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이야기 나비클럽 소설선
김형규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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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발 붙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은 탓이다. 몇 달 전 서재 친구분께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신 것을 보고 작가도 나처럼 현실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관심이 갔다. 작년 말 희망 도서로 신청했는데 예산 때문에 잘려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내 손에 받아들 수 있었다. 


우선 작가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동양사를 전공하고 러시아 현대사를 연구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사회과학 분야의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현재는 티셔츠를 입고 대중 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는 변호사로 일한다. 


러시아 현대사와 동양사를 공부해서인지 소설의 배경에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 나처럼 어릴 때라 당시 한국의 노동계와 사회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잘 모르던 사람도 이런 사실이 있었고 이런 대화가 오갔겠구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와 ‘너’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온다. ‘너’는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고 질문의 대상이기도 하며 공포, 또는 연민의 대상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모든 것의 이야기>는 슬픔과 연민에서 시작해 이상과 희망으로 나아가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20년 대림동 수정커피호프에서는 슬픔과 외로움의 냄새가 진하게 흐른다. 나는 수정커피호프에서 일하는 탈북자 여성을 위험에서 구해준다. 나는 가난과 폭력 속에서 살아왔다.


있잖아, 내가 되게 무서운 사람이거든. 사람들은 나를 많이 무서워해. 

그런데 내가 집에만 들어가면,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곧바로 눈물이 막 쏟아져.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언제나 그래. 엉엉 울어. 무서운 것도 없는데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려. 추워서 덜덜 떨려. - P24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나를 지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를 더 강하게 다그쳐야할지 모른다(사회적 가면). 세상은 폭력과 위협이 난무하고 나를 지키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과 온종일 부딪치며 돌아온 나는 피투성이가 된다. 이럴 때는 우는 것이 나의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2043년 화성 마오 기지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중국의 우주본부가 핵폭격을 받고 인공위성도 격추되어 본부와 통신도 할 수 없고 지구로도 돌아갈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 되었다.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아끼며 나아갈 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너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지구를 그리는 두 사람. 문을 열고 나아간 너.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1999년 마석 어쭈구리 테이블에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의 꿈을 위하여!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한때나마 품었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낸다. 선생님, 용접공, 과일 가게 주인, 경찰관, 소방관, 사냥꾼, 가수, 우주인. 꿈은 일관성도 없이 다종다양하다. - P56


‘어쭈구리’라는 상호명을 볼 때 반가웠다. 대학 근처에 어쭈구리가 있었는데 만 원에서 이만 원이면 다양한 안주에 소주를 마실 수 있어서 친구들, 선배들과 무척 많이 갔던 기억이 난다. 대학을 다니면서 장학금을 얻기 위해 공부도 하고 동시에 돈을 벌기도 해야 했다. 당시는 IMF를 막 넘은 터라 여전히 경기는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꿈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를 무사히 넘기길 바랐던 것 같다. 


1951년 하동군 양보면에서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다. 

3년 간 이어진 한국 전쟁은 시시각각 전황이 바뀌었다. 인민군이 내려와 인민군의 세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국군의 세상이 되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인민군으로 변신하고 사람들에게 평등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반동분자를 가려내어 처형하는 일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곳에서 인간이란 어느 장단에 맞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간절히 그리운데 누가 그리운지 모르겠고, 그리운 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가고 싶은 데가 있는지도,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거기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거기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뜻을 헤아리려 애써보아도 헤아릴 수 없는 부서지고 조각난 말들이었다. - P90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세상 속에서도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 말은 ‘네가 문을 열고 나아간다.’이다. 희망 섞인 바람이자 주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어서 기다리면 변하는 것은 없다. 문을 열고 나아가야 무엇이든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림동에서, 실종>은 차별과 배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대림동’하면 떠오르는 주입식 이미지들이 있지 않나. 대림동을 가자고 하니 택시 기사가 하는 반응은 너무나 뻔하다.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려고 하세요?” 계속 읽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어디에 숨고 싶어진다.


대림동은 분지예요. 아무 건물이나 옥상에 한번 올라가서 보세요. 신도림동, 신길동, 신대방동, 구로동의 고층 아파트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요. 거인의 성벽처럼요. 대림동은 아파트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그 성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누가 뭘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 거예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죠. 제대로 된 이름도 없고요. 조선족, 중국 동포, 그런 이름들도 웃기잖아요. - P113


가난한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이 제 몫을 누리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꼭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그게 연극이지? 있잖아,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은 늘 배신당해.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우리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이길 거라고 믿어요.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한다면요. 그러고는 모두 말이 없어졌다. - P165


<가리봉의 선한 사람>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다. 작가가 경험한, 보고 느낀 것이 가장 많이 담겨져 있는 이야기라 생각됐다. 선한 노동자는 거지꼴이 되거나 아귀들에 뜯겨 살아남지 못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자신의 밥그릇을 뺏는다고 생각하고 사장은 노조가 만들어지거나 노조가 목소리를 내는 것을 혐오한다. 지금은 폭력으로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방법들로 노동자를 무너뜨리게 하는 일이 많다. 


- 정규직: 청소부들이 주제를 모르고 정규직이 되려 하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우리가 취준생으로 몇 년을 고생했나

  공정하지 않아 정의롭지 않아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세상은 평등하지 않아 평등해선 안 돼 세상은 원래부터 불평등한 것

  오른쪽 공장 건물의 창문에서 누군가 얼굴을 내민다. 살집이 두툼한 사장님이다.

- 사장님: 공순이들이 겁도 없이 파업을 하려 하네

  세상 무서운 줄 몰라 백골단을 불러 묵사발을 내줄까

  하지만 나는 교양 있는 사장님 근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지

  건전한 노조 활동을 육성하려 하네 건전한 어용노조를 육성해 - P176~177


<구세군>은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다. 기본 소득에 대한 이야기, AI의 등장으로 사람과 기계가 직업을 두고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 등.

기본 소득이 실현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하지 않을까. 일반 납세자들, 무직자들, 재벌을 비롯한 기업가들 간에 충돌은 여전하지 않을까. 지금의 굳어진 양당제가 의원 내각제로 변화할 수 있을까. 


사육되기를 거부하라. 세계는 사람의 것이다. - P222


사육되기를 거부하라는 메시지는 ‘동물 농장’을 읽었을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과학과 기술로 환경은 무너지고 인류는 기술과 실력을 겨루어야 하는 시대가 올 지 모른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시간 뿐 아니라 레닌그라드, 한국 등 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읽고 나면 슬프고, 벅차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역시 읽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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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1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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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1 1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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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5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8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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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쇠퇴는, 중앙 정부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그러한 권력이 점점 지방관들 손에 넘어가면서 국가와 사회 사이의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는 현상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리고 몇몇 측면에서 이러한 쇠퇴현상이 실제로 19세기 동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 제도적 틀은 19세기의 가장 파괴적인 내전 가운데 하나 속에서도놀라울 정도로 중국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었다. 분명 바로 이 때문에20세기의 혁명적 전환들이 전국적 맥락에서 국가 보존을 주목표로 하여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 말기 이후 청 세력 감퇴를 검토할때 중국이 전국적으로 정치적 통합을심지어 학자 엘리트들의 공적인 삶에까지 침투해 있던 부패한 후원제하에서도 어느 정도나이루고 있었는지를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시기 왕조 쇠퇴의 징조는 지방 정부의 착취, 출세 제일주의, 비능률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민중 반란을 야기하는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을 이해하려면 가경제 [1760~1820년)초의 정치적 위기가 미친 영향과 그로 말미암아 결국 정부가 추진한성급한 기초적 개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88

인구 압력의 영향은 청대에 들어와 대규모의 국내 이민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18세기 초 이후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고 또한 반란이 가장 쉽게 발발한 곳이 바로 이들변경 지역이었다. 예컨대 타이완 섬, 쓰촨의 산간 지방, 광시의 낙후된향촌, 후난과 구이저우의 접경 지역의 먀오족 거주 지역 등이 그러했다. 이들 지역의 사회적 특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지역들 속에서 일련의 반란을 조장한 몇 가지 공통적인 요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나 준종족적 자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변경 지역 사람들의 종족적 이질성으로 인해 첨예화하고 때로는 언어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으로는 불안정한 변경 지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비적들의 출몰이나 집단 간 분쟁으로 인해 고도의 무장화가 필연화된 것을 들 수 있다. - P222

근대로 진입하기 직전에 부패만이 아니라 상업화가, 그리고 타락만이 아니라 점증하는 사회적 복잡성이 중국 사회와내부의 권력 분배를 변화시키는 힘들로 작용하고 있었다. 전제군주제가 사적 집단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면서 공공이익 분야의 범위를 지정하고 그것을 통제하던 중앙 정부 자체의 역할 또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 P266

역대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반란자와의 타협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었다. 즉 정복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민심을 잃어 황실이 제위를 보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명이 바로 이렇게 망했으며, 도광제도 자기책임을 소홀히 하여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제국 통치의 이러한 원리는 비록 아편전쟁으로 인해 바뀌지는 않았지만순수함을 잃고 말았다. 왜냐하면 편의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원칙을 - P350

제쳐놓고 임시로 서양과 타협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란의 핵심이 되었던 것은 굴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즉각 결정하는 문제였다. - P351

당시 중국의 공식 문서들은 여전히이 번외의 이인들을 ‘영역‘ 즉 ‘영국 반역자‘로, 베이징 중심의세계 질서에 속해 있지만 그에 반항하는 반역적인 존재들로 묘사하고있다. 게다가 그들이 무력에 의존하는 것은 ‘반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조약항 체제는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de novos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국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온 것이었다. 조약항 내의 외국인 거주지와 통상 지역을 지정하고, 상대국에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을 허용하며, 다른 외국과의 교섭에서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한 새로운 조약의 조항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확대였으며 제도로 볼 때 원래는 과거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구들이 새로 개항된 1840년대에도 조공 사절단은 계속 베이징을 방문했다. 조선은 매년, 류큐는 7년에 한 번, 베트남과 시암은 3년마다 한 번씩 보내왔다. 조공에 관한 각종 규례와 기록들은세부적인 내용까지 하나하나 보존되어 있는데, 이번원을 통해 몽골이나 기타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수장들이 표한 충성의 표시까지 기록되었다. 아편전쟁은 오늘날 회고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대격변처럼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 - P382

포함 외교 - 즉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이용한 강요-를 통해 시작된 불평등 조약 체제는 외국의 조약 열강들에게 중국 영내에서 상당 정도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모습은1860년에 이르러 확고해졌다. 즉 조약향의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치외법권), 조약항 내 조계들의 자치권, 중국 영해에서의 외국군함의 활동 허용과 중국 영토 내 외국 군대의 주둔, 외국 선박의 중국연해 교역과 내지 항해 허용, 그리고 조약에 의한 관세권의 제한 등이그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외국의 권리와 특권이 추가되면서 중국의주권 행사 범위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상업, 재정, 군사, 산업, 기술등 여러 면에서 초강대국인 이들은 점점 더 중국의 전통 사회, 정치, 문화를 파괴적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 P438

19세기 중반 중국의 농촌 사회는 각종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이들과 겨우 사후에나 전술적으로만 협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더 쉽게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태평천국은 전통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령한 도시의 배후에 있는 내륙의 농촌에까지통제력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태평천국에게는 도시가 제국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그곳에서만이 그들의 독특한 제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중국 고유의 농촌 조직 형태들은 오히려 정통 신사들에의해 쉽게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중심 도시를 태평천국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에서 지방 방어 조직을 이용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과 이들이 통치하려고 한 농촌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격은 종종도시와 농촌 사이의 간격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신기하게도 서양 세력이 조약항에 침투하면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중국이 겪게 될 문화적 분열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P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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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계의 하나인 선비어를 이은 거란어는 사어로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어는 알타이어족 언어에 속하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몽골어의 조상어로 추정된다. - P140

거란 대자의 경우 글자 수가 3,000여 자나 되고, 한자의 소리와 뜻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거란 소자의 경우도 원자가 450여 자나 되어 널리 사용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결국 두 종류의 거란 문자는 제정할 때부터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거란 문자가 대중화에는 실패하였으나 이웃한 여러 민족의 문자 창제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1036년경 서하가 서하 문자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금의 문자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은 1119년 거란 대자를 본받아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여진 소자도 제정하였다. - P170

거란은 ‘인속이치’ 방침으로 ‘나라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인의 제도로 한인을 대한다’는 ‘북면관’과 ‘남면관’을 두는 이원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 - P182

거란 왕조는 유학을 통치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중화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거란이 이미 예법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 P229

북방 유목민족 가운데 첫 번째로 중원 유가문화를 접수한 거란은 유가문화가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서하 등 이웃 나라에서도 이를 모방하였고, 모두 한족문화를 학습하였다. 거란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다음 문으로 다스리는 문치 사상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사회 발전의 수요에 상당히 부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P247

거란 경내의 한족은 대체로 3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연운 16주를 획득한 후 거란에 편입된 이들이다. 두 번째는 거란 건국 이후 중원에서 잡아온 한족 포로다. 세 번째는 진한 이래로 이 지역에서 거주하던 한족 유민이다. 따라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거란에 의해 포로로 잡혀 온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을 회유하는 것은 거란 통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 P265

거란과 송의 정통 지위를 둘러싼 논쟁은 원대까지 이어졌다. 원은 초기부터 거란 송 금의 역사서를 편찬하려 하였으나 중기까지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누가 정통왕조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송을 정통으로 보고 거란과 금을 송사에 편입하는 것이고, 다른 의견은 송을 남사, 거란과 금을 북사로 서술하여 평등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거란 송 금의 역사를 편찬하기 시작한 지 반세기가 지난 1343년 원 조정은 세 나라의 정통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세 왕조 모두를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 P282

다민족 제국 거란은 필요에 따라 한족 제도와 전통문화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거란과 한족의 전통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하였다. 거란 제국은 정치 제도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일원적 체제였던 한족 왕조 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복왕조 거란은 지배자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하고자 본래의 유목민족적 사회조직과 언어 전통 문화 종교에서 차별되는 이원적 체제를 시종일관 유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거란은 자신의 민족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한족과 한족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최초의 정복 왕조가 될 수 있었다. 거란이 연 정복왕조의 문을 통해 이후 금 원 청은 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세차게 내딛을 수 있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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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弘을 大司空으로 삼았다. 湖陽公主가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황제가 공주와 함께 조정의 신하들을 논하여 은근히 그녀의 뜻을 관찰하려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宋公의 위엄 있는 용모와 덕스러운 도량은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못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장차 도모해 보겠다." 하였다. 뒤에 宋弘이 인견을 당할 적에 황제가 공주로 하여금 병풍 뒤에 앉아있게 하고, 인하여 宋弘에게 이르기를 "속담에 ‘귀해지면 사귀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 하였으니, 이것이 人情인가?" 하니,宋弘이 대답하기를 "신은 들으니 ‘빈천할 때 알았던 친구는 잊을 수 없고, 술지게미와 겨로 끼니를 이으며 함께 고생한 아내는 堂을 내려가게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황제는 공주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일이 뜻대로 잘 되지 않겠다." 하였다. ≪後漢書 宋弘>에 나옴.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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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州, 河南省 ?陽市)에서 말하기를 ‘백성들 가운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입은 것이 20무(畝) 이하의 사람이 조세를 면제해 달라고 청구한 것은 조신(朝臣)들이 전무(田畝)가 많지 않다고 하여 그 소원(訴願)을 받지 말기를 요청하였다.’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가난한 백성으로 전지(田地)가 적은 사람은 은택(恩澤)이 항상 미치지 아니한다. 재앙과 해를 받으면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은 정치가 곤궁함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어찌하여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한정하겠는가?"
신미일(20일)에 조서를 내렸다.
"지금부터 백성이 수재와 한재를 호소하면 전지가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가리지 말고 모두 더불어 검사하고 시찰하라."

2월 초하루 임오일에 황제가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친히 여러 군대의 장교를 사열하고 명적(名籍)에 의하여 수고하고 업적을 쌓은 것을 참고로 그들을 올려주거나 내쫓았는데, 한 달이 넘어서야 마치었다.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장교(將校)를 발탁하여 뽑는 데는 우선 그 사람이 삼가면서도 능히 아랫사람을 어거(馭車)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고 힘세고 용감한 것은 다음으로 하였다."

정미일(26일)에 요(遼)에서는 초토사(招討使)인 한덕양(韓德讓)이 당항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드디어 하동(河東)을 습격하니 조서를 내려서 아름답다고 포상하였다.

3월에 문무관원과 외국의 번객(蕃客)에게 대명전(大明殿)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고 발해대사(渤海大使)인 난하(鸞河)를 불러서 그를 위로하며 어루만져 주었다. 난하는 발해(渤海)의 추장(酋長)인데, 황제가 유주(幽州)을 정벌하자 부족(部族)을 인솔하고 귀순하였으니 그런 연고로 이러한 하사를 한 것이다.

5월 신해일(2일)에 성의 남쪽에 행차하여 보리밭을 관찰하였으며 보리를 베는 사람에게 전백을 하사하였다. 돌아오다가 옥진원(玉津園)에 행차하여 물고기를 관람하고, 연사(宴射)하고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오대(五代) 이후를 보건대 제왕이 처음에는 근검하다가 끝내는 마침내 그 간난(艱難)하였던 것을 잊어버리면 넘어져서 망하는 것이 빠르게 되었으니 모두가 스스로 남긴 것이다. 다른 사람의 위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염철사(鹽鐵使)인 왕명(王明)이 강남의 염금(鹽禁)을 열어 주어 1년에 판매하는 소금 합계 53만5천여 관(貫) 가운데 28만7천여 관의 공급하는 소금을 백성들에게 주고, 세금징수 시에 그 전(錢, 鹽錢)을 거두고, 24만여 관은 상인들이 판매하고 무역하도록 허락해 주어 그 산전(算錢)을 거두자고 하였는데 이를 좇았다.

"진박은 다만 그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하고 세리(勢利)에 간여하지 않으니 이른바 방외(方外, 세상 밖)의 선비이다. 화산에 이미 40여 년 살았으니 그 나이를 헤아려 보건대 마땅히 100세일 것이며, 스스로 오대(五代)의 어려움과 흩어짐을 경험하였는데 다행스럽게 천하가 승평하니 그러므로 와서 조근(朝覲)하게 하였다.

8월 초하루 계유일에 요(遼)에서는 요택(遼澤)이 막히고 잠겨서 고려 정벌을 그만두고, 추밀사인 야율색진에게 명령하여 도통으로 삼아서 여진(女眞)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 해에 연계(燕?)에서 군사를 운용할 것을 논의하고 고려(高麗)에 조서를 내려서 유시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서쪽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요(遼)에서는 태후가 스스로 칭제(稱制)하고 바로 야율휴격(耶律休格)에게 남쪽의 업무를 총괄하도록 위임하였다. 야율휴격은 수병(戍兵)을 고르게 하고, 경휴법(更休法)을 세우고 농상(農桑)을 권고하며 크게 무력적인 대비를 닦았다. 송(宋)에서 군사를 사용할 뜻이 있음을 엿보고 간첩을 많이 두어서 거짓으로 나라 안이 텅 비었다고 말하게 하였다. 변방의 우두머리들은 꾀가 없어서 모두 이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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