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베트남 전쟁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았다. 베트남에서의 철수는 당연히 미국과 함께 이루어진 줄 알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 말미에 하노이를 빠져나오지 못한 한국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4년 jtbc에서 방영을 한 다큐멘터리 <사이공 1975>로 총 4부작으로 방영이 되었다(다행히 현재 유튜브에 풀 영상이 올라와 있어서 모두 볼 수 있었다). 10년 전 영상이니 보신 분들이 있으실 거라 생각한다(나는 이걸 이제야 봤다). 


https://youtu.be/GCjjKkQQLrk

https://youtu.be/iD7CCrTWjjo

https://youtu.be/opLY9CgYJEA

https://youtu.be/As1wdL8VqzI



때는 1975년 하노이가 호치민이 되던 무렵 베트남에 남아 있던 한국인들의 이야기다. 당시 베트남에는 2만 명의 교민이 있었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남베트남에 거주하거나 불법체류하고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한국군을 대상으로 나이트클럽이나 바를 운영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사업가와 한국 회사, 그리고 외국계 회사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베트남에 재산이 있는 상태에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주베트남 미국대사가 사이공을 떠나기 하루전까지도 남베트남의 패망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사이공에 남아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P282~283).

하지만 미국은 오랜 베트남 전쟁의 결과 지쳐 있었고 베트남에 더 이상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탈출 작전에 실패하여 한국 민간인들은 6개월여를 그곳에서 고생해야 했고 한국 대사관 공관원 3명은 현지 형무소에 끌려가 1981년까지 장장 5년을 억류되어 있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다. 


물론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최우방국이었던 한국을 미국이 배신했다 생각할 만했을 것 같다.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이 딱이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 4부의 한국인 대사관 직원 3명의 이야기는 착잡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게 하였다. 여기에는 북한과 북베트남의 이해 관계가 있었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와의 전쟁으로 충돌이 발생하면서 지연되었던 측면이 있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7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몰라 보게 달라져 있었다는 대사관 직원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자연스레 떠오른 책은 <구술로 본 한국현대사와 군>이다. 


이 책은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단이 2009년부터 10년 간 한국군 인사들의 구술 채록을 바탕으로 한 연구 및 조사를 정리한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한국군과 관련된 역사를 군의 공식 자료 이외에 조사, 정리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3부는 특히 베트남 전쟁을 통째로 다루고 있다. 


베트남전에서 군의 지휘권은 한국군이, 작전권은 미군이 가졌다. 이는 한국군의 군수물자의 보급과 수당 등을 사실상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애초부터 한미동맹 관계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때 한진, 현대 등의 한국기업은 베트남에 진출하여 막대한 이윤을 끌어 모았다. 한국군은 구호사업, 건설사업, 의료사업, 농경지원, 자조사업 등에 주력하여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미군에게 지급받아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긍정적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도난사건, 교통사고, 살인, 성범죄 등의 사건에 연루되며 베트남의 민간사회와 충돌했다.

 

전투병 파병과 브라운각서 체결을 전후로 해서 한국기업들은 베트남으로 새롭게 진출하거나, 기존의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기업의 활동 폭이 넓어진 배경은 무엇보다 한국군-특히 전투부대-의 존재 그 자체였다. 군과 기업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시기 이전 시기와 비교해본다면, 1965년 이후 군과 기업의 관계는 운명공동체와 유사한 형태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군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고 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P246).




베트남 전쟁은 1965년 한일 수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미국의 입김, 북한과의 충돌 등 안보 면에서 일본과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물론 경제재건과 성장을 위한 이유도 있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1964년 베트남에 의료부대와 태권도부대를, 1965년부터는 전투부대를 파병하며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해외 파병으로 매년 5만 명 정도의 전투병이 나갔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외교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는 한미관계를 좀 더 강고하게 하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미군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스스로 방위를 지키지 못해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한국이 다른 나라의 방위를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시될 수 있었으며, 결론적으로 한미동맹 강화라는 목표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P406~407).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를 읽을수록 복잡한 생각이 든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한국이 얻은 것은 컸지만 어쨌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한국군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도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전쟁이 오래도록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씁쓸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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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변증법 -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하여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지음, 김민예숙.유숙열 옮김 / 꾸리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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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은 한계가 뚜렷했다. 계급과 위계(권력)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기원은 설명하였는지 모르지만 가부장제에 따른 성의 불평등까지 주목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 구조 안에서 아이는 돌봄의 대상이 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밥과 빨래를 해야 하는(가사 도우미를 쓴다면 그 여성이 존재하는 가정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등의 문제)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은 애초부터 실패할 운명을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파이어스톤이 나아간 곳은 성적 해방의 길이다.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권리 동등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성적 계급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세계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생식조절에 대한 점유, 인공생식에 대한 주장은 현재로서도 놀라워 보이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자연스럽게 성의 불평등은 인종 불평등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파이어스톤은 인종차별주의가 권력의 분배에 따른 불평등에서 기인했다고 이야기한다. 성별에 따른 계급이 존재하듯 인종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종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가 확장된 것이다.


앞선 성적 해방을 제외하고 특히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아동기를 없애자'의 4장과 6장의 '사랑', 7장의 '로맨스 문화'였다. 


'아동기를 없애자'는 주장은 제목만 봤을 때는 와 닿지 않았었다. 페미니즘과 아동기를 없애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동기라는 명칭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한다. 중세까지만 해도 그런 구분 자체가 없었다고. 이렇게 근대에 들어서 생긴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등의 구분은 억압을 만들어내는 기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했던 적이 많았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 시기엔 뭘 해야 하고 이 시기엔 뭘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강요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심지어 이것이 계급과 맞물리니 피곤해진다. 사교육은 부모의 경제력과 연결되고 아이들은 또 그것에 맞춰 힘겹게 살아가야 한다(거기에 끼고 싶어도 낄 수 없는 아이들은 불평등한 세상과 목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제도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유지하는 핵심 산물이다. 


여성은 남성이 원하는 모델로 정형화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공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집착하고 화장으로 얼굴을 덧칠하며 그도 안되면 성형까지 가는 것이 아닐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것이 자기 만족이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그런가요?"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까 신경을 쓰는 게 아닌가. 나이가 들고 운동을 안 하니 옆구리에 살이 삐져 나오고 뱃살이 울룩불룩해지는 것을 나도 모르게 신경을 쓰게 된다. "살 좀 빼라!"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리는 것 같고 맨 얼굴로 나가는 게 자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결국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는데도 이런 구속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 한심해진다. 이전에 나오미 울프의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과 구속에서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마르크스/엥겔스 관련 책과 스노우의 <두 문화>를 읽어보자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러지는 못하고 밑줄만 많이 긋고 내 생각을 책에 간단히 적는 것으로 이번에도 대신하는 것 같다. 

페미니즘 책은 읽어도 여전히 나의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진다. 아무튼 파이어스톤의 핵심 저서를 초독이지만 읽어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 방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회주의 선두주자들을 능가했다. - P15

엥겔스는 때때로 역사적 변증법의 성적 하부구조 sexual substratum 어렴풋이 인식했으나 섹슈얼리티를 오직 경제적 여과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면서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 평가할 수 없었다. 엥겔스는 본래의 노동분업은 자녀양육의 목적을 위하여 남녀 간에 존재했으며, 가족 안에서 남편은 소유자이며 아내는 생산수단이고 자녀는 노동이라는 것, 인간 종족의 생식 reproduction은 생산수단과 구별되는 중요한 경제체계라고 보았다. - P17

학교(전문화된 기술만을 위한)는 나이와 상관없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배움을 전했다. 도제제도는 어른에게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열려 있었다. 14세기 이후, 부르주아지와 경험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이 상황은 서서히 진전하기 시작했다. 아동기라는 개념이 현대 가족의 부속물로 발달된 것이다. 아이들과 아동기를 묘사하는 용어들이 만들어졌고(예를 들어 불어로 ‘아기 lebebé‘), 그리고 특별히 아이들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들이 만들어졌다. [children에 ‘성질‘, ‘상태‘, ‘성격‘을 나타내는 접미사 -ness을 붙인] childreness’는 17세기 내내 유행어가 되었다.(그 후로 그런 용어는 예술과 생활방식으로 확장되었다. - P117

아이들은 깨어있는매 순간 억압당한다. 아동기는 지옥이다. 그 결과는 불안한 사람, 따라서 공격적-방어적이고, 흔히 우리가 아이라고 부르는 몹시 불쾌한 작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 성적 그리고 일반적인 심리적 억압에 의해 그들은 부끄러워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악의적인 정체를 스스로 드러낸다. 이러한 불쾌한 특성들은 결국 아이들을 나머지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을 강화한다. 그래서 그들의 양육, 특히 인격 형성의 가장 어려운 단계에서의 양육은 기꺼이 여성에게 양도되는데, 여성들은같은 이유에서 그러한 인격적 특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 그러므로 (과거에 아동이었고 여전히 억압받는 아동 여성인)혁명은 페미니스트 혁명가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한 어떤 기획에도 아동 억압을 포함시켜야만 한다. - P151

초기 시민권 운동은 너무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해 왔다. 기존사회에 적응되고 속박되어 ‘검둥이 문제 Negro Problem‘에 관해 아주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즉, 흑인들은 ‘유색인종이고 그들은 백(비유색)인들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만을 원한다는 것이었다.("우리도 사람이야.") 그 결과 백인들은 명백한 육체적·문화적·심리학적 차이점들을 가리기 위하여 친절하게도 그들의 시각을 걸러냈다. ‘검둥이nigger‘와 같은 단어들이 사라졌다. - P154

‘해방된‘ 여성들은 남성들이 따르고 모방할만한 ‘훌륭한 사내들‘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남성의 성적 패턴을 모방함으로써(여기저기에 추파를 던지고, 이상을 추구하고, 육체적 매력을 강조하는 등), 해방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포기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에 빠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닌 질병을 스스로 주입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멋‘이 천박하고 무의미하다는 것, 그 뒤에서 그들의 감정이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 그들이 나이 들고 퇴폐적이 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209

여성은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성적 매력의 이미지이다. 여성에 대한 정형화는 확장된다. 그리고 에로티시즘은 이상성욕erotomania이 된다. 극한까지 자극되어 역사상 견줄 데 없는 광적인 것에 이르렀다. - P223

이 고도로 효과적인 선동 체계의 내적 모순 중 하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여성이 겪는 정형화 과정을 노출시킨다는것이다. 그 생각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여성적 역할에 더 익숙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TV를 켠 남성 역시 최신형의 복부 보정, 가짜 속눈썹, 그리고 바닥 광택제("그녀는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를 접하게 된다. 이러한 교차하는 성적 유희와 폭로는 어떤 남성이라도 여성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데 충분하다. 그가 이미 혐오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 P224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주의 혁명은 똑같은 이유로 실패해왔거나 앞으로도 실패할것이다. 현재의 사회주의하에서는 어떤 최초의 해방이라도 항상 억압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그 이유는 가족 구조가 심리적·경제적·정치적 억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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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7-24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동기를 없애자‘ 부분은 저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 환경이라서 모짜르트가 나올 수 있었겠구나 싶고
요즘 유,초등 아이들은 나이 별로 구별해서 놀게 한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고요.
저도 혼자서는 완독할 수 없었을거예요.ㅎㅎ 화가님 완독 수고하셨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7-25 09:01   좋아요 2 | URL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저 어렸을 때도 문제가 많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더 심해진 듯 합니다. 제도라는 것이 받는 사람에게 효과적이어도 끌고 갈까 말까 할텐데 그닥 그런 것 같지도 않아서 의미도 없어 보여요. 부모와 아이들만 죽어나는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미미님은 재독이시라서 더 의미있는 시간이셨을듯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3-07-25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외모에 마음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거기에서도 여성이 더하겠지요 자기 만족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사람 눈을 하나도 마음 쓰지 않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5 09:03   좋아요 1 | URL
누구를 위한 외모 지키기인지 모르겠어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운동과 적절한 식이 요법이 더 중요하겠죠.

다락방 2023-07-25 0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고생 많으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저도 아동기를 없애자 는 제목만보고 당황했었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파이어스톤은 여성 해방에 진심이었구나 싶어욬 정말 해결하고자해서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3-07-25 09:05   좋아요 1 | URL
네. 정작 파이어스톤 본인 해방은 이루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더군요. 초독이라 얻어간 것이 별로 없는 듯하지만 함께 읽기가 아니었다면 역시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7-25 1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독이라...😳
리뷰를 읽으며 흐름을 대충 잡고 열심히 읽겠습니다.
늘 모범생 화가 님!🤞🏾

거리의화가 2023-07-25 11:00   좋아요 2 | URL
7월도 얼마 안 남아서 지난 주말 남은 분량 다 읽었네요. 늘 읽고 나면 제가 얻은 게 부족한 듯하여 찜찜합니다만 거르거나 포기하지 않고 읽어내는 것에 자축합니다. 앞으로도 모범생 컨셉으로 쭉 가지 않을까 싶네요!^^ 나무님도 함께 해주셔서 늘 든든합니다^^

건수하 2023-07-2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댓글을 뒤늦게 답니다. 길게 후기 써주셔서 다시 한 번 정리하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제 후기 너무 짧네요). 파이어스톤이 워낙 이상적인 사회를 그렸으니 좌절도 더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15명 내외로 구성했다는 단체가 일종의 ‘가구‘였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 단체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궁금하더군요. Airless Spaces도 번역되면 좋겠는데.. 언젠가는 번역되겠지요? ^^ 더운 날 읽고 쓰느라 고생하셨어요. 남은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7-26 14:13   좋아요 1 | URL
저는 페미니즘 책 리뷰 쓸 때가 가장 어렵고 힘드네요. 리뷰 쓸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한답니다ㅜㅜ
파이어스톤의 주장은 지금 봐도 큰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조금씩은 개선이 되고 있지만 그 이상향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그래도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 놀라운 지점이겠죠!(더군다나 그 어린 나이에ㅠㅠ) 독서하기에는 오히려 덥고 추울 때가 더 좋은 듯 싶습니다. 남은 여름 수하님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하버드 중국사 당 - 열린 세계 제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한신 옮김 / 너머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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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중국인은 당唐 왕조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화 제국의 절정기로 인식하고 있다. (...)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찬양하는 군사적 정복과 뛰어난 시문의 등장은 당 왕조의 전반기에 이루어졌다. 당 조정은 8세기 중반에 격변을 불러온 반란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였고, 수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중국의 정치가와 문인들은 지나가 버린 왕조의 전성기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은 그 지나간 영광의 그늘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와 예술에서의 초기 업적에 대한 찬양은 후대 왕조들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 왕실이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5세기와 6세기에 중국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모든 변방의 '오랑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었다. - P17~18

당은 중국 역사 사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찬란한 시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현종 초기,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기 전 시기로 국한지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당 초기만큼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 후기 이후 북부 지역에는 돌궐을 비롯하여 티베트 등 강한 이민족의 힘이 당을 억눌렀는데 이는 당 후기까지 내부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면서 당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당의 전기와 후기가 어떻게 달랐는가.

당대 초기 중국 북부 지역에서는 균전제가 행해졌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소유한 토지를 경작 가능한 가구들에게 주기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지급받는 모든 가구에 대하여 동일하게 부가되는 세금 체계가 소유한 토지에 따라 연결되었다. 군사 체계로는 전방에 이민족 유목민 부대를, 변경에는 직업군인들을 배치하고 수도에는 정예군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수도와 다른 주요 도시들은 벽으로 구분하여 거주 구역을 두고 교역은 특정 시장에서만 열도록 제한을 두었다. 사회는 소수의 최상위 대가문들이 독점하였다. 문학적으로는 장식적이고 인위적인 스타일의 작문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당 후기가 되면 국가는 부병제를 포기하고 직업군인(모병제)로 전환된다. 도시 내 교역에서는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고 도시 생활은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의 구분이 사라졌다. 또 정부가 황하 유역 대부분의 지역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양자강 유역이 경제 중심지이자 국가 재정 수입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된다. 남부의 항구를 통해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한국, 일본 같은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을 넘어서서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해협의 해안 지역들과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학적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룬 장르의 운문들이 등장하고 남녀 사이의 관계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도 나타난다.

당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하였다. (...)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북서부 지역은 장기간의 경제적 · 생태적 쇠퇴가 시작되어 오늘날과 같은 빈곤하고 반 사막인 후배지後背地로 전락하게 된다. 중원 평야는 인구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뿐 아니라 중국 문화의 전형으로서의 광채를 상실하였다. 북동부(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는 거의 이민족화되어 경계 지역이 되었고, 그중 몇몇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중화 지역과 다시 결합하지 못하였다. (...) 양자강 하류 지역과 그 남부 지역은 풍부한 강수량과 풍요로운 식생 그리고 편리한 수상 운송으로 인하여 중국의 인구학적 그리고 경제적 중심지로서 점차 황하 유역을 대체하고 있었다. - P29~30

인상적이었거나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겠다.

지역 간 거래의 성장과 더불어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금융거래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 말과 송대 사이의 시기는 지폐, 약속어음 그리고 다른 형태의 종이로 된 신용거래에서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였고, 이는 현금이라고 알려진 많은 양의 무거운 동전 꾸러미들을 대체하였다(P239). 교역이 늘어 기존의 동전들을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지면서 화폐와 어음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화폐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지폐가 이 때 등장했다는 게 놀랍다. 군부대의 병사들이 고향에서 곡식으로 구입한 영수증으로 부대에서 음식을 살 수 있었다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구내 식당의 '식권' 같은 개념이다. 상인들이 도성에서 정부로부터 권리를 구입하면 이것을 지방 금고에 가져가서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날아가는 현금'). 이는 비단 오늘날의 은행과 다를 바가 없다. 다양한 종류의 종이로 된 신용 증권도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종이돈이 장례식에 사용되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중국인의 문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차 마시는 문화가 아닐까. 차가 제국 전체에서 보편화된 음료로 발전한 것이 당대에 와서라고 한다. 차 마시는 행위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북부 지역에서 차 음료의 확산은 많은 이유로 불교 사찰에서의 차의 사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오후에 고체로 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액체의 음료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이후 차 음료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대접의 수단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에서는 의식에 사용되는 등 다양한 부분에 전파되었다.

안녹산의 난 발발과 티베트에 의한 북서부 지역의 점령은 아랍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침공의 성공은 18세기에 만주족이 점령할 때까지 중국 왕조들이 돈황을 경계로 그 서쪽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은 불교 세계의 한 부분이자 중화 문명의 영향이 미치는 부분으로서의 중앙아시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P319). 당 초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당나라는 안녹산의 반란으로 내부의 위기, 서북쪽의 티베트의 공격으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상실한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아랍 세력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대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다. 기본적으로 사채업, 그 이외에도 주점은 소그디아 인 또는 토카라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운영하였고,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예능과 매춘에서는 비중국적 취향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여성이 시중을 들거나 예능인인 외국인 소유의 주점과 선술집은 당대 시나 예술의 일반적인 주제였다. 중앙아시아 음악은 도시 전체에서 큰 유행이었고 수도에서부터 모든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8세기가 되자 중국의 대중음악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의 음악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P337~338). 당이 참으로 국제적인 도시였음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때 중앙아시아의 음악이 중국 내 유행을 했고 거의 주류 음악처럼 되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심지어 현종과 양귀비의 애창곡도 중앙아시아 노래의 번안곡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시기라는 이미지가 있다. 아무래도 무측천, 그녀의 딸인 태평공주와 위황후가 반 세기 이상의 기간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멸망 이후 중국 북부 지역을 차지한 유목민들이 중국에 가져온 것으로 유목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물론 당에 비해서 남녀평등하다는 것이었을 것이지만). 6세기 인물인 안지추는 당시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북부 지역의 여성들을 법률적 사안을 직접 처리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남자 친족을 위해서 정부 청사에 들어가 탄원과 고소를 할 수 있었다. 7세기 중반 이후 당대 황후들의 권력은 여성들이 다양한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북방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강력한 황후들의 존재 뿐 아니라 당대는 공주들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졌다(P357~358). 

수나라 때 전래된 불교는 당나라 때 와서 중국식화된다. 그 전까지 불교는 외래 종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생사관과 의례 체계의 기저를 이루는 불교 사상의 많은 체제들이 중국의 종교(민간신앙) 속으로 융합되었다. 서구에서 연옥이 있듯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망한 친족을 구제할 수 있었던 완전히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연옥은 시왕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망한 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10곳의 연속된 법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의 법정은 당대의 재판장을 모델로 묘사된 것으로서 각 법정을 지배하는 왕들(십왕)은 개인의 인생의 기록들을 조사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였고, 만일 필요하다면 죄의 완전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도 있었다. 법정을 떠난 이후에, 그 사망한 자들은 다음 생에서 환생할 상태가 결정되는데, 선행을 베푼 자들은 보다 나은 상태로 환생하고 악행을 행한 자들은 더 나쁜 상태로 환생한다(P381).

시를 새로운 무대와 사회계급으로 옮기고 복고의 정치-윤리적 담론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당대에 시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개척할 수 있었다. 시를 짓는 것은 사교적 세련미의 차원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로 격상되었다. 시인은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찬양하였던 기인과 '천재'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인물이 되었다. 시는 지식인들의 소명이 되었고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특정 작가들은 시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으로 묘사하였고 시인에게는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 보장되었다(P514). 그러니까 당나라 때 오면 시인이 지식인을 넘어 직업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당시(唐詩)가 하나의 장르가 된 것처럼 시는 당대는 물론이고 이후 지식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같은 것이 되었다. 게다가 시가 개인적 소회를 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보나 백거이 등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시들을 많이 발표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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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25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나라는 시인이 일이었다니... 그러니 두보나 백거이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겠습니다 그 뒤에도 시인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겠습니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런 게 죽 이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네요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에는 여성과 남성을 비슷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5 08:58   좋아요 1 | URL
그 전까지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생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위진남북조 시기 도연명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가 본격적인 장르가 되고 시인들이 여럿 탄생하면서(그만큼 시상이 떠오를 일이 많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흘러왔던 것 같습니다.
당나라 여성의 삶이 서술된 것만으로도 힘이 제법 있었구나 싶더군요. 송나라, 명나라 오면서 문치주의로 인해 그 힘이 약화된 것이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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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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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를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브라질 원두를 좋아해서 확인차 샀는데 역시 고소해서 좋았다. 파우치 형태라 들고 다니면서 먹기에도 편하고 콜드브루니까 아주 더운 날 아이스로 마시면 좋다. 먹어보니 역시 우유랑 찰떡궁합인데 저지방우유 말고 생우유 적힌 양보다 적게 해서 마시면 더욱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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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3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지방/무지방우유 넣은 라떼는 라떼가 아니다!! 그 밍밍함 용서못해....

거리의화가 2023-07-24 08:50   좋아요 2 | URL
보통 디카페인은 오후 늦게나 저녁에 먹으니까 저지방 우유를 넣어봤는데 역시 그냥 우유만 못하죠. 역시 라떼는 고소해야!^^

scott 2023-07-24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디카페 좋습니다
자칭 커피 중독자인 저
쌀자루보다 원두 자루를 더 소중히 여기는
제가 인정 ^^

거리의화가 2023-07-24 13:11   좋아요 1 | URL
디카페인 보통은 원두로 시켰었거든요. 제가 아이스를 잘 안 먹다보니까 콜드브루는 좋아하지 않는데(그 특유의 향 때문에) 우유랑 먹으니까 좋네요. 저도 커피 중독자라 줄어드는 원두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북동부 지역의 군사화는 4세기 진 조정의 남천 이후 수많은 비한족의 정착과 관련이 있었다. - P41

안녹산의 반란 이후에 독립적인 절도사節度使들의 성장은 북동부 지역을 당 조정에 대한 저항의 영구적인중심지로 만들었다. - P42

당 조정에게 중원 평원은 경제적·정치적으로 부차적인 지역이었다. 반면에, 그 지역은 당대에 대단한 문화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 P43

사천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중국 남서부 지역으로서당대에 동남쪽의 양자강 하구 유역만큼의 경제적인 중요성은 없었지만, 티베트(토번)와 남조南沼가 7세기 후반기부터 이 지역에서 발흥하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군사적 중심지로 대두하였다. - P44

당대에 남부 지역은 양자강과 그것의 네 갈래 주요 지류의 하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날 호북, 호남, 강서, 산서의 진령산맥 남쪽과 안휘 남부, 강소남부, 절강북부가 이에 해당된다. 비록 그 지역은 구릉지였지만,
강수량은 일정량을 유지하였고 호수, 강, 하천들이 풍부하였다. 남부지역은 한랭한 북부 지역에 비해서 곡물 성장 시기가 길어서 보다 긴시간 동안 다모작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우월한 자연 조건으로 인하 - P49

일반적으로 중부 지역에서는 느리게 흐르는강물을 댐으로 막아서 저수지를 만들고 그 물을 수문을 통해서 저수지로부터 작은 수로로 흘려보내서 그 후에 중력의 작용을 통해서 경작지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반대로 과잉의 물을 인공적으로 조성된 웅덩이나 저수지 속으로 배수시켜서 나중에 필요할 때 빼서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주로 썼다. - P52

조정의 남동부의 곡식에 대한의존도 증가는 그 지역의 생산성 증가의 또 다른 징조였는데, 이때 남부 지역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곡물을 북부로 보내면서도 남부 지역의 인구들 또한 먹여 살릴 수 있을만큼 생산성이 증가하였다. - P53

북부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충분하지 못했기에,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물이 농업용 관개수로로 흘러들어갔다. 따 - P55

라서 많은 물자를 적재한 운반선들을 실어 나를 강에는 훨씬 적은 운하용수만이 공급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 지역에서 수상 운송은 당대 전반기 내내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제한적인 상황이 초래한 한 가지 결과는 대규모 군사의 이동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한적인 수상운송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각각의 도시와 지역이 그 지역의 자체적인 농업 생산에만 의지해야 했다는 점이고, 이는 경제적 전문화(분화)를 제한시켰다. - P56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내지는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상서書』「하서夏書」중우공편에서 묘사된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두개의 강 유역 사이에 위치하는 지역을 생산품의 차이에 따라 다시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눈다. ‘구주九州‘라고 하는 이 명칭은 결국 중국 전체를 나타낸다. - P63

한 제국에 의해서 건설된 ‘종속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미주들은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역들이었다. 당의 변경 내에거주하는 이들 부족민들은 당에서 직위와 인장을 수여받은 부족장들의 지배를 받았다.
기미주들은 대체로 당과 완전히 이질적인 ‘오랑캐들 사이의 완충국이었다.
기미주들은 특히 정주적인 농경 지역에서 초원 유목 지역으로 넘어가는 생태적인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변경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 P68

건국 초기 당 조정은 제국 전체에 안정을 회복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의 재정적 지불 능력을 복구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면서, 정부는 세수의 꾸준한 확보를 위해서 국가에서 토지를 분배해 주는 제도인 균전제를 재도입하였다. 이 균전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지역 행정력이 필요하였고, 당 왕조는 주현제州縣制를 확립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621년에 정부는 통화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수대에 화폐의 가치 저하와 위조화폐로 인하여 붕괴되었던 것이었다. - P78

당초반에는 왕조의 군대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세습군호나 외국인 동맹군 또는 외인 용병으로 이루어졌다. - P102

절도사의 직책은 8세기에 다양한 수비 부대와 군대를 한 지역 내에서 편제하고 지휘할 필요에 대비하게 되면서 즉흥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자몇몇 절도사는 막대한 경제력을 갖추고 조사위원관이라는 관직을 겸직하였다. 이 직책은 그들에게 그 지역의 민정 행정에 대한 상당한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8세기 중반이 되자 이러한 절도사들은 변경 지역에서 실질적인 지방장관이 되었고 중앙정부의 권위를 위협하는 지역세력의 집중화를 가져왔다. - P106

안녹산이전에 동북 지역의 모든 절도사는 적어도 한 번은 수도 장안에서 대신의 직책을 수행하였고 일반적으로 4년이 넘지 않는 상대적으로 짧은기간만 절도사로 재임하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휘하 장교나사병과 강력한 사적인 유대관계를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서부 변경 지역인 중앙아시아와 티베트 국경의 사령부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747년 이임보는 모든 절도사직은 이민족 직업군인 출신으로만 채워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 P107

당 왕조는 공식적으로는 귀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특정가문에 대해서 조정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보장해 주고 그들에게 특별한 법적 특권을 부여해 줌으로써 엘리트의 존재를 실제적으로는 인정해 주었다. - P110

당대 법전의 세 가지 특징은 한대의 선례와 구분시켜 주었는데, 귀적인 지위와 비천한 지위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적 지위 그룹에 대한법적 인정, 가족 내 혹은 관료제 내에서의 상대적 지위고하에 근거한처벌의 엄격한 단계적 차이, 직제에 관한 세밀한 법적인 관심이 그것이었다. - P117

당 왕조 초기, 특히 중국 북부 지역에서, 토지 소유, 조세 그리고 부역은 통합된 집합체로서 성인 남자 가장에 중점을 두고 있다. - P120

8세기에 정부는 가구세와 토지세와 같이 두 차례에 걸쳐 약간의 추가적인 조세들을 도입하였는데 이것들은 어느 정도 가구의 부에 따라 징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은 부분적인 영향만이 있었을 뿐이고, 그 제도의 핵심은 여전히 모든 성인 남자가 동일한 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일한 세금을 납부한다는 이상에 근거하고 있었다. 고이러한 조세 징수 원칙에서 예외자들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근거가 부의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특권 사회 계층 그룹에 속했는가의 여부였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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