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과 그의 시대 3 - 열정과 냉정 사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22~1945) 김규식과 그의 시대 3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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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편까지 왔다. 3권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의 가장 긴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분량이 상당한데 그럼에도 기존에 알지 못했던 사실과 흥미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나 이 시기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선행 자료와 없거나 부족한 자료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든 행위, 자료들(문자, 구술 포함)을 엮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따른 결과이며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 저자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당연히 뒤에 애써주신 분들의 노력도 포함되겠다).


김규식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로서 또 한 번 부각이 되는 시기는 3권의 초반에 등장하는 1921~1923년까지의 활동들이다. 앞서 살펴보았으나 김규식은 이승만과의 갈등 끝에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김규식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고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극동민족대회에서 그는 연설을 통해 “러시아 혁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불태우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한국 문제에 대해서 3건의 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김규식은 1921년까지의 한국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놓았다. 극동민족대회의 결과로 중국은 국공합작이 도출되었으며 일본은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한국도 민족통일전선 조직 및 정당조직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레닌이 제공한 60만 루블은 한인사회당과 상해 임정을 대표한 밀사 한형권과 박진순이 취득했다. 자금의 성격은 조선의 독립운동 대표단에게 전달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이르쿠츠크파, 국민의회파가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전달된 레닌 자금의 처분을 둘러싸고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코민테른은 자금 중단을 하고 한국 대표단 외교교섭단 단장이던 김규식,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지도자들을 고려공산당 활동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린다. 


김규식은 한동안 침잠해 있다가 한중국제연대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중한호조사는 한중 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사 16인 중 한국 측 위원 중 김규식은 부이사장, 여운형은 교제과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간담회, 강연회 등 집회를 통한 한국 참상 알리기와 한국 독립 지원 활동을 요청하는 활동에 집중했다. 중한어학강습소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참여 인원 중 아내인 김순애와 모택동도 있었다고 한다. 

국민대표회의는 사분오열된 임시정부의 지도부를 개조하거나 제도를 변경 또는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자는 공감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개조파, 창조파,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참여로 시작했던 회의는 마지막에 임시정부 창조파 인원만 잔류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국민위원회를 설립했다. 김규식은 국민대표대회 대표가 아님에도 5개의 행정부서 중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민테른은 국민위원회 조직 형태에 대한 협의를 위해 김규식과 이청천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렀다. 김규식은 이르쿠츠크파 후보 당원의 자격이었으며 이청천은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대 대표로서의 자격이었다. 국민위원회는 코민테른에 한국 독립운동 중심기관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귀결은 한국독립당이라는 정당이었다. 국민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에 기초한 독립 운동을 표방했으며 무장력과 국제연대를 강령으로 선택했다. 대표로 선출된 위원들이 총회 참석에 늦어져 연기되면서 1924년에야 열릴 수 있었으나 레닌이 사망하고 독일혁명도 실패하자 소비에트의 흐름이 내부 안정화에 집중하는 흐름이 생겼다. 국민위원회는 이렇게 씁쓸한 결말을 맞았다. 


국민대표회의 후 김규식은 상해 프랑스조계 내 한인 유학생을 위한 중등 예비학교인 남화학원을 운영했고 상해 북단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했다. 독립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1927년에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유동열, 김영호 등과 함께 국민당(군벌인 풍옥상의 부대) 북벌에도 참여하여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천진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29년부터는 북양대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처럼 독립운동을 하지 않을때도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생활 유지를 할 수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한국 독립운동의 흐름은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 세력 위주였는데 김규식은 이 중 후자쪽이었다. 그는 중국 측 요청으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한중연대 조직 흐름에 참여했다. 이는 한국 5개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국 측의 민중자위동맹회가 합쳐져 만들어진 중한민중대동맹이었다. 김규식은 중한민중대동맹에서 선전, 모금 활동을 위해 미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미국은 대공황 여파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재미한인 대부분이 실직과 궁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한인 사회에는 독립 진영 내분으로 인한 후유증이 여전하여 독립운동 열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김규식은 미 서부와 동부를 돌며 중한동맹지부 결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동부 지역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뉴욕지부를 만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와이에서는 이용직, 한길수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용직, 한길수가 미일개전과 한국의 반일 움직임을 미 정보 당국에 선전하고 있을 때 김규식은 미국 전역을 돌고 있었다. 짧은 하와이 방문 기간 동안 김규식은 미 육군 정보당국과 인터뷰(1933.7)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을 중한민중동맹의 하와이 미주 대표로 인정하는 신임장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김규식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3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에 복귀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통일된 독립 운동의 흐름을 위해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경제적, 외교적 상황이 계속 나아지지 않자 김규식은 1935년 직을 사임하고 나와 사천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사천대학에는 1942년까지 있었으니 제법 오래 있었던 셈이다. 이때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던 시간이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 선언을 한 뒤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경제 후원과 군사 지원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는 광복전선과 민족전선의 대립을 만들며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창익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가 화북 지대로 이동하면서 중경에 남아 있던 김원봉 조선의용대 세력이 힘을 잃자 중국 국민당은 한국광복군에 힘을 실어주었다(이는 해방 후 국내파 정계 세력에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위기에 몰린 김원봉은 한길수, 재미한인사회와의 연계를 이용하고자 했다. 한길수는 김규식 및 중한민중동맹 관계가 이미 단절되었음에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와 공식관계를 맺었다. 한길수는 중국 내 한인좌파운동 세력으로 미주를 대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김원봉은 한길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독당과 임정 주류 세력에 대한 비난을 하는 동시에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세력을 과장하고(이미 조선의용대 주력군이 화북 지대로 이동했음에도)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및 동북항일연합군 등과의 연대를 강조했다(이 서신 내용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 정말 놀라웠다). 이렇게 김원봉은 한길수를 활용하려 했고 한길수는 김원봉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늘리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한반도 신탁통치론은 1945년 동아일보 오보를 통해 보도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갑작스런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이해하게 되었다. 1943년 카이로 선언 이전 이미 1942년 미 포춘지에 중경의 신탁통치 반대 여론 움직임이 기사로 실렸고 1943년 4월 시카고선의 워싱턴회의의 결과 보고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1943년 중반 이후가 되면 임시정부도 사태를 관망하지 않고 신탁통치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미국의 대중적인 대한정책의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서 강대국 간의 합의에 의한 공동 추구 표명 성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도 중국 내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간에는 암살단 사건이 벌어지고 공금 횡령으로 잡음이 많았다. 이는 중국 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이 통일되지 않은 탓도 컸다. 

중경과 미주는 연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때도 이승만은 갈등의 축이었다. 재미한족연합회와 주미위원부, 임정의 상호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회는 민회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명령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 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재미한족연합회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김구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참 여러 모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때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해방 후 이승만의 국내 지도자적 위치와 입장은 더 제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1945년 임시정부는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김규식은 부주석의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를 시도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군사적으로는 광복군-OSS 작전이 감행되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시도도 이어졌다. 


3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원래 해방 후 내용을 담은 4권이 있었으나 <1945년 해방직후사> 단행본으로 기출간된 바 있다. 그 책을 읽으며 해방 후 정국을 정리해야 비로소 이 시리즈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미 읽었으나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김규식이 해방 전 집필 중이었다는 영시집 <양자유경>은 1992년 출간되었으나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은 이미 나온 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는 있으나 각 진영에 따른 입장 차이에 따라 기술이 제각각이라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더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이처럼 8월 한 달은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읽으며 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훓으며 보냈다. 찌는 여름임에도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보냈는데 저자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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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9-01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해방 이후도 궁금했는데, 이미 출간되어 있다니 기다리는 수고는 좀 덜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거리의화가 2025-09-02 13:12   좋아요 0 | URL
8월 안에 끝낼 줄은 몰랐는데 다른 책은 제쳐두고 읽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 관련해서 그 책 읽으시면 맥락이 이어지실거고 단행본이니 부담스럽지 않으실 듯합니다^^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김규식과 그의 시대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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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로서 읽을 수 있는 고마운 책이다. 김규식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파리강화회의로 대표로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얻는 과정, 이후 1930~40년대 독립운동 세력 간에 균형자로의 노력과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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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상한 정상가족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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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이라는 제목부터 느꼈지만 내용은 더 불편하고 가혹하다. 몇 세대를 지나쳤음에도 한국은 가부장제와 가족주의가 공고하며 시스템은 여전히 낡아 있다. 개개인의 타인을 향한 공감 능력 키우기도 중요하나 개인과 가족에게만 출산, 양육을 기대서는 한계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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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1919~1921)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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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을 읽자 마자 얼른 읽고 싶어서 2권을 바로 읽었다. 2권의 내용은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과 3.1운동의 여파에 따른 상해 임시정부의 생성,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독립운동가 세력과 미국 독립운동 세력 간의 충돌, 미국 내 한인 세력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대목이지만 외부 환경, 내부 세력 간의 입장 차이로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이다.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김규식은 외몽골 등지에서 생활인으로 살았다고 1권 내용에서 언급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상해로 귀환했다. 그리고 재미 한인 지도자인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자신이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리며 미리 도움을 요청해두었다(이승만이나 안창호과 접촉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로써 그가 상해로 귀환한 것이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이 준비된 것을 알고 복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경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도 자신이 파리 강화회의 공식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라는 말을 전하며 조선의 해방을 주장하는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윌슨 대통령에게 쓴 독립청원서는 신정, 김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신정은 한국공화독립당 총재인 신규식이며 김성은 사무총장인 김규식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한국 병합은 승인된 상태이므로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는 없다로 정리되었다(편지는 혹시 모르니 보관하라 명했다). 비망록은 1919년 1월 말 작성이 되었는데 김규식은 2월 1일 파리로 떠났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측근이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11월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상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여운형은 크레인 환영회에서 중국 처지를 동정하고 중국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라는 말에 자극을 받고 조선인들의 억압 상황과 호소를 담은 청원서를 작성하여 한 부는 크레인에게 전하고 다른 한 부는 밀러드(윌슨 대통령의 측근)에게 전달한다. 1918년 여름부터 여운형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등은 이미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는 상태였는데 크레인 청원서 제출을 계기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게 되었고 이때 김규식은 이사장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애초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시작을 한데다가 중국 내 입지도 김규식이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록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이사장은 되었으나 과거 동제사 조직과의 오랜 인연으로 동제사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그러나 동제사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제는 신한청년당이 상해의 독립운동세력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외로 밀사들을 파견했다. 간도와 연해주에는 여운형이, 일본에는 장덕수와 이광수가, 국내에는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가 활약했다. 특히 장덕수는 재일한인유학생과 상해 신한청년당, 동제사를 연결해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2.8독립선언을 연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에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1919년 2월 24일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상해에 있던 현순이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3월 9일에는 미국에 있던 한인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달되었다. 3.1운동은 민중이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자 독립운동 진영이 연계망을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뒤 잠시 중국인인 이욱영의 집에서 하숙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 집을 나온다. 4월 말에는 파리 샤토덩가 38번지에 파리위원회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4월 말에 상해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김탕, 5월 18일 전후에는 이관용, 6월 3일 황기환, 6월 말에는 조소앙, 7월 초에는 여운홍이 조직에 합류했으나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 및 비망록을 전달한 것은 5월 10일이었으므로 김규식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5월부터 6월 사이에는 김규식은 미국 측과 접촉을 시도하며 고군분투를 했다. 미 대표단은 3.1운동에 미 선교사가 개입했다거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책임을 지우려는 일본 측 주장(미 선교사와 3.1운동을 그런 식으로 엮는다니…)에 반대했으나 그 여파가 자국에 미칠 영향 때문에 묵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익이 없는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대통령 고문의 통역이나 국무장관의 개인 비서, 극동전문가 등은 김규식에게 대체로 호의적이고 한국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서 성과 없이 끝나자 김규식은 국제 연맹에 임시 정부를 승인받는 것으로 외교 방향을 전환했다. 통신국을 설립하고 통신전을 간행하였으며 다른 약소국가 대표단과 지도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김규식은 8월 파리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하는데 이승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승만은 국채 발행권과 신임장을 상해의 현순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국무경 지위를 이용해 미국 내 선전을 하고 청원 외교를 벌이다가 상해 임시정부 결성 소식으로 더는 그 자리를 버틸 수 없자 그 후에는 부여된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을 대통령으로 자칭해 부르며 활동을 한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로 들어가는 미주의 자금을 독점 관할하여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 워싱턴에 임시 공사관 본부를 설립하고 구미위원부를 결성하겠다고 하며 재가를 받아낸다.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그는 구미위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받았지만 공식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이승만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미 한인의 네트워크 및 교류는 한국친우회의 서재필이 관할하고 있는 상태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미 한인이 모은 독립운동자금인 애국금을 줄기차게 보내라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공채금 발행에 목을 맸다. 김규식이 상해와 북미 간 조율을 위한 타협책으로 애국금과 공채금을 병행하는 정책을 제기했지만 결국 이승만은 1920년 2월 애국금을 폐지한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활동할 때부터 과로 누적과 스트레스로 몸이 계속 좋지 않았는데 1920년 3월 병으로 뇌수술을 받는다(미국에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것 뿐인 것 같다). 그는 건강을 핑계대고 구미위원장 사직을 요청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구미에서 자신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승만에 의해 미국의 운동 세력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더는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호주를 거쳐 상해로 귀환한다(상해로 돌아가는 길도 험난했다고). 이 무렵 이승만도 상해 임시정부의 끊임없는 소환 요구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곳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줄 사람으로 김규식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거부하자 구미위원장직에서 그를 해임해버리고 만다. 현순이 뒤이어 구미위원장이 되었는데 그가 말많고 탈많은 공사관 설립 등의 폐지를 추진하자 이승만은 현순도 직위에서 해임해버린다. 이승만은 김규식과의 만남을 재요청했으나 비공식 국무회의 자리에서 김규식이 이승만 사퇴를 주장하자 그는 김규식을 학무총장 자리에서 해임했고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는 임정을 떠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3.1운동의 영향으로 호기롭게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는 이렇게 분열과 갈등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특사로 해보려는 노력은 일본 등 외부에 입김에 의해 힘이 제대로 실리지 못하며 실패했고 미주에 가서 외교적 힘을 보태려던 그의 생각은 이승만에 의해서 제대로 먹힐 수가 없었다. 이는 미주에 있던 박용만과 안창호도 마찬가지다. 미주 독립운동 세력에도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도 혼란을 가져온 이승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곱씹어도 참 답답해지는 부분이다. 


이제 3권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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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 (1881~1918)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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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했던 책을 만나는 일은 정말 소중하고 좋은 경험이다. 저자가 김규식 평전을 준비 및 집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들뜬 기분이었는지 아직도 그 감정이 생생하다. 201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서 2023년까지 초고 완성을 했으니 집필 기간만 자그만치 10년이다. 시작도 끝도 어려웠을 작업이었을텐데 무사히 나와서 정말 독자로서 감사할 뿐이다. 


책의 제목을 ‘김규식 평전’이라 하지 않고 ‘김규식과 그의 시대’라 한 것은 왜인가. 김규식은 대한제국부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까지 넒은 시기를 거쳐 살았고 조선, 미국, 중국의 상해, 북경, 몽골, 파리 등 다양한 공간에서 활동했으며 다양한 사람과 교류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만으로 정리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1권의 내용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 관계, 성장 환경과 미국에서의 생활, 조선에서의 활약과 상해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이자 해방 후 중도 우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권은 생소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나 또한 몰랐던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그동안 그를 너무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김규식의 부친은 김용원으로 철종의 어진을 그릴 정도의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는 고종에 신임을 얻어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었고 일본 공관에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사진술, 유리제조술, 금은분석술을 배웠다. 당시 사진 촬영에는 유리 원판이 사용되었고 감광제를 바른 후 은 용액에 담그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진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귀국 후 촬영국과 순화국(서양 담배 제조회사)을 개설하였다. 

1884년 김용원은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된다. 고종은 조러조약 비준서 교환, 조선과의 육로 통상 문제 해결, 외부 압력이 있을 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한 공식 사절단 파견 등을 요청했고 러시아 측은 이에 화답하는 밀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청일 모두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고종은 살아남기 위해 부정,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고 김용원은 희생의 제물이 되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김규식은 얼마 후 사망한 어머니, 많았던 형제들도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1886년 만 5살 남짓 된 상태에서 언더우드 고아원에 들어갔다. 김규식의 어학 재능은 출중했던 것 같다. 배운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 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통역을 맡을 정도였다 한다. 1891년 유배형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함께 1년 남짓 살다가 할아버지, 큰 형마저 사망하자 그는 스스로 서울로 가 관립영어학교를 수학하고 잡화점에서 영어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독립신문사에서 영어 직원 겸 회계로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16살 무렵 김규식은 의화군의 도미 유학 준비를 위해 언더우드 선교사와 외부 통역관 박용규와 동행하게 된다. 당시 의화군은 고종의 잠재적 정적이었는데 일본에 체류 중임에도 그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고종의 명령으로 반강제적으로 도미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화군은 생면부지인 김규식과의 미국 동행을 거부하고 박용규와 수행원인 신성구와 유학길에 오른다. 김규식은 의화군이 떠난지 40일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더우드와 로녹대학 학장인 드레허와의 인연으로 세일럼의 로녹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로녹대학은 미국 남북전쟁 중에 개교하였으며 1876년부터 외국인 학생을 받기 시작한 곳이었는데 서병규가 한국인 최초의 입학생이었다. 김규식은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문학회 활동을 하기도 하고 대학 학보에 글도 썼으며 사교클럽에 간부로 선출되면서 연설 능력도 키웠다. 

사실 나는 그가 프린스턴 대학에 재학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는데 이는 시중에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고(프린스턴 대학의 재학생 목록에 김규식이란 이름이 없다). 


1904년 국내에 들어온 김규식은 YMCA 교사를 하다가 1905년에는 고종의 밀사로 비밀 접선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언더우드의 개인 비서로 일을 했는데 총독부가 교수직을 제안하자 이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그는 신해혁명 후 자극을 받아 신규식, 박은식이 만든 동제사 활동에 참가한다. 동제사는 독립운동단체이기도 했지만 유학 한인 학생들의 생활 학습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 김규식은 신규식 자택에서 거주하면서 서서히 동제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913년 반원세개 운동인 토원운동이 벌어지자 중국인 의사 모대위란 사람과 적십자 조직을 만들어 출동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당시 중국 전역에서 원세개에 반대하는 세력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원세개 세력에게 진압당했다고). 동제사는 중국에 있는 한인 학생들의 도미 유학을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는데 김규식은 상해 거점의 한국 학생 도미 네트워크의 중심 인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추구 및 망명 정부를 수립, 이를 위한 계획을 추진한다. 신한혁명당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다는 가정 하에 독일,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하고 한국 독립의 방략을 추구했다. 독일, 중국은 제정국가이므로 이왕가를 이용하기로 하고 고종과 연락해 그를 당수로 추대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신한혁명당은 신규식, 박은식을 비롯해 신해혁명을 주도한 친손문세력이자 공화주의 세력과 성낙형 계열의 근왕주의, 친원세개 세력도 있었는데 이는 전략적인 결합이었다. 작전을 위해서는 고종과 접선을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에 잠입한 혁명당 관련자들은 고종을 만나기도 전에 일제에 체포되어 실패했다. 원세개가 사망하고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이전에 추구한 복고주의 왕정이 아닌 공화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목표 쪽으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명, 주권재민론을 펼치며 3.1운동,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김규식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한 중국 내 독립운동을 위해 의주에 잠입해 자금 모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군사 훈련 학교를 운영하고자 유동열, 이태준과 외몽고의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으로 넘어가게 된다. 김규식은 러시아 상업학교에서 교사를 하기도 하고 러시아인들에게 영어 개인 강습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몽골리언프로듀스사에서 회계 및 비서 일을 했고 앤더슨마이어사에 취직해서 상해, 천진, 홍콩 및 장가구 지점의 부지배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제는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끊임없이 추적했는데 1914년 이후 김규식의 이름은 종적을 감춘다. 1916년 장가구, 외몽고로 넘어간 뒤부터는 위의 활동 내역처럼 생계를 위한 활동에 집중한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그의 청년 시절이 다양한 활동으로 채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유대, 의화군(의친왕)과의 연결고리도 놀라웠고 고종은 아버지 대부터 끈질긴 고리였음을 느끼기도 했다. 유년기 버려진 고아에서 언더우드의 양자로 입적되어 미국 유학을 거쳐 지성인이 되기까지가 한 편의 이야기였다면 국내에서 종교,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망명 뒤 혁명 운동과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일은 또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2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시기이자 그의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3.1혁명 이후부터 1921년까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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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7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빨리 읽으셨군요. 저는 엄두가 좀 안나던데요. 두께가 참.... 김규식 선생 역시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된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 반대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면서 이승만에 대립했던게 결정적이지 않을까싶은데요. 지금이라도 우리 역사가 이런 분들의 삶을 복원해나가야 하겠죠. 한 인물에 대해 이정도의 책이 나온건 정말 대단하다싶은데 천천히 저도 읽어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5-08-22 10:20   좋아요 1 | URL
저평가된 분 중에 한 분이라는 말 정말 공감해요. 사실 근래 들어 여운형 선생은 관련 자료나 책들이 많이 쓰여짐으로 인해서 대중들에게도 이제는 꽤나 알려지고 그 지위도 복원되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향후를 위해서도 이렇게 참고할 수 있을 만한 책이 나오게 된 것이 다행인 것 같습니다.

희선 2025-08-18 0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세권이군요 1914년 1916년까지만 있어서 그 뒤는 모르는 건가 했습니다 2, 3권에 더 나오겠네요 저는 잘 모르는 분입니다 독립운동 하신 분을 다 아는 건 아니기도 하네요 부끄러운 일이네요 거리의화가 님은 이 책을 기다리시고 이렇게 만나셔서 기쁘시겠습니다 다는 아니어도 여러 가지 알게 되실 테니...


희선

거리의화가 2025-08-22 10:21   좋아요 0 | URL
네^^ 사실 저도 김규식 선생님 관련 역사는 너무 소략하게만 알고 있어서 군데 군데 비어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일단 1권만 읽어봤는데도 몰랐던 사실이 많아서 정말 놀랐답니다. 기다리던 책을 받아보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감사합니다^^*

얄리얄리 2025-08-18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복절에 한겨레에서 본 책 소개가 생각나네요. 제목이(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해방 시기 리더가 김규식이라면‘이었나.. 그만큼 후대 관점에서 보아도 아까운 인물이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고, 저자나 분량만 보아도 그 의미와 들인 공력이 어마어마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다 읽을 자신이 없어서, 화가님 리뷰를 기다리려 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5-08-22 10:23   좋아요 0 | URL
한겨레에서도 이 책이 소개됐군요. 제가 보는 한국일보에도 이 책이 소개되었거든요. 김규식 선생 관련하여 기존에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있고 모르던 이야기도 많아서 읽는 것만으로 즐거운 시간입니다. 도움이 된다면 저야 기쁘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