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선의 통로는 고문회의의 조직이었다.
고문회의라는 조직 형태는 한민당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명망과 식견을 구비한 인사로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과 인사에 자문케 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수용되었다. 윌리엄스는 하지로부터 미군정을 위해 전국 고문회의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지만,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한민당에서 나왔고, 윌리엄스를 통해서 하지의 재가를 받은 것이었다. 고문회의는 일제 시기 어용기관이었던 중추원(中樞院)의 재판이었는데, 좌파는 인민공화국의 약화를 우려했고, 우파는 임시정부의 약화를 우려했다. 한국인들의 열광적 환호도 없었다. - P320

한민당은 미군정기 핵심 국가 권력기구였던 고문회의(김성수, 송진우), 경찰(조병옥, 장택상), 사법부(김병로), 검찰(이인) 등을 장악했다.
고문회의를 통해서 주요 직책에 한민당원을 추천했으며, 공권력의 핵심인 경찰, 검찰, 법원을 한민당원들이 장악함으로써 미군정기에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다. - P332

이승만과 한민당, 미군정은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슬로건으로 내건 정당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독촉중협을추진했으며, 이는 미국 기록에는 전한국국민집행부·통합고문회의·정무위원회로, 이승만 기록에는 국무회의 · 국정회의·민의 대표기관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독촉중협은 좌파와 중도좌파는 물론 임시정부 세력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성립은 되었지만 내용적으로 실패를 면할 수 없었다.
또한 좌파·중도파 임시정부 세력을 포함한 민족통일의 완전체가 모스크바회담 개최 이전에 완성되었어야 하지만, 시기적으로 이미 늦은 상태였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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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를 대체할 한국인 인력이 부재하거나 부실한 상황에서 신뢰할 만한 인력이 필요했던 하지는 윌리엄스의 조언에 따라 "신뢰할 수 있는" 일제 시기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제와 가족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국무 - P262

부는 한국 내 주거·안전·생활상의 이유를 들어 선교사들의 한국 귀환에소극적이었던 반면, 하지. 맥아더 · 전쟁부는 한국 상황에 경험이 있는 선교사들을 활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사업을 계속 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전쟁부와 미군정은경험과 능력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주한 선교사 및 가족들이 필요했고,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들어갈 비자와 입국 허가가 필요했다. 선교사들은정책 결정에서 직접적인 힘이 없었지만 미군정 고위 장교들과 한국 지도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들에게는 전례 없는 기회와 권력이기다리고 있었다. - P263

윌리엄스는 하지의 명령에 따라 고문회의에 충원할 개신교 대표 2명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친일파가아닌 목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는 윌리엄스가 개신교 대표를 찾지 못하자, 나머지 종교 대표들의 임명을 거부했다. 결국 종교계 대표 5명은 임명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12명의 고문이 임명되었지만, 여운형은 고문 취임을 거부했고, 북한에 있던 조만식도 취임할 수 없었다. 45그러나 나머지 10명의 대표 중 다수가 기독교 평신도였으므로 전체 고문11명 중 기독교인은 6명으로 그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 P274

미군 진주 이후 처음 10여일 동안 24군단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G-2 Periodic Report)에 등장하는 주요 정보 제공자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서상일, 김용무, 설의식, 김도연, 김동성 등 한민당 지도부였다. 이들은 여운형·안재홍 등과 건준·인공에 대한 모략적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미군이 이승만·임시정부와 동반 입성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과 이들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역사가 전개된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한민당이 미군 진주 초기 이승만과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열광적으로 주장한 것은 정치공학적인 술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뜻하지 않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일본군이 전달한 왜곡된한국 상황에 관한 정보로 의심이 가득한 채 진주한 미군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그 덕분에 미군 수뇌부에 훨씬 더 가까이, 훨씬 자주 접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미군 수뇌부의 신임을 얻어,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 P292

하지가 인정할 수 있는 기성의 주권 정부, 기성의 권력은 조선총독부와 그 행정력이었을 뿐 인민공화국 같은 자생적 토착권력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일본인 고관들을 잠정적으로 유지하거나 고문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되자 미군정은 직접 통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공화국 같은 현지 토착권력의 활용은 미국 본국이나 주둔군 사령관 하지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하지와 그의 군대는 수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에 익숙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은 인민공화국을즉시 적이나 라이벌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였던여운형은 한 달 넘게 하지를 만날 수 없었다. 진주 직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되었던 인민공화국은 1945년 12월 12일 미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법 단체가 되었다. - P303

국무부는 현지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할 수밖에었는데,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임시정부와 관련 인사들을 활용하는 정책은 미국이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되어 있고 그들을 후원한다는 정치적 혐의를 벗기 어려웠다. 미 국무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는 임시정부를비롯한 모든 한국인은 임시정부의 관리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귀국하는 한국인은 이런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요구하는 것이었다. - P311

맥아더에게 전달된 3부 조정위원회의 훈령 176/8호(SWNCC176/8)는 임시정부 혹은 유사한 정치조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다만 필요할 경우 그 조직 성원을개인 자격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124 3부 조정위원회는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간판으로 활용할 경우 미국의 공식 대한정책인 연합국의 합의에 따른 신탁통치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임시정부 활용을 반대했지만, 이 훈령은 하지에게 임시정부 활용에 대한 내락으로 받아들여졌을 공산이 컸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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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2 도시로 보는 시리즈
신윤환 외 지음 / 사우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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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2편을 읽었다. 이번 편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수도가 상당수 포함된 것이 눈에 띄었다.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마닐라, 프놈펜, 비엔티안, 이렇게 다섯 곳이다. 수도는 국가의 대표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발전을 위해 인력과 기술을 집중 투입한다. 그래서 그만큼 개발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집중되어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는 화려함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수도는 근대에 들어와 제국주의에 의하여 개발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으나 그 이전부터 왕국의 수도로 역할을 한 도시도 있다.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마닐라가 근대에 이르러 개발이 이루어진 경우라면 프놈펜과 비엔티안의 수도 역사는 그 시기를 꽤나 거슬러 올라간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크메르 제국이 멸망할 무렵인 1434년에 크메르의 수도가 되었으나 그 이후 캄보디아의 역사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해서 수도라는 게 별 의미가 없었다. 버려지고 잠시 수복되었다가 다시 버려지고, 나라가 힘이 없어지니 왕도 예전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는 1975년 크메르 루주군이 권력을 장악한 뒤 벌어진 폭압의 상처가 깊게 패어 있는 곳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론 놀 정권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은 처음에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주를 환영했다. 이들은 캄보디아 민족주의 정신으로 남베트남과 미국을 적대시하고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막상 정권을 잡자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없애고,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학살에 나섰다. 크메르 루주는 당시 프놈펜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을 강제로 시골에 이주시켜 이 지역은 사실상 페허가 되어 있었다. - P16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81년 자진 해체했으나 이 때 새 정부에 도움을 준 베트남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물러나면서 1993년이 되어서야 캄보디아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고 시아누크가 왕이 되었다. 다행히 깊은 상흔을 뒤로 하고 현재 프놈펜은 빠르게 거점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 빌딩, 공원 등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이제는 제법 수도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고.

1353년 지금의 루앙프라방에 란상 제국이 세워졌다. 1479년 다이비엣 공격으로 수도가 페허가 되면서 1560년 수도가 비엔티안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1828년 비엔티안은 시암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프랑스가 들어오고 나서 1900년이 되어서야 재건되었는데 1940년 시암 공격으로 또 한번 파괴된 뒤 재건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현재 라오스의 수도는 비엔티안이다. 라오스하면 ‘루앙프라방‘만 익숙하고 ‘비엔티안‘이란 이름 자체가 낯설었는데 16세기부터 한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루앙프라방은 그 이전에 수도였고 당시의 왕궁과 사원이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이기에 도시명이 익숙했던 것 같다.
작가가 라오스에 대한 역사와 관련 문물, 문화, 먹거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와 닿았다.
짧은 일정으로 가는 여행자는 여행지를 아무래도 깊게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곳의 사람들에게 특별함을 느낀다면 아무래도 그 여행지가 더욱 오래 기억남는 것 같다. 개인의 역사는 역사에서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현재의 사람들에게서 삶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바나나 잎으로 살포시 싼 소시지와 파파야샐러드 봉지를 들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많은 박물관과 기념관과 국보로 지정된 사원에서 찾으려고 했던 라오스의 역사는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역사책에서 빠졌을 뿐 그 땅에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파탓루앙 회랑을 돌며 기도하던 사람들, 아누웡 왕 공원에서 과일을 팔거나 야식을 팔던 사람들, 빠뚜싸이 공원 분수대 근처에서 산책을 즐기던 가족들, 뚝뚝 택시비를 어떻게 흥정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수줍게 알려주던 호텔 직원. 그들이 없었다면 라오스라는 나라가 어떻게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까? - P345~346

참! 프놈펜 말고 캄보디아의 도시가 하나 더 소개되었다. 시엠립인데 앙코르와트에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야 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시엠립은 앙코르 왕조가 있던 곳이고 왕조가 몰락한 후 19세기 후반까지는 태국이 점령했다가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860년 초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베르 앙리 무오가 방문한 후 책을 출발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에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알렸다. 당시 앙리 무오는 약 400년 전에 멸망한 옛 도시 앙코르의 유적을 본 것인데, 당시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앙코르 유적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인근 태국을 공격하여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1863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삼았다. - P81

시엠립에는 앙코르 유적군인 프놈 바켕 사원,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타 프롬 사원이 있고 앙코르 왕조가 성스러운 산으로 부른 프놈쿨렌산과 프놈쿨렌 폭포가 있다. 또 초기 왕코르 유적군인 프레아 코, 바콩, 롤레이 사원이 있으며 거대한 바다 같은 호수인 톤레사프도 있다. 올드 마켓 지역에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의 도시들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부는 마젤란이 닿은 곳으로 필리핀에서 가톨릭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라고 한다. 세부는 스페인령 식민지일 때 멕시코 남미 문화가 들어와 대농장과 지금의 다운타운 지역에 석조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이후 미국령 식민지가 되었을 때 도로나 근대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자카르타는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무역항(바타비아)이자 식민 도시로 개발이 되었다. 1961년 수도가 된 이후 자카르타는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 수 때문에 남쪽으로 도시를 확장하여 지금은 천만 인구가 되었고 규모가 커진 만큼 빈부 격차가 커졌다고 한다.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시아 수도이자 최대 도시, 정치 중심지이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로 특히 중국인과 인도인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비롯한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잘 닦인 도로, 편리한 교통 때문에 관광객들이 관광하기에 좋은 도시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도교 사원과 힌두교 사원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마지막으로 후에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후에는 베트남 중부 도시로 다낭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베트남 최초, 최후의 통일 왕조였던 응우옌 푹아인이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 황성과 사원이 전하는데 안타깝게도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겪은 곳이라 온전하지가 않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구정 공세를 감행해 100개 이상의 남베트남 도시를 기습했다. 다른 도시는 미군이 수비게 다시 탈환했으나, 후에에서는 예외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베트남에서 대략 5,000명 이상의 병력이 공격을 단행했고, 북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후에 대학살이라 불리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미군은 폭격기를 동원해 후에를 휩쓸었고, 이 과정에서 후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 P273

다낭은 프랑스가 들어온 후 식민지 항구로 유명해졌다. 15세기까지는 강력한 해양 국가였던 참파 왕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동서 무역의 요청지로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는 중부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중부 유일의 직할지다. 만약 후에의 유적이 온전했다면 다낭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을까.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정신적 문화 수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왕불사상(왕=부처)이 잘 구현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승려의 신분적 위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윈난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중국인의 비율이 50% 이상이라고 한다. 아마도 미얀마의 중국 같은 느낌이 아닐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동남아시아에 일찍부터 전파되었고 동남아시아는 이렇게 인도화되었다. 고대 왕국은 종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데 이런 불교가 수입되었으니 동남아시아의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도화의 핵심은 바로 왕권의 확립인데, 4~6세기에 동남아시아 각 지역이 받아들인 힌두교와 불교는 왕권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샤머니즘이나 토템, 애니미즘과 같은 토착 종교에 의존하던 지도자의 권력이 일시적이었다면, 힌두교 및 불교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신과 왕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인도화 이후 왕의 권력은 절대화, 영속화하기 시작한다. 힌두교 세계관의 절대 신인 비슈누나 시바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자신을 신 혹은 부처의 화신으로 자임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통치 방식이 바로 인도화의 영향이었다. - P185

만약 나중에 인도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가게 된다면 불교와 힌두교(신과 경전 포함)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다양한 경우 글쓰기 스타일에 따라 호불호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은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총 13개의 도시를 소개하는데 나는 그 중 자카르타에 대한 소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도시 내부를 구석구석 소개시켜주는데 시기별로 가상의 인물 세 명을 등장시켜 그들의 일상을 따라 가며 알려준다. 이 방식은 마치 내가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의 현장을 보는 느낌이어서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대중들이 그 나라의 역사와 도시, 문화를 이해하기에 탁월한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에는 감동이 일었다.

‘완벽한 승리‘ 혹은 ‘승리의 행위‘를 의미하는 자카르타는 대략 400년 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항이자 식민 도시로 개발되었다. 17세기 향신료를 운반하던 상선의 선원, 19세기 가난과 차별이 일상이었던 식민지의 소년, 21세기 도시 빈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400년 동안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자카르타는 항상 최첨단의 문물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지만, 때로는 엄청난 환희와 극심한 고통 그리고 좌절감을 안겨준 도시였다. - P279

이 시리즈가 뒤이어 더 나올 수 있을까. 아직도 동남아시아의 도시 중 많은 곳들이 비어 있다. 독자로서 더 만들어져서 많은 곳이 소개되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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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0일 일제의 포츠담선언 수락 사실이 알려진 후 총독부는 종전 대책에 분망했다. 총독부는조선인 고위 관리, 친일파 등을 동원해 여운형과 접촉하며 치안유지회 등의 타협적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송진우 그룹과도협력을 모색했으나, 거절당했다. 8월 15일 일제 패망이 현실화되고, 소련군의 38선 이남 진주 가능성이라는 위기가 팽배하자, 여운형은 5개 조건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5개 조는 사실상 주요 행정권의 이양 혹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희망하거나 계획하지도 않았고, 평소라면 절대 동의하지도 - P83

않았을 여운형의 5개 조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5개 조건은 여운형과 엔도 정무총감, 니시히로 경무국장의 논의·타협 과정의 산물이었는데, 총독부가 구상하고 있던 치안유지 협력책과 정치범·경제범 석방계획에 여운형이 적극 찬성하고 식량 사정 확인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자 실질적으로 주요 행정권을 이양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아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이 합법적으로 간판을 걸고, 안재홍이 경성방송국라디오 방송을 하는 순간 전국에서 일본의 경찰치안과 행정력은 마비되었고, 한국인 관리 및 경찰은 잠적했다. 그 공간을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 · 보안대가 장악했다. 실질적인 권력의 이양이었다. - P84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인이 자유롭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해방의 공간이 열리자 폭발된 에너지는 총독부 통치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향해 달려나갔다. 총독부의 예상과 달리 일본인, 경찰, 관리에대한 공격은 미미했다. 대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에너지가 건국준비위원회로 결집했다. 무너진 둑처럼 한국인들의 환희와 열정이 쏟아져 내렸다.
치안유지회, 치안유지의 협력 정도로 생각했던 여운형 측의 신속한 대응은 총독부가 감당할 수 없는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결합해 해방 한국의 시공간을 장악했다. - P95

8월 18일경부터 8월 25일까지 전개된 안재홍-김병로·백관수 중심의 교섭은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부재 중인 상황에서급격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한민당 계열과 총독부가 희망하는 유지자대회 개최 방식으로 추진하다가,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건준간부진의 강력한 반대로 유지자대회는 무산되었다. 다음으로 유지자대회대신 건준 확대위원회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는데, 여운형 위원장이 나타나 이들에게 의견 제출권만 주고 결의권을 주지 말라고 저지했다. 이 때문에 확대위원회를 소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민당과 이만규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권태석-김병로 등의 논의를거쳐 확대위원회 명단은 8월 25일경에 결정되었지만, 여운형의 반대로회의가 연기되었다. 건준 내부에서는 당연히 한민당 계열의 주도와 결정 - P117

으로 확대위원회를 개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가 인원을 더하는 방안이논의되었다. 안재홍의 주도로 한민당 계열과 타협을 한 이후 건준의 내부갈등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결국 8월 31일 여운형이 위원장 사표를 던지고 난 후에야 9월 1일 확대위원회 명단이 공개되었고, 9월 2일 건준 확대위원회 소집이 공표되었다. - P118

1945년 말에 이르러 인공은 최초의 목표였던 민족통일전선체로서 임시혁명정권이라는 스스로의 규정과는 다른 지점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공의 현실적 위치가 지방의 대중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178

1938년 이후 열렬한 친일활동을 펼쳤던 이묘묵은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자,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을 친일파·공산주의자로 무고하는 한편 이를 발판으로 하지의 통역이자 문고리 권력으로 입신했고, 나아가 사상검사를 이용해 자신의 친일 기록을 소각하는 데 성공했다." - P224

베닝호프와 윌리엄스는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이라는 공통점, 미국 선교사들이 수십년동안 한국에 기여한 업적과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미군정하에서 더욱 확산·정착시켜야 한다는 믿음,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놓였던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 및 정치 역량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불신과 저평가, 그리고 미군정 내에서 유례가 없는 그들의 결정적이고 중요한 위치 등을 종합한다면,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자신들이 정해야 한다는 일종의 복음주의적 사명과 의무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은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확고한 반 - P252

소·반공의식을 한 축으로 하고, 기독교에 기초한 미국식 제도에 대한 확신을 다른 축으로 한 이들의 신념체계는 미군정의 수뇌부가 이견을 가질수 없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미국적 사유체계였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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