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중세 말, 대부분의 중부 및 서유럽에서 그러했듯 독일에서도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런 그들에게 폴란드는 마치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고, 이에 따라 폴란드는 이후 유럽 유대인 정착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9년 폴란드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유대인이었으며, 대다수는 유대교 전통 복장과 관습을 지켜오고 있었다.

스기하라는 폴란드 장교들의 도움에 힘입어 리투아니아에 있던 수천 명의 유대인이 무사히 탈출길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먼저 기차를 타고 드넓은 소련 땅을 오랜 기간 가로지른 뒤 배를 통해 일본에 들어갔고, 거기서 다시 팔레스타인이나 미국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이 일련의 과정은 바로 수십 년 동안 조용히, 하지만 굳건하게 이뤄진 폴란드-일본 정보 협력의 결과물이었다.

1940년과 1941년, 바르샤바 게토를 비롯한 여러 게토는 이내 급조된 형태의 노동수용소이자 유대인들을 가둬두는 장소가 되었다. 독일은 이곳에 흔히 전쟁 전 지역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 중 일부로 구성된 유대인 위원회 혹은 평의회를 구성했다. 독일은 유대인 경찰도 만들었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게토의 질서 유지, 유대인들의 탈출 방지, 독일의 탄압 정책 수행 등이었다.

동방 총독부 여러 지역에서 이뤄진 AB 악치온(‘특별 평정 조치‘)은 그 살해 흔적들에서 볼 수 있듯 범위나 방식에 있어 제각각이었다. 크라쿠프에 있던 수감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간단한 평결문을 읽었다. 물론 거기에 이들을 무슨 형벌에 처한다 따위의 내용은 있지 않았다. 평결문에 적힌 죄목은 반역죄 곧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모순적이게도 전원이 도망치다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독일이 1941년 6월 22일의 기습 공격을 통해 소련을 침공해 들어오자, 폴란드와 소련의 관계는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동맹으로 변했다. 그들은 이제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꽤나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었다. 앞선 2년 동안 소련은 50만에 달하는 폴란드인을 탄압한 자들이었다.

"동유럽 종합 계획"이라는 제목하에, 동부 식민지에 관한 일련의 기획안 초안이 작성됐다. 첫 기획안은 1940년 1월, 두 번째는 7월, 세 번째는 1941년 말, 그리고 네 번째는 1942년 5월에 완성되었다. 기획안들의 한결같은 부분은 바로 독일인들이 점령 지역 사람들을 강제추방, 살해, 동화하거나 혹은 노예로 삼는 것, 그리고 이를 발판 삼아 새로 개척한 변경 지역에 질서와 번영을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굶주림 계획에 따르면, 독일군은 모든 집단농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곳곳의 수확을 감시하며, 단 한 톨의 식량도 빼돌려지거나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독일 국방군은 나치 친위대 및 각 지역의 협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집단농장을 관리하고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과거 소련이 했던 수준의 효율성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독일인들은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곳의 작황 및 농작물을 빼돌릴 만한 장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은 공포감을 조성할 수는 있었으나, 공포와 함께 신념을 불러일으켰던 공산당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는 점에서 소련만큼 체계적이지 못했다. 도시 지역을 시골 지역으로부터 봉쇄할 만한 인적 자원 역시 없었다.

원칙상 수용소들은 세 종류, 즉 굴라크(임시 수용소), 스탈라크(사병 및 부사관 대상의 기본 수용소), 소규모의 오플라크(장교 대상)로 나뉘었다. 하지만 세 종류의 수용소 모두 실제로는 대부분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인 벌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폴란드 동부에 일종의 유대인 보호구역을 마련한다는 ‘루블린 계획’은 동방 총독부가 독일 본토와 너무 가깝고 복잡한 관계로 1939년 11월에 포기되었다. 그 다음으로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유대인들을 소련 땅으로 보내려 했던 ’대소련 합의 계획‘은 스탈린이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안았기에 1940년 2월 폐기되었다. 그다음 유대인들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보내는 것을 골자로 한 마다가스카르 계획 역시 처음에는 폴란드가, 뒤이어 영국이 독일과 협력하기는커녕 싸우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1940년 8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 자신들이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도 실패함에 따라, 굴복한 소련 땅을 유대인 문제 해결의 장으로 활용하려던 ’대소련 강제 이주 계획‘마저 1941년 11월에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소련 침공은 독일에게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한 반면, 유대인 문제는 확실히 악화시켰다.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 달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 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태풍 작전’은 최종 승리를 일궈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독일은 독일인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추방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이는 일종의 연쇄반응을 불러왔다. 좁은 게토에 유대인 수용 공간을 더 마련해야 했던 상황은 특정 대량 학살 방법(리가, 독일이 점령한 라트비아)을 공식화했고, 또한 또 다른 방법(우치, 독일 치하의 폴란드)이 고안되는 것을 촉진시켰다.

일본이 움직이던 때는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꽁무니를 빼던 바로 그 시점이었기에 진주만 공격은 독일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의미했다. 영국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력으로 미국에 맞설 준비에 들어갈 대륙 제국으로서의 독일은 커녕, 하나같이 약한 동맹국들(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혹은 결정적이랄 수 있는 동유럽 전선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맹국들(일본, 불가리아)을 이끌고 소련, 영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된 것이었다.

전쟁의 주도권이 스탈린에게로 넘어가자 히틀러는 목표를 다시 써내려가기에 이른다. 소련을 파괴하겠다던 계획은 이제 유대인을 없앤다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소련 파괴가 ‘무기한 연기’됨에 따라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이 곧 전시 정책이 되었다.

유럽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히틀러의 결정은 유대인과 빨치산 사이의 관련성을 과장하여 일종의 추상적인 관념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곧 유대인들은 독일의 적을 지원하는 자들로서, 우선적으로 몰살해야 할 대상이었다.

1942년 중반부터 그 이후 독일의 주요 작전은 이른바 "거대 작전"이라 불린 것으로, 그것은 실제로 벨라루스 유대인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민간인들까지 학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빨치산을 물리칠 수 없게 되자, 빨치산들의 전투를 지원할지도 모를 민간인을 살해했다.

히틀러의 총통부는 바르테란트 내 폴란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스 실험 뒤, 독일 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이 프로그램은 의사, 간호사,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핵심 기획자는 히틀러의 주치의였다. 희생자들은 표면상 의료적 실험 및 치료라는 미명하에 시설로 오게 되는데, 실제로는 가스통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로 질식하게 될 "샤워장"으로 인도된다. 금니를 한 희생자들은 미리 등 뒤에 분필로 표식을 해두었는데, 이는 그들이 죽은 뒤 금니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첫 희생양이었고, 부모들에게는 이들이 치료 과정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적은 가짜 소견서가 전달되었다. 이 "안락사" 프로그램의 희생자 대다수는 비유대 독일인이었다. 물론 장애를 가지고 있던 독일 유대인들은 아무런 검사조차 없이 곧바로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독일 경제는 유대인들을 아무런 안전망 없이 자기 위를 맨발로, 또 눈가리개를 한 채 걷게 만들었던 날선 곡예줄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그들의 죽음 사이에 있었던 것이자, 피비린내 나는 기만의 체제였으며, 종국에는 그들의 소멸을 가져왔던 것임에 틀림없다.

선발은 서류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아주 중대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냈고, 사적인 안전 확보에 대한 집착을 일반화시켰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들만은 제대로 된 일이나 관련 증명서를 확보한 채 게토 안에 남겨질 거라 믿곤 했다. 이 같은 희망의 개별화, 그리고 사사화는 그들 집단에게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남은 힘은 저항을 조직하기보다는 노동 관련 서류 뭉치를 뺏고 빼앗는 데 쓰였다. 그 누구도 독일인과 유대 경찰들이 게토 내에서 폭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비틀어 보려 하지 않았다. 독일은 소수의 인력만으로도 이를 관리 감독하는 데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미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베를린의 진군 도중, 붉은 군대는 제3제국의 동부 영토, 다시 말해서 폴란드 영토가 될 예정이던 땅에서 소름 끼치도록 단순한 행동을 반복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남성은 (그리고 일부 여성도)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런 행동은 병사들이 독일 영토로 남게될 땅에, 그리고 마침내 베를린에 닿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초에서 1947년 말까지 이뤄진 피란과 추방 과정에서, 본래 독일 땅이었다가 폴란드에 병합된 땅에서 약 40만 명의 독일인이 숨졌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련과 폴란드의 수용소에서 죽었고, 그 다음으로는 군대에 당했거나 바다에 수장되었다.

본래는 ‘동방 작전’으로 불렸던 비스와 작전은 전적으로 폴란드군이 수행했으며,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기획에는 소련 인사가 적잖이 관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모스크바와 연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근 소련 영토에서의 다수의 소련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연관성이 높았던 소련 작전은 ‘서부 작전’으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폴란드 접경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비스와 작전이 끝날 무렵, 소련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도록 했다.

1948년 5월에 실시된 ‘춘계 작전’에서 리투아니아계 주민이 강제이주되었다. 이듬해 3월에, ‘프리보이 작전’으로 리투아니아계 주민이 추가로 이주되고, 라트비아계, 에스토니아계도 이주되었다. 모두 따져보면, 1941년에서 1949년 사이 스탈린은 20만 명가량의 인구를 발트 삼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전쟁 중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이 전쟁이 유대인 해방전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대체적인 합의를 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소련, 미국, 영국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고통은 기껏해야 독일 점령의 사악함의 한 측면으로 여겨져야지, 그 자체로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스탈린이 죽은 한참 뒤에도 동유럽을 떠돌았다. 그것이 중요한 통치 수단이 되는 일은 드물었으나, 언제나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면 불거지곤 했다. 반유대주의는 각국의 지도자가 전시 고난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게 해주고(오직 슬라브족들만 고통받았다는 식으로), 스탈린주의의 역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게 했다(왜곡을 거쳐 유대인들이 공산주의를 훼방 놓은 식으로). 새로운 종류의 반유대주의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스탈린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축소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적인 집단 기억이 1970년과 1980년대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독일과 서유럽 유대인들의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희생자 가운데 소규모 집단들, 아우슈비츠(학살된 유대인 중 6명에 1명 정도와 관련 있던)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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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17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년 전, 이 책 리뷰 대회 덕분에 쟁쟁한 분들의 글들로 간접 접했었네요. 거리의 화가님 몰입 독서 중이시네요.
이렇게 역사책, 특히 유럽어가 많이 등장하는 외서는 번역가님이 무척 고생하셨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하게 되네요.
˝리가˝와 ˝우치˝는 고유 명사인걸까요?^^ 와...어려워요

거리의화가 2023-09-17 15:20   좋아요 1 | URL
ㅎㅎ 맞습니다. 저는 뒷북으로 읽게 되었네요^^; 이미 올라온 리뷰들이 훌륭하기 때문에 저는 읽는데 의의를 두었어요.
사실 인물이나 지명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많습니다. 다 신경쓰면 머리 공간이 터져서 곤란하니까요ㅎㅎㅎ 이 중 핵심 키워드만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보 봅니다. 이런 책은 정말 번역이 중요한 듯 싶어요.
 



Shamshi-Adad, King of the Whole World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는 또 다른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 Shamshi-Adad가 있었다. 그는 티그리스 강 근처의 Asssur라고 하는 도시에 살았다. Assur의 왕이 된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신(바람과 태풍)이 모셔진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 그는 온 세계의 왕이 될 것이라 소리쳤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고 두 아들로 하여금 자신 곁을 따르게 했다. Assyrian army는 얼마 있지 않아 메소포타미아 근방의 모든 도시를 다 정복하게 된다. 그는 독재자였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을 죽였으며 말을 듣지 않는 리더들은 자르곤 화형대에 그들을 던져버렸다. 마을은 불타고 군대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shamshi-Adad와 Assyrian army의 소문을 들은 주변국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게 되었다. 그의 제국인 Assyria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영역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그는 죽을 때 한 아들에게는 제국 통치 완수 사업을 맡기고 다른 아들에게는 Assyria에서 가장 큰 도시인 Mari를 맡기며 두 아들이 협력하여 제국을 강성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서로 다투었고 이 때 Hammurabi가 Mari를 무너뜨렸다. Hammurabi는 다행히 Assyria의 지도자와 주민들의 자치를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Assyrians들은 언젠가는 자신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며 또 한 번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꿈을 간직했다.



The Story of Gilgamesh


옛날 Gilgamesh라는 왕이 Uruk라는 도시를 다스렸다. 그는 지구상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젊고 건강했으며 돈도 권력도 모두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잔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들의 백성을 밤낮으로 부리며 돈과 먹을 것을 착취했고 아이들은 노예로 삼는 등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Uruk 사람들은 Gilgamesh을 없애고 싶어 하늘의 신인 Anu를 불러내 도와달라 외쳤다. Anu는 살펴보더니 그를 주무를 적인 Enkidu라는 괴물(반인반수, 12마리의 사자의 힘을 가졌음)을 보내 Gilgamesh와 싸우도록 명했다. Gilgamesh는 도끼가 문에 보이는 꿈을 꿨는데 그의 어머니가 꿈을 해석하더니 한 남자가 널 죽이려고 오고 있다. 너는 그를 친구로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죽는다!” 그러나 정작 Enkidu는 오다가 사냥꾼의 아들을 만나 그의 집에서 한동안 지내게 되었다. Enkidu는 그 곳에서 말하는 법과 먹는 법, 옷 입는 법을 배웠다. 어느 날 Enkidu가 친구들과 Uruk에 들어가서 결혼 피로연을 보게 되었다. Gilgamesh(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문득 자신이 신랑이 되고 싶어했고 신부 될 이를 훔쳐내 도망쳤다. Enkidu는 분노하여 “이 여자를 데려가려면 날 죽여야 한다.”하고 외쳤다. Gilgamesh는 Enkidu를 들어 올려 땅에 내리꽂으며 서로 피튀기게 싸움을 이어갔다. 싸움의 승자는 Gilgamesh였다. Gilgamesh는 이기기는 했지만 자신이 이전에 보지도 못한 힘을 가진 Enkidu에게 반했는지 친구를 청하고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도망쳐나온 신이 지상에 내려와 Gilgamesh 왕국을 지나가다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가 숨쉴 때마다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Gilgamesh와 Enkidu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Enkidu는 신을 죽이고 나라를 구해냈다. 그러나 신들은 Enkidu에게 앙심을 품고 재앙을 내려 12일 간 고통에 신음하다 죽는다. Gilgamesh는 친구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영원한 삶의 비밀을 찾고 죽음을 정복할 길을 찾으러 떠난다. 그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는다는 Utnapishtim 집으로 찾아가 영원한 삶의 비밀을 묻고 6일 낮과 7일 밤을 깨어 있을 수 있다면 불멸할 수 있다는 답을 얻는다. Gilgamesh는 잠을 잤다가 7일 후 깨어나는 바람에 다른 방법을 묻고 바다 바닥 밑까지 수영하여 마법의 식물을 찾아내서 가져와 먹으면 다시 젊어질 것이라는 답을 얻는다. 우여곡절 끝에 식물을 얻은 Gilgamesh는 집에 가서 식물을 먹겠다 생각한다. 그러나 Gilgamesh가 잠을 자는 동안 뱀이 다가와 식물을 찾아내 먹고 나이가 어려진다. 그는 Uruk로 갔고 원래대로 늙어 사망했다. 이 이야기는 구전에 구전을 거듭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 chasm

It was so powerful that whenever it breathed, huge holes and chasms opened up in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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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9-16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길가메시가 왕이었군요? 역사지식이 부족하여 이제사 알게 되네요.ㅋㅋ
근데 잔인한 왕이었네요.
그 시절엔 온화했다는 왕 이야기가 별로 없네요. 서로 전쟁을 치뤄 땅과 목숨을 지켜나가는 세상이라 그랬을까요?
근데 뱀이 어려지는 식물을 먹어버렸다면?
새끼뱀이 된 것인가? 상상해 봅니다. 이 와중에 몹쓸 상상!ㅋㅋㅋ

건수하 2023-09-16 10:26   좋아요 2 | URL
그래서 허물을 벗게 되었다 라고 나오더군요 ^^

거리의화가 2023-09-16 21:29   좋아요 1 | URL
공교롭게도 작년에 가부장제 창조 읽으면서 길가메시 이야기가 나오길래 관련 영상을 찾아본 게 있어서인지 이후 이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또 읽으니 훨씬 이야기가 익숙하네요^^ 뱀이 어려지는 식물을 먹어버린 결과는 수하님이 친절히 설명해주셨네요!ㅋㅋㅋ

독서괭 2023-09-16 1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7,8장 들었습니다. 따라잡긔!!ㅋㅋ

거리의화가 2023-09-16 21:29   좋아요 1 | URL
앗! 두 장 동시에 들으셨군요ㅋㅋㅋ
 

[ 아큐정전 ]

누구에게 맞는 것은 괜찮고 자기 뺨을 때리는 것으로 승리를 구걸하는 이가 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이 미워서 자기보다 낮은 상대를 어떻게든 찾아내 인간승리하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세상은 어지러웠고 곳곳에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는데 반란에 가담하면 나도 세상을 뒤집을 수 있나 생각했을까.
그 와중에 혁명에도 연줄이 필요하다는 것은 참…
너무 한심하고 순진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웃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보다.

"아큐! 이것은 자식이 아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때리는 거야. 네 입으로 말해 봐!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고."
아큐는 양손으로 자신의 변발 머리꼭지를 움켜잡고, 고개를 비틀며 말했다. 무
"벌레를 치는 거야! 됐어? 나는 벌레야. - 이래도 안 놓을 거야?"
그러나 비록 벌레라고 했건만 건달은 결코 놓아 주지 않고, 늘하던 대로 가까운 데 아무 데나 머리를 대여섯 번 소리나게 찧고나서야 만족하여 의기양양해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아큐도 혼이났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초도 지나지 않아 아큐도 역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돌아갔다. 그는 그야말로 스스로를 경멸하고 스스로를 낮추기로는 으뜸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 P123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힘껏 자기 뺨을 두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그제서야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때린 것은 자신이고,
얻어맞은 것은 또 다른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같이 - 비록 아직도 얼얼하지만 - 몹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드러누었다.
그는 푹 잠들었다. - P126

그가 서른의 나이에 뜻밖에 젊은 비구니 때문에 마음이 둥둥 뜨는 재난을 입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둥둥 뜨는 마음은 유교 도덕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란 정말증오해야 한다. 가령 젊은 비구니의 얼굴이 매끈매끈하지 않았더라면 아큐가 넋을 뺏기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가령 젊은 비구니의 얼굴에 베 한 겹을 덮기만 했어도 아큐가 넋을뺏기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가 5, 6년 전에 무대아래 관중들 틈에서 한 여인의 넙적다리를 스쳤던 일이 있었는데, 바지 한 겹이 사이에 있었기 때문인지 그때는 결코 마음이 이렇게둥둥 뜨지는 않았다. 그러나 젊은 비구니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역시 이단이란 미워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것이다. - P136

‘이 제기랄 놈들을 죽여 버리자! 더러운 놈들을! 미운 놈들을………… 나도 혁명당에 투항해야지.
아큐는 요새 쓸 돈이 궁색해져서 다분히 불평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빈속에 낮술을 두어 잔 들이켰더니 취기가 더욱 빨리 돌았다. 생각하며 걷다보니 다시 마음이 하늘거리기 시작했다. 어찌된셈인지 갑자기 자신은 이미 혁명당이며 미장 사람들은 모두 그의포로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기쁜 나머지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질렀다.
"반란이다. 반란이야!"
미장 사람들은 모두가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가련한 눈빛을 아큐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 P158

혁명을 한다면 입으로만 입당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변발이나 틀어올려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혁명당과 사귀어야만 된다. 그가 평생에 알고 있는 혁명당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성안에 있던 한 사람은 이미 ‘싹둑‘ 죽고 말았다. 이제는 그 가짜 양놈 한 사람만 남았다. 얼른 찾아가서 가짜 양놈과 상담하는 외에는 더 이상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아큐는 갑자기 자기가 배짱이 없어 노래 몇 마디 부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이 마치 회오리 바람처럼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청상과부성묘 가네」는 화려하지 못하고, 용호상쟁」중의 ‘후회해도 소용 없다………‘ 도 따분하다. 역시 손에 쇠채찍을 들고 네놈을 치리라 하자. 그는 동시에 손을 쳐들려고 했으나, 손이 묶여 있음을 상기했다. 그래서 「쇠채찍을 들고」도 부르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후에 또 한 사람・・・・・…."
...
아큐는 정신이 없는 중에도 이제까지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 - P178

이 없는 말이 ‘스승 없이 스스로 통달‘ 한 듯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잘한다."
군중 속에서 늑대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수레는 쉬지 않고 전진했다. 아큐는 갈채 소리 가운데서 눈알을굴려 우어멈을 찾았다. 그녀는 내내 그를 보지 못한 듯하였으며 그저 병정들이 메고 있는 총만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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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8월 11일, 내부인민위원회가 "폴란드 군사 조직의 간첩 연결망 완전 청산"을 수행하도록 하는 ‘명령 00485호’를 공표했다. 명령 00485호는 부농 박멸 작전 개시 직후에 공포되었지만, 훨씬 더 과격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계급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적을 노린 명령 00447호와는 달리, 00485호는 특정 민족 집단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폴란드 박멸 작전은 연이어 벌어진 다른 소수 민족 박해 작전의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작전들의 대상은 스탈린주의가 만든 신조어로는 ‘적국’인, 고국을 떠난 민족으로 그 고국과 실제 또는 허구의 관계를 맺고 있는 집단이었다.

1939년 초반, 히틀러는 전환점에 도달했다. 독일 민족을 하나의 국경 안에 모은다는 그의 대외 정책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동방 침략에 폴란드를 참여하게 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또한 히틀러는 독일을 재무장하는 한편 전쟁 없이 최대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3월 25일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에게 폴란드 침공 준비를 명했다.

1939년 런던과 파리는 독일의 공격을 저지할 목적으로 폴란드에 안전을 약속했고, 이를 통해 소련을 일종의 방위 동맹에 끌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일이 폴란드나 소련을 공격하더라도 런던과 파리가 동유럽에 개입하진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독일과 합작한 후 자본주의 열강들이 서유럽에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의 공격이 있고 사흘 뒤에 체결된 독일과 소련 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독일과 일본 간의 방공 협정을 무효로 만들었다. 전장에서의 패배 이상으로, 나치-소비에트 동맹은 도쿄에 정치적 격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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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콜링'을 직접적으로 당해본 기억은 없으나(아니면 내가 외면하거나 무시했을지도)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불쾌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 자체를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 하에 주어진 남성의 권력의 과시성에서 온다는 점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런 상황이 비단 여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소수자들에게도 확장되어 사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보면 길가다가도 농짓거리를 한다거나 장애인을 보고 깔보는 시선과 비하하는 말들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남성, 특권층)이 본인이 세상을 구성하는 전부가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 같다. 여성들이 이런 상황을 부딪쳤을 때 적극적인 항변의 행위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문화 의식의 성장 아닐까. 남성의 공감 능력은 필수고.


220, 220페이지 밑줄!

매우 많은 언어에 어떤 사람이(대체로 남성이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여성 혹은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성적인 언사를 외치는 행위를 묘사하는 표현이 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캣콜러들은 자신의 언행이 여성에 대한 칭찬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어디 가, 자기야?", "와, 저 엉덩이 좀 봐!"). 하지만 사회과학자들과 캣콜링을 당하는 사람들 모두 실제로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안다. (...) 그가 원한 건 내가 자기 말을 듣고 그저 나에 대한 통제권을 쥐었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단 몇 초라도 말이다. 캣콜링은 섹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문제다. - P202

캣콜링, 방해, 여성이 미쳤다며 무시하기, 혹은 다른 방식의 침묵하기는 권력을 향한 점진적인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들이다. 이는 모두 여성이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하면서, 그들이 갓 요구하기 시작한 권한으로부터 그들을 멀리하게 만드는 정당화의 방식이다. - P206

2009년 「사회적 전략으로서의 칭찬」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언어학자 네사 울프슨과 조앤 메인스는 칭찬의 즉각적인 발화 기능이 무엇이든 간에, "칭찬의 기저에는 발화자와 청자 간의 결속을 강화하거나 형성하는 사회적 기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상호작용에 익숙하지 않은 외계인에게 칭찬을 통한 결속 개념을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웃어!"나 "엉덩이 한번 만져 보자" 같은 말은 그다지 좋은 예가 될 수 없다는 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 P210

캣콜러나 다른 방식으로 희롱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이 상처가 된다는 정보를 주어도, 그만두게 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타고나길 잘못 타고나서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게.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우리 문화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 어디 속해 있다고 여기는지와 관련이 있다.

기저에 깔린 문제는 남성이 여성의 몸에 대해서 자동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그 가정에 있다. 이는 사회적 통제의 현시이며,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이 소유한 세상에 침입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따라서 사생활을 가질 권리가 없다고 여기게끔 한다. - P215

남성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은 극단적이고 부적절하다. 우리는 남성으로 하여금 힘이 있어햐 하고, 이성애적이어야 하고, 절대로 여성성과 연관되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남성적인 정체성을 수행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성은 여성의 관점을 모른 체하고 고통을 무시해야 한다. - P217

주변화된 집단의 친구들에게 스스로를 명료히 대변하라고 가르치는 건 중요하다. 필수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건 문제를 절반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성과 퀴어가 자신을 대변하기 쉽지 않은 문화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220

세상이 전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야 한다. 남자들이 어린아이일 때, 양육자이자 선생님으로서 우리는 남성성에 대한 문화적 상상을 깨부술 필요가 있다. 남성이 여성에게 공감해도 괜찮다. 다른 남성이 언어로나 다른 방법으로 여성을 쓰러뜨리려할 때 남성이 여성에게 공감하고 동조하고 지지해도 괜찮고, 정말 권장돼야 한다. 그리고 남성이 아닌 사람을 세상의 침입자처럼 대하는 건 괜찮지 ‘않은‘ 일이어야 한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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