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군의 침공 초기에는 알 하라위가 그랬듯이 서쪽으로부터비롯한 위협이 그처럼 광범위하게 퍼지리라고 짐작한 아랍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너무 빨리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체념하고 살아 남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낯선 상황을 이해하려고 비교적 냉철한 관찰자의 모습을견지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바로 다마스쿠스 명망가 출신의 젊은 문필가이자 연대기 사가인 이븐 알 칼라니시3일 것이다.
1096년에 스물세 살의 나이로 프랑크인들이 처음 동방으로 들어오던 모습을 목격한 이래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기적으로 기록하였다. - P19

그 해 여름, 서쪽 하늘에 혜성 한 개가 나타났다. 그 혜성은 스무 날이나 계속 올라가더니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 P42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곧 사라져 버렸다. 소문은 점점 구체성을 띠갔다. 그리하여 9월 중순에 이르자 사람들은 프랑크인들의 전진 과정을포착할 수 있었다.
1097년 10월 21일,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안티오케이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들이 온다!" 몇몇 사람들이 성벽으로 뛰어갔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저 멀리 벌판 끝 안티오케이아 호수 근처에서 이는 희미한 먼지뿐이었다. - P43

새벽 4시, 도시 남쪽에서 밧줄과 돌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오각형 망루 꼭대기에서 한 남자가 몸을 매단 채 손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꼬박 밤을 새웠는지 그의 수염은 심하게 헝클어져있었다. 이븐 알 아시르는 그의 이름이 피루즈이며 망루를 지키는 일을담당한 갑옷 제조인이었다고 쓰고 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무슬림인 피루즈는 오랫동안 야기 시얀의 주변에 머물러 왔으나 암거래를 한 혐의로얼마 전에 큰 벌금을 문 적이 있었다. 복수를 벼르던 피루즈는 포위자들편에 가담하기로 했다. - P61

당시 시리아는 아주 작은 부락조차도 독립적인 군주국으로 자처할 만큼 정치적 분열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는 스스로를 지키거나 침략자들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자든, 카디든, 귀족이든 누구라도 지극히 미미한 저항만으로도 자신의 공동체를 단번에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그들은 애국심은 따로 묻어둔 채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공물을 지참하고프랑크인들에게 존경을 표하러 찾아왔다. 네가 부러뜨리지 못할 팔이라면 그것을 껴안고 그 팔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를 하라는 그지방 속담을 따르기나 하는 듯. - P74

생질은 그에게 신의 저주가 있기를 클르츠 아르슬란에게 패한뒤 시리아로 돌아왔다. 그의 휘하에는 3백 명의 병사들밖에 없었다. 그 때 트리폴리스의 영주인 파크르 알 물크는 두카크 왕과 홈스의 통치자에게 전갈을 보냈다. "생질에게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이번에야말로 그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 P106

아니겠소!" 두카크는 2천 명을 서둘러 모았고 홈스의 총독도 가세하였다. 트리폴리스의 군대는 성문 앞에서 이들과 합세한 뒤 생질과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다. 생 질은 1백 명은 트리폴리스 군대와, 1백 명은 다마스쿠스 군과, 50명은 홈스 군과 맞붙게 하고 나머지50명은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 그런데 적을 보자마자 홈스의 군대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어 다마스쿠스 군도 똑같이 도망쳤다.
트리폴리스 군대만 홀로 맞섰는데 이 모습을 본 생질은 2백 명의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하여 7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 P107

샤라프의 수하 몇몇이 그에게 말했다. "성지를 탈환하러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보다는 자파를 손에 넣읍시다!" 샤라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그가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바다를 건너온 원군과 합세한 프랑크인들은기세를 회복하였고 샤라프는 결국 빈손으로 이집트의 부친에게 돌아가야 했다. - P108

여름이 시작되자 프랑크인들은 그들의 이동탑들을 성벽으로 밀어붙이면서 트리폴리스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주민들은 격렬한 공격을 감당해야 할 것을생각하자 일찌감치 기가 질려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벌써 느꼈다. 식량도 바닥난 데다 이집트 함대의 도착도 늦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지으려는 신의 의지인지 바람은 반대편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공격의 수위를 곱절로 높였고 1109년 7월 12일,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 P125

하산이 적을 겁주는 데 선호한 무기는 바로 살인이었다. 조직원은 대개는 혼자서, 아주 드물게는 두세 명의 무리를 이루어 지목한 인물을 살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주로 상인이나 수행자로 변장을 하고범행을 저지를 도시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와 희생자의 습관 등을 익혔다. 계획이 일단 결정되면 그들은 단번에 실행했다. 그런데 준비는 극도로 엄중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행은 되도록 많은 군중들이 모인장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장소는 대사원이 시기는금요일 정오가 선호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산에게 살인은단순히 적을 제거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중에게이중의 교훈을 주는 방식이었다. 살해당한 자에 대한 개인적인 징벌이하나라면 그 일을 행한 조직원의 영웅적 희생이 또 하나였다. 이 암살자를 이른바 ‘자살 특공대‘ 라는 뜻의 ‘피다이‘로 불렀던 것도 그들이 주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때문이었다.
그 조직원들이 침착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 때문에 이들이 하시시에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동시대인들이 많았다. ‘하시시 중독자‘라는 뜻의 ‘하슈샤신‘이라는 별칭이 훗날 ‘아사신‘으로 변형되어 여러 나•라 말들에서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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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저녁까지 걷기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리디 살베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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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해야 했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 이해하지 못한 영역이 조각이었기에 그것을 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제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었다. 자코메티라… 몇 년전 자코메티 전시를 보러 갔다가 ‘걷는 인간’을 보고 오래도록 잔상에 남았던 기억이 있다.

작가인 리디 살베르는 2014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그는 우연히 알리나를 통해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온전한 하룻밤의 시간을 보내며 자코메티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녀는 ‘걷는 인간’을 보면서 작가가 어떠한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오래도록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작가는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토해내는데 정서적 측면에서 상당 부분 공감이 갔다. 그녀는 이민자 부모 아래 자란 폭력적인 아버지 하에서 학대를 받은 경험을 고백하며 상처와 콤플렉스가 오래도록 그의 정서를 뒤흔들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과거는 흘러갔지만 잔상과 흔적은 오래 가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녀는 ‘걷는 인간’ 앞에서 거대한 벽을 느끼며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 내적 스트레스가 오히려 자신과 주변을 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함께 사는 반려자와 입씨름을 하며 미술관의 미술품들이 자본주의의 노예로 좋은 투자처일 뿐 아니냐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니까. 뭐 일부는 공감이 가기도 한다. 어떤 미술관의 미술품은 전리품인 경우가 있고 어찌 되었든 미술관에서는 돈이 되는 전시품을 모은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특히나 사설 미술관은 돈이 되지 않으면 영업을 이어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자코메티의 삶과 예술에 세 명의 중요 인물이 등장한다. 아네트, 이사쿠 야나이하라, 그리고 카롤린. 아네트는 아내이자 모델 겸 작업 조수였으며 그의 작품에서 상당 부분 등장했기에 가장 중요한 위치였다고 볼 수 있다. 둘은 술집에서 만나 동거 후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야나이하라는 사르트르의 소개로 자코메티를 만났고 이후 그의 모델이 되었다. 카롤린은 자코메티의 마지막 연인이었는데 자코메티는 그녀에게서 강한 에너지와 힘을 느꼈던 모양이다. 이처럼 삶과 예술은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걷는 인간’은 뼈대만 남은 사람이 앞을 향해 기운 채로 서 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궁금했다. 아래 구절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실패를 계속해야 했고, 고꾸라져야 했다. 결과에 대한 보장 없이 실패해야 했고, 그 모든 암중모색과 망침, 후회, 망설임, 엉김, 돌출, 사고, 비틀림, 추함, 자신이 견뎌낸 모든 실패와 불확실성을 작품에 담아야 했다.
쉬지 않고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저 자기 내면에서 나아가는 것일지라도.
그는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행위가 어쩔 도리 없이 그를 끔찍한 난파로 이끌지라도.
심장이 고동치는 한 걷고, 걷고, 걸어야만 했다.

자코메티 하면 실존주의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는 삶을 중요시 여겼고 수없는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실패를 새로운 창작을 위한 열정으로 승화시켰다.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작가는 나아가 그것이 죽음의 메시지를 던진다고 말한다. 계속 걸어가다보면 그 끝은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공교롭게도 자코메티의 전시품을 피카소 미술관에서 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삶은 피카소와 비견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피카소는 예술을 사랑했고 삶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사’보다는 ‘생’을 추구했던 작가였다고. 하지만 나는 자코메티도 예술을 사랑했고 삶을 사랑했다고 본다. 다만 둘은 그 방식의 차이가 있었을 뿐.

예술은 사는 일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다는 사실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술이 우리의 기쁨과 삶에 대한 허기를 늘리기도 한다는 것. 예술이 죽음에 당당히 도전하거나 냉혹하게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것. 몸과 영혼이 포맷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를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시대는 더이상 불가능을 희망하지 말라고 엄명하는데 예술은 불가능을 좇는 우리의 취향을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 유용한 목적만 좇는 정신이 곳곳에서 우세할 때 예술이 무용한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을 되살리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강렬한 욕망을 다시 솟구치게 하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유년기에 무척 좋아했던 색채들, 특히 빨강에 대한 취향, 잊어버린 취향을 우리에게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형태와 사물에 대한 취향, 그것들의 소재와 빛에 대한 취향,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주어진 단순한 사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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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컴북스 이론총서
김환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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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입문서인 이 책은 작년에 나왔다. 올해 나온 책 이외에 라투르의 사상을 요약 정리하여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신간과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라투르 사상의 흐름을 잘 정리한 책이라 보여진다. 한 명의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약력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의 이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개하면서 자연스레 사상이 전개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저작과 함께 소개한다. 이보다 탁월한 구성이 있을까. 


브뤼노 라투르는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교사에 근무했다. 그리고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면서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프랑스과학연구소(ORSTOM)에 군 복무 대신 근무하면서 과학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과학이 객관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학문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인류학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다양한 학문이 걸쳐 있는 것은 이런 이력에서 온 경험들이 축적된 덕분이 아닐 수 없다.


라투르는 이후 엔지니어 양성기관인 파리 국립고등광산대 혁신사회과학센터의 교수에 임용되었다. 그곳에서 과학사회학 연구자인 미셸 칼롱을 만나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을 개발하는데 여기에 영국 과학지식사회학 연구자인 존 로도 동참했다.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과학과 기술의 여러 서로 다른 요소들이 과학자, 엔지니어에 의해 긴밀한 연결망으로 결합되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고 정의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과학자, 엔지니어 등의 인간 행위자 뿐 아니라 기구 등 사물에도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읽을 때 이 부분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사물에도 역할을 부여한다고?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파격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구 근대주의의 모순, 과학기술에 의한 산물이 무한대로 뻗어 나가며 현대의 생태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이는 사람 대 사물 등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존재론과 행위 원칙을 세워야 함을 알린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근대주의자이지 탈근대주의자는 아니라고 명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포스트 모더니즘, 탈근대 이론 등과 구분해볼 수 있겠다).

라투르는 과학에는 어느 정도 중요성을 부여했으나 사회학에는 유독 비판적이었던 모습을 보인다. 사회학은 사회학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다른 것과 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철학이나 과학과의 결합을 말한 것이 아닐까. 


그는 ANT에서 나아가 지구인이 살아가기 위한 존재 양식의 인류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구상한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이 가이아 이론이었다. 가이아 이론은 1970년대 이미 나온 바 있는 이론으로 지구의 자기조절 시스템에 대한 자연 과학론이었다. 

가이아 정치생태학을 통해 인류세의 생태 위기를 극복하려는 라투르와 슐츠가 ‘계급’ 개념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과연 어떻게 하면 서구 역사에서 정치를 조직하는 이념이었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그리고 극우 민족주의)에 이어 생태주의가 그러한 이념이 될 수 있을지 고심한 결과였다. - P157

계급 투쟁은, 지구사회적 갈등의 얽힘이었다. 경제화를 통해 이를 협소하게 틀 짓는 것은 지구적 존재들(인간 포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급은 경제화 대신 거주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 P161

이처럼 라투르는 가이아 이론을 ANT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정치 생태학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가 제시한 생태 계급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국경으로 둘러싸인 내부로의 회귀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챕터 제목이 ‘지구정치신학’이라는 것에 눈길을 끌었다. 그의 사상에 종교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론적 관점에서 실재를 의식하게 하여 이전에 사실이라고 생각한 것을 새롭게 재정렬할 수 있게끔 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신학이 현대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순기능이라면 여러모로 이기주의와 파괴 행태로 나아가는 이 세계의 행위자들에게 윤리적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인류세에 대응해야 하는 정치신학을 ‘지구정치신학’으로 명명했다. 라투르는 지구종교신학의 올바른 행위자로 공교롭게도 얼마 전 타계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언급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말했다. “이 자매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지구에 선사하신 재화들을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남용하며 가한 해악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는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을 시간 순에 따라 요약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여러 모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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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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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흐름을 도레의 그림과 함께 간단한 설명과 지도를 통해 장면으로 구성해놓았다(현명한 책의 구성인듯). 전투와 인물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쟁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 사상자들에 주목한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서로 간 담소, 먹고 마시기, 운동, 언어 등도 주고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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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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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권은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면서 3차 십자군부터 마지막 십자군까지를 다루기 때문에 기간도 길고 무척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역사를 다루지만 인물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 때문에 특히나 3권에서 흥미로운 인물을 많이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재미롭게 읽었다.

3차 십자군에서 살라딘에 맞섰던 리처드. 4차의 엔리코 단돌로, 6차의 프리드리히 2세, 7차의 루이 9세, 8차의 메메드2세까지. 여기에 2차부터 참여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에 이어 소년 십자군이 새롭게 등장한다. 


1, 2차 십자군때까지 영국은 개인 자격으로만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 뿐 집단으로 출병한 적이 없었다. 이는 프랑스와의 영토 이권 다툼으로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는 십자군 원정 비용을 위한 세금을 거두고 전쟁을 준비했으나 그의 아들인 리처드가 반기를 들면서(당장 떠나기엔 자금, 병력이 부족)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리처드가 승리한 뒤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르고 1년 뒤 십자군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2세가 참여했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1세가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참여한다.


1189년 8월 28일 십자군은 아코 성벽에 이른다. 아코는 항구도시로 출입구는 항구 밖에 없으므로 성벽이 뚫리면 아코가 함락되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아코 방어군을 지원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고 리처드도 도착하기 전이었다. 리처드는 살라딘의 보급선을 중간에 가로채는데 성공하고 아코에 도착한 뒤 십자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리처드는 사령관에 올라 투석기를 성벽을 향해 쏘지 않고 성문을 향해 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성문은 목재로 되어 있으므로 돌로 된 성벽보다 무너뜨리기 좋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전선을 방어선과 공격선으로 분리하여 병사들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러니 어떻겠는가. 살라딘은 그에게 휴전을 요청한다. 십자군의 협상 조건은 포로를 조건 없이 송환하고 모든 이슬람교를 퇴출하며 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다. 지불이 모두 완료될 때까지 이슬람교도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으로 하고 기한은 한달로 정했다. 아코 공방전은 2년 만에 이렇게 종료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프리드리히 1세의 최후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시 계절은 여름이었는데 병사들과 함께 강으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1191년 9월 7일 십자군 대 이슬람군의 1차 격돌인 아르수프 전투가 시작된다. 아르수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항구도시였기에 살라딘 입장에서는 이곳을 먼저 수중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리처드의 별명이 ‘사자심왕’이 된 것은 상대측인 이슬람 병사들에 의해서다(그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지 않고 언제나 앞선 지휘로 용맹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맞수가 인정하는 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전투는 아르수프 바로 아래에 자리한 야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이슬람 기병수는 2천명이었으나 십자군 수는 기사가 불과 17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적인 불리함을 뒤집고 야코에서도 리처드를 위시한 십자군은 승리하고 야파를 탈환했다. 살라딘 측과 리처드 측은 강화  협약에 성공한다. 그러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화 협상은 무려 이후 26 년간 전쟁 없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성공한 회담이라고 생각한다. 

리처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부하에게 걸리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으나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귀국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노리는 동생 존이 있었다. 담판 승부를 벌이려 했던 존은 이미 프랑스로 도망친 뒤였는데 리처드는 그럼에도 프랑스까지 쫓아가서 그와 화해한다. 

이후 리처드는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데 전념한다. 그러다 전선에서 석궁을 맞아 41세 나이에 사망했다. 리처드 뒤를 이은 것은 자연스레 존이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후계자 분쟁으로 정신이 없었던 이슬람 측으로 인해 이집트가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수송을 위해 이탈리아 해상국들을 물색하는데 최종 선택은 베네치아가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치하던 최고 지도자인 도제는 엔리코 단돌로였는데 그는 협상에 응하면서 얻은 땅 절반을 받아내고 수송을 돕기로 한다. 

비잔틴제국도 당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스러웠다. 황제인 알렉시우스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놓이고 이 때문에 베네치아에 도움을 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에 새로 등극한 황제는 두카스 무르주풀루스, 십자군의 항전이 거세자 그는 단돌로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단돌로가 이를 거부하자 자국의 시민으로부터도 인기가 없던 그는 나라를 팽개치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공석이 된 황제 자리로 십자군은 쉽게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제5차 십자군은 중근동의 그리스도들을 주력으로 하고, 해군 및 수송은 제노바, 목적지는 이집트 항구인 다미에타로 정해진 채 시작되었다. 13세기 초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모두 이집트 술탄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 쪽으로 방향을 정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수중에 넣었으나 이후 나일강 부근에서 진군에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이집트 술탄이 군대를 보내자 더는 싸움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 병사들을 철군시키는 대신 다미에타는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강화 협상은 총 3차례에 이어 싸움을 지속하면서도 이루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는 개인적으로 십자군 전쟁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6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종용에 십자군을 출발시켰으나 역병이 돌아 병사들이 나가 떨어지자 출발을 연기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하기에 이른다. 6차 십자군은 소수 정예집단으로 병력을 구성하고 이탈리아 해상에 도움을 얻지 않고 직접 해군을 꾸렸으며(수송용 배도 직접 제작), 지휘 계통을 일원화시켰다. 이때 술탄 알 카밀은 동생 알 무아잠이 죽자 또 다른 동생인 알 아슈라프에 의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아코에 십자군이 당도했을 때 교황의 칙령이 도착했다. 그러나 알 카밀과 프리드리히는 싸우지 않고 공생 관계를 맺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파라딘을 협상자로 내보내 협상을 성공시킨다. 교황이 이를 가만 두고 볼리가 없다.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프리드리히였는데 이 일로 인해 프리드리히 영지인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결정이 잘못되었나?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협상자였던 알 카밀은 10년 간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놈의 명분을 위해 전쟁터에 병사들을 내보내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


유럽의 그리스도 세력은 10년이 지난 뒤 전쟁으로 기존 영토를 수복하자는 흐름이 대세를 이룬다. 그런 만큼 유럽의 왕실과 제후, 기사 세력들이 전폭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주력군은 프랑스 군이었는데 왕은 루이 9세였다. 왕이 직접 십자군을 이끄는데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수송 및 해군은 제노바 선단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 십자군 목표는 이집트에 일격을 가하여 이슬람 세계를 흔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미에타는 이번에도 공략에 성공하였으나 나일강이 문제였다. 십자군은 결국 나일강에서 많은 병사들을 잃고 대패한다. 그들은 카이로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하는데 되돌아가다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고 왕과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혔다 카이로로 연행되는 굴욕을 당한다. 


1258년 바그다드(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수도)가 몽골의 공격을 받아 왕조가 멸망한다. 루이 9세는 8차 십자군을 꾸린다. 이번에도 유럽 각지의 왕족이 참여했고 로마 교황이 도장을 찍으면서 출발한 군대였다. 그러나 리더인 루이 9세가 튀니지아의 카르타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이슬람에 주도권이 넘어가버린다. 이후 십자군과 이슬람 간의 강화 협상이 이루어졌고 십자군이 스스로 철수하기로 하면서 기나긴 십자군 전쟁이 막을 내린다. 


장장 2백 년에 걸쳐 이어진 십자군 전쟁이었다. 성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교황이 승인, 기사들이 모이고 왕과 황제가 자금과 병력을 모았으나 피해를 본 것은 이름 모를 사상자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해상 이용 능력을 가졌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해상국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수확이다. 신권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르네상스도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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