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 이태준 중단편전집 1 - 기생 산월이, 방물장사 늙은이, 달밤, 오몽녀, 봄 외 30편 한국문학을 권하다 7
이태준 지음, 고명철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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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무렵 조선을 배경으로 쓴 이태준의 중단편소설을 모았다.


어느 날 어느 곳에서 그가 나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간들 

내가 무엇으로 그의 걸음을 막을 수 있으랴.

모두가 한낱 그림자로다.


우리는 매일 어떤 사람을 만나고 마주하게 될까. 만남과 헤어짐도 다 어쩌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평생 마주하지 못하기도 하기에 하다 못해 전철에서 잠깐 스친 사람이라도 때론 그 일을 계기로 특별한 인연이 되지 않던가.

<그림자> 속 주인공은 안타깝지만 그 기회를 흘려보낸 경우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렇게 스친 인연이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결혼의 악마성>을 보면서는 결혼은 결코 낭만이 아니라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다. 아버지가 폭군이었던 주인공은 말랑한 사람에게 끌렸다(너무 젠틀한 사람도 바람둥이라고 거부했음). 결국 그는 정직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던가. 현실주의자인 나는 돈 없는 결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반듯함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영민(또는 영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결혼은 결국? 자신의 이상과는 다르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6년 만에 동경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고향>의 주인공은 정작 고향이 낯설기만 하다. 비록 조선에서 태어나 자라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일에 따라 계속 장소를 옮겨 다닌 그는 한곳에 정착하며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6년 간의 외국 생활도 그는 이방인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고베 역 플랫폼에서 한 조선인 유학생을 만나 밥과 술을 얻어먹는다. 왠 오지라퍼인가 싶은데 그는 조만간 좋은 은행에 취직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에서 만난 조선인들은 하나 같이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은 과연 내가 조선에 가서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걱정한다. 과연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 일도 없소>는 돈이 되야 하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편집장의 요구에 신문사 기자가 찾아간 곳에서 만난 기가 막힌 사연의 주인공의 이야기다. 기자는 생각한다. 이렇게나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쩌면 이렇게 세상은 평화롭고 여유로울 수 있는가를 말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이것이 비단 과거의 일일까 생각했다. 오늘날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 않은 씁쓸한 생각.


동경에서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겠다 생각한 <실낙원 이야기> 속 주인공이 있다. 그러나 이상과는 달리 개인이 읽는 책을 검열받고 조선어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는 등 교사 생활이 순탄하지 않게 흘러간다. 식민지 시기 교사들이 처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과연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지. 


<코스모스 이야기> 속 주인공은 부모님의 요구에 따라 부잣집으로 시집갔으나(주인공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상대는 배려나 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과연 이후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꽃나무는 심어놓고>에서는 소작농의 이야기도 접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양반에게 부림 받던 소작농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일제강점기 들어와서는 더 힘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주가 일본 사람으로 바뀌면서 자기 땅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버티기 어려워진 것이다. 살아왔던 터전을 반강제로 떠나게 된 이들은 부푼 꿈을 가지고 서울로 오지만 그 돈으로는 변변한 집은 커녕 여관도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주인공은 처자식을 데리고 떠돌고... 도청에서는 사쿠라를 심는다고 인부들을 동원한다. 이들에게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다.


표제작 <달밤>의 주인공은 매일 늦는 신문 배달 때문에 분통을 터뜨린다. 알고 보니 그는 부업으로 신문 배달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안 주인공이 그를 짠하게 여기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신문을 보는 집을 그렇게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만 해도 신문을 따로 보는 것조차 사치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신문이 귀하기는 커녕 소셜 미디어로도 뉴스를 보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매년 신문 구독을 해주십사 하는 전화를 받기도 하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한 것만은 분명하다.


위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여기에 실린 단편 소설은 대체로 엘리트나 룸펜도 있지만 대체로 가진 것이 없거나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소시민들의 이야기들이 많다. 소설이지만 현실 풍자는 기본이고 약간의 블랙 코미디 같은 웃픔도 느낄 수가 있다. 

또 맛깔나는 이북 사투리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묘미다. 이태준의 소설을 가볍게 경험해보기에 적합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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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파시즘은 1919년 3월 23일 일요일 밀라노에서 탄생했다. 그날 아침 참전 퇴역군인과 전쟁을 찬양하는 생디칼리스트,
미래파 지식인‘, 언론인, 단순 가담자 등 약 1백여 명 이상의 군중이 산세폴크로(San Sepolcro)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밀라노 상공업연맹 회의실에 모여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선포하였다. 그때 무솔리니는 자신의 운동을 ‘전우단‘이라는 뜻의 ‘파시 디 콤바티멘토(Fasci di Combatimento)‘라 불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퇴역군인들의 애국주의와 급진적인 사회적실험인 일종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가 교묘하게 결합된 파시즘 강령이 발표되었다. - P29

보수주의·자유주의 · 사회주의와 같은 ‘이름‘들은 정치가 교인의 일이었던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상대방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끈질기고 학구적인 의회 토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고전적인 ‘이름‘은 그사상을 뒷받침하는 철학과 그 이름들의 강령을 검토함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파시즘은 대중 정치 시대에 급조된 새로운 고안물이었다. 파시즘은 세밀하게 연출된 의식과 감정이 가득실린 수사(修)를 적절히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서에 주로 호소했다. - P53

이 책은 목각인형이나 본질 같은 것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라고제안한다. 그러지 않으면 파시즘을 고립시켜서 보게 되는 고정된시각과 관점에 휘둘릴 수 있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 탄생 순간부터 격변을 맞으며 생을 마치는 마지막 단계까지 파시즘과 사회가 형성한 복잡하게 얽힌 상호관계 속에서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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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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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 이야기를 건네기, 살아 있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기, 나 중심 사고 돌아보기 등등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이다. 김초엽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럴싸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상상으로 빚어낸 이야기로 놀라움을 주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래서 좋았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SF적 상상으로 풀어내 독자에게 질문함으로써 각자의 생활 속에서 고민 속에 얻은 해답을 현명하게 풀어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단편 소설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한 편씩 읽었다. 대부분이 좋았는데 아래는 특히 내게 와닿았던 소설이었다.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는 흥미로운 소재에 박진감 있는 전개로 순식간에 몰입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책의 포문을 열기에 적절했다 생각한다. 

'인간의 살갗인 이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가 다른 물성으로 된 것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 물음을 조심스럽게 던진다.

금속 피부를 이식한 수브다니를 보면서 나는 단순하지만 어릴 적 만화에서 본 기계 인간을 떠올렸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던 인간이 기계의 몸을 주는 행성에 가 기계 인간이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영원의 삶을 살 수 있던들 무슨 소용일까, 유한한 생명이어서 값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어린 나이에도 했었더랬다.  

어쨌든 나는 수브다니가 금속 피부를 이식한 이유가 너무 의외라서 놀랐다. 금속 피부를 애써 고집하는 그를 보면서 주문을 받은 이는 그의 내막을 궁금해하고 이후 수브다니의 개인적 사정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의외의 전개로 흘러간다.

과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외형을 바꿀 수 있다면 삶의 어떤 것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따라올까? 인공 장기, 인공 피부... 여전히 윤리적 문제는 남아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수브다니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여름 휴가를 떠났고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내가 생각하고 지향하는 바가 상대에겐 낯선 것일 수 있다.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과연 표제작다운 소설이었다. '여러 명의 자아를 가질 수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다. 

여러 명의 자아가 갈등하고 충돌하여 분열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결국 다 쪼개져 분리되어 버린다면?

나는 평소 내 안의 자아도 여러 명이 살고 있나 생각할 때가 있다. 자아를 과연 단일한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해서다.

종종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혹은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감이 든다. '내가 가진 본 모습이라는 게 어떤 거지?' '나다운 게 뭘까?'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규정하고 싶어하고 그래야 복잡하지 않고 정리하기 편하니까 그렇게 묻는 걸까 할 때가 있다.

어쨌든 내 안에 여러 자아가 있다는 가정은 실제 분리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가정이라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과연 주인공은 여러 명의 자아와 화해하여 좋은 결말을 맺었을까?

더불어 나, 인간, 지구 중심의 사고에 우리가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곱씹게 하는 부분도 있어서 좋았다.


<진동새와 손편지>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는 재미 면에서는 덜하다. 그렇지만 지구인의 문자 기록 역사와 언어 소통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지구인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자 기록과 언어 소통이 비지구인에게는 낯설 테니까 말이다. 

과거부터 인간은 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는 것에 집착하며 기록에 집착했을까. 진동새는 촉각으로 질감과 진동으로 정보를 얻는다고 한 것처럼 감각으로도 의사 소통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사실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것이 다양성 면에서는 좋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번거롭고 복잡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물론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재미가 있고 외국어 소통을 위해 통역사라는 직업도 존재할 수 있었지만. 기록 문화는 확실히 매력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것이 기록화되어 오늘날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에도 전수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은 살아 있는 감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그 감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나온다. 데이터 조각이 되버린 인간에게는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일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감각한다는 것이 소용 없는 일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이어져 있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았다. 예전보다 그 고립감과 공허함은 더욱 커지지 않았나 해서다. 이제는 예전보다 더 쉽게 연락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를 누르는 일이 더 어렵게 되어버린 것 같다. 


<비구름을 따라서>는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과 조금씩 얽혀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다면?' 사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려면 상상했을 때 무언가 떠올라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다. 이 세계가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적응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서이겠지.

아무튼 여기에는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 다른 세계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세계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계에 어떻게든 발붙어 사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다쳐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별 수 있나, 살아야지. 그치만 그게 안될 만큼 힘겨운 사람도 분명 있다. 주인공은 하나의 일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옮겨다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작가가 쓸모가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를 비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비구름을 따라가자는 마지막 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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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그렇게 1894년의 격변을 거치며 조선 사회는 확연히 변했다. 인민들은 칼 대신에 펜을 들고 자발적 결사체를만들어 여론을 형성하며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거리 풍경도 변했다.
문명화의 세례로 도시는 서양의 모습을 띠어갔다. 잘 닦은 도로에 높은 시계탑이 걸린 서양식 건물이 하나씩 올라가고 정해진 시각에 달리는 전차와 전신주를 갖춘 도시는 인민에게 변화를 실감하고 희망을 꿈꾸게 하는강력한 자극제였다. 이제 더는 거스를 수 없는 개혁의 요구와 운동은 이렇게 새로이 펼쳐진 인민의 공간, 도시에서 자발적 결사체와 시위와 집회를통해 활짝 피어났다. - P222

<협성회규칙>에 따르면 토론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회장이 토론 주제를 발표하면 토론이 시작된다. 찬성 2명, 반대 2명으로 편을 나누어,
찬성과 반대 측 대표가 각각 10분씩 연설한다. 그런 다음 찬성과 반대측에서 상대 주장을 5분 동안 반박한다. 청중 가운데 지명받은 사람 몇명이 3분씩 질문하거나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찬성과 반대 측 대표가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한다. 회장은 청중에게 토론회의 승패를 물어 결과를 발표한다. 승패가 갈린 후 초청 인사의 연설을 듣고 토론회를 마친다. 토론 주제는 2주 전에 결정하고 일주일 전에 회보에 실어 회원 모두가 사전에 알고 토론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 토론회 방식은, 서재필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토론 및 연설 조직인 레노니아클럽에 참가해서 익힌 영국 의회 토론 방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협성회 토론회는 모두 50회나 실시되었다. 토론 주제는 자주독립과•자주외교(7회, 14퍼센트), 자유권·평등권 · 참정권 등의 기본권 (14회, 28퍼센트), 국정 개혁과 문명 계몽(29회, 58퍼센트) 등이었다. - P247

1900년대에 들어와서야 개인은 인민, 국민, 동포 등 집단과 구별되는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나진과 김상연이 번역하고 해설한 《국가학》은 개인을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로 설명했다. "국가는 개인 혼자의 힘과 또사회적 통합력에 의지하여 경영하고 존립하는 하나의 커다란 공공체"
라고 했다. <대한매일신보》에도 ‘일개인‘ 혹은 ‘개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국가는 국가의 사업에 정진하고 개인은 개인의 사업에 정진하라." 지금은 당연한 주장 같지만, 당시만 해도 개인과 국가를 대등한 위상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새로운 변화였다. 개인의 활동과 영역이이미 하나의 권리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는 나라가 썩고 망해가는 이유로 개인주의의 유행을 들면서 개인주의를 경계했다. 개인주의가 애국심을 약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 P282

빈부귀천 따로 없이 누구든 스스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이를 ‘자주노동‘이라 한다. 자주노동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는곧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조선 정부는 그것을 ‘유랑‘이라 표현하며 위험시했지만 권력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었다. 19세기초가 되면 서울에도 상인, 수공업자, 일용노동자, 잡역부, 부랑자 등이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들은 도시의 문명화와 함께 새로운 직업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 P285

1804년에 나온 중국어판 <만국공법>(원저자 헨리 휘튼(Henry Wheaton), 한역자 윌리엄 마틴(William Martin))은 영어 ‘right‘를 ‘권리‘로 번역했다. 이책은 국제법상 국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런데 ‘권리‘라는 개념이 ‘개인의 권리‘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혼선이 생겨났다. 유학에서 권리는 자유가 그랬듯이 결코 긍정적인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이기적‘이라는 뜻을 내포했듯이, 권리는 ‘이기적인 이익 추구‘를 가리키는개념이었다. - P294

국가는왕과 정부와 인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생존과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재정과 물품을 생산하는 존재는 임금이나정부가 아니다.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인민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인민의 ‘권리‘로 국가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인민이 자신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국가가 안녕할 것이라는 점이 ‘민권론‘의 핵심 주장이었다. - P311

유길준은 중립화의 절차로 청이 주도하여 러시아,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조선과 아시아에 관심이 있는 나라들이 모여 조약을 맺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렇듯 유길준은 청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탈중국자주독립의 길을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인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힘이 부족하니 조선을 둘러싼 주변 국가와 서양 열강의 양해를 얻어 중립국으로 살아가자고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독립국으로서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 P335

‘정신상 국가‘를 이끄는 주체가 민족이었다. <독립신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민족이라는 개념은, 현존하는 국가의 구성원 혹은 국가가 없더라도 존재하는 국가의 원형적 집단을 의미했다. 나라를 잃으면서 후자. 즉 국가의 원형적 집단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초역사적인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1908년부터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라는 말이 관습적 표현이 되었다.
민족 개념을 발판으로 민족주의와 민족국가론이 등장했다. 민족주의는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려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저항 논리로 제시되었다. - P342

공화라는 개념은 1881년에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민종묵의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민종묵은 세계 각국의 정체로 국민공치, 입군(君)독재, 귀족정치와 함께 공화정치를 소개했다. 1883년에는 홍영식이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고종은 홍영식에게 미국의 정치제도를 물었다. 홍영식은 미국이 삼권분립을 실시하고 있으며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 P363

3·1운동에서 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적 논리는 민주주의였다.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것은 민족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민족의 독립이 곧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구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에 전 민족 구성원, 즉 인민들이동조했다는 것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이해와 동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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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해방의 논리는 명확했다. 평등권은 하늘이 준 권리이므로 누구에게도 사람을 사고팔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노비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노비를 풀어주어야 상전도 노비제라는 신분적 질곡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설득했다." 노비를 천부인권을 가진 인민으로 품어야 진정한 신분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례도 제시되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것은 노예 해방, 신분 해방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인도는 신분제가 잔존하여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독립협회는 노비제 잔재 청산 운동을 통해, 어떤 개인이든 똑같이 인민으로 대접받을 때 진정한 신분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논리를 신문이나 토론회 등을 통해 널리 확산시켜나갔다. - P30

교우촌에 모여 사는 천주교인에게 무엇보다 절박한 문제는 생계였다.
화전을 일구기도 했지만, 교우촌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것은 옹기를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종교 탄압을 피해 신앙생활을 계속하며 먹고사는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옹기 장사를 하면서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헤어진 가족과 연락하고 천주교 소식을 듣거나 전할 수있어 좋았다. 옹기 교우촌이 주로 지역 간의 경계 지점에 형성된 것은 도주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옹기업은 특별한 시설이나 도구, 많은 자본이 없이도 기술, 연료, 흙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옹기를 만들고 파는 데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데, 교우촌의 천주교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일을 했다.
옹기 교우촌은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치적삶의 실천장이었다. - P78

최시형이 1884년에 생활 규범으로 내놓은 <통유문(通文)>은 전통적인 일상 윤리에, <십무천(+天天)>은 동학의 평등적 사유에 기반하고있다.

<통유문>에서는 전통적 일상 윤리의 화법을 빌려 동학이 제시한 도덕을 요구하고 있고, <십무천>에서는 하느님, 즉 모든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 둘을 조화시킨 생활 도덕 운동을 전개한 동학에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는 것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는 전환의 시대에 동학이 인민에게 호소력을 가진 소통의 종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P89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전파하던 와인 1862년에 삼남지방에서 농민항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후 개항이 되었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일어났다. <한성순보》가 서양 민주주의를 소개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웠다. 이 모든 것을 인민은 감지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항쟁했으나, 이제껏 역사가들은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오로지 중세로부터의탈피, 즉 반봉건 농민항쟁 안에만 가두었다. 신분을 뛰어넘어 세금을 공평하게 부담하고 관리의 부정부패가 없는 정의로운 사회와 나라를 염원하고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나선 인민의 역량을 과소평가해온 것이다. - P111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는 <혁신정강>을 발표하면서 불공정한 조세제도의 개혁과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을 4개 조항에 걸쳐 제시했다.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전국의 간사한 관리를 없애고 어려운 인민을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한다.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 가장 심한 자를 처벌한다.
• 각도의 환곡을 영구히 면제한다.
• 모든 국가 재정을 호조가 관할하도록 하고 그 밖의 재무관청을 폐지한다.
급진개화파의 주장을 살피면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만약 성공했더라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 P141

동학은 과거 잘못된 세상을 고쳐 다시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나선 것이다.
인민에 해독을 끼치는 탐관오리를 베고 일반 인민이 평등하게 대우받도록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복을 채우고 음탕하고 삿된 일에 소비하는 국세와 공금을 거두어 의거에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고 여러 사람의 피땀을 긁어 제 몸을 살찌우는 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고 귀천이 있게하고 공적 토지를 사사로운 토지로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상원리에 위반이다. 이것을 고치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악한 정부를 고쳐 선한 - P155

정부를 만들고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 P156

지금까지는 개화파의 문명화 정책을 친일, 친청, 친미, 즉 외세 의존적이라는 민족주의적 시각에 초점을 맞추거나 반민중적이라고 평가하는의견이 많았다. 개화파는 1862년 농민항쟁을 목도하고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내놓은 개혁안인 <혁신정강>에 인민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했으며, 민씨 척족에 맞선 권력 내의 소수자, 즉 비주류였다. 10년의 핍박 끝에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며 갑오개혁을 실시했다. 권력의 바깥에서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만들어 인민에게다가갔다. 이처럼 개화파는 권력 안팎에서 ‘인민파‘로 활약했으나, 그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인색하기만 하다.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인민과 권력 내 ‘인민파‘, 즉 개화파는 독립협회가 생겨날 무렵부터 소통하고 연대하며 전환의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했으나, 정작 고종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부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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