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계년사 6
소명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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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계년사 6권은 1900년부터 1903년 시기를 다루고 있다.


내부적 개혁 동력은 진작에 꺾이고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고 권세를 탐할 생각만 하는 관리들.

백성의 생각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탁상 공론만 펼치는 관리와 고종 황제.

일본과 영국, 러시아 등 외국 세력의 이권이 야금야금 차지해가는 모습.

심지어 전 판서 민영주, 전 비서원 승 송정섭, 수륜과 장 강면희 등이 월미도를 일본인에게 돈을 받고 몰래 파는 일도 생겼다.

러시아 사람들이 용천 용암포에 와서 땅을 차지하고 물러나지 않자 일본과 영국도 이에 개입하기를 원해 이곳에 대한 개항을 정부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이때 조선은 러시아의 원조를 중요시 여겨 결국 용암포를 허가하고 만다. 이는 나중에 러일전쟁의 빌미가 된다는 안타까운 일.


그리고 대한계년사는 을미사변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다루는데 그 후폭풍이 이 시기에도 어김없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을미사변 때 서명한 대신들, 이재면과 김윤식,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처형하길 요청하지만 고종은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영효는 현 정부를 수구당이 집권한 부패한 정권으로 여겨 전복할 기회를 몇 차례나 노리기도 했다.


1902년은 가장 중요한 일영협약이 있던 해이기도 했다.

일본과 영국은 암암리에 협약을 맺으며 청은 영국이, 일본은 조선의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약속한다. 두 나라 간의 교전이 발생하면 서로를 돕는다는 약속도 함께 이루어진다.


특이했던 것은 엄귀비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1900년 8월 엄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순빈에 책봉되는데 정사에 자주 간여하며 주변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의 묘사가 나온다. 엄씨는 1902년 10월 황귀비로 높여 책봉이 된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 아들을 낳았다는 정도만 알 뿐 이렇게까지 좌지우지하는 인물인 줄 몰랐다고 해야할까. 

승정원 일기 등에도 찾아봤는데 엄귀비가 책봉될 때의 사실만 나오지 다른 이야기는 찾질 못했다. 관련하여 좀 더 정보를 찾아봐야할 것 같다.


다음 권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해이다. 더욱 암담한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 같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로부터 각 도 수령들은 오로지 탐욕스럽고 포악하게 백성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일삼았다. 또 나라의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고, 위에다 바치는 것은 그 날짜를 넘기곤 했다. - P37

러시아 공사가 하야시 공사를 향해 말하기를 ‘일본과 러시아가 모여 협상한 다음 한국을 분할합시다‘하니, 하야시 곤노스케가 말하기를, ‘이 문제는 우리 정부를 향해 할 일입니다‘ 하고 거절했다. 다시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가 이토 히로부미 후작에게 한국을 분할하는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역시 사절하고, 이타가키 다이조 백작을 시켜 ‘한국을 연합하여 보호한다는 주장‘을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에게 알리도록 했다고 한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 P39

당시 이용익이 내장원을 자기 사저에 두고 황실의 재정과 부세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맡아서 관리하며 가혹한 세금 징수를 일삼으니, 백성들은 매우 원망하며 괴로워했다. - P46

김영준은 재판장이 되어, 선량한 백성들을 상대로 없는 사실을 꾸며 함정에 빠뜨리고 재산을 억지로 빼앗았다. 김영준이 처형되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 P61

각 고을의 수령들이 나라에 바치는 돈을 교묘한 꾀로 농락하고 거저 떼먹는 폐단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여러 해 째 기한 안에 돈을 못 바치기도 했다. 이때에 이르러 탁지부에서 그 액수가 군수 2백여 명 모두를 장차 황제에게 보고해 면직시키고 붙잡아다가 납부토록 독촉하려 했다.
각 고을의 수령과 그 친족들은 앞다투어 벗어날 길을 꾀하려고, 혹은 돈을 더러는 수표를 가져와 바쳤다. - P63

박영효가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의 형편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정부를 전복하고 수구당을 제거해 우리 대한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활동자금 10만 원을 변통하여 얻은 뒤에야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중략)」 - P68

이근택은 오로지 인민을 모략해 죄에 빠뜨려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황제에게 사적으로 바치고 자기를 살찌우는 짓을 일삼았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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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31 2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올려주시는 대한 계년사
따라 읽는 재미 만큼 한국 현대서
울분과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엄귀비 등에 업혔던 고종!(아관파천)

결국 황귀비가 되는 군요

화가님 설 연휴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福마뉘 ^ㅅ^

거리의화가 2022-02-01 19:20   좋아요 2 | URL
읽다 보면 진짜 분노가 여러 번 치밀어올라요 헌데 지금 정치판도 다르지 않으니 화가 나고. 이 시기 백성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여러 모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니…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국이 언제 도약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시점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문제이다.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갑자기 시작되었고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되었다. 어떤 경제는 돌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경제는 몇 차례나 도움닫기 과정이 필요했다. - P1745

19세기 중반이 되자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업화는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상업적 교류와 국제협약(자유무역을 포함하여)은 전체 유럽시장의 통합을 촉진했다. 유럽대륙의 문화적 동질성이 과학기술의 교류를 더욱 쉽게 만들었다. - P1746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선도 업종의 전환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새로운 상황이 출현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국가에서 생산방식의 전반적인 기계화가 실현되어 공업화 이전의 소규모 공방‘ 이사라졌다. 자영 소기업주를 대체하여 고용된 직업적 경영자가 사회와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와 함께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유한책임회사가 흥기하기 시작했고 민간기업의 관리가 관료화되면서 화이트칼라‘라는 직업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생산이 집중되고 카르텔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경쟁 메커니즘이 제약을 받게되었고, 다국적 콘체른이 등장했으며, 상표가 마케팅의 주도적인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목적으로 각지의 협력자와 손잡고 만든 전지구적 판매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 P1748

아시아의 근대 초기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는 "왜 유럽인가?" 라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분석이 다 끝난 화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장점과 업적(로마법, 기독교, 인쇄술, 정확한 자연과학, 합리적인 경제관념, 경쟁적인 국제체제, ‘유럽인의 개인주의‘ 등)을 하나씩 열거한뒤 유럽 이외에는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두리뭉실한 결론을 내려서는 설득력이 없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아시아는 상호 접근이 늘어갈수록 그들 사이의 질적·양적 차이는 좁혀졌고 (19세기 중반에 출현한) 세계를 성공자와 실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은 더욱 지지를 받기 어려워졌다. - P1750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그 밖의 과학 분야도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갔다. - P1755

19세기의 공업문명은 화석연료에 의존했고 에너지의 보다 효율적인 기술적 · 기계적 전환이 꾸준히 일어났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증기기관의 사용은 그 자체의 나선형 발전과정을 열었다. - P1758

에너지가 풍부한 유럽은 비서방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 P1764

수출주도형 경제의 거시경제적 성공 여부는첫째, 생산이 노동집약적 가족기업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수출에서발생한 수익이 국내에 남아 사회 내부에 비교적 균등하게 배분되는지, 둘째, 수출상품 생산의 주력 형태가 다량의 저임금노동으로 생산하고 소유권이 외국기업의 수중에 있는 플랜테이션 또는 광산이어서 대부분의 수익이 국외로 흘러나가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유형의 구조가 두 번째 유형의 구조보다 국민경제와사회 전체의 발전에 유리했다. 두 번째 유형의 구조에서도 경제성장은 일어났지만 고립된 지역에 국한되어서 다른 경제 영역에 자극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 법칙의 중요한 예외는 남아프리카뿐이었다. - P1769

1912-20년, 중국 공업의 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88) 1920년 무렵, 중국은 취약하기는 하지만 발전 잠재력이 있는 공업화 경제의 기초를 갖추었다. 군벌의 혼전으로 인한 내정의 혼란,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할 강력한 정부의 부재,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은 중국 경제의 도약단계가 반세기나 늦춰진 주요 원인이었다.
1980년 이후 위대한 도약이 시작되었다. 그 전의 중국 공업화 역사의특징은 제국 말기의 정부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한 지체된 발전과정이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가 저지된 1920년대의 도약이었다. - P1773

‘낙후‘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을 사용할 때는적용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어떤 시점에서는, 특히 19세기말에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은 분명히 인도나 중국의 비교적 발달한 지역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경제적 성취를 판정하는 잣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소수의 대형 성장 지역이었다. 인도에서는 정부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민간 기업가의 결심의 결과로1910년 또는 1920년 무렵 몇몇 영역에서 대규모 공장생산이 등장했고, 이로부터 자기이익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공업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인도의 도시지역에서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공업화와 기타 발전과정이 나타났다.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더라면 인도 경제는 ‘좀더’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인가? - P1776

메이지정부는 지속적으로 국영경제를 건설할 생각이 없었다. 초기 단계의 자극을 제공한 후 정부는 점차로 대다수 공업 분야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정부의 예산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기업계의 선두주자들도 공업화를 전체 일본을 위한 애국사업으로 생각했다. 사업의 동기는 개인이익의 최대화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봉사였고 미국식의 놀라운 사치성 소비(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Veblen이 말한 과시성 소비)를 비난했다. 이런 국가관의 결과로 기업은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한 세계시장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사회로 전파했다. 관료와 자본가들은 다양한 공업구조를 구상하고 또 실현했다. 이로써 일본은 수입의존성을 최대한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은 국가의 안보를 고려한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메이지 과두체제는 물질적 발전의 약속과 실현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 — 어쨌든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질서를 파괴했다 을 개선하고 넓히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투자하려는 민간 기업인들도 충분했다. - P1780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공업화의빠른 속도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서술해서는 안 되며 미국 공업화의장기 연속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 밖에도 미국의 공업화는 주로 자본주의 시장역량의 자유로운 발전이란 법칙을 따랐지만 그것이 성공요인의 전부는 아니었다. 1862-1913년 사이의 (중간에 두 명의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를 제외한) 공화당 집권기에 연방정부는 공업화를 정책적 사업으로서 추진하면서 전국 시장의 통합, 보호관세, 금본위 화폐제도 등 중요한 제도를 실시했다.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공업화는 -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것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고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ㅡ 역사적으로 예외에속한다. 서방의 자유주의 공업화와 동방의 국가계획 공업화란 양대모형이 선명하게 대립한 상황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 P1781

1913년 무렵에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전 지구적 범위에서 활동하는 국가자본주의가 등장했다. 공업화,구체적으로 말해 현지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발전한 기계화된 생산은 모든 사례가 지역적 특성에 기반한 발전과정이었다. 반면에 19세기의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역적 기업 활동을 전 지구적 범위의활동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더 많은 가능성을 창조한 활동이자 경제제도였다. - P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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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주권의 이상은 일단 개념이 적립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정치체제가 어떻게든 지켜야 할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진정한 신생 사물이었으며, 정치적 기대의 혁명이자 정치적 공포의 혁명이었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투쟁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통치자의 ‘정당성‘과 그가 속한 신분집단의 오래된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더 이상 정치의 핵심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동선에 관한 의사결정에 누가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었다. - P1624

영국의 법치개념은 제국이란 통로를 통해 모든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비유럽인의 시각에서는 영국의 법치제도는 식민주의의 색채가 강하기는 했지만 현지인 통치자가 통치하는 이웃나라의 법치 상황보다 못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유권자의 범위는 단계적으로 확대되어왔다. 유권자범위의 확대는 부분적으로는 혁명투쟁의 전리품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위로부터의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 P1635

‘잭슨 민주주의‘와 함께 미국은 1776년 이후로 다시 한번 세계 역사상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들어섰다.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전에 유럽 어디에서도 이처럼 경쟁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일만큼 자유로운 논조가 가득한 ‘대중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 여러 차례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보편적 남성 투표권이 실현된 후에도각 주의 지사가 지니고 있던 권력이 아직 약화되지 않은 프랑스에도이런 형식의 민주주의는 없었다. - P1639

정치운동과 시민조직은 신분에 대한 고려에 얽매이지 않는 내부기능을 통해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흔히 사람들이 평등하게 모이는 소집단, 단체, 조직을 통해 표출되며 상호 제약 없는 소통을 통해 실현된다. 더 큰 규모의, 충돌이 빈번한 정치무대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남김없이 표현된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그것과 연관된 풀뿌리 운동의 핵심이다. 예컨대, 많은 증거가 증명하고 있듯이초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연합된 운동이었다. - P1642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후로 민간경제 부분에서 점차로 국가관료제도를 대규모로 복제하기 시작했다. 관료제도는 프로이센과나폴레옹시대 프랑스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유럽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유럽 이외에 중국, 오스만제국, 일본에도 관료제도의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들의 관료제도는 ‘전근대적‘ 이라거나 ‘세습적‘ 이었다고 서둘러 평가절하해서도 안 된다.
19세기에 이들의 전통은 서방의 영향과 충돌하면서 다양한 결과를낳았다. - P1649

영국의 (인도) 식민지 관료제도는 국가기없는 정치지평에서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르지 않았다. 무굴제국과그것을 계승한 역대 정부의 핵심은 중국과 베트남 같은 관료조직이아니었다. 그들은 문관의 다양한 위계와 성숙한 문서제도를 갖추고있었지만 엄격하고 세밀한 공무원 관리체계를 갖지 못했다. 인도문관제도(ICS)는 그러므로 당시에 존재하던 기반 위에서 제한적으로수립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문관제도는 동인도회사의 관리체계를직접 이어받았다. 동인도회사는 18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구조 가운데 하나였지만 여러 면에서 현대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직위의 분배는 객관적인 업적평가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여전히 후견제도(Patronage)를 지키고 있었다. - P1651

중국(또한 베트남)의 관료제도는 완전히 ‘전현대적‘ 이지는 않았다. 중국의 관료제도는 두 가지 측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하나의 측면은 가족관계 또는 후견관계를 초월한 비인격적 원칙을 지킴으로써 고도의능력위주 인재선발방식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는 더 나아가 이런 원칙과 세습귀족의 지속적인 고위 행정직 점거 현상이 상호 용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P1655

오스만제국에서 (유럽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 동안 통용되었던 후견관습이 하루아침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따르는 인사정책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두 가지 조류와 관념은 충돌하면서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었다. 1839년 이후의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은 새로운 관료계층을 제국의 핵심적인 엘리트계층으로 만들어 놓았다.
1890년, 이 직업 공무원 집단의 숫자는 최소 3만 5,000명이었다. 백
년 전에 수천 명의 필사원은 모두 수도 이스탄불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1890년이 되자 이스탄불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소수의 신식 고급관원뿐이었다. 오스만 관료체제의 지방화는 19세기 후반에야 중국이 수백 년 전에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 P1656

일본은 독특한 관료제도의 현대적 형식을 찾아냈다. 그러나그것은 절반의 현대성이었다. 메이지시대의 정치질서에서 개인의자유와 인민주권은 낮선 사상이었다. 일본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계약관계라는 유럽적 관념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군주가부장제는 합리적 관료체제의 시대에도 지속될 수 있었다. 일본의1889년 헌법은 천황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이며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 통치권을 독점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유럽 모형을 이탈했다. - P1658

19세기와 20세기에 각양각색의 경찰제도가 전파되면서 세계적인 범위에서 경찰력이 확대되었다. 경찰제도는 종주국의 수도에서 식민지로, 때로는 샴과 일본 같은 국가의 도입에 의해, 나아가 각 제국 내부에서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 P1672

역설적이게도 (파가론 연구에서 이론화가 부족했던) 권력의 집적이 다른 영역 —— 민족주의 강령 —— 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아무리 반동적인 군주라도 이제는 ‘짐이 곧 국가‘라고 말 할 수는 없었지만 국가가 곧 민족이란 관념은 널리 퍼졌다. 국가에 유익한 것이라면 민족에게도 유용했다. 이렇게 국가권력 합법성의 기반 개념이 바뀌었다. 민족국가는자기 고유의 존재이유를 갖게 되었다. 그 존재이유는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왕조의 합법성이나 정치적 실체로서의 유기적 조화가 아니라 ‘민족이익‘ 이었다. 누가 민족의 이익을 정의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 P1691

달리 말하자면 국가의 강성은 결코 인류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재배치의 불균형한 결과였다. 다른 국가 보다 약하거나 낙후한국가는 쉽게 공격을 받았다. 약한 국가는 잠식당하거나 정복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근대 초기 유럽인의 상상 속에서 ‘동방‘국가는 모두 백성을 지푸라기로 아는 ‘폭정‘의 국가였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달랐다. 방대한 관료기구를 가진 중국도 그렇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19세기에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유럽 민족국가가 강력한 관료기구와중앙집권제를 건설한 방식을 빌려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 P1692

제도 설계의 기본 의도는 정치 메커니즘의 단순화였다. 영국의 계몽사상가이자 공리주의 (功利主義) 학설의 창시자 제레미 벤덤(JeremyBentham)은 민주주의 이념에 관해 말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책임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간권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가장 명쾌하면서 모든 민주정치의 강령이되는 기본 사상이다. 인민과 통치자는 가능한 한 중간 고리를 줄이고 직접 대면해야 한다. 그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의제도라야 한다. 대의제도는 선거와 대표 파견의 과정일 수도 있고, ‘신비한 연합‘ (unio mystica) — 군주 또는 독재자가 국가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때 ‘인민‘이 박수를 치든지아니면 ‘사실상의‘ 의사표시를 통해 지지를 보내는 방식을 통해구현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민족국가의 정치제도는 민족적 동질성과 헌법구조의 단순성을 기반으로 한다. - P1694

최소한의 기대치는 있었다. 모범시민은 개인이익의 추구와 민족 전체를 위한 희생 사이에서 훌륭한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많은 국가의 공적영역에서 사람들이 생각한 문제는 시대와 함께 나아가는 문제였다. - P1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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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타이가의 시간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다 - 모스크바에서 바이칼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여행자 K 지음 / 시대의창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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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중 여행에세이를 좋아한다.

겁이 많고 소심한 내가 대리만족할 수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

헌데 생각보다 책에 대한 평이 너무 없어 놀랐다.

그리고 그마저도 평이 별로다.

음. 너무 기대가 커서였을까.


하지만 나는 읽어보니 이 분의 성정이 느껴졌고 잘 읽혔다.

내 스타일이었나보다.

두고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여행기는 어차피 그 당시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이고

언제나 최신으로 갈아치워지므로 별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내 꿈이었다.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가기가 그렇지만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더라도 옆지기를 설득하는 일이 우선일 것 같다.

몇 차례나 꼬드겨봤지만 꿈쩍을 하지 않았다.

혼자 간다고 하니 위험해서 안된다고 하고.(어쩌라는 거냐)


참! 여행기 중 러시아 혁명기를 거쳐간 조선인들의 이름이 종종 나오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문장이 좀 뻔하다는 것~?^^;

그래도 여행의 설레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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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30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베리아횡단열차 타보고싶어요. 부산에서 북한 찍고 시베리아 넘어 유럽까지 가는 날이 오길 ㅎㅎ 저희 옆지기도 집나가면 고생이란 주의랍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31 21:12   좋아요 1 | URL
너무 타보고 싶습니다ㅜㅜ 언제나 타볼지. 죽기 전에 북한은 가볼 수 있겠죠.
옆지기가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큰일이에요. 점점 더 안 움직이려고 하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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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내 취향의 원두다. 바디감이 무겁지 않으면서 개운하고 깔끔하다. 종종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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