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7 - 5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7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17권은 1941년 무렵 즈음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1880년 후반부터 시작했던 시기가 어느덧 40 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조선이 식민지가 된 지도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1941년 무렵은 일본은 장개석의 원조 루트를 방해하기 위한 작전이 진행중이었고 오랜 전쟁으로 전쟁 물자도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미국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단계에 와 있었기에 미국이 참전하느냐 마느냐 사람들은 기대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40년 안에 큰 전쟁이 두 차례가 벌어지고 국가 간 전쟁은 부지기수인 상태였다. 전쟁에 끝이란 있는 것인지 공포를 넘어선 권태가 몰려오던 시기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국내에는 창씨 제도가 시행되었고 주요 신문이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었으며 반전운동단체라는 빌미를 구실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어졌다.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이 만들어지면서 농촌은 군량이 끊임없이 반출되었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군수품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 무엇보다 사상범 보호관찰령의 강화로 조금이라도 건수를 잡으면 잡아가는 현실이 되어 버린다.

"파괴란 새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휴머니즘을 결여한 새 질서란 허구이며 허구에서 시작되는 파괴란, 남 뿐만 아니라 자신도 무너지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지. (...) "
평소 환국이답지 않게 그의 어투는 매우 신랄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민족성에다가 못 박는 것은 반대다.
체제에 따라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보편성 아닌가."
"민족성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말한거야. 인간의 보편성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일본의 역사는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해왔다. 그렇게 본다. 나는 민족성에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길들여진 상태를 말했을 뿐, 그러니까 그들 스스로도 피해자인 셈이지."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했다. 그게 뭔데?"
"우라시마 타로의 다마테바코처럼 속이 텅텅 비어 있는 신도(神道), 혹은 신국사상과 현신이라 부제가 붙은 만세일계世一系)는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와 진실, 또는 사실은 그들 형편 따라 변화무상이지. 결국 그것들은 일맥(一脈)으로써 변하건 변치 않는 것이건 허구다 그 얘기야." - P22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휴머니즘(인간애)이 없다면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질서가 보편성을 띤 가치인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자국만의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아니면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부심이라면? 이를 위해 타인을 짓밟고 전진하는 행위는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17권에서 세 가지의 큰 사건이 있었다.

송관수가 죽고 길상은 모임을 해체하기로 결심한다. 길상은 독립 자금 강탈 사건을 기획했으나 이는 명백히 실패했다(이 때문에 본인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으니). 확보한 자금은 국외로 나가기는 했으나 비중 있게 쓰이지도 못했다. 평사리에 우가(家)가 미꾸라지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다가(자식 하나는 군대에 나가고, 다른 하나는 면서기에 진출. 그러니 안하무인이지!) 최참판 가(家)도 무한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수감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며 무의미한 침체 상태에서 조직의 멍에를 벗겨주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체념하고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하는 자조감이었달까.
길상은 최참판 가(家)의 일원이 되면서 어쩌면 스스로의 입지를 넓힐 수 없는 처지임을 한탄하기도 했을 것 같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서희, 환국이, 윤국이 등이 위험해지니까.

홍이의 아내 보현이는 아파서 국내에 들어갔다가 금을 구입해 들어온다. 그런데 이 사건이 경찰에 발각되어 홍이 내외는 곤욕을 치른다. 홍이는 처가와 썩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산소를 보러 오거나 할 때 아니면 들어올 생각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국내에 압송되고 처가집과 직면해야 했다(아마도 불편했겠지).
홍이는 40이 다 된 나이이지만 공적인 외부 활동(독립 운동) 이외에는 대처를 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보현이와 아이들에게도 밖에서 보면 잘하는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서로 간에 끈끈한 정은 없다. 아내는 장이와의 일 이후에 늘 전전긍긍해했는데 홍이가 좀 더 세심하게 대처했다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것 같다. 딸인 상의와의 대화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상의가 아는 언니가 간호부가 되겠다고 하는데 나도 하고 싶다고 말하니 발끈한다. 왜 발끈하는지 설명이라도 하던가. 차라리 김두수가 여자들을 팔아 넘기는 일을 한다고 말하는 누나의 직설적인 말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물론 상의는 당황하지만). 감정이 앞서서 욱하다가 (누적되어)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되니까.

인실과 오가타가 드디어 만난다. 지난 번에 하얼빈에서 인실이 탄 마차를 발견하고 오가타가 얼마나 미친 듯 쫓아갔던가. 결국 잡지 못했지만 인실은 그가 자신을 보았음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번 만남에서 오가타는 인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과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왔음을 알게 되곤 혼란스러워한다. 오가타는 세월이 흘렀지만 예전과 별반 다름이 없다. 좋게 말하면 이상주의자고 나쁘게 하면 현실감이 부족한? 인실은 진실을 말하고 오가타에 대한 애정의 말을 던진다. 오가타는 분노의 말을 토로하고 헤어지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인실은 오가타를 잊지 못했구나... 해방이 되어 둘은 해후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국적이라는 장벽은 너무나 크다. 조선이 해방한다면 일본은 패망이니까 말이다.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타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 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타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 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 심중에 회한이 없겠소? 종속을 그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변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자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노예근성, 나같이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는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 적이 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 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겠소. 친구지." - P198

오가타와 조찬하가 적이 아니고 친구라고 말하는데 나는 희망을 찾고 싶으면서도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인실과 오가타도 마찬가지의 복잡한 감정을 느꼈듯이 말이다.

마지막 5부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등장 인물들은 과거를 자주 회상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일명 "옛날이 좋았대이." 다.
내가 생각에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조선인은 식민지민이 되었기에 위치성에서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식민지 정책의 변화, 외부 상황에 따라(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그 비애가 더 커졌을 뿐이다.
물론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서 이득을 본 많은 이들은 상실이 아니라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마음 속에는 일말의 비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지난 권에서 송관수가 호열자로 타국에서 쓸쓸하게 죽고 이번 권에서는 봉기 노인이 죽는다. 같은 사망이라도 반응은 달랐다. 한 사람은 타국에서 쓸쓸히, 다른 한 사람은 고향에서. 한 사람은 호열자로, 다른 한 사람은 자연사로. 한 사람은 동학, 형평사를 비롯 독립 운동에 노력했던 인물,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이 땅에서 먹고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만큼 둘을 놓고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송관수는 너무 이르게 갔음을 한탄하고 봉기 노인은 살 만큼 살았다는 식이다(물론 그만큼 오래 살기도 했다). 송관수는 출신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펼친 행동들은 그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기에 존경을 받았다. 반면 봉기 노인은 주변 사람들을 시기하고 괴롭힌 적이 많았으므로 호평을 받지 못한다.
두 사람의 살아온 궤적을 보면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었다. 주어진 조건과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 개인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물며 당시 상황에서 반기를 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송관수의 죽음은 안타까웠으나 그의 삶은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 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 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 있던 간도 땅에서 홍이는 감수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 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복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 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 값도 안 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 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정면돌파를 했든 측면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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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6-15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때 송관수나 봉기 노인처럼 산 사람으로 나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이 평범하게 살려고 했지만, 시대 때문에 그러지 못하기도 했겠습니다 소설에서는 한국말로 하지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고 한국말을 한 게 들키면 잡아가기도 한 듯한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람은 예전에 잘 살지 못했다 해도 예전이 좋았다 할지도 모르죠 지나간 일이기에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걸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5 09: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40년대 초니까 창씨개명 시행이 되고 이미 교육 체계는 일본어가 국어처럼 쓰이던 때죠. 조선말 하면 혐오와 괄시를 받는 그런 때! 내가 잡혀가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덤탱이 씌우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이 좋았다고 한 이유는 그때는 독립운동의 불꽃이 남아 있을 때고 그에 참여한 인물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동네도 북적였고 활기가 있었을 때였는데 이제는 친일파들 빼고는 몇몇 남지도 않은 데다가 잡혀가지 않기 위해 쉬쉬하는 그런 분위기? 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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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죽음의 시간이 불확실하다고 말하지만, 이런말을 할 때면 그 시간이 뭔가 막연하고도 먼 공간에 위치한 것처럼 상상하는 탓에, 그 시간이 이미 시작된 날과 관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ㅡ 혹은 우릴 먼저 부분적으로 차지하고 나서 그 후엔 결코 손에서 놓아주지 않는―이렇게 확실한 오후, 모든 시간표가 미리 정해진 오후에 일어날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달 동안 필요한 신선한 공기 전부를 마시려고 산책하기를 열망하면서도,
입고 나갈 외투나 우리가 부를 마부를 고르면서는 망설이고, - P11

그런 후 합승 마차에 오르면 하루가 당신 앞에 온전히 놓인 듯보이지만, 여자 친구를 맞이하려고 때맞춰 집에 돌아가기를바라기에 하루가 짧다고 느끼고 다음 날에도 날씨가 좋기를바라곤 한다. 그리하여 다른 쪽에서 당신을 향해 걸어오던 죽음이,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바로 그날 몇 분 후 마차가 거의샹젤리제에 도착할 바로 그 순간을 선택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한다. 어쩌면 보통 때는 죽음 특유의 기이함 때문에그 공포에 시달리던 이들은 이런 종류의 죽음에서 - 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과의 접촉에서 - 그것이 우리가 아는 일상의 친숙한 모습을 띤다는 사실에 오히려 어떤 안도감 같은 걸느낄지도 모른다. 죽음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찾아오기도 하고, 건강한 사람의 외출길에 찾아오기도 한다. - P12

우리를 배신하는 중이라고 의심하며 압박하는 것은 우리 삶 그 자체이다. 이 삶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걸 느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 삶을 믿고, 삶이 마침내 우리를 버리는 날까지 어쨌든 의혹 속에서 살아간다. - P15

우리가 사는 거리에 도착하기전 마차가 쫓아가야 하는 그 끝없는 벽을 불태우던 석양빛은 말과 마차의그림자를 벽에 투사하면서 마치 폼페이의 구운 점토에 그려진영구차마냥 붉은바탕에 검은빛으로 뚜렷이 드러나게 했다. - P17

대개의 경우, 통증은 우리 몸의 기관을 위협하는 어떤 새로운 상태를 의식하고, 그 기관이 이런 상태에 맞는 감각을 필요로 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이 통증의원인을 어떤 불편한 증상에 따라 식별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그런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는 연기로 가득한 방 안에 둔감한 남자 둘이 들어와 일에 열중한다.
그런데 이들보다 예민한 세 번째 남자는 그 방에서 끊임없이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의 콧구멍은 그가 맡아서는 안 되는것처럼 느껴지는 냄새를 계속해서 근심스럽게 맡을 것이며, 매번 그것이 정확히 무슨 냄새인지를 알고 그 불쾌한 후각에익숙해지려고 애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마도 뭔가에깊이 몰두하면 치통을 호소하지 않게 되는지도 모른다. - P24

독창적인 화가나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안과 의사처럼 해야 한다. 그들이 그린 그림과 그들이 쓴 산문으로 진행 - P31

되는 치료가 언제나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치료가 끝나면 의사는 "자, 이제 보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세상은(단 한 번만창조되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예술가의 수만큼 창조되는 세상은) 우리 눈에 과거 세상과는 아주 다르게, 그렇지만 전적으로 투명하게 보인다. 여인들이 거리를 지나간다. 르누아르가 그린 여인들이므로 예전과는 다르다. 우리가 예전에 여인으로 보기를거부했던 그 르누아르가 그린 여인들이다. 마차 또한 르누아르가 그린 것이며, 물이나 하늘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첫날보았을 때는 결코 숲으로 보이지 않던, 숲 고유의 빛깔이 없이수많은 빛깔로 아롱지는 장식 융단 같던숲에서 우리는 산책하기를 열망한다. 바로 이것이 지금 막 창조된 새롭고 덧없는우주다. 이 우주는 독창성을 지닌 새로운 화가나 작가가 일으킬 다음번 지질학적 대변동 때까지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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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은 페미니스트 법 이론을 다룬다고 하지만 사실상 시기에 따른 다양한 페미니스트 이론들을 다루고 있다.



동등대우 이론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여성은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여성과 남성은 동일하므로 동일한 고용, 경제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 페미니즘은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이미 설계된 기준이 남성 중심적 평가 기준이기 때문에 남녀 차이의 경험 및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대우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성별에 따라 반드시 나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남성, 여성 내부에서도 차이는 존재하니까.


지배 이론은 여성과 남성 간에는 힘(권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에 의해 사회제도에 녹아 들어 불평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성적 지배로 발생하는 강간, 포르노 문제를 잘 설명해주는 이론이지만 여성 내 다양성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반본질주의는 비판적 인종 페미니즘과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있다. 비판적 인종 페미니즘은 한 사람이 맺는 다양한 지위와 상황에 따라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으로 생물학적인 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종과 능력 사이에는 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의 성적 지향성에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이성애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관련성을 지적한다. 전통적인 남성상은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경계를 넘나들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남성성은 여성성보다, 이성애는 다른 섹슈얼리티보다 우선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에코 페미니즘은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강조하며 성차별주의와 자연주의는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이 억압의 경험을 같이 한다고 보고 그 억압의 기제는 생태계라고 본다.


실용주의 페미니즘은 추상화를 지양하고 맥락과 관점을 중요시여긴다. 보편성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맥락에 맞는 구체적인 해결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개개인의 경험은 이론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하나의 진실이란 없고 진실은 여러 개이며, 지속되지도 않으며, 개인들의 체험과 관점,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해체"의 포스트모던 기법을 가져와 기존의 법 해석 개념과 불변성에 도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론에서도 그렇고 1장에서도 긴즈버그 대법관이 언급된다. 그는 낙태 권리, 동성애자, 종교적 자유 등 소수자 권리를 위해 힘쓴 미국 연방 대법관으로 27년간 재임하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92318310004391


올해 2월에 긴즈버그가 한 인터뷰를 실은 책도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기는 했는데 이렇게 또 체크해둔다. 노터리어스 RBG는 친구분 덕분에 같이 추가해놓음.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스트 법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법 이론은 공통적으로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바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observation)과 나아가야 할 목표(aspiration)다. 먼저 페미니스트는 현재 남성이 누리는 권력과 특권은 남자들만이 이 세상을 만드는데 참여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페미니스트 법학자는 남성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문명의 법을 만드는 데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 역사에서 남자가 만든 법이 남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다음으로 모든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평등을 달성하는지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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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12 09: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출근길에 시작했어요. 긴즈버그 언급되는데 제가 <긴즈버그의 말>을 사두었었거든요. 마침 집에 있는 그 책 생각나, 얼른 읽어야겠다 했습니다.
자, 화이팅!!

독서괭 2023-06-12 10:06   좋아요 1 | URL
전 <노터리어스 RBG> 가지고 있는데 빨리 읽어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3-06-12 13:24   좋아요 1 | URL
역시 책에 있어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다락방님ㅎㅎㅎ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이론이라서 딱딱할 줄 알았는데 읽기 어렵지 않네요^^ 2월달에 읽었던 데이비스 책이 도움이 많이 되는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6-12 13:39   좋아요 1 | URL
괭님 <노터리어스 RBG>도, <긴즈버그의 말>도 도서관에 있더라구요! 덕분에 2권 빌리게 되었네요ㅋㅋ 정보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06-12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어제 빌려왔어요.
차례 보면서 이 책은 각각 페이퍼 안쓰면 다 잊어버리겠군 했는데 먼저 시작하고 계시네요.
미리 예습하는 기분으로 잘 읽었습니다. 아리송했던 말들이 정리가 딱 되는군요!
끝까지 잘 읽으시길 응원합니다. 페이퍼도 또 올려주세요~~
더불어 저도 얼른 도전해 보겠습니다.^
파이팅~~~

거리의화가 2023-06-12 13:26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런 책은 정리 안하면 그냥 휘발되버리기 쉽죠.
은하수님의 도전도 응원합니다!

얄라알라 2023-06-12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역시 철저하게 공부하시는 분이시라 개념부터 확실하게 짚어주시네요

저는 오늘 ˝문화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어요.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 표현인데, 올려주신 정의를 봐도 갸우뚱 갸우뚱하니, 어서 책을 직접 읽어봐야 하나봐요....^^:;

다들 열심히 읽으시는데 이렇게 곁눈질로 리뷰만 엿보고 가네요. 책도 아직 안 구해서^^;;

거리의화가 2023-06-12 15:05   좋아요 1 | URL
정리차 본문에는 간략하게 개념만 올려두었습니다. 책에는 사례라던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 덧붙어서 이해가 더 쉬우실 듯합니다. ㅎㅎ 이 책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단가가 비싸서 사기에는 부담되는 가격이긴 하더라구요ㅠ

얄라알라 2023-06-12 14:39   좋아요 1 | URL
네네^^ 감사합니다.

사례, 궁금해지네요

2023-06-12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2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3-06-12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즈버그 얘기 나오겠지? 했는데 역시군요 ㅎㅎ
벌써 12일이네요.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3-06-12 15:08   좋아요 1 | URL
네 수하님. 이제 긴즈버그를 읽을 때가 되었나봐요. 이론이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1장은 페미니즘 이론에 가깝더라구요. 그동안 그래도 개념이 좀 정리가 되었던건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뒷장들은 어떻게 전개될지도 궁금하네요!ㅎㅎㅎ
 

"은자언니는 졸업하면 백의의 천사가 되겠대요?"
"뭐?"
홍이 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학교 나와서 간호부로 들어가면 대우가 참 좋다는 거예요. 보통 소학교만 나와가지고 간호부가 되니까 말예요." 그
"그따위 소리 하지 마."
딱딱한 홍이 음성에 의아해하며 상의는 말했다.
"아버지 왜 그래요? 저는 좋아 뵈던데, 병원에 가면 그 언니들 깨끗하고 거룩해 뵈고, 그 중에는 굉장히 예쁜 사람도 있었어요."
"너도 간호부가 되겠다 그 말이냐?" 모으는 EXER
"그런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긴 좋던데요?" PRS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백의의 천사가 되어 전선에 나가서부상병을 돌보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구요."
홍이는 단발머리에 고집 세게 생긴 딸을 가만히 바라본다.
‘천방지축을 모른다. 애국이라니, 나라가 어디 있다구.‘ - P119

"김두수라고, 니는 모릴 기다마는, 공장에는 가끔 올 기다.
우리가 어릴 적에 한 동네서 살았제. 그래서 잘 아는데 그놈이,"
하다 말고,
"아니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니는 모릴 기다."
"왜 보지도 못한 사람 얘길 꺼내는 거예요?"
"잠자코 들어보아라. 그 사람 본업이 가씨나장산 기라. 조선서 데리오는 가시나들을 받아가지고 팔아묵는데 그러이 그쪽사정은 환하게 안다."
"아이들 데리고 별소리를 다 하요."
의도적으로 임이에게 말을 하지 않던 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머가 우때서? 야아가 백의의 천사라고 해쌓으니께 하는 말이제."
보연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을 한다.
"상의 니가 몰라서 그러는 기라. 왜년들이사 그렇지도 않을기다마는 조선 아이들은 명색이 간호부지 군대 따라댕기믄서병정을 받는다 안 카나." - P113

전시하에 개인은 금을 소유할 수 없다, 일본 정부의 그 같은포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부가 금을 회수하겠다는 것이며 공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국민은 고시한가격으로 금을 정부에 팔아야만 했다. 금이 탄환(彈丸)이 되는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쇠붙이는 전선으로 전선으로 가게 돼 있는 판국인데, 물론 많은 사람들은 소유한 금을 내놨고 고시가격으로 팔았지만 그것에 불응하여 금을 은닉한 소위 반역자가없지도 않았다. 은닉한 일부의 금이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었던것도 사실이었고, 만주 혹은 중국 본토, 그 방면으로 유출되는것이 이른바 밀수였는데 전문적으로 하는 밀수꾼의 조직도 상 - P128

당수 있었겠지만 만주서 조선으로 다니러 온 사람, 만주에 볼일이 있어 가거나 혹은 이주해가는 사람, 이들 중에도 조선서금을 매입하여 실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숨겨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일본제국의 경찰이라고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은 이윤을 위해 위험도 무릅쓰게 돼 있었다. 그러나 보연의 경우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단순했고 물정모르는 만용이라 할 수도 있겠다. - P129

"그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인실 씨 심경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런일 아닐까요? 민족의식이 에고이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말 할 자격이 제게는 없는지 모르지만, 일본은멀잖아 패망하겠지요. 일본인도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 피해자이기도 하구요. 이런 정세하에서 오가타나 저나 앞날은 안개속입니다. 일본인인 오가타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일본인을 사랑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십시오. 인실 씨는 사람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인실 씨는 오늘까지있어온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십일 년 전과 내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찬하는 깨닫는다. 그때 인실은 그 말로 설득되지않았다.
"제가 무지하게 보이지요?" 인실은 역시 혼잣말같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 P154

지난가을에는 일본이 무모한 불인(佛) 진주를 감행했고 그보다 앞선 삼월에 왕조명(汪兆銘)은 위정부(僞政府)를 남경에다 세웠으며구라파도 전쟁의 도가니로 화해 있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을뚫었으며 영국은 됭케르크에서 총 철퇴, 드디어 파리는 함락된상태, 각각 세계의 정세는 예측불허였다. 뿐인가, 소만 국경은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터질지, 언제 하얼빈이 전화 속으로 들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연회가 성대하고 여인들 의상이 현란하며 남자들이 폭음하는 것은 내일을모르기 때문일까. 일본인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이다. 절망은오히려 그들 편이었다. - P162

"일본여자를 데리고 살며 나라를 망하게 한 고관대작의 자손으로,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지만 오가타상,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잊지 마시오. 인실 씨가 그리된 데는 내게도 다소 책임이 있었고 또 그와의 언약은 지켜주는 것이, 그는 평범한 길을 가고 있는 여성이 아니오. 생각해보아요. 오가타상이 현실을 비판하고 군국주의를 증오하지만 자기 자신 일본인인 것을부정할 수 있어요?"
"그건 문제가 달라요."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과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 사람, 어느 쪽의 고통이 컸을까?"
그 말 대답은 못한다.
"몰라 그렇지, 그 여름에 인실 씨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신파같은 건 아니었소. 나는 그 당시 회피할 수 있다면 회피하고 싶었소. 회피할 수도 있었지요. 인실 씨는 매달리며 호소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 P186

나는 너를 잊겠다! 하며 절규했으나 인실은 그에게 진실의 여운을 남기고 갔으며 인실이 낳아준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환희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알지 못할 폭풍이 불고 있었다. 안정을 잃었고 격노한 것도 그것은 사태 변화에 대한, 어쩌면 그것은 역설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 P187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타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타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 심중에 회한이 없겠소? 종속을 그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변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자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노예근성, 나같이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는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 적이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겠소. 친구지." - P198

제문식이 말하며 술을 마셨다.
"작년 초 창씨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아시다시피 폐간되었고 이어서 구월에는 반전운동단체라하여 기독교도들을 비질하듯 검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의 조직, 그것은 아까 문식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농촌은 군량의 저장고로, 노동자들은 깡그리 군수품의 부품으로, 그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그걸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운동인가 뭔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만화지요. 처처에서 만화 같은 작태가 벌어지고있어요. 윌리엄 텔의, 압제자 모자 앞에서 절하는 것쯤, 그거약니다. 가장 저질의 신(信)을 우리는 지금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야만적으로 가장 무지몽매한 종족으로 우리는추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일본인들은 그런 일에는거의 불감증인 듯하지만 현인(人神)을 믿지 않는 조선인들처지에서 보면 뱃가죽이 터질 지경이지요. 그러나 조선인이 그희극의 관객 아닌 연기자다 하는 점이 참혹한 거지요. 여하튼,
금년에 들어와서 종전에 있었던 사상범 보호관찰령(保護觀察令)이 개정되어 예방구금령(豫防禁令)으로 공포된 것은 한층 목을죄자는 것인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사람들이 급박해진 것은 당연하지요. 어디든 국경을 넘고 싶다는 유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 P208

"그들이 살아남는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힘의 무게를 다는아주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P211

"언제까지 미쳐 날뛸까요?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전쟁은 끝나지요? 전쟁 미치광이 땜에 과학이 발달되고 부를 축적하기위하여 과학이 발달되고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만 할 것 때문에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고 생산에 미쳐 날뛰는, 이 끝없는 낭비는 결국 인류가 전멸한 뒤에 끝이 날까요? 그래요. 군국주의는 망해야 해요! 식민지 정책은 끝이 나야 해요. 낭비와 축적의이 병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생명이 부지될 수도 없을 겁니다. 제사장 말대로 농촌은 거대한 군량의 저장소이며 노동자는 모조리 군수품의 부품,뿐이겠어요?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볼 때, 지주들이 농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노동자 아닌 사람도 노동자로 공급이 될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항 없어요. 망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역사의변혁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망해야 합니다."
오가타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 P225

오가타는 아이의 손을꼭 쥐었다. 축복받지 못한 생명을 안고 찬하에게 도움을 청했을 그때 그 모습을 오가타는 히비야공원 어느 모퉁이에서 찾기라도 할 듯,
‘아니다. 이 애는 축복받은 생명이다. 이렇게 무구하고 신비스럽게 자라주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우리들 사랑의 등불이야.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인실의 뜨거운 눈물과 나의 비원을받아 태어난 아이, 이 영롱한 생명은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 P237

언제나 그랬지만 가슴이 설렜다. 어디든 떠난다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섦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 P242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이상한 것은."
99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차 없이 배척하는 그 속성말예요. 그것도 사람의 본성일까요? 이해가 걸려 있을 경우도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소외시켜버리는 그 잔인성 말예요." - P262

"같은 사람이면서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닐 게야. 너 자신 속에도 배타적인 감정은 있을테니까. 인종에서 단위가 작아져도 마찬가지다. 해서 끼리끼리모인다 하지. 쪼개고 쪼개서 하나가 될 때까지. 단위가 크든 작든 다르다는 것은 거리며 이질적인 것 아니겠나?"
"그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나타나는 적대의식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건가요?"
"어디 사람뿐이겠어? 생명 있는 모든 것, 곤충이든 식물까지종(種)이 다르면 배척하고 싸워. 아니면 항복하든가. 이기적인생존본능 아니겠어?" 어떻
"그렇담 영원한 투쟁이네요. 영원한 불평등이고."
"누르는 주체만 달라져왔을 뿐 변한 게 뭐 있어. 새삼스럽게그런 얘기는 뭐할려고 해." - P263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 있던 간도 땅에서 홍이는 감수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 - P301

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 값도 안 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 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
정면돌파를 했든 측면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 P302

담배 연기를 날리며 영광은 생각한다. 이 고장의 성지(聖地)인 이곳이 악랄한 일본으로부터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굳게 닫혀진 사당 문을 멀리 바라보며 영광은 바로 이곳 지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통영 시내로가자면 서문안 고개를 넘어서 간창골을 빠져나가야 시내에 나간다. 간창골 일대 서문안 고개에도 집은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특히 서문안 고개는 가난한 초가들로 이루어졌고 그곳에서 충렬사로 이르게 되는 내리막의 골짜기는 대개 가난한 서민들의 주거다. 마치 분지 속에 그 가난한 백성들에게 옹위되듯충렬사는 자리하고 있었다.
‘한 위인이 살다 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 - P317

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 - P318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한복이는 그런 말할 만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기적이었으니까. 돌밭의 질기고 못생긴 무 꽁댕이 같았던 그,
밟히고 또 밟히는 길가의 잡초같이 자란 한복이, 그에게도 수십성상의 세월이 실려 이제는 제법, 몸집은 작으나마 의젓하고 사려 깊은 현자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숨이 가쁘지요."
한참 만에 홍이 대꾸했다. - P359

세 늙은이는 신명을 내가며,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만든다.
모처럼 그들에게 생활이 살아나 꽃이 되는 것 같았다. 한 곁에밀려나서 마치 방 안에 놓인 장롱과도 같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 눈치볼 며느리 딸도 없고 마치 자유천지에서 벗과 노니는 것처럼, 우물가에서 지저귀던 옛날이 돌아온 것같이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부엌 안에서 맴돈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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