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송 시기 역사를 읽으면서 당시와 송사 등의 장르가 있고 당송팔대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나라는 시가 유명했고 송나라 때는 사(시와 비슷하나 조금 다른 운문 문학)가 유명했다. 당시의 대표 주자 '이두李杜'인 이백과 두보, 왕유, 백거이 등이 있다.

이백과 두보만큼은 아니더라도 왕유도 이름이 높았던 모양이다. 놀라운 것은 당시삼백수 등에 보면 이백과 두보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왕유의 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불교시인으로도 유명한데 당나라는 수나라에 이어 불교가 융성했던 배경 때문이다.


왕유(王維)는 젊어서 시명(詩名)이 높았던 인물이다. 같은 시대에 이백과 두보라는 위대한 시인이 있어 그 그늘에 가려졌지만, 같은 나이 또래인 이백보다 빨리 세상에 나왔고, 시의 작풍도 달랐다. 왕유는 오로지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읊었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법도에 맞고 아담한 정취가 그의 시의 특징이다. 왕유는 무측천 성력(聖曆) 2년(699)에 태어났다. 일설에는 2년 뒤인 장안(長安) 원년(701)이라고도 한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이백과 나이가 같은 셈이다. - P235

위수(渭水)는 진(秦)의 성새를 돌아 굽어들고,
황산(黃山)은 예부터 한(漢)의 궁궐을 둘러쳐서 기울었다.
난여는 멀리 선문(仙門)의 수양버들 사이로 나가,
각도(閣道)에 머물러 상원(上苑)의 꽃을 둘러본다.
구름 속에 치솟은 제왕의 성, 두 마리 봉황 같은 궁궐의 문,
비에 젖는 봄 나무 사이로 온 백성의 집이 묻혔구나.
봄기운에 응하여 시의(時宜)의 정령(政令)을 펴려는 것뿐,
물화(物華)를 즐기려는 신유가 아니다.

안사의 난은 시인들을 수렁 속으로 휩쓸어 넣었다. 장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 무렵 이백은 고역사를 능멸했다 하여 장안의 조정에서 추방된 뒤 하남에서 장강 유역을 떠돌고 있었다.

햇빛 비친 향로봉에 자줏빛 안개 피어나고,
멀리 폭포를 바라보니 긴 강을 매단 듯.
내리 쏟아지는 물줄기 삼천 자,
혹시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

마침 이곳에서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황제에 충성하는 의병을 일으켰다. 이린은 현종의 아들로 어머니 곽씨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숙종이 어렸을 때부터 돌보아 주었다. 영왕은 이 때 이백을 맞이했다. 이백은 안녹산을 토벌하는 의병에 가담할 생각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자신이 속한 영왕군이 황제의 명령군을 어긴 반란군이 되었다. 황제가 된 숙종은 단호한 조치로 토벌군을 파견했다. 이백도 이 때 역적의 참모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이백을 아끼는 이들이 구명운동을 쳘쳐 겨우 죽음만은 면하고 서남(西南)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백은 759년 은사령이 내려져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안녹산과 안경서는 죽었으나 사사명이 대연제국 황제를 칭하고 있었고 그것을 토벌하기 위해 이광필이 파견되었다. 이백은 60세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참가하려고 길을 나섰다 병에 걸려 사망한다.

장안에서 급사중(給事中)으로 있던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해 안녹산군에게 사로잡혔다. 현종의 장안 탈출은 비밀리에 이루어져서 양귀비와 황족, 고역사 같은 측근만이 그를 따랐다. 출근 시간에 백관이 궁중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황제의 출분(出奔)을 알고 허둥댔다. - P274


수많은 집 애타는 마음, 들판의 안개로 피어오르고,
백관들 언제나 다시 천자를 뵈올꼬?
가을 홰나무 잎은 떨어져서 빈 궁전 뜰 적막한데,
응벽(凝碧) 연못가에 풍악 소리 높아라.

장안 평강방(平康放) 보리사에 갇혀 있던 왕유는 친구인 배적에게 안녹산이 낙양의 응벽지에서 음악회를 열었을 때 참가한 사람들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불리게 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안녹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에서 누구나 불렸다고 한다.

두보는 안사의 난을 피해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그 곳에서 <춘망春望>이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나라는 망했으나 산하는 남아서,
성 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구나.
시절에 감동하여 꽃에도 눈물을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 소리에도 마음 놀라네.
봉화는 석 달이나 이어지고,
집의 소식은 만금보다 값지도다.
흰 머리를 긁으니 더욱 짧아져,
다 모은들 비녀를 이기지 못할 것 같구나.


이백(701~762)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으나 25세 강남을 유람했고 현종 때가 되어서야 한림학사의 직위를 얻게 되었다. 벼슬에 올랐다가도 끊임없이 정쟁에 휘말려 유람 생활을 반복했다.

<월하독작月下獨酌>

꽃떨기 사이 술 한 병 놓고,
홀로 마시노니 짝할 사람이 없구나.
잔 들고 밝은 달을 마주하니,
그림자 합하여 세 사람이 되었구나.
달이야 술 마실 줄 모른다 쳐도,
그림자야 한갓 내 모습만 따라 하누나.
잠시나마 달을 짝하고 그림자를 거느리니,
즐거울 때 모름지기 봄맛을 느껴야지.
내 노래에 달은 배회하고
나의 춤에 그림자도 산란하다.
깨어서는 함께 어울려 기뻐하고,
취한 뒤엔 각각 제 갈 길 가겠지.
영원히 망정忘情의 친구가 되어,
저 아득한 은하수에서 서로 만나길.

'월하독작'은 이백이 장안에 있을 때 아무런 실권이 없는 한림공봉이라는 벼슬을 얻자 만족하지 못하고 읇은 시라 한다. 이백은 술로도 유명하다. 봄 밤 달 아래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의 시는 그림을 그리듯 아름답다.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시인이다. 그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자탄하는 삶을 살았다. 숙종 대 좌습유의 벼슬을 얻게 되었으나 직언으로 숙종의 미움을 받아 화주 사공참군으로 밀려났다. 그는 당시 사회상은 물론 백성의 고통을 잘 표현한 시풍으로 이름이 높았다.

<망악望岳>


태산은 무릇 그 어떠한고?
제나라 노나라 지역으로 푸르게 끝없이 이어졌구나.
조화옹께서 신기한 것, 빼어난 것을 모두 모아 놓았고,
밝은 곳, 어두운 모습 밤낮처럼 분명하게 나뉘었네.
시원하게 트인 풍경에 층층 구름 피어오르고,
눈을 크게 뜨니 돌아오는 새 시야에 들어오누나.
내 언젠가 저 꼭대기에 올라,
그 아래 작은 산들 한번 훑어보게 되겠지.

'망악'은 개원 23년(735) 두보가 낙양에서 진사 시험에 낙방하고 조제(하남, 하북, 산동 지역) 일대를 유람하다가 태산에 이르러 지은 것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뛰어난 문장가 여덟 명을 가리키는 말로 당나라 문장가로서는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이 있고 송나라 문장가로서는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이 있다.

수나라 때 흥기한 불교는 당대에 와서 흥성한다. 그러나 송명 도학파 즉 요즘 말하는 신유학도 이때 싹텄다. 불교가 흥성하던 곳에 공자의 학문을 따르고 계승한 학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놀랍다.


송명 도학파의 선구적 인물은 한유(韓愈, 768-824)다. 『신당서』의 그의 전기는 말한다.
수나라까지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여 성인의 도[유학]은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고, 유자(儒者)들도 국가의 이념을 괴이하고 귀신적인 것에 의탁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한유만은 홀로 탄식하여 성인의 사상을 인증하며 온 세상의 미혹과 싸워 모함과 비웃음을 받았지만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분투했다. 처음에는 신뢰받지 못했으나 마침내 당시에 크게 유명해졌다.
한유는 맹자를 몹시 추존하여 공자의 정통 전수자로 여겼고 이에 『맹자』는 송명 도학파의 중요한 근거 전적이 되었다. 한유는 "도(道)" 자를 제시했고 도통설(道統說)을 만들었다. 이 설은 원래 맹자가 이미 대충 언급했지만 한유가 제창한 이후 송명 도학자들이 모두 견지했고, 도학도 송명 신유학의 새 이름이 되었다. - 중국철학사(하) P417~422



한유는 최고의 고문가이기도 했다. 어릴 때 고아로 형수에 의탁하여 성장했다고 한다. 정원 8년 진사에 올라 이부시랑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 불교를 반대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폄직되기도 했으며 만년에 국자좨주國子祭主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시와 문장은 웅장한 기세를 즐겨 썼으며 유가적 사유에 밝았. 

<팔월십오야증장공조八月十五贈張功曹>
엷고 섬세한 구름 사방에 말아오니 은하수가 사라지고,
맑은 바람 불어오니 빈 하늘에 달빛이 물결처럼 퍼져 가네.
모래가 평평하니 강물도 소리를 죽이고 그림자도 끊겼는데
한 잔 술 권하노니 그대는 의당 노래라도 불러야지.
그대 노래 소리는 시고 가사 또한 괴롭구려,
끝까지 다 듣지 못한 채 눈물이 비 오듯.
"동정호는 하늘로 이어졌고 구의산은 높이 솟아,
교룡이 출몰하고 성성이와 날다람쥐 울부짖네.
구사일생 고생하여 임지에 다다르니,
깊숙한 거처는 적막하여 마치 도망쳐 숨을 곳인 듯.
침상 아래는 뱀이 무섭고 먹을 밥은 독약이 두렵도다.
바다 기운 습기와 벌레에 비린 냄새 풍겨나네.
사면령이 내렸다고 어제 주부州府의 문에 큰북이 울려으니,
새로 등극하신 황제께서 기와 고요 같은 어진 신하 임용하리라.
사면의 문서는 하루에도 천 리 길을 달려왔으니.
대벽의 큰 죄인도 죽음에서 제외되고,
좌천을 당한 자도 모두 유배지에서 되돌아가,
흠을 씻고 때를 벗은 채 조정의 깨끗한 반열에 서게 되리.
그러나 주부에서 올린 우리 명단 관찰사가 억제하여,
불우한 우리 신세 단지 강릉으로 이송될 뿐이라네.
우리 받은 판사 벼슬이 너무 낮다 말도 못한 채,
먼지 속에 태장이나 면하면 그나마 다행.
함께 귀양 왔던 동료들은 모두 수도로 돌아가는데,
수도 장안 가는 길이 험난하여 따라잡기 어렵구나."
그대 그만 노래를 쉬고 내 노래를 들어다오.
지금 부를 내 노래는 그대와 크게 다르도다.
일 년 중 밝은 달은 오늘밤이 으뜸이라.
사람의 삶이란 명에 달린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로다.
술 있으니 마시지 않고 저 밝은 달을 어이하리!

덕종 정원 19년(803) 한유가 장서와 함께 남쪽으로 유배되었다가 21년 순종이 등극하자 그해 두 사람 모두 사면을 받아 침주(지금의 호남)에 이르러 명을 기다렸다. 1년 만에 순종이 죽어 헌종이 황제로 등극하여 대사면령을 내렸으나 호남 관찰사 양빙楊憑의 방해로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릉(지금의 호북 강릉)으로 이송되어 한유는 법조참군, 장서는 공조참군이 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현재 한유가 남긴 문장을 읽고 있는데 그는 '도'를 무척 중요시한다 느낀다. 그는 당시 문장을 꾸미는 데만 집중한 문장가들을 비판했다. 글에는 글쓴이의 정신, 도와 덕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장의 기술만을 중요시했던 이들을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과연 신유학의 대표 주자였다라는 생각이 든다.
한유는 이백과 두보가 살았던 시대보다는 훨씬 뒷 세대이다. 그들이 동시에 활동했으면 어땠을까. 한유가 안사의 난을 겪었다면 아예 두문불출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익은 한유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한유는 그에게 '글을 짓는 일'에 대해서 편지를 보냈다(801년).

氣는 水也요 言은 浮物也니 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니라 氣之與言도 猶是也하야 氣盛則言之短長與聲之高下者皆宜니라 雖如是라도 其敢自謂幾於成乎아 雖幾於成이라도 其用於人也奚取焉이리오 雖然이나 待用於人者는 其肖於器邪아 用與舍屬諸人이니라 君子則不然하야 處心有道하고 行己有方하야 用則施諸人하고 舍則傳諸其徒하고 垂諸文而爲後世法이니라 如是者인댄 其亦足樂乎아 無足樂也아

기는 물이요. 말은 (물 위에 ) 떠 있는 물체니 물이 많으면 그 크고 작음에 따라 뜨기가 정해진다. 말도 기와 같은 것이다. 기가 성하면 말의 길고 짧음이 소리의 높고 낮음도 모두 그에 따른다. 그러나 기가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쓰이는 것이 어찌 그에 따르겠는가. 사람이 쓰이기를 기다리는 것은 기물을 닮았다. 쓰고 버려지는 것은 사람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군자면 마음이 처한 곳에 도가 있고 자신의 행동에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쓰일 때는 모든 이들에게 베풀고 버려지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전하면 (결국) 문장에 드리워져서 후세의 법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데 만족하고 즐길만하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 그러니까 (마음에 도를 닦아) 군자가 된다고 해도 출세길에 올라 누구에게 쓰이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니 쓰임을 받으면 백성들에게 베풀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버려진다면 후학을 양성하거나 자기 제자들을 키우거나 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글을 짓는 일은 결국 공부를 하는 것에도 적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 정도 실력인데 왜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지?'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고 누구에게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쓰임을 받기 전 준비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끝내 알아주는 이가 없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당나라 때 과거 제도가 시행되기는 했지만 송나라 때 와서야 과거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벼슬길에 제약이 많았다. 비루한 출신이었던 한유는 더군다나 출세에 오르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벼슬길에 올랐으나 말년에 가서야 고위직에 올랐고 그 전까지는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그래서 그는 편지로 주변 이들에게 청탁을 하는 류의 글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한 것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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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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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내 품사를 재배치하고 더 오늘날에 맞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지금의 독자가 읽기에는 더 수월해졌으나 길이가 다소 길어졌다는 느낌도 받는다. 노래하는 맛을 살린다면 이전 번역이 나을 듯도 보이는데 이는 독자의 선택이 될 것같다. 역자의 고민과 노고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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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1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844쪽 의 책을 읽으셨네요! 거리의화가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1 09:53   좋아요 1 | URL
ㅋㅋ 다락방님 오해십니다. 펀딩책이라 오늘까지 100자평 남겨야 해서 부랴부랴. 다 못 읽었어요 걱정마십쇼!ㅋㅋ

페넬로페 2023-07-1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어떨지 넘 궁금해요^^

거리의화가 2023-07-11 10:14   좋아요 1 | URL
기존 천병희 선생님이 하신 번역과 한 단락 정도 비교해봤는데요. 단어를 ‘분노->노여움‘ 이런 식으로 바꾸고 문장 내 배치를 더 이해하기 쉽게 변경한 듯 보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해는 더 잘 되는 것 같았어요. 물론 책을 전체를 다 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책읽는나무 2023-07-11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다 읽으신 줄 알았어요^^
지금 읽고 있는 <갈대 속의 영원>에 일리아스랑 오디세이아랑 뻑하면 제목이 나와요.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을 붙잡았을 때 장식장의 값비싼 보물과 독특한 보물상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보물상자에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를 보관하라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나도 언젠간 일리아스를 꼭 읽어 보리라! 생각만...^^;;;

거리의화가 2023-07-11 10:29   좋아요 1 | URL
ㅋㅋㅋ 펀딩 적립금 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3주 내 읽고 100자평을 써야 하는데 애시당초 불가능한 책인데다가 지금 다른 책 읽고 있어서 언제 읽을지 기약이 없었답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두 권 모두 예전에 천병희 선생님 역으로 완독했었어요.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또 멋진 문장들이 많답니다. 언젠가 나무님도 접해보셔요!

책읽는나무 2023-07-11 11:13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저도 북펀딩했던 책 100자평 썼어야 했는데....아!!!!!
날짜 지났나 봅니다.
6월말 경에 받았던 알림은 이미 지나가버려 찾을 수가 없군요!ㅜㅜ
저도 오늘이라도 얼른 써서 올려야겠어요^^
이젠 북펀딩 100자 평도 다 놓치고 있네요.^^;;

전 일리아스 예전 천병희 샘꺼 가지고 있어요.
옛날에 좀 읽다가 너무 등장인물이 많아서 헷갈려서 중간 포기했었네요.ㅜㅜ
다시 재도전 할 수 있을지 좀 두렵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1 11:23   좋아요 1 | URL
펀딩한 책 3주 내 못 읽을 거면 책 받은 즉시 올리는 게 좋겠더라구요. 잊어버리면 적립금 날아가는 사태가ㅠㅠ
일리아스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것 이미 가지고 계셨네요. 등장인물이 많기는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좀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판본은 좀 더 현대적으로 번역된 느낌이었어요. 나무님이 읽기에 좀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2023-07-12 0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사람이 읽기에 좋게 번역한 거군요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는 읽어봐야겠다 생각한 적이 없네요 가장 오래된 책, 이야기니 읽어보면 좋을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2 11:02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원전은 역자에 따라 늬앙스가 다르게 번역되어서 보는 맛이 있습니다. 저도 전문을 다 읽은 것은 아니여서 어떨지 궁금하네요.
 

지난 토요일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요즘 서재에서 핫한 사랑을 받고 있는 '다락방 문진'을 얻기 위함에 부랴부랴 쓸어담은 책이었다. 사실 행사용 책들이 애매하고 고만고만한 책이여서 뭘 사야 하나 고민이 되었는데 <파묻힌 여성>을 발견하는 순간 '야호!' 했다. 어차피 사야할 것 미리 사자 하는 마음으로 담았다. 
그리고 <중국한시기행>은 EBS 여행 테마 방송을 본 사람은 혹시나 알 수도 있는데 꽤나 유명하신 분이다. 방송에 나와서 다짜고짜 한시를 노래 부르듯 읊는데 '이 사람 뭐지?' 하는 마음이 들었더랬다(내가 볼 땐 풍경이 멋져서 혹했던 것인 것 같기도 함). 덕분에 이백이나 두보 등의 시인이 궁금해졌고 저렇게 창을 부르듯 한시를 읋을수도 있는 것이구나 신기했다. 1권은 진작 사두었고 얼마 전 2권이 나왔다길래 함께 주문했다.
책도 책이지만 무엇보다 문진이 마음에 쏙 든다.


그리고 3권의 책은 도서관에서 데려온 책이다. 바야흐로 금요일 퇴근길이었고 백팩에는 책이 한가득 있어서 대출한 책들이 다 들어갈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힘들게 들어가긴 했다(출근길에 1권의 책을 빼서 가능했던 듯).

<조용한 미국인>은 잠자냥님 서재에서 리뷰를 보고 전에 사둔 원서가 생각났다. 원서를 읽으려면 번역서가 필요한데 소설이라 막상 사기에는 부담스러워 결국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냉전' 시기를 잘 그리고 있다고 한다.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도 희망도서다. 루쉰의 본처인 '주안'에 대한 평전인데 루쉰의 아내로서만 인식되어 가려져 있었던 그녀의 삶이 자못 궁금했다. 루쉰의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본처가 있다는 것은 내연녀도 있었다는 이야기고. 아무튼 루쉰의 작품이야 유명하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자서전이 아닌 평전으로 나왔다는 게 또 다른 포인트다.

<열린 제국>은 중국사 읽기로 읽으려고 진작부터 찜해두었지만 이미 품절된 책이고 중고가도 싸지 않아서 망설이던 책이다. 우리 지역 도서관에는 없지만 상호대차로 가능해서 신청해두었었다. 근데 나중에 신청해도 되었을텐데 괜히 이번에 신청했나 싶다. 이 책 말고도 지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한 <중국의 역사 : 송대>도 있으니 말이다. 4권을 이번에 다 읽을 수는 없을테니 아무래도 이 중에서 <열린 제국>은 못 읽고 반납 들어갈 듯 싶다. 3권이라도 모두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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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10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잉 루쉰의 유물 궁금하네요! 그러고 보니 왜 루쉰 아내의 존재를 생각도 못했을까요?! 음 내연녀까지 있는데 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7-10 17:25   좋아요 1 | URL
그쵸?ㅎㅎ 진짜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이렇게 평전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서 저자에게 일단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청아 2023-07-10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궁금하네요! 책 정보 들어가보니 루쉰이 여러집을 전전했나보군요?
일단 중국 소설도 읽어야하는데 아유..바쁘네요ㅎㅎㅎ

거리의화가 2023-07-10 17:58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러니까요. 저도 루쉰 소설 제대로 읽은 것도 없는데 저 책부터 읽게 되버렸네요. 이참에 루쉰 작품 단편소설도 읽어보면 좋을텐데 여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새파랑 2023-07-10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은 많이 읽으시는 만큼 많이사고 빌리시는군요 ㅋ 너무나 당연합니다. 역시 독서 천재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3-07-11 08:47   좋아요 0 | URL
ㅎㅎ 얼마전에 cd를 사는 바람에 제법 큰 돈을 쓴지라 이번에는 특히 좀 자제했어요^^; 사기 애매한 책들은 주로 빌려서 보려고 합니다.

얄라알라 2023-07-10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6권 중에 한 권이라도,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식후 입가심 달콤이용으로 삼을 책이 하나도 없어보여요^^
저는 어려운 책이 1이라면 가벼운 책 5 비율로 평소 읽는 것 같은데, 화가님은 전문 몰입 독서!! 아무쪼록 여름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독서 함께 해요^ ^

젠더고고학은 꼭 읽고 싶었는데 제목만 기억하고 있네요
화가님의 리뷰로 먼저 만나게 될 예감~^^

거리의화가 2023-07-11 08: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한시기행은 가벼운 마음으로 구매한 것인데요^^;
요즘 습해서 가만히 있어도 축축 처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독서하는 즐거움으로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젠더고고학 책은 11월에 여성주의 함께읽기 책이라 그 무렵 글로 만나게 되실 거예요!ㅎㅎㅎ

희선 2023-07-11 0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 역사와 중국 작가 루쉰 부인 이야기에 한시까지... 루쉰 책은 제목만 조금 알고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길 이야기 한 거 어디선가 보고...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1 08:50   좋아요 1 | URL
한시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샀어요. 저 책은 한시 책이기도 하지만 여행기기도 해서 좋습니다^^
중국에 가보고 싶은데 남편에게 혼자 가겠다고 했다가 한소리 들었어요. 위험한 동네 어쩌구저쩌구... 이런 여행기로 대신하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자목련 2023-07-1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의 핵심 발견은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군요. 화가 님의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2 11:03   좋아요 0 | URL
네. 자목련님도 그 책에 관심이 가셨군요^^ 여러 분들의 부응에 힘입어 이 책을 먼저 읽어봐야겠습니다ㅎㅎ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 수.당.오대십국.북송 : 중원의 황금시대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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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 책을 봤다는 것을 북플의 기록을 보고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읽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뒷부분인 송나라 역사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용 무협 소설 읽는다고 배경이 되는 역사를 훓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덕분에 지금까지도 당시의 굵직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목적을 가지고 읽은 책은 기억에 남는 법인가보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권은 우리에게 익숙한 수, 당, 그리고 짧은 분열기였던 오대십국, 북송 시기까지를 다룬다.

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 왕조가 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 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 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 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 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건의 난부터 시작된 중국의 분열기를 넘어 남북조를 통일한 것은 수나라 왕조였다. 수나라 시조인 문제는 북주의 중신인 양견이었다. 북주는 선비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였으나 수나라는 한족 왕조임을 내세웠다. 수나라는 지방 행정기구를 정리하여 기존의 주군현 제도에서 군을 폐지하고 주와 현으로만 구성하는 대신, 지방관이 임명하던 지방 속리를 중앙 임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드디어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하지만 수나라는 햇수로 38년(581~618)밖에 이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후계자 문제, 고구려 원정, 수도 건설과 무리한 대운하 사업, 2대 황제인 양제의 사치 때문이었다.
당나라 고조인 이연은 그다지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결단력도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뒤이은 태종이 형인 이건성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컸을 것이다. 거병했을 때 이연은 태원 유수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을 반란군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했다. 수나라 말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도적떼들이 황제나 천자를 자칭하며 일어났으나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은 고조였다. 태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과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책사인 위징은 이밀의 부하였는데 이밀은 수나라 말기 자신의 아버지인 이연과 더불어 경쟁했던 상대였다. 게다가 위징은 황태자로 장자인 이건성을 밀었는데도 태종은 그를 국사로 임명한다.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안녹산은 재치 있고 붙임성이 좋았던 모양이다. 현종과 양귀비 모두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안녹산은 거란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양귀비의 일가라는 사실만으로 출세한) 양국충과 손잡고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이임보 배척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이임보가 죽자 안녹산과 양국충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양국충은 수도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반면 안녹산은 외지에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 간했고 불리함을 느낀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다. 그 때 안녹산은 3군 절도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이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 이듬해 마침내 낙양을 함락시켰으나 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현종은 이 때 촉으로 피신을 갔고 왕위를 이어받은 숙종은 위구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의 구원병을 모아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겨우 수복했다.
당은 시 문학이 활발했다. 이백, 두보, 왕유, 백거이 등 지금도 당시(唐詩)의 대명사가 된 이들이 이 시기 차례로 등장했다. 성당시는 당의 국력이 번성했을 때의 시를 말한다. 이백은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성당시인이었다. 그는 당의 국력이 약해질 무렵 죽었고 당 말기가 되면 혼란스러운 사회가 된 만큼 사회성이 강한 풍조를 담은 두보나 백거이 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 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 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할 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 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 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송나라는 당에서 문제가 되었던 절도사의 힘을 약화시켰고 과거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였다. 당나라 때도 과거 제도를 활용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비율로 따지면 소수였다. 과거제는 진사과와 제과로 나뉘었는데 진사과는 시문을 짓거나 논술을 하거나 고전을 일부 발췌하여 적어내야 하는 시험이었다면 제과는 문장을 베끼는 종류의 시험이었다. 진사과는 주로 고급 관리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고 제과는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주로 차지했다. 강남 지방은 예로부터 문인의 기풍이 높았고 화북 지방은 무인 기질이 넘쳤다(남북조 시기까지 거슬러 감). 송나라 초기에는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당나라 말기 권력을 잡았던 세력들)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기가 되면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는 과거제와도 연결되어서 진사과에 지원한 이들이 강남 지방의 문사들로 채워졌다. 화북 관료와 강남 관료 간의 경쟁은 북송 시기 내내 화북과 강남 인력 사이에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 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 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 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P304

송나라는 대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관료사회였던 송은 갈수록 국가 방비에는 허술해진다. 내부적으로도 주전파보다는 주화파 정치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요와 강화 조약을 맺고 대하(중국에서는 서하라고 부름)와도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였으나 그만큼 국방에 투자하지 않았던 것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송나라는 세력이 커진 금에게 결국 수도를 뺏기고 남으로 내려가야했다. 이때까지가 북송 왕조다.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 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 송은 형, 요는 동생의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2~46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 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 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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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시대적 변화를 단지 왕조교체에서 찾았던 종래의 십팔사조사관에 대해, 나이토의 설은 시대상의 변화를 지적하고, 당·송 양 시대 사이에 성격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 중국사에서 당송변혁의 중요성을 학계에 인식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그의 설은 시대라는 그 자체를 완결된 개체로 보고 주로 문화사 중심으로 파악한 것으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필연적 발전법칙에 의해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토의 학설은 교토 대학을 주무대로 삼아 많은 후계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미야자키 이치업적이 주목할 만하다. 미야자키는 나이토 학설을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보강하고, 나아가 중국사 이외의 아시아 여러 국가(이슬람과 인도를 포함)의 시대구분까지 고려하여 총괄적인 시대구분 속에서 송대의 시대성을 파악했다.
예를 들면 1950년 출판된 동양적 근세는 당말 변혁을 중세사회로부터 근세사회로의 변혁이라는 사회경제적 의미로 파악하면서송대를 유럽사의 르네상스기에 대비시켰다.
한편 도쿄 대학에서는 가토 시게시가 중국경제사의 개척자로서 견고하고 치밀한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는데, 특히 당송시대의사회경제사 연구에 진력하였다. 가토는 시대구분론에 대해서는 극히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중국경제사개설支那經濟史槪說』(1944)에서 다음 - P17

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국진한은 물론 남북조 시대까지는 소작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대관호족大官豪族의 대토지를 경작한 것은 주로 노복奴僕이었다. 균전법의 붕괴를 전후하여 농경에 노복을 쓰는 것이 쇠퇴하고, 소작인을쓰는 것이 유행했다. 대지주가 소유한 대토지, 즉 장원의 토지를 경작한것은 주로 소작인[전호佃戶]이었다. · 송대에는 노복을 경작에 쓰는일이 더욱 쇠퇴하고 소작제도가 점점 발달했다. 북송시대에 전국의자작농과 소작인의 비율은 대략 2대 1 정도 되었을 것이다."
AP즉 노예노동시대에서 지주전호제로 이행한 시기를 당말오대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가토 역시 당과 송 사이에 변혁이 있었다고 본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에다 나오노리前田典의 『동아시아에서의 고대의 종말』(1948)이 출판된 이래 중국사 시대구분을 둘러싼 논의는 더욱활발해졌다. 마에다의 설은 동아시아 역사를 일체로 파악하면서,
여러 민족의 역사발전에 대한 이해는 상호간의 연관성을 중시해야 하며, 중국사에서 고대사회의 종말은 당말오대 즉 10세기 전후였다고보았다. 이 마에다 설을 계기로 해서 이후 점차 중국사를 동아시아사의일환으로 보고 시대구분을 하려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 P18

조보는 태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961년(건륭 2)절도사에 대한 대책을 바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진鎭(절도사)이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황제의 힘이약하고 신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들을 다스리고자 한다면달리 뾰족한 방책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들의전곡穀을 제어하고, 그들의 정병을 거두어들이면 천하는 자연히안정될 것입니다." - P28

송 초의 과거에는 제과科(경의과라고도 함)가 있었다. 진사과는 시부와 논 및 첩경 묵의로 시험을 쳤고, 제과는 경서經書·예서 사서.
등의 첩서 뮥의로 시험을 보았다.
시부란 시와 부시의 일종)를 짓는 것이고, 논은 논문이다. 첩경은 경서와 예서, 사서 등의 본문에서 앞뒤를 가린 채 한 줄만 드러내고 그한 줄 중에서 또 석 자를 감추어 감춘 글자를 맞추는 것이다. 묵의는경서·예서·사서의 작자 이름을 묻거나 이들 책에서 한 어귀를 뽑아그 문장 다음에 오는 문장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즉 시부 및 논은직접 작문을 하는 시험이고, 첩경과 묵의는 일종의 암기시험이다. - P26

인종 때의 진사과는 종래의 시부·논·첩경·묵의 외에 책策이 더해졌다. 책은 시무時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것이다. - P59

북송에서는 처음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에는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남송의 육유陸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천성(인종의 첫 번째 연호) 이전에 인재를 뽑아 등용할 때에는 대부분북인을 뽑았는데, 구준이 이를 담당하였다. 그로 인해 남방의 사대부들이 울적해하였다. 인종이 그 폐해를 알고 널리 인재를 뽑아남북 간의 차이를 없앴다. 그리하여 범중엄이 오(강서江·소주蘇州)에서, 구양수가 초楚(강서江西·길주吉州)에서, 채양蔡襄이 민園(복건福建·홍화興化)에서, 두연杜이 회계會稽(절강浙江·소흥紹興)에서, 여정 이 영남(광동廣東·광주廣州)에서 일어나 한 시대의 명신이 되니 성송사람을 얻는데 ‘뛰어나다고 칭찬받았다. 그런데 소성(철종 친정 후의 연호)·숭녕(휘종의 - P63

연호) 연간에는 남인을 뽑는 일이 더욱 많아져 북방의 사대부가 다시울적해지는 슬픔이 있었다. 그래서 진관(휘종조의 명신, 복건·남검주사람이 홀로 그 폐해를 보고는 조정이 남인을 중시하고 북인을 업신여기면 국가 분열의 싹이 튼다고 말했다. 이는 천하의 지당한 지적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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