다. 두개골은 서양화에서도 익숙한 그림의 등장 소재다. 두개골은 죽음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17세기부터 ‘바니타스’라는 형식으로 북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시작되었는데 전통적으로 정물과 해골을 함께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화상 속 인물은 두 뺨이 붉게 물든 것을 통해서도 어딘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도 표정은 두려움 같은 감정을 초월한 모습이다. 저자도 그 점이 신기해서 이 그림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나카무라 쓰네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시인이자 언어학자, 동화작가인 바실리 에로센코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초상화는 근대 일본 서양화의 대표작으로 남았다고 한다(에로센코는 루쉰과 교류하고 염상섭, 박헌영과 만남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 한국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에스페란토어로 남겼다니 놀라웠다). 


사에키 유조는 ‘요절, 파리, 화가’라는 세 가지 요소를 지녀 일본 근대 미술의 신화로 남았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그린 자화상은 공교롭게도 앞서 언급한 나카무라 쓰네의 바실리 에로센코의 자화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다 1924년 파리로 건너가 만난 야수파 화가 모리스 블라맹크에 의해 비난을 받고 충격을 받은 뒤 그린 자화상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그렸다. 그는 일본 근대미술의 정통 아카데미즘적 화풍에서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냈다. 사에키의 주변에는 조선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후지시마 다케지는 그가 미술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으로 짧게나마 조선에 체류하며 작품을 남기고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맡기도 했다(그는 조선 화가 오지호의 스승이기도 하다). 미술학교 선배인 이시이 하쿠테이, 친구인 야마다 신이치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여러 번 맡았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된 이후 서양화를 그리던 대부분의 일본 화가들은 전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그 흐름에 앞장선 대표적인 화가다. 그런데 그는 전쟁이 끝나도 이에 대한 반성은 커녕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고 심지어 유럽으로 가 이름을 바꾸고 남은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이 흐름에 예외라 할 수 있는 부류가 아이미쓰와 슌스케다. 


아이미쓰의 <눈이 있는 풍경>은 서양의 초현실주의 대표 미술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적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붉은 기운에 휩싸여 있다. 저자는 2020년 예술학 강의에서 ‘전쟁과 미술’을 테마로 삼았을 때 이 그림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학생들의 감정도 남달랐다고. 이 그림은 1938년 그려졌다. 1938년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군국주의의 기치를 내건 이후다. 그림 속 묘사는 당장의 현실은 아니지만 미래를 예견한 듯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다. 아이미쓰는 전쟁화를 그리지 않았다. 조각가 이데 노리오의 회상에 따르면 어느 날 모임에서 화가 후루사와 이와미가 “요즘은 군부에 협력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해.”라고 말했을 때, 아이미쓰는 히로시마 사투리로 “아무리 그리 말해도 나는 전쟁화는 못 그려, 어쩌면 좋지?”라고 울먹였다고 한다(P113). 그는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시류에 편승하는 화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미쓰의 <눈이 있는 풍경>은 현대미술가 야나기 유키노리에 의해 <고질라 프로젝트-눈이 있는 풍경>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 정치, 우익 단체에 의해 전시 설치를 지속적으로 방해받는 등 우여곡절이 많다. 과거의 망령은 여전히 떨쳐지지 못했다. 


마쓰모토 슌스케의 그림은 대체로 어둡고 음울한 색채와 분위기를 지녔다. 슌스케는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열 살부터는 모리오카시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갑작스런 고열 이후 얻은 청각장애로 원래 꿈이었던 엔지니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다행히 형 덕분에 붓을 잡으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신념’이란 말이 번번히 입에 오른다. 하지만 오히려 현대의 지식인이나 젊은이에게 신념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반성하는 양심이 있다는 증거다. 신념의 부족보다도 몽매한 신념이 얼마나 크나큰 재앙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 잡기장, 1937년 4월호 (P208)

그는 아내와 함께 발행한 잡지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충성과 신념을 강요당하던 시대 몽매한 신념을 부르짖는 일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스즈키 구라조가 기고한 미술가가 국가를 위해 붓을 휘둘러야 한다는 글에 대해 예술의 휴머니티로 논박한다. 물론 그의 휴머니티에 대해서는 곱씹을 필요가 있다. 슌스케는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저항한 예술가의 전형으로 추켜세워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이자 인도주의인 휴머니티의 구체적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그가 일본의 군국주의이자 대동아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런 시대 속에서 그가 예술가로서 최선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한다. 


7명의 화가 중 4명의 화가를 언급했을 뿐이지만 나머지 인물들도 흥미롭다. 책은 각 화가의 작품과 삶의 궤적, 그와 관련된 인물들과 역사를 언급하고 있기에 근대 시기 예술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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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02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엄청 궁금한데 참고 있던 책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뒤로 뒤로 미뤄두고 있는데,,, 모른척 할 수가 없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1-02 08:39   좋아요 1 | URL
책이 궁금해지셨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네요. 즐거운 책읽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대타자의 존재를 내 생명에 대한 공격으로, 생물물리학적으로 제거해야만 내 생명의 잠재력과 안전을 강화될 수 있는 그런 치명적 위협 또는 절대적 위험으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근대 초기와 후기 모두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적인 주권의 여러 상상적 차원 중 하나라고나•는 주장한다. 허무주의와 권력에의 의지 선언을 존재의 본질로서 다루든, 인간의 대상되기becoming-object로 이해되는 물화의 문제를 다루든, - P138

또는 모든 것을 비인격 논리와 계산 가능성과 도구적 합리성의 지배에 복종시키는 문제를 다루든 상관없이, 전통적인 근대성 비판 대부분을 이런 지각의 인식이 뒷받침하고 있다. - P139

영원을 향한 욕망 속에서 포위된 몸은 두 단계를 통과한다. 첫째, 몸은 단순한 사물,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가소적인 단순한 물질로 변환된다. 둘째, 몸이 죽음에 처해지는 방식, 즉 자살이 그 몸에 궁극적인 의미를 준다. 몸의 물질, 또는 다시 말해서 몸으로서 존재하는 물 - P172

질은 사물로서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 바깥의 초월적인 노모스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포위된 몸은 희생을 통해 영원한생을 존재하게 하는 금속 조각이 된다. 몸은 스스로를 이중화하고,
죽음 속에서 글자 그대로 또는 은유적으로 포위와 점령의 상태로부터 탈출한다. - P173

파괴의 충동은 먼저 내부의 타자를 표적으로 삼으며 시작된다. 나치 통치하에서 독일 민족의 몸에 퍼져 있다고들 하는 썩은 조각인 유대 민족을 절멸시키려는 명령이 이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주체그 자체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이 경우 파괴는 "외부 세계에서 되돌아와 주체를 향하고", "시의적으로 맞지 않는 일을 하도록, 자신의익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현실 세계에서 그에게 열린 전망들을 파괴하도록, 결국 그 자신의 실제 존재를 소멸시키도록" 주체를 밀어붙인18다.‘ 식민주의, 파시즘, 나치즘은 외부라고 생각되던 세계가 주체로 회귀하는 극단적이거나 병리적인 세 가지 형태라 할 것이다. - P189

"나는그저 다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일 수 있기를 바랐다. (...) 나는사람이기를, 오직 사람이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다른 사물들에 둘러싸인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은 차이의 명령에 의해 저지된다. 인종의 주체, 즉 차이로 규정되는 주체에 대해 인종주의는 "네그르의 행실 conduite de Negre"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이는 따로 놓인 사람의 행실인데, 왜냐하면 네그르는 따로 떨어뜨린 인간들의 일부-따로 떼어진 몫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명예와 치욕에 귀속되도록 배치된 일종의 ‘잔여물‘이 되는 것이다. - P210

성의 두 양상의 중심에 팔루스phallus가 있다. … 식민지 상황-그러므로 인종주의적 상황에서 그것은 삶에 대해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발기,
돌출, 그리고 침입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상징한다. 팔루스에 그 물질성이나 그도 아니라면 최소한 그 살아있는 살을, 감각의 영역을 증언하는 능력, 모든 종류의 감각과 진동과 전율(색, 향기, 촉감, 무게, 냄새)을느끼는 능력을 회복시켜주지 않고서는 발기, 돌출, 침입에 대해 말할수 없다. 인종적 지배의 맥락에서, 따라서 사회적 소수화의 맥락에서, 네그르의 팔루스는 무엇보다 거대한 자기 긍정의 힘으로서 인식된다. 그것은 완전히 긍정하는 동시에 위반하는 힘, 어떠한 금기로도억눌리지 않는 힘의 이름이다. - P216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e[아프리카 미래주의]은 20세기 후반 디아스포라에서 등장한 문학적, 미학적, 문화적운동이다. 이는 SF, 흑인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의 기술에 대한 성찰, 마술적 리얼리즘, 비유럽적 우주론을 결합하여, 소위 유색인종의 과거와 현재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P260

다양한 유형의 상호작용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대립시키는 개념들을 서로 연결한다. 과거는 현재 속에 있다. 이는 반드시 과거가 현재를 반복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현재 속에서 굴절되고, 때로는 그 틈새로 스며들어 자신을 암시한다. 혹은 단순히 시간의 표면으로 다시 살아나, 시간의 표면을 회색빛으로 공격하고, 포화시키고, 읽을 수 없게 만들려고 한다. 가해자는 피해자 속에 있다. 고정된것은 움직임 속에 있다. 말하기는 침묵 속에 있다. 시작은 끝에 있고끝은 중간에 있다. 그리고 모든 것, 아니 거의 모든 것이 서로 얽힘, 불완전, 확장과 수축 속에 있다. … - P270

아카이브 자료에 침투한다는 것은 흔적을 다시 방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바로 그 경사면을 파고드는 것을 의미한다. - P276

않다. 인류는 영원히 창조 중이다. 인류가 공유하는 바탕은 취약성vulnérabilité인데, 이는 고통과 퇴화에 노출된 신체의 취약성에서 시작한다. 이 취약성은 다른 존재들에게 노출된 주체의 취약성이기도 한데, 그 다른 존재들이 경우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취약성에 대한 상호 인정 없이는 배려가 자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돌봄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 P281

모든 건정한 민주주의의 체제에는 말의 물질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이 세상에 작용하는데 우리가 가진 것은 말과 언어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런데이제 말과 언어는 도구, 나노-대상, 기술이 되었다. 그것들은 무한한 재생산의 순환에 흡수되어 스스로를 도구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의식을 강타하는 끊임없는 사건들의 흐름은 우리의 기억 속에 역사로서 새겨지지 않는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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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사실상 두 개의 얼굴을가진 역사, 나아가 두 개의 몸을 가진 역사다. 한편으론 태양의 몸이 - P47

며, 다른 한편으론 밤의 몸이다. 식민지 제국과 노예제 국가-그리고더 정확히 플랜테이션과 유형지bagne3"는 이 밤의 몸의 주요한 상징들이다. - P48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세계는 그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그 권리를 가진 전부, 즉 섞여든 모든 종이 함께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세계다. 이러한 나눔이 가능해지고 이러한 전 지구적 민주주의, 종들의 민주주의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배상에 대한 요구가 불가피하다. - P79

우리의 세계가 되어버린 슈미트의 세계에서, 적의 개념은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결코 은유나 공허하고 생명 없는 추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단순한 경 - P95

쟁 상대나 적수가 아니며, 우리가 적대하거나 반감을 느끼게 하는 사적인 라이벌도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 적대antagonisme suprème를 가리킨다. 그는 그의 몸과 살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물리적으로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 그런 자이다.
적으로부터 친구를 가려내는 것은 물론이고, 적을 확실하게 식별해야 한다. 편재성이라는 당혹스러운 형상으로서, 그는 이제 어디에나 있는 만큼 더 위험하다. 얼굴도 이름도 장소도 없다. 혹 그에게 얼굴이 있다면 베일 쓴 얼굴, 얼굴의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혹 그에게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차용한 이름-그 첫 번째 기능이 은폐인 가짜이름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때는 가면을 쓰고서 때로는 민낯으로나아가며, 그는 우리 사이에서, 우리 주변에서, 우리 가운데에서, 한밤중에도 대낮에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으며, 매번 출현할 때마다 그가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 양식 그 자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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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X : 관상지주
바오수 지음, 허유영 옮김 / 서삼독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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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는 주인의 뿌리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꽁꽁 감추고 있었다.‘ 관념과 실재는 뒤섞이고 시간 관념조차 정의내리지 못하는 고차원의 세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우주에서 탄생과 죽음, 윤회를 떠올리며 누군가를 알아보는 마음과 진심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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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타이완 여행기 - 2024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 2024 일본번역대상 수상, 2021 타이완 금정상 수상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 마티스블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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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소설가 치즈코는 1938년 타이완을 방문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자신의 소설 《청춘기》를 각색해 만든 동명의 영화를 감명깊게 본 현지부인단체 〈닛신카이〉가 타이완 총독부와 연합하여 초청장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전에 일본 촐판사에서 모든 경비를 대줄테니 타이완으로 가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의도가 불순하다 생각하여 가질 않았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늦었는데 결혼도 안한다며 성화였고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집안의 잔소리도 피할 겸 타이중으로 떠나오게 된 것이다.

타이중 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인 거리로 향한 치즈코는 과일 노점상의 판매원과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 부딪쳤는데 다행히 한 소녀의 통역 도움을 받아 위기를 해결한다. 그때 시역소(시청) 직원인 미시마가 그녀를 찾아낸다. 사실 타이중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치즈코는 현지인 거리를 경험하고 싶다며 나선 것이었던 것. 다카다 부인 댁에 도착한 그녀는 그렇게 타이완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시마는 현지에서의 일에 도움을 주고 통역을 맡기로 했지만 치즈코와 사사건건 의견 대립으로 맞지 않았다.
치즈코는 관광객들이 흔하게 먹는 음식이나 계속 먹어왔던 일본 음식보다는 진짜 현지인이 평소 먹는 음식들을 권해주기를 바랐다. 몇 번이나 요구해봤지만 미시마가 한 번을 들어주지 않자 치즈코는 폭발했다.
결국 다카다 부인은 다른 현지 통역사를 소개시켜주는데 알고 보니 그는 과일 노점상에서 도움을 받은 그 소녀였다.

그녀는 왕첸허로 이름이 치즈코의 한자와 같았으니 결과적으로 둘은 이름이 같은 셈이었다. 치즈코보다 3살 어린 첸허를 치즈코는 샤오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치즈코는 관광 여행이 아닌 현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위해 1년 정도 살 집을 원했다. 다카다 부인은 그녀의 생각을 이해했고 무사히 그렇게 1년 동안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치즈코는 샤오첸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샤오첸은 일본어, 타이완어, 하카어, 영어에 능했고 프랑스어도 접해본 언어 능력자였고 어린 나이임에도 처세술에 아주 능했다. 조용하지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해야 할까. 샤오첸은 식민지 부유한 가문인 서출 출신이었다. 치즈코는 샤오첸과 친구가 되기 위해 무척 공을 들이는데 반대로 샤오첸은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노력한다.

때는 1938년 타이완이 배경이다. 타이완은 일본의 첫 식민지였고 1938년 무렵에는 이미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까지 통과하는 철도가 놓여진 후였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라 철도 내에서는 주먹밥과 매실 장아찌만 있는 도시락만 파는 것이 허용된다. 이처럼 일본의 식민 정책으로 내지와 본섬 현지인 간의 동화 정책이 시행되는 만큼 일본의 음식이나 풍습, 문화 등이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 차별은 자행되고 있었다.

˝사기업에 고용된 혼토진 여성 통역사는 잡역부와 같은 거 아닌가요?˝
이런 말을 뱉고 있는 현지 농림 전문학부의 Ⅰ 서기 얼굴에서는 부끄러운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통역을 맡는 여성은 확실히 소수지요. 게다가 혼토진이잖아요. 실질적인 전문성이 있나요? 예전에 학교 선생으로 일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공학교에서 가르쳤던 것뿐인데요...˝ - P67
공학교는 타이완인이 다니는 학교를 지칭하고 내지인이 다니는 다니는 학교는 소학교라고 불렸다. 치즈코는 이처럼 샤오첸이 자신의 통역사로 일하면서 겪는 일들을 부당한 차별이라 생각한다. 내지인이고 남성이었다면 결코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오첸은 치즈코가 보기에 적극 대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치즈코는 그런 샤오첸이 때론 답답하다. 게다가 자신을 업무적 위계 관계가 아닌 친구처럼 동등한 관계로 대해주었으면 하지만 이마저도 잘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혼토진이자 통역을 맡은 제가 비서 업무를 수행하길 기대한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본섬 출신 통역사는 내지 작가의 전속 직원인 셈이지요. 겸상이 적절하지 않답니다. ... 함께 식사하려면 반드시 평등한 관계여야 하니까요.˝ - P114

˝토인삼은 가짜 인삼이죠. 이 세상에는요. 저를 왕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의 눈에는 첩실의 딸이자 본섬 국적의 여학생일 뿐이에요. 저는 그저 진짜처럼 꾸며진 채 사람을 속이는 가짜 인삼이죠.˝ - P254

타이완은 다양한 구성의 사람들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청(복건성 등)에서 내려온 한족인 하카인이 있고 가오사족이나 핑푸족처럼 다양한 타이완 원주민이 있다(번인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는 당시 일본인이 그 사람들을 부르던 멸칭이라고 한다). 푸라오인은 하카인 중 타이완어를 쓰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다양한 구성의 사람들이 살다 보면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었을 듯하다.

치즈코가 왕첸허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첸허 씨는 어느 종족에 속하나요?˝
˝아오야마 선생님 매우 교활한 질문이네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 천황의 자식이죠. 민족도, 내지인이나 외지인을 구분하지도 않....˝ - P57~58
왕첸허의 ‘교활한 질문‘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그들도 식민지인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도 이런 답을 한 것은 이미 수년의 시간이 흘러 이런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게 일본 제국주의가 원하는 답이기는 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치즈코는 제국의 정책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제국의 ‘남진‘, 제국의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은 식민지에서 천황국의 동화 운동이 되었다. 이건 사람들이 저마다 지닌 서로 다른 문화와 교양을, 그 흔적을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행위다. ...
‘전쟁 앞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강력히 주장하면서 큰 소리로 외치곤 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전쟁이 여성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은 내지나 본섬이나 차이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 P161

치즈코는 샤오첸 앞에서 자신은 제국이 하는 행위(와 일본인의 차별적 행위)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며 계속해서 그녀의 동의를 구하려 한다.

˝내지에서 가져온 벚꽃을 강제로 본섬 땅에 심는 게 너무 제멋대로 같지는 않나요? 샤오첸도 이렇게 생각하나요?˝ - P151

˝재작년에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로 짧게 여행을 갔었거든요. 홋카이도 이누이족과 오키나와 류큐족의 고유한 생활 방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더라구요. 두 지역의 개척은 메이지 초기의 일이었데 말이에요! 일장기, 대일본제국, 천황의 백성은 모두 야마토 민족이다.... 이건 제국의 염원이겠죠.
... 식민지 타이완, 조선, 만주국은 머지 않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가 걸어갔던 길을 걷게 되겠죠.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 P165

˝예전에 사람들이 그랬어요. 내지인은 러우싸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여긴다고요. ‘내지인은 사시미만 먹는다‘ 같은 경고를 들은 적도 있고요. ...˝
˝어떤 게 미식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 편견을 가진 게 분명해요.˝
˝본섬 사람의 러우싸오와 내지인의 사시미는 ‘더럽다‘와 ‘깨끗하다‘로 나뉜답니다. ... 본섬의 장삼과 내지인의 와후쿠도 마찬가지죠.˝
˝러우싸오와 사시미는 모두 미식이에요. 장삼과 와후쿠도 다 아름답고요. 저한테는요. 세상 만물에 있어서 본질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 P202~203

치즈코는 샤오첸을 위한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샤오첸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치즈코의 방식은 제국주의의 얼굴인 오만과 편견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둘의 관계는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둘의 관계는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 타이완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당시 타이완에 살고 있던 상황을 여러 모로 떠올려보게 된다. 이 책은 아오야마 치즈코가 쓴 소설을 양쐉쯔가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양쐉쯔의 번역본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다. 여행기라고 하지만 엄연히 소설이므로 실제 여행기가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닐 테고 일부는 좀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허구적인 내용도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당시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충분히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단 지배-피지배, 남성-여성 간의 위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친구라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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