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문명에 성별을 구성한 형식(사회적 역할, 법, 은유)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 역사적 발전을 따라가보는 것
동양문명에서는?

기원들: 전통주의 -> 다윈 진화론, 프로이트 심리, 윌슨의 자연 선택 -> 마르크스 주의, 레비 스트로스 구조 문화주의 -> 모성주의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기록되지 않은 소문자 역사(history) – 인류에 의해 재수집된 과거의 모든 사건 ㅡ와 대문자 역사(History)기록되고 해석된 과거를 구분해야 한다. - P16

현재 시점에서 집단으로서의 남성과 집단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차원에서 양자의 모든 차이가 구별지어지는 정도는 남성역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여성의 특수한 역사의 결과이다. 이것은 문명보다 더 오래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 때문이며, 여성의 역사에 대한 거부 때문이다.

나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과거에 대한 지식과 맺고 있는 관계는 그 자체로서 역사를 만드는 하나의 힘이라는 통찰이다. - P20

모든 관념의 행렬은 현실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어떤 것 혹은 적어도 자신들이 경험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미지, 은유, 신화는 과거 경험을 통해 ‘형상이 미리 예시된‘ 형태 속에서 표출된다.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들로 이 상징들을 재해석하며, 그것들은 다시 사람들을 새로운 조합들과 새로운 통찰력으로 인도한다. - P25

한쪽 눈으로 볼 때 우리의 시각은 범위가 제한되고 깊이가 없다. 우리가 다른 눈의 시각을 더할 때 우리 시각의 범위는 넓어지지만, 여전히 깊이는 없다. 우리가 전체적 시각과 정확한 깊이의 지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두 눈으로 볼 때뿐이다.
컴퓨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은유를 제공한다. 컴퓨터는 우리에게 삼각형 (2차원) 그림을 보여준다. 그 이미지를 유지한 채 삼각형은 공간을움직이고 피라미드(3차원)의 형태로 변환된다. 피라미드와 삼각형의 이미지를 유지한 채로 피라미드는 곡선을 만드는 공간(4차원)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은 채로 네 가지 차원 모두를 동시에보지만, 또한 서로간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그것들을 본다.
가부장적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가 보았던 대로 보는 것은 2차원적이다. 가부장적 틀에 ‘여성을 추가하는 것‘은 그것을 3차원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세번째 차원이 완전히 통합되고 전체와 함께 움직일 때만이, 여성의 시각이 남성의 시각과 평등할 때만이, 우리는 전체의 진정한 관계와 부분들의 내적 연관성을 지각한다. - P28

해석을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접근법 개념적 틀은 결과를 결정짓는다. 그것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대답되기를 원하는 과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오랜 역사적 시간 동안, 우리의 의문을 형성했던 개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토론을 거치거나 도전을 받지도 않았다. - P33

전통주의자들은 당연히 남성지배는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주장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여 제시되기도 한다.
전통주의자들은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발견되는, 여성과 남성에게 다른 일과 역할을 배정하는 현상인 ‘성적 비대칭‘(sexual asym-metry) 현상을 여성과 남성의 지위에 대한 증명이자 그것의 ‘자연스러움‘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 P35

19세기에 종교적 주장이 힘을 잃자 여성의 열등성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설명은 ‘과학적이 되었다. 다윈주의이론은 종의 생존이 개인의 자기충족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강화시켰다. 미국사회에서 사회복음(Social Gospel, 노동자계급이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운동으로서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으며, 자유주의적 진보사상과 수정다윈주의 등을 차용하였다― 옮긴이)이 부와 특권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자의 생존이라는 다윈주의적 관념을 이용한 것처럼, 가부장제의 과학적 변호인들은 모성역할을 통해 여성을 정의하는 것과 경제 및 교육기회에서의 여성배제를 종의 생존이라는 이익에 봉사한다며 정당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은 성차가 자연스럽다는 가설을 의심조차해보지 않고 현존하는 성차를 관찰했고, 또 조상들만큼이나 생물학적으로 제약을 받는 심리적 여성상을 구축하였다. 성역할을 비역사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측정된 임상자료로부터 도출된 지배적인 성별역할을 강화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 P38

윌슨(E. O. Wilson)의 사회생물학은 인간행동에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주의적 사고를 적용함으로써 성별에 대한 전통주의적 시각을 제시하였다. 윌슨과 그 추종자들은 집단의 생존을 위해 ‘적합한‘ (adapative) 인간행위는 유전자 속에 새겨진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이런 행위에 이타주의나 충성심, 모성주의(maternalism) 같은 매우 복잡한 성향까지 포함시킨다. 이들에 따르면, 여성이 자녀를 키우고 돌보는 기능을 담당하는등 성에 바탕을 둔 노동분업을 실천하는 집단이 진화에 이로울뿐만 아니라, 이같은 행위가 우리의 유전적 유산의 일부가 되었고 그런 사회적 역할배정에 필요한 심리적·신체적 경향이 선택적으로 발달하여 유전적으로 선택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 P39

양성의 본성에 대한 엥겔스의 기본 가설은 생물학의 진화론들을 수용.
하고 있지만, 그의 큰 이점은 성적 관계를 구조화하고 정의하는 데 사회적 · 문화적 영향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다. 엥겔스는 사회관계에 대한 이론적 모형과 함께,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일부일처제가 발전의 정점에 서 있다는 양성관계에 대한 진화론을 발전시켰다. 변화하는사회관계와 성적 관계를 연결시킴으로써, 그는 전통주의자들의 생물학적 결정주의와 결별하였다. 사적 소유관계에서 출현하여 제도화된 양성간의 갈등에 주목함으로써 그는 경제·사회적 변동과 오늘날 우리가 성별관계(gender relations)라고 부르는 관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 P45

‘여성의 교환’은 그 속에서 여성이 상품화되고 ‘사물화된‘ (reified), 즉여성이 인간존재라기보다는 물건으로 생각되었던 교역의 최초 형태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여성의 교환은 여성종속의 시작을 나타낸다. 그것은 다시 남성지배를 만들어내는 성별노동분업을 강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기를 인류문화 창조 과정에서 긍정적이고 필요한 단계로 보았다. - P46

모성주의(rmaternalist) 이론은 생물학적 성차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 위에 구축되어 있다. 몇몇 최근의 이론가들이 이 입장을 수정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모성주의자들은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 위에 구축된 성별노동분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모성주의자들은 여성의 평등을 위해, 그리고 심지어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논리를 편다는 점에서전통주의자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 P49

집단 내의 여성들이 남성권력에 영향을 미치거나 견제하는 상당한 힘을 가지는 사회와 생활의 많은 혹은 몇몇 측면에서 남성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사회가 있었고, 아직도 있다. 개별여성이 그들이 대변하는 남성들의 모든 권력 혹은 거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여왕이나 통치자와 같이 그들의 대역으로 행동하는 사회도 존재하고 또 역사적으로존재해 왔다. 이 책에서 보여줄 것처럼, 자신의 계급 혹은 그와 유사한 위치의 남성들과 경제 정치적 권력을 공유할 가능성은 일부 상위계급 여성의 특권이었을 뿐이며 그것은 여성들을 가부장제에 더 밀접하게 예속시켰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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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시절의 그에게는 철학이 모든 것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에게, 철학이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는 양반과 종놀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살아온 고장에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철학이란, 양심의 마지막 숨을 곳이었으리라. 아니면 그 신분이 임금이건 종이건 사람이 산다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 뜻을 캐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좋고, 철학이란 그 모든 것을 다 뜻한다. 어쨌든 그는 철학의탑 속에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 P106

타지 않기는 명준의 심장뿐이었다. 그 심장은 두근거림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남녘에 있던 시절, 어느 들판 창창한 햇볕 아래서당한 그 신내림도, 벌써 그의 몫이기를 그친 지 오래다. 그의 심장은 시들어빠진 배추 잎사귀처럼 금방 바서질 듯 메마르고, 푸름을잃어버린 잿빛 누더기였다. 심장이 들어앉아야 할 자리에, 그는 잿빛 누더기를 담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 누더기는 회색 말고는 어떤 빛도 내지 않았다. - P124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세워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 P158

에덴 동산에서의 잘못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코뮤니즘의 낳음과 자람의 걸음에 신기스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쌍둥이 그림이었다. - P184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르케고르 선생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아닌광장이었다. - P186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 P192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가 다른 한 마리의반쯤한 작은 새인 것을 알아보자 이명준은 그 새가 누구라는 것을알아보았다. 그러자 작은 새하고 눈이 마주쳤다. 새는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눈이었다. 뱃길 내내 숨바꼭질해온 그 얼굴 없던 눈은 그때 어미 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우리 애를 쏘지 마세요! 뺨에 댄 총몸이 부르르 떨었다. 총구에는 솜구름처럼 뭉실한덩어리가 얹혔을 뿐. 마스트 언저리에 구름이 옮겨왔다. 망가진 기계가 헐떡이듯, 밖으로 나갔던 몸을 간신히 창 안으로끌어들이면서, 총을 내린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는 굵다란 진땀이 이마에 솟고, 볼때기가 민망스럽게 푸들푸들 떨린다. - P203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될터이었다. 다만한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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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에 읽을 도서 중 《마이너 필링스》를 포함시켜 놓았다.
어제 알라딘에서 저자인 캐시 박홍이 내한을 하여 북토크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가웠다.
물론 시간과 장소 상 북토크 직접 참석은 어렵겠지만 어찌 됐든 이 책을 더 잘 읽어내자 하는 주지를 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2. 

이 주에 눈에 띤 책들을 살펴보았다.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은 역비한국학총서 중 하나로 작년에 나왔지만 역사비평에서 관련 칼럼을 읽고 관심이 갔었는데 잊어버리고 있다가 근간인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이 나와서 묶어둔다.

《완경 선언》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내용일 것 같다. 여성의 폐경 시기가 점차 빨라지고 있는데 갱년기 이후의 신체적/정신적 변화에 대해서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추가로 오늘 아침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집 시리즈도 발견하고 리스트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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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03 1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캐시 박홍도 오고 파친코 작가도 오고 줄줄이 작가들 내한 하고 있네요 서울 북페어도 있고 이런저런 이벤트가 많아서 유월 책사랑 더 깊어 질것 같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3 13:01   좋아요 3 | URL
아 그러네요. 이민진 작가도 오죠^^;ㅎㅎ 반가운 내한들이 많네요~
저의 기준으로 매년 6월이 가장 좀 묵직한 책들을 많이 읽게 되더라구요ㅎㅎ 올해도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콧님 덕분에 버지니아 울프 산문선들도 찜해서 기분 좋아요. 감사합니다^^

mini74 2022-06-03 1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완경선언. 제목이 확 와닿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06-03 13:07   좋아요 2 | URL
저도 제목 보자마자 이거다 라는 생각이^^ 역시 다 같은 마음인가봐요. 책들이 넘쳐나고 있어요. 그치만 행복한 비명입니다~ㅎㅎ

얄라알라 2022-06-03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께서도 이벤트 소식 보셨네요.
파랑새 극장이라니^^ 코로나가 정말 물러가고 있나봅니다. 80명 청중분들은 행복한 시간이 되실듯.

그런데 이민진 작가가 내한하나요? 우와! 그건 경쟁 엄청 더 치열하겠는걸요

독서괭 2022-06-03 22: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울프 산문집 시리즈 너무 갖고 싶어요 ㅠㅠ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를 잊었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 든다. 무엇인가는 언제나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실은아무것도 잊은 것은 없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느낌은 틀림없이 일어난다. 아주 언짢다. - P26

느닷없고 짤막하면서, 풀이되지 않은 것이 풀이된 것 같아 뵈는,
그 짤막한 글월들의 힘과 그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서 겪은 어질머리 사이에는 닮은 데가 있다.
깜빡할 사이에 오는 그런 복 받은 짬은 하기는 어떤 마이너스의 마당자리에서 일어나는 꿈일 것이리라. 비록 플러스의 자리래도 좋았다. 쉴새 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가면서 살 수 있는 삶. 명준이 찾는 삶이다.
아무 일에도 흥이 안 난다.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을 찾아낼 수가 없다. 가슴이 뿌듯하면서 머릿속이 환해질, 그런 일이 없을까? 도낏자루 안 썩는 신선놀음 같은. - P43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있습니다. - P67

돈의 길이 삶의 길인데,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거니 돈을 잊고 살아온다. 제 삶을꾸려주는 돈 말이다. 밥을 먹고, 잠자리를 받고, 학비를 타고, 책을 사고 하는 데 쓰이는 돈이라는 물건을 한번도 ‘자기‘라는 것의살갗 안에 있는 것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다. - P73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건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 속았다 하고 때었다 할 때, 꾸어주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억지가 아닐까. ‘사랑‘이란 말 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 그런 잘못과 헛된 바람과 헛믿음으로 가득 찬 말이 바로 사랑이다. 어마어마한 그물을 읽어낸 철학자가 늘그막에 가서 속을 털어놓는 책을 쓰는데, 그 맺음말에서 ‘사랑‘을 가져온다.
말의 둔갑으로 재주놀이하는, 끝없는 오뚝이 놀음, 철학이란 그렇게 가난한 옷이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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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이름 - 미술사의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 예술가들
권근영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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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분야의 책이 있다면 미술 쪽일 것이다. 미술 중에서도 그림이 그렇다.
미술을 잘 모른다. 학교 때도 미술 점수는 늘 바닥이었다보니 그 시간이 오는 것이 나중에는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점수를 얻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육 현장을 벗어나니 그제서야 조금씩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30대 이후 여행을 가면 박물관과 미술관을 보러 다녔고 외국 작가의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면 종종 보러 가고는 했다.
2년 전 이사를 하면서 거리가 멀어지고 코로나 등의 여파로 전시회를 거의 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

책에서는 세 개의 주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여성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다.


- 호기롭게 길을 떠난 이들.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10년도 훌쩍 지난 지난 이야기지만 독일 바이마르에서 만났던 바우하우스 건물이 생각났다.
바우하우스 하면 현대 건축에서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평등이었으나 결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여성들은 공방 등에서 일해야 했고 심지어 등록금도 더 비쌌다고 한다.
프리들 디커도 바우하우스 교육생 중 한 명이었다.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탈출에 실패하고 결국 수용소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나비 등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데 죽기 전 이들은 그림으로나마 평화를 꿈꾸었을까.

엘리자베스 키스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게일 신부의 이름을 보자마자 아!!! 했다. 키스의 책이 복원판으로 나온 것도 알고 있었고 게일 신부의 책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키스 자매들은 이방인으로 낯선 땅 조선에 왔다가 눌러 앉아 조선의 골목을 누비며 조선 민중의 삶을 주목했다. 특히 여성들의 그림이 많은 것이 눈에 띤다.
키스 자매들이 보기에 조선인 여성들은 임신 및 육아, 가정 살림까지 많은 것을 감내하며 힘겹게 사는 것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녀들의 시선이 따뜻하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이걸 보며 키스 올드 코리아 복원판을 구입해야겠다 생각했다.

노은님 
타국에 가서 하마터면 꾸준히 그림을 그려 이름을 알린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노은님이 파독 간호 경력 2년으로만 알려지고 이후 긴 예술 활동에 대해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힘찬 걸음을 표현한 <큰 걸음>은 방향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그녀의 다양한 작업을 만나고 싶다.

정직성
정직성은 예명이다. 들으면 바로 꽂히는 이름이라 한 번 각인되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림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예술 세계를 보니 그녀는 한계를 모르는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서울의 연립주택을 표현한 그림을 보면서 현실을 예술로 이토록 잘 승화시킬 수 있구나 해서 놀라웠는데 이런 작업은 계속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바뀌는 서울의 도시 풍경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의 모습이 담긴 프로필의 문패도 인상적이었다.

- 거울 앞에선 이들.

베르트 모리조
인상파 여성 멤버인데 주로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 많이 등장했다.
파리 살롱전에서 6번이나 당선된 이력을 가진 화가인데 왜 나는 마네의 이름은 알면서도 그녀의 이름은 알지 못했을까.
책에서는 몇 개의 작품이 나오지 않지만 모리조 이름으로 검색한 그림들을 보니 하나 같이 다 화사하고 예쁘다.
인상파 그림의 특징을 잘 담고 있으면서도 주변의 환경을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든다.

파울라 모더존베커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파울라 모더존베커.
<옆으로 누운 엄마와 아이>는 엄마와 아이의 유대성과 친밀감이 잘 느껴졌다. 그 시기는 지금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것이다.
그녀의 그림들 속 얼굴의 눈동자가 동그랗고 크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찾아보니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서 찍은 사진 속 모습과 일치한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서 색전증으로 사망했다니 31살의 짧은 생애가 너무도 안타깝다.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버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가 화가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버지니아 울프와 노년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이다.
유명 작가였던 언니의 그늘에 가려진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진다.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일찍 마감했으나 상대적으로 버네사 벨은 꽤 오랜 삶을 살았다.

천경자
몇 년전 근대 여성에 대한 전시로 <신여성 도착하다> 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천경자를 처음 만났다. 도록도 집에 갖고 있는데 신여성들의 다양한 예술 활동에 주목한 전시여서 정말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천경자의 작품은 고전 기법의 그림부터 서양화까지 스펙트럼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 여러 마리가 인간의 머리 위에서 또아리를 틀고 왕관 형태를 하고 있는 그림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충격이다. 다시 봐도 놀라운 그림이다.
박경리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였다라는 것은 몰랐는데 그녀를 묘사한 글을 보니 정말 잘 표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경자의 예술세계는 자유로움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영숙
이 책에서 여러 예술가를 만났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라면 박영숙이다. 그녀야말로 스스로 한계를 가두지 않고 뻗어나가는 예술 활동을 하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진 작가인 그녀는 주변 인물들을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제주의 곶자왈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태 환경적 사진을 담아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마녀와 미친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여성을 매도하는 단어로 쓰인 마녀, 미친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예술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가로까지 나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되찾은 이름들.

유딧 레이스터르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였던 유딧 레이스테르의 이름은 230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거래하려던 그림은 그녀의 것이었으나 나중에 밝혀져 고소를 당했다고.
직업 화가였던 만큼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그림들이 눈에 띈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느낀 건 인물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생동감 있다는 사실이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하다.
바로크 시대 화가로 정물화도 있으나 대부분 다양한 인물들을 그렸다. 섬세한 붓터치가 눈길을 끈다.

힐마 아프 클린트
칸딘스키, 몬드리안보다 앞선 최초의 추상화가였다고 한다.
근대의 문, 과학이 떠오르던 시기 그녀는 영속성과 영적 세계에 경도되었다.
미래를 위한 그림을 보면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데 마치 태양을 향한 영적 숭배의 신성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상상 속의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양식으로 추상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혜석
나혜석은 근래 들어 많은 자료 등으로 조명되면서 회자되는 여성 화가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예술보다는 개인적인 삶에 치중하여 주목하거나 나아가 비난받는 점이 강해서 마음이 좋지가 않다.
그림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논외로 친다면 어쨌든 그녀는 당시로서 조선의 서양 화가라는 타이틀 자체가 희귀할 때 그림을 그렸으므로 그것만으로도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전시회도 열고 많은 문화계 인물들과 교류를 했다. 여성으로서 견뎌내야 하는 환경적 부당함에 대해서 끊임없는 주장을 펼쳤던 그녀는 페미니스트 선구자라고 평가될 만하지 않을까.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아델레이드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화가였다.
<두 제자와 자화상> 마리 가브리엘 카페와 마리 마거릿 카로 두 제자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두 제자도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회원의 일원이다.
팔레트와 여러 개의 붓을 들고 있는 화가와 뒤의 두 명의 제자들의 서로 다른 시선이 재밌으면서도 나는 이런 그림 구도 자체가 생경했다.
무엇보다 아델라이드는 남성 일색이던 아카데미에 많은 여성 화가들이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끊임없이 여성 권리의 신장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바로크 화가였던 젠텔레스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카라바조가 떠오른다. 카라바조보다 그녀가 먼저 활동했다면 젠텔레스키풍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당시 여성 화가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아주 제한적이었을텐데 젠텔레스키는 그림으로 당당히 피렌체 예술 아카데미에 여성 첫 회원이 되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아버지의 지인으로부터 그림을 도와주다가 성폭력을 당하는 사건 이후 법정 싸움까지 가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 유독 유디트가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 주장하고 쟁취할 줄 알았던 젠텔레스키. 그녀는 많은 작품을 남기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공한다.


다뤄진 예술가들 중 아는 이름이 얼마 없다는 게 민망하고 죄송했다.
그동안 가려지고 없어진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얼마나 많았던걸까.
당연히 이 책에서 다뤄지지 않은 수많은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름들을 찾아내는 작업들이 꾸준히 이어져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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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2 21: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이렇게 여성화가들을 주목하며 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책들이 간간히 나와서 너무 좋네요.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를 보면 여성이 파악하는 유디트가 남성들에 의해 왜곡된 유디트와 얼마나 다른지 확 와닿더라고요.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오면서 위의 화가들 각자에 대한 책들도 다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젠틸레스키에 대한 책은 나왔네요. ^^

거리의화가 2022-06-03 08:56   좋아요 2 | URL
젠텔레스키 유디트의 묘사와 표현이 기존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책에서도 언급이 나옵니다.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를 겪으면서 충격이 컸을텐데 주저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타개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최근 들어 여성에 주목하는 여러 작업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지 않도록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젠텔레스키 책은 구입했고 이 달에 읽을 예정이에요. 그녀의 삶과 예술 활동에 대해서 더 많이 들여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scott 2022-06-03 0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클림트 누이들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작품이 없고
까미유 끌로델의 뛰어난 조각품들은 몇 점 없고(로댕의 작품 상당수가 그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

마녀와 미친 *이라는 소리를 ㅠ.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여성 예술가들
부지런히 발견 되어 이름을 되찾아야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6-03 08:57   좋아요 3 | URL
스콧님 말처럼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여성 예술가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현재 앞으로도 이런 책과 자료들이 많이 나와주길 바랍니다!

새파랑 2022-06-03 0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이라고 닉네임을 지으신 이유가 있으시군요~!! 저도 학교다닐때 미술만 ˝미˝ 였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3 08:59   좋아요 3 | URL
ㅎㅎㅎ 화가라는 닉네임은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 누가 붙여준 것입니다. 미술에 미 자도 모르는데 음... 닉네임을 바꿔야 하는게 아닌지ㅋㅋ 근데 거의 20년 넘게 쓴 닉네임이라 바꾸기도 뭣하긴 합니다ㅎㅎ 미술 점수 정말 미 이상 받아본 적 없는 것 같아요ㅋ

mini74 2022-06-03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랑 같은 ㅎㅎㅎ 그림은 매번 졸라맨 수준인데 ㅠㅠ 학교를 떠나니 그림이 좋더라고요. 의도적으로 묻힌 여성화가들, 폄하된 여성화가들의 제자리 찾기는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는데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너무너무 잘 읽었어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6-03 13:08   좋아요 0 | URL
ㅎㅎ 졸라맨^^; 저는 사람을 그린다고 그리면 매번 얼굴 몸통 다리 삼분할만... 표정도 없고 똑같습니다ㅋㅋ
학교라는 환경이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을텐데 점수와 성취로 학생들을 몰아가는 영향이 큰 것 같아요. 편한 마음으로 보니 그림이 좋아지더라구요~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던 여성 화가들의 이름들 저라도 열심히 부르짖고 다녀야겠습니다!ㅎㅎ 미니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