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경험에 따른 것이다. 물론 경험이 쌓인다고 해서 그 형태가 좋고 옳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본래부터 겁이 많고 소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20대나 30대 초까지는 돈이 없었을 뿐 오히려 많은 것들에 도전했던 시기였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방송 장비를 설치해서 사람들을 상대로 온라인 방송을 하기도 했고 방송국에 어느 가수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때 나는 현실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욕심을 다 채울 수 없어서 그 헛헛함을 이것저것 다른 것을 찾아다닌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는 분명 뒤를 돌아보지 않고 경계심 없이 막 부딪쳤던 것 같다.
지금은 무엇을 하기 전 이 정도면 적당해, 타협해야지 하는 생각부터 한다. 이는 나쁘게 말하면 더 나아가거나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뜻이 되겠다.
이를 통해 안정적으로 적당한 성과를 거둘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새로운 시도를 할 기회는 줄어드는 것이 된다.

러셀도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긴 나도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애당초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혼자 결정할 수 있으면 더 편할거야 라는 오만한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지금은 결혼을 하고도 10년을 훌쩍 넘긴 것을 보면 사람 일이란 모를 일이구나 싶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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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3 - 열정과 냉정 사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22~1945) 김규식과 그의 시대 3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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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편까지 왔다. 3권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의 가장 긴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분량이 상당한데 그럼에도 기존에 알지 못했던 사실과 흥미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나 이 시기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선행 자료와 없거나 부족한 자료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든 행위, 자료들(문자, 구술 포함)을 엮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따른 결과이며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 저자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당연히 뒤에 애써주신 분들의 노력도 포함되겠다).


김규식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로서 또 한 번 부각이 되는 시기는 3권의 초반에 등장하는 1921~1923년까지의 활동들이다. 앞서 살펴보았으나 김규식은 이승만과의 갈등 끝에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김규식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고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극동민족대회에서 그는 연설을 통해 “러시아 혁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불태우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한국 문제에 대해서 3건의 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김규식은 1921년까지의 한국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놓았다. 극동민족대회의 결과로 중국은 국공합작이 도출되었으며 일본은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한국도 민족통일전선 조직 및 정당조직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레닌이 제공한 60만 루블은 한인사회당과 상해 임정을 대표한 밀사 한형권과 박진순이 취득했다. 자금의 성격은 조선의 독립운동 대표단에게 전달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이르쿠츠크파, 국민의회파가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전달된 레닌 자금의 처분을 둘러싸고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코민테른은 자금 중단을 하고 한국 대표단 외교교섭단 단장이던 김규식,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지도자들을 고려공산당 활동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린다. 


김규식은 한동안 침잠해 있다가 한중국제연대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중한호조사는 한중 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사 16인 중 한국 측 위원 중 김규식은 부이사장, 여운형은 교제과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간담회, 강연회 등 집회를 통한 한국 참상 알리기와 한국 독립 지원 활동을 요청하는 활동에 집중했다. 중한어학강습소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참여 인원 중 아내인 김순애와 모택동도 있었다고 한다. 

국민대표회의는 사분오열된 임시정부의 지도부를 개조하거나 제도를 변경 또는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자는 공감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개조파, 창조파,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참여로 시작했던 회의는 마지막에 임시정부 창조파 인원만 잔류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국민위원회를 설립했다. 김규식은 국민대표대회 대표가 아님에도 5개의 행정부서 중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민테른은 국민위원회 조직 형태에 대한 협의를 위해 김규식과 이청천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렀다. 김규식은 이르쿠츠크파 후보 당원의 자격이었으며 이청천은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대 대표로서의 자격이었다. 국민위원회는 코민테른에 한국 독립운동 중심기관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귀결은 한국독립당이라는 정당이었다. 국민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에 기초한 독립 운동을 표방했으며 무장력과 국제연대를 강령으로 선택했다. 대표로 선출된 위원들이 총회 참석에 늦어져 연기되면서 1924년에야 열릴 수 있었으나 레닌이 사망하고 독일혁명도 실패하자 소비에트의 흐름이 내부 안정화에 집중하는 흐름이 생겼다. 국민위원회는 이렇게 씁쓸한 결말을 맞았다. 


국민대표회의 후 김규식은 상해 프랑스조계 내 한인 유학생을 위한 중등 예비학교인 남화학원을 운영했고 상해 북단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했다. 독립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1927년에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유동열, 김영호 등과 함께 국민당(군벌인 풍옥상의 부대) 북벌에도 참여하여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천진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29년부터는 북양대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처럼 독립운동을 하지 않을때도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생활 유지를 할 수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한국 독립운동의 흐름은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 세력 위주였는데 김규식은 이 중 후자쪽이었다. 그는 중국 측 요청으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한중연대 조직 흐름에 참여했다. 이는 한국 5개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국 측의 민중자위동맹회가 합쳐져 만들어진 중한민중대동맹이었다. 김규식은 중한민중대동맹에서 선전, 모금 활동을 위해 미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미국은 대공황 여파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재미한인 대부분이 실직과 궁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한인 사회에는 독립 진영 내분으로 인한 후유증이 여전하여 독립운동 열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김규식은 미 서부와 동부를 돌며 중한동맹지부 결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동부 지역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뉴욕지부를 만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와이에서는 이용직, 한길수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용직, 한길수가 미일개전과 한국의 반일 움직임을 미 정보 당국에 선전하고 있을 때 김규식은 미국 전역을 돌고 있었다. 짧은 하와이 방문 기간 동안 김규식은 미 육군 정보당국과 인터뷰(1933.7)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을 중한민중동맹의 하와이 미주 대표로 인정하는 신임장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김규식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3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에 복귀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통일된 독립 운동의 흐름을 위해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경제적, 외교적 상황이 계속 나아지지 않자 김규식은 1935년 직을 사임하고 나와 사천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사천대학에는 1942년까지 있었으니 제법 오래 있었던 셈이다. 이때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던 시간이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 선언을 한 뒤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경제 후원과 군사 지원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는 광복전선과 민족전선의 대립을 만들며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창익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가 화북 지대로 이동하면서 중경에 남아 있던 김원봉 조선의용대 세력이 힘을 잃자 중국 국민당은 한국광복군에 힘을 실어주었다(이는 해방 후 국내파 정계 세력에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위기에 몰린 김원봉은 한길수, 재미한인사회와의 연계를 이용하고자 했다. 한길수는 김규식 및 중한민중동맹 관계가 이미 단절되었음에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와 공식관계를 맺었다. 한길수는 중국 내 한인좌파운동 세력으로 미주를 대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김원봉은 한길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독당과 임정 주류 세력에 대한 비난을 하는 동시에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세력을 과장하고(이미 조선의용대 주력군이 화북 지대로 이동했음에도)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및 동북항일연합군 등과의 연대를 강조했다(이 서신 내용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 정말 놀라웠다). 이렇게 김원봉은 한길수를 활용하려 했고 한길수는 김원봉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늘리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한반도 신탁통치론은 1945년 동아일보 오보를 통해 보도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갑작스런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이해하게 되었다. 1943년 카이로 선언 이전 이미 1942년 미 포춘지에 중경의 신탁통치 반대 여론 움직임이 기사로 실렸고 1943년 4월 시카고선의 워싱턴회의의 결과 보고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1943년 중반 이후가 되면 임시정부도 사태를 관망하지 않고 신탁통치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미국의 대중적인 대한정책의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서 강대국 간의 합의에 의한 공동 추구 표명 성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도 중국 내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간에는 암살단 사건이 벌어지고 공금 횡령으로 잡음이 많았다. 이는 중국 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이 통일되지 않은 탓도 컸다. 

중경과 미주는 연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때도 이승만은 갈등의 축이었다. 재미한족연합회와 주미위원부, 임정의 상호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회는 민회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명령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 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재미한족연합회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김구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참 여러 모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때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해방 후 이승만의 국내 지도자적 위치와 입장은 더 제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1945년 임시정부는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김규식은 부주석의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를 시도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군사적으로는 광복군-OSS 작전이 감행되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시도도 이어졌다. 


3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원래 해방 후 내용을 담은 4권이 있었으나 <1945년 해방직후사> 단행본으로 기출간된 바 있다. 그 책을 읽으며 해방 후 정국을 정리해야 비로소 이 시리즈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미 읽었으나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김규식이 해방 전 집필 중이었다는 영시집 <양자유경>은 1992년 출간되었으나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은 이미 나온 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는 있으나 각 진영에 따른 입장 차이에 따라 기술이 제각각이라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더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이처럼 8월 한 달은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읽으며 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훓으며 보냈다. 찌는 여름임에도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보냈는데 저자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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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9-01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해방 이후도 궁금했는데, 이미 출간되어 있다니 기다리는 수고는 좀 덜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거리의화가 2025-09-02 13:12   좋아요 0 | URL
8월 안에 끝낼 줄은 몰랐는데 다른 책은 제쳐두고 읽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 관련해서 그 책 읽으시면 맥락이 이어지실거고 단행본이니 부담스럽지 않으실 듯합니다^^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김규식과 그의 시대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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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로서 읽을 수 있는 고마운 책이다. 김규식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파리강화회의로 대표로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얻는 과정, 이후 1930~40년대 독립운동 세력 간에 균형자로의 노력과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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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상한 정상가족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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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이라는 제목부터 느꼈지만 내용은 더 불편하고 가혹하다. 몇 세대를 지나쳤음에도 한국은 가부장제와 가족주의가 공고하며 시스템은 여전히 낡아 있다. 개개인의 타인을 향한 공감 능력 키우기도 중요하나 개인과 가족에게만 출산, 양육을 기대서는 한계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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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1919~1921)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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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을 읽자 마자 얼른 읽고 싶어서 2권을 바로 읽었다. 2권의 내용은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과 3.1운동의 여파에 따른 상해 임시정부의 생성,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독립운동가 세력과 미국 독립운동 세력 간의 충돌, 미국 내 한인 세력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대목이지만 외부 환경, 내부 세력 간의 입장 차이로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이다.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김규식은 외몽골 등지에서 생활인으로 살았다고 1권 내용에서 언급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상해로 귀환했다. 그리고 재미 한인 지도자인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자신이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리며 미리 도움을 요청해두었다(이승만이나 안창호과 접촉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로써 그가 상해로 귀환한 것이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이 준비된 것을 알고 복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경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도 자신이 파리 강화회의 공식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라는 말을 전하며 조선의 해방을 주장하는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윌슨 대통령에게 쓴 독립청원서는 신정, 김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신정은 한국공화독립당 총재인 신규식이며 김성은 사무총장인 김규식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한국 병합은 승인된 상태이므로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는 없다로 정리되었다(편지는 혹시 모르니 보관하라 명했다). 비망록은 1919년 1월 말 작성이 되었는데 김규식은 2월 1일 파리로 떠났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측근이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11월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상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여운형은 크레인 환영회에서 중국 처지를 동정하고 중국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라는 말에 자극을 받고 조선인들의 억압 상황과 호소를 담은 청원서를 작성하여 한 부는 크레인에게 전하고 다른 한 부는 밀러드(윌슨 대통령의 측근)에게 전달한다. 1918년 여름부터 여운형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등은 이미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는 상태였는데 크레인 청원서 제출을 계기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게 되었고 이때 김규식은 이사장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애초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시작을 한데다가 중국 내 입지도 김규식이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록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이사장은 되었으나 과거 동제사 조직과의 오랜 인연으로 동제사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그러나 동제사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제는 신한청년당이 상해의 독립운동세력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외로 밀사들을 파견했다. 간도와 연해주에는 여운형이, 일본에는 장덕수와 이광수가, 국내에는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가 활약했다. 특히 장덕수는 재일한인유학생과 상해 신한청년당, 동제사를 연결해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2.8독립선언을 연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에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1919년 2월 24일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상해에 있던 현순이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3월 9일에는 미국에 있던 한인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달되었다. 3.1운동은 민중이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자 독립운동 진영이 연계망을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뒤 잠시 중국인인 이욱영의 집에서 하숙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 집을 나온다. 4월 말에는 파리 샤토덩가 38번지에 파리위원회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4월 말에 상해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김탕, 5월 18일 전후에는 이관용, 6월 3일 황기환, 6월 말에는 조소앙, 7월 초에는 여운홍이 조직에 합류했으나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 및 비망록을 전달한 것은 5월 10일이었으므로 김규식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5월부터 6월 사이에는 김규식은 미국 측과 접촉을 시도하며 고군분투를 했다. 미 대표단은 3.1운동에 미 선교사가 개입했다거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책임을 지우려는 일본 측 주장(미 선교사와 3.1운동을 그런 식으로 엮는다니…)에 반대했으나 그 여파가 자국에 미칠 영향 때문에 묵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익이 없는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대통령 고문의 통역이나 국무장관의 개인 비서, 극동전문가 등은 김규식에게 대체로 호의적이고 한국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서 성과 없이 끝나자 김규식은 국제 연맹에 임시 정부를 승인받는 것으로 외교 방향을 전환했다. 통신국을 설립하고 통신전을 간행하였으며 다른 약소국가 대표단과 지도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김규식은 8월 파리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하는데 이승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승만은 국채 발행권과 신임장을 상해의 현순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국무경 지위를 이용해 미국 내 선전을 하고 청원 외교를 벌이다가 상해 임시정부 결성 소식으로 더는 그 자리를 버틸 수 없자 그 후에는 부여된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을 대통령으로 자칭해 부르며 활동을 한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로 들어가는 미주의 자금을 독점 관할하여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 워싱턴에 임시 공사관 본부를 설립하고 구미위원부를 결성하겠다고 하며 재가를 받아낸다.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그는 구미위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받았지만 공식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이승만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미 한인의 네트워크 및 교류는 한국친우회의 서재필이 관할하고 있는 상태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미 한인이 모은 독립운동자금인 애국금을 줄기차게 보내라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공채금 발행에 목을 맸다. 김규식이 상해와 북미 간 조율을 위한 타협책으로 애국금과 공채금을 병행하는 정책을 제기했지만 결국 이승만은 1920년 2월 애국금을 폐지한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활동할 때부터 과로 누적과 스트레스로 몸이 계속 좋지 않았는데 1920년 3월 병으로 뇌수술을 받는다(미국에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것 뿐인 것 같다). 그는 건강을 핑계대고 구미위원장 사직을 요청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구미에서 자신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승만에 의해 미국의 운동 세력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더는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호주를 거쳐 상해로 귀환한다(상해로 돌아가는 길도 험난했다고). 이 무렵 이승만도 상해 임시정부의 끊임없는 소환 요구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곳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줄 사람으로 김규식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거부하자 구미위원장직에서 그를 해임해버리고 만다. 현순이 뒤이어 구미위원장이 되었는데 그가 말많고 탈많은 공사관 설립 등의 폐지를 추진하자 이승만은 현순도 직위에서 해임해버린다. 이승만은 김규식과의 만남을 재요청했으나 비공식 국무회의 자리에서 김규식이 이승만 사퇴를 주장하자 그는 김규식을 학무총장 자리에서 해임했고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는 임정을 떠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3.1운동의 영향으로 호기롭게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는 이렇게 분열과 갈등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특사로 해보려는 노력은 일본 등 외부에 입김에 의해 힘이 제대로 실리지 못하며 실패했고 미주에 가서 외교적 힘을 보태려던 그의 생각은 이승만에 의해서 제대로 먹힐 수가 없었다. 이는 미주에 있던 박용만과 안창호도 마찬가지다. 미주 독립운동 세력에도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도 혼란을 가져온 이승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곱씹어도 참 답답해지는 부분이다. 


이제 3권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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