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름, 완주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에서 시작하여 여름의 초입을 지나 뙤약볕을 쬐고, 폭풍 같은 비바람을 만난 뒤 평온해지는 느낌.

이 책은 여름 한 계절을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계절 하나를 보내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이 경험은 주인공에게 새로움이었다.
주인공은 손열매, 어린 시절을 충남 보령에서 비디오 가게 손녀 딸로 살다가 커서는 상경했다.
성우가 되었으나 프리랜서로 수입이 일정치가 않아 고군분투한다. 어느 날부터 목에 문제가 생겨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고 정신과 진료 결과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마도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있지만 함께 살던 룸메이트 언니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떼인 것도 큰 몫을 했을 것. 그녀는 목 때문에 일도 할 수 없어 수입이 거의 끊겨서 룸메이트 언니인 고수미의 고향 집을 찾아가기로 하면서 소설의 무대는 그곳으로 이동한다.

손열매는 심신이 지쳐있어서 매사 시니컬했다. 고수미 고향은 서울에서 1시간 남짓 걸려서 도달할 수 있는 동네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을 향해 가는 버스에 탔다가 어저귀를 만났다.

고수미 고향 집을 찾아가니 고수미 엄마는 이미 그런 일을 많이 겪은 듯 달관한 태도였다. 고수미는 이곳에 찾아온지 오래인 듯했고 열매는 딱히 어디 갈 데도 없어서 이곳에 세입자로 지내게 된다.

이곳은 열매에게 온통 신기한 곳이었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아침마다 장례를 위해 시신의 염을 하러 가는 고수미 엄마가 있었고
지나치게 슬픔에 대해 논의하는 아이들 양미, 파드마, 율리아가 있었다.
유명한 배우가 대저택에 은둔하며 사는 곳이기도 했다.
인류애를 잃어버렸다면서 온갖 마을 일에 도움을 주는 어저귀가 있었다.

마을의 논밭을 다 밀어버리고 골프장으로 개발하려는 개발회사가 있었다. 개발을 위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중간 다리를 놓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설득에 넘어가 동조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지만 상당수는 지금의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은 풀벌레 소리, 전나무 냄새가 느껴지는 곳이었으니까.
이처럼 마을은 개발을 두고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는 수해 때문에 생긴 큰 사건이 있어서다.

결론적으로 고수미는 이곳에서 지내면서 욕망을 다시금 되찾게 된다.
그렇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반드시 있음을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인생의 무게는 가벼울 리 없다. 아직 내가 그 무게를 알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때론 살면서 비굴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실수할 때는 인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지만).

싱그러움이 느껴지다가도 온전히 맑지만은 않아서 물기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돕고 싶은 마음. 나는 그것을 갖고 있을까?
소설을 읽으며 이 여름을 조금은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고로 이 책은 오디오북으로 먼저 나오고 뒤에 종이책이 나온 경우다. 윌라 독점 계약으로 오디오북 프로젝트로 작가가 원고를 썼다고 한다.사투리, 음향 효과 등 때문에 이 소설은 가능하면 오디오북으로 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프로젝트로 성우를 비롯하여 배우들이 재능 기부를 했다고 한다. 나도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5-11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디오북을 먼저 내고 종이책을 내는 방식도 나왔군요. 신선하네요. 예전에 창덕궁 밤구경 갔다가 행사로 배우들이 나와서 책을 읽어주는걸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딱 첫문장 듣는데 와 전문가구나 진짜 다르다 했었어요. 전 듣기를 좀 힘들어해서 책으로 읽겠지만 그래도 이런 다양한 시도는 참 좋네요. ^^

거리의화가 2025-05-13 11:38   좋아요 1 | URL
창덕궁에 그런 행사가 있었군요. 확실히 배우들이 감정을 넣어서 대사를 하니 훨씬 실감나더라구요.
다양한 시도로 독자가 유입될 수 있는 길이 늘어난다는 면에서 저도 좋은 시도로 보입니다^^

희선 2025-05-12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디오북으로 만나셨군요 배우가 읽는, 거의 연기할 듯하네요 라디오 드라마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라디오 드라마 들은 적은 별로 없지만... 예전에 EBS FM에서 예전 소설 드라마처럼 읽어준 적 있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5-13 11:38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정말 화려한 배우 출연진들이라 듣는 맛이 쫄깃하더라구요. 라디오 드라마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소설인데 또 희곡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락방 2025-05-1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윌라 재구독 해야할까요..

거리의화가 2025-05-13 18:34   좋아요 0 | URL
아하하~ 다락방 님 선뜻 재구독하라고 말씀드리기는 그렇네요. 다락방 님 취향과 거리가 멀까봐서ㅎㅎ
예전에 토지 청취 때문에 윌라 구독했다가 해지한 이후에 이 책을 들어보고 싶어서 확인해보다가 14일간 무료 구독이라길래 겸사 겸사 들은 거였거든요. 무료 구독 가능하시다면 시도해보시는 것도 좋겠죠!^^

독서괭 2025-05-1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그 배우 김정민이 세운 출판사에서 나온 거죠? 오디오북용으로 먼저 제작되다니 흥미롭네요!

거리의화가 2025-05-13 18:36   좋아요 0 | URL
괭 님 이미 알고 계시다니! 혹시 아직 윌라 구독중이시라면 들어보셔요~^^
이 출판사에서 계속 오디오북 제작할 모양이더라구요. 이 책이 첫 주자였다는.

바그다드 2025-05-18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정민에 대한 언급 없이 온전히 책에 대한 얘기만 써 주신 게 반갑네요. 저는 김금희 작가도 좋아하고, 이 책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책의 본질이 아닌 다른 이슈 때문에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그다지 반갑지 않거든요.

거리의화가 2025-05-18 19:20   좋아요 0 | URL
화려한 배경이나 포장 때문에 내용의 본질이 묻히면 안되죠.
저는 배우의 연기가 담긴 목소리 등이 좋았고 바탕인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파렴치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감내해왔을까?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

사실 다윈의 진화론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전혀 아니다. 다윈에게서 생존하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적합한 자, 즉 적자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적자생존이 진화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강하거나 우수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적합한 종이 자연에 의해 선택된다는 것이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공룡은 강했지만 멸종했고, 매머드도 코끼리보다 훨씬 크고 강했지만 멸종했던 것이다. 자연계에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수한 것으로’ 따위 진화의 방향성은 없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사이에 힘과 문화적 상상력의 위계가 엄연했던 만큼이나 성애의 판타지도 가파르게 위계화되었다. 승리한 나라의 남성이 점령지 여인과의 가벼운 로맨스를 꿈꿀 때, 패배한 나라, 약소국 남성은 수치심과 회한으로, 때로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사정을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해도 좋을까? 그 무렵 한국의 인터넷 여론은 한술 더 떴다. "키워줬더니 베트남 따위가 건방지다"는 식의 혐오 댓글이 난무했다. 진보적이라는 커뮤니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과학사학자 김영식은 현대 한국 과학기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기술관을 꼽는다. 개화기 이래 과학기술이 주로 경제적 효용 달성이라는 도구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역설적이게도 일제시기 지식인들에게 과학주의적 태도가 널리 퍼졌다고 비판한다.
9
그렇다면 세상에 쓸모가 없는, 힘이 되지 못하는 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적인 과학저술가 사이먼 싱은 말한다. "기술은 삶(그리고 죽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반면,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과학자들의 동기는 유용성이나 편리함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작은 사람’이라고 해서 역사의 책임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아니 작은 사람이야말로 역사를 더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성숙이 시작될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5-11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전 좋았습니다. 화가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기대되네요.

거리의화가 2025-05-13 11:39   좋아요 1 | URL
어제 알라딘 시스템 접속이 계속 이상해서 댓글을 이제야 답니다^^;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식민지배자는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시켜줄 거울, 즉 타자(식민지인들을 포함)를 필요로 한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타자로 설정했다. 식민지배자는 타자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결속을 다지며, 타자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타자는 다름 아닌 희생자들, 유색인들, 식민지인들이다.

식민植民이란 지배국이 식민지에 자국민을 옮겨 심는다는 뜻이다. 식민주의란 힘이 센 나라가 무력으로 자신보다 약한 나라의 땅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그곳의 물적·인적 자원을 약탈하며, 자국민을 이주시켜 지배하고 통치하는 행위 및 이념을 일컫는다. 다름 아닌 약육강식을 근간으로 삼는 차별적 이데올로기이다. 식민주의는 자국민에게 승리의 영광을 가져다주지만, 식민지인들에게는 패배의 굴욕을 안겨준다.

‘탈’이란 접두어는 예속상태에서 벗어남, 즉 주권수립과 해방,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의식의 탈식민화를 의미한다. 해방, 광복, 독립이란 단어는 억압, 어둠, 예속의 상태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외형적 독립과 국가건설만으로 식민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묘한 형태로 신식민주의가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국적 자본주의는 더 이상 국가(경계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오직 하나의 국가(예를 들면 미국이란 거대 자본국가)만이 존재하고,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의 문제는 그 규모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다. 스탈린 치하의 고려인(까레스키) 강제이주, 일제지배 하의 강제징용, 6·25전쟁, 사할린 거주 한인들, 해외 이민 등이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입증한다.

블라디보스톡, 타쉬켄트, 하와이, 멕시코, 위안부, 사할린 한인들, 우토로(일본 교토 징용 조선인 촌락) 등은 강대국의 힘에 유린을 당한 한민족의 수난사를 잘 말해준다. 이산자들이 당한 고통과 상처를 글로 기록하고, 그 부당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은 필요하며 중요하다.

탈식민화에는 여러 장애물이 존재하지만, 그중 ‘매판계층(comprador)’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이 계층은 식민국의 상층부 엘리트를 구성하는데, 종주국과 협력적 관계를 유지한다. 그 결과 자국의 사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종주국에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식민지배자는 이 매판계층과 유착관계를 맺어 적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손쉽게 식민지를 원격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민족주의에 기초한 문화적 본질주의 혹은 ‘토착주의(Nativism)’도 탈식민화에 걸림돌이 된다.

서발턴이란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거나 접근을 부인당한 그룹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노동자, 농민, 여성, 피식민지인 등 주변부적 부류가 속한다. 스피박이 ‘서발턴’이란 용어 사용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노동자, 농민, 여성, 피식민지 등 기존의 용어들은 억압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성을 지니기 때문에 다양한 종속적 처지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서발턴 용어 사용의 장점은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와 맥락에 한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즉, 이 용어는 계층, 인종, 젠더를 포함할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이며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스피박은 불평등 해소라는 정의실천보다는 지배권력을 해체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바로 이점이 그녀의 한계이다.

일본이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계속 왜곡하는 현실에 맞서 우리는 계속 ‘자아성찰’만 해야 하는가.

탈식민주의는 저항담론이며 실천담론이다. 따라서 어렵고 난해한 용어와 이론을 운운하는 것은 지적 유희요 공허한 포즈이다. 탈식민주의 연구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는 것, 자신의 삶과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탈식민주의 이론이 세상 읽기의 유효한 방식이 되고, 현실 참여의 영역과 맞물려 있어야 의미가 있다. 반성과 토론만 하다가 투쟁이나 실천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면 진보는 위기에 처한다.

저항은 패권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저항이 없다면 예속, 불평등, 비인간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도 타자(약자)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윤리학을 정립하는 것이 요청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교도의 모든 역사는 출발점에 신화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최초로 배워야 할 학문은 신화 - P88

또는 신화의 해석이어야 하며, 신화는 이교도 민족의 최초의 역사였다는 것이다[202]. 그리고 이렇게 확립된 방법으로 민족은 물론학문의 출발점도 다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학문은 다름 아닌민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이 저작 전체를 통해 논증할 것이지만, 학문의 출발점은 민족의 공적인 필요성이나 유용성에 있었는데, 훗날 여기에 인간 개개인의 예리한 통찰력이 적용되어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다[498]. 세계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모든 학자들은 그러한 출발점이 [지금까지의 세계사에서]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399]. - P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어느새 일국사 틀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해외 귀환자 문제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이 문제를 마이너 테마로 간과하거나 애써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일제강점기 말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해외로 끌려갔다고 교과서에 적어놓고선 그들이 그 후 어떻게 돌아왔고, 어떤 과정을 거쳐 새 나라의 국민이 되어 갔는지는 정작 설명하지 않는다. 즉 ‘사람’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역사책을 만들고 그것을 줄줄이 암기해 온 셈이다. - P315


종전 후 이루어진 대규모 인구이동은 본질적으로 뚜렷한 특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이동하는 사람들의 송환과 수용 사이에는 이동 당사자의 개인적인 선택권보다는 조선인•일본인•점령군이라는 각 행위 주체의 집단적•민족적•국가적 이해관계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이들 3자 간의 각기 다른 필요•욕망•지향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이것이 미세 조정되는 방식으로 전후 인구이동의 논리와 틀이 만들어진 셈이다. - P68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 P132

또한 남한 사회는 긴급한 사회문제로서 일본인의 불법적인 재산 처분과 밀항에 대한 단속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법령 제10호를 발표해 당국의 허가 없이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의 이동을 금지했지만, 이를 어겨도 이를 단속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다. 이에 미군정 당국자(하지 등)는 도리어 ‘돈에 눈이 먼 의식 없는 조선인’ 탓이라며 일본인을 도와 밀항을 알선한 브로커를 비난했고, 단속할 방법을 찾아달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결국 1945년 12월 15일이 되어서야 남한의 구 일본국에 소속된 재산과 권리를 모두 군정청에서 관리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이를 돈냄새를 맡은 이들은 횡령, 사재기, 밀수 등으로 이미 법망을 다 빠져나간 뒤였다. 


그리고 탐욕은 부에서 끝나지 않고 권력으로도 이어진다. 식민지 시기 이루어졌던 요정에서의 밀실 정치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총독부 고관 대신 미군정 관료와 통역관 등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서 포르노 상영회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도색영화 상영 모임의 물주는 물건을 사재기하거나, 귀환하는 일본인으로부터 값싸게 물건을 건졌거나 건물 등의 운영권 등을 따내 떼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아! 도색영화 현장에는 당시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도 있었다. 

이 무렵 서울은 귀환자와 월남민 외에 생계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던 시점이었다. 주거난이 심각하여 역의 대합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방공호, 길거리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념쳐났다. 이런 모리배와 투기꾼들이 주지육림에 빠져 있는 동안 정작 일거리가 없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길을 떠돌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다반사였던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미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의 행태와 잘못이 가장 크다. 미군정은 구 총독부 시스템을 답습하여 남한의 정치 기본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잘못된 곡가 정책으로 인해 물가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켜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 거기에 미군정 핵심 인사는 친일파나 정재계의 거물들에게서 각종 뇌물과 향응 등의 이익을 받고 뒷배를 봐주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도 있다. 그는 특별한 흠결이 없었고 영어가 되어(유학 경험) 미군정으로서는 그를 점찍었던 모양이다. 서울 시장으로 있었던 기간은 단 2년 7개월이었다는데 그가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심지어 그 비싸다는 청파동 가옥을 매입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만약 미군정이 일본인들이 떠난 후 적산가옥과 대규모 요정, 유곽 시설을 귀환자나 월남인들을 위해 적절히 배분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귀환자와 월남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뒤 많은 나라들에서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한반도에 200만의 인구가 유입이 되었고 일본도 60만의 인구가 유입되었으나 둘 간의 정책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일본은 정부와 의회가 있어 이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창구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미군정이 1944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구호령 제도의 틀을 그대로 끌어오고 군정령을 더해 처리한 미봉책으로 빈곤자들마저도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귀환원호단체의 지도자나 경성일본인세화회 회장 등이 귀환자들을 지지하여 의회에 진출하여 그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반면 조선은 그런 창구 자체가 거의 전무했다.

연합국총사령부의 간접 통치 아래 있던 일본은 귀환자 구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논의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귀환자도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통해서 요구 사항을 제도적으로 관철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에 한국은 귀환자의 정착을 위한 미군정의 제도적 노력도 부족했고, 귀환자들의 정치 세력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한일 간의 역사적 경험 차이와 더불어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의 국가 운영 경험과 행정 능력의 차이, 그리고 점령국인 미국에게 있어 전후 한일 양 지역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과 국가적 위상의 차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 P285~286


전작에 이어 한달 안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좋은 책이었다. 전작과 함께 이 책도 구매할 예정이지만 두 권의 책은 도서관에 꼭 있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기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기존에 내가 알고 있었던 미군정의 정책에 더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모리배, 간상배, 아귀는 지금도 정재계와 사회에 뿌리 내려 있음을 앞선 역사를 통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재미난 사례와 그것을 사료와 적절한 설명으로 풀어내는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전작이 2012년에 나왔는데 후속작이 무려 12년 만에 다시 나온 것이다. 연구 등으로 바쁘시겠지만 부디 저자가 앞으로도 이런 학술대중서를 출간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