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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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비롯하여 한국현대사와 관련한 저작들을 내놓은 학자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내부적 문제로 인한 갈등 폭발, 미소 등 외부적 세력에 의한 영향, 내부적/외부적 결과의 혼합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차적으로는 해방 후 5년 간 일어난 사건들에서, 2차적으로는 남한에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구조가 뿌리내린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그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식민지에서 뿌리 내린 체제에서 비롯된 계급 갈등의 문제(지주와 농민 간, 기업가와 노동자 간)는 내부의 갈등이 뿌리 깊었음을 인지하게 하며 통일 후 지향할 사회의 문제(이념)는 신탁 통치를 기점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치하면서 군림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비주류 지배층과 갑자기 부유해진 양반과 지주, 관료들을 포섭하여 민중의 저항을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자원을 동원하고 수탈하는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시기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농업이 상업화되고 일본은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기존의 조선 지주들은 토지 자본을 상업과 산업에 투자하며 배를 불렸고 일부 평민, 천민들은 사업을 통해 기업가로 변신한다. 산업의 중심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였고(제조업, 산업, 광업, 상업 중심의 공장이 많았던 북부 지방의 고용이 증가하여 남부의 농민들이 대거 북부로 이동), 노동 계급이 형성되었다. 식민지의 노동 정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였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강제 동원이 시작되면서 만주나 일본 등 해외로 노동하러 가는 인구가 늘었다. 해방 이후 북에서 남으로, 만주나 일본에서 귀환한 노동자(농민)들은 자신의 기반인 토지를 잃었다.

해방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영향력 있는 한국인 인사와 접촉을 하였는데 첫 주자인 송진우는 거절하였고 여운형이 수락하면서 과도적 행정기구 책임자로 국내 치안 임무를 맡게 된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연합군에 외국의 개입 없이 한국은 즉각 독립할 것과, 친일 세력은 배제해야 함을 전달하였다. 8월 16일 감옥에 있던 정치, 경제범이 석방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대중들도 일본과의 협력는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요구는 설 길을 잃는다. 건국준위위원회(건준)은 전국적으로 지부가 만들어지며 산하 단체까지 조직되고 8월 20일 무렵이 되면 일본은 건준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 미국이 9월 초까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일본은 남은 물품을 폐기하고 화폐를 마구 찍어냈으며 친일 성향의 한국인에게 은사금을 마구 뿌려대는 등 남한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8월 28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 유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임을 선언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된다. 그 배경에는 조선의 자주성과 미국의 입김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인공 지도부는 좌우익을 연합한 명단으로 구성되었다.
9월 16일 인공에 반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된다. 이들은 주로 대지주, 식민지 시기 각종 혜택을 받은 계층과 지도자급 인물들, 서구에서 유학한 엘리트 계층이 많았다. 한민당의 최대 목표는 식민지 시기 지주/농민 구조와 토지 지배 관계를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로 분화된 세력을 포용하고 포괄하고자 노력했다. 1943~1946년에는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다국적 신탁통치를 시도했다. 루스벨트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신탁 통치는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이전의 식민 지배를 대체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식민지는 점진적으로 독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와 한국으로 빠르게 남하하면서 미군의 상륙 날짜는 거듭 앞당겨졌고 소련에게 한국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에서 국제협력주의가 설 자리는 없게 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과 한국까지 점령하라는 작전 지시 아래 미국 제10군 24군단에 하지를 임명하여 조선으로 보낸다. 한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 침략의 희생자로 인정되었음에도 하지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패전국의 규정이 적용될 대상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하지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 기구를 존속시키라 지시한다. 미군의 목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외부적 혁명 세력과 국내의 자생적 혁명 새력을 차단할 방어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점령군은 한국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점령해 다른 세력이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없도록 만들기를 원했다.

1945년 미군정은 임정 관련 인물들이 미국의 정책에 도움이 되는 대중적 지지와 정통성을 지녔다 생각했다(미 국무부는 임정을 비롯한 한국인 단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미군정은 정치 단체 협의회를 군정 내 한국 정부를 구성하고 정무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기획하였다. 정무 위원회는 과도 정부로 기능하고 미군 사령관은 거부권, 미국인 감독 및 고문의 지명권을 갖는다는 생각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좌우익 결집을 시도한다. 그는 소련과 소련의 북한 정책을 비난하였고 인공 참여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여운형과 박헌영 같은 좌익 계열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탈퇴한다. 여운형은 11월 11일 인민당을 결성하고 이전의 인공보다 좀 더 온건한 세력을 흡수하여 조직을 구성하였다. 중국에서 임정 세력이 귀국하자 자체 정부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에 인공 대표자들은 위협을 느꼈고 이에 인공대표자들은 군정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하지는 인공을 비판하고 심지어 그들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규정한다. 이 때부터 하지는 인공, 전평 등 좌익 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정은 기존 토지 관계가 유지되길 바라는 한국인과 결탁하여 미곡 경제 법령을 발표하고 미곡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시장을 설치하는 정책을 펼치지만 이것은 미곡 유통 구조를 미군정이 장악하려는 시도로 대중의 반발만 불러오며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난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렸다. 4대 강국이 한국에 5년 이내의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신탁 통치 이전에 과도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우익의 반대, 이후 좌익이 찬성하며 극심한 대결 끝에 혼란을 불러온다. 송진우는 저격으로 암살되었고 김구는 파업과 시위를 이끌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이후 국내에서 핵심 입지를 잃음)하면서 반탁운동의 중심은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넘어간다. 또한 임정과 인공의 연합 노력은 좌익이 모스크바 협상 지지 입장으로 변화하자 중단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남북한 모두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고 대표민주위원을 한국 과도정부의 모체로 내세운다.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해 다양한 한국 정치 단체들에게 주요 민주 개혁을 포함해 신정부가 추진할 정책을 합의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미군정은 우익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실제로 28명의 정무위원 중 4명만 좌익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익이 차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과 임정의 좌익 계열을 아우른 민주주의민족전선이결성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인공의 직접적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미국은 정부 형태와 관계 없이 한국의 조속한 독립과 자치를 추진하고 소련과 협력해 미소양군 점령을 종결시키겠다 공표한다. 미소공동위원회 협상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나 과도 정부 수립을 한국의 어떤 단체와 논의할 지 합의하지 못하여 무기한 중단된다. 미국은 대표민주의원을 남한의 유일한 자문기구로 사용 제안했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공위의 핵심 쟁점은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인민위원회와 관련된 조직)가 남북한 모두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을 공포하여 좌익 색출 단체를 해체하려 했고, 1946년 3월에는 군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였으며, 1946년 5월이 되면 전국의 경찰을 이용하여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전권을 부여한다.

하지는 레너드 버치 중위에게 온건파를 포함하되 극좌, 극우 세력을 배제하는 중도파 합작 형성을 목표로 좌우합작을 추진한다. 하지만 여운형과 박헌영이 좌익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였고 과도입법의원이 대표기구로 수립되었으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자생적이었고, 다양한 계급 구성원(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 학생과 제대한 군인, 지방의 명망가와 지주, 일제강점기 관료)이었기 때문에 지역 마다 정치 참여 수준과 토지 상황, 지리적 위치, 인구 이동, 근대화 정도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거기에 일본에서 미국의 통치로 넘어가는 기간도 그 결과를 다르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조직 구조가 알려진 지방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중앙의 건준과 인공과 비슷한 부서로 이루어졌고 조직부, 선전부, 치안부, 식량부, 재정부가 있었다.

1946년 가을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전국에 농민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경상도에 집중되었으며 인민위원회가 강력하거나 지배한 전라남도, 충청남도, 강원도 군에서도 발생했다. 봉기가 경상도에 집중된 것은 해방 뒤 이 곳에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으며 토지를 잃고 불만에 찬 농민들이 모여들면서 일어났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남한 전체의 철도 수송이 멈춘다. 나중에는 인쇄공, 전기 노동자, 전보국, 우체국 직원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총파업이 벌어진다. 여기에 학생들도 참여하여 파급력이 커졌다. 이들은 쌀 배급량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며 실직자와 피난민들에게 집과 쌀을 배급할 것, 공장 노동자들에게 작업 환경을 개선할 것, 조직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라는 요구였다. 군정청은 북한 공산주의자가 혼란을 부추긴다며 비판하였고 현재 한국인은 자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미군정은 시위자 검거를 실시하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거부하면 즉시 해고하고 쌀 배급을 중단하겠다 엄포를 놓는다.

9월 말 대구에서 많은 공장과 기업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3천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파업이 확산되며 격렬해진다. 이 과정에서 진압자는 발포를 하고 시위자는 지방의 공무원과 경찰을 살해,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는 등 과격해진다. 군정은 농민 봉기 진압에 경찰을 활용하였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과 봉기는 미군정의 곡가 정책으로 1946년 하반기 곡물가의 폭등, 통화 팽창, 실업이 불러온 결과였다.

소련은 1945년 9월 북한 내부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기존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지방 인민위원회를 이용해 식민지 유산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고위층인 친일 인사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피신하는 등 지주, 식민지 시대 관료, 경찰의 활동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은 채 혁명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중앙과 지방의 요구를 결합, 중앙집권적 통제 방식과 대중 노선을 혼합한 방식을 추구하려 했다. 김일성은 지도자, 조직, 대중 노선을 내세우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움으로써 중앙적 조직의 기반을 마련한다.

북한은 빈농과 노동자들 중심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중앙에서 마을 밑바닥까지 하나의 유기적 명령 체제를 완성하였고 무엇보다 토지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이전의 지주는 소규모 토지를 받고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지주 제도를 뿌리 뽑고 하층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갖게 함으로써 정권에 호응도를 높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8시간 노동제, 사회 보험 제도 실시, 노동 조건 개선, 성별에 상관 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 남녀 평등법을 제정, 일본인 소유의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 관할 아래 투자와 생산활동을 하도록 장려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이루어낸다.
1946년 8월 29일 북로당이 결성되면서 북한의 내부 당파를 통합하게 됨으로써 북한은 남한과 명확히 다른 노선의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 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 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 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 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 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 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일제강점기 지배층과 통치 구조를 남한이 이식되지 않았다면, 하지가 버치 중위를 끌어들여 주도한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곱씹어볼수록 해방 이전의 식민지 지배층이 통치권력으로 이양되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물론 미군정의 헛다리와 판단 미스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생적인 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잘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1945년 8월부터 12월의 5개월이 역시 뼈아픈 듯 싶다. 이 때 이식된 결정들이 향후 바꾸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못했고 안착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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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11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이런... 거리의화가님 이번 리뷰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심있는 이웃들을 두 갈래 길로 이끌듯 합니다. 리뷰를 읽고 지도처럼 활용하여 글의 큰 흐름을 잡는 이들과, 아니면 리뷰만 읽고 책을 ‘읽는 셈치고‘ 건너뛰는 독자로... ㅋㅋ

거리의화가 2023-06-11 17:51   좋아요 1 | URL
앗! 정리하다보니 너무 길어지긴 했네요. 어떤 분들이든 제 리뷰에서 도움을 얻으시면 감사하겠죠^^ 그래도 제 리뷰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직접 읽어보셔야!ㅎㅎㅎ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희선 2023-06-15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의 기원이군요 외국 사람이 이걸 쓰다니... 다른 나라 사람이 그때가 어땠는지 쓴 걸 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테니... 그런 거 본다고 알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5 09:11   좋아요 1 | URL
워낙 유명한 저자입니다. 한국현대사, 그리고 한국전쟁사 관련하면 이분이 바로 생각날 정도로요!^^;

NamGiKim 2023-09-1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좋은 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8 09:07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분들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죠. 한국전쟁사를 다룬 책들 중 분기점이 된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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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식민지 시기에서 얻은 구조적 문제와 해방 후 전쟁 전까지의 사건들이 영향을 준 결과 발생했다. 1권은 식민지 시기 통치 하에서 이루어진 산업 구조의 분화와 동원, 해방 이후 1946년 말까지의 시기를 다루며 남북한의 이념과 체제가 확고하게 분화된 배경과 사건들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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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장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많은 한국인이 보기에 소련은 점령 초기 미국이 추구한 것과 완전히 상반된 정책을 따랐다(또는 한국인에게 그러도록 허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의도된 것이든 그저 인민위원회가 편리했건 간에 소련은 한국인에게재량권을 주고 뒤로 물러났다. 조지 매큔은 "불길하지만 확고한 권위를 가진" 지위라고 적절히 표현했다. 앞으로 보듯 소련이 평양의 최고사령부에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그들은 실질적 통치권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1945년 12월 그런 정책이 "제한적 점령"을 나타낸다고 지적하면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6SE PR이처럼 해방 뒤 몇 달 동안 북한에서는, 미국 공식 자료가 마지못해 인정한 대로,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 출신으로 구성된 완전히 새로운 지배층이 식민지 시대의 심연에서 등장했다. 식민지 시대의 계급 구조는 완전히역전됐다. 미국의 일상적인 속어로 표현하면 "개자식들이 쫓겨난the bastardswere thrown out" 것이다. 물론 남한의 미국이 보기에는 새로운 개자식이 들어왔다. - P504

북한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 혁명을 모두 경험했으며 해방된 한국에서 자발적 농민 봉기가 시작돼 자신들의 눈앞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상황과 마주쳤다. 그 결과 이런 지도부와 그 정책은 중앙과 주변의 요구를 결합하고 스탈린의 상명하달 방식과 마오쩌둥의 대중노선을 혼합한 이념을 구현해야 했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주의의 핵심 구호는 "대중에서 대중으로"라는 마오쩌둥주의의 핵심 구호와 나란히 놓였다. - P505

남한에서 볼 수 있었던 자발적 인민위원회와 노동·농민조합은 북한에서도 필연적으로 나타났으며 헌신적 공산주의 조직자들에게도 상당한문제를 던져준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이 거느린 공산주의자들은 우선 헌신적 지지자로 구성된 핵심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그 핵심이 해방된한국의 정치가 만들어놓은 산만한 상황을 지배할 때까지 끝없이 확장하는동심원 형태로 성장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2월 두 가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두 문제는 서울 인민공화국의 조직이 붕괴돼 북한에서 인민위원회 지도부를구성해야 할 필요가 나타난 것과 남한에서 단독 행정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북한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등장을 인공 지도자들의 실패,
나아가 배신행위와 연결하면서 인공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한 줌의 사람들이 발표한 선언에 따라 수립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들은 "지방 인민 - P515

위원회를 통일된 형태로 이끌 수 있는 중앙의 국가기구"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모스크바협정에서 제시된 "미래의 한국 임시정부의 원형이 될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구성에 대한 보고에서 그것은 "통일된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기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강력해진 각 지역의 행정조직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말했다. 그 무렵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다가오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남한 대표로 조직되고 있었으며, 그 뒤 실제로 미소공위와 협의할 수있는 유일한 단체로 제안된 남조선대표민주의원에 대항하는 기구로 구상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동일한 필요에 따른 조직이었다. - P516

이 기간의 한 피난민은 "지식인과 부자는 남한으로 갔지만 가난한사람들은 "상황에 만족했다"고 말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대부분 소련을 싫어했지만 "압도적 다수"가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지도부를 지지했다. 아울러 토지 개혁이 이뤄진 뒤 공장의 혹사를 금지한 노동법이 곧 제정됐다. 그것은 1946년 6월에 공포돼 하루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험제도를실시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또는 어렵거나 위험한 작업에는 추가 수당을 지급하며 성별에 상관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다음달 남녀평등 관련 법률이 제정됐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사건이었다. 그것은 축첩 · 매춘 여아 살해 그리고 여성을 착취하는 수많은폐단(남한에서는 계속 남아 있었다)을 금지했다. 이런 개혁의 내용이 즉각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1000년 넘게 노동자와 여성을 괴롭히던 학대는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대부분 앞서 일본인이 소유했던 주요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된 반면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가 관할해 투자와 생산활동을 장려케 했다.이런 방식과 남아 있던 일본인 기술자 및 소련 전문가의 도움으로 경제와 특 - P528

히 주요 산업은 질서를 회복하고 1946년 말 생산 증가를 기록했다. - P529

김일성은 결성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모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적극 싸우는 사람"은 당원이 될 수 있으며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진보적 자질을 보여줄 수 있다고연설했다. 그 뒤 "대중정당"이라는 생각은 세계혁명에 한국이 기여한 또다른 공헌이라고 선언됐다. 북로당은 세계의 어떤 공산주의 정당보다 인구에서 당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이 올바르게강조한 대로 조직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조직한다는 북한의 대중 동원 정책이 낳은 결과였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북로당이 해방 뒤 북한에서 나타난 "조직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로당의 결성은 강력한 의지를 가진 세 지도자-김일성·김두봉·무정-를 뭉치게 했고 박헌영이 이끈 남조선노동당이 그 직후 남한에서 등장함으로써 남한과 북한의 좌익 세력을 결속시켰다. - P533

북한은 남한으로의 이주를 조장했는데 그럼으로써 남쪽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세 측면이 있다. 첫째, 돌아온 피난민은 남한의 식량 공급과 구호시설에 부담을 줄 것이며 불만을 품고 토지를 몰수당한 하층계급이 될 것이었다. 앞서 본 대로 뿌리가 뽑힌 이런 사람들은 지방에서 여러 소요를 일으켰다. 둘째, 지주들이 남한으로 피난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북한은 불만을 품고 토지를 몰수당한 상층계급을 남한으로 보낼 수있음과 동시에 토지 개혁 이후 적대적이고 터전을 잃은 지주계급을 다뤄야하는 곤란한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전직 경찰과 관리를 포함해 이런 세력이 북한으로부터 유입된 것은 남한을 양극화시켰다. 그 결과문제를 온건하게 해결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미국에게는 공산주의와 반동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분명히 북한은 이런 효과를 환영했을 것이다. 적어도 오갈 수 있었던 38도선 덕분에 그들은 급진적 개혁이가져올 계급 사이의 충돌을 늦출 수 있었다. 끝으로 북한은 남한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난민 가운데 자신의 공작원을 침투시킬 수 있었고, 이는 미군정 당국과 남한 경찰에 끊임없는 골칫거리가 됐다. - P537

한 세대 안에서 한국 농민은 놀라운 "진보의 물결"이 자신들을 옛 관습에서 밀어내다가 갑자기 그 물결이잦아들면서 이전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한국의지주계급은 농민이 변화한 만큼 변화하지 않았으며 옛 관심에서 벗어나 발생하는 탄력성과 적응성을 얻지 못했다. 상업이나 공업으로 전환하지 않은상태에서 농민 혁명과 마주치면서 그들은 해방과 그 뒤 이어진 사건들에 차갑고 비타협적으로 반응함으로써 계급적 화해와 온건한 해결의 희망은 모두 사라졌다. - P551

한국에서 미국과 소련의 핵심 목표는 매우 비슷했다. 자신들에게 계속 우호적인 일련의 지도자와 사회질서를 강화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범위안에서 한국 지도층과 조직의 성향, 그들의 세력에 따라 독립과 자치의 가능성이 결정됐다. 두 강대국은 그 정책에서 뚜렷한 한계를 설정했다. 소련은반동 세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미국은 혁명을 용인하지 않는다는것이었다. 두 강대국 모두 자신들이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줄거나상대방의 독점적 지배를 막기 위해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 P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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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장

1945년 8월의 무거운 분위기와 농민의 뿌리 깊은 불만은 한반도 전체로인민위원회가 빠르게 퍼져나간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군·면에서 "(농민이)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때 지방 관료·경찰·지주에게서권력을 빼앗은 고전적 혁명이 일어났다.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적의 힘을 정확히 계산해 인민위원회를조직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했고, 조직한다면 그 성격과 역량, 존속 기간을 적절히 판단했다는 의미였다. 곳곳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 본질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뀌었고, 변화의 속도와 참여한 집단 및 계급도서로 달랐다. 거의 모든 지방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찰력이 나타났고 새 위원회가 행정을 인수했으며 대부분의 일본인·한국인 지주는 재산을 위협받았다. - P360

한국은 산업화되면서 근대성과 후진성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게 됐고, 국내 시설은 자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상당히 넘어서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자국보다는 일본의 이익에봉사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나타나는 급진적 활동에서 그런 시설은 두 방향으로 사용된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다면 그것은 신속한 소통을 가능케 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장악하면 반란 세력을 저지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처럼 해방된 남한에서 인민위원회는 가장 발달한 지역과 가장 낙후한 지역 모두에서 강력한 위상을 확보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찰을 비롯한 치안 기관은 이런 시설을 장악해 유용하게 썼다. 이것은 그들이 한국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한 결정적 요인이었으며,
1945~1950년 남한의 비교적 고립된 지역에서만 강력한 반란이 펼쳐진 핵심적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 P369

한국에서 미국인은 도 단위에서 잘 기능하고 있는 기존 정치조직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뒤 그것을 대체할 지방 정치조직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미국인이 대신 해줄 수는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미국이 자립할 수 있는 조직을 발전시키거나 촉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정치집단을 지원하기로한 편협한 결정이었다. - P389

전직 미국 관료는 인민위원회가 전라남도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문제점과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도의 관할권을 모두 인민공화국에 넘기든가, 아니면 그 지배를 무너뜨려야 한다. 최종 결론은 옛 총독부 기구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하위 관료를 기반으로 이용하고 적당한 지도자를 찾는 대로 빨리 그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라남도는 물론 미국이 지배한 모든 도에 적용된 정책을 간결하설명한 것이다. 혁명에 맞서기로 한 결정이 이보다 솔직하게 표현된 것은 드물다. - P394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소작농과 관련해 해방 이후와 1946년 가을 남원군과 순창군에서만 반란이 일어났을 뿐 전라남도와 달리 비교적 조용했던까닭은 두 가지였다. 첫째, 광범위한 지주 제도는 소작농을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했다. 아울러 한국인 지주가 더 많아 전통적 관계가 덜 무너졌다. 식민 지배가 야기한 민족적 분열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북도의 많은 한국인 지주는 일본과 부적절하게 가깝다는 오명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전라남도에서 동척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한 것과 반대로 전라북도에 일본인 지주가 많이 존재했다는 것은 해방 뒤 그들이 고국으로 도망치면서 소작농에게 싼값으로 토지를 팔거나 그저 버렸다는 의미였다.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널리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것은 많은 소작농이 소작농의 지위라는 집단적 문제를 개인적 방법-일정 면적의 토지를 사거나 소유하는ㅡ으로 해결했다는 의미였다. 신분 상승 이동을 이용한 개인적 해결책의 가능성은 이처럼 전라북도 소작농의 연대를 약화시켰다. - P412

처음에 인민위원회는 멀리 떨어져 있고 빈곤한 군에서 세력을 넓혔지만 결국 손쉽게 해체됐다. 인구 변화가 크고 좌익과 우익이 긴장속에서 공존한 중심 지역의 군에서는 여러 인민위원회가 1946년 가을까지세력을 유지했다. 정치상황이 복잡한 군, 특히 인민위원회의 우세나 열세가 명확하지 않은 군에서는 인민위원회에 반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미군은 물론 인민위원회와 관련되지 않은 한국인 군청 직원은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여러 면 행정을 맡도록 허락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위상을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해방 뒤 14개월 만에 경상북도 전체에서 거대한 봉기가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도에 견고히 자리 잡은 인민위원회는 봉기에 필요한 조직력을 공급했고, 급격한 인구 유입은 기꺼이 무기를 들려는 정처 없고 분노에 찬 사람들을 공급했다. - P429

미군이 제주도에서 시행한 행정과 인사에 대한 자료는 매우 적다. 미군이임명한 도지사 박종훈은 대일 협력자로 알려졌다. 기이한 일치지만, 미군여론조사반의 통역으로 제주도에 온 인물은 자신과 함께 온 신임 제주 경찰서장이 일제강점기의 특고경찰이었음을 알게 됐다. 통역이 신우경이라는 인물에게 새 직책을 묻자 그는 "일제강점기의 경찰인 자신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임명된 것을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한라단같은 일부 우익 단체도 제주도에 있었다. 좌익이 분명히 우세했지만, 이렇게 여기서도 경상북도처럼 오랫동안 좌익과 우익이 공존했다.
1946년 가을 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는 2명의 좌익이 당선됐지만, 그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행방불명됐다.
제주도의 직업 구성이 비교적 다양하게 분화돼 있던 것도 인민위원회가발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 P445

행정 단위의 서열에 따라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면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고 하달식 명령 체계가 확립됐지만, 인민위원회는 그와 반대로 자발적이고 상향식 의사전달을 구현함으로써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자발성은 인민위원회의 커다란 약점 가운데 하나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일본인은 수십 년 동안 시장이나 행정력을 침투시켜 한국의군과 면을 개방시켰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그 군과 면에서는 폐쇄가 나타났다. 인민위원회들은 물샐 틈 없는 밀폐 공간처럼 자신이 관할하는 군의 사무를 다스리는 데 만족하면서 다른 지역의 사건에는 대체로 관심을 갖지않았다. 분할되고 특정 지역에 치우친 인민위원회의 행정은 일종의 세포 구조를 가졌다. 하지만 미국이 찾으려 했어도 찾지 못한 세포에 기반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적 구조는 아니었다. 이런 구조적 약점에 힘입어 각 단위를 다른 단위와 분리해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것 - P449

은 쉬워졌다.
이런 복잡한 고려 사항보다 인민위원회가 패배한 가장 핵심적 요인은 미국의 권력이었다. 인민위원회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미국의 보고에 거듭 나왔지만, 미국은 이런 운동이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았기때문에 의식적·체계적으로 뿌리 뽑았다. 이런 조치가 남한 농촌의 정치적통합과 참여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느낄 수 있다. - P450

경상북도, 특히 대구와 그 인접 군, 국방경비대 경상 - P457

북도 연대에서는 해방 첫해 동안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구에서 이런 현상은 대구지역평의회로 나타났다. 그것은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한국독립당 ·인민당에서 지역 지도자 20명을 동일하게 뽑아 구성한 단체였다. 평의회는 1946년 6월 28일부터 주마다 한 번씩 모였다. 미군정도 담당 장교는 평의회의 조언을 군정 정책 수립에 이용했다. 그들은 그 단체가 곡물 징수를 위해 농민의 협력을 얻는 데 특히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평의회는 전후 한국에서 드물게 성공한 합작 시도의 하나였지만,
극우와 극좌는 여러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 또한 평의회는 경상북도에서 좌익이 존속하고 일정한 합법성을 얻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후남한에서 마찬가지로 희망차게 출발한 수많은 조직처럼, 이 역시 유혈의 폭력적 갈등 속에 끝났다. - P458

봉기는 대구 지역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퍼진 뒤 서쪽으로 옮겨가 전라남도까지 이어졌다. 한국 전역에서 수만 명의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은 지방에 존재했고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끌어왔다. 그 구조는 계층적이 아니라 독립된 세포 형태였다. 마치 소문이 대중의 비공식적 통신 수단을 거쳐 퍼지듯 한 봉기는 이웃한 지역의 또 다른봉기를 불러왔다. 당구공이 연속해 서로 부딪치듯 이런 연쇄적 반응은 자기완결적 구조를 지녔다. 공산주의자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토지의 사용 조건과 관계, 불공평한 곡물 공출, 지방에서 지주·공무원·경찰의 유착에서 연유한 깊은 분노 때문에 전라남도 농민이 일어났음을 증거들은 보여준다. - P470

폭동이 대부분 가라앉은 뒤 비판신문은 가을 봉기가 동학농민운동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봉기라고 언급했다. 그런 판단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분명히 1946년 봉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동학과 비슷했다. 가을 봉기의 참여자들은 동학과 모든 지역의 농민 봉기에서 기법을빌려왔다. 그들은 낫·갈고리 · 망치처럼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무기로 삼았다. 그들은 화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이 소총을 장전하느라 잠깐 멈추는 동안 집단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언덕에서 봉화를 올리거나 산에서 북을 치거나 사람을 보내거나 구두로 전달하는 등 원시적 통신 방법으로 하룻밤 새 군중을 모을 수 있었다. 아울러 농민은 경찰·군수·지주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자신을 억압한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해 목표를 택했다.
지방 관청이 점령되면 미국 공출 기록이 가장 먼저 파괴됐다. - P472

한국의 좌익 지도자들은 1946년 가을 분출된 인간의 놀라운 힘을 지휘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려 했다. 격렬한 농민 봉기를 유발한 그들의 역할에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농민의 거친 힘을 조직화된 정치로 이끌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한에는 그들이 후퇴할 수 있는 안전 지역이 거의없었다. 거기에는 베트남처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중부 고지대가 없었다. 거기에는 중국 옌안처럼 전국을 지배한 정권과 경쟁할 수 있는근거지도 없었다. 그리고 농민을 조직으로 편입시켜 그들에게 이익과 지위,
적을 방어하는 핵심 요소를 제공하는 과정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부족했다. 한편으로 남한의 좌익과 공산주의자는 대중을 조직하는 데 경험이 부족한 지도자들의 실패를 계속 보여줬다. 그 결과 그들은 그저 자신들만 조직했을 뿐이다. 즉 그들은 한 파벌에서 다른 파벌로 분화했으며 서울에 지나치게 힘을 집중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우세한 통신・교통을 비롯한 그 밖의 물리적 수단을 갖고 농민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훈련을 받은 - P485

관료 기구와 마주쳤다. 이런 기구는 1946년 가을 동안 수많은 사건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산주의자와 좌익 조직자의 실패만큼이나 진압을성공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봉기 이후 한국 농민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준 지방 조직이 사실상 소멸됐다는 사실이다. 남한 전역에서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농민조합이 사라졌다. 전국과 지방의 중요한 좌익 조직의 지도자들은 죽거나 투옥되거나 체포되거나 은신했다. 그들의 지지자 수천 명은 정치적으로온건해지거나 매우 급진화됐다. 모든 좌익이 연합해야 한다는 민전의 정확한 주장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대중적 기반의 큰 상실과 좀더 과격하고 수용의 폭이 좁은 조직인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농민에게 합리적 선택은 평온한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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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과는 전시에 구상한 미국 계획의 순서를 뒤바꾼타협이었다. 한국 정부는 신탁통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수립될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것은 자치를 위한 신탁통치 협정이거나 한국인들에게는 후견이 - P296

필수적임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협정은 오직 미국과 소련의 협력만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했다. 모든 것은 협정이 어떻게 시행되고 그것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달려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신중하게 협력하고 협정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 P297

1945년이 저물 때까지 한민당은 자신들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보편적 이해관계로 제시하는 것과 소수부유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겉모습과 본질을 초월하는 데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싼 난국은 폭넓은 국가적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기회를 제공했다. 이것은 몰락할 위기를 맞은 집단이 정치적 투쟁의 범위를 넓히는 데 성공해 좀더 유리한 권력 기반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는 주여한 사례였다. - P301

소련은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의 즉각적 독립을 가장 옹호하는 국가라는 인상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며 자신들이한국에서 추진해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이 손상될 것이라고예상하면서도 북한 사람들을 설득해 협정을 지지하게 했다. 미군 사령부가 남한에서 우익의 반탁 세력을 지지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군정 초기부터 미국이 한국 우익을 지지하리라는 사실은 소련이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아울러 소련은 토착 좌익 세력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들의 이익은모스크바협정의 이행과 상관없이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처럼 협정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사태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사태를 미국과의 협력은 미국의 조건을 따를 때만 가능하다는 신호이자 배신 행위로 해석했을 것이다. - P306

대표민주의원은 1946년 한 해 동안 군정이 조선공산당과 인공의 온건한 좌익을 "급진파"와 분리하고 후자를 고립시켜 남한에서 연합을 이루려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첫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대표민주의원 지도 - P317

자들은 좌익과의 연합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2월 14일 개회식부터 그들은자신들을 한국 정부로 묘사하려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는 그들이 신중하기를 바라면서 우대하고 지켜봤다. 그 결과 그들은 좌익이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 P318

소련의 오랜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독립되고 민주적이며 안정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미국이 보기에 소련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완전한 독립보다 중요하다. (…) 무력으로 강요되지 않는다면 한국은 예측할 수있는 미래에 소련보다는 미국으로 향할 것이다.
문서는 미국의 "1차 목표가 소련의 지배를 막는 것이고 "2차 목표는 한국의 독립이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한국의 독립은 2차 목표이므로 조기에 한국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미국의 - P320

이익에 부합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유엔이 침략을 막을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증거를 제시할 때까지 미국은소련과 함께, 필요하다면 한국에 일정한 영토를 확보하고 한국의 국제관계에일정한 핵심적 특권을 행사해야 한다. ・・・) 그러므로 한국에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은 미국이 적어도 정부 최고 수뇌부에 위장된 통제를 몇 년 동안행사한다는 조건에 기초해야만 한다. - P321

공위의 핵심 쟁점은 미국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까지 확대되기를 바랐으며 소련은 그들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미국이 점령한 남한지역까지 넓혀지기를 기대했다는 데 있었다. 미국의 골칫거리는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가 남한 전역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가 핵심 쟁점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 P327

군정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1946년 5월 "미국인이 남한 전역을 다니면서관찰한 결과 모든 좌익 지도자를 체포하라는 지시가 한국 경찰에 내려진것이 분명했다." 군정청 여론부의 내부 보고는 군정법령 72호가 "경찰이여러 지역에서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데 전권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공식 기록은 이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렸지만, 4월 30일 랭던은 "미국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좌익을 대대적으로 검거한 것은 기존 질서와 권력에 대한 도전을 진압하려는 쌀 배급 허가권 발급과 같은 권한을불법적으로 장악하려는 등의 목적에서 시행됐다"고 보고했다. - P332

하지를 비롯한 미국인들은 마침내 같은 시각을 갖게 됐다.
1947년 하지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합작 정부는 곧 "공산주의 정부로 갈 - P342

것"이라는 견해를 말했다. 하지는 "소련과 국지적 협상을 끝내고 공산주의자를 여기(남한)서 몰아낼 것"을 제안했다. 11월 미소위 미국 대표단은 합작위원회의 온건 좌파는 "사령관이 정치 문제를 협상할 수 있는 믿을 만한좌익 정치 세력"을 대표한다면서 하지와 약간 다른 견해를 보였다. 하지의 견해가 우세한 이상 온건 좌파를 포섭하려는 정치적 노력은 모두 덧없었다. 버치는 지혜롭고 열정적으로 합작을 추구했지만 상관의 도움이 부족했다. 게다가 중도파에 힘을 실어주면 좌익과 우익을 이끌 수 있을 거라고 한국 정치 지형을 판단했던 그의 견해는 틀렸다. 중도파는 기반이 없었지만 좌익은 강력한 조직과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우익은 부유층과 관료 기구에 의지했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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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10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커밍스의 그 유명한
저작이로군요.

해방 후,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분단 상태고 고착된 상태
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참...

거리의화가 2023-06-10 18:47   좋아요 1 | URL
식민지 시기, 해방 후 3년의 시간의 과정이 지금의 결과죠. 식민 청산이 안 되었고 계급, 이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