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를 발견하다 -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
쑹녠선 지음, 김승욱 옮김 / 역사비평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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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동아시아'와 '현대'라는 용어의 기원과 둘의 관계에 대한 모색이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는 대체로 19세기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팽창과 함께 이루어진 세계사적 전환이다. '동아시아'는 어떨까? 냉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발전 이라는 흐름 속에 '동아시아'는 지역적 의미가 아닌 민족이나 종족성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저자는 일반적 현대의 개념이 아니라 '동아시아 현대'를 정리하려 했는데 그 기점이 16세기이다. 따라서 부제도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로 되어 있다.

'동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은 시대마다 다른 함의를 내포한다. 이 개념들은 구역 내부의 교류 및 구역과 외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점차 형성된 것이다.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끝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분명히 낡은 내용은 버려지고 새로운 내용이 첨가될 것이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부단한 정의, 부정, 재정의다. - P15

책의 내용은 약 16세기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구역의 역사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만 사료를 새로 발굴했거나 독특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삼국의 역사를 공부했다면 알 만한 내용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양철학자 헤겔(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8.27~1831.11.14)은 이성이 인류를 진보로 이끌어가는 메커니즘을 삼단논법인 변증법을 통해 설명했다. 이는 유럽을 이성-선진-문명-진보로 여기고 아시아는 야만-낙후-우매-정체로 하여 부각시켰다. 이는 일반적인 유럽(인)의 시각이었다.

아시아가 존재하는 의의는 유럽이 왜 유럽인가를 증명하는 데 있었다. 1885년 「탈아론」은 헤겔 이래 유럽 사상 속의 이 '아시아 안티테제'를 상당 정도 드러내고 있었다. - P23

유럽 중심 시각의 영향 아래 아시아 안티테제'는 동아시아 모든 국가에서 일찍이 자리했다. '아시아주의' 속에 서양은 종족과 문명이고, 제3세계 이론 속에 서양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대표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개념은 내부에서 생겨난 듯 보이지만 매우 강한 외부적 영향이 접목되면서 탄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시아'는 본래 타인 눈 속의 타자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인은 이 개념을 가져와서 역으로 타자를 주체적인 자기 인식으로 변화시켰다. 스스로 인식한 '아시아'도 상당 정도는 유럽(또는 서양)을 안티테제로 삼은 것이다.
「탈아론」에 대한 단순화된 해석은 곧 '현대화'를 탈아와 동일시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익숙하게 '우매 폐쇄 야만 전제'와 같은 크고 부당한 모자를 씌워서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을 부정한다. 그에 내재하는 논리는 '탈아'와 일맥상통하며, 심지어 지적인 면에서는 더 나태하고 조악하다. - P24


조선전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 관계 기억의 결절점이자 원점이라는 데 있다.

첫째, 이 전쟁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서사는 처음부터 줄곧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둘째, 삼국은 이후 다른 시기에, 늘 이 전쟁에 대한 회고를 통해 당면한 자신의 운명, 민족의 운명, 세계 구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찾았다. 자료와 연구가 이미 한우충동汗牛充棟이지만, 이 충돌에 대한 동아시아인의 인식은 시종 혼란스럽게 나뉘어서 나라에 따라, 시기에 따라, 정세에 따라 다르다. 그뿐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도 연관되어 있으므로 정체성의 변화에 따라 서술도 바뀐다. - P63

전쟁에 대한 삼국의 기록은 저마다 다른데 이마저도 서로에게 유리하게 기술되어 있는 탓에 후대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평가에도 어려움을 겪게 한다.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전쟁의 성격, 전쟁의 명칭은 삼국이 서로 다르다.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도 큰 몫을 차지했으나 더 큰 것은 경제적인 이유였다라고 생각된다. 명과 일본 사이에는 100 여년 동안 감합무역이 이루어졌으나 16세기 중엽이 되면 감합무역은 중지되고 공식적 교류도 단절된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과의 교류가 중요해진다. 이전에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와 수신사를 서로 파견하였고 부산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상인의 거래가 가능했다. 조선-일본을 이어주던 쓰시마 섬 영주는 일본의 커지는 요구에 문서를 날조하여 조선에 전달했고 조선은 일본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삼국이 악역으로 삼은 인물은 누구일까? 명의 심유경이다. 그는 자싱 출신으로 일본과 왕래하면서 일어를 할 줄 알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병부상서의 요청으로 일본과 교섭하게 되었다. 그는 적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평화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문제는 중국과 조선 사이 오가는 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다. 심유경의 죄는 결국 만력제에게 드러나 전쟁 후 참형에 처해진다. 심유경은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를 잘 알았고 체제 담론 아래서 어느 정도의 변통 내지 조작의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 간에 요구사항을 잘 알았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은 그의 설득으로 전투를 멈추고 공격을 중단했다.

미국 역사학자 피터 퍼듀는 종번 담론이 일종의 '과문화 언어(Intercultural language)'로, 상당히 큰 융통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 P71


만주 지역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변방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중국의 내륙아시아 특히 동북 지역은 농경 지대도, 유목 지대도 아닌 중간 지대로 누르하치가 굴기한 것은 명, 몽골, 조선 등 모두의 역사에 걸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명이 조선에 참전하면서 만주 지역이 다각도로 변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명조가 조선에 파견한 부대가 만주 동북의 여진, 몽골 등의 부족을 견제하기 위한 요동 부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파견되면서 역설적으로 동북 변경은 틈이 생겼다. 게다가 명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명 조정은 이것에도 대응해야 했기에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위협하여 통합하는 동안에도 충분한 군대를 투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누르하치가 사망할 즈음 정권은 이미 여러 부족이 결합한 다원적 국가였다. 홍타이지는 이후 조선을 두 차례 공격하여 명까지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게다가 차하르를 포함한 내몽골 전체를 복속시킨다.

여기에서 동아시아의 민족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이족'과 정통이란 구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는 확실히 19세기 이후의 의식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이중 압박을 받은 뒤에 피동적으로 발생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결코 공중누각은 아니며 역사가 형성한 신분 정체성 인식의 기초 위에 접목된 것이다. 이 신분은 '민족'이 아니지만 후대인에 의해 매우 쉽게 '민족'으로 개편되었다. 민족과 민족주의 양자는 모두 인위적이며 비자연적인 산물이다. 민족주의 이전의 엘리트 계층은 결코 현대 민족주의자처럼 하층 민중을 포함한 전체 '국민'을 동원하여 '한 쟁반의 흩어진 모래'를 하나의 통일적인 '국國/족族'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인식을 자기 계층의 문화와 정치 신분에 더 많이 호소했다. 중원, 조선, 베트남, 일본에서 이 엘리트 계층은 유가儒家 사인士人 집단을 주요 대표로 삼았다. - P99

청조 통치자는 중원 지역에서 "화와 이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일부 한의 유학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 조정은 명조의 정치와 이념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기는 했으나 다양한 집단들을 포함한 국가였기에 이를 아우르는 논리가 필요했다. 동아시아 세계에 명조 시기 형성된 '중화'라는 인식의 개념이 청의 등장으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기존의 '중화'는 성리학 학풍을 따르는 것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흐름인데 명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을 '중화', 조선의 유학자들은 '소중화' 로 이를 지칭하였다. 청은 명의 제도를 계승하여 예부를 통해 대외 교류를 이어갔다. 이는 종번(조공-책봉) 체제를 기반으로 조선과 일본 등의 국가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다른 제도를 통해 내륙아시아 변강 지역(몽골, 칭하이, 티베트, 신장 및 서남 지구)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기구는 설립 초에 '몽고아문'(1636)으로 바뀌었다. 순치 연간 이번원은 예부에서 벗어나 외번 사무를 전담하는 독립 부문이 되었다. 이번원으로 내륙아시아에 대한 통치를 실시한 것은 청이 명과 다른 매우 큰 특징이며, 오늘날 중국이 '중국'으로 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걸음이었다. - P113

홍타이지는 폭력과 강압만이 아니라 정치 체계와 종교 신앙 측면에서 자신과 몽골을 한데 섞어 하나로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군사 무역 이민 등의 방식으로 영토와 인구를 탄탄히 하고, 지역을 나누어 집정관을 파견하여 관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의 '중화' 체계는 모호해지고 청을 중심으로 한 '천하' 질서로 바뀌게 된다. 중국은 여러 부족이 통합된 단일국가가 되었고 러시아와의 변계가 확정된다. 종번 원칙을 통해 조선 및 베트남 등과도 경계가 획정된다.


대항해 시대 로마교황청과 스페인 포르투갈은 동맹을 맺고 유럽 바깥의 세계에서 공동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1494년과 1529년 토르데이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하여 지구를 동서로 분할하여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태평양 서부를 맡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부분을 포함하여 브라질 동부에서부터 인도네시아 군도에 이르는 지역을 갖게 된다. 이 때 예수회는 로마교황청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아 아시아로 진출하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선교를 위해 갔으나 선교만이 아니라 유럽 문명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중국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진다. 마테오 리치는 세계지도를 통해 아시아라는 용어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 때의 아시아라는 용어는 새로운 공간 인식의 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 아니어서 청 강희제에 의해 '마테오 리치 규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마테오 리치 규칙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질적인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좋은 측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며, 상호 적응을 시도하는 노력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는 그리 신선하지 않지만, 줄곧 이슬람의 부상을 위협으로 보고 또 바야흐로 신교의 충격을 받은 천주교 유럽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담한 조치였다. 바로 이러한 태도에 이끌리는 가운데 천주교의 몇몇 기본 개념은 한어 맥락에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몇몇 한어 어휘도 기독교화했다. - P173

예수회는 16세기 일본 엘리트가 외부 세계에 품은 관심과 호기심에 영합하는 전략과, 발리냐노의 현지화 전략을 통해 천주교가 초창기 동아시아에 안착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수회의 성공은 스페인과 그 지지 교단을 시샘하게 만들었고 유럽과 천주교 내부의 정치적 경쟁으로 일본은 격랑 속에 휘말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공고히 해야 했기에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대외무역에 대한 관리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다이묘는 배제되어 '겐나 대순교' 등이 발생하였다. 얼마 전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이라는 것과, 책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숨은 기리시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서 놀랐다. 중국과 조선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거셌으나, 일본의 기리시탄에 대한 박해는 아주 처참했다고 한다. 잔혹한 박해와 형벌로 일부 기리시탄은 겉으로 종교를 포기하고, 자신의 종교를 위장하고 숨어들었다. 그 세월을 2세기 동안 지켜냈다는 게 놀랍다.

17세기 후기에 이르면 예수회는 천주교 내부에서 배척당했고 포르투갈의 세력도 약화된다. 1773년 로마 교황청은 예수회를 불법으로 지정하였다.

16~18세기 유라시아 교류는 보통 유럽인이 출발점인 경우이다. 하지만 17세기 초 일본이 파견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사절단은 태평양을 건너서, 강희 연간 번수의는 서쪽으로 인도양을 가로 질러 유럽에 이르렀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번수의가 살던 시대는 천주교의 운명이 역전되던 때로 외부 세계에 대한 배척이 강해지던 때였다. 이 때문에 금교를 계기로 초래된 교류는 19세기 이래 '쇄국'이라는 단어로 통칭한다. '쇄국'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는가?

미국이 견고한 함선과 고성능 대포를 가지고 일본을 강제로 개방시킨 뒤, 종래 어떤 정령 속에서도 출현한 적이 없던 쇄국'이라는 단어는 에도시대 일본의 '자아봉쇄'에 대한 고정 인식이 되었고, 이후로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대한 '상식적' 묘사로 더 확대되었다. - P216

동아시아의 역사를 곧 '쇄국'과 '개국'이라는 기본 논리로 삼아 파악하는 것은 구미가 주도하는 '현대' 서술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 P217


아메리카의 은이 화폐를 대신하고 노예가 상품 가치를 띄기 시작한 이후 차와 담배가 동아시아 삼국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다. 대항해 시기 이후 중국의 바다는 28년의 해금 정책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열려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은 이민이 빈번하여 이민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이민도 동남아시아까지 두루 퍼져 있었다. 조공 무역을 제외하면 해상무역이 빈번했고 이 때문에 해상을 장악한 세력은 부를 쌓을 수 있는 명백한 기회가 되었다.

역사상 중국의 바다 봉쇄와 개방은 국가와 해상 집단 간의 역량 각축이 서로 길항하며 소장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배후에 존재하는 논리는 해양무역에 대한 거부라고 하기보다는 해양무역의 통제권에 대한 쟁탈이라고 해야 한다. 국가와 상인은 절대로 항상 대립적이지 않았다. 해상 집단은 전형적인 초국적 세력으로, 무릇 세력이 커진 자는 주변의 국가 및 비국가 정권과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가졌다. 해금 시대의 동아시아 해역은 조금도 쓸쓸하거나 적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역사 극장이었다. - P241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중국 황제의 조정을 방문했다. 그러나 건륭황제는 그를 내쫓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닝보, 저우산 등 지역을 항구로 개방한다. 베이징에 영사관을 상설한다. 저우산 부근의 섬 하나를 획정하여 영국 상인의 거주지와 창고로 제공한다. 영국 상인이 광저우에 상주하는 것을 허가한다. 영국 배가 광저우와 마카오 수로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며, 아울러 과세를 감면한다. 영국 선교사의 선교를 허가한다. - P264

요구 조건이 누가 봐도 과하다. 통상적 권리가 아닌 영국 자국에 특수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매카트니가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기 거부한 것과 건륭제가 영국왕에게 준 회신의 오만한 태도가 강조되며 선입견을 만들어 냈다. 이는 야만적인 '동양'이 침략당해도 싸다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사실 건륭제의 회신은 1896년이 되어서야 전체가 영문으로 번역되었고, 그 서신과 거기에 담긴 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어떠한 주목도 끌지 않았다.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으며 ... 지금껏 정교한 제품을 중시하지 않았으니, 당신 국가의 제품은 조금도 필요치 않다." 해당 말의 문맥은 매카트니가 가져온 예물을 이야기한 것이지, 중영 간의 무역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17세기 조선의 강항과 중국의 주순수는 유학자로 일본 근대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강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일본군이 전라도 해상에 쳐들어오자 그만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에서 그는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유학을 접한 이후 유학 연구에 매진하던 학자였다. 강항은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주자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이후 하야시 라잔을 비롯하여 도쿠가와 시대 일본 사상의 주류 흐름으로 발전한다. 주순수는 정성공이 강남 지방을 공격할 때 전투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일본 나가사키로 가 학문을 전수한다. 이 때 주순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가르쳤고 에도로 가게 된 그는 이후 일본 지식인과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유명해졌다.

중국은 강남풍 문인화가 유행하고 일본에서는 우키요에 문화가 유행한다. 강남 풍격은 조정의 주류와 분리되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호방한 기상을 담으며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다이묘가 에도에 출사하러 가면서 에도의 무사 중심 인구가 급격히 늘고, 남녀 비율이 불균형해지면서 연예업, 서비스업, 색정업 발달이 촉진되었고 이로 인해 17세기 후기 우키요에 문화가 출현하였다.

청학은 경세치용 실사구시를 추구하면서 전통 유학의 관변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으나 유학의 리와 이의 추구는 유학이 주도하는 흐름 속에 흘러갔다. 반면 일본 근대 사상은 청학과 달리 유학을 수용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나 난학처럼 유럽을 귀감으로 삼아 본토의 지식을 수정하고 국학과 같이 일본 내부의 특성을 담은 학문도 전개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실학은 유학 체계 안에서 정주이학에 대한 비판 및 반성과 부합했으며, 또한 16세기에 전해진 유헙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실학에서 '경세'는 학문의 실천을 검증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이성을 숭상하고 과학 등의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면서, 그것들을 유가 도덕 및 정치와 대립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에 특히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백은 공급이 하락한 뒤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차와 바꿀 다른 상품으로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에 주목한다. 동인도회사는 대중국 아편 무역을 회사가 인증한 항각상인이라는 산상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항각상인들이 광저우 관부와 결탁하여 아편을 밀수해 들여와 폭리를 취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아편이 10배 느는 동안 백은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사회 풍조가 부패하고 해이해지면서 결국 영국과 전쟁까지 벌이게 된다.

일본은 페리 개항 이후 문명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요시다 쇼인은 미국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밀항을 준비하며 미국 군관에게 한문으로 쓴 편지를 찔러주기도 한다. 이 편지가 영문으로 번역되면서 미국이 일본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구가 된다.

흑선의 도래는 미국이 동아시아를 정식으로 척식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일본이 '식민 현대'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에게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본은 마치 요시다 쇼인이 페리를 추종했던 것처럼 동아시아의 겸손한 동료였다. 비록 두 나라는 20세기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점령과 개조를 거쳐 일본은 다시 좋은 학생의 모습으로, '문명'으로 되돌아갔다. - P335

중국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개항을 하게 되고, 조선은 강화도 조약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다만 두 나라는 당시의 국제법에 대한 원칙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조약을 맺게 된다. 국제법은 모두 식민제국 체제 하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아시아 '천하' 구조는 외부 압박과 내부 변란이 이중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해체되어 하나의 '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구질서가 해체된 뒤 도래한 것은 하나의 민족국가 체제가 아니라 일본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 질서였다. 신질서는 국제법의 언어를 차용했지만 오히려 '중화-천하' 질서의 많은 면모를 계승했다. - P345

동아시아는 '식민 현대'의 한 대상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구미 제국의 눈에 '비문명' 세계의 한 구성 부분, 그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를 가져다가 추상적인 서양과 상대되게 한 것은 식민 체계 아래서 동아시아인의 인식 착오다. - P353


인류를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 '인종'으로 구분한 것은 18세기 스웨덴 자연학자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학은 갖가지 측량술의 발달로 종족 이론의 생물학적 근거를 강화했다. 19세기 찰스 다윈의 자연진화론은 인류 사회의 차이를 해석하는 데 쓰였다. 종과 족은 문명진화론과 긴밀히 연계되었고 식민 압박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가 열릴 때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다. 러시아는 대회 참여를 사양했고, 일본은 세계 박람회에서 자기 문명의 높은 수준을 전시하면서 일본인이 러시아를 넘어서 '가장 문명적인 종족'을 자처했다. 일본의 논리는 유럽과 미국이 주장하던 식민 체제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동아시아가 민족주의로 자신을 개조한 것, 그 하나의 주요한 자극은 담론과 실천 두 측면에서 마치 한 쌍의 대립적인 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피식민자가 일련의 반항적 민족주의를 구축하면서 의지한 논리 역시 식민자가 가져온 그 문명 진화 논리였다. - P366

17세기에 기원한 현대 국제법은 식민주의가 세계에 확장되면서 식민 활동을 지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야기했다. '보호국'이라는 개념은 1885년 유럽 국가가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세운 논리였다. 일본은 식민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구미 국가의 평가에 특히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매 단계마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문명의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12년 메이지 천황 사후 일본은 새 시대를 맞이하면서 명목상으로 구미 식민제국과 자신이 완전히 평등한 국가가 되었음을 인식한다. 이것은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며 삼국의 정치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아시아주의는 새로운 압박으로 기존 압박을 반대했기에 초월성을 가지기 어려웠기에 결론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1919년 일부 지식인들은 식민주의의 타개도 중요했지만 어떻게 자신을 '현대'로 만들 것인가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했다. 이 때문에 '현대'를 가속화하기 위해 자아 비판 나아가 동양 비판으로 나아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의 본질을 급격하게 실천한 이들은 중국과 조선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해방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 연이어 일어나며 중소간 분열의 무대가 된다. 중국해방전쟁으로 중국과 미국이 조선에서 직접적으로 교전했고 베트남에서 간접적으로 대항했다. 미소간 게임이 아니라 중미와 중소의 게임이 이어졌는데 이는 19세기 이래 이어진 식민과 반식민, 패권과 반패권 항쟁이 심화된 무대였다. 1949년 이후 중국은 국가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과 한국의 경제 도약은 한국전쟁 이후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냉전 구조는 대체로 종료되었지만 식민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졌는가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 흐름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식민 현대성과 다른 대안적 발전관을 찾도록 요구한다.

오늘날 동아시아를 곤혹스럽게 하는 역사 인식의 문제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어떤 전쟁, 어떤 사람(집단),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현대성 개념에 대한 인식에 있다. 19세기 후기부터 동아시아는 점차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고, 정해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종의 발전주의 시대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역사는 부단히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인류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간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선진'적일 것다, 우리가 매 맞는 이유는 '낙후'하기 때문이며 낙후한 원인은 '폐쇄 보수'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문명의 승리자'의 시각에 서서 '몽매한 야만인'을 부정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누가 문명과 승리를 대표하며, 누가 몽매와 실패를 대표하는가? - P458

인류의 현대는 어느 하나의 국부적인 기원에서 다시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사회 간에 긴밀히 교류하고 만나는 과정 속에서 함께 형성해낸 것이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상호작용이 없었다면, 유럽의 현대화도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현대'는 동아시아에 내재된 것이다. 외부 세계가 가져온 충격을 직시하되, 이러한 충격을 유일한 역사 추진력으로 간주하지 말고 외부 충격에 조우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현지의 역사적 동력으로 내화하는지의 과정을 탐구해야 한다. - P462

이 책을 통해서 동아시아가 현대로 들어서는 과정의 역사를 들여다 보았다. 한중일 지역을 둘러싼 지역의 역사를 한 곳에 모아놓아서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저자의 기호가 균형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조선에 관한 분량은 적은 편이고 중국에 우호적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재밌게 읽었다. 한중일 근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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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6-07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임진왜란이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이었다는 해석
을 본 기억이 나네요.

굽작가도 혹시 이 책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7 11:39   좋아요 1 | URL
임진왜란를 조선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명칭이 맞지 않죠^^; 애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벌하러 간다는 의도로 시작한 전쟁이고 명도 참전한 전쟁이니까요. 명도 이 전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결국 청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잖아요.
삼국의 역사를 함께 보여주는 이런 역사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여러 모로 비교할 지점이 생기니까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7-08 15: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07-08 15:3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7-08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7-08 17:31   좋아요 2 | URL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저도 놀러갈게요.

mini74 2022-07-08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 축하드리러 왔다가 붕어빵 말풍선에 빵 터지고 갑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2-07-08 17:3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랜덤 스킨인데 왜 하필 붕어빵에 소주?ㅎㅎ 저도 덕분에 들여다봤어요^^;
어제는 소주잔 스킨이 당첨되더니ㅋㅋㅋ

미니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7-08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07-09 21:33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7-08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당선 축하드려요. 역시 역사책은 화가님이 최고~!!

거리의화가 2022-07-09 21:33   좋아요 2 | URL
ㅎㅎ 영광입니다^^ 소설은 새파랑님이 최고!^^*

겨울호랑이 2022-07-08 23: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글에서 어쩌면 임진왜란을 전후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사상의 중심과 공간의 중심을 일치시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명나라, 포르투갈과 교류하며 중화를 넘어선 서구문명과 중화세계의 연결점으로 서려던 일본, 소중화 세계의 조선과 중화로부터 독립된 과거 홍산문명의 후계로서 독립문명을 꿈꾸던 청나라 등. 이들 인식의 대립이 페이퍼의 배경이 아니었을까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2-07-09 21:42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님 이런 멋진 댓글을!ㅎㅎ
저자가 임진왜란을 현대의 기점이 된 사건으로 꼽은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전쟁 후 조선은 종번체제에 철저히 이입되는 모습으로 나아갔고 일본은 물론 쇄국 정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포르투갈, 네덜란드를 비롯한 무역을 통해 서양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있었고요. 명의 지역은 청이 들어섰지만 명이 유지하려던 체계를 청도 이어가려고 했던 걸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22-07-09 03: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축하합니다 한국만이 아닌 한중일 세 나라로 역사를 보는 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와 나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니... 그러고 보니 한중일 역사를 만화로 내는 사람도 있군요 그 책을 보신 분이 쓴 글만 봤지만...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09 21:43   좋아요 1 | URL
네. 하나의 시선만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보는 역사를 요즘은 더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2-07-11 0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고, 항상 깊이 들어가셔서 많이 배웁니다**

거리의화가 2022-07-11 09:01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관심만 많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요^^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scott 2022-07-11 0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 합니다

아베 피살
소식을 들은 주말
한국 중국 일본의 지난 역사들이 스쳐 지나가네요

한반도의 운명 ㅜ.ㅜ

거리의화가 2022-07-11 09:02   좋아요 2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피격 소식 듣고 놀랐다가 사망까지 이르다니 심경이 좀 복잡해졌어요. 삼국 간에 더 피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ㅠㅠ

thkang1001 2022-07-11 06: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세요!

거리의화가 2022-07-11 09:03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독서괭 2022-07-11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당선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7-11 13:11   좋아요 2 | URL
괭님도 당선 경축드립니다^^*

thkang1001 2022-07-11 2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밑줄

3. wife-as-deputy

흠 대역부인 번역이 좀…

생태학적으로 제한된 공간에서는 농업생산물 증가에 의해서나 영확장을 통해서만 증가하는 인구에 대한 식량공급이 가능하다. 처음에는자발적으로 나중에는 전문적 차원에서, 전자는 엘리트의 발달을, 후자는군사주의의 발달을 가져왔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구조들이 사원도시의 형태를 취했으며 기원전 네번째 천년과 세번째 천년에발달하였다. 부족간 전쟁에서 도시의 존재는 일자리를 찾아서 혹은 전쟁과 기근 때문에 보호를 받기 위해 모여드는 주변마을의 인구를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한다. 그러한 인구는 대규모 역사(役事)에 동원되는노동자들이 되어 거대한 사원의 건설과 중앙집중화된 관개사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사원은 복잡한 종교 · 정치·경제적 활동을 하였다. - P102

여왕 십투는 왕이 자주 궁궐을 비우는 동안 그의 대리역할을 했다. 그녀는 마리 시의 행정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았으며, 이웃도시 테르카(Terqa)의 총독은 ‘여주인‘인 여왕에게 사업에 관해 보고하고 그녀의 명령을 실행했다. 총독과 제후들은 대체로 통치자에게만 하기로 되어 있는용어로 그녀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바쳤다. 또 십투는 희생제물을 바치고 신의 명령과 계시를 받는 것을 감독하였으며, 매우 중요한 행사들에관해 왕에게 정기적으로 조언을 하였는가 하면, 왕의 지시를 실행하기도하였다. - P122

지배엘리트들의 왕권찬탈자로서의 이해관계로 인해, 그들이 확립한권력의 형태는 이를 관찰한 어떤 사람이 쉽게 ‘세습적 관료주의‘
(patrimonial bureaucracy)라고 불렀던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들의권력이 얼마나 안정적일지 여부는 권력의 중요한 하급지위에 가족구성원들을 얼마나 많이 임명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초기시대에 그런가족원들은 매우 종종 여성―부인, 첩, 딸들이었는데, 이를테면 이들은 남편/아버지/왕을 섬기는 최상위 신하들이 되었다. ‘대역부인‘(wife-as-deputy)의 역할은 이렇게 출현하였으며, 이 시기 이후 그런 역할을 맡는 여성들이 계속 등장하게 된다. - P128

엘리트 남성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이나 풍부한 물자, 노예와 하렘을 웨한 첩의 소유 같은 성적 서비스에 대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성들은 가장 안전하고 고위층 출신이고 자신감에 차 있을지라도스스로 남성의 보호에 의존하는 존재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사회계약의 여성세계이다. 자율을 거부당한 여성들이 보호에 의존하고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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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6-06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벌써 100페이지 읽으셨네요?^^

거리의화가 2022-06-07 06:58   좋아요 2 | URL
네 3장까지 읽었습니다^^*
 

밑줄

2. 작업가설

그래서 우리의 탐색은 가부장적 체계의 역사에 대한 탐색이 된다. 남성지배체계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과, 그 기능과 양상이 시간이 감에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과 뚜렷하게 결별하는 것이다. 이 전통은 가부장제를 비역사적이고 영원하며 눈에 보이지않고 불변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신비화하였다. 그러나 19, 20세기 들어와서 많은 여성들이 우리가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주었던 과정을 마침내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바로 여성들이 취할 수 있었던 사회적 · 교육적 기회의 변화 때문이다. 이제야우리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개념화할 수 있고, 그리하여 여성을해방할 수 있는 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의식은 남성지배체계의 바람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결과들로부터 남성들을 자유롭게만들 수도 있다. - P71

문명화된 사회의 제도들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원시적 조건 아래서 유아에 대한 어머니의 실제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오직 어머니의 팔과 보살핌만이 유아에게 추위로부터 피난처가되었고, 어머니의 모유만이 생존을 위한 영양을 공급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무관심이나 유기는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생명을 주는 어머니는정말로 삶과 죽음에 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놀랍고도 신비로운 여성의 힘을 관찰한 여성들과 남성들이 어머니 여신을 숭배하게 된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여기서 나의 요점은 여성이 어머니 노릇을 하는 최초의 노동분업을 만들어낸 필연성(necessity)에 대한 강조이다. 수천년 동안 집단의 생존은 그것에 달려 있었고, 다른 대안은 없었다. - P75

분명한 것은, 여성과 출산·양육을 연계시키는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사회적으로 조종된다는 점이다. 나의 요점은 어머니 역할 및 자녀양육 활동과 병행할 수 있는 일거리를 여성들이 선택했던 가장 초기의성별노동분업은 편리하였으며(functional), 그래서 남성들과 여성들이 다같이 받아들일 만했다는 것이다. - P78

여성의 과거에대한 개관에서, 엘리제 볼딩은 인류학적 연구들을 종합하여 매우 다른해석을 내놓았다. 볼딩은 신석기시대 사회들에서 일이 평등하게 공유되었고 그 속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은 각각 집단의 생존에 적합한 기술과필수적인 지식을 발달시켰음을 발견한다.
문명이전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평등했음에 틀림없으며, 어쩌면 자신을 남성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보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 P79

초도로에 따르면, 아이에게 어머니 노릇을 하는 사람은 바로 여성들이기 때문에,

커가는 여아는 자신을 타인과의 연속적인 존재로 정의하고 경험하며,
자기(self)에 대한 경험은 더 융통성 있고 더 침범되기 쉬운 자아(ego) 경계를 포함하고 있다. 남아는 경직된 자아경계와 분화에 대한 느낌을 더 많이가지고서 자신을 더욱 분리되고 구별되는 존재로 정의하게 된다. 자기에 대한 여성의 기초적인 느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며, 자기에 대한 남성의기초적인 느낌은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

남아는 양육적인 어머니와 반대로 자기개념이 규정되는 방식에 의해공적 영역에의 참여가 준비된다. 여아는 심지어 자신의 사랑을 남자에게로 옮겨갈 때까지도 어머니와 동일시하고, 언제나 어머니와 일차적으로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관계의 영역들‘에 더 크게 참여하게끔 준비된다. 성별로 규정된 여아와 남아는 "성불평등한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일차적으로 재생산의 영역에 두는 성인의 성역할을 맡도록" 준비된다. - P80

나는 초도로가 현대산업사회에서 여성들이 아이를 양육한 결과라고설명한 그러한 인성형성은 신석기시대의 원시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추론한다. 그보다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여러 가지 기술들에서의 유능함에 대한 자각 그리고 식량채집에서의 자급자족과 연관되어있는 여성들의 어머니 역할과 양육행위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힘의 원천으로, 아마도 마법의 힘으로 경험되었음에 틀림없다. - P81

여성의 어머니로서의 효과적인 양육기술이 부족의 생존에 필수적이고, 따라서 매우 높이 평가되었던 것처럼, 남성의 사냥과 전쟁기술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방어에 숙련된 남성들을 키워내지 못한 부족들은 결국 남성들에게 이런 기술을 장려한 부족들에게 굴복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론적 주장이 자주 제기되어 왔지만 나는여기서 또한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에 근거한 심리학적 주장에 동의하면서 논의하고 있다. 두려움, 경외 그리고 아마도 여성에 대한 공포라는 상황 속에서 일어났을 개별 남성의 자아형성은 남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자아를 지원하고 자신감을 강화해 주고 가치관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사회제도를 고안해 내게 했을 것이다. - P82

세계 여러 지역의 부족사회들에서 발견되는 현상인 ‘여성교환’(exchange of women)은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여성종속의 선도적 원인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은 여성들이 속한 부족에서 그들을 강압적으로 제거하거나(신부 훔치기), 의례에 의한 능욕 혹은 강간, 정략결혼 등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아동기의 아주 초기부터여성들에게 그에 대한 교의를 항상 먼저 주입시킴으로써 족내혼(endogamy)에 대한 금기와 강제된 결혼에 동의하는 것이 친족에 대한그들의 의무임을 여성들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말한다.

결혼을 구성하는 교환의 총체적 관계는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로 구성된 두 집단들 사이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여성은 동반자 중 한 명이 아니라, 교환의 대상물건 중 하나일 뿐이다. .…대체로 그렇듯이, 이것은 소녀의 감정이 고려되었을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다. 계획된 결합에 순종하면서 소녀는 그 교환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거나 촉진이 시키지만, 그녀는 그 교환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다. - P84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과정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일어났지만, 원인과 결과는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수렵채집사회나사회가 농경사회로 바뀌는 시점을 전후해서 친족구조는 모계제에서부계제로 이동하고 사유재산이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사건의 순서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다. 엥겔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유재산이 먼저 발달하고, 이것이 "여성이라는 성의 세계사적
"전복"을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레비-스트로스와 클로드 메이야수(Claude Meillassoux)는 사유재산이 생기게 된 것은 여성교환을통해서였다고 믿는다. 메이야수는 그 과도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있다. - P87

메이야수는 분만할 때 여성들이 생물학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부족들은 다른 집단들로부터 더 많은 여성들을 조달해야 했고, 또 여성들을 약탈하려는 경향은 부족간의 끊임없는 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전사문화(戰士文化)가 출현하였다. 여성약탈의 또 다른 결과는 잡혀온 여성들이 그들을 잡아온 남성들에 의해 보호받거나, 약탈부족 전체에 의해 보호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성들이 정복하고보호했기 때문에 그들은 여성을 사물화하는 사람이 된 반면, 여성은 물건과 같이 소유물로 생각되었다—여성은 사물화되었다. 여성의 재생산능력이 처음에는 부족의 자원으로 인식되다가, 이후 지배엘리트가겨나면서 특정 친족집단의 재산으로 소유되었던 것이다. - P88

나는 여기서 결정론을 주장하거나 의식적으로 조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건들이 특정한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그것은 남성들도 여성들도 의도하지 않았던 특정한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사회라는 대담한 신세계를 출범시킨 현대남성들이 오염이나 생태계에 대한 영향과 관련된 결과들을 알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도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과정과 결과에 대한 인식이 발달할 수 있었던 시점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 과정을 멈추기레 너무 늦었다. 적어도 여성들에게는. - P90

한쪽에는 여성의 사물화, 다른 쪽에는 국가와 사유재산으로 연결된 관계는 엥겔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제안된 것과는 정확하게 반대다. 역사적으로 주어진 사회구조적 현상으로서의 여성의 사물화 없이는 사유재산과국가의 기원이 설명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설득력이 있는 아아비의 주장을 따른다면, 우리는 농업혁명 과정에서 인간노동력과 여성들에 대한 성적 착취가 풀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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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06 1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진도 쭉쭉 나가고 계시네요. 저도 곧 시작하겠습니다!!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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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예전에 읽었으니 가지고 있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에 둔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새로 구입한 책이다. 이전에는 같은 출판사이지만 최인훈 전집으로 나온 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판본이었다.

어쨌든 광장은 재독이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으로 손꼽히는 광장. 1960년 11월에 발표된 소설이다.
출간 당시가 전쟁이 끝난 지 6~7년, 4.19 혁명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북한은 갈라진 상태에서 전쟁으로 막심한 피해를 겪었고 인간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을 때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는 비동맹 선언, 중립주의 등의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이명준의 선택은 당시 사람들의 상황과 선택지 중 하나를 예상케 한다.

명준이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면서 중립국을 선택하는 모습은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남한과 북한 사회의 모습들을 친절하게 보여주는 모습에서 명준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한다.

구운몽은 처음 읽게 되는 것이었다. 
(근데 이전에도 같이 실려 있었을텐데 왜 나는 구운몽을 함께 읽지 않았을까.)
우선 읽기 전 왜 하필 구운몽이 광장과 나란히 한 책에 묶였을까 궁금했다.
어떤 배경도 접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전달받고 감정을 겪자 생각하여 곧바로 읽게 되었다.

완독 후 첫 감정은 혼란과 어지러움이었다.
독고민이 몇 차례의 꿈을 꾸고 환각을 경험하던 것처럼 나도 마치 악몽을 꾸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비슷한 악몽을 꾸는 과정을 여러 번 겪듯 메스꺼움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구운몽을 이끌고 가는 인물은 독고민 뿐 아니라 김용길, 시사회 해설자 등 다양하다. 이 때문에 장면의 전환이 빨라서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구운몽은 1962년 4월에 발표된 소설로 5.16 군사 쿠데타의 상황을 그렸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혁명군 방송에서는 혁명이 위기에 빠졌다며 시민군이 일어서기를 반복적으로 종용하고 자유를 부르짖는다.

독고민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반복되는 내면의 상황들이 독고민의 마지막을 짐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광장>의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광장이라면 <구운몽>의 광장은 썰렁하고 시멘트 바닥의 느낌처럼 차갑고 얼어 붙어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광장과 구운몽은 형식이 달라서 새롭게 느껴졌다.
<광장>은 명준이 선택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묘사에 집중하는 모습이라면 <구운몽>은 철저히 인물에 대한 내면에 치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한 권의 책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 두 개를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두 소설을 한 권에 담은 더 큰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가 아닐까 한다.
4.19 이후 독재에서 벗어나 이제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5.16 으로 그것이 송두리채 무너지게 되니 말이다.


남한 시절의 그에게는 철학이 모든 것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에게, 철학이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는 양반과 종놀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살아온 고장에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철학이란, 양심의 마지막 숨을 곳이었으리라. 아니면 그 신분이 임금이건 종이건 사람이 산다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 뜻을 캐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좋고, 철학이란 그 모든 것을 다 뜻한다. 어쨌든 그는 철학의탑 속에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 P106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세워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 P158

에덴 동산에서의 잘못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코뮤니즘의 낳음과 자람의 걸음에 신기스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쌍둥이 그림이었다. - P184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될터이었다. 다만한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 P208

마음이 추우면 죽는다. - P223

더 많은 탐조등 빛이 도시의 하늘에서 갈팡질팡 엇갈리고 있다. 폭격, 혁명, 누가 혁명을 일으킨 것일까. 스피커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거리고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개 한 마리 얼씬 않는 거리는 사방이 괴괴할 뿐, 총소리 한 방 들리지 않는다. - P249

불사조처럼 날아오르는 그대의 양심을. 그대의 사랑을. 양심과 사랑에 거듭나서, 심연의 그 아득한 거리에 승리하고, 저 높은 자유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그대의 앞날을 봅니다. 이 도끼를 받으십시오. (총성. 또 총성. 뒤따라 기관총이 이어쏴) 안녕히. 연인이여. 그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자유 만세. 공화국 만세. - P278

현대는 성공의 시대가 아니라 좌절의 시대며, 건너는 시대가 아니라 가라앉는 때며, 한마디로 난파의 계절이므로, 다음에 현대인의 인격적 상황은 극심한 자기 분열이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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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6-04 2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장은 몇 년 전에 재독했는데, 같이 실린 구운몽은 아직 못 읽었어요^^; 구운몽 쪽이 더 읽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화가님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2-06-04 22:59   좋아요 3 | URL
괭님도 구운몽 못 읽으셨군요ㅎㅎ 구운몽 내면 묘사가 좀 많고 장면 전환이 휙휙이라 어지럽더군요^^ㅎㅎ
월요일까지 쉬니 여유가 더 생긴 것 같아요~ 연휴 잘 보내세요^^

mini74 2022-06-04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광장, 밑줄 그으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딩때 읽었었는데, 반공교육이 익숙했던 세대로 주인공의 선택이나 결말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ㅎㅎ 화가님도 연휴 즐겁게 보내시길 *^^*

거리의화가 2022-06-04 23:11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에 읽을텐 명준의 선택이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다시 읽으니 명준의 마음이 더 이해되는 측면이 많더라구요 가면 갈수록 명준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보니 말이죠. 그 시기를 직접 겪은 분들의 심정도 돌아보게 됐어요^^ 연휴 잘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2-06-05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책 가지고 있는데 왜 광장만 읽었을까요? 광장 처음 읽은게 중학교때였던 거 같아요. 순전히 집에 책이 있어서.... 그런데 진짜 그때는 이해가 하나도 안돼는.... 학교에서 하는 반공주의 교육에 찌들어있던 어린 영혼이 뭐가 이해가 되었을까 싶어요. 그 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서는 1960년대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데 정말 놀랐었고 감격했던 기억이 나네요.
구운몽은 아마 제목 때문에 안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고전 소설 구운몽을 연상시키는데 저는 그 구운몽 싫어했거든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06-06 21:4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구운몽 제목 듣자마자 예전 고전 소설 떠올렸거든요~ 진짜 그게 연상되서 꺼려진건가 싶기도 하군요ㅋ 저는 어릴 때 읽지는 않아서 처음 읽을 때도 나름 잘 읽긴 했는데 그때는 명준의 마지막 선택이 강렬해서 다른 건 순삭되었었던 것 같고 이번에 읽으니 주변의 여러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어쨌든 잘 쓴 소설인 것 같긴 합니다!

scott 2022-06-06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쓴 독후감으로 상을 받았었는데
이후 두번 다시 읽지 않았던!ㅎㅎ

화가님 환각 경험까지 일어 나셨다고 하니
진심으로 명준의 선택에 아쉬움 가득 ㅠ.ㅠ

거리의화가 2022-06-06 21:45   좋아요 2 | URL
오~ 스콧님 독후감으로 상 받은 적이 없어서^^; 역시 능력자 스콧님! 근데 왜 두번 다시 읽지 않으셨어요...ㅋㅋ

환각은 뒤에 읽은 구운몽 때문에 생겼어요. 어찌나 상황이 어지럽던지ㅋㅋㅋ
명준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되는 면이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제가 그 시절이었고 명준의 상황이라면? 전 물도 무섭고 겁이 많아서 육지에 내리긴 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죠ㅋㅋㅋ

희선 2022-06-12 0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아는 책이네요 구운몽은 옛날 소설도 있는 거 맞군요 그것도 제목만 알지만... 그것과 아주 다른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식이 비슷할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2-06-12 07:02   좋아요 2 | URL
고전 구운몽 학교 다닐 때 분명 읽었을 것 같은데 내용이 가물거리네요^^;
최인훈의 구운몽 제목은 아마도 주인공이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의 꿈을 여러 차례 꾸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가져다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
 

서구문명에 성별을 구성한 형식(사회적 역할, 법, 은유)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 역사적 발전을 따라가보는 것
동양문명에서는?

기원들: 전통주의 -> 다윈 진화론, 프로이트 심리, 윌슨의 자연 선택 -> 마르크스 주의, 레비 스트로스 구조 문화주의 -> 모성주의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기록되지 않은 소문자 역사(history) – 인류에 의해 재수집된 과거의 모든 사건 ㅡ와 대문자 역사(History)기록되고 해석된 과거를 구분해야 한다. - P16

현재 시점에서 집단으로서의 남성과 집단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차원에서 양자의 모든 차이가 구별지어지는 정도는 남성역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여성의 특수한 역사의 결과이다. 이것은 문명보다 더 오래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 때문이며, 여성의 역사에 대한 거부 때문이다.

나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과거에 대한 지식과 맺고 있는 관계는 그 자체로서 역사를 만드는 하나의 힘이라는 통찰이다. - P20

모든 관념의 행렬은 현실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어떤 것 혹은 적어도 자신들이 경험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미지, 은유, 신화는 과거 경험을 통해 ‘형상이 미리 예시된‘ 형태 속에서 표출된다.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들로 이 상징들을 재해석하며, 그것들은 다시 사람들을 새로운 조합들과 새로운 통찰력으로 인도한다. - P25

한쪽 눈으로 볼 때 우리의 시각은 범위가 제한되고 깊이가 없다. 우리가 다른 눈의 시각을 더할 때 우리 시각의 범위는 넓어지지만, 여전히 깊이는 없다. 우리가 전체적 시각과 정확한 깊이의 지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두 눈으로 볼 때뿐이다.
컴퓨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은유를 제공한다. 컴퓨터는 우리에게 삼각형 (2차원) 그림을 보여준다. 그 이미지를 유지한 채 삼각형은 공간을움직이고 피라미드(3차원)의 형태로 변환된다. 피라미드와 삼각형의 이미지를 유지한 채로 피라미드는 곡선을 만드는 공간(4차원)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은 채로 네 가지 차원 모두를 동시에보지만, 또한 서로간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그것들을 본다.
가부장적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가 보았던 대로 보는 것은 2차원적이다. 가부장적 틀에 ‘여성을 추가하는 것‘은 그것을 3차원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세번째 차원이 완전히 통합되고 전체와 함께 움직일 때만이, 여성의 시각이 남성의 시각과 평등할 때만이, 우리는 전체의 진정한 관계와 부분들의 내적 연관성을 지각한다. - P28

해석을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접근법 개념적 틀은 결과를 결정짓는다. 그것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대답되기를 원하는 과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오랜 역사적 시간 동안, 우리의 의문을 형성했던 개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토론을 거치거나 도전을 받지도 않았다. - P33

전통주의자들은 당연히 남성지배는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주장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여 제시되기도 한다.
전통주의자들은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발견되는, 여성과 남성에게 다른 일과 역할을 배정하는 현상인 ‘성적 비대칭‘(sexual asym-metry) 현상을 여성과 남성의 지위에 대한 증명이자 그것의 ‘자연스러움‘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 P35

19세기에 종교적 주장이 힘을 잃자 여성의 열등성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설명은 ‘과학적이 되었다. 다윈주의이론은 종의 생존이 개인의 자기충족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강화시켰다. 미국사회에서 사회복음(Social Gospel, 노동자계급이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운동으로서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으며, 자유주의적 진보사상과 수정다윈주의 등을 차용하였다― 옮긴이)이 부와 특권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자의 생존이라는 다윈주의적 관념을 이용한 것처럼, 가부장제의 과학적 변호인들은 모성역할을 통해 여성을 정의하는 것과 경제 및 교육기회에서의 여성배제를 종의 생존이라는 이익에 봉사한다며 정당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은 성차가 자연스럽다는 가설을 의심조차해보지 않고 현존하는 성차를 관찰했고, 또 조상들만큼이나 생물학적으로 제약을 받는 심리적 여성상을 구축하였다. 성역할을 비역사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측정된 임상자료로부터 도출된 지배적인 성별역할을 강화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 P38

윌슨(E. O. Wilson)의 사회생물학은 인간행동에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주의적 사고를 적용함으로써 성별에 대한 전통주의적 시각을 제시하였다. 윌슨과 그 추종자들은 집단의 생존을 위해 ‘적합한‘ (adapative) 인간행위는 유전자 속에 새겨진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이런 행위에 이타주의나 충성심, 모성주의(maternalism) 같은 매우 복잡한 성향까지 포함시킨다. 이들에 따르면, 여성이 자녀를 키우고 돌보는 기능을 담당하는등 성에 바탕을 둔 노동분업을 실천하는 집단이 진화에 이로울뿐만 아니라, 이같은 행위가 우리의 유전적 유산의 일부가 되었고 그런 사회적 역할배정에 필요한 심리적·신체적 경향이 선택적으로 발달하여 유전적으로 선택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 P39

양성의 본성에 대한 엥겔스의 기본 가설은 생물학의 진화론들을 수용.
하고 있지만, 그의 큰 이점은 성적 관계를 구조화하고 정의하는 데 사회적 · 문화적 영향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다. 엥겔스는 사회관계에 대한 이론적 모형과 함께,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일부일처제가 발전의 정점에 서 있다는 양성관계에 대한 진화론을 발전시켰다. 변화하는사회관계와 성적 관계를 연결시킴으로써, 그는 전통주의자들의 생물학적 결정주의와 결별하였다. 사적 소유관계에서 출현하여 제도화된 양성간의 갈등에 주목함으로써 그는 경제·사회적 변동과 오늘날 우리가 성별관계(gender relations)라고 부르는 관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 P45

‘여성의 교환’은 그 속에서 여성이 상품화되고 ‘사물화된‘ (reified), 즉여성이 인간존재라기보다는 물건으로 생각되었던 교역의 최초 형태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여성의 교환은 여성종속의 시작을 나타낸다. 그것은 다시 남성지배를 만들어내는 성별노동분업을 강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기를 인류문화 창조 과정에서 긍정적이고 필요한 단계로 보았다. - P46

모성주의(rmaternalist) 이론은 생물학적 성차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 위에 구축되어 있다. 몇몇 최근의 이론가들이 이 입장을 수정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모성주의자들은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 위에 구축된 성별노동분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모성주의자들은 여성의 평등을 위해, 그리고 심지어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논리를 편다는 점에서전통주의자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 P49

집단 내의 여성들이 남성권력에 영향을 미치거나 견제하는 상당한 힘을 가지는 사회와 생활의 많은 혹은 몇몇 측면에서 남성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사회가 있었고, 아직도 있다. 개별여성이 그들이 대변하는 남성들의 모든 권력 혹은 거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여왕이나 통치자와 같이 그들의 대역으로 행동하는 사회도 존재하고 또 역사적으로존재해 왔다. 이 책에서 보여줄 것처럼, 자신의 계급 혹은 그와 유사한 위치의 남성들과 경제 정치적 권력을 공유할 가능성은 일부 상위계급 여성의 특권이었을 뿐이며 그것은 여성들을 가부장제에 더 밀접하게 예속시켰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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