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설계자들 - 국가 주도 산업화 정책과 경제개발계획의 탄생 역비한국학연구총서 40
정진아 지음 / 역사비평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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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비총서 시리즈 전작을 읽은 뒤 독서 모임을 하면서 이 책이 다음 권임을 알게 되었다. 전권이 현대 한국 사회과학 형성의 계보를 정리했다면 이 책은 경제 정책의 초기 형성을 정리했다. 두 책을 연이어 읽고 나니 서로 보완되는 측면이 있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상이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의식관념과 인식체계, 이를 기반으로 한 목적의식적인 사고 활동이다. 사상사는 역사적 현실 세계와 결부된 이러한 의미의 사상 전개와 그 발전사를 중심으로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정책사상사 연구방법론이란 해방 후 현실에 대한 학자 및 관료를 비롯한 지식인층 일반의 인식체계 및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구상과 이념을 파악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체계화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P26~27


앞선 사회과학의 계보를 정리할 때도 사상사적 방법론을 사용했지만 이 책도 그렇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저 정책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상사’가 역사적 현실을 담은 사상을 추적하며 역사를 재구성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대체 담당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 세계와 어떻게 절충시켜나갔는지 들여다보는 과정이야말로 그들의 인식 세계를 확인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 정책과 정책을 내놓은 관료들의 면모를 확인하다 보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정리 시기를 1945년부터 1960년대로 한정했다. 해방 후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미국의 압도적 영향 하에 들어선 뒤 한국이 자본주의의 경제로 정해지기까지를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국민들은 사회 복지, 균등 분배 경제 정책을 원했다. 그래서 정책 담당자들은 이를 고려하여 농업 분야는 지주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국가 통제하에 공업 생산력을 증강시켜 산업 구조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에는 합의했다. 다만 경제주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우파는 자본가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중간파는 중소농과 중소자본가, 노동자에 손을 들어준 것이 달랐다. 그래서 정부 수립 초기 경제 관료진은 기획처, 농림부에는 계획 경제론자들(중간파)을 기용하고 상공부, 재무부 등에는 자유 경제론자(우파)를 배치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계획 경제론자들은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공동 생산 협동 정책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정부 내부의 견제로 인해 정책은 조기에 좌절되었다. 자유 경제론자들은 소농체제를 육성하고 미국 원조를 바탕으로 통제를 최소화한 자유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이 추진된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미국이 급브레이크를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남한 정권은 공산주의 투쟁과 산업부흥 정책을 병행한다. 하지만 미국이 원조를 차단함으로써 꼬리를 내린 정책론자들은 한미경제안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안정 추구 방향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통화량 조절, 긴축 금융, 귀속재산의 급속불하, 조세증진을 통한 세입 증대, 정부 보조금 폐지, 통제 완화 등을 담은 경제안정 15원칙에 의거한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인플레이션은 잡혔으나 산업은 오히려 위축되었고 소비재 산업에 급속히 자금이 몰리면서 산업 구조의 불균형 문제가 생겨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특수로 물가가 대폭등하여 정부는 비상이 걸린다. 유엔금이 준 대여금과 세입 마련을 위한 한국 은행 차입은 인플레이션을 더 심화시켰고 물가를 더 폭등시키는 악순환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통화 증발을 억제하고 유엔이 준 대여금을 상환하고 통제 경제 정책을 실시하며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자는 방안을 내놓는다. 필수 민생 부분에 한해 국가가 물자와 자금을 알선하고 통제하고 그 외 분야는 자유롭게 하겠다는 관리 경제 방침을 발표한다. 이는 개인 기업을 성장시켰으나 국공엽 기업체가 부진을 겪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전시경제 정책을 맡은 담당자들은 재무부국장 백두진, 차관 김유택, 이재국장 송인상, 회계국장 박희현이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해 수입 내 재정 지출을 하는 초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정부 재정의 적자는 더 발생하지 않았으나 애초부터 자본금이 없는 중소자본가는 힘들어지고 지주, 농민에게는 해택이 없어 불합리한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는 1952년 말 유엔금 대여금에 지불 능력이 없다고 미국에 통보하고 대여금 청산을 위한 통화 개혁을 단행을 발표한 뒤 이를 실시한다. 1953년 2월 미국은 한국의 성의를 감안하여 대여금을 완전히 탕감한다. 1951년 6월 주한 ECA 원조가 끝나고 한미경제안정위원회 운영이 중단되면서 한국 정부와 유엔사령부 합의 하에 합동경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52년 상공부 주도 하에 시행된 상공생산종합계획은 전쟁 물자 생산을 밑받침하기 위한 단기 계획 성격을 띤 정책이었다. 재건기획팀은 기획처장에 원용석과 상공부장관에 안동혁을 중용한 뒤 기획처와 물동계획국 주도하에 기간산업 복구를 위해 장기계획인 부흥물동계획을 세웠으나 원조액 대부분이 재정 적자인 정부에 쓰여지면서 정작 부흥 정책에 쓰여지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념 체제 경쟁에 따라 남한은 자본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자유경제론자들의 입김이 거세졌고 미국이 국유화, 사유재산권 제한을 명시한 제헌 헌법 조항을 문제 삼으면서 개헌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경제위원회는 국영기업체 지정을 해제하고 민유민영방침을 내세우며 이를 위한 자본은 한국 산업은행의 융자로 확보하고 차후 민간에 양도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승만 정권은 경제조정관에 김현철을 기용하고 한일관계 개선과 재정금융 안정을 하는 대신 미국에 기간 산업 건설에 쓰겠다며 원조증액을 요청했다. 이때 백두진이 물러나고 3년간 중지중이었던 합동경제위원회가 재개되면서 정례화되었다. 

1956년부터는 전후 재건을 마치고 정부에서도 경제 자립과 부흥을 위한 정책으로 경공업과 중공업의 동시 발전을 병행하기로 한다. 이승만은 자유당 국회의원인 인태식을 재무부장관에 기용하고 미국에 대충자금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요청을 거절한다. 인태식은 산업자금을 위해 정부가 가진 달러를 팔기 위한 산업부흥국채를 발행하자고 제안하는데 유엔사령부 경제조정관 윌리엄 원은 이에 딴지를 걸며 산업자금은 대충자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김현철이 이를 중재하며 산업부흥국채 집행은 세입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도록 한다. (1957년부터 시행된 이 정책은 이승만이 퇴진하는 1960년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갈수록 산업 수준을 하락시키고 제조업의 불황을 초래하였으며 대기업과 정부의 유착 관계를 심화시키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1957년 김현철의 뒤를 이어 송인상이 부흥부 장관 겸 경제조정관에 취임했다. 부흥부는 처음으로 여론을 참고하여 장기경제개발을 위한 기관으로 부흥부경제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문가를 물색했다(그전까지는 정부 입맛대로 기용했다는 이야기).  미국에서 산업 기금을 확보한 뒤 1958년 경제개발위원회를 산업개발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분야별 전문성을 고려하여 위원들을 선정한다(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도 두루 포함시켰다). 이렇게 시작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1차로 생산력 증강과 국제수지 개선을 1차 목표로 했다.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향후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의 프리로드 성격을 갖는 것이었으며 향후 자립경제 체제 확립을 조성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계획경제 정책과 관리경제 정책, 자유경제 정책이 각축하고 경합하는 가운데 그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만들어낸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가 중심으로 정초된 한국 경제정책의 계급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정책 담당자들은 원조자금이 들어오는 동안 공업화와 생산력 증진에 매진함으로써 경제자립을 달성하려고 했다. 관민협조, 노자협조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본가들은 생산력 증진의 주역으로 상정된 반면, 농민과 노동자들은 작업장과 마을 단위에서 자활과 자립을 통해 국책에 부응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또한 전후재건사업과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는 국민생활수준의 향상 및 분배와 계급 문제 해결을 후순위로 돌린 채 경제성장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정부와 자본가의 유착관계가 심화되는 가운데 노동자, 농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 P377


그 결과는 역사가 말해주듯 4.19혁명이었다. 미국의 역할도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게 컸음은 앞선 바대로다. 경제 관료들의 정책에 미국의 입김과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한국전쟁은 해방후 사회분배와 평등정책이 더 우선이었던 상황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의거한 자유경제로 완전히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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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사회·경제체제를 봉건제나 노예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유럽의 봉건제와 노예제의 핵심에는 국가와 교회 등이 인지하는 법적 종속이 있었다. 중세 유럽과 고대 로마의 도시에는 법적으로 인정되는 자유의 조건이 있고, 이 조건은 자본 축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자본 축적은 마침내 자본주의의 등장을 이끌어냈다. 이와 비교해보자면동남아시아의 체제는 더 개인적이고 금전적이었다. 법보다 충성이 중요하고 모두에게 주인이 있었다. 돈은 채무를 통해 사람의 충성을 사는 데는 유용했으나, 일시적인 임금으로 노동력을 사는 데는 무용했다. 자본을 보호하고 사용할 하인을 모으지 않고 자본을 축적하기란 가능할지는 몰라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 P203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 일부일처제와 정절(이혼으로 쉽게해소되는), 여성의 강력한 지위 등 성관계의 전반적인 양상은, 교역의 시대에 동남아시아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던 세계종교와 여러 가지로갈등을 빚었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이슬람 율법과의 충돌이었다. 이슬람 율법은 여성을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남편에게 의존적인 존재로만들고, 여성이 이혼을 요구할 권리도 철저히 제한했다. 혼전 성관계(지 - P229

나zina) 또한 아주 엄하게 처벌받았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아랍 부모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딸이 사춘기가 되면 곧 결혼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 P230

도서부 동남아시아에 관해 주장하고 싶은 바는 서기 1000년 이전에종교적 문헌을 읽을 목적으로 인도에서 문자체계가 처음 들어온 것이분명하겠지만 수마트라, 남술라웨시, 필리핀의 여러 지역에서는 상당히다른 일상적 목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확장 이전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여성이 상업과 사회 면에서 능동적이었던 애니미즘 문화에 의해 문자 체계가 받아들여졌다. 여성은 글쓰기를 남성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신을 주고받고 여성의 영역이던 채무와 상거래 문제를 기록했다. 따라서 문자 교육과 전승은 가정의 영역이자 대개 어머니와 손위 자매의 책임이 되었고, 배타적인 사제계급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었다. - P314

교역의 시대는 바람 아래의 땅에서 엄청난 변화의 시기였다. 문화와교육의 형태, 대중 신앙, 법체계, 심지어 의복과 건물의 양식까지, 교역도시들은 자신들이 중심이었던 공동체들을 개조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는 이 연구가 그 시작점도 변화의 방향도 세계의 다른 지역과 유사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해왔음에도) 유럽에서 유사한 시기인 르네상스 시대와 비교할 만하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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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이음매 없이 짜인 거미줄과 같아서 역사의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 얽힌 맥락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바람아래의땅‘처럼 국제 교역과 긴밀하게 얽힌 부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지역을 연구하는 우리는, 그 연결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동남아시아인을스스로의 역사적 무대에서 구경꾼으로 만들지 않기가 무척 어려운 것을 잘 안다.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식민주의 역사는 동남아시아를 서구의 위대한 팽창 과정에서 별다를 것 없는 배경쯤으로 축소하고 폄하했다. 반면 민족주의 역사는 아시아인을 행위자가 아닌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해, 오히려 식민주의 역사를 강화하거나, 지역 연구를 국제적 역학이나 비교로부터 고립시키는 식으로 문제점을 바로잡으려 애써왔다.
동남아시아인이 직접 쓴 사료를 발굴하고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영웅적인 과업을 시작한 것은 동양학 연구였으나, 이 잡학다식한 전통은 왕실연대기, 종교적 주석, 서정적인 운문이 생산과 교환의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일러주는 길잡이가 되지는 못했다. - P17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에 관한 극히 부실한 사료에서 도출한 부정확한 통계 수치는 사용하기를 꺼려왔는데,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수량화 작업 없이 특정한 시기나 지역을다른 시기나 지역과 비교하거나, 동남아시아 자료를 유럽이나 중국처럼누적된 연구 자료가 많은 지역의 더 정교한 사회사와 연결시키기란 불가능하다. 파편적이고 모순되는 여러 자료에서 특정한 수치를 도출하는데는 큰 위험이 따르며 오류가 생길 가능성 또한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전근대 유럽 사회사도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문제를 겪었으며(이 분야에는 상반되고 모순되는 사료가 더 많다), 주저함과 망설임으로 가득한 초창기 이래 거둔 성과에 이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 P39

쌀이야말로 동남아시아 최대의 교역 품목이었으므로, 동남아시아 교역의 근간이 사치스럽고 "아름답고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본 판 뢰르의가정"은 옳지 않다. 쌀 수출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보관과 유통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큰 도시 지역의 쌀 소비 시장이출현하면 쌀 생산지는 금방 뒤따라 생겨났다. 북수마트라의 근세 이래쌀 잉여 생산지인 적 없었던) 델리가 연간 쌀 300톤을 생산해 1640년대에전성기를 누린 아체에 쌀을 공급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네덜란드의 봉쇄나 지역 경제 위축으로 쌀 수입량이 줄어들면, 1650년대아체와 1630년대 반튼 주변에서 그랬듯 인근에 벼 재배지가 생겨났다. - P55

새로운 국가 대부분에서 국가적 양식을 재정의하는 과정은 종교적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수용은 거의 예외없이 복식뿐 아니라 머리 모양, 몸치장에 변화를 가져왔다. 여러 종족에 - P140

게(자바인은 아니지만) 말레이식 문화적 타협이 이슬람 복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본적인 사롱 위에 여성은 바주나 크바야 같은 상의가, 남성은비슷한 헐렁한 웃옷과 두건이 더해졌다. 여성용 스카프(슬렌당selendang)는 다른 용도로 살아남았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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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번역총서 1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기획, 형진의.임경화 엮음, 다카하시 데쓰야 해설 / 어문학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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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의 본의』는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나 천황기관설 등의 대항 사상을 배척하고 메이지의 왕정복고에 내재된 신화적 국가관을 전면적으로 전개하여 국가 공인 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내세운다. 1937년 이 책이 간행된 해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며 국가총동원체제가 이어졌기에 시점이 절묘하다고밖에 없다. 

신화적 국체관을 받들고 세계대전으로 향한 일본 체제는 패전으로 붕괴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주류사회는 헌법 개정을 통해 내부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며 평화 헌법을 부정하고 보통 국가라는 허명 아래 전쟁 국가로 나아가려하고 있다. 극우정권을 후원하는 단체인 일본회의는 국체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전형적인 예다. 

1945년 12월 15일 GHQ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던 이 책은 2009년 사토 마사루의 『일본국가의 신수: 금서 「국체의 본의」를 해독하다』가 출간된 이후 해설서와 번역서, 관련 저서 등이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다. 언론과 미디어도 이에 호응하며 과거의 영광을 복기하고자 한다.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도 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책을 읽으면 '무슨 헛소리야'하는 소리가 나오면서 분노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대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조선 식민지 체제의 영향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극우 파시즘이 판을 치는 지금의 시기에 미루지 않고 읽어야 한다고 여겼다.


책이 출간될 무렵의 배경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일본은 서양 문물의 급격한 흡수로 인해 전통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했다. 서양의 개인주의, 자아 주장, 자유 주의를 비판하며 집단(그러니까 가족, 국가)을 강조한다. 가정에서는 집이 나라이고 충효는 모든 선의 근본이라 주장한다.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에 송(宋)학이 수입되고 선(禪)학이 유행하면서 대의 명분론과 국체론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주자학을 채용하면서 신도사상을 바탕으로 한 국학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다. 


신을 받드는 것, 정치를 행하는 일의 근본은 같다.

천황을 만세일계의 황통에서 나와 신민이 천황을 섬기는 것은 의무도, 힘에 굴복하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추앙과 순종이다.

충효는 천황을 섬기는 관계에 핵심이며 일본은 가족국가이고 황실은 신민의 종가다. 

신심은 죄와 부정을 씻고 사를 버리고 공에 합치되어 개인을 버리고 국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참된 자기를 살리며 국가에 봉사로써 남을 동화시키는 힘을 키워야 한다(몰아동화).

무사도는 정직, 근본, 바른 모습을 지닌 사람이다.


간단히 책의 핵심 내용만 추리면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사실 더 많지만 말만 바뀌었지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


스진 천황(10대) 시대에 사도장군을 지방으로 보낼 때 다음과 같은 조칙이 나와 있다.

"... 도읍에서 멀리 떨어져 천황의 위엄이 미치지 않는 지방의 백성들은 아직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직 왕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가. 이에 경들을 선발하여 사방으로 보내니 짐의 법도를 알리라." - P48

국토 경영의 정신이라며 천황의 위엄이 퍼지지 않은 곳은 이를 교화시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교묘한 숨은 논리에 날이 설 수 밖에 없다.


읽으면서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면 무사도는 정직, 근본, 바른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 남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그들이 말하는 국민성과 국민 정신은 진심과 조화라는데 과연 그런 진심이 어디에 표출되었는지 말이다. 힘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따져 묻게 된다. 


마지막 인용구가 나는 참으로 의미 심장했다. 공교롭게도 메이지 유신에 관한 책을 읽고 이 책을 읽으니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과거의 폭력과 전쟁을 향수로 미화하려는 시도를 앞으로도 계속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창조는 항상 회고와 하나가 되고, 복고는 항상 유신의 원동력이 된다. - P131


충은 천황을 중심으로 받들고 천황에게 절대 순종하는 길이다. 절대 순종은 나를 버리고 사사로움을 멀리하여 오로지 천황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이 충의 길을 행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 유일한 살 길이고 모든 힘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이른바 자기 희생이 아니고, 소아를 버리고 크신 능위에 살면서 국민으로서의 참 생명을 떨쳐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 - P55

효는 동양 도덕의 특색이지만, 그것이 나아가 충과 하나가 되는 점에 우리나라 도덕의 특색이 있고, 세계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무사의 선언이 그 집안이 황실에서 나온 것을 선언하고, 또한 가헌이나 가훈이 황실을 섬기는 관계를 그 먼 기원으로 삼은 것은 완전히 동일한 도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 P67

우리 무의 정신은 살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활인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전쟁은 그 의미에서 결코 남을 파괴하고 압도하고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리에 따라 창조의 역할을 하고, 큰 조화 즉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쇼와 천황 즉위식의 칙어는 다음과 같다.

"황조황종께서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실 때, 나라를 집으로 삼고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여겼다. 역대 천황은 대대로 그것을 이어받아 어진 정치는 온 천하에 고루 퍼지고, 만민이 서로 이끌며 군주를 공경하고 충성을 다하는 미풍으로 위를 섬기고, 상하가 진심으로 서로 느끼며 군주와 신민이 일체가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국체의 정화이고, 천지와 함께 영원 무궁히 존재해야 하는 바이다." - P76

우리나라의 신에 대한 숭경은 나라를 시작하신 정신에 바탕을 둔 국민적 신앙으로 서양의 신앙처럼 하늘이나, 천국, 피안, 이념과 같은 인간 세계에서 초월한 신앙이 아니고, 역사적 국민생활에서 나온 섬김의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사는 지극히 넓은 의의를 가지는 한편, 완전히 국가적이고 현실생활적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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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와 시마즈 히사미쓰 - 메이지 유신의 선봉
손일 지음 / 푸른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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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와 조슈번의 하급 무사들이 역성 혁명을 일으켜 막부를 타도하고 근대 천황제를 확립(하여 지금의 일본이 있게 만든)한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삿초 사관). 하급 무사, 그러니까 행동 대장들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메이지 유신 3걸로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막부 말기에는 다양한 세력 간에 투쟁이 있었기에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메이지 유신의 과정과 결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저자는 개인의 활약보다 사쓰마 번이라는 집단의 결정에 더 주목하며 당시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의 생각과 행동에 힘을 싣는다. 한 마디로 사이모 다카모리는 그동안 과대 평가되어왔고 시마즈 히사미쓰는 과소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1950년대 이후 메이지 유신을 평가하기 시작했고 패자인 막부의 입장이나 승리한 사쓰마, 조슈 번의 입장이 아닌 다른 번들의 입장에 대한 해석도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마리우스 잰슨은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이라는 책에서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이끌어내기도 했다.  


책은 메이지 유신 전후의 과정 뿐 아니라 사쓰마 가문에 대한 배경 정보를 위해 앞선 역사를 개략적으로 다룬다. 사쓰마 번이 막말 정국의 핵심으로 들어오기까지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 알기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보여지므로 저자의 탁월한 선택이라 보인다. 


고대 중앙집권 체제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하면서 지방 분권 정부가 시작되었다. 이때 유력 농민 세력들 중에 개간한 토지를 중앙 권력층에 바치고 장원의 관리인이 되는 이가 생겨났다. 이들은 중앙 권력의 뒷배를 빋고 혜택을 받으며 장원을 늘려나갔다. 후지와라 사유지였던(5대 때 성을 고노에로 바꿈) 시마즈 장원을 가신인 고레무네 다다히사가 장원 관리를 맡은 이후 영향력을 키워 나간다. 후에 고레무네 다다히사가 성을 시마즈로 변경하는데 이것이 시마즈 가의 출발이다.

시마즈 가가 돈을 많이 벌어들이게 된 계기는 1609년 사쓰마가 류큐(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류큐는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오고 있었는데 이에야스에 의한 명으로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로 하여금 류큐를 점령하게 한 것이다. 사쓰마 번은 류큐에 관리를 파견하고 명, 청과의 조공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아편 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고 미국 페리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막부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제후 및 정계 인사들에게 대책을 자문하기 이른다. 

시마즈 히사미쓰가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것은 1862년 솔병상경(막부 허락 없이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향한 일)부터다. 그는 사쓰마 번 내 정치 입지를 강화하고 혼란스러운 일본 정국을 이용하여 막부 정치에 개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히사미쓰의 솔병상경을 전후로 양이의 주체가 완벽하게 달라진다. 페리 내항 이전 막부의 외교 정책은 개국과 양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지만, 내항 이후 막부는 개국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에 동조한 것은 일부 번주(특히 히토쓰바시파 개명 번주들)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지배층과 서민들은 개인적 수준에서 정서적 양이론에 머물러 있었다. 외국인을 살상하고 막부 최고위층에 위해를 가하며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교토에서 봉기를 주도하던 존왕양이 지사들 역시 이러한 정서적 수준의 양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P284). 히사미쓰가 입경에 성공하자 정국에 주도권을 빼앗겼음을 자각한 조슈 번은 양이론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여기에 도사번이 합류하면서 존왕양이론이 정국의 핵으로 부상했다. 


조슈 번은 1,1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와 양이친정을 건의하고 조정에 결단을 요구하였다. 히사미쓰는 자신이 계속해서 막부 인사 개혁에 관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했다. 나카가와노미야는 천황친정을 뒷받침할 실력자를 찾고 있었고 둘은 이렇게 서로 정략적으로 연대하게 되었다. 이들은 8월 18일 양이친정 연기, 급진파 공경의 참내 정지 및 타인 면회 금지, 급진파 공경들의 소굴인 국사참정, 국사기인 역직 폐지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었고 이에 조슈 번과 급진파 공경들은 교토에서 추방되었으며 조정은 공무합체파가 장악하게 된다. 히사미쓰는 천황의 밀칙 하에 ‘무리한 양이는 불가하고, 급진파가 주장하는 왕정복고(천황친정)는 불가하고, 막부에 대한 대정위임에 동의하고, 산조 사네토미를 비롯한 7명의 공가들과 관백 다카쓰카사를 처분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조슈 번은 자신들은 존왕양이의 대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며 탄원서를 조정에 제출하려 하였으나 조정은 이들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사쓰마가 막부로부터 빌린 면을 싣고 나가사키로 가던 중 조슈 번 포대의 포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벌어진 1864년 참예회의는 대외 방침에 대한 결정 사항과 더불어 자연스레 조슈 번의 처분에 대한 사항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요코하마 쇄항 결정에 결정적으로 반발한 히사미쓰는 이후 참예회의에 더는 참가하지 않았고 교토를 떠났다. 


히사미쓰는 돌아가 군사력 복구에 매진하였다. 신식 총포 구입에 매진하고 사쓰에이 전쟁으로 파괴된 집성관(서구 과학기술을 도입해 자립할 목적으로 지음)을 위해 나가사키 제철소에서 기술자를 초빙하고 증기기관 및 서양 기계를 갖춘 기계 공장을 복구하며 주변에 많은 공장을 세우게 된다. 또 육해군 교육기관으로 가이세이쇼라는 양학교를 개설하여 해군 포술, 병법, 축성, 측량, 항해, 조선 등을 교육한다. 이 학교 출신 학생을 중심으로 영국에 유학생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교토에서는 조슈를 지지하는 급진파 존왕양이 지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친조슈가의 인물이 국사로 임명되자 주전파는 때가 왔다며 세자의 상경을 번 내에 알렸다. 이때 과격파 존왕양이 지사들이 모여 정변을 모의하자는 정보가 새어나가 치안유지 조직 단체가 조슈, 도사 번 출신 지사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자 조슈 번은 격분했고 출병하기에 이른다(금문의 변). 

사쓰마, 도사 등 번들은 조슈에 대한 신속한 토벌을 요구했고 사이고 지휘 하의 포병의 대활약으로 조슈는 큰 손실을 입으며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어소를 향해 발포한 책임을 물어 조슈 정벌의 명령까지 떨어진다. 하지만 히사미쓰는 국내 갈등이 외세 침탈에 빌미를 줄 수 있다며 조슈와 화해와 연대가 필요하다 보았고 이에 삿초 맹약이 맺어진다. 이는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효고만에 출현하는 등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쇼군 요시노부는 프랑스 공사와 회담 결과 효고항을 개항하되 사쓰마와 조슈에 대항을 해달라는 조약 이행 서명을 했다(문제는 조약 이행에 대한 제후들의 의견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 

1867년 교토의 사쓰마 번 수뇌부는 막부 주도의 정국을 타파하고 제번연합에 의한 조정 중심의 정치체제를 위해 히사미쓰의 상경과 유력 제후의 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히사미쓰의 명을 받은 사이고는 전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네나리, 전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전 에치벤 번주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설득해 냈다. 4제후가 요시노부에게 건의서를 제출하였으나 이후 정국은 요시노부의 주도로 이어질 가능성만 확인한 채 물러나게 되었다. 4후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도사 강경파와 사쓰마 번의 사이고, 오쿠보 등은 삿도밀약을 맺으며 강경 노선으로 들어간 반면 히사미쓰를 비롯한 중신회의는 병력을 교토에 집중시켜 쇼군 요시노부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사임을 유도해내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이후 4후회의의 계획은 좌절되고 삿도 밀약 세력들에 의해 왕정복고 쿠데타가 벌어졌고 이는 메이지 정부를 탄생시킨다.


책은 이렇게 메이지 유신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사쓰마 번(의 히사미쓰)의 입장을 중심으로 정리하며 삿초 사관에 사려진 인물들을 다루었다. 메이지 유신이 몇 사람의 영웅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압과 내부 충돌에 의한 복합적인 정치성과 국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막부가 프랑스가 배후에 있었다면 삿초 세력에는 영국이 배후에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책의 중심은 사쓰마 번이고 막부를 무너뜨린 주도 세력의 한 축이다. 이는 엘리트 중심적 시각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700년 사쓰마의 역사는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무너뜨린 막부의 운명과 함께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히사미쓰를 비롯한 사쓰마 무사들은 결코 일본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되며, 기존의 막번 체제로는 식민지로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10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번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총력으로 매진한 결과, 그들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주도의 중앙집권 국가라는 신체제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물론 새로 만들어진 일본이 과연 그들이 원한 것과 얼마나 일치하였는가는 알 수 없다. - P396~397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고(?) 막부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일본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타국을 침탈하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삿초 사관과 메이지 유신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하는 일본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서 숨어있는 폭력성을 느낄 수밖에 없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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