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 어떻게 위대한 정복자가 우리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었는가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몽골이 벌인 정복전쟁의 참상은 여러 책과 영화에서 잘 다루어졌으나, 법률 제정가인 칭기스칸의 역할은 대체로 보아 별로 탐구되지 않은 상태다. 생애 만년에 그는 온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을 자신의 야영지로 불러들였다. 이는 서로 반목하는 종교들 사이에 지속적인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는데, 사실 여러 종교 사이의 호전적인 적대감이 인류를 크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영적 정수를 찾기 위해 종교에 귀를 기울였으나 이것이 결국에는 사회 내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탐구과정으로 확대되었다. - P23


잭 웨더포드의 책을 처음 읽었다. 일 때문에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내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였고 책이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주말에 다 읽지 못한 것을 후회할 만큼 재미나게 읽었다. 저자의 글 솜씨인지(아니면 번역자의 공?) 이 책의 글이 재미난 것인지는 판단을 보류해야겠으나(다른 책을 이제 곧 집어들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풀어서 참 재미나게 썼다고 여긴다. 마치 소설 같은 아름다운 묘사로 장면을 상상하며 읽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도서관에 갔다가 읽을 책이 안 보여서 시큰둥하다가 발견한 책 치곤 마치 바다에서 대왕 오징어을 건진 기분이었다. 물론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이거 심상치 않다 싶어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보긴 했지 아니나 다를까 괜찮을 것 같다 여기고 바로 대출을 했다. 


기존에 칭기스 칸을 다룬 책이나 매체들은 몽골의 전쟁사나 개인의 영웅담 같은 이야기에만 주목하여 비슷한 내용들이 많았다. '왜 그런 주제에만 천착하지?' 하는 생각을 했고 다른 내용은 없나 궁금해하던 찰나였다. 그리고 이 책은 몽골이 왜 제국을 그리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 방점을 종교에서 가져온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몽골의 통치자들은 그 넓은 영토를 유지하는데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려야하는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무자비한 탄압만으로 그 넓은 영토와 사람들을 다스리기에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만한 것으로 어쩌면 믿음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칭기스 칸이 여러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며 제국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전쟁사는 핵심만 담고 종교를 통한 사회 통합 과정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칭기스 칸이 처음부터 종교를 적극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몽골인들은 샤먼에 기반한 전통 믿음 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즉각 수용하기에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몽골의 환경은 이런 믿음 체계를 가질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산간의 숲 지대인 캉가이는 풍성한 생명의 어머니였지만, 수목의 생장 한계선 위의 높은 산간 지대는 커다란 암석과 험준한 절벽이 영원한 눈과 얼음을 헤치고 비죽 튀어나와 있는,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땅이었다. 이런 남성적 요소가 대지에 딱딱한 뼈를 제공했다. 여성적 숲과 남성적 암벽은 함께 모든 존재의 기원을 형성했다. 그것들은 남성, 여성, 불멸이라는 3대 영혼으로 구성된 우주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은 두 개의 필멸하는 영혼과 하나의 불멸하는 영혼을 갖게 되었다. 몽골의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뼈에 남성적영혼을 살과 피에 여성적 영혼을, 그리고 마음과 심장에 불멸의 영혼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 P61


칭기스 칸은 처음에는 정주 문명의 종교 기관들을 매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대한 사원, 엄청난 부, 화려한 의식 행렬 등을 자랑하는 대규모 종교들은 가짜에 불과하다고 의심했다. 그렇지만 이 이상한 기관들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은 듣고 싶어 했다. 많은 저술을 남긴 13세기의 학자 겸 연대기 작가 바르 헤브라이우스Bar Hebraeus는 이렇게 썼다. 칭기스칸은 ‘고매한 현자들‘을 소환하여 여러 언어로 된 그들의 성스러운 경전을 읽어달라고 했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종교를 저마다 설명하고 토론하게 했다. 수도자, 신부, 점성술사, 마법사, 예언자, 연금술사, 점쟁이, 현자, 점술가, 허풍선이 들은 몇 달에 걸쳐넓은 강을 건너고 높은 산을 지나 먼 곳의 국경을 통과하여 마침내 그의 유목 캠프에 도착했다. - P40


테무진과 두 아들인 톨루이와 오고데이는 기독교도 아내를 받아들였고 모든 몽골 칸은 기독교 어머니 소생이거나 기독교인 아내를 두었다. 칭기스 칸이 거쳐간 세계는 많은 부족들 중 위구르족은 공식 종교로 마니교를 썼다. 위구르 제국이 붕괴된 후에는 몽골 스텝 부족들 상당수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는데 테무진은 평생 기독교와 중요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카라키타이를 정복함으로써 테무진은 무슬림,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칭기스칸은 새로 해방된 땅의 각 도시와 마을에 전령들을 보내, 자신의 법률을 널리 전파하여 모든 사람이 그 내용을 들어서 알도록 했다. 그는 "각자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그 신조를 따라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그때 이후 그가 추진한 정복에서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신하들을 위해 이 원칙을 지켰다. 기존의 믿음 체계를 파괴하지 않고 각자의 종교를 지키게 했던 원칙을 세운 일은 칭기스 칸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하였다.


어느덧 칭기스 칸의 제국 궁정은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인 회합의 자리가 된다. 종교인은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는 데에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칭기스 칸의 궁정은 마법의 돌을 가진 몽골 샤먼, 도교 연금술사, 독경하는 불교 승려와 점성술가, 기도하는 물라, 노래하는 기독교인, 유교의 궁정 의례 담당관, 티베트의 점술가, 다양한 종류의 독립적인 심령술사와 강신술사, 영혼을 불러온다고 소문이 났거나 마법의 술수를 부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독심술사 등 다양한 영적 위력을 지닌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칭기스칸의 캠프는 유목민의 대학과 같은 특성을 지녔으며, 다양한 언어, 문화, 종교를 지닌 학자들로 이루어진 정신적 동물원의 종합판과 같았다. 그 캠프는 밝은 노란색, 하얀색, 반짝이는 오렌지색, 핏빛 적색, 아주 진한 검은색으로 된 제의祭衣가 넘쳐났다. 하루가 염주, 북, 공, 호루라기, 나무 종 같은 종교적인 소리로 시작하여, 신들린 채 모닥불 옆에서 깃털 장식을 달고 춤을 추는 샤먼, 불태운 양의 어깨뼈에 생긴 금을 읽는 주술사,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점성술사, 지골을 던져서 운수를 알아보는 병사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끝났다. - P243~244


무엇보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구처기와 야율초재에 대한 것이었다. 구처기는 중국 도교 중 하나인 전진교의 추앙 받는 지도자였고 야율초재는 요 왕실의 후예로 스텝 부족인 거란 부족의 일원이었다. 야율초재는 요 왕조가 여진족에 의해 무너졌을 때 칭기스 칸을 모시기로 결정하고 이후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뿌리는 유목 민족이었으나 중국에서 오래 생활을 한 덕분에 중국의 사상(특히 유교)과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구처기는 칭기스 칸의 요청에 따라 몽골 궁중으로 와서 그를 만난다. 그러나 야율초재는 구처기에게 불호에 가까운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화를 시작하며 시를 주고받을 때, 나는 솔직히 어느 정도 그를 인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구면이 되면서 나는 그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했다. 그 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를 비웃었다." 야율초재는 구처기를 가짜라고 생각했다. 반면 구처기를 따라 나섰던 이지상은 스승을 두둔하는 입장의 글을 남겼다.  


칭기스 칸은 마지막으로 탕구트 원정에 나섰다가 사고로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졌고 이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한다. 많은 종교인들과 만나고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려 노력했으나 마지막에는 몽골인으로 죽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몽골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피하여 그 대신에 완곡하게 ‘신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하여 1227년 여름에 칭기스칸은 신이 되었다. 예수이 카툰은 칭기스칸의 시신을 펠트로 감싸는 작업을 감독했으며 친위대는 황제를 고향으로 데려가 매장할 준비를 했다. 칭기스칸은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도교, 그 외의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몽골인으로 죽었다. - P378


칭기스 칸 사후 제국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이어지는 동시에 형제들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어지러운 궁정 상황을 마무리하고 몽케 칸이 즉위하는데 그는 앞선 칭기스 칸과는 달리 몽골 전통 종교에 집착하는 쪽이었다. 특히나 이 때 도교는 몽골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 기관이 되었다. 이지상의 지도에 따라 도교는 오고데이의 가문과 밀접하게 지내며 그들 편을 들었고 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몽케는 도교의 위상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불교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소림사는 육식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몽골인들에게 거부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승려들의 전투 실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을 하면서 지금의 소림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잭 웨더포드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책 <칭기스 칸과 근대 세계의 형성>을 집필하면서 기번의 논평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의 종교 관련 법률과 로크 씨 사이에서 독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호기심을 따라간 저자가 얻은 결론은 독자도 놀라게 할 만한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칭기스 칸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과연 그의 법률에 담은 내용도 칭기스 칸의 종교적 사회 통합을 염두에 둔 것일까. 이 책을 읽어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반영했다고 여겨진다.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널리 퍼진 중국 관련 주제에 관심을 공유한 많은 지식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771년 8월 3일에 처남 로버트 스킵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칭기스칸을 다룬 머피와 볼테르의 연극에는신경 쓰지 말고 당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던 원극의 대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제퍼슨은 칭기스칸을 다룬 페티스 드 라 크루아의 전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제퍼슨 역시 모든 종교에는 일부 좋은 면이있지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그는 프랑스어로 된 칭기스 칸 전기를 여러 부 구입했다. 그중 일부는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는 자기 딸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 P469


제퍼슨은 1777년에 종교적 자유에 관한 법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1786년 1월 16일 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알맞은단어를 찾는 데 고심했고 이 작업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의 제안은 치열한 논쟁·편집·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 확정된 핵심적인 단어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유사했다. 제퍼슨의 새로운법은 이렇게 규정했다. "그 누구도 종교적 의견이나 신앙으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장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전해졌고, 몽골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다시 터키어, 프랑스어를 거쳐 마침내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문헌들에는 칭기스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칭기스칸의 정신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 P470~471


이 책은 재밌게 읽기도 했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오별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절판이라니... 진심으로 재판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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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을 떠날 무렵, 칭기스칸은 종교인들이 자신의 광대한 제국의 통치에서 제한적인 역할만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유용한 기술을 지녔지만, 말만 많고 거의 행동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은상식을 추구한 반면에 그들은 깨우침을 추구했다. 몽골 궁정으로 데려온사제, 수도사, 율법학자, 샤먼 들은 칭기스칸에게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강론과 가르침을 내세웠다. 그들 말대로 모든 문제가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연구,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칭기스칸은 당면한 문제가 산적한 수백만 인구의 제국을 통치해야했고, 그러려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즉각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 P357

몽골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피하여 그 대신에 완곡하게 ‘신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하여 1227년 여름에 칭기스칸은 신이 되었다. 예수이 카툰은 칭기스칸의 시신을 펠트로 감싸는 작업을 감독했으며 친위대는 황제를 고향으로 데려가 매장할 준비를 했다. 칭기스칸은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도교, 그 외의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몽골인으로 죽었다. - P378

이제 외국 땅에 진출한 많은 몽골인은 칭기스 칸이 알아볼 수 있는부류의 몽골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시인이 되어 있었다. 제국의 중심은 먼 도시로 이동했다. 훌레구는 바그다드와 타브리즈를 중시했고, 쿠빌라이는 새로운 수도 연경(오늘날의 베이징)으로 중심을 옮겼다. 몽골인들은 스텝을 버렸다. 카라코룸은 목초지로 전락했다. 한때 사절들이 칸 앞에 와서 몸을 떨고 포도주가 거대한 은빛 분수에서 흘러내리던 곳은 이제 염소와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곳으로 변했다. 카라코룸의 사원, 모스크, 교회는 산산이 부서져 폐허가 되어 땅속으로 사라졌으며, 새로 자란 풀로 만들어진 카펫 밑에 묻혔다. 승려들의 염불 외는 소리, 무예진의 기도 시간 알리는 소리, 기독교인들이 찬송가 부르는 소리는 가뭇없이 사라져 울부짖는 바람 소리로 대체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기도 소리는 때때로 샤먼들이 찾아와 북을 두드리고, 밤에 빛나는 별 아래 모닥불옆에서 춤추며 노래 부를 때 나는 소리뿐이었다. - P439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널리 퍼진 중국 관련 주제에 관심을 공유한 많은 지식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771년 8월 3일에 처남 로버트 스킵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칭기스칸을 다룬 머피와 볼테르의 연극에는신경 쓰지 말고 당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던 원극의 대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제퍼슨은 칭기스칸을 다룬 페티스 드 라 크루아의 전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제퍼슨 역시 모든 종교에는 일부 좋은 면이있지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그는 프랑스어로 된 칭기스 칸 전기를 여러 부 구입했다. 그중 일부는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는 자기 딸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 P469

제퍼슨은 1777년에 종교적 자유에 관한 법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1786년 1월 16일 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알맞은단어를 찾는 데 고심했고 이 작업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의 제안은 치열한 논쟁·편집·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 확정된 핵심적인 단어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유사했다. 제퍼슨의 새로운법은 이렇게 규정했다. "그 누구도 종교적 의견이나 신앙으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장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전해졌 - P470

고, 몽골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다시 터키어, 프랑스어를 거쳐 마침내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문헌들에는 칭기스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칭기스칸의 정신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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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투겐의 죽음은 칭기스 칸 제국의 미래계획뿐만 아니라 칭기스칸의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영적 중심도위협했다. 정말로 하늘이 그를 축복하여 그런 크나큰 위업을 달성할 수있게 했다면 왜 손자의 사랑을 계속 누릴 수 있는 운명을 거부했을까?
왜 손자의 운명은 그를 바미얀의 절벽 앞에서 쓰러져 죽게 했을까?
운명은 죽음의 때를 결정했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그 운명에 맞서 자기 내면의 고통을 세상에 대한 복수로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는 손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원래 전통적으로 죽은 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무투겐의 죽음 자체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적에게 왕족의 죽음을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심지어 후대에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 연대 - P305

기 작가들마저 무투겐의 죽음이나 그 후에 벌어진 복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면 무슬림관찰자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P306

그는 이제 삶에서 마지막 행동이될새로운 영적 여정을 떠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내면의조화와 평화를 구하기 위해 철학적인 명상이나 마술 같은 의식에 기대려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당대에 가장 존경받고 저명한 영적 스승들과 현인들을 초빙해서 저 너머에 있는 세상으로 새로운 탐구를 떠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과 습관을 상세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부 신비한 비밀과 마음을 위로하는 지식을 알아내기 위해 다른 것들, 즉 좀 더 형식을 갖춘 체계화된 종교들을 연구하기시작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무엇을 발견했을 때 곧바로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 P311

칭기스칸은 몽골인들이 중국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연로한 도교 현인이 도움을주길 바랐다. 당시 그는 중국의 3분의 1만 정복한 상태로, 금의 영토는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송과의 전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인들은 중국 전역을 통제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고된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처지였다. 구처기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이미 칭기스 칸의 휘하에 들어온 영토에서 몽골의지배를 더 강화할 수 있고, 또 금과 송의 통치 지역에 사는 백성들에게도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도교 수도사들이 그를 도와 이미 정복된 백성들을 회유해주고, 나아가 아직 정복되지 않은 백성들의 마음 - P331

을 몽골 쪽으로 끌어들이길 기대했다. 외부에서온통치자로서 몽골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중국인들이 인정하는 합법성을 필요로 했다. 옛 지배층과 밀접한 동맹을 맺어온 유학자들은 그런 호의를 베풀 기색이 전혀없었지만, 불교와 도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 P332

구처기와 그의 추종자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을 의도적으로 새롭게해석했다. 그들은 전진교가 다른 모든 도교 교파를 제압하고 종국적으로는 주된 경쟁자인 불교를 타도해야 한다는 칙령으로 해석했다. 전진교는성직자들의 면세 특권을 확장했고 도교 사원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들의 사업은 면세 특권 덕분에 다른 상인들보다 우위에 서면서 빠르게확대되었다. 전진교 사원들은 이제 사실상 면세로 물건을 판매하는 창고로 변모했다."
주어진 특별한 혜택으로 전진교는 점점 그 세력이 강해졌고, 너무나강대해진 나머지 어떤 경우엔 자신들에겐 몽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여기기까지 했다. 전진교 사원들은 상업, 은행업, 제조업을 위한 면세 지역으로 운영되었고, 창고로 쓰는 공간은 점점 도교를 숭배하는 공간을밀어내며 자리를 넓혀갔다. 그들은 제국 전역을 무대로 하는 면세점 체인이 되었다. 전진교에 가입한 사람들은 몽골 지역 당국이 요구하는 군역, 고된 집단노동, 가도 건설, 관리 운송, 그 외 다른 부류의 노동을 면제받았다. 결국 전진교의 대규모 확장은 제국을 통치하고 거대한 몽골군을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가 세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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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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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선 주의와 이성애 중심의 섹스가 보편적이라고 여기던 누구라도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다양한 암컷들의 생태계를 보고 나면 인간이 더 후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전학과 진화생물학 이론을 넘어서 과학이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야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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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이 임신과 수유의 책임에서 풀려나게 되면 동물의 세계 나머지에서 그러하듯 아빠들이 자식에게 훨씬 더 헌신적으로 된다. 특히 조류에서는 부모가 함께 자식을 돌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조류 커플의 90퍼센트가 그 일을 나눠 가진다. 진화의 단계를 거슬러가다 보면 아비의 돌봄이 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관례 수준이다. 물고기의 경우 전체 종의 3분의 2가 양육의 모든 책임을 아비 혼자서 지는 싱글대디이고, 어미는 알을 기여하는 것 이상은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심지어 해마 수컷처럼 일부는 출산까지 한다.

뒬락은 두 종류의 뉴런을 발견했다. 하나는 새끼 돌보기 행동을 하게 하는 갈라닌 뉴런이고, 다른 하나는 영아 살해 충동을 일으키는 우로코르틴urocortin 뉴런이다. 두 뉴런은 서로에게 직접 작용하여 하나를 자극하면 다른 하나가 억제된다. 따라서 두 행동은 상호배타적이다.

"지금 저와 당신이 살아 있는 것도 우리 조상님들이 자신의 갈라닌 세포로 제 자식을 돌보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엄마로 하여금 과연 지금이 아기를 가지기에 좋은 때인지 판단하고 실행하게 하는 우로코르틴 덕분에도 우리가 존재하지요. 그러지 않았으면 어미 자신이 죽었을 테니까요." 뒬락의 말이다.

뒬락은 이 신경 회로가 비단 생쥐의 암수에서만 똑같은 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척추동물이 공유하는 특성이라고 추정한다. 시상하부는 뇌 안에서도 아주 오래된 영역으로 잠자고 밥 먹고 성관계를 하는 것처럼 여러 본능적 행동의 중심이다. 이 각각의 행동을 조절하는 뉴런이 동물에서 발견될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뉴런이 인간에게서도 발견된다. 만약 부모되기의 명령 중추가 개구리와 생쥐에 존재한다면 유사한 회로가 인간 남자와 여자의 뇌에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뒬락은 자신의 추정대로 우로코르틴 뉴런과 산후우울증이 연관되어 있다면 자신의 연구가 해당 장애를 치료하는 차단제를 찾아낼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실제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들은 무엇이 자신을 부추겼는지 알 수 없지만 엄청난 본능을 느꼈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게 뭔지는 설명하지 못했죠. 위험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본능적으로 새끼를 없앤 쥐의 뇌에서 일어난 일과 아주 유사할지도 모릅니다."

모성애의 목표는 무작정 새끼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번식할 때까지 오래 살아남는 자손의 수를 최대로 늘리는 곳에 자신의 제한된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이 일에 진정한 이타적 헌신은 없다. 오히려 철저히 이기적이다. ‘좋은 엄마’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 때와 포기할 때를 알고 있으며 그건 심지어 새끼가 태어난 후에도 그러하다

모성의 시작은 호르몬의 교향곡으로 촉진되는데 그중에서도 모성 경험의 강력한 원동력으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옥시토신이다.

암쥐 처녀들은 일반적으로 새끼 쥐에게 극도로 적대적이라 무시하거나 마주치면 잡아먹기까지 했으나 반복적으로 새끼에 노출되고, 특히 주변에 보고 배울 엄마가 있으면 이 미숙한 베이비시터는 살해를 멈추고 생모처럼 어린 쥐를 자상하게 돌보기 시작한다.

남의 새끼를 돌보고 부양하는 것은 얼핏 진화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협동 번식은 다양한 분류군에서 여러 차례 진화했다. 1만 종의 조류 중 약 9퍼센트와 전체의 3퍼센트에 달하는 포유류 어미들이 알로마더allomother, 즉 ‘다른 엄마’들로부터 절실한 도움을 받는다.

인간의 아기는 성숙하기까지의 속도와 비용 면에서 최악이다. 남아메리카 수렵채집 부족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조사 결과 한 사람을 출산부터 영양 면에서 독립할 때까지 키우는 데 약 1,000만~1,300만 칼로리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는 크고 육즙이 풍부한 덩이줄기를 아무리 잘 찾는다고 해도 엄마 혼자서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

편협하지만 대단히 영향력 있는 다윈의 태도로 인해 이후 150년 동안 동성 경쟁의 연구는 짝을 두고 벌이는 수컷의 경쟁에만 초점을 맞췄고, 암컷의 전투적 잠재력은 대개 무시되었다.
그 결과로 암컷의 데이터가 들어가야 할 텅 빈 자리는 허위 정보로 메워졌다. 암컷은 경쟁심이 없다는 가정하에 엉터리 이론이 세워진 것이다. 실상은 그저 우리가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것뿐인데 말이다.

사회적 선택social selection이라는 개념은 1979년에 이론생물학자 메리 제인 웨스트 에버하드Mary Jane West-Eberhard가 주창한 것이다.
웨스트 에버하드는 다윈의 성선택 이론이 번식 철 바깥에서 성과 무관하게 영역이나 자원을 두고 벌어진 경쟁에 의해 정교하게 진화한 형질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스트 에버하드는 다윈을 폄하는 대신 그의 원칙을 확장하여 성선택을 사회적 선택이라는 더 넓은 배경의 일부분으로 제안했다. 웨스트 에버하드는 종의 야단스러운 형질이나 성적 이형을 성선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아 계절이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사회적 기능을 보이는 방대한 생물의 예시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옹호했다.

암컷들 간의 전략적 경쟁은 영장류 조직의 핵심이다. 영장류 암컷의 사회는 대부분 상속 가능한 안정적인 모계를 특징으로 한다. 통제권을 쟁취하려는 무자비한 싸움을 벌이며 심리적 위협, 전술적 동맹, 잔인한 처벌을 통해 서로 경쟁한다.

미어캣 사회는 임신하는 즉시 다른 암컷의 새끼를 죽이고 잡아먹는 근친관계 암컷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번식 경쟁에 기반을 둔다. 새끼를 잡아먹는 일은 임신한 아랫사람에 대한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 알파 암컷의 전지전능함에 의해 통제된다.
이 여인의 목표는 자신이 통치 기간에 그 어떤 암컷도 번식하는 꼴을 보지 않는 것이다.

미어캣 문화는 항상 긴장된 상태에 있고 또 살인적이다. 1,000종 이상의 포유류를 대상으로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치명적인 폭력을 조사한 결과, 미어캣이 지구상에서 가장 살인적인 포유류로 밝혀졌다. 심지어 인간을 제치고 잔인하기로 으뜸가는 짐승이 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미어캣 다섯 마리 중에 한 마리꼴로 다른 미어캣에게 살해당한다.
가해자는 대부분 암컷, 그것도 새끼의 할미일 가능성이 크다.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사회에서는 영역 방어를 대부분 암놈이 담당한다. 여우원숭이 암컷은 냄새 분비샘이 잘 발달했고 수컷보다 화학 신호를 많이 생산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기대치와 반대되는 것이다. 여우원숭이 암놈들은 수놈보다도 동종의 냄새, 특히 번식기 암컷의 냄새에 더 관심을 보였다. 건강한 암컷일수록 지방산 에스터를 많이 생산하는데 이는 강하고 섹시하다는 증거이다.

마다가스카르의 여우원숭이는 원원류, 즉 인류의 가장 근간이 되는 영장류 사촌이다. 원원류는 영장류 진화의 굵직한 경로에서 일찌감치 갈라져 나왔고 이후에 나머지가 신세계원숭이(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진원류)와 구세계원숭이(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사는 진원류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대형 유인원이 여기에서 진화했다)로 갈라졌다. 원원류 중에서도 현생 여우원숭이의 조상은 약 5,000~6,000만 년 전에 마다가스카르섬에 고립되어 진화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암컷의 지배성 연구는 ‘지적으로 고립’되었고 본질적으로 테스트할 수 없는 가설이라 하여 여우원숭이는 종종 ‘마다가스카르의 유별난 괴짜’로 무시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우원숭이의 10퍼센트는 암컷 지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비과학적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육식동물에서부터 설치류와 바위너구리까지 전 세계적으로 암컷이 지배한다고 기재된 포유류를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암컷 지배가 마다가스카르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암시다.

침팬지 무리에서 암컷의 계급은 나이와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 여러 암컷을 동물원에 모아놓으면 대개 별다른 소란 없이 재빨리 서열이 결정된다. 한 암컷이 다른 암컷에게 복종의 자세를 취하면 그걸로 끝이다. 암컷의 서열은 안정적이고 웬만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침팬지 무리에서 사회적 결과물은 가족 관계와 동맹의 네트워크에서 누가 중심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마는 월등한 사회적 네트워크와 중재 기술을 갖춘 특별한 존재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모든 성체 수컷은 공식적으로 마마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하나같이 마마를 필요로 했고 마마를 존중했다.

여성이 스스로 삶을 제어하지 못하고 남성이 폭력을 가할 위험성이 큰 사회는 암컷이 어린 나이에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지원과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랭엄이 말한 결속하지 않는 암컷은 인간의 가장 가까운 야생의 사촌들에서 공격적인 수컷 지배의 본보기를 찾으려는 인류학자에게 요긴하다. 수컷이 남고 암컷이 떠나는 시집살이가 아마도 선행인류의 패턴이며 그로 미루어 인류의 암컷 조상들도 이와 비슷하게 고립되고 취약하고 억압받았을 것이라는 랭엄의 주장은 더욱 좌절을 준다.

프란스 드 발은 보노보를 ‘페미니스트 운동에 내려진 선물’이라고 불렀다. 침팬지는 부계 중심에 호전적이지만 보노보는 모계 중심에 평화롭다. 인간은 양쪽에 똑같이 피를 나누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대형 유인원의 비정통적 삶이야말로 영장류에서 수컷 지배가 정해진 것이라 주장하는 개념에 최후의 치명타를 날린다.

뒤를 봐줄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디아스포라로 성인의 삶을 사는 대신 보노보 암컷은 낯선 집단에 합류해서도 피를 나누지 않은 암컷들과 동맹을 형성한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구성된 자매 관계의 힘으로 보노보 암컷은 자신들보다 큰 수컷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의 동맹은 싸움이나 신체적 겁박에 의해 형성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큰 요인은 과학자들이 ‘G-G 문지르기’라고 묘사한 행위로 서로 생식기를 비비는 행동이다.

보노보는 이성과 섹스를 할 때 종종 정상 체위를 시도한다. 이는 다른 영장류에서는 전혀 관찰된 바가 없는 사실이다. 침팬지는 암수가 얼굴을 마주 보는 섹스를 하지 않지만, 야생에서 보노보는 세 번 중 한 번꼴로 정상 체위를 시도한다.

"보노보 세계에는 100퍼센트 이성애도, 100퍼센트 동성애도 없습니다. 모두 양성애자예요." 패리시의 말이다.

보노보는 인류학을 개방하여 가부장제를 인류 조상의 보편적 상태로 전제하지 않는 신선한 모델을 탐색하게 했다. 사실 영장류 사촌 전반에서 가부장제가 희귀하다는 사실은 어떻게, 그리고 왜 가부장제가 많은 인간 사회에서 진화하고 장악했는지를 묻게 한다.

보노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이 공격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행위와 능력은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여성에게 힘을 부여한 핵심적인 요소는 압제적인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자매결연의 힘이다. 여기에서 자매란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까지 모두 아우른다.

진정한 완경完經은 생식기관의 노화와 신체의 노화가 분리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생식기관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동물원에서 폐경을 경험한 고릴라는 공짜 식사와 건강 관리로 수명이 인위적으로 연장되었다. 야생에서 고릴라 암컷은 35~40년을 살지만 사육 상태에서는 60년까지도 살 수 있다. 몸과 뇌가 난소의 나이를 넘기는 것이다. 5,000종의 포유류 중에서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완경에 이른다고 알려진 종은 이빨고래류 4종과 인간뿐이다.

나이 들어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부담스러운 사회적 비용이 진화적 자극이 되어 범고래 암컷으로 하여금 중년이 되면 번식을 중단하고 대신 아들과 손자에게 투자하며 딸과 손녀와의 경쟁을 거두게 한다. 그런 동기가 코끼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다른 사회적 포유류처럼 아들이 출생 집단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끼리 암컷은 시간이 지나도 집단 구성원과 근친도가 낮고, 아니 적어도 더 높아지지는 않기 때문에 코끼리 암컷 우두머리들에게 가장 무난한 선택은 죽을 때까지 번식하는 것이다.

1970년대 당시 범고래를 위협하는 것은 굶주림과 오염이 아닌 납치였다. 전국의 해양 공원에 범고래 개체군이 잔혹하게 약탈당한 것이다. 살리시해의 남부 상주군 40퍼센트가 납치되어 인간의 여흥을 위해 수족관에 감금되었다.

범고래(그리고 인간과 같은 대형 유인원)처럼 코끼리는 분열과 융합이 거듭되는 사회를 이룬다. 즉 사회적 삶이 유동적이라는 뜻이다. 집단의 크기는 고정되지 않았고 역동적이며 구성원이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새로 밝혀진 알바트로스 동성 커플이 제안하는 바는 훨씬 고무적이다. 자연에서 성역할에 내재된 융통성은 물론이고 동물이 새로운 사회, 생태적 환경 앞에서 파격적으로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생태적 대재앙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점차 더 중요해질 특성이다. 하와이 바닷새 군집의 65퍼센트 이상이 해수면 상승으로 위협받고 있다. 이들은 낮은 지대의 산호섬에 둥지를 짓기 때문이다. 미드웨이 환초와 레이산섬은 멸종 위기의 얼가니새나 슴새와 함께 레이산알바트로스 둥지의 95퍼센트가 밀집된 곳이지만 이번 세기 중반이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7 그리하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새롭게 군집을 형성하는 개척적인 레즈비언들은 말 그대로 종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매끈비늘도마뱀붙이Lepidodactylus lugubris 개체군은 암컷으로만 이루어졌고 수컷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 도마뱀은 대단히 성공한 종으로서 오직 복제를 통해 수컷의 개입이 전혀 없이 이 섬에서 식민지를 건설했다.

복제를 통한 번식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자손이 유전적으로 어미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이는 근친교배의 궁극적 형태로, 감수분열 중에 가끔 일어나는 복제 실수 말고는 유전적 다양성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 그래서 복제된 동물의 가계는 기생충, 질병,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 맞서서 대항할 유전 다양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섹스는 감수분열 중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해로운 돌연변이의 축적을 막는다. 유성생식하는 종에서는 복제 과정에 실수가 일어나더라도 상대편 성세포의 건강한 유전자 덕분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할 때 오류가 제거된다. 무성생식하는 종은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없어 유전학계에서 ‘돌연변이 멜트다운mutational meltdown’ 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돌연변이를 축적하며 끝없이 복제만 거듭한다.

2018년에는 단성인 점박이도롱뇽Ambystoma 종의 역사가 500만 년이나 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의 장수 비결은 ‘절취생식kleptogenesis’이라는 것이다. 점박이도롱뇽 암컷은 때로 근연종의 정자를 슬쩍하는데, 자극에만 사용할 뿐 그걸로 알을 수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천 년에 한 번씩은 다양성 유지를 위해 과거에 ‘훔쳐서’ 저장해둔 정자의 일부를 게놈에 통합한다.

질형목 생물이 진화적으로 장수한 비결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한 조사와 맹렬한 숙고의 영역이었다. 그 비법 중 하나는 식사 중에 다른 생명체로부터 유전자를 ‘훔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이들의 식단이 부러울 만한 건 전혀 아니다. 물론 사는 곳을 보면 더 기대할 수도 없다. 질형목 생물은 대부분 ‘유기 폐기물’, 죽은 세균, 조류, 원생동물 등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먹고 산다. 그런데 어떤 과학자들은 질형목 생물이 저녁거리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수평적 유전자 이동horizontal gene transfer’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기 게놈을 단장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합치면 질형목은 500종 이상의 종에서 외래 DNA를 갖다 붙인 프랑켄

암컷뿐인 이 개척자들은 성의 보편성에 대한 이성애 중심의 가정에 도전하고, 유전학과 진화생물학의 새로운 탐구 영역을 열고 있다.

환경이 균열되고 아주 많은 종이 재앙 수준으로 감소하면서 성적 파트너를 찾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복제라는 고대 기술에 의존할 수 있는 암컷은 종이 힘겨운 시기를 견디는 데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최근 수학 모델에 따르면 단성생식 위주의 개체군에서도 유성생식하는 개체군과 거의 같은 속도로 좋은 돌연변이가 퍼졌다. 성이 주는 이점은 10~20세대에 한 번씩만 유성번식을 하더라도 유지될 수 있다. 어느 최신 논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체의 5~10퍼센트만 유성생식하더라도 매번 유성생식하는 것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이점을 얻는다.
그래서 번식 양식을 자기 복제로 전환하여 개체수를 위험 수준 이상으로 올리는 능력을 갖춘 암컷이야말로 한 종을 멸종 위기에서 구하는 데 필요한 존재다.

종이 살 곳이 없어지면 아무리 수를 늘리더라도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복잡한 수학적 모델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단성생식은 특정 종에서만 가능한 안전망이고 복제 능력이 있는 것도 암컷뿐이다.* 이 특별한 암컷들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만약 인류가 이런 식으로 전쟁과 파괴를 이어나간다면 미래는 틀림없이 여성이 될 것이다. 살아남는 건 질형목 생물뿐일 테니까.

따개비는 성적 투자를 분산하는 대가이다. 안착한 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성 체제를 수정하는 능력 덕분에 번식 스펙트럼의 폭이 대단히 넓다. 예를 들어 앞에서 본 왜웅矮雄, 즉 난쟁이 수컷은 암컷 위에 내려앉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난소가 발달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확실히 수컷으로 분류하기가 뭣하다.

한 젠더는 수컷으로 태어나 평생 수컷으로 살고, 한 젠더는 암컷으로 태어나 평생 암컷으로 산다. 하지만 세 번째는 암컷으로 태어나 살다가 나중에 수컷으로 변한다. 이처럼 성이 전환된 수컷은 처음부터 수컷이었던 놈들보다 몸집이 훨씬 크다. 이들은 영역과 암컷을 공격적으로 방어한다. 수컷으로 태어난 작은 개체들은 서로 연합하여 팀워크를 통해 짝짓기에 성공한다.
환경에 따라 선호되는 무지개양놀래기 수컷의 젠더가 다르다. 해초로 덮인 환경에서는 몸집이 큰 성전환 수컷이 암컷을 지키느라 애를 먹는 반면, 성전환하지 않은 작은 수컷은 더 활발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산호초의 맑은 물속에서는 성전환 수컷이 제 영역과 암컷을 더 잘 지킨다. 따라서 진화는 그 둘의 혼합을 선호한다.

성을 바꾸는 물고기 대부분이 자성선숙이다. 암컷으로 태어나 나중에 수컷이 된다는 뜻이다. 소수지만 그 반대인 웅성선숙의 예도 있다. 흰동가리들이 바로 수컷으로 시작하는 소수에 속한다. 이 물고기는 암컷을 만드는 메커니즘을 연구할 특별한 기회를 준다.

2020년에 출간된 선충에 관한 연구는 이진법적 도그마에 더 큰 타격을 준다. 이 미세한 회충은 인간을 포함해 좀 더 복잡한 생물에서 행동 조절의 청사진을 찾는 신경과학자들이 아주 사랑하는 모델 생물이다. 로체스터대학교 메디컬 센터 연구자들은 이 벌레의 뇌세포에서 유전자 스위치 하나를 분리했는데, 환경의 요구에 따라 성별 특이적인 형질을 왔다 갔다 한다. 예컨대 선충 수컷은 섹스를 찾도록 배선되었고, ‘암컷’(자웅동체이기도 하다)은 먹이를 찾는 데 집중된다. 그러나 수컷이 너무 굶주리면, 행동이 급격하게 암컷을 닮아간다. 이런 가소성은 성 사이의 경계를 뭉개고 성을 고정된 것으로 보는 발상에 도전한다.

이제는 유해하며 공공연하게 우리를 속이는 이원적 기대를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자연에서 암컷의 경험은 성별 구분이 없는 연속체 안에 존재하며, 다양하고 가소성이 높으며 낡은 분류 방식에 순응하길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얼굴 전체를 덮는 이론의 가면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바깥 세계의 언어를 읽으면서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서 읽는 영구적인 습관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 가면을 벗기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깊이 각인된 개인적 이해의 틀 안에서 세상을 문화적으로 해석하도록 적응되었다. 이런 확실성의 안전한 그물 밖으로 나오려면 먼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깜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갈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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