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프로이트주의: 오도된 페미니즘

프로이트주의와 페미니즘은 같은 역사적 조건에서 발생했고 같은 현실에 기반한다.
프로이트주의는 ‘사회적 적응’을 위해 임상치료적 목적에 맞게 수정되었다.

프로이트주의는 무척이나 비난할만하지만, 프로이트가현대 삶의 핵심적인 문제인 섹슈얼리티를 파악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70

20세기 초에는 사회적·정치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도, 문학적·예술적 문화에서 섹슈얼리티, 결혼, 가족, 여성의 역할에 관한 관 - P71

념이 굉장한 동요를 일으켰다. 프로이트주의는 이러한 동요에서나온 하나의 문화적 산물에 불과했다. 프로이트주의와 페미니즘은 둘 다 서구 문명의 가장 독선적인 시대가족 중심성, 따라서과장된 성적 억압으로 특징지어지는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반응으로 나왔다. 두 운동 모두 의식의 깨어남을 의미했다. 그러나프로이트는 페미니즘이 치유하려고 주장하는 것을 진단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 P72

나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권력의 측면에서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프로이트가가부장제 사회의 핵가족생물학적 가족 자체에 내재하는 불평등의 최악의 결과들을 강화시키는 사회조직 형태에서 자란 모든 정상적인 개인에게 공통적인 것으로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 - P75

를 관찰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남성이 권력을 덜 가진사회에서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게다가약화되는 가부장제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완화를 추적할 수있는 많은 문화적 변화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있다. - P76

전통적인 가족에서는 부모의 양극성이 존재한다. 어머니에게는 자녀를 헌신적으로 무조건 사랑할 것이 기대되는 반면, 아버지는 유아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물론 양육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후에 아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실적과 성과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를 조건적으로 사랑한다. - P78

마침내 소년을 설득시키는 것은 그가 자랄 때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무력한 사람들인 여성들과 아이들의 상태에서부터 잠재적으로 강력한 상태인 자아 연장인) 아버지의 아들로 이행하도록 요청받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 P81

일반적으로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보다 덜심오한 발견이라고 믿어지는데, 그 이유는 여성에 관한 모든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여성을 단지 부정적인 남성negative male 으로서만 분석하기 때문이다. 즉,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역전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것이다. - P82

페미니스트적 번역은 이렇다. 아이들은 그들의 주인인 부모,
특히 진짜 권력을 가진 사람인 아버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것을 상상한다.
또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성적 도착증의 일종fetishism]에 관해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대상은 어린 소년이 그 존재를 믿지만포기하고자 하지 않는 어머니의 성기를 대치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말로 난처할 수 있다. 어머니의 권력에 관해 말하는 것이훨씬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어린 소년은 음경과 음핵 간의 차이를 가까이서 관찰하기는커녕 어머니가 옷 벗은 것을 본 일조차없다. 소년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가 어머니에게 애착을 가진다는 것과 그녀가 무력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택된 대상은 이 애착의상징일뿐이다. - P86

프로이트는 특히 모든 정상적 남아에게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모든 정상적 여아에게서는 그것의반대급부인 엘렉트라콤플렉스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근친상간금기에 의해 야기된 성적 억압에 의한 심리적 처벌을 묘사했다.
동성애는 마땅히 억압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생긴다는 것이다. - P88

성을 감정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서구 문화와 문명의 토대다. - P93

이 신-프로이트주의적 수정주의neo Freudian revisionism를 가장 잘특징짓는 용어는 아마 ‘적응adjustment‘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의적응인가? 기본 가정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흑인, 또는 특별히 불운한 사회적 계급의 일원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들은 이중적으로 불해진다. 그들은 우리가 보아온 대로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어렵고 불안정한 정상성을 획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들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특수한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에도 ‘적응‘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기정의 selfdefinition 또는 자기결정 self determination을 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마르쿠제의 관점에 있어서, 치료의 과정은 그저 ‘체념의 과정‘일 뿐이고, 건강과 신경증 간의 차이는 ‘체념의 정도와 효과‘일뿐이다. - P98

그때 유럽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많은 지성인들이개업을 하러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은 이상적이었다. 고통받는 하나의 계급 전체가 그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정신병 환자뿐만 아니라 교육 잘 받고 책임감있는 시민들,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이렇게 쇄도하는 환자를 다루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새로운 분야가 개척되었다. 아동심리학, 임상심리학, 집단치료, 결혼상담 봉사 등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어떤 것이든 이름이 붙여졌고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어떤 것도 충분하지 못했다. 새로운 학과가 대학에 창설될 수 있는것보다 그 요구가 더 빠르고 다양해졌다. - P104

심리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이 됨으로써 진지한 학문으로서 훼손되었고 그것의 핵심과 잠재성은 반동적인 것이 되었다.
심리학만이 타락한 유일한 학문은 아니었다. 교육학, 사회사업학, 사회학, 인류학, 모든 관련된 행동과학은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여성의 교화라는 이중적인 기능을 과도하게 수행하면서 수년 동안 사이비과학pseudo science으로 남아 있었다.
남성들은 곧 (남성들의 독점인) ‘순수‘ 과학으로 도피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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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09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매달 제가 책을 정해 읽자고 하면서도 이렇게 매번 읽기 싫어서 미루기만 할까요? 저도 곧 읽겠습니다. 아 그렇지만 읽기 싫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3-07-10 08:59   좋아요 0 | URL
읽어보니 역시 쉽지 않은 책이네요. 2장은 3~4번을 반복해서 읽었는데도 아리송한 부분이 많습니다. 다락방님도 화이팅입니다!
 

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 - P303

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우이당쟁 - P304

정부는 폭리를 취했다. 소금은 모두 정부의 손을 거쳐야만 유통되었는데, 이익이 많이 남는 물품이라 암거래가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소금을 ‘사염‘이라고 불렀으며, 사염 판매는 말할것도 없이 불법이었다.
소금 전매제가 붕괴되면 당나라 왕조도 무너지므로, 사염 거래는 단속이 엄격했다. 한 섬(10말) 이상의 사염을 판 자는 사형, 한 말 이상 판 - P354

자는 장형(杖刑)으로 정해져 있었다.
단속이 심해지자 사염 판매인들도 그것에 대항하려고 했다. 관헌의 습격을 받더라도 그들을 격퇴할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므로 무장은 당연했다. 또 관헌의 단속 정보를 가능한 빨리 알아내야 했으므로 각지의 사염업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고있었다. 황소와 왕선지는 둘 다 사염판매인이었으니, 거병 전에 만난 적은 없다고 해도 서로 연락은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 왕선지와 황소의 배경 - P355

실력의 시대였다. 그것은 남북조 이후 이어져 온 귀족사회가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문벌을 중시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성당(盛唐)이후, 문벌이 없는 인물이라도 진사에 합격하면 관계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반발하는 감정이 우이(牛) 당쟁‘을 낳았다. 진사라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려면, 드물게 예외는 있지만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어야 했다. 당나라 초기, 건국의 원훈 가운데도 도적떼 출신자가 재빨리 귀족화했듯이 진사 출신 고관도 귀족화다. 하지만 당나라 말기는 문자 그대로 실력주의의 시대다. 실력이란 무력을 말하므로 ‘군벌의 시대‘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386

세종은 오대 여러 제왕 중에서도 명군으로 꼽힌다. 오대의 제왕 중에서 내정에 많은 힘을 쏟은 사람은 후주의 세종 정도다. 개간, 치수, 강기숙정(正), 행정개혁, 군대 정비 같은 일에 정력적으로 몰두했다. 역사상 세종은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란(法難)‘이라고 불교 측에서 말하는 일종(一宗)이 바로 이 세종이다. 탈세와 병역 기피를 위해 출가한 승려를 환속시켜 생산적인 일에 종사시키는외에,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불상과 범종을 회수하여 동전을 주조하는 경제적인 효과까지 생각한 폐불령이었다. - P407

후당에서부터 시작하여 후진, 후한, 후주를 섬겼고, 요나라의 태종(야율덕광)이 남하했을 때도 영입되어 입조했으므로, 이 인물은 다섯 조정에서 모두 재상으로 활약했다.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지만,
5조(朝), 8성(姓) 11군(君)을 섬겼다는 미증유의 기록을 가진 주인공이다.
예부터 풍도는 문제 있는 인물로, 칭찬과 비방의 낙차가 그만큼 큰 예도드물다. 오대는 남형(刑)의 시대여서 사람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여겼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쉽게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무대에서, 그것도 재상으로서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왕조가 바뀌어도 죽지 않고,
더구나 재상으로서 임용된 일은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410

당말부터 오대에 걸쳐 완전히 몰락한 것은 귀족사회였다. 기록된 역사는 귀족과 귀족사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만을 보여 준다. 굵고뚜렷한 경계선이 있어서 그 아래에 위치한 비(非) 귀족층은 문헌에 전혀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귀족사회의 붕괴로 그 경계선이 허물어졌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 그 경계선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러 번반복하지만 화응이 염사를 불태워 버린 것은 그런 의식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당의 국주(國主)도 당당히 사를 지었다.
시는 읽는 것이지만, 사는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노래가 입을 통해서 나오는 상태였다. 아니면 그때까지 그들의 입을 막고 있던 것이 힘을 잃은 시대였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의 주제가 주로 사랑이라는 점도 그때까지 금기시했던 것이 불식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귀족적 분식 대신에 서민적인 솔직함이 시대의 분위기를 물들이고 있다. - P434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ㅎ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송은 형, 요는 동생의 - P462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3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신법 실시가 아니라 그것의 폐지와 부활이라는 변동, 즉 당쟁이었다.
역대 중국의 역사가는 북송의 쇠망을 신법 탓으로 돌리는 자가 많아왕안석은 악역으로 몰려 버렸다. 개혁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왕안석의 집정은 겨우 6년이었다. 시간을 두고 일관되게 실시해야 효과가 나타나는데도, 정국은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표면은 어찌되었건 중국인의 사고방식에는 노장적인 면이 의외로 강하다. 노장의 사상은 ‘무위(無爲)‘를 존중한다. 너무 간섭하는 정치는좋아하지 않는다. 신법은 그 성격상 백성의 생활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간섭하는 것이었다. 그 번거로움이 싫었던 것이다.
신법은 높은 이상을 내걸었으나, 새로운 정책을 실시할 때 일어나는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구법의 의식적인 방해도 있었지만 말단 정책을 이해하지 못한 혼란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처럼 모든 죄를 왕안석과 신법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 P489

휘종은 채경과 동관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 서화와 시문 이야기 상대로서 두 사람을 능가할 대신은 없었다. 게다가 이 둘은 정치적인 수완도 어쨌든 표준 이상이었다. 휘종은 정치를 그들에게 맡겨 놓고자신은 우아한 예술 생활을 보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술을 하려면 돈이 든다. 그 돈은 재상들이 어떻게든 마련했다. 이제 ‘신법‘은 그런 일을 위해 쓰이게 되었다.
항주에는 궁정용 도구를 만드는 공예국(工藝局)을 설치했는데, 그 설치를 동관이 맡았다. 또 황족의 혼례기구를 만들기 위해 ‘후원작(後苑作)’이라는 관청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환관 양(楊)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양전은 ‘공전법(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후원작의 경비를 조달했다.
왕안석의 신법 안에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대지주가 숨긴 논을 찾아내 세금을 매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지는 못했지만 토지 실측으로 숨긴 논밭을 많이 찾아내 증수(增收)로 이어졌다. 대상은 대부분 대지주였다.
휘종 때의 ‘공전법‘은 그렇게 만만한 법이 아니었다. 자의 기준을 바꾸었던 것이다. - P528

방납은 ‘끽채사마(喫榮事魔)‘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끽채사마란 채식주의자에다 마귀를 섬기는 자를 뜻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이것은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會昌) 연간의 폐불령 때 함께 탄압받은 마니교가 지하로 숨어들어 살아남은 집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무장만 한 암거래상인 집단이 아니라 종교라는 유대로 묶인 만큼 단결이 강한 사람들의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휘종은 이 지방의 반란이 조작국과 화석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토벌군을 보냄과 동시에 그것들을 폐지했다. 조작국과 화석강을 폐지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원망을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방납은 항주를 함락하고 한때는 엄청난 기세로 자신을 성공(公)이라 칭하고,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 P53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연경의 한인들이 특별히 찾았던 것은 소식과 황정견의 글씨였다. 이때 왕안석의 글씨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고한다. - P548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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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왕조가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 - P64

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徵, 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태평공주의 죽음으로 여성의 시대는 일단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여권은 크게 신장하여 당대(唐代)의 여성은 다른 시대의 여성에 비해 당당해보인다. 한대(漢代)의 미인은 조비연(飛燕)처럼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가볍고 가냘픈 것이 이상이었다. 반면 당대의 미인 조건은 좋은체격이었다. 이 시대의 그림이나 당삼채(唐三彩)에 등장하는 여성을 보면대개 통통하게 살이 쪘다. 양귀비도 체격이 좋았다. 무측천도 태평공주도 아마 체격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여성은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탔다. 그전까지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안장에 옆으로 걸터앉았다.
이것도 이 시대 여성의 기질을 말해 주는 풍속일 것이다. - P229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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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8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그동안 위지경덕으로
알고 있었는데, ‘울지‘가 맞는
표현이고 하네요.

건성의 참모 위징은 춘추시대
공자 규를 모시던 관중 같은
존재였나 보네요.

이백과 두보의 시가 그 결이
다르다고 배웠는데, 저는 개인
적으로 후자가 더 마음에 드
는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0 09:22   좋아요 1 | URL
저는 위징은 생각할수록 놀라워요. 건성을 왕으로 모시려고 주장했었는데 후에 태종이 그를 참모로 쓰는 걸 보면. 위징도 놀랍고 태종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

이백은 참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더라구요. 그래서 시의 양도 많지만 다양한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백거이 시가 좋더라구요!ㅎㅎ
 
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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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관계는 상대적이다. 외교는 자국의 입장에서 정도의 차이에 따라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에서부터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는 치열한 수싸움의 세계이다. 외교에서 중요한 관계는 아마도 주변국이 될 것이다. 자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외교는 안보와도 연결되어 인식되므로 그렇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세계사적으로 유목 민족이 힘을 키운 적이 몇 차례 있었다. 돌궐, 위구르, 몽골, 오스만 등이다. 돌궐은 유목 제국의 황금기를 연 첫 주자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었다.
예를 들어, 한반도는 고대부터 근대에 오기까지 중국의 영향 하에 있지 않았던 적이 없다(좋든 싫든). 현재 남아 있는 문헌들이 대부분 중국의 것들이고(물론 일본도) 당연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변국들의 입장은 축소되거나 왜곡되어 기술된 경우가 많다. 자국의 역사가 있다면 중국이 써 놓은 기록과 비교해볼 수 있겠으나 고대로 갈수록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있다 해도 부족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다각도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돌궐은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초원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며 호령한 제국이다. 그 이전에 흉노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범위를 차지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유목 국가로서는 최초의 타이틀을 가질 만하다.
돌궐은 552년 건국되어 급격하게 성장했다가(제1제국 시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로 분열되고, 다시 일시적으로 힘을 되찾았으나 630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그 후 한동안 당의 기미지배를 받다 그 세력권에서 벗어나 687년 국가를 재건하였으나(제2제국 시기) 이후 침체 및 부침의 과정을 거쳐 745년 멸망하게 되는데 이처럼 2세기 동안 다양한 양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국가가 성장에서 소멸의 시기를 겪지만 이처럼 제국으로 성장했다가 숨고르기를 하고 다시 일어나 제국을 형성하다니 놀라웠다.

이 책은 돌궐의 주도 집단인 아사나 세력에 주목하여 이들이 권력을 형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아사나 집단의 역사는 곧 돌궐국의 형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아사나는 5세기 바르콜 분지(톈산 산맥 북방)에서 발원해 6세기 초 유연과 고차가 대결하는 과정에서 알타이 산지로 이주하였다. 그때까지 아사나는 유연의 지배 하에 있던 대장장이에 불과한 집단으로 그나마도 건국 이전의 기록은 없고 건국 이후 중국 기록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그 기원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아사나 집단은 자신들이 국가의 주도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들은 과거 흉노, 오손 이래 북아시아의 정통성 계승을 상징해주던 이리 신화를 받아들여 하늘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이어졌음을 강조했다(P97) .

돌궐은 건국 이후 몽골 초원과 중가리아를 넘어 서방으로 진출해 카자흐 초원을 거쳐 아랄 해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의 초원과 그 주변의 오아시스 지역 대부분을 통합하고 단일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냈다. 돌궐은 과거 유목민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고 주변의 오아시스 상인 출신의 관료들을 채용하였다. 이를 통해 동서 교역로인 초원길을 바탕으로 거대한 교역 시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돌궐이 위치한 곳은 주변의 정주 세력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정주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반대로 약해지면 돌궐은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구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남북조 시기 이전 돌궐은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끝나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돌궐의 교역로가 해체되자 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수, 당은 돌궐을 끊임없이 견제하였다. 돌궐은 680년 재기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당나라의 지속적인 무력 대응으로 수나라 통일 이전의 제국 범위 만큼은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720년 이후가 되면 돌궐은 당조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받아들인다.

비록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돌궐이 보여주었던 권위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교역 국가로의 지향, 즉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영역을 확대해 초원과 오아시스를 결합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기초로 장악한 동서 교역로를 바탕으로 중국으로부터 구득한 물자를 유통시키려고 한 방식은 이후 큰 영향을 미쳤다. 돌궐 이후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위구르는 그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했음에도 이와 같은 교역 국가로서의 지향은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위구르는 당조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카라발가순 같은 거대한 교역 도시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또한 10세기 초의 거란(요) 역시 동부 몽골 지역으로부터 초원을 가로지르는 교통로를 장악, 유지하면서 화북과 만주 등지에서 확보한 재화를 동서로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적극 보여주었다. 나아가 13세기 초에 등장한 몽골은 돌궐처럼 서방 진출에 성공해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만이 아니라 주변의 정주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과거 초원을 최초로 통일했던 돌궐을 능가해 정주 지역마저 통제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돋움했다(P595).
아사나가 유목 세계의 투르크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던 노력은 그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된 뒤에도 아시아 내륙에 펼쳐진 거대한 중앙 아시아 지역에 큰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사나는 초원의 중요한 유목민 세력이었던 투르크들을 통합하기 위해 과거 투르크(고차)의 상징으로 북아시아의 중요한 신화소였던 '이리'까지 차용해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전했던 200여 년의 돌궐사 전개 과정을 통해 '투르크'라는 강한 자의식이 초원 유목 세계 내에 형성될 수 있었다. 그 후 누구든 초원의 패자가 되려면 이것을 극복하든가, 아니면 이것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P596).

이 책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장점은 사료로 비단 중국의 한문 문헌만 참고하지 않고 고대 투르크(오르콘룬) 문자로 쓰인 비문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투르크 비문은 19세기 말 유럽 탐험대가 확인한 이후 연구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투르크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이후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돌궐은 이전 유목민들과 달리 6세기 후반 소그드인의 문자를 차용하고 680년 이후에는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였다. 사용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일방적인 한문 자료로의 해석에서 탈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돌궐의 문자는 이후 위구르, 키르기스 등에서도 10세기까지 사용되었고 이후 거란, 서하, 여진, 몽골, 만주 등도 독자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선례를 만들었다. 단점은 (아사나 집단의 세력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내용의 구성과 책의 분량, 시간상의 제약으로 몽골 중심으로 전개된 부분만 다루어져 서돌궐의 범위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을 펴 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고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정주 세력인 중국의 자료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래서 유목 세력의 역사들을 함께 고찰해야 일방적인 해석을 벗어나 빈 공간의 역사를 메우고 왜곡된 역사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당이 고구려에 몇 차례나 공격에 막히고 고구려 이후 대조영이 세력화하기까지 돌궐과 생각보다 많은 관련이 있어 흥미로웠다. 아주 유익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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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 역사를 보면 정주민인 한족과
유목민족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습니다.

청조 멸망 이래 한족의 중원지배가
불과 한 세기 정도 밖에 안된다는 걸
볼 때, 다시 유목민족이 발흥하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0 09:15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도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중화라는 명분 아래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죠. 세력이 끊임없이 교체한 역사를 확인해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7-09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궐이 큰 나라였네요 돌궐이라는 말은 알아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큰 나라라고 해서 그게 오래 이어지지 않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거 생각하면 지금 한국은 언제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 사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오니... 역사에는 남겠지만... 돌궐 역사를 보면 고구려나 발해도 조금 알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0 09:19   좋아요 0 | URL
네. 돌궐이 굉장히 넓은 땅을 소유했더라구요. 이전의 흉노족이 있기는 했지만 땅의 범위가 더 컸다고 하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2세기 정도 이어진 걸 보면 결코 짧은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수나라는 단 38년을 유지했으니까요^^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며 후대에 유목 민족의 하나의 루틴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웟습니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지만 사실 우리 피에는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죠. 기원설도 여러 개가 있고요. 그리고 이만큼 오래 지났는데 설마 하나이기는 하겠습니까! 고구려, 발해, 수, 당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었답니다^^
 

아사나는 비록 부흥 과정에서 아사덕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약화되었던 자신의 권위를 부활시켜 자신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특히 카프간 카간은 대외 확장 정책의 성공을 통해 체제를 안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확보된 백성을 토대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체제를 구축했다. (배움 돌궐 사자와 만나게 했다. 이렇돌궐은 이제 몽골 초원에서 고비를 넘어 남부 초원까지 나아가 이곳의유목민들을 되찾고 흑사성 주변에 오르두(아장)를 설치해 무주를 위협할 만큼 성장한 것이었다. 이 무렵 돌궐의 이런 발전은 과거 동돌궐이630년 붕괴되기 전 일릭 카간이 당조를 상대로 위세를 떨칠 때와 비슷하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발전이 서방의 오아시스를 비롯한 서돌궐 지역에까지 진출해 과거와 같은 거대한 유목제국의 재건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프간 카간이 다시금 몽골 초원을 차지하고 유목 세계의 질서를 이끌게 된 점은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존적-存당조 중심의 기미지배 체제가 해체되면서 돌궐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낼 주체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P439

당시 돌궐에 복속되었던 초원의 유목 부락들은 "서쪽으로 튀르기쉬 - P471

의) 사칼을 멸망시키고 결국 거란과 해마저 정복하는 데 그 부하들을 가혹하게 부려 먹었다. 이미 늙어 점차 정신이 흐려져 포학하게 대하자 부락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배반했다"라고 한 것처럼 원정에 계속 동원하자지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계속된 원정 참여에도 불구하고 카프간카간이 합당한 급부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유목 부락들의 원정 참여는 그만큼의 이익이 생겨야 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패배로 인한 타격이 더욱 심각했기 때문TOE이다. 따라서 이후 서부에서 패배해 시작된 내부의 균열은 카프간 카간을중심으로 한 돌궐 지배 체제의 약화로 이어졌다. - P472

반면 빌게 카간은 카프간 카간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된 당조의 포위 전술과 북벌, 부락민들의 이탈 등으로 인한 위기를 벗어나 비로소 다시 초원의 유목 부락들을 포섭하고, 나아가 남쪽으로 도망갔던 부락들도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부로 진출해 다른 한편으로 오르도스에 있던 소그드 상인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외교적 교섭을 통해 당조와의 관계도 개선했다. 이는 빌게 카간이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 초원의지배자로서 재기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몽골 초원 내부를 안정시키고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던 빌게 카간의 노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 P498

당시 빌게 카간은 당조의 강력한 대외 정책으로 카프간 카간 시기에 비해 많은 백성을 잃고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서 떨어져나간 - P534

주변 세력들로부터 강력한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동생은 동분서주하며 이를 막아내 몽골 초원의 패자로서 자리매김하려고 했다. 그런데이제까지 그를 돕던 킹메이커이자 장인인 빌게 톤유쿠크와 자신을 추대해 카간으로 만들어준 퀼 테긴마저 죽으면서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위협에 대응해야만 했다. 특히 당조가 주변 세력들과 연합해 자신을 포위하고북벌할 가능성을 봉쇄하려면 많은 노력이 절실했다. 따라서 가능하면 전쟁을 벌이지 않기 위해 현종에게 협조적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야 했는데, 제사 시설의 건축은 그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내적으로도 동생의 죽음과 관련해 그동안 별다른 교섭을 하지못하던 당조로부터 엄청난 사절단과 제사 시설을 만들 뛰어난 장인들이파견되었다는 사실 역시 중요했다. 실제로 제사 시설이 중국적이냐 돌궐식이냐의 형식 문제보다 빌게 카간에게는 당조가 파견한 기술자들이자신들을 위해 일했다는 점과 그 결과물로 이제까지 초원에서 볼 수 없었던 ‘랜드마크‘가 건설되어 백성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실제로 확인시켜주는 상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535

이제까지 돌궐이 당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벌인 노력은 주변 세력을 개별적으로 상대하고 지원함으로써 세력 균형을 이루려고 했던 현종의 입장과 배치되었다. 현종은 당조를 도발하지 않겠다며 경제적 교류를강하게 원했던 빌게 카간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실제로 퀼 테긴의 사망으로 다시 기회가 왔음에도 734년에 가서야 비로소 혼인을 받아주었다. 이것만 아니라 여전히 고비 남부에 군사를 배치하고 주변 세력들과 연합해 돌궐에 계속 압박을 가했다. 이를 통해 현종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고, 이것은 이른바 ‘개원의고 평가받는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현종이 결국 빌게 카간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 거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종이 거란에 원정을 떠났던 돌궐을 어떤식으로든 무마하기 위해 화친을 받아주려고 하자 양국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하지만 돌궐에서 빌게 카간이 부의룩 초르(Buyiruq chor로 추정, 매록철梅錄)에게 독살되는 돌발 변수가 발생함에 따라 다시 상황이 급변했다. - P541

이상과 같이 돌궐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마지막 저항 세력이었던 바얀카간(Bayan qaghan으로 추정. 백미가한白眉可汗)을 위구르의 바얀 초르가 죽인다음 그의 수급을 정월에 당조로 보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아사나종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몰락과 함께 쿠틀룩 야브구와의 대결에서 패배해 본거지로 밀려났던 빌게 카간의 카툰 바벡 역시 745년 8월 당조에 투항했다. 즉 인척 씨족인 아사덕마저 초원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것이다. - P562

740년대 중반 붕괴 이후 당조에 내려와 투항하고 돌궐 출신 번장으로서안녹산에게 봉사하던 아사나종례가 일으켰던 부흥 운동이 실패함에 따라돌궐의 지배 집단인 아사나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은 더 이상 역사의 전면 - P575

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내지의 다른 아사나 일족 역시 안녹산과 사명, 그리고 복고회은 등의 연이은 봉기를 거치며 이후에 더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또한 10여 년에 걸친 혼란 속에서 돌궐 외에 당조 내에서 활약하던 투르크계 유목 부락들 대부분이 약화되었으며, 일부는 위구르에 통합되기도 했다. 따라서 유목 세계를포함한 동아시아는 세력 재편 과정을 거치면서 당조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위구르가 몽골 초원의 유일한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쪽에서 당조를 압박하던 토번 역시 국제 질서의 중요한 축의하나로 등장하면서 경쟁을 벌였다. - P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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