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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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모든 것을 찢어발길 수 있는 한편, 강하고 탄탄한 것도 부드럽게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만사가 잘되길 기대하면서 수동적으로 서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발을 땅에 단단히 내딛고 통제하지 않으면 작은 흔들림에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 P367

분명히 말하지만 러스트벨트의 사람들은 단순하지 않다. 단지 투박하거나 순진하다고 해서 그들은 직설적이고 친숙한 것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신중했다. 오랫동안 그들은 결과 대신에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달변인 정치인들에게 상처를 입어왔고, 그 상처들에는 딱지가 앉고 흉이 생겨 경멸에 가득 찬 깊은 불신이 자리잡게 되었다. 상대가 진지하다는 걸 확신하기 전에는 어떤 약속도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을 얻으려면 무뚝뚝하고 간단명료한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일단 그렇게 하면 껍질이 깨지면서 전혀몰랐던 깊이가 드러난다. - P368

"이 살인자들아!" 반대 시위대 중 하나가 소리쳤고, 그 비난의 불합리성이 나를 일깨웠다.
분홍색 모자의 물결을 보면서 우리 모두를 그곳으로 이끈 맥박을느꼈다. 사람들은 분홍색 나팔관과 위로 쳐든 주먹이 그려진 팻말을 들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머리 위로 ‘사랑은 혐오를 이긴다LoveTrumps Hate‘도널드 트럼프의 성 트럼프가 이긴다‘라는 뜻에서 착안한, 트럼프 반대파들의 슬로건라고 쓰인 팻말을 치켜들었고, 인파 사이로 성스러운 어떤힘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심판을 요구하는 정의로운 힘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힘도 아니었으며, 정치적 이데올로기나인위적 제도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속삭임 같았고, 더나은 것을 보장하는 아득한 약속 같은 것이었으며, 아홉 살 때 성당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 잘 가거라. 내가 수녀가될 운명인지를 성모마리아에게 물었을 때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무의미한 말인지, 예언이 틀렸는지, 혹은 내 머릿속 목소리에 불과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깊은 믿음이 마음속에서일렁이면서 미래를 향한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수도에 운집한 수천의 시위대 속에 서 있는 지금,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 P373

아빠의 특권의식 밑에서 버글거리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우주의중심이라는 매우 인간적인 망상이었다. 나의 관점이 가장 중요하다.
내 문제들은 마땅히 해결되어야 한다. 나는 내 인생이라는 서사시에서결점 없는 주인공이고, 고통 따위는 잊고 즐겁게 살고 싶다. 이 망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마주하기 싫은 장소들에서도 우리를 에워싼 혼돈이 보이기 시작한다. 애초에 여성혐오자인 줄 알았던 그 보수적인 크레인 기사는 내 어깨를 그토록 오래 내리눌렀던고통을 마음속 깊이 이해했다. 딸을 버리고 정치적 견해를 선택한것처럼 보였던 아빠는 내게 기적을 만들어주려고 모든 것을 희생한 - P385

남자와 한사람이었고, 나는 아빠에게 세상을 빚진 진보주의자 딸이었다. - P386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미국 민주당 소속의 하원의원. 스물아홉 살에 미 역사상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으로당선되었으며, 최상위 소득계층에 최고세율 70퍼센트 부과 등 파격적인 주장으로 밀레니얼세대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나는휴게 시간에 그녀에 관한 뉴스를 읽으면서 그녀가 촉발한 시위에웃음을 터뜨렸다.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자격 미달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여자가 정치를 한다! 웨이트리스가 하원의원이라니말도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밀레니얼 세대를 대변하는 그녀는 우리 세대의 전형이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경기 침체기의물이었다. 오래 기다린 성인기가 도래하기 직전에 발밑에서 카펫이치워졌으니,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고 묵묵히 걸으며 힘겹게 버텼다.
정책을 입안하기 전에 샌드위치를 서빙해야 했다.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라떼를 따라야 했다.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하기 전에 코일을 묶어야 했지만, 오카시오코르테스의 당선은 징조였다. 그것은 - P412

장대비 이후에 뜬 무지개였다. 수위가 줄어들고 있다는 조짐이었고,
폭우 이후에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증거였다. 최저임금과 하향고용과 끔찍한 좌절의 오랜 시간 이후 우리 세대는 마침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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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소 말고 주재소 순사라도 됐이믄 사람을 잡아도 몇은 잡았일 기다. 세상에 사람 영악한 것겉이 무섭은 기이 어디 있노.
그 악종들은 건디리지 않는 게 상수라."
"엽이네 처지가 기막히제. 까막소에서 나온 오서방이사 진작 식솔 데리고 떠났이니 빌어묵든 얻어묵든 다리 뻗고 잘 기다마는."
"떠나고 싶어 떠났나아? 우가 놈의 식구들, 밤낮없이 직이겠다고 굿을 치는데 견딜 재간 있던가? 그 억울한 사정, 다 말못하지. 적반하장이라 카더마는 우가 놈이 오서방 직이겠다,
낫을 들고 나왔는데 그라믄 가만히 앉아서 당하겠나? 안 죽을라고 실갱이를 하다 보이, 그리 된 긴데 전생에 무신 원수가 졌일꼬." - P222

"과연 이놈의 돌대가리, 형의 호주머니 축내가면서 공부를계속할 필요가 있겠는가, 해서 술 마셨고, 처자를 내동댕이친채 평생을 자신의 자유를 찾아 방랑하는 내 부친 말이오, 얼굴도 모르는 그 양반의 그 배신과 기만을 씹으며 술을 마셨고, 철저하게 속았소. 세상 떠난 억쇠할아범한테 속았고 어머님한테속았어요. 밤이면밤마다 삯바느질로 지새며 한숨 쉬던 어머님의 세월, 상전이 뭐길래 뼈를 깎고 살을 저미듯, 백발이 되고허리가 꼬부러질 때까지 봉사한 억쇠할아범, 유월이할멈, 도대체 그분들 희생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거짓의 지릿대 때문이었소. 할아버님처럼 아버님도 나라를 위해 큰일 하신다. 하하핫핫 하하핫………… 그 큰일이 알고 보니 방탕이었습니다." - P232

민우는 억지를 썼지만 윤국은 할 말이 없었다.
"사나이의 풍류로써 기생과의 로맨스,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딸애도 낳을 수 있는 일이지요."
"듣기 거북하군."
"내 말이 뭐 틀렸습니까? 다만, 그렇지요. 다만 내가 분노를느끼는 것은 늑대 울부짖는 벌판에 처자식을 내동댕이치고 떠난 사람, 형은 모를 겁니다.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겉은 멀쩡하면서 속으론 찬 바람 굶주림에 웅크려야 했던 우리들 세월을 모를 거요. 평생을 외가의 도움, 넉넉지 못한 숙부의 도움으로 연명했던 우리들 심적 고통.……… 무책임하게 비정하게 내버리고 간 부친의 목적이 무엇이며 가치관은 무엇이냐, 새삼스럽게 그걸 따지자는 건 아니오.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어떤면에선 모질고 강한 거지요. 하면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또 뭡니까? 기생과 동서했고 기지배까지낳았으면" - P233

"양반 꼴 좋다. 세상에 며느리보고 이년 저년 욕하는 시애비가 어디 있노. 우리 겉은 상사람도 그런 망측한 짓은 안 하거마는 늙어서 덕 본다. 젊었이믄 동네 가운데 두기나 할 기든가?"
동네 사람들 말이었다. 언젠가 병수는 혼잣말같이 말한 적이있었다.
"내가 불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며 저런 부친의 아들로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운명을 어찌 거역하겠느냐."
비애에 젖은 눈으로 병수는 휘를 바라보았다. 휘는 그때 눈물을 흘렸다. - P245

"사람 아닙니다. 밥이나 믹이달라꼬 기어들어와도 그 꼬라지못 볼 긴데, 그 곱새도령 몸은 병신이지마는 마음은 관옥이오.
이 세상 사람 아닌갑소. 컬 때도 보아서 알지마는 그 눈이 실프고 우찌나 맑고 빛이 나던지. 우째서 그리 착한 사람이 그렇기도 무도한 부모한테서 태어났을까요." - P248

어디 병수의 한이 그것뿐이겠는가. 불구의 몸으로 서희를 엿보았던 마음, 서희와 자신을 결합시키려 했던 부모의 간교에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그 세월, 서희는 그에게 빛이었고우주의 신비였다. 관음상이요 숭배의 대상이며 그것은 인간적이 아닌 천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길상을 만날 수는 없었다. 간절하게 만나고 싶은 길상이지만 서희의 존재는 그것을상쇄했다. - P266

"저는 아마도 부친을 버렸을 겁니다. 미움을 버리면서 부친을 버린 셈이지요. 그, 그렇소. 부친에 대한 연민은 혈육에 대한 그런 아픔과는 다르오. 한 생명에 대한 것, 그, 그것 이외 아무것도 아닐 거요, 아니 그보다 나는 불효라는 말을 두려워했소, 불효라는 말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소."
오종종했던 얼굴이 풀어지면서 병수는 솔직하고 담담하게심경을 털어놨다. 지감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올곧잖게 해도사를 노려보면서,
"몹쓸 사람이구먼." - P288

‘혹 떼러 왔다가 혹을 붙이고 가는 꼴이군. 겁을 좀 주어서,
집안이 조용하게끔 하기는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내가 가고나면 송장 썩은 물 대신 날 잡아오라고 성화겠지. 그거야 뭐 몸에 해롭잖은 풀이나 풀뿌리면 당분간은 괜찮을 게고.‘
해도사는 휘한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똥벼락을 맞은 조병수가 대성통곡을 했다는 얘기, 가엾고 측은하며 사람이 어찌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떠날 길을 왜 생각지 않는가 하며 통곡을 했다는 얘기, 해도사는 병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심정이 바로 지금 그와 같았다. 측은하고 가엾고, 미워할 수가 없었다. 정말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구제받지 못하는 자에 대한 슬픔이었다.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자에 대한 슬픔이었다. 삭을 대로 삭아버린 육체를 안고 버둥거리는 한 생명에 대한 슬픔이었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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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존재에 대한 감정에, 그 존재가 일깨우지만 그 존재와는 무관한, 이미 예전에 다른 여인에 대해 느꼈던 많은 감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특별한감정을 뭔가 우리 마음속에서 보다 일반적인 진리에 이르게하려고 애쓰며, 다시 말해 인류 전체에 공통된 보편적 감정에포함시키려 한다. 이 보편적 감정과 더불어 개인과 개인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아픔은 과거의 우리와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내 아픔에 기쁨이 섞인 것도, 그 - P192

아픔이 이런 보편적 사랑의 아주 작은 부분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 P193

침묵은 힘이라고들 한다. 침묵은 다른 의미에서는 사랑받는 이들이 가진 무서운 힘을 뜻하기도 한다. 이 힘은 기다리는 이의 불안을 가중한다. 우리와 떨어져 있는 인간보다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침묵보다 더 극복하기 힘든 장벽이 또 어디 있으랴? 누군가는 또한 침묵은 형벌이며,
감옥에서 침묵을 강요받은 자는 거의 미칠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침묵을 감수하는 일은 침묵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큰 형벌이다! 로베르는 중얼거렸다. "이렇게소식이 없다니 그녀는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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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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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광주 민주항쟁 기념일 어제로서 43주년이 되었다. 

그동안은 주로 회고록 등을 통해서 사건 일지를 들여다보듯 최대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애썼던 듯하다. 그래서 사건과 관련한 대표작인 이 작품을 선뜻 읽기가 망설여졌다. 이제야 읽었던 이유이자 변명이다.


4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5.18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어제 오전 늘 그렇듯 신문을 펼쳐 들고 기사를 훓어 읽다가 5.18과 관련한 기사들을 몇 건 접했다. 사건 이후 꽤 시간이 흘렀으니 참상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세대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20/30대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마침 관련 기사가 있었다(https://hankookilbo.com/News/Read/A2023051709480005826). 물론 이들의 생각이 광주에서 살고 있는 20/30 세대 전체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도 생겨났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광주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은 갑갑해져온다. 메인 고리인 전두환은 이미 숨졌고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죄를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진실이 몇 개의 정직한 언론을 통해, 외신 기자 등의 사진, 영상 등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다만 당시에는 신군부 군홧발 아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총 6장을 읽는 동안 마음을 연신 쓸어내렸다. 특히 2장에서는 시신이 트럭에서 내던져지고 불태워지는 일을 주체가 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객관적 사실을 그림으로 그리듯 묘사하니 그것을 읽는 일은 역시나 어려웠다. 무엇보다 "나"가 아니라 "너"라는 단어로 주체를 표현한 것은 자신을 사물처럼 객관화시켜 제3자처럼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닐까. '너는 방관자야. 또는 너는 구할 수 있었어(용기를 냈다면) 그러지 않았잖아! 너는 결국 피한거야!' 스스로를 제2의 가해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이 총검에 폭력에 희생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지키려 했던 사람을 욕할 수 있을지는 나조차도 모르겠다. 마음으로는 구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 폭력이 두려울 수밖에 없으니까.


시민들이 많이 다치고 죽으면서 병원의 병상은 모자랐고 어느 순간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온다. 결국 상무관에 시신을 안치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으면 확인하게 하는 작업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태극기로 관을 감싸고 합동 영결식이 이루어질 때 애국가가 불린다. 태극기와 애국가가 이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나라란 게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착잡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혐의자라고 단정한 이를 추적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강제로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과정도 자세히 묘사된다. 판옵티콘처럼 설계된 감옥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그 눈과 폭력의 현장을 탈출할 수 없었던 수없는 이들을 가만히 숨죽인 채 생각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모든 이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이들, 소식을 들은 이들 모두가 이 일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간접적으로 책을 통해,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접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에게 이 일은 시위, 피 냄새, 폭력일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이 일은 괴로워서 잊고 싶은 일일지 모른다. 


인간의 성(性)은 과연 어떤 것일까? 성선설 또는 성악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인간의 물성이 선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했고 다만 좋은 일들을 행하면서, 좋은 생각들로 조금씩 개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래도 얼마 전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광주를 찾아 직접 마음을 전한 일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부디 유족분들의 마음이 치유되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진실이 명확히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 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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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19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년들의 대담 기사를 보면서,,,,
갑자기 프라하의 얀 팔라흐의 기념비가 생각나네요.
그들은 그들의 아픈 역사도 삶이 되고, 예술이 되는데,,, 우리는 정리하지 못한 아픔이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리의화가 2023-05-19 16:37   좋아요 1 | URL
프라하의 봄도 이후 20여년간 우여곡절이 많았죠.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말끔하게 정리가 안되니 중언부언 살이 붙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로 인하여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듯 싶습니다. 덕분에 저도 기념비 사진을 다시 찾아서 확인했네요.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05-19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번은 절대 못읽을 책이죠 친구랑 어제 이책에 대해 말하면서 눈물 흘렸거든요
5.18기념식에 합창곡 부르러갔던 친구가 5.18관련자께서 자작시 낭송하면서.. **동에서 얼마나 ㅇ많은이들이 죽고 **동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이런 시를 읽으며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오열했다는 말을 듣고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하는 실감이 오더라구요. 당사자들에겐 43년이 지났어도 치 떨리게 생생한 기억이겠구나 싶기도 했구요!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이 최소한의 책무가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거리의화가 2023-05-19 16:42   좋아요 2 | URL
안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었습니다. 그동안 못 읽었던 이유도 읽고 나서 후폭풍이 클 것 같아서였어요. 어쨌든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이었고 읽으니 후련하기는 합니다. 다만 읽고 나서도 목소리가 떠나지 않네요. 세월이 지나 광주 내부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있는 듯 싶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세력 때문에 사건 자체의 해결은 요원해지고 잡음만 커지니 국민들도 피로감이 커지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입니다.

희선 2023-05-20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잊지 않아야 일에서 하나군요 5·18... 이것도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아직 그때 일을 겪은 사람은 지금도 힘들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5-20 10:14   좋아요 0 | URL
직접적으로 겪은 분들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겠죠. 여론을 조작하여 물타기하거나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등 가면 갈수록 사태가 정리되지 않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독서괭 2023-05-20 0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 이 소설 읽어봐야지 하고 담아둔 게 몇년째인데 손이 안 가요 ㅠㅠ 힘들 것 같아요 ㅠㅠ 화가님은 맘 단단히 하고 해내셨군요! 리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 없어서 5.18을 잊고 있었어요

거리의화가 2023-05-20 10:16   좋아요 2 | URL
그쵸^^; 저도 몇 년째 읽을까 말까 하다가 결국 손에 놓기를 몇 번이나 했었습니다. 그러다 언제까지 미룰거야 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읽었답니다. 매년 잊지 않아야 할 일이 늘어나는 것이 마음이 아픈 동시에 또 기억하지 않으면 사건의 해결은 요원할 것 같다라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