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읽자]를 읽자: by 에티엔 발리바르

"목적론적-분석적 방법‘의 핵심은 그 진화의 주어진 시기의 어느 한철학자의 문제설정을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분리된 요소들로분해décomposer하고, 그다음 이 분리된 요소들에 이 요소들을 기다리는 미래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가치를 할당해 이 분리된 요소들의 내재적인 종말목적으로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의식적인것으로 이 철학자의 문제설정을 회고적으로 표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는 안전장치는 하나의 이론적 계기[순간]의 일관성cohérence을 존중함과 동시에, 이 이론적 계기의 의도intention를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혹은 복수의 역사적 맥락들 내에 이 일관성을 기입하는 것입니다. - P35

첫 번재 중핵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다음 명제들의 결합인데, 이 명제들에따르면, (1)‘모든 과학은 이데올로기의 과학‘(이 테제는 마슈레가 최초로 정식화한 것인데, 그러나 알튀세르주의자들에게는 가장 뜻밖의, 그리고 가장 불편한 장소에서, 그러니까 ‘상품물신숭배‘에 관한 분석들 내에서 규약들protocoles을 찾아내고자 했던 랑시에르 또한 자신만의 방식대로 발전시켰던 테제이지요)이며, (2)자신의 대상에 대한 하나의판으로도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과학은 선재在하는 이론들이선재하는 이론들 내에서 이 대상은 인식connu되지는 않으면서 인지reconnu (혹은 ‘식별‘identifié)되었을 뿐이었죠에 관한 ‘증상적 독서‘를 수단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P46

오늘날 제가 존재론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두 번째 중핵은 … 인류사의 각계기들 내에서 절대정신 도래의 실현을 ‘독해할 수 있게 해주는 ‘본질적 절단면‘coupe d‘essence이라는 헤겔적(혹은 사람들이 헤겔의 것이라 간주하는) 관념과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되는 ‘현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하는 비-동시대성‘non-contemporanéité à soi du présent이라는 테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부지점에서 이 관념을 [시간성에 내재적 다수성과 이질성을 부여하는] 다른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시도들과 맞새울 수 있는데, 그 결과는 항상 진화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반박이지요. - P47

마지막 중핵을 구성하는 것은 정치경제학의 ‘대상‘마르크스적 비판으로 인해 (자본축적의 균형 조건들에 대한 하나의 이론으로부터 이 자본축적의 모순과 갈등에 대한 하나의 이론으로 나아감으로써) 형태변화métamorphosé가 되어 나오는 바로서의정치경제학의 ‘대상‘에 대한 정의가 취하는 가능조건과 구성요소에 관한 성찰입니다. - P49

이론의 실천은 어떠한 ‘실천의 우위‘의관점으로부터 우리가 이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표상 내에서만 (하지만아마도 이 표상이 존재 가능한 유일한 것은 아닐 터인데) 이론주의적입니다. ‘이론주의‘는, 아마도 그 끝이 존재하지 않을 왕복운동 내에서,
‘실천주의‘의 전도된 이미지입니다. 그렇지만 이론의 가치는, 이론이이론에 속한다는 사실로부터, 혹은 이론이 이론 그 자체로서 자율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선제적으로d‘avance 판단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이 이론의 내용을 그 적용에 대해, 그리고 이 이론의 고유한 일관성이 - P54

라는 관점에서 또한 분석해야만 합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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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젠더는 성차에 관한 지식으로 사회적 구성물이다. 이때 성차는 가변적인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과거에 대한 역사(적 재현 방식)가 현재의 젠더 구성에 일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사가 역사학에서 차지하는 낮은 위상과 한계에 부딪쳤을 때 저자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이때 포스트구조주의 담론인 의미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만났고 이것을 하나의 분석 도구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푸코는 권력이 양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고 관계적이고 구성적인 형태라고 말했다. 권력이 어떤 형태를 지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프로이트는 성차는 영원한 수수께끼라며 불가해하여 정확한 기술이나 경계지을 수 없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젠더는 역사적, 문화적, 시간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정치와 젠더는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문화적 개념에 투명한 의미,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문화의 어휘 목록에서 의미란 고정돼 있지 않으며 역동적이고 항상 유동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의 연구는의미를 확립하는 갈등적 과정, 젠더와 같은 개념들이 고정된 외연을 획득하게 된 방식, 규범적인 사회적 정의定들에 대해 제기된 도전들, 그리고이 도전들에 대한 대처 방식 - 다시 말해서, 어떤 사회에서 의미가 구축되고 실현될 때 관련된 힘의 작용, 즉 정치-을 주목하게 만든다.
정치를 말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인과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미가 통제되거나 경합하는가? 그 이해관계의 본질은 무엇이며, 기원은 무엇인가? 이들 질문에 답할 수 있는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적으로 결정되고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이해관계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담론적으로 생산되고상대적이며 맥락적인 이해관계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 P29

텍스트와 문맥, 허구와 사실, 예술과삶 등을 대립시키는 것은 문학과 역사라는 분과 학문의 자기 재현들을 구조화한다. 문학과 역사학은 서로의 연구 대상과 해석 방법의 대비를 통해각자의 전문 지식을 정의한다. 또한 서로를 반사판으로 활용함으로써 스스로의 모호함을 해결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을 별개의 지식 분야로 정체화해 주는 규칙과 관례들이 명료해지며, 이때 필연적으로 특정한 연구 방법과 소재를 강조하게 된다. - P34

젠더의 불확정성-결코 성차의 의미들을 최종적으로 고정시킬 수없는 젠더의 무능에 대한 나의 사유는, 처음에는 미셸 푸코의 영향을받은 것이었다. 근대성 속의 편재하는 권력,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보통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권력에 대한 그의 주장은사회사 그리고 나중에는 문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푸코는 권력을 어떤대상으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그것을 규칙, 법, 부, 폭력의 독점 같은 것들과 관련된 어떤 양도 가능한 자산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그는 권력을 관계적이며 생성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그것을그 효과의 측면에서 이해하려 했다. 권력은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것이고,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며, "담론을 따라 흐르고, 사람들 사이를지나는" 것이었다. 문제는 누가 권력을 잡는가가 아니라 권력이 어떤 형태를 띠며 어떤 작용을 하는가였다. - P11

알렌카 주판치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프로이트의 발견에서핵심은 정확히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자연적이거나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성적인 것은 정확하게 기술되거나 경계 지어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경계가 정해지거나 한계 지어질 수 없다는 불가능성 그 자체다. 성적인 것은 인간 활동이나 삶에서 따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과 성차라는 것이 인간 활동의 어떤 다른 분야에대한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들과 관련한 개념화 속에 항상 이미 얽혀 들어 있다.
성차를 영원한 수수께끼로 보는 포스트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이론화는 내가 젠더를 역사화하는 데 핵심적이다. 남/여 범주는 정치적 시기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띠며 그 시기를 이해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 P13

자기를 따른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안전을 최대한 제공하겠다고 트럼프는 약속했다. 그의 특출한 남성성은 경제적 불황과 사회 분열, 그리고 테러리즘의 위협에 대한해결책이었다. 원부의 복원에 대한 판타지와 많은 백인들이 상실해 가고있다고 혹은 상실했다고 생각한 특권의 복원이 연관돼 있음은 대선 이후점점 더 명확해졌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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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삶
마리 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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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닌 근본적인 취약함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수용하게 하며, 우리의 근본적인 결핍은 삶이 지루해질 틈이 없도록 창의성을 맘껏 펼칠 기회를 열어 준다.


나는 원래도 일상이 불안해지는 것을 위태롭게 생각하는 성향이었는데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주어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정을 더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욕망을 내치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불안해지는 것을 거부했던 것은 아닐까. 


불안은 우리가 가진 이상이 기성 문화가 제시하는 이상과 맞지 않더라도, 우리의 욕망과 이상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신호다. 

따라서 우리 기질이 진정성을 갖길 바란다면 우리는 욕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욕망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볼 때 평소 대단하다 생각했던 적이 많다. 통제하고 견디는 일에 익숙하여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겁이 나고 소심해졌던 경우가 많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사회적 시선과 타인의 반응에 지나친 의식을 가지는 문제였다. 


사회적 활동에 몰두하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져 존재에 일관성이 생기므로 유혹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중요한 실존적인 선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고, 그 외의 것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게 돼 가능성의 장이 축소된다.


종종 내가 껍데기 같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길 때가 있었다. 나의 본성과 기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상태에서 자아 찾기는 외면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냈었다. 공허할수록 다른 것에 집착했고 그럴수록 더 공허해졌다. 함께 사는 사람이 처음 진지하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종종 떠올린다. “너 그때 삐에로 같았어.” 웃고 있지만 슬퍼 보였다는 의미였다. 사실은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였고 자아는 불안했고 엉망인 상태였다. 


니체는 숭고한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신을 더욱 강인한 모습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상처가 되는 기억을 그저 떨쳐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불가해하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삶을 매우 존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가 현재에 과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실존적 통찰력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동의한다.

고통 없는 삶이란 비현실적인 것으로, 과거의 고통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그 고통을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자원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니체의 견해에 공감한다.


저자는 과거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니체의 의견을 이야기한다. 니체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과거에 여러 부정적인 경험을 겪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사리 잊고 나아가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래에 비슷하거나 더한 상황이 올 때 과거의 아픔과 고통의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침은 될 것이다.


사회는 관리를 위해서라도 특정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사회적 가치와 기성 문화가 모두 옳은 가치는 아니다. 그 가치에 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타자화되고 배제된다. 과연 우리가 현대에 살면서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들로 외면되는 것들이 없는지 돌아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그저 말로만 개성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사실 우리는 서로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좋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여론에서 미용 상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다양한 것을 쉽게 팔 수 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생각을 예상할 수 없을 때가 위태로운 순간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자신만의 독특한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정치 경제 기관들은 더욱 더 자기 잇속을 차리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 책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개념은 ‘큰 사물’과 (이에 대응하는) ‘반복 강박’이다. ‘큰 사물’은 라캉에 의해서, ‘반복 강박’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나왔다. 

애초에 우리가 이 낙원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사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존재였던 적이 없으며 단순하고 마음이 태평하기만 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낙원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조금도 굽히지 못한다. 이 실낙원을 "큰사물the Thing(환상의 대상)"로 명명하는데, 이 대문자 T는 그것이 그저 평범한 환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매우 특별한 것임을 나타낸다.

반복 강박이란 우리가 전혀 이롭지 않은 행동의 청사진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진지하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똑같은 대인 관계 문제, 똑같은 직업적 딜레마, 똑같은 성가신 "문제"에 다시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큰사물의 울림이 우리를 반사회적인 것으로, 즉 문화적 규범에 대한 저항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끈다면, 반복 강박은 우리를 사회화하는 트라우마를 되풀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론적으로는 큰사물의 울림은 우리를 기질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한 하나의 저항이라면, 반복 강박은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서구 세계의 물질주의는 사실 매우 부끄러운 행태를 보인다. 평범한 백화점이나 교외의 쇼핑몰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상품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우리 마을을 어지럽힌다. 밤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빛을 발하는 온갖 사물 또한 마찬가지다. 또한 서구 사회가 누리고 있는 풍족함이 종종 상대적으로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회를 희생시켜 가며 얻은 것이라는 사실은 큰사물의 윤리 규범을 속히 소생시킬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며 살고 있는 가치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 삶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결코 알 수 없다. 지금의 일을 몇 년 더 할 수 있을지 50세 넘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인지 갑자기 아프지는 않을지 가까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경험을 하게 될까 늘 두렵다. 그렇지만 이 끝도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지금의 삶을 당장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지 않나 생각한다. 


삶이 다소 불분명해 보이고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모호함투성이거나 삶에 자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삶의 명확함이나 자유가 무조건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때로는 이를 얻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자기계발서 같기도 하고 인문교양서 같기도 한… 이 책은 묘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자기계발서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진다. 기질, 욕망, 사회와의 타협 등… 다만 우리가 살다 보면 부딪치는 갈등과 문제를 여러 개념과 이를 다룬 철학(자)으로 설득력 있게 다루었다. 

자기계발서를 읽은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2010년 이후로는 읽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비슷비슷한 패턴과 어찌 보면 광고성 같은 내용들에 피로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계발서가 이래야지 생각했다. 부를 쌓고 성공에 다가가고 그런 책들은 이제 더는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한다고 여긴다. 어떻게 내 삶을 가꾸면서 타인과 살아나갈지, 사회와 균형을 맞추며 나아갈지 그런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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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01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자기계발서!
 


처음에 읽는다고 덤볐을 때 무모하리만치 겁이 없었다는 것을 이번에 재독하면서 깨달았다. 그때는 급하게 삼켜서(너무 짧은 기간에 읽으려고 했음) 그저 특정 부분에 꽂혔을 뿐 전체적인 이해에 다가가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작년 말 함께 읽는 책으로 선정되어 3달 간에 걸쳐 이 책을 재독할 수 있었던 점은 그런 의미에서 참 감사한 일이다.


이 책은 서설에 핵심이 집약되어 있다. 1~3부에 걸친 내용은 관련 예시로서의 나열로 보면 될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의 전반기는 유럽(주로 영국과 프랑스), 후반기는 미국을 중심으로(제국주의의 패권의 이동에 따른) 서양이 바라본 동양에 대한 사고와 관념적 체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동양은 중동, 아랍과 이슬람의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어져서 이 세계에 대한 개념과 지식에 소홀한 나는 그 예시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고, 잘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지루하게 다가왔다. 한 번 읽어서 이해가 안 되어서 재독하면서도 한 챕터를 반복해서 읽은 경우도 있었다(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에는 동양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되었다. 유럽은 동양에 우위를 선점하며 군림했다. 동양에 관한 지식은 서양에 의한 지식과 힘을 배경으로 동양과 동양인, 동양세계를 날조했다. 담론은 상상의 지리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속에는 동양을 말하고 쓰는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동양을 이질적인 것으로 성격짓고 연극무대 속 삐에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때의 동양은 유럽을 위한, 유럽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일 따름이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점령을 시도했다. 그는 이집트를 오리엔탈리즘의 무대로 포섭하기 위해 <이집트지>를 제작함으로써 기존의 이집트사나 동양사를 대체했다. 비록 이집트 점령은 군사적으로 실패했으나 동양을 유럽에 접근시키고 완전히 흡수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에르네스트 르낭의 저작,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수에즈 운하 건설, 영국의 이집트 점령).


19세기 초 문헌학이 도입되고 난 후 오리엔탈리즘은 비교 연구 분야로서 변모하고 동양은 서양에 지적으로 종속되었다. 사적인 오리엔탈리즘(동양 체제, 개인적 증언에 의존)은 전문적 연구로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로서 순례지는 서양인의 시선에서 살아 있는 그림으로의 동양으로서 자리하며 재구성되고 재조명되었다. 오리엔탈리스트는 인간을 집합체로 파악하고(유형화) 일반 추상 개념으로 인식해했으며 개인에 대한 관심에는 무지했다. 지식의 형태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앞선 학자로부터의 기술을 기반으로 이론을 답습함으로써 동양의 현실은 배제되는 오류를 낳았다. 따라서 동양은 실재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20세기 오리엔탈리즘은 기반 연구 조직의 확대, 지리학의 발전, 출판업의 발달 등에 의한 전파 능력의 증대의 영향을 받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오리엔탈리스트는 동양에 대한 서양 열강의 특별 대리인이나 대표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인종, 문명, 민족은 경계선에 따라 구성되었고 동양은 이야기에 의해 정의되었다. 

이슬람을 대상으로 하는 오리엔탈리즘은 현대사와 새로 업데이트되는 자료가 있음에도 문화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이는 현대의 이슬람도 과거의 이슬람의 개념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오리엔탈리즘 이론이 동서양의 차이를 더 심화시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2차 대전 이후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었으며 오리엔탈리스트가 없는 중동은 무시되고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미국이 주도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문헌학적 학문 분야가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의 하나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정부가 만든 중동연구소가 개설되면서 본격적인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지만 과거의 오리엔탈리즘의 관념은 반복되고 심화되었다. 동양에 있는 학생이 미국에 가서 연구하는 이들이 늘었으나 이들은 오리엔탈리스트 하의 관념을 배우고 자국에 가서 이 논리를 반복했다. 아랍과 이슬람은 서양의 시장체제에 완벽히 동화되어 동양에 관한 문화적 이미지는 획일화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관련하여 여러 욕심이 생겼다. 비코의 저서 읽기,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해, 마르크스와 플로베르(읽기 싫지만 정말 책에 수없이 언급됨)의 저서 읽기다. 

이번 읽기도 결국 요약 정리한 것에 불과해진 것 같지만 처음보다는 더 나아졌다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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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래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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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었는데 결국 읽고 있는 책에 언급되어서 읽었다.

외국 소설을 읽을 때면 매번 등장 인물이 많아서 힘들고, 인물들 이름이 어려우니 되돌아가서 자꾸 읽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인물 관계도 복잡해서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한 건데 하다 보면 완독을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이렇게까지 힘들게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 소설은 이야기도 비교적 짧고 등장 인물들도 많지 않아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독자들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유람선에 있던 사람들이 말로라는 선원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작가는 콩고강을 운항하는 기선의 선장으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체험이 소설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작가의 체험과 극중 화자인 말로의 이야기가 동일시될 수는 없겠으나 어느 정도는 따오고 일정 부분 허구를 덧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쪽 끝에는 일곱 가지 무지개색으로 표시된 크고 번질거리는 지도가 한 장 놓여 있더군.
붉은색이 차지하는 면적이 아주 넓었는데, 그곳은 언제 보아도 우리를 흐뭇하게 하지.
거기서는 어떤 실질적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야.
파란색 지역도 꽤 넓었고 녹색 지역 약간에 귤색도 보이더군.
그리고 동해안의 자줏빛 지역은 명랑한 발전의 선구자들이 그 좋다는 라거 맥주를 마시고 있는 곳을 가리켰어.
그러나 나는 그런 색이 칠해져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게 아니었지.
노란색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어. 그곳은 지도의 한복판에 있었어. 바로 거기에 그 강이 마치 뱀처럼 매혹적으로 무시무시하게 놓여 있었지.

19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자원에 탐을 내고 꽂으면 깃발이 되는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였다고.

말로는 아프리카의 벨기에령 콩고에서 기선 선장으로 취직한 후 콩고강 상류의 오지까지 배를 몰고 가는 과정에서 온갖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콩고에 도착하여 자신이 그렸던 모습과 다른 현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다 주재원 커츠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그 목적을 위해서 일명 흐린 눈 처리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실상 커츠는 현지의 주재원들에게 칭송을 받았을지 몰라도 현지의 원주민을 착취하고 코끼리의 상아를 약탈하는 데 몰두하는 인물이었다.
현지 회사 지배인은 그가 상도덕을 무시하고 일명 선(?)을 넘자 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 정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로는 커츠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점차 궁금해한다.

사실 커츠의 타락한 도덕성의 진면목을 보고 나는 종국에는 말로가 그를 욕하거나 갈등이 폭발해서 부딪치는 장면이 나올 거라 예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말로는 몸이 약해져 배 위에서 ˝무서워!˝를 외친 후 죽게 되는데 말로는 그런 그의 모습이 삶에 대한 후회를 표시하는 동시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았다.
말로가 그에게서 일정 정도 연민을 느낀 것은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어떠한 감정적 발로가 아니였다고 보인다.

한때 커츠의 소유물이었던 것이 모두 내 손에서 빠져나갔어. 그의 영혼, 그의 육신, 그의 주재소, 그의 계획, 그의 상아, 그의 필생의 과업 같은 것 말이네.
남은 것이라고는 그에 대한 기억과 그의 약혼녀뿐이었어. 말하자면 나는 그런 것들마저 과거로 넘기고 싶었던 걸세.
나는 아직 내게 남아 있던 그의 잔재를 인간의 공동 운명에서 마지막 경지라고 할 수 있는 망각의 세계로 손수 넘겨주고 싶었던 거야.
나는 내 처사를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진실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히 몰랐으니까.
아마도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커츠에게 충실하자든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여러 면모에 도사리고 있는 기이한 필요성 중 하나를 수행해야겠다는 충동이었을 테지.

이처럼 말로는 커츠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약탈하는 것이 정당한가 인종주의는 옳은가 라는 단순한 질문과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당시 아프리카로 내려간 유럽인들이 모두 현지 주민을 약탈하는 등 제국주의적 행동을 했을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적어도 선의나 호의를 갖고 접근한 사람들도 있었을테니.

보고서의 주장은 이렇게 시작되. 우리 백인들의 발전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네들 야만인에게는 마땅히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하느님 같은 힘을 과시하면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등의 내용이 바로 그거야.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의지를 행사하기만 해도 실제로 무한한 이익을 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바로 여기서부터 그의 어조는 고양되어 나를 사로잡기 시작하더군. 보고서의 맺음말은 화려했어.
위엄 있는 선의를 가지고 그 거대한 이국적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어.
그 구절을 읽으니까 나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더군.

그러나 이는 정확히 제국주의적 시각이며 화자인 말로의 생각과 행동에도 은연 중에 드러난다.
야만을 문명화하겠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은 제국주의가 어떤 귀결로 끝이 날지 당연하겠지만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로 들어왔을까? 우리가 그 말 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까? 말을 할 줄 모르고 아마 귀까지 먹었을 그 세계가 실로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했어. 그 세계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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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4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1 1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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