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존재에 대한 감정에, 그 존재가 일깨우지만 그 존재와는 무관한, 이미 예전에 다른 여인에 대해 느꼈던 많은 감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특별한감정을 뭔가 우리 마음속에서 보다 일반적인 진리에 이르게하려고 애쓰며, 다시 말해 인류 전체에 공통된 보편적 감정에포함시키려 한다. 이 보편적 감정과 더불어 개인과 개인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아픔은 과거의 우리와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내 아픔에 기쁨이 섞인 것도, 그 - P192

아픔이 이런 보편적 사랑의 아주 작은 부분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 P193

침묵은 힘이라고들 한다. 침묵은 다른 의미에서는 사랑받는 이들이 가진 무서운 힘을 뜻하기도 한다. 이 힘은 기다리는 이의 불안을 가중한다. 우리와 떨어져 있는 인간보다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침묵보다 더 극복하기 힘든 장벽이 또 어디 있으랴? 누군가는 또한 침묵은 형벌이며,
감옥에서 침묵을 강요받은 자는 거의 미칠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침묵을 감수하는 일은 침묵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큰 형벌이다! 로베르는 중얼거렸다. "이렇게소식이 없다니 그녀는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 - P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월 18일 광주 민주항쟁 기념일 어제로서 43주년이 되었다. 

그동안은 주로 회고록 등을 통해서 사건 일지를 들여다보듯 최대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애썼던 듯하다. 그래서 사건과 관련한 대표작인 이 작품을 선뜻 읽기가 망설여졌다. 이제야 읽었던 이유이자 변명이다.


4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5.18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어제 오전 늘 그렇듯 신문을 펼쳐 들고 기사를 훓어 읽다가 5.18과 관련한 기사들을 몇 건 접했다. 사건 이후 꽤 시간이 흘렀으니 참상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세대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20/30대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마침 관련 기사가 있었다(https://hankookilbo.com/News/Read/A2023051709480005826). 물론 이들의 생각이 광주에서 살고 있는 20/30 세대 전체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도 생겨났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광주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은 갑갑해져온다. 메인 고리인 전두환은 이미 숨졌고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죄를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진실이 몇 개의 정직한 언론을 통해, 외신 기자 등의 사진, 영상 등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다만 당시에는 신군부 군홧발 아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총 6장을 읽는 동안 마음을 연신 쓸어내렸다. 특히 2장에서는 시신이 트럭에서 내던져지고 불태워지는 일을 주체가 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객관적 사실을 그림으로 그리듯 묘사하니 그것을 읽는 일은 역시나 어려웠다. 무엇보다 "나"가 아니라 "너"라는 단어로 주체를 표현한 것은 자신을 사물처럼 객관화시켜 제3자처럼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닐까. '너는 방관자야. 또는 너는 구할 수 있었어(용기를 냈다면) 그러지 않았잖아! 너는 결국 피한거야!' 스스로를 제2의 가해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이 총검에 폭력에 희생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지키려 했던 사람을 욕할 수 있을지는 나조차도 모르겠다. 마음으로는 구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 폭력이 두려울 수밖에 없으니까.


시민들이 많이 다치고 죽으면서 병원의 병상은 모자랐고 어느 순간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온다. 결국 상무관에 시신을 안치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으면 확인하게 하는 작업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태극기로 관을 감싸고 합동 영결식이 이루어질 때 애국가가 불린다. 태극기와 애국가가 이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나라란 게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착잡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혐의자라고 단정한 이를 추적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강제로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과정도 자세히 묘사된다. 판옵티콘처럼 설계된 감옥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그 눈과 폭력의 현장을 탈출할 수 없었던 수없는 이들을 가만히 숨죽인 채 생각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모든 이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이들, 소식을 들은 이들 모두가 이 일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간접적으로 책을 통해,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접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에게 이 일은 시위, 피 냄새, 폭력일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이 일은 괴로워서 잊고 싶은 일일지 모른다. 


인간의 성(性)은 과연 어떤 것일까? 성선설 또는 성악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인간의 물성이 선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했고 다만 좋은 일들을 행하면서, 좋은 생각들로 조금씩 개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래도 얼마 전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광주를 찾아 직접 마음을 전한 일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부디 유족분들의 마음이 치유되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진실이 명확히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 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5-19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년들의 대담 기사를 보면서,,,,
갑자기 프라하의 얀 팔라흐의 기념비가 생각나네요.
그들은 그들의 아픈 역사도 삶이 되고, 예술이 되는데,,, 우리는 정리하지 못한 아픔이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리의화가 2023-05-19 16:37   좋아요 1 | URL
프라하의 봄도 이후 20여년간 우여곡절이 많았죠.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말끔하게 정리가 안되니 중언부언 살이 붙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로 인하여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듯 싶습니다. 덕분에 저도 기념비 사진을 다시 찾아서 확인했네요.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05-19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번은 절대 못읽을 책이죠 친구랑 어제 이책에 대해 말하면서 눈물 흘렸거든요
5.18기념식에 합창곡 부르러갔던 친구가 5.18관련자께서 자작시 낭송하면서.. **동에서 얼마나 ㅇ많은이들이 죽고 **동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이런 시를 읽으며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오열했다는 말을 듣고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하는 실감이 오더라구요. 당사자들에겐 43년이 지났어도 치 떨리게 생생한 기억이겠구나 싶기도 했구요!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이 최소한의 책무가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거리의화가 2023-05-19 16:42   좋아요 2 | URL
안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었습니다. 그동안 못 읽었던 이유도 읽고 나서 후폭풍이 클 것 같아서였어요. 어쨌든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이었고 읽으니 후련하기는 합니다. 다만 읽고 나서도 목소리가 떠나지 않네요. 세월이 지나 광주 내부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있는 듯 싶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세력 때문에 사건 자체의 해결은 요원해지고 잡음만 커지니 국민들도 피로감이 커지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입니다.

희선 2023-05-20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잊지 않아야 일에서 하나군요 5·18... 이것도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아직 그때 일을 겪은 사람은 지금도 힘들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5-20 10:14   좋아요 0 | URL
직접적으로 겪은 분들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겠죠. 여론을 조작하여 물타기하거나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등 가면 갈수록 사태가 정리되지 않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독서괭 2023-05-20 0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 이 소설 읽어봐야지 하고 담아둔 게 몇년째인데 손이 안 가요 ㅠㅠ 힘들 것 같아요 ㅠㅠ 화가님은 맘 단단히 하고 해내셨군요! 리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 없어서 5.18을 잊고 있었어요

거리의화가 2023-05-20 10:16   좋아요 2 | URL
그쵸^^; 저도 몇 년째 읽을까 말까 하다가 결국 손에 놓기를 몇 번이나 했었습니다. 그러다 언제까지 미룰거야 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읽었답니다. 매년 잊지 않아야 할 일이 늘어나는 것이 마음이 아픈 동시에 또 기억하지 않으면 사건의 해결은 요원할 것 같다라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감사해요^^
 

잘못한 놈은 고해성사라는 걸 하지도 않고 왜 피해를 당한 사람이 고해성사를 하고 나아가 고발을 해야 하는지. 안하무인! 빡침의 연속이다.


나는 신부의 이 태도도 마음에 안 든다.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그럼 이 여성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건가? 물론 육체적인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고 정신적인 문제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것이 자신을 내팽개쳤으며 사랑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친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그냥 허무한 제스처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신부는 가톨릭 교리를 충실히 지켰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여성이 원한 것은 결단코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부모님의 태도도. 후... 딸이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꼭 트럼프를 찍어야 했나? 나는 딸의 절규가 이해가 되었다. 나라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듯하다. 


물줄기 속에서 작은 돌들이 자꾸 발밑에 밟혔고 몸에서 에런과벤의 냄새가 훅 끼쳤다. 그들의 땀내가 목구멍 뒤에 맴돌았다. 그 냄새는 주위의 증기에 매달린 채 숨을 한번 들이쉴 때마다 점점 강해졌다. 바디워시를 샤워 타월에 붓고 구석구석을 문질렀지만 몸에밴 남자들 냄새는 꽃향기로 가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바디 워시를 더 따르려고 손을 뻗는데 별안간 내 안의 모든 것이덜컥 움직였다. 정신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왔다. 위에서 내가 나를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몸이 울고 있다는 걸 꽤 차분하게 알아챘지만 눈물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연약한 분홍색 피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의 고통과 문제로부터 동떨어져 있었고 나를 그토록 오래 데리고 다녔던 그 죽은 몸뚱이에서 뽑혀 나간채 시간 밖에 떠 있었다. - P288

"속죄를 위해," 스캔런 신부님이 무릎에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성모마리아님께 기도를 올리세요. 여성으로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성모마리아님께 도움을 청하세요."
신부님의 말씀은 나를 더욱 흐느끼게 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스캔런 신부님이 고해성사 때 무슨 말을 했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게 필요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여러모로 그의 말은 옳았다. 나는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불안정한 여학생이었고, 때로 부적절한 곳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신부님 앞에 앉아 있는 내게 이 고통을 초래한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줄 필요는 없었다. 이미충분히 수치스러웠다. 그때 내게 필요한 것은 정신 치료를 받을 수있게 안내받는 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몸도 못 가누는 상태에서 어떻게 합의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성폭행당한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었다. - P293

그로부터 근 13년이 지나 스캔런 신부님이 영면했다. 그 직후 가톨릭교도들은 그를 칭송했다. 지금도 스캔런 신부님을 성인으로 시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하는 게마땅하다. 한 번의 판단 실수가 지금껏 쌓아온 덕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며 성인들도 때로 죄를 짓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여자들이너무 오랫동안 남자들의 짐을 짊어지고 왔다는 것을. 오랜 세월 여자는 본성에 결점이 있는 요부로 묘사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죄로인도하는 무절제의 화신이다. 아담이 사과를 먹은 것은 오로지 이브가 사과를 먼저 먹었기 때문이다. 에런과 벤이 나를 이용한 것은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성폭행당한 죄를 용서해준 신부님은 언젠가 성인으로 추앙될 것이다. 사과를 먼저 먹은것은 이브였다. 사과에는 선악에 대한 앎이 들어 있다. 아담이 선악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으리란 걸 이브는 미리 알았던 것이다. - P294

위원단은벤이 숲에 함께 있었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성관계는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돼." 엄마가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던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찡그린 이마와 떨리는 입술로 보건대몹시 화가 나 있었다. "총장한테 직접 가서 따져야겠다. 아니면 스캔런 신부님께 말씀드리든지 해야겠어. 우리 생각을 알려야지."
나는 의자에 그대로 앉아 접시에 놓인 상추를 뒤적거렸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난 엄마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무감각했다.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옳은 일을 한다고 내 입장을 밝힘으로써 다른 여학생들을 돕는다고생각했지만 성취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벤은 처벌 없이 빠져나갈 것이고 나는 위원단이 내린 평결의 무게를견뎌야 할 것이다.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넌 그저 네 자신을 여성으로사랑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 P303

암사슴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귀를 쫑긋했다. 혼란 전야의고요함 속에서 사슴과 나는 서로를 응시했다. 머릿속이 격렬하게 뛰었다. 에런과 벤을 생각하고, 그들과 숲에 있었던 그 추운 밤을 생각했다. 암사슴의 날씬한 목과 부드러운 점들과 급소를 생각했다.
씰룩거리는 귀와 맑은 눈을 생각했다. 곧이어 그것은 다시 에런과벤이 되어 내 마음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들의 몸, 그들의 체취.
땅에 누운 나의 맨 넓적다리와 그다음 날 아침 딱지투성이의 무릎을 생각했다. 곧이어 그것은 다시 암사슴이 되었다. 암사슴의 부드러운 점들과 비에 젖은 털. 고해성사. 성모마리아 피났어? 라는 질문. 그런 다음 에런과 벤, 숲속에서의 추운 밤, 골프를 치는 남자들,
웃는 남자들, 버클에서 풀리는 허리띠, 붉은 컵, 맨 넓적다리, 암사 - P309

슴, 암사슴의 날씬한 목, 부드러운 점들, 부러진 뼈, 암사슴의 피.
암사슴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면서 사슴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암사슴은 날씬한 다리로 우아하게 몸을 돌리더니 새로 돋은 초봄의 풀들 위로 떠갔다. 순식간에 사슴은 무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울었다. 처음으로내가 무서웠다. - P310

내가 성폭력을 고발하러 나선 것은 다른 여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맞서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가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후로도 피해를 입은 여학생이 너무도많았다. 그사이 나 같은 젊은이들이 문제라고 혀를 차는 나이 든 미국인들의 한탄을 숱하게 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중심적으로 권리만 내세운다고 말했다. 우리는 직업윤리도 형편없었다. 순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한편, 앞선 세대의 규율과 실행력은 부족했다. 이런비난은 늘 초점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 세대는 변화를 만들어낼힘이 있다고 믿으며 자랐지만 꿈을 꾸면 이룰 수 있어 우리의 이 - P312

상은 사회가 남용과 타성에 빠져 황폐화되는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어린 시절의 포부는 더 이상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선한 의도는 갈 곳을 잃고 우리 안으로 파고들어 좌초된 다음, 유리만큼 부서지기 쉽되 뿌리 깊은 이기주의를 양산했다. 세상의 구원을 꿈꿨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제 한 몸 구할 수없는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 P313

남자들이 누군가의 성기를움켜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때 어떤 해를 입힐 수 있는지 부모님 - P331

은 목격한 터였다. 엄마는 성폭행을 당한 내 눈물을 닦아주었고 아빠는 금 목걸이를 주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트럼프는 남성의 특권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부모님은 그런 트럼프를 지지했다. 그뿐아니라 트럼프를 위해 기꺼이 교황을 버리는 한편, 트럼프가 용납한여성혐오주의로 상처 입은 딸을 외면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차에 탔을 때 누구보다 날 사랑하는 줄 알았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 P332

이곳은 망명과 기회의 나라였다. 거대한 실험. 세계제일의 나라. 그곳에는 자체의 결점이 있고그것도 치명적인 결점이 대부분이지만, 절망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말을 더듬는 아저씨가 그 증거였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키울 수 있었지만 지독한 패배감에 젖거나 자기감정에 몰입하지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기댈 수 없었던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을 앗아간 폭력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고통은 냉소를키우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방패처럼 들지 않았고 그압력 아래에서 무너지지도 않았다. 삶은 그에게 주목받지 못하는목소리를 주었으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 P357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5-1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ㅠㅠ
 

몇십 년에 걸쳐 강철을 만들어온 그녀는 회사에서 최고의 자리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적어도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이스의 연공서열이 용융아연도금 라인의 에스오티가 될 만큼 높아졌을 때, 책임자들은 그녀를 외면했다.
마땅히 그녀의 몫이 되어야 할 자리에 경험이 적은 남자 노동자를보내 훈련시킨 것이다. 조이스는 재빨리 노조에 연락을 취했고 노조는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섰다. 노조 간부들은 회사에 항의했고 회사는 마침내 동의했다. 조이스는 에스오티로 훈련을 받았지만 그녀가 견뎌야 했던 싸움은 자명했다.
용융아연도금 라인에서 일을 시작하고 첫 며칠 동안 그 이야기가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회사의 조치가 과연 우연이었을까 의구심이 들면서 그녀를 제외한 유일한 여자로서 내 자리를 새삼 의식했다. - P210

의사는 메스를 들고 엄마의 배에 손을 올렸다.
"지금도 감각이 있어요." 엄마가 말했다.
"아니요." 의사가 대꾸했다. "머릿속 생각이라니까요."
의사는 메스를 배에 대고 단칼에 곧게 그었고 엄마는 단말마의비명을 질렀다. 본능적으로 팔에 힘을 주고 뻗대는 바람에 팔걸이가와작 부러졌다. 아빠는 기절했다. 간호사들은 약을 가지러 황급히뛰어갔다. 누군가가 엄마 몸을 눌렀고 의사는 배의 칼자국을 치료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환자의 말을 무시한 의사를 고소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엄마는 이 과실이 성차별과 관련이 있다는 걸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성차별은 페미니스트들의 용어였으며, 페미니즘은 우리 집에서 금기어였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이 여성에게 할 수 있는 제일 심한 모욕이었는데, 엄마가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외가 쪽 여자들은 모두 지혜와 굳은의지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강인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 P216

공장 노동은 지금껏 겪지 못했던 피로감을 느끼게 했다. 밤교대 근무로 부족한 잠을 거의 보충하지 못한 탓에 내내 진창을 걷는 기분이었다. 어떤 일에도 온전히 집중할수가 없었다. 마트에서 닭고기 사는 것을 깜박했다. 빨래가 산더미여도 그대로 방치했다. 욕조를 빡빡 문질러 닦다가 문득 욕조를 내려다보면서 그날 아침에 닦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멍하고 뿌옜다. 식단은 집밥에서 에너지드링크와 테이크아웃 음식으로빠르게 변해갔다. 늘 간신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 P230

아연공장에 관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든 일의 중심에는 남자들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껏 나는 남자들에 견줘 나 자신을 평가해왔고 남자 못지않게 잘하려고, 남자아이처럼 되려고 애를 써왔다. 남자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에 과도하게 신경을 썼다. 사시의 그늙수그레한 크레인 기사가 내 어깨를 팔로 껴안으면서 나더러 제철소에서 일하기엔 너무 예쁘다고 했을 때, 나는 그의 팔에서 몸을 빼내지 않았다. 예쁘다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지게차가 철둑에끼여 고참들이 나를 비난할 때도 항의하지 않았다. 성차별을 따끔하게 일러주는 그런 여자들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 게 싫었다. - P233

이제껏 살면서 본래의 나의 모습과 내가 원하는 모습, 남자들이내게 원하는 모습, 그리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사이에 끼여 수없이 갈등을 해왔던 것 같다. 이 혼돈의 와중에 정작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쉽게 간과했다. 때로 성차별의 영향은 괴롭힘이나 학대만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충족할수 없이 상충되는 기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 P234

우리는 강한 용기와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진실함과 성실함을 소중히 여겼고 워싱턴의 변호사들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다. 그들은아버지가 대준 돈으로 대학교를 다녔을 한심한 출세주의자들에 불과했다. 저희들 세계에 갇힌 채 너무 많은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었다. 현실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트 쪼다들에 지나지 않았고, 노력한다 한들 철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자들이었다. - P239

"우리더러 끼라는 저 토시 말이야. 저거랑 관련된 뒷이야기를 대부가 들려줬어." 슬리피 베어가 말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뭐라고 말했건 나 역시 별것도 아닌 일에수선을 떨었다.
"조질압연공장에서 누가 코일 모서리에 팔이 베였다나 봐." 슬리피 베어는 말을 이었다. "회사가 어떤지 알지. 일단 누군가 다치면제철소에 변화가 생기잖아. 모든 사람이 이 토시로 값을 치르는 거야."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아니 코일로 다치는 게 가능해요?"
그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대개의 경우 코일의 날카로운 모서리는서로 겹쳐 놓는 터라 위험할 수가 없었다. 코일 모서리에 몸을 갖다대고 비비면 모를까 코일에 베이기는 힘들었다.
"나도 모르겠어." 슬리피 베어가 말했다. "여기선 온갖 일이 일어나니까." - P245

수업 도중에 강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총을 쏴서상대를 죽여야 합니다. 숙취보다 그 생각에 더 토할 것 같았다. 나는총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명적인 걸 손에 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삶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어떤 위험이 그 수료증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그 수업을 너무도 쉽게 통과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기를 소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경험도 지식도 기술도 없는데 무기를 구입해 허리춤에 숨길 권리가 생긴 것이다. 두려움이 그 수업을 듣도록 떠밀었지만, 이제 불현듯 그두려움이 내포하는 바가 보였다. 내가 총을 쏴서 누군가를 죽일 수있는 사람이 된다면 나의 일부는 늘 세상을 목표물로 바라볼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라서 벽장 속 서류 캐비닛에 수료증을 넣었다. - P257

나도 그들의 세계를 모른다. 그들의 싸움과 목표, 그들이 대항하는 악에 대해 모른다. 그들이 나를 정형화했다는 생각이들어서 나도 그들에게 똑같이 대했다. 일종의 앙갚음이었다. 눈에는눈, 이에는 이 나의 적대감이 이 나라를 갈라놓은 금이라는 생각은하지 못했다. 그 균열은 정당과 경제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국회와백악관을 넘어섰으며 우리의 주급과 직책을 넘어섰다. 그 균열은 인간의 약점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경계를 풀었다. 우리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장막과환상을 짜는 이들이 나타나 우리 자신이 초래한 암흑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우리를 사리 판단에 어두운 장님으로 믿고 우리의 두 눈을 신중하게 가렸다. 우리 중 누구도-철강 노동자들도 변호사들도-다시는 세상을 환히 볼 수 없기를 바라면서. - P2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얘기하는 동안 그는 열기에 들뜬 채로, 때로는 내게 때로는 친구들에게 황홀한 눈길을 쏟아부었다. 모든이들의 웃음 속에 얘기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얘기가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내 재치를 높이 평가하게 해 줄 것이며, 또 바로 그런 이유로 그가 그 얘기를 알지 못한 척했다는걸 깨달았다. 바로 이런 게 우정이다. - P165

"우리가 환경 탓으로 돌리는 영향력은 특히 지적 환경에 대해서는 사실이죠. 인간은 자기가 가진 사상에 의해 규정되니까요.
그런데 사상은 인간 수보다 적어요. 따라서 동일한 사상을 가진 인간들은 모두가 비슷할 수밖에 없죠. 사상에는 물질적인면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의 사상을 가진 인간을 단지 물질적으로만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상을 조금도 바꾸지못하는 법이죠." - P168

"그리고 사상이란."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인간의 이해관계에 개입할 수 없고 그 이점도 누릴 수 없으므로, 사상을 가진인간들은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죠." - P17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3-05-18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글만 골라 뽑으신 것 같습니다. 여러 번 읽어 보게 됩니다.
사상은 인간 수보다 적다는 것을 생각해 내다니...
사상이란 완전히 독립적인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