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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브루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7
R. H. 모레노 두란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이 아버지 없는 자는 고통과 향수가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누워 있는 곳에 세워진 십자가를 찾는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먼 시대의 지시물이라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의 사진과 느낌, 그리고 희미한 기억이 서로 교차하면서 행방불명된 지시물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의 아들이라면서 대표적 본보기로 나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P415
주인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의 후예라는 위치에서 태어나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과 전쟁에 대한 의문점을 갖고 관련 연구를 시작한다. 국내외 문서보관소와 도서관의 자료부터 찾는 것을 시작으로 알려진 일들이 과연 진상인가 궁금증이 일면서 사건에 더 파고들게 된다. 하긴 수치로 기록된 통계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이며 기록의 사실들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을테니 참전한 군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어보자 생각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자료나 보고서에서 기록된 수치적 통계와 참전 용사들의 증언은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로서 기록과 현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결국 보고서와 증언이 미묘하게 겹치는 공간을 추적하고 빈 공간을 다른 자료를 통해서 교차 분석하는 것만이 가장 가까운 진실에 다가가는 일이 아닌가 싶다.
전쟁 발발 후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해외 국가가 참전했다(그 시기와 규모만 다를 뿐). 콜롬비아도 그 중 하나다. 콜롬비아군은 총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파견되었다. 1951년 5월에 제1파견대가 에이킨 빅토리호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고 휴전이 가까워질 무렵(1953년 3월) 제2파견대가 출발했다. 시기적으로 보면 짐작할 수 있듯 1차 파견대는 실 전투(녹십자 전투, 바르불라 전투, 불모 고지 전투 등)를 겪었으나 제2파견대는 부산에 도착할 무렵 휴전 즈음이 되어 실 전투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당시 콜롬비아 내정은 혼란스러웠다. 명분은 국가를 위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정의 눈을 외부에 돌리고자 대통령은 준비도 되지 않은 이들을 전쟁터에 내보냈다.
천 명이 넘는 신병들이 레알 거리를 행진했어요. 마치 엄청난 승전보를 울리러 가는 것처럼. 오로지 낙관적인 친구들만, 우리를 보면 적들이 부리나케 숨어버릴 거야, 하고 말했어요. 난 군기 인도식을 거행하면서 대통령이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말끝마다 그가 매일 짓밟았으나 검열 때문에 그 누구도 문제 삼지 못했던 단어인 '자유'를 입에 올렸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자유가 범죄인데 머나먼 아시아 국가로 가 자유를 위해 죽으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 P54
자유를 억압당하는 와중에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나가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을 법하다. 이는 콜롬비아가 내정도 어지러웠지만 당시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현실이다.
한국전쟁은 1951년 무렵이 되면 전선이 이미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동안 격렬한 전투들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다. 콜롬비아 1파견대군은 (이전과는 달라진 전투적 양상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중국군을 비롯한 북한군과 어려운 전투를 치러야 했다. 미군의 강요와 입김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은 후방에 있는 미군들을 위해 전방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예를 들어 미군 앨라배마 연대 병사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전선의 돌파구를 열고 앞장서는 일 같은 것).
전쟁을 마주한 어느 병사는 당시 전쟁터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한강변의 화천지구를 따라가고 있었고 나는 휘파람을 불었어요. 종종 새의 노랫소리가 들렸고 도로변에 탱자나무가 한 그루 보였지요. 우리는 마치 굶주린 벌레들처럼 바로 열매를 따먹었어요. 저 멀리 버려진 집 몇 채와 폭격 맞은 집들이 보였어요. 이런 평화는 지옥 속의 전원곡이었지요. 그러나 정찰에 나선 날은 모든 게 달랐어요. 광활한 사막, 재로 뒤덮인 평원,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황무지, 정말이지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 없었죠. 침묵에 잠긴 참호가 있을 뿐이었지요.(P36) 전쟁이 시작하고 이미 1년이 지난 즈음 한반도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생각지도 못했던 통역이었다.
가끔씩 미군들이 말하고 연락장교가 통역하고 나머지 군인들이 끝없는 논쟁을 벌일 때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군들 전략에 오류가 있거나 그것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연락장교가 마음대로 통역하는 바람에 그런 끔찍한 소동이 벌어졌던 거거든요. ... 발단은 미군들이 참호로 들어가 더 넓게 파라는 뜻으로 '호우hoe'하고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괭이' 혹은 '파다'라는 의미였지만, 우린 자기들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우리에게 욕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호그hog', 그러니까 '돼지'라고 들었던 거죠. - P174
그러고 보니 낯선 땅에 가서 소통을 해야 하는데 통역을 어떻게 했을까 싶은 것이다. 전투에서 여러 개의 전략이 충돌하며 갈등이 일어나고 언제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는 와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생각해보면 당황스럽다. 전쟁만큼 소통이 중요한 때가 있을까. 말귀 못아먹어서 작전이 잘못 전달되면 나도 너도 죽고 다 죽는 일인데 허허. 단 한 번도 통역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좀 놀라웠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언급조차 안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 같다.
공감가는 이야기는 역시 미국의 매카시즘, 반공주의였다.
몇몇 사람들은 서양이란 단어는 미국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지요. 파나마 아래쪽과 적도 북부를 끊임없이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도살장 말입니다. ... 우리가 한국에 관해 뭘 알고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 무조건 복종하는 통역사는 괴로워하는 목소리로 그들을 빨갱이, 빨갱이 개자식들, 빨갱이 살인자라고 칭했지요. - P167
한국은 당시 매카시즘 광풍의 한복판에 있었다. 어쩌면 미국 국내보다도 전선에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며 한편에선 자유주의와 다른 한편에선 공산주의의 길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편에 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콜롬비아도 같은 이념을 강요받았다.
(이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이 홉스봄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으로 흥미로웠다. 홉스봄의 이야기는 지금은 철지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한국이 이념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세기가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세기이며 진정한 야만의 극치라는 것은 틀린 소리가 아니라네. 제3차 세계대전은 한국에서 시작됐거든. 많은 사람들이 줄기차게 지칭하던 '냉전'을 말하는 것이네. 한국전쟁은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전쟁터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지. 새로운 방식이자 새로운 전략이었어. 미국은 자기들이 한국에서 싸우는 건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백오십 대의 중공군 비행기들이 사실상 소련인들이 조종하는 러시아 비행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네. 그러니까 내 말은 콜롬비아는 사실상 미국의 사주를 받아 한국에 가서 북한군과 싸웠지만, 북한군이 중공군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도 모른 채 러시아군과 싸운 꼴이 되었다는 소리야. - P281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일은 어렵다. 포르노 잡지 사진을 제작 및 보급하여 돌려보는 병사들과 유곽과 유흥업소를 드나드는 일을 무훈처럼 떠벌리는 병사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투 고지를 여성의 신체 기관에 빗대어 묘사하는 부분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콜롬비아군은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모가 사망하여 고아가 된 아이를 부대원으로 들이는데 이들이 보고 배우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모성을 찾아, 실연을 찾아 성을 찾아다닌다는 논리가 말이 된다고 보는가? 그저 구실이고 허언이며 집착이자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하지만 이것이 전쟁터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현실이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물며 전쟁터 뿐이겠는가).
파견된 콜롬비아군은 1954년 10월에야 부산을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1953년에 휴전협정이 맺어졌음에도 1년이 훌쩍 지난 기간동안 이들은 전선을 정리하고 봉사하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이들이 귀국하자 그야말로 환영 인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바라고 떠났던 이들에게 실제로는 원하는 만큼 주어지는 것은 없었다. 살아 돌아온 병사 중 몇몇은 범죄의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정부는 군대 파견으로 미국에 성의를 보였고 국민에게 체면 치레를 했지만 이들은 정작 돌아온 것이 작지 않았나 싶다. 물론 명예는 다른 일이겠지만(명예가 밥 먹여주나. 실제적인 것이 있어야지^^;).
이 책을 통해서 콜롬비아군이 한국에 어떤 배경으로 파견되었고(정치적 상황이라던지) 전쟁터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등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읽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처럼 찜통 같은 계절에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추천하지 않는다(울화통 터짐 주의. 분노 조절 장애 주의).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이는 건 내가 보기엔 정치적 이유 때문이야."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