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식민화와 기독교화

캘리번과 마녀는 식민화에 저항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상징하는 템페스트』의 등장인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이란 신세계 주민들의 종속과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일어났던 유럽 민중들, 특히 여성들의 종속 간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토지에서 지역공동체 전체를 강제로 몰아냈고, 빈곤이 엄청나게 확산되었으며, 민중들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관계를 파괴하는 "기독교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또한 구세계에서 발달된 억압의 형태들이 신세계로 이전된 뒤 다시 유럽으로 재도입되는 꾸준한 교차수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의 차이를 과소평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금과 은을 비롯한 여러 자원들이 유입되자, 국제분업이 일어나 새로운 글로벌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상이한 계급관계와 규율체제로 분할했다. 이는 노동계급 내에서도 종종 갈등을일으키는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인들과아메리카인들이 겪어야 했던 유사한 처우는 자본주의의 발달을 지배하는 단일한 논리의 존재와 이 과정에서 자행되는 만행의 구조적 성격을충분히 보여 준다. 마녀사냥이 아메리카의 식민지로 확산된 것은 이와관련된 중요한 사례다. - P311

16세기와 17세기, 심지어는 18세기에마저 인간의 피(특히 비명횡사한 사람들의 피)는 여러 가지 액체에 인간의 살을 담가서 추출해낸 미라수mummy water의 형태로 많은 유럽국가에서 간질을 비롯한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데 흔하게 사용되었다.
게다가 "살, 피, 심장, 두개골, 골수 등 여러 신체 부위들과 관련된 이런식인풍습은 "사회 주변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가장 존경받는 집단 내에서도 시행되었다"(Gordon~Grube 1988: 406~407).7 따라서 스페인인들이 1550년대 이후 원주민들에 대해 느꼈던 새로운 공포는 단순히 문화적 충격에서 기인했다고 보기가 힘들다. 이는 오히려 노예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서 인격을 박탈하고 이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야만했던 식민화의 논리 속에 내재한 반응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 P317

스팔딩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상숭배 캠페인은 본보기형 처벌이었다. 중세 유럽의 공개적인 교수형처럼 참가자들만이 아니라 청중들을 대상으로 교훈적인 공연을 펼치기 위한것이었다(같은 책 : 265).
이들의 목적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죽음의 공간"16을 만들어 내는것이었다. 이로써 잠재적인 반란자들이 공포에 마비되어 공개적으로구타당하고 모욕당한 사람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시련에 맞서려 하기보다는 무엇이든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도록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 지점에 있어서 스페인인들은 부분적으로 승리했다. 고문과 익명의비난, 공개적인 굴욕 앞에서 많은 유대와 우정이 산산이 부서졌다. 자신들의 신이 힘을 가졌다는 신념이 약해졌고, [지방신에 대한] 숭배는 정복되기 전처럼 집합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은밀한 개인적 행위로 변해갔다. - P327

스페인인들이 도착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이들은 여성혐오적 신념을 주입하여 남성들에게 우호적인 방식으로 경제 및 정치권력을 재조직했기 때문이다. 전통 족장들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토지를 인수하고, 공동체의 여성구성원들이 토지와 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은 이로 인한 고통 역시 감내해야 했다.
따라서 식민지 경제 내에서 여성들은 (엔코멘데로스, 성직자, 식민지대리인들을 위해) 하녀로 일하거나 공작소의 직조공으로 전락했다. 여성들은 남편들이 광산에서 강제노역]미따 일을 할 때(사람들은 이 일죽음만도 못한 일이라고 여겼다) 이들을 따라가야 하기도 했다. - P329

유럽인들의 환상 속에서 아메리카 그 자체는다가오는 낯선 백인을 유혹하며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신의 여성이었다. 때로 "인디언" 남성들 스스로가 경제적 보상이나 공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 여성 친족들을 사제나 식민자들에게 바치기도 했다. - P330

이런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라틴아메리카 혁명군들이 캘리번의어머니인 마녀 시코락스가 아니라 캘리번을 식민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캘리번은 주인에게서 배운 언어로 주인을 저주하는 방식으로만 주인에게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반란에 있어서는 "주인의 수단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캘리번은 속임수에 넘어가서 자신의 해방이 강간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있고, 자신이 신으로 숭배하는 신세계의 일부 기회주의적 백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로 성취될 수 있다고 믿게 될 가능성이 있다. 대신 "달을 통제하고, 조수간만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녀 시코락스(『템페스트』, 5막 1장)라면 아들에게 대지, 물, 나무, "자연의 금고" 같은 지역적인 힘과 공동체적 유대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도록 가르쳤으리라. 고난의 수 세기를 거치면서도 공동체적 유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해방투쟁에 자양분을 공급해 왔고, 이미 어떤 약속의형태로 캘리번의 상상을 사로잡았다. - P334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부르주아의 레파토리에서는 마녀사냥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화와 기독교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식민화된 사회의 신체에 확실히 이식되어 피식민 공동체 스스로 자신들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실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P34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3-08-13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을 읽고 있는데요. 이 책이 자꾸 언급되니 읽어야 하나 막 생각이 드는..... 하지만 어려운 책 이제 안 읽고 싶어 이러면서 보관함에만 넣어두고 마는데 이렇게 열심히 읽으시는 화가님 보면서 반성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8-13 17:42   좋아요 2 | URL
앞서 그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었어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사실 정리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 리뷰는 못 쓸 것 같지만 읽고 나니 잘 읽었다 싶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4장 유럽의 대마녀사냥

마법을 사형으로 처벌하기로 한 것은 찰스 5세가 1532년 제정한제국법규 <캐롤라이나> Carolina였다. 청교도 잉글랜드에서는 1542년과1563년, 그리고 1604년에 통과된 세 개의 의회법안을 통해 마녀박해가성문화되었는데, 이중 마지막 법안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위해가 없더라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1550년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스위스, - P242

프랑스,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도 마녀의 사술을 중대 범죄로 규정하고 국민들에게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규탄하도록 조장하는 법규와조례가 통과되었다. 이후 몇 년간 사형대상자의 범위를 확대하고, 마녀의 사술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해가 아니라 사술 그 자체를 중대 범죄로 규정하는 법규정들이 재차 만들어졌다. - P243

마녀사냥은 인구집단 내에 집단적인 정신질환을 유발하기 위해 멀티미디어 선동을 활용한 유럽 최초의 박해이기도 했다. 인쇄매체가 최초로 한 일은 마녀들의 세세한 악행과 가장 유명세를 탄 재판을 홍보하는 소책자를 통해 마녀로 인한 위험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Mandrou 1968 : 136). 이를 위해 예술가들을 모집했는데, 이중에 독일인 발둥Hans Baldung은 가장 지독한 마녀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박해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법학자. 치안판사 · 악마연구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종종 한 인물처럼 행동하곤 했다. 이들은 [마녀박해를 지지하는 주장을 체계화하고 비판에 답했으며, 법적인 장치를 완벽하게갖춰 놓음으로써 16세기 말엽에는 표준화된, 거의 관료적인 수준의 마녀재판 형식을 마련했다. 이는 국가 간에 자백의 형식이 유사한 이유를설명해 준다.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업무 중에 철학자나 과학자 같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협력을 구할수 있었다. - P245

마녀사냥은 여성에 대한 전쟁이었다. 이는 여성을 비하하고악마화하며 이들의 사회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집단적인 시도였다.
동시에 고문실에서, 그리고 마녀들이 죽어가던 화형대에서 여성성과가정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상이 구축되었다.
여기에서도 마녀사냥은 당대의 사회적 흐름을 증폭시켰다. 실제로마녀사냥이 표적으로 삼았던 관습과 같은 시기 가족생활과 젠더, 소유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입법이 금했던 행위들 간에는 틀림없는 연속성이 있다. 서유럽 전역에서 마녀사냥이 진행되는 동안 간통을 저지른 여성을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대역죄인과 마찬가지로 화형에 처했다). 동시에 매춘과 혼외 출산이 불법화되었고, 영아살해는 중대범죄가 되었다. 33 동시에 여성의 우정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부부간의 동맹을 전복할 수있다며 교단의 비판을 받았다. 이는 마녀박해자들이, 여성들이 서로를범죄의 공범으로 비난하게 만들어서 여성간의 관계가 악마화된 것과견주어볼 만하다. 또한 중세에는 "[여성]친구"를 의미했던 "가십"이라는단어의 의미가 바뀌어 경멸적인 함의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는 여성의 권력과 공동체적 유대가 얼마나 침해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이기도 하다. - P275

마녀사냥은 악마와마녀 간의 권력관계를뒤집어 놓았다. 이제는여성이 하수인이자 노예이며 신체와 마음이모두 악령인 존재이고, 악마는 이런 여성의 소유주이자 주인이며, 뚜쟁이인 동시에 남편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의도했던 마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악마이고, "여성이 먼저 악마를 불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Larner 1983 : 148). 악마는 마녀에게 몸을 드러낸 뒤 자신의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하고, 그 뒤에는 전형적인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관계가 뒤따른다. 게다가 결혼생활에서 여성들이 짊어지고 갈 운명을정확하게 예시라도 하듯 마녀는 단 한 명의 악마를 맞아들인다. 하지만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는 둘 이상의 악마를 맞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중세시대 지중해와 게르만 지역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헤라다이아나의 시장의 숙녀> la Signora del zogo처럼) 여성의 모습을 한악마를 추종하는 집단이 창궐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마녀사냥 시기 악마는 남성으로 그려졌다. - P277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비난했던 마녀사냥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에 순응하여 가족 내에서의 재산상속과 출산을 위협하거나, 노동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낭비하게만드는 모든 성적 활동을 범죄화하는 광범위한 성생활의 재구조화를위한 주요 수단이기도 했다. - P288

유럽 여성들의 운명과 아메리카 인디언 및 아프리카인들의 운명은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상호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녀사냥과 우상숭배라는 비난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지역 주민들의저항을 궤멸시키고 세계인들 앞에서 식민화와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파리네토에 따르면 유럽당국들은 아메리카에서의 경험을 통해 마녀의존재에 대한 믿음의 발판을 마련하고 아메리카에서 발달한 것과 동일한 대량살상 기술을 유럽에도 적용시키게 되었다(Parinetto 1998). - P294

합리주의와 기계론은 세상이 자연의 착취에 열을 올리게만드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마녀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마녀사냥을 선동할 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중세 말에 이르러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위협하던 존재양식 전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느끼게 된 유럽 엘리트들의 필요였다. 이 과업이 완수된 시점에, 다시말해서 사회적 규율이 복원되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마녀사냥이 중단된 것이다. 그 때부터는 마법에 대한 믿음이 조롱의 대상이 되어 미신으로 매도당하면서 기억에서사라져 가게 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 과정이 시작되었다. 단, 스코틀랜드에서는 30년 정도 더 오래 마녀사냥이 지속되었다. 마녀사냥의 중단 - P304

에 기여한 요인 중에는, 지배계급이 스스로 자신들이 동원한 억압기제의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배계급의 일원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마녀사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있다. - P3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장 대캘리번

이제 신체는 사회정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노동의종용에도 꿈쩍 않는 야수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보유고이자 생산수단, 중요한 노동기계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신체에 대한 전략을 살펴보면 엄청난 폭력과 엄청난 관심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신체의 움직임과 부속기관들에 대한 연구는 데카르트처럼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경우는, 홉스처럼 사회의 지배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우든 당대 대부분의 모험적인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 P202

마법의 근간에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지 않고, 따라서 우주를 주술적인 힘으로 채워진 살아있는 유기체로 상상하는 자연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념이 있다. 유기체적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그나머지들과 "공감하는 관계 속에 있다. 자연을, 해독해야 할 비가시적 - P209

인 친연성을 나타내는 흔적과 증표의 우주로 바라보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Foucault 1970: 26~27), 약초, 식물, 금속, 그리고 우리 신체의 대부분 등 모든 요소들이 고유한 강점과 힘을 숨기고 있다. 따라서 자연의 비밀을 전유하고 그힘을 인간의 의지에 맞게 변형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이 계획되었다. - P210

마법의 위험이 어떻든지 간에 부르주아지들은 마법의 힘을물리쳐야만 했다. 마법은 사회적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별들의 영역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를 부르주아지의 권한 밖에 있는 통제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개인의 책임이라는 원칙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와 17세기의 철학적 사색을 특징짓는 시공간의 합리화 과정에서 예언은 개연성의 계산으로 대체되었다. - P212

기계론적 철학이론 중에는 신체의 통제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모델이 있다. 한편으로 데카르트 모델은 순수하게 기계적인 신체라는가정에서 출발하여 동의에 기초한 통치와 자발적인 노동관계를 가능케하는 자기규율, 자기관리, 자기조절 같은 개별 메커니즘들의 발달 가능성을 상정한다. 다른 한편 홉스의 모델은 신체에서 벗어난 이성이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통제기능을 외부화하여 국가의 절대적인 권위에 이 통제기능을 위임한다. - P218

나는 중산계급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이 인기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이 조장한 자기지배 프로그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자기지배 프로그램은 그 사회적 함의라는 측면에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정당화한 인간과 자연간의 헤게모니적 관계만큼이나 데카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엘리트들에게 중요했다. - P223

홉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행위는 정확한 자연법칙을 따르는,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부단히 타인에 대한 지배와 권력을 추구하게 만드는 반사행위의 집합이다(Leviathan : 141ff). 그러므로 만인의 만인에대한 투쟁(가설적인 자연상태에서), 그리고 공포와 체벌을 통해 사회에서 개인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절대적인 권력의 필요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 P225

가장 은밀한 후미에서 신체를 지배하려는 이 집착과도 같은 시도속에서 우리는 같은 시기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는 이질적이고 위험하며 비생산적인 존재를 정복("식민화"라고도 할 수 있다)할 때 보여 준 것과 똑같은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당대의 대캘리번이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페티가 국가의 - P232

손에 맡겨야 한다고 얘기했던 "원초적이고 소화되지 않은 그 자체로 물질적인 존재였다. 국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개선하고 관리하며 용도에 맞게 변형해야만 한다" (Furniss 1957 : 17ff). -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장 노동축적과 여성의 지위하락

유럽에서 토지사유화는 15세기 후반에 식민지 팽창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거주자 추방, 지대 인상, 빚을 지게 하여 토지를 팔게 하는 국세 인상 등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이것들을 모두 토지 수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이 수반되지 않은 경우에도 토지 상실은개인이나 공동체의 의지에 역행해서 이루어졌고 이것은 생존기반의 파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토지 수용은 전쟁과 종교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특히 전쟁은 이 시기에 영토적·경제적 배치를 바꾸기 위한 수단의성격을 띠게 되었다. - P109

잉글랜드에서 토지사유화는 대개 "인클로저"를 통해 진행되었는데, 이 현상은 노동자의 "공동자산"cawealth을 박탈하는 것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반자본주의 운동가들은 이것을 사회적 수급권에 대한 모든 공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16세기에는 "인클로저"가 전문용어였다. 인클로저는 잉글랜드에서지주와 부농이 공동체적 토지소유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토지보유를 확대하기 위해 이용한 일련의 전략을 가리켰다.28 그것은 주로 공동 경작제open-field system를 폐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공동경작제란 주민들이 - P111

토지사유화가 해방시킨 것은 노동자(남자건 여자건)가 아니라 자본이었다. 이제 토지가 생존의 도구라기보다는 축적과 착취의 도구로서 "자유롭게" 기능할 수 있게 되었기때문이다. 해방된 것은 지주였다. 지주는 직접고용의 경우에만 노동자가 생계유지 수단을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재생산 비용을 거의 다 노동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업위기나 농업위기가 닥쳐와 일자리가 없어지거나 타산이 맞지 않으면, 전과 달리 노동자가 굶어 죽건 말건 해고해 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 P122

물가상승은 소농을 몰락시켰다. 그들은 소출이 생존에 불충분할 때는 곡물과 빵을 사느라 땅을 팔아야 했다. 물가상승은 자본주의적 기업가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굶어죽어야 했던 시대에 농산 - P123

물 투자와 고리대금업으로 떼돈을 벌었다.
또한 가격혁명은 오늘날 세계은행과 IMF가 수행한 "구조조정"의여파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나타난 것과 맞먹는 역사적인 실질임금 하락현상을 촉발시켰다. - P124

유럽에서 "이행"기는 여전히 격렬한 사회갈등의 시기였고, 국가가주도적으로 일련의 정책을 취하는 발판이 되었다. 정책들의 결과에서역으로 이 정책들의 주된 목적을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
더 잘 훈육된 노동력을 창출하는 것. 둘째, 사회적 저항을 분쇄하는 것.
셋째, 노동자들을 강요된 일자리에 묶어두는 것. - P134

인구위기와 경제위기는 1620~163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유럽과식민지 모두 시장이 위축되고, 무역이 중단되고, 실업이 일반적인 것이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발전도상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있었다. 유럽과 식민지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돼서, 각지의 위기들이 서로를 빠른 속도로 상승·확대시키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의국제적 경제위기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17세기의 "일반적 위기"GeneralCrisis라 부른다(Kamen 1972 : 307ff; Hackett Fischer 1996:91). - P140

맑스는 출산이 착취의 영역이자 저항의 영역일수 있다는 점을 전혀 인정한 바 없다. 그는 여성이 출산을 거부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거부가 계급투쟁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973 : 100)에서, 자본주의 발전은인구수와 무관하게 진행되는데, 그 이유는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는 덕에, "고정자본"(기계류 및 기타 생산자산에 투입된 자본과의 관계에서자본이 착취하는 노동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그 결과 "잉여인구"가결정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전형적인 인구법칙"(『자본』 1권 : 689ff)이라 정의한 이 동학은 출산이 - P148

순수하게 생물학적 과정이거나 경제변동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활동인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고, 또 자본과 국가가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을 거부할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때에만 적용될 수 있다. 맑스가 가정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상황이었다. - P149

중세 내내 여성은 주로 약초로 제조한 여러 가지 피임약을 이용했는데, 대개 생리주기를 바꾸거나 낙태를 유발하거나 불임상태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역사가 John Riddle은 『이브의 약초 :서양 피임술의 역사』(1997) Eve‘s Herbs : A History of Contraception in the West 에서 다양한 약재와 각각의 기대효과를 광범위하게 서술하고 있다. 피임 관련 지식은 여성이 출산에 대해 일정한 자기통제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피임이 불법화되면서 여성들은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 오던 이 지식들을 박탈당했다. - P150

비노동자 정의과정은 17세기 후반에 거의 완성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여성주의 역사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여성은 원래 그들만의 직업으로 여겨지던 맥주양조나 산파 일에서밀려나고 있었고, 여성고용에 대한 새로운 제한들에 묶이게 되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최하층의 직업 말고는 일자리를 구하기가어려웠다. 여성 노동인구 3분의 1은 하녀였고, 나머지는 농장 일방적·뜨개질 · 자수. 보따리장사· 유모와 같은 일에 종사했다. - P151

계속되는 토지사유화와 더불어, 동업조합과 시정부의 이와 같은 동맹을 통해 새로운 성적 분업 또는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1988)의용어를 빌자면 새로운 "성적 계약"이 날조되었다. 이 새로운 성적 계약은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은폐하는 어머니 • 아내·딸· 미망인과 같은 용어로 여성을 정의하는 한편, 여성과 그 자식들의 신체와 노동에 대한 무상이용권을 남성에게 부여했다.
.
이 새로운 성적 사회계약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인클로저때문에 남성노동자가 상실한 토지의 대체물이자 가장 기초적인 재생수단이 되었으며, 또 누구나 뜻대로 전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유재가 되었다. 스스로 매춘에 나선 창녀를 지칭하는 16세기의 "공유여성"(Karras 1989) 개념에서 이 시초축적"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노동편성에서 (부르주아 남성이 사유화한 여성만이 아닌) 모든 여성이 공유재산으로 변했다. 일단 여성의 활동이 비노동으로정의되자 여성의 노동은 마치 공기처럼 누구나 마음껏 쓸 수 있는 천연자원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57

마녀사냥의 시대에는 여성이 야만적인 존재로서 정신적으로 허약하고, 구제불능의 욕망을 가졌고, 반항적이고, 순종하지 않으며, 자기통제능력이없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18세기가 되면 이것이 뒤집히게 된다. 이제여성은 수동적이고, 무성적이고, 남성보다 더 순종적이거나 더 도덕적이고, 남성에게 긍정적인 도덕적 영향을 줄 능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 P168

플랜테이션 체제는 대대적인 노동집결과 고향에서 뿌리 뽑히고 의지할 곳 없는 예속 노동력으로 공장제에 선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노동비용 절감을 위한 이주노동과 지구화를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특히 노예와 임노동자를 지리적·사회적으로 나누어 놓은 상태에서
"소비재의 생산을 통해 노예노동을 유럽 노동인구의 재생산에 통합시킨 국제분업의 형성에 결정적인 단계가 되었다. - P170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유럽 출신 노동자를 덜 쓰고 그들을 아프리카 노예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법안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인종적 구분선이 그어진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Moulier Boutang 1998). 그때까지는 백인, 흑인, 토착민 간에 동맹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고, 본토에서건 플랜테이션에서건 유럽인 지배계급의 상상 속에 언제나 그러한 동맹에 대한 공포가 존재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이런 공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마녀의 아들이자 토착민 반란자인 캘리번과 먼 바다를 항해하는 유럽 출신 프롤레타리아트 트린큘로와 스테파노가 조직한 음모를그림으로써, 억압받는 자들의 치명적인 동맹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프로스페로의 마법을 통해 지배자들 간의 불화가 치유되는 극적인 대조를 펼쳐 보인다. - P175

성차별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도 입법을 통해 제도화되고 강제되어야 했다. 흑인과 백인 간의성관계가 금지되었고, 흑인노예와 결혼한 백인여성은 비난을 받아야했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평생 노예로 살아야 했다. 1660년대에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통과된 이 법령들을 살펴보면 인종차별사회는 위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게다가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종신노예화라는 처벌이 필요했다는 점은 그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었는지를 보여 준다.
마치 마녀사냥의 대본을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새로운 법령들은백인여성과 흑인남성의 관계를 악마화했다. - P1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장

농노제가 주인과 하인 간의 관계에 도입한 변화의 관점에서, 농노 - P48

제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농노로 하여금 재생산수단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이다. 영주직영지demesne에 바치는 부역노동의 대가로 농노는 한 뼘의 땅 망스mansus, hide를 받았다. 농노는 이 토지를 경작해서 먹고 살았으며, 이것을 "상속수수료만 내면 진짜 유산처럼"(Boissonnade 1927 : 134)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 P49

화폐와 시장은 계급차이 위에 소득차이를 도입하고, 정기적인 적선에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대중을 만들어 내며 농민층을 갈라놓기 시작했다(Geremek 1994 : 56~62).
점증하는 화폐의 영향력으로 인해 유대인을 향한 체계적인 공격이 12 - P60

세기에 시작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법적·사회적 지위는 하락했다. 기독교 경쟁자들이 왕, 교황, 고위성직자에게 대부해 주던 유대인을 몰아낸 것과, 성직자들이 유대인 차별규정(예 : 구별되는 옷을 입게 한다)을새로이 도입한 것, 그리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유대인을 추방한 것은사실 서로 뜻깊은 관련이 있다. 교회로부터 버림받고, 기독교인들과 분리되고, (유대인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인) 대부업을 촌락수준에서만 영위할 수 있게 된 유대인들은 이제 빚진 농민들의 화풀이대상이 되었다(Barber 1992 : 76). - P61

교회가 성적 규제를 재구성한 특권적 도구로서 7세기부터 출간한 책자인 고해안내서Penitentials가 있다. 푸코는 『성의 역사』1권(1978)에서, 이 책자들이 17세기에 담론으로서의 성과 다양한 단계로 구성된 성 관념을 만들어 내는 데 맡았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해안내서는 중세에 이미새로운 성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책자들은 성행위 중 허용된체위들(실제로는 오직 한 가지 체위만이 허용되었다)과 성행위가 허용되는 날짜, 그리고 성행위의 대상으로서 허용되는 자와 금지되는 자를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교회가 진정한 성적 교리문답을 부과하려고 시도했음을 보여 준다. - P73

14세기 중엽이 되면 종교재판관의 보고서는 더 이상 이단의 이상성행위와 성적 방종을 고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제 이단은 악명 높은 꼬리 아래 입 맞추기 bacium sub cauda 의식을 행하면서 동물을 숭배하고, 술에 취해 난교를 벌이며, 밤에 하늘을 날고,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다고 고발당했다(Russell 1972) 종교재판관들은 루시퍼파라는 악마숭배 종파가 존재한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단 박해가 마녀사냥으로 넘어가는 이 과정에 발맞추어 이단의 형상은 점차 여성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15세기 초가 되면 마녀가 이단 박해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 P78

흑사병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계급갈등이 만들어 낸 노동력위기의 심화였다. 노동인구 중 많은 수가 질병으로 사망하자 노동력이극도로 부족하게 되었고 임금이 상승했다. 이는 봉건지배의 족쇄를 부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 P86

프롤레타리아트 남성이 경제적 조건 때문에 결혼을 - P92

미룬 것에 대한 보상으로 "자기 몫"을 되찾고 부자들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파괴적이었다. 가난한 여성에 대한 국가후원 강간은 반봉건투쟁을 통해 얻은 계급연대의토대를 침식했기 때문이다. - P93

반란이 실패한 것은 봉건권력의 모든 세력들(귀족, 교회, 부르주아지)이 전통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에 대한 공포로 합심하여 공동보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부르주아지의 상은 진정으로 왜곡된 것이다. 이 상에서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귀족과 전쟁상태에 있으며 평등과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그러나 중세 말기 토스카나에서 잉글랜드, 그리고 저지대40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보나 이미 그들은 하층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귀족과 연합하고 있었다. 41 부르주아지는 농민과 도시의 민주적 직조공 및 수선공이 귀족보다 더 위험하다고 인지했고, 그 위험은 시민계급이 소중히여기던 정치적 자율성을 희생해서라도 막아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절대국가로 가는 첫걸음인 군주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귀족의 권력을 재수립한 것은 바로 도시 성벽 내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두 세기 동안 투쟁해 온 부르주아지였다.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