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하나의 국가 체제에 속해 있지 않았고 city-states라고 불리는 여러 개의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Sargon이라 불리는 사람이 city-states를 one country로 만들기를 꿈꾸었다. Sargon의 신화는 너무나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강 근처에서 떠다니는 아기가 든 바구니를 어떤 한 하인이 발견하여 왕에게 가져다 주었고 아기는 궁전에서 성장하였다. Sargon은 궁전에서 술 따르는 하인으로 지내다 군 사령관과 친분을 쌓고 군의 힘을 빌려 마을을 평정하고 50번이 넘는 전투 끝에 city-states를 모두 제압한 뒤 one country를 구성하고 국가 이름은 Akkadia, 수도 이름은 Akkad로 정한다. 그러나 제압당한 기존의 city-states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military dictatorship(군사 독재) 정치로 강압 정책을 펴면서 사람들을 제압한다. 근데 이게 과연 얼마나 갈까?


* cup-bearer

  He even became the cup-bearer to the king; at every meal, he would bring the king his wine in a golden cup. 


* military dictatorship

  Military means “having to do with the army.” A dictatorship is when people have to obey the government without asking any questions. 



어떤 사람에게 신화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 신화를 만들어낸 점은 납득이 가지만 궁금한 점은 신화는 왜 다 비슷한 내용일까 하는 점이다. 고대 한반도에 있던 신화들도 알에서 태어나거나 강에서 주웠다거나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이게 다 돌고 도는 내용인가 싶은? 이는 해외나 국내 신화나 가리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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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11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함달달 열기가 뜨겁습니다,

˝cup-bearer ˝ 뭔가 상징적, 함축적 의미가 있는 단어라 상상했는데 인용해주신 예문보면 말 그대로 컵을 들고 있었나봐요 ㅎ

거리의화가 2023-09-11 18:13   좋아요 0 | URL
예문 보면 진짜 명확하게 들어오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읽는나무 2023-09-12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화들을 보면 죄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함정이 있어요.^^
그러고 보면 토테미즘이 그냥 생겨난 게 아닌가 봅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2 17:34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러게요. 머리는 사람인데 하체는 다 동물들로^^;
토테미즘은 동서양을 막론하지 않고 두루 존재하나봅니다ㅋㅋ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외 옮김 / 청아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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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사(全史)는 한국전쟁의 시작 전부터 마지막 정전 협정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의 기원에  초점을 더 맞추어 전쟁 자체의 기록은 소략해서 아쉬움이 있었다(마찬가지로 한국 저자인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도 그 기원과 배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전반적인 과정과 결과를 다루고 있고 무엇보다 한국과 소련, 중국, 미국의 기록 등 다양한 기록을 참고하고 있어 도움이 되었다.


1949년 4월 23일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제스 정권이 있던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는 중국 내부에도 전환점이 되었으나 북한 지도부도 고무되었음에 틀림 없다. 변화된 미국 정세에 남한은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 안에 넣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 정부는 남한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말하며 미국에 대한 한국의 불신감을 키웠다. 이 무렵 38선을 둘러싸고 국경 충돌이 본격화했다. 5월부터 옹진 반도에서 북측의 공격으로 남측이 부대를 투입했으나 격퇴에 애를 먹으면서 6월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6월 29일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였고 6월 30일에는 남북의 노동당이 합당하면서 김일성-박헌영 체제가 확립되었다. 7월 말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이 북한에 들어와 조선인민군으로 재편된 결과 북의 병력은 5개 사단으로 증가한다. 


북한 정부는 미군이 떠난 지금 삼척을 해방시키고 옹진반도를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고 이를 소련에 타전한다. 1949년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지령을 내려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옹진반도와 개성 지구의 탈취 같은 부분적인 작전에 대해 말하자면, 이 작전의 결과 북조선의 경계가 서울에 거의 근접하게 된다면, 이 작전은 북조선의 전쟁 개시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사적 면에서나 정치적 면에서나 이 전쟁을 위한 북조선의 준비는 아직 미흡하다. 덧붙여 북이 먼저 군사행동에 나서 장기화할 조짐을 보일 경우, 조선 문제에 어떠한 형태로든 미국인이 끼어들 명분을 줄 우려가 있다. 모든 점을 감안할 때 현재 조선 통일의 투쟁 과업을 위해 최대한의 힘을 결집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첫째, 반동 정권의 타도와 전 조선 통일이라는 과제의 성공을 위한 남조선 빨치산 활동 전개, 해방구 설치, 그리고 전 인민 무장봉기의 준비이며 둘째, 조선인민군을 전반에 걸쳐 한층 더 강화하는 일이다.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은 미군의 개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북한 지도부의 무력 해방안을 반려했다. 하지만 1950년 일본공산당에 대한 코민포름의 비판(소련공산당이 일본공산당에 대해 미군에 맞서는 철저한 대결 노선으로 전환하라는 지시)이 나오고 소련이 중국 혁명의 길을 지지하면서 북한 지도부는 다시 스탈린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타전한다. 스탈린은 1월 30일 거의 완전한 동의를 표명하는 서신을 보냈다(물론 중국 정부의 원조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 하에). 이로써 김일성은 전쟁 준비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1950년 훈련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이동한 모든 보병연대는 6월 23일 저녁 전투 명령을 받았고, 25일 오전 4시부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이 모든 부대에 하달됐으며, 공병은 곧바로 6월 24일 지뢰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6월 25일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38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UN은 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했으나 소련이 불참(스탈린은 “내가 생각하기에 소련 대표는 안보리 회의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불참 지시를 내렸다.)하고 유고슬라비아가 기권한 상황에서 첫 결의가 채택됐다. 29일 미국은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을 목표로 한 공군 작전 확대와 부산-진해에 한정된 미 지상군의 투입을 지시하는 명령을 결정했다. 맥아더는 전황을 시찰한 뒤 “한국군은 반어 능력이 없으며 적의 진격이 계속되면 붕괴할 위험이 있으므로 현재의 전선을 지키고 나아가 반격하기 위해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6월 30일 미군의 전면적 출격이 단행되었다. 한국전쟁 개전으로 타이완은 제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으로 군사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일본은 후방 지원으로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10월 2일 맥아더가 유엔군 전 부대에 “우리가 군사 작전을 하는 곳은 군사적 필요와 한반도의 국제적 경계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따라서 소위 38선은 우리 군의 군사적 운용 측면에서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해 귀하의 부대는 그 경계를 언제든지 넘어도 좋다.” 명령하며 한국군의 북진은 추인됐다. 하지만 이후 전쟁 과정은 알려진 바와 같이 남북한 모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난항을 겪었다. 


1951년 3월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알렸다. 

조선의 전장에서 벌어진 최근의 전역 과정은 거의 모든 적군이 괴멸되지 않는 이상 적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적의 군대 대부분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선의 군사 작전은 장기적인 성격의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2년은 걸릴 것으로 상정해야 합니다.

마오쩌둥은 이북을 지키기 위한 소련 공군을 스탈린에게 요청하였는데 이를 승인했다.


이 무렵 미국도 정전에 대한 고려를 시작하여 대일 강화 조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중소우호조약에 따라 대일 강화에서 중국과 보조를 맞추어야 했다. 한국전쟁 관련해서 소련보다는 정면에 중국을 내건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중국의 입장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5월 6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대일 강화 문제 관련하여 지지를 요청했다. (1) 강화조약의 단독 준비에 반대하고, 중・소, 미・영의 공동 준비를 요구한다. (2) 중국의 타이완에 대한 권리를 명기하라. (3) 일본령 오키나와를 미국 통치하에 두는 것에 반대한다. (4) 일본 군사력의 한계를 명기하라. (5) 일본은 군사동맹에 가입해서는 안 되며, 강화 후 1년 이상 점령군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오쩌둥은 완전 동의를 표명하고 이를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은 6월 14일 대일 강화 조약에서 남사할린과 쿠릴제도는 일본이 포기하고 소련의 영유라는 규정은 삭제했다. - P384

이때 남한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으로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적 위기 상태가 지속되면서 남한 정부가 미국에 무기 제공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은 남한 정부와 군을 불신했고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던 정전회담 개시 방향 등도 공유하지 않았다. 5월 17일 미국 상원에서 한국전쟁 정전 결의가 채택됐으나 애치슨은 이승만의 동의를 얻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이승만 패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9월 8일 대일평화조약 체결로 일본은 전쟁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미국은 일본 방어를 내세워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정전회담은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되었다. 중국과 북한 측 회담 대표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남일이었고 부대표는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 덩화였다. 유엔군 대표는 터너 조이 해군대장, 4명의 미군 장성과 한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대장으로 구성됐다(이승만이 정전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장이 참 난감했을 것이다). 중국과 북한 측의 정전 협상은 마오쩌둥이 대부분 주도하였다. 회담 의제 중 군사분계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 포로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컸다. 그나마 군사분계선의 문제는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았으나 포로 문제 때문에 정전 협상은 결렬과 재개를 반복하며 2년 넘게 끌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으로 이승만은 민의를 거슬렀고 미국 정부에도 이는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 대한민국에 이승만을 대신할 국민적 브랜드를 가진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다. 

북한은 1953년 제5차 전원회의 결정에서 종파주의분자 적발, 비판 캠페인으로 김일성에게 권력을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뒤 박헌영은 추도식 직후 체포되면서 김일성은 종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포로 협상에서 “송환을 주장하는 모든 포로는 즉시 송환하고, 나머지 포로는 송환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확보하기 위해 중립국에 인도할 것”으로 결론이 난다. 저우언라이, 김일성이 이에 서명하였으나 이승만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는 (1) 한반도의 재통일, (2) 중공군의 철수, (3) 북한군의 무장해제, (4) 제3국이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의 금지, (5) 대한민국의 주권 존중 및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그 목소리의 존중이었다. 모두 정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클라크는 이승만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도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사실 그 이면에는 “에버레디 계획”으로 한국 정부가 저항한다면 정전에 협력적인 신한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승만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워싱턴이 양보하고 이승만도 물러서면서(정전협정에 서명할 수 없지만 정전회담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방기한 것 아닌지?) 7월 24일 정전회담의 내용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7월 27일 판문점에서 해리슨과 남일은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정전 명령은 남쪽은 클라크의 이름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따라 비타협적 대립 속에 갇혔다. 한국 측에도, 북한 측에도 군사행동을 다시 생각할 조건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존재하게 된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차가운 전쟁도 아니었다. 냉전이라면 외교 관계는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긴박한 대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열전은 끝났지만, 냉전 상태에도 미치지 못한 특별한 적대적인 상태가 계속됐다. - P60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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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ing Mummies


이집트의 미라 만들기. 정말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인데 고인을 위해서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이집트인들의 정성에 탄복했다. 미라는 죽은 사람의 몸에 향신료 처리를 하여 천으로 감싸서 부패하지 않게 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사람들이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가기 전까지 고인의 몸이 보존되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embalming(방부 처리)이다. embalming은 성직자만 할 수 있다고 한다. 미라가 만들어지는 데 는 2달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Egyptian Pyramids


이집트인들은 중요한 사람이나 왕들이 땅이 고인이 되면 금, 보석 등으로 치장하여 무덤을 조성했다. 처음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들 때 보물과 함께 지하실에 안치했다. 그랬더니 도둑들이 미라가 있는 곳에 보물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싹쓸이 해갔다. 이후 이집트인들은 무덤 중간에 벽을 만들고 그 아래 보물실에 부장품들을 넣기 시작했다. 이 무덤의 이름을 mastaba tombs라고 한다. 파라오는 mastaba tombs도 자신이 묻히기에는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pyramids를 생각해냈다. pyramids는 거대한 요새로 파라오와 보물을 모두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구조를 가졌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신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늘에 올라가 사후에 그들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피라미드의 측면을 계단처럼 사용하였다. 대형 피라미드 근처에는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가진 상상 속 동물인 스핑크스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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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 미국에 미련을 버린 북한과 공포의 균형에 대하여
정욱식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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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북한은 미국과의 오랜 적대관계를 평화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국제전략의 핵심 목표로 잡았다. 곡절과 부침이 있었지만, 2019년까지는 이러한 기대와 목표를 접지 않았다. 북한이 핵개발을 지렛대 삼아 대미 관계 정상화를 노렸다면 미국은 북핵을 명분으로 '한반도의 현상'을 유지·강화하고자 했다. 미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현상이란 정전체제와 한미동맹, 남북·북미·북일 간의 긴장관계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의 실패와 6월 30일 이루어진 남북미의 소득 없는 정상회동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국가의 중심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2018년 4월부터 2019년 8월까지 김정은과 트럼프 간에 주고받은 27통의 친서가 2022년 9월 25일 한미클럽(전·현직 주미 특파원 모임)을 통해 전문이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북한의 정책 변화에 대한 기조를 엿볼 수 있다.

2018년 4월 판문점 정상회담 합의와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의 결과로 종전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안보 관료들은 종전선언 이전 북핵문제에 진전을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협정은 비핵화의 최종 단계에서 체결한다는 구상이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라 말했지만 김정은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18년 6월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단계적 비핵화에 상응하는 제재 완화를 기대했으나 한미 연합훈련 실시 방침이 발표되자 김정은은 8월 5일 트럼프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낸다.
"나는 도발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북미 실무회담에 앞서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 이 훈련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 나는 미군이 이러한 남한의 편집광적이고 매우 과민한 행동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 미국과 골칫거리로 인식하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과 핵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미국과 남한의 군사적 행동들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제거되기 전까지는 이전과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 P45~46

2019년 6월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깜짝 정상회동에서 트럼프는 8월 예정된 한미연합훈련 취소를 약속하고 김정은은 북미 실무회담에 응하겠다고 화답했다. 트럼프는 7월 3일자 친서에서 김정은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미사일 엔진 시험장에 기술 전문가들의 방문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했다. 9월 6일에 보낸 답장에서 김정은은 "핵무기 연구소의 전면 가동 중단과 핵물질 생산시설의 불가역적인 폐쇄"를 제안하며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줄 우리 주변 환경의 변화를, 약간만이라도 느낄 필요가 있다"는 단서를 달 정도로 한 발 이상 대화에 진전된 행보를 보여줬다. 그러나 미국은 '선 비핵화, 후 제재 해결'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문재인 정부의 중재는 통하지 않았다.  이후 2019년 10월 열린 실무회담은 미국의 대북 제재의 변화 없음으로 성과 없이 끝났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는 전임 정부의 남북관계 악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좌초가 단계적 군축 합의,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지키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음에도 3축 체계를 비롯한 군사력과 한미연합훈련의 강화 정책을 이어가는 중이다.

우리는 북한=경제난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팩트가 아니다. 경제가 어렵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정도로 예전의 고난의 행군 때문만큼은 아니다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2023년 5월 직접 만나본 중국의 관계자들은 '북한이 식량난을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식량 사정은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런데도 한국은 여전히 북한을 지원의 대상으로 본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을 돕겠다고 했지만 북한은 거부하거나 응답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이미 중단된 대북 지원을 또다시 중단하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이런 괴리가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김정은 정권은 핵과 미사일에만 매달린다'는 인식을 부추기며 새로운 대북정책 수립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내가 볼 때 가장 문제는 국내 언론과 정부의 과도한 북핵 공격 조장 행위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과연 핵무기를 앞세워 우려하는 적화통일에 나설까. 이는 북한에도 자충수일 뿐더러 국내에도 과도한 군사력 강화 태세, 정쟁을 키우기만 하는 요인이 된다. 한국이 결핍감에 시달리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과도하게 억제하려고 할수록 정작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억제가 힘들어진다는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한미, 혹은 한미일이 대북 억제 강화를 이유로 군사력과 준비태세를 강화할수록 북한도 마찬가지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또 미국의 확장억제와 한미일의 군사적 결속은 북한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을 겨냥한 군사적 조치로 간주하며 맞대응에 나서서 한중·한러 관계에 큰 부담과 위험을 야기한다. 한국이 이미 충분히 강력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매달릴수록 미국은 한국에 부담금 청구를 들이밀 것이므로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이 부분이 나는 꽤나 중요하다 생각한다).

1954년부터 유럽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한 미국은 1966년에 나토 회원국들과 '핵공유 협정'을 체결하면서 평시에는 접수국 기지에 배치된 핵무기를 미군이 관리·보호하다가 유사시 접수국의 전투기에도 탑재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나토 회원국은 '핵기획 그룹'에 참여해 나토의 핵 정책 발전과 실행에 관여했다. 
미국은 한국에 1950년대 후반부터 핵무기를 배치했고, 1970년대 초반에는 그 수가 1000개에 육박했음에도 한국과 핵공유를 하지 않은 것은 1953년 정전협정의 '신무기 반입 금지' 조항을 의식해서다.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핵공유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인 것이다. 동시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주한미군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과 협의도 없이 몰래 핵무기를 배치했다. 한미가 '나토식 핵공유'를 추진할 수 없을까 생각하지만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 때문에 불가능하다. NPT에 따르면 핵보유국은 핵무기를 직간접적으로 양도하지 않고 양도받지 않을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나토는 핵공유 협정을 1966년 체결하여 1970년 NPT 조약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고 동맹의 핵보유국들이 그들의 핵무기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핵무기 통제 이전을 금지한 NPT 조항에도 부합한다 보았다. 
2023년 4월 한미 간 체결된 워싱턴 선언은 한국이 NPT와 한미원자력협정을 준수한다는 내용을 통해 독자적 핵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더불어 그 어떤 핵공유는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핵공유 논의는 불필요하다고 선을 그으면서 미국과의 반도체 합작에 나섰다. 
북한은 2013년 핵독트린에서 '적대적인 다른 핵보유국이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거나 공격하는 경우 그를 격퇴하고 보복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최종명령에 의하여서만 사용할 수 있다.'라고 명시했었다. 그러나 2022년 핵독트린에서는 '핵무기 사용 결정권을 김정은에게 독점 부여하면서도 국가지도부와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대한 적대 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로 사용조건을 명시했다. '공격하는 경우 ->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로 한발 더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안정성이 결여된 억제 관계는 무력충돌의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며 '한반도형 3C'를 제안한다. (한미동맹과 북한이 군비경쟁보다는) 군비통제를 통해 군사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접근, (보복 위협이 빈말이 아님을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적대적 신뢰보다는) 서로가 선제공격하지 않고 우발적 충돌 발생 시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우호적 신뢰 구축의 노력, (두려움 주기식의 전달을 지양하고) 상호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으려는 대화와 소통 방식의 마련 이다.
더불어 최대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최소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라는 저자의 말에 가장 공감했다. 지금까지 남북 대화를 포함한 각종 회담의 목표는 '최선의 시나리오'에 맞춰져 왔다. 많은 것을 얻으려다 보니 어느 하나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선은 대화와 협상의 목표를 '최악의 시나리오'를 방지하는 데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소한 전쟁을 방지하고 긴장 완화를 가능하게 하는 접근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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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9-09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소의 시나리오.. 군비도 최소로 들고 그러면 참 서로 좋을텐데 말입니다.

아이젠하워가 한반도에 핵무기를 설치했었다는 걸 전 화가님 글에서 처음 알았네요. 충격적입니다…. 지금도 한반도에 핵무기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거리의화가 2023-09-10 21:07   좋아요 1 | URL
한반도에 핵무기가 한 때 천기도 넘게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군비를 한쪽에서 확장하면 다른 쪽에서도 확장할 수 밖에 없는 구도이니 경쟁은 끝이 나질 않겠지요. 이미 한국의 군사력이 6위까지 올랐는데 이것이 좋은 일인지... 정부와 국방부에서는 무기 수출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최초의 문자에 대한 기록이다.


이집트인들이 석판에 새긴 글자를 hieroglyphs라고 한다. 석판에 새겼으니 소재 자체가 단단해서 만들고 나면 튼튼하지만 쉽게 새기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Fertile Crescent의 Mesopotamia(between the Tigris and Euphrates rivers)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진흙판에 글자를 새겼고 이를 cuneiform이라 했다. 진흙은 석판보다 글자 새기기 훨씬 수월하고 마르고 나면 꽤 단단해져서 좋았으나 쌓이면 공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수천년 후 이집트인이 발견한 것이 paper와 ink다. 종이는 나일강 둑 근처에 있던 갈대를 부드럽게 짓이겨주는 과정을 거쳐 펄프로 만들고 판에다 펴서 말리면 만들어지는 것이 papyrus(파파이루스)다. 가지고 다니기도 좋고 글자 쓰기에도 최적화되어 있던 papyrus는 물에 약해 젖으면 분해되거나 찢어졌고 오래되면 망가지기 쉬웠다. 때문에 수메르인의 기록은 수천 년이 지나도 살아남았으나 이집트인의 기록은 없어졌다. 


* mash

The Egyptians learned how to soften and mash them into a pu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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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9-08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ashed potato…. 자야 하는데 배고프네요 🙄

거리의화가 2023-09-09 08:1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너무 늦게 올렸군요^^;
mash 라는 단어가 저렇게 쓰인다는 걸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새겼습니다. 단어는 외워도x2 왜 뒤돌아서면 잊는지!

2023-09-08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9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09-09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화가님의 한줄 영어요약 멋져요!👍👍😆

거리의화가 2023-09-09 08:19   좋아요 1 | URL
앞으로도 이렇게 이야기 요약해서 올리려구요^^; 3장은 상대적으로 짧았는데 두 개나 세 개로 이야기가 나뉘어진 것은 좀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ㅎㅎ 마지막 단어는 인상 깊은 단어와 그것이 쓰인 문장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