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괴물.

저자인 크리스테바는 페미니즘 관점으로 대중문화를 분석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이다.

공포영화 리스트 중 아는 것이라곤 아주 어렸을 적 본 에일리언 빼곤 없다.
잔혹영화를 싫어하며 공포영화도 거의 보질 않는다.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리스트에 있는 영화 중 하나라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1. 아브젝션이란? 경계와 위치, 규칙을 존중하지 않으며 정체성과 체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 한마디로 모호함이이다.

2. 공포영화에서 묘사하는 아브젝션
- 공포영화를 관람하면서 토하거나 배설하고자 하는 욕망
- 괴물은 상징계적 질서와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
- 한 개인이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는 최초의 시도


그런데… 비체라는 개념이 와닿지가 않는다.
읽다 보면 나아지려나.

모든 괴물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들에 직접적으로 말을 겁니다. 여성괴물은 의심의여지없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성들의 그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자의 재생산성, 월경혈, 그녀들의 숨겨진
질과 자궁,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P10

괴물은 혐오감을 줌과 동시에 매력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터부시되는 것들과 대면할 수 있도록 해주기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괴물의 본질은, 터부의 내용이 상대적이고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에 문화마다 달라집니다. 괴물들은 종종 사회가 차이를 부정하고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부과한 터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제공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킹콩>은 소위 문명화된 사회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을 폭로합니다. - P12

나는 ‘여성괴물monstrous-feminine‘이라는 표현을 남자괴물male monste의 단순한 반대말인 ‘여자괴물remale monsite의 의미로 사용해 왔다. 여성괴물이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 방식은 남성괴물이 관객을 공포에 떨게하는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이 차이점을 밝히기 위해 새로운 표현이필요하다. 처녀에서 창녀에 이르기까지, 여성성에 대한 다른 모든 정형과 마찬가지로 여성괴물 역시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바탕으로 정의되었다. 여성괴물이라는 표현은 그녀의 괴물성 형성에 있어 젠더의 역할이핵심적이었음을 강조한다. - P24

남성괴물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서 여성괴물성을 정의할 수 있게 만드는 여성 자체의 그 무엇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윌리암스의 논의를 제외하고 위에서 논의된 거의 대부분의 논문이여성을 공포영화의 희생자로 다루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여성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공포를 유발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 즉이미 여성을 희생자로 구성해 놓은 이론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여성은 원래부터 희생자라고 말하는 본질주의적 관점을대변하고 또 지지하는 가부장적 정의를 강화할 뿐이다. 나는 공포영화에서의 여성 재현을 분석하고 여성이 다수의 공포영화에서 괴물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여성괴물이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형태로 재현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페미니스트적‘이라거나 해방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괴물은 여자의 욕망이나 여성 주체성에 대해서이야기하기 보다는 남성의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현은 확실히 남성 관객은 대체로 적극적이고 가학적인 위치에 있고 여성 관객은 언제나 수동적이고 피학적인 위치에 있다는 관점에 도전한다. 이런 특징에 대한 분석은 또한 프로이트 이론의 중심 내용을 재독해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 P31

비체의 장소는 ‘의미가 붕괴되는 장소’이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 비체는 삶을 위협한다. 비체는 살아 있는 주체가 존재하는 장소로부터 급박하게 추방되어야만 하며 (크리스테바, 1982, 2) 육체로부터 내쫓겨서 자기the self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키는상상계적 경계 반대편에 놓여야만 한다. 주체는 비체를 추방해야 하지만, 동시에 비체는 묵인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삶을 위협하는 것이곧 삶을 규정함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추방의 행위는 주체가가
상징계 안에서 적절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필요하다. - P35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모든 불결제의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오염시키는 것들은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외부로부터 주체성을 위협하는 배설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부터 위협하는 월경이다. 오염시키는 것의 두 범주 모두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월경혈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분명하다. 어머니와 배설과의 관계는 배변 훈련에서 어머니가 수행하는 역할로부터 비롯된다. 이 지점에서 크리스테바는 주체가 최초로 대면하는 ‘권위‘는 아이가 어머니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몸의 형태, 깨끗함과 더러움, 몸의 적절한 부분과 적절하지않은 부분 등 자신의 몸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에서 대면하게 되는 어머니의 권위라고 주장한다. 내가 공포영화에서 여성괴물에 대해 분석할때 거세를 이야기하면서 상징계까지 확장해 들어갈 것이 바로 이 ‘어머니의 권위‘라는 개념이다. - P41

비체를 상징계적 구조의 토대로 전락시킴으로써정화하는 것이 대중 공포영화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적 기획이다. 공포영화는 결과적으로 비체를 제거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다시그리기 위해 비체(시체, 신체적 배설물, 여성괴물)와 대면하도록 한다.
현대의 불결제의로서, 공포영화는 상징계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모든것,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어머니의 세계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상징계적 질서로부터 분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공포는 어머니 육체의 재현과 그와의 화해를 포함한다. - P44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션에대한 이론에서 우리는 공포영화 속 여성괴물 재현을 여성의 재생산성및 어머니로서의 역할과의 관계 안에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젝션의 본질 자체는 매우 모호하다. 그것은혐오스러움과 동시에 매혹적이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우주를 상징계적질서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혹은 결국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괴물과 같은 어머니의 본질에 대해 깊이연구하다보면 그 어머니 역시 거세와 더불어 아이가 상징계적 질서로편입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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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자 시사IN 저널북 (SJB) 3
국승민 외 지음 / 시사IN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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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이 코앞이다. 

3월 4일부터 양일간 이루어진 사전 투표율이 총 36.93%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제 3일 앞으로 다가온 본선 투표를 합으로 대통령이 결정된다.


대선 전 20대 여성들의 생각을 면밀히 뜯어보자 생각했다.

이 책은 시사인에서 2021년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남녀 2천명을 대상(20대 600명, 30대 600명, 40대 이상 800명)으로 웹조사를 한 통계를 바탕으로 분석해 내놓은 책이다. 20대 여성을 알기 위해 세대별 조사를 한 것이 눈에 띄었다. 


책을 읽기 전 기대한 바는 20대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이 1차적으로 궁금했고 20대 남성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같은 20대 여성이라도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추가적으로 이들이 이번 대선에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추측해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책을 보면 느끼겠지만 화두를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았다.


왜 페미니즘인가?

20대 여성 10명 중 4명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전체 응답자의 2배가 넘었다. 이것만 봐도 왜 페미니즘을 화두로 선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페미니즘의 정의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모두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만 페미니즘에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20대 여성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이라는 질문이 중요한 이유다. '페미니즘은 남녀의 동등한 지위와 기회 부여를 이루려는 운동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로 꼽히기에 시사인은 이 질문을 선택했고 20대 여성의 66.9%가 동의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감정 온도(100이 긍정 0이 부정)나 타인이 페미니스트였을 때의 관계성 면에서 20대 여성은 53.3도로 우호적이었다. 반면 남성은 66.6%가 페미니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감정 온도도 14.35도로 무척 낮았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20대 여성에 대한 생각은 짐작한 대로였다. 20대 여성은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공격받고 있고 소수의 극단적인 주장으로 과대대표되고 있다고 인식했다. 20대 여성의 페미니즘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또래 집단과의 경험으로 비슷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고 이것이 연대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대 여성은 사회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고 느끼는데 이는 성별 임금 격차가 존재하며 능력에는 차이가 없거나 높은데도 취업의 문이 남성에게 더 유리하다 여기고 있다. 게다가 결혼 출산 등으로 경력 단절이 이루어진다는 인식 속에 결혼과 출산에 대한 20대 여성의 비율은 전 연령 통틀어 유일하게 한 자리수였다.


20대 여성이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은 무엇일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와 다양성(다문화주의) 등과 관련이 있었다. 다른 선택지는 '법과 사회질서 확립 우선'(권위주의), '정부 개입의 최소화 우선'(자유시장주의), '경제적 재분배 우선'(사회민주주의)이 있었다. 20대 남성은 지지 세력 1순위가 법과 사회질서 확립 우선이었다. 

성장보다는 복지를, 경제성장보다는 환경보호를 선택했다.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 허용에 대한 찬성 비율이 높았다. 

20대 여성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참여에 높은 열의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정치권에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땅한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할 곳이 없다는 이야기다.

20대 여성의 표심이 20대 대선에서 어디로 움직일지 이 부동층의 표심이 대선의 키가 될 수 있을까.


20대는 현재 사회적 갈등 중 어떤 것을 가장 심각하다고 느낄까? 예상하겠지만 젠더 갈등이다. 이는 20대 남성, 여성 모두 공통적이었다.(85.6%)

20대는 전통적 갈등인 진보/보수 갈등, 빈부 갈등, 세대 갈등보다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여성/남성 혐오 표현을 쓰는 친구와의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 전체 조사 대상의 51.3%는 변한 적 없다 답했으나 20대는 44.5%가 변했다고 답했다. 

성범죄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여성들은 이에 대해 세대 불문하고 모두 공포를 가지고 있다 답했다.

하지만 20대 남성은 여자들이 실제보다 성범죄 위험을 과장한다 여겼다.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20대 여성은 문재인 정부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20대 대선에 이재명을 지지하는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통계 결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본다면 먼저 연령별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크게 나타난 것이다.

40대 이상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 차가 뚜렷하지 않았는데 2019년 극단적 안티페미니즘 성향의 집단이 주로 20대에 남성에 나타났던 것이 비해 20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윗세대에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해석은 세심할 필요가 있다)

또 젠더 갈등의 시야를 바깥으로 돌려 서유럽이나 미국의 인종 갈등에 대비한 것은 다소 무리는 있더라도 신선한 시각이었다고 생각한다. 서유럽이나 미국은 기존의 주류 집단이 정체되고 마이너리티화된다 느끼면서 인종 간 갈등이 격화되었고 백인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트럼프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체성 정치로 젠더를 이슈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결론이다. 다른 우선순위에 밀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사인이 정체성 정치를 젠더와 매치시킨 것은 어떤 집단이 힘을 잃는 동안 새로운 집단이 대두하면 기존 집단은 피해의식을 느끼기 쉽고 대표적으로 무임승차 등의 이슈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20대 여자 현상 표본 조사 연구를 위해 238개 항목이 최종 선택됐다. 300개가 훨씬 넘는 질문 중 많은 것들이 탈락되었는데 이 중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서 공표 불가 판정을 하여 다음 항목은 탈락했다고 한다.(세대별 가중치 배율 문제로)

- 대통령 선거 투표 의향

- 2022년 20대 대통령 선거 지지

- 차기 대통령 적합도

- 정당별 호감도

- 정당별 호감도 변화

- 대통령 및 주요 대권 주자 호감도

- 더불어민주당이 내부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 보호 노력 시 지지 여부 변동

- 국민의힘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유지 시 지지 여부 변동

- 페미니즘 행보 강화 시 지지 변동 여부

- 현재 지지 정당


이번 대선과 연결된 핵심 질문들이 많아 만약 실렸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 너무 아쉽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성범죄 지지 여부 변동, 국민의 힘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 여부 변동 질문은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이라 더욱 궁금했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238개 질문을 통해 페미니즘이 젠더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분배 노동 등 많은 영역에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지지 정당에도 영향을 미치는 변수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20대 여자 내부만이 아니라 20대 여자를 둘러싼 외부 변수들까지 다루어주어 더욱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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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구로카와 유지 지음, 안선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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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알고 있던가? 책을 읽기 전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무지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강대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역사로 인식했을 소지가 다분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란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다.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 글로벌 이슈로 미-러시아 간, 러시아-NATO 간 첨예한 대립을 보면서 설마 전쟁이 벌어지기야 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설마가 현실이 될 줄이야.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떠난 피난민들이 100만에 이른다고 한다.
미-러시아 간 협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진전된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민간인에 대한 폭격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고 러시아가 자포리아 원전을 장악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더 이상의 피해가 있어서는 안될 터인데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둘러싼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역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민족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영토에 존재했던 다양한 민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것이 장점이나 단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지역이라도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발음이 엄연히 구분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짐작했던 것처럼 내 경우도 키예프나 드네프르강이 익숙하지 키이우, 드니프로강은 익숙하지 않게 느꼈다. 그만큼 많은 단어들이 러시아어로 관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B.C 1500~ B.C 700년경 흑해 북쪽 해안의 땅인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는 키메리아인이 거주했다.
그들은 유목생활을 했고 능란한 승마술로 유명했으며 철기시대를 이룩한 민족이었다.
B.C 750 ~ B.C 700년경이 되면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쪽 해안으로 들어와 키메리아인을 쫒아내고 그 땅의 주인이 된다.
스키타이 민족의 특징을 잘 묘사한 인물은 헤로도토스다. 그의 저서인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세 가지 설을 제시하는데 그 중 스키타이인이 아시아 최초의 유목민이었으며, 아랄해 주변에 살던 마사게타이인에게 쫓겨나 키메리아인이 살던 현재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설을 가장 신뢰했다.
B.C 4세기 이란계 민족인 사르마타이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스키타이의 동쪽 땅으로 이동해온 뒤 B.C 2세기 스키타이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낸다.
사르마타이인은 A.D 3세기까지 번성했고 스키타이인과 신앙 및 풍속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A.D 3세기 중반 ~ A.D 4세기 말 게르만계 고트족, A.D 4세기 후반 ~ A.D 6세기 중엽 훈족, A.D 6세기 중엽 아바르족, A.D 6세기 말 ~ A.D 7세기 중엽 불가르족 등의 민족이 잇달아 흑해 북쪽 해안의 땅을 차지했다.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대에 케르소네소스(현재의 세바스토폴 근교)를 중심으로 비잔티움 문화가 번성하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다음으로 키예프 공국에 대한 이야기다. 키예프 공국은 전성기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했을 만큼 대국이었다.
키예프 공국의 군주는 '크냐지'라고 불렸는데 이는 영어의 king 에 해당되는 단어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크냐지가 다스리는 국가로 한 단계 낮춰 공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키예프 루스'가 아닌 '루스'로만 불렸지만 러시아가 루스에서 파생되어 국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키예프를 수도로 삼는 루스'라는 뜻의 키예프 루스가 관례가 되었다.
이전까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는 러시아사 하에서 다루어졌다. 러시아의 논리는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영토로 분할이 되었고 나라 자체가 소멸했으므로 계승자가 없지만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졌기에 러시아가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 지배하의 비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고 중앙집권제인 러시아 소련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 체제는 전혀 달라서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슬라브인은 6세기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에서 시작하여 7세기 초부터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 동슬라브인이 키예프 루스를 구성한 사람들이며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라고 볼 수 있다.
8~11세기 스칸디나비아에서 인구 폭발이 일어나며 바이킹들이 바다를 건너 확산되기 시작했다.
동슬라브인은 바이킹을 '바랴그인'이라고 불렀다. 바랴그인은 계속 이동하여 드네프르강을 따라 흑해로 나와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바닷길을 확립했다.
동슬라브인 사회의 문헌상 최초 기록은 12세기 초 편찬된 『원초 연대기』의 키예프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전설이다.
동슬라브인은 바랴그인에게 공물을 바치다 바랴그인을 내쫓고 자치를 시작했지만 내분이 일어나자 과거에 쫓아낸 루스(그 땅의 바랴그인이 자칭하는 말)에게 사신을 보내 땅을 통치해달라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루스 때문에 '루스'라는 나라 이름이 탄생했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키예프 공이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고 형제 상속, 부자 상속이 동시에 이루어져 대가 바뀔 때마다 싸움이 일어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런 힘겨움을 뚫고 볼로디미르 성공과 야로슬라프 현공 시대에는 황금기였다.
1125년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사후 1240년에 몽골이 키예프에 들어오기까지 1세기 동안 키예프 루스 공국의 힘은 서서히 약화된다.
할리치나-볼린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의 할리치나 공국과 볼린 공국이 병합하여 형성된 공국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한다.
1340년대에 볼린은 리투아니아에, 할리치나는 폴란드에 각각 병합된다.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의 멸망 후 17세기 중반이 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이 없었다. 대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각각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이 시기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언어도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가 형성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의 볼린, 체르니히우, 키이우, 드니프르 등의 넓은 영역을 지배 하에 두었다. 1362년에는 강력함을 자랑하던 킵차크한국과 싸워 승리하기도 했다. 이후 과거의 키예프 루스 공국이 가진 절반 이상의 땅을 지배하게 된다.
폴란드는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에 패배하고 남쪽의 보헤미아, 모라비아에도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유일한 출구는 동방이었다. 14세기 중엽이 되면 할리치나 지방은 폴란드 지배 하에 놓인다.
리투아니아 전성기가 지나고 점차 폴란드 힘이 강성해지자 1569년 루블린 연합이 성립되면서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의 수중에 들어간다.
폴란드는 기존 키예프 루스 공화국이 기독교였던 것과 달리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고 문화적으로도 서로 달라 이질감이 컸다. 이 시기가 되면 귀족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으며 농민이 농노화가 된다.
고대부터 우크라이나 땅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 게다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살기 좋은 환경이 형성되면서 유대인 인구가 급증했다.
그리고 이 시기 정교가 분열되고 키예프 루스의 정교와 달리 '우니아트'라는 그리스 정교와 가톨릭 절충안이 등장했다. 우니아트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성직자 결혼도 인정했지만 로마 대주교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러시아사를 바탕으로 한 학설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의 의미는 '변경지대'(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봤을 때 변경)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땅' 또는 '나라'를 의미한다 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어간에 해당하는 'krai'는 '가장자리' '지방' '나라'라는 의미가 있고 '우크라이나'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12~13세기다. 『키예프 연대기』는 1187년 볼로디미르 공이 죽었을 때 '우크라이나는 그를 위해 슬퍼 탄식했다'고 기술했다. 『할리치나-볼린 연대기』는 1213년 '브레스트, 우프레브스크 등 모든 우크라이나를 재통일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크라이나'는 '변경지대'보다는 '땅'이나 '나라'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15세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자치 무장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들이 '코사크'이다.
우크라이나의 슬라브인에게 사용됐던 코사크라는 단어가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1492년이다. 키예프와 체르카시 사람들이 타타르 배를 약탈하여 크림의 칸이 리투아니아 대공에게 항의하자 대공이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조사하겠다고 약속한 내용이 그것이다. 1493년 크림의 칸은 드네프르강 하구에 있는 크림한국의 오차키프 요새를 파괴한 체르카시의 대관과 부하를 '코사크'라고 불렀다.
좀더 큰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은 '시치'라 불리는 요새를 짓고 1530년이 되면 드네프르강 하류의 섬에 주요 시치가 만들어졌다. 이 중 자포로제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중심지가 되었다.(러시아 변경의 돈 코사크)
코사크 수가 증가하면서 군사력이 커지자 이들은 원정에 나서 여러 도시들을 습격했다. 코사크는 16세기 말 이후 폴란드 왕에게 복종하여 각지에 싸우며 정치적 지위를 높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에게 받는 대우와 영주에 대한 불만으로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회의를 통해 선출된 헤트만은 군사 독점권을 소유했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따랐다.(전투에서 패배하면 사형되기도 했음) 사하이다치니는 최초의 헤트만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교육, 정교의 진흥에 힘썼다.
우크라이나사 최고 영웅으로 손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조직가이자 군사령관, 외교관으로서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국가를 완성했다. 헤트만 국가를 지키는데 자력만으로는 안되므로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폴란드와 대항하여 타타르-오스만튀르크-크림한국-몰다비아-트란실바니아 등 주변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대부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모스크바와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으며 평가가 엇갈리게 된다. 그는 10년 간 활약하였으나 우크라이나의 국민 시인인 타라스 셰브첸코는 흐멜니츠키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팔았다고 비난했지만 역사상 헤트만 국가를 형성하여 후세 우크라이나 재건의 상징이 된 인물이라는 이중 평가를 내렸다. 우크라이나 독립 후 그의 초상은 5흐리브냐 지폐에 새겨졌다.
이반 마제파는 흐멜니츠키에 이은 강력한 지도자로 폴란드, 우안 우크라이나, 좌안 우크라이나, 모스크바 등 수장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할 정도로 정치적 생존 기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헤트만에 올라 20여년간 자리를 유지했다. 마제파라는 인물의 생애 덕분인지 그에게서 수많은 작품이 나왔다. 바이런, 푸시킨, 빅토르 위고가 서정시를 썼고, 차이코프스키가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프란츠 리스트도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를 작곡했다.
최후의 헤트만인 키릴로 로주모프스키는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퇴임당하고 대신 러시아의 백작이 되었으며 광대한 영지를 받는다. 아들 안드레이 라주모프스키는 러시아의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하며 폴란드 분할 협상에 관여했고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에서 러시아 전권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베토벤을 후원하기도 했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곡」과 「운명」 교향곡, 「전원」 교향곡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1783년이 되면 코사크 연대가 러시아군으로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한다. 80년간 유지해온 헤트만 국가는 소멸한다.
1772년, 1793년, 179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으로 완전히 분할된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정치상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폴란드 분할 후 1차 세계대전까지 약 120년 동안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80퍼센트는 러시아에 의해서, 나머지 20퍼센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서 지배된다.
러시아 제국은 강력한 전제군주제이자 중앙집권제였고 오스트리아는 상대적으로 민족동화정책은 약했기에 내셔널리즘의 거점이 되었다. 크림전쟁(1853~1856)은 동유럽과 지중해에 진출하려던 러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튀르크를 돕는 형태로 저지하려 하면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톨스토이가 참전한 전쟁이었으며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전쟁이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의 농노제는 폐지된다. 민족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가 우크라이나어로 코브자르를 쓰면서 내셔널리즘을 고양하고 정당이 성립하는 등의 활동이 일어났지만 1863년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벌어지면서 이 기세는 수그러든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면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각종 결사 단체와 정당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은 새 단계에 접어든다.
오스트리아에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우니아트인이었다. 프랑스 2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민주화와 민족 독립 시위가 증가하면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해임되고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최초의 우크라이나어 신문이 발행되었으며 우크라이나 독립과 통일을 표방하는 급진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리비우 대학에는 우크라이나어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이 붕괴되고 소련이 탄생했다. 구러시아 제국 하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발트 북유럽 국가들이 독립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하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어떤 국가보다 활발한 독립운동으로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건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 소련 또는 폴란드 지배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국회 중심의 임시 정부와 노동자 병사 중심의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 상태가 되었다.
3월에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회의, 평의회를 뜻하는 우크라이나어)가 결성되어 임시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으나 임정은 이를 거부하였다. 10월 혁명이 발발했고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정을 제압하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12월 소비에트 정부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승인을 통고했으나 우크라이나 정부가 거부하여 볼셰비키가 힘으로 우크라이나 점령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간 전쟁이 벌어진다.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가 붕괴하면서 독립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이후 11월 13일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수립 선언을 했지만 이는 8개월 간의 단기간의 정부였다. 서우크라이나는 대외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폴란드와의 싸움을 지속했으나 역부족이었고 1919년 7월 동우크라이나로 후퇴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이 합병하여 1919년 1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1919년 10월 티푸스 발생으로 우크라이나군의 70%가 괴멸되고 말았다. 프랑스는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하고 러시아 부활을 위해 러시아에 무력 간섭을 했으나 1919년 4월 볼셰비키가 들어오면서 소비에트와 폴란드 간 전쟁이 발발하였고 1920년 6월 페틀류라를 폴란드가 포기면서 리가 조약이 체결된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렸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소련,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통치 결정이 이루어졌다.
1922년 12월에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으나 공산당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927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연이은 5개년 계획과 농업 집단화로 농민들을 통제하면서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며 노동력이 부족되면서 대기근이 발생되었다.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 땅에서 스탈린 땅의 대대적 숙청이 감행되면서 30년대 중반이 되면 전체 37%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이 숙청되고 30년대 말이 되면 공화국 자치는 완전히 사멸되고 전체화가 이루어진다.
서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우크라이나 자치 조직을 결성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에서 85~90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얄타회담으로 폴란드 국경이 획정되었고 국제 연합 결성 여부와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되었다. 스탈린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가져가는 것을 루스벨트가 승인하였고 종전 후 200 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귀국하였다. 다만 정치적 이유로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처형 당했고 35만 명이 중앙아시아, 극동 등지로 끌려갔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실행한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부메랑이 되어 소련은 해체되었고 우크라이나도 이 결과로 독립하게 되었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때론 무임승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과연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거저 얻어진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의 독립은 몇 세기에 걸쳐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기에 얼마만큼의 시련과 고난이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도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기간 타국에 의한 지배를 받은 역사를 지녔지 않았나. 때문에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책이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온전히 담아냈을까 하면 솔직히 평가가 어렵다.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러시아사 하에서 다루어져 선입견 하에 쓰여진 역사였기에 단독의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보류할 수 밖에 없다.
향후 더 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평가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역시 우크라이나의 평화에 대한 것이었다.
더는 피를 흘리는 이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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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06 21: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보니 우크라이나 역사가 참 험난했군요~ 한 나라로 다시 일어선게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전쟁이라니 ㅜㅜ 더이상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네요~!!

거리의화가 2022-03-07 08:24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이렇게 우크라이나 역사를 알게 된 것이 뭔가 부끄럽게 느껴지더라구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외면하고 살았을지 몰랐을 것 같아서… 더불어 보이는 것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도 했습니다. 전쟁이 하루 빨리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네요ㅜㅠ

책읽는나무 2022-03-07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덕분에 저도 우크라이나 역사를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네요.ㅜㅜ
정말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다시 봐질정도로 힘든 역사를 안고 살아왔었군요.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생하는 모습이 우리네 역사 같아 보이기도 하구요.
스키타이인 들어본 듯도 하구요. 아시아 최초 유목민이었다니?.....
암튼 전쟁이 빨리 끝나서 국민들이 가족들을 빨리 만났음 싶네요. 큰 피해가 없어야 할텐데요~

거리의화가 2022-03-07 17:02   좋아요 2 | URL
나무님 저도 마찬가지 입장이에요.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주목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 땅의 환경이 곡창지대인데다 유럽의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에 노른자 땅이였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군침을 안 흘릴 수 없었겠죠. 오늘 기사에서도 푸틴이 민간인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임시 협정을 어기고 폭격을 해서 사망하고 다쳤다는 걸 봤어요.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도 마음이 아픕니다. 국민들은 무슨 죄인지... 모쪼록 휴전이 빨리 되어야할텐데요.

mini74 2022-03-07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크라이나 ㅠㅠ 우리처럼 이들도 한이 많은 민족이군요. 스탈린도 푸틴도 천하의 삐삐삐 입니다. ㅠㅠ 전쟁이 끝나야 할텐데. 다치고 피난가는 아이들 사진 보니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2-03-07 17:04   좋아요 2 | URL
네 한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알게 모르게 울분 같은 게 있잖아요. 사진이나 동영상 보는데 도저히 제대로 봐지지가 않더라구요. 정말 그들이 무슨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적으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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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공국은 10~12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침략 등으로 키예프는 쇠퇴하고 말았고, 소위 분가에 해당되는 모스크바가 대두하여 슬라브의 중심은 여기로 옮겨졌다. 루스(러시아)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은자기 나라를 나타내기 위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역사상으로도 키예프 루스 공국은 우크라이나인의 나라가 아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발상의 나라로 받아들이게 됐다. - P6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이 아시아 최초의 유목민이었으며,
아랄해 주변에 살던 마사게타이인에게 쫓겨나 키메리아인이 살던 현재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제3의 설을 가장 신뢰했다. - P22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한때 부크강 어귀의 올비아에 살았다. 초원의 민족인 스키타이인과 바다의 민족인 그리스인 사이에는 교역을 통한 보완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스키타이의 땅은 비옥했고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배하에 뒀다. 한편 그리스인의 주식은 빵이었지만 정작 그리스 본토에 밀이 부족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키타이의 땅은 그리스 본토의 ‘빵 바구니‘가 됐다. 기원전4세기에는 아테네의 수입 곡물의 절반이 아조프해 연안에서 들어온것이었다. 곡물 외에도 생선, 가축, 가죽, 벌꿀, 노예까지 그리스에팔렸다. 그 대신 스키타이는 그리스인에게 항아리 같은 가재도구,
물, 장식품, 포도주, 올리브유 등을 샀다.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그리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히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됐다. 앞서 언급한 스키타이의 대규모 고분과 그곳에 보관된, 세련된 황금 부장품들이 그 결과물이다. - P35

공국公國 혹은 대공국이라 하면 왕국이 되기에는 부족한 소국의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2장의 주제인 키예프 루스 공국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대국이었다. 전성기였던 볼로디미르성공聖公 시대에는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현공賢公은 자신의 딸들을 프랑스, 노르웨이, 헝가리의 왕에게 시집보낼 만큼 권력을 장악하여 유럽의 장인‘으로 불릴 정도였다.
키예프 공국의 군주는 크냐지knya 라고 불렀다. 크냐지의 어원은영어로 ‘킹‘, 독일어로 쾨니히knig, 스웨덴어로 ‘코눙그Konung‘에 해당되는 단어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크냐지의 아들과 자손을 모두크냐지라 부르면서 그 가치는 왕자나 공작 수준으로 하락했다. 후세에 와서는 크냐지가 다스리는 국가라는 뜻으로, 키예프국도 한 단계 아래 등긎인 공국이라는 단어가 붙게 됐다. - P42

키예프를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하여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했으며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러시아가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임은 새삼스럽게 논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논리는 이렇다. 모스크바를 포함한 당시 키예프 루스 공국의 동북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되어서야 핀어 대신에 슬라브어가 사용됐을 정도였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 · 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키예프의 파괴 (1240) 이후에도 1세기에걸쳐 현재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됐다. - P44

통설로는 슬라브인이원래 살던 곳이 남쪽으로 카르파티아산맥, 서쪽으로 오데르강, 북쪽으로 프리파티강, 동쪽으로 드네프르강에 둘러싸인 지역, 즉 현재의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로 추정한다. 슬라브인은 7세기 초의평화로운 시기부터 이 지역에서 서서히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게다가 그들은 여타 민족이 살던 곳을 떠나 이동한 것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세력을 확장했다. 여기에는 슬라브인이 유목과 수렵의 민족이 아닌 농경 중심의 민족이었던 요인이 크다.
슬라브인 중에서도 키예프 루스를 형성한 것은 동슬라브인이며 이들이 현재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가 된다. - P45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 방식은 키예프 공(대공)이 아들들을 지방의 공(지사)으로 각지에 배속하고, 대공이 죽으면 장남이 아니라 대공의 다음 동생이 계승하는 형제 상속이 원칙이었다. 한편 동시에 부자 상속도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불완전한 계승 방식은 대가 바뀔 때마다 형제간, 친족 간의 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이것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혼란과 쇠퇴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됐다. - P55

몽골의 정복으로 그때까지 명목상 남아 있던 키예프 루스 대공국은 종언을 맞이하고 기나긴 몽골 지배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공국들이 곧바로 소멸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공국은 몽골의지배에 복종하여 세금을 바치는 대가로 존속을 인정받았다. 몽골의지배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 - P69

할리치나 볼린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에 있는 할리치나(러시아어로 갈리치‘, 영어로 갈리샤‘ 또는 갈리치아) 공국과 볼린(러시아어로 ‘볼린‘, 영어로 ‘볼리니아‘) 공국이 병합하여 형성된 공국으로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도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다. 할리치나 볼린 공국에 대해서는 기존에 거의 회고된 적이 없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더없이 중요한 존재다. 이 장의 서두에서 서술했듯 우크라이나는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키예프 루스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계승할 국가가 없었다는 러시아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할리치나-볼린 공국이다.
우크라이나의 역사가인 토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최전성기의 할리치나 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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