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3장 - 선택의 애통함

임신한 여성을 아이의 어머니로 고정시킴으로써 임신중지는 문제적이며 해로운 것으로 관철시키는 입장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다양한 담론장을 가로질러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 감정이 중요한 까닭은 임신한 여성을 이미 자궁 안에서부터 자율적인 ‘아이’의 어머니로 만들고, 임신중지를 여성에게 도덕적으로 문제적이며 해로운 것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반임신중지의 수사가 숨어들어 그 규범적 효과를 증폭시킨 강력한 수단이다. 이때 정치는, 임신중지에 무엇이 뒤따르며 여성이 어떻게 임신중지를 경험하는지를 말해 주는 진실로 둔갑한다.

임신을 바란 여성은 모성적 정체성을 갖고서 미래의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유산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원치 않은 임신을 자발적으로 끝낸 여성의 경험과 매우 다르다.

임신중지 법이 자유화되기 전에는,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신체적으로 해를 끼친다는 문화적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임신중지 이후 재생산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전부 임신중지 탓으로 돌렸다. 바버라 베어드는 이런 유의 경험을 ‘체현된 일탈’이라 불렀다. 이는 "일탈적인 사회적 행위가 신체의 물성으로 나타난다는 (···) 역사적ㆍ문화적으로 구체화된 신념"을 일컫는다.

연구자들은 임신중지가 단기적ㆍ장기적으로 여성에게 불가피하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보다 대중적인 포럼에서 임신중지 심리적 영향은 계속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임신중지의 심리화는 임신중지를 임신한 여성의 건강이나 심리적 복지 차원에서 바라보는 법에서 점차 뚜렷해졌다.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긴다는 주장은,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심리적ㆍ감정적으로 이로울 수 있다는, 법으로 공식화된 주장과 부딪혔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의 반임신중지 운동에서는 임신중지의 심리적ㆍ감정적 효과를 둘러싼 여러 주장을 PAS라는 진단명으로 집약했다. PAS는 1988년 WEBA와 RTL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반임신중지 커뮤니티에서 공동 컨퍼런스를 조직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여성의 심리적 복지를 근거로 임신중지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1980년대 초 ‘여성중심적’ 반임신중지 활동 단체가 만들어지며 탄력을 받았다. ‘임신중지 피해자Victims of Abortion’와 WEBA Women Exploited by Abortion(임신중지로 착취당한 여성)가 여기 들어간다. 미국 WEBA의 창립자가 1983년 대회를 연 뒤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RTL 구성원들이 WEBA를 설립했다. WEBA의 목표는, "임신중지가 산 사람을 죽인다는 진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기 아이를 죽게 한 여성의 마음에 트라우마를 남긴다는 진실"에 관하여 ‘침묵의 공모’를 끝낸다는 것이었다. WEBA 회원들은 임신중지를 겪었다고 주장하며, 개인적 경험에 의거해 반임신중지 정치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거기 있었다"고 계속 강조했다.

1991년 WEBA는 WHBA로 단체명을 바꿨다. 즉 ‘임신중지로 착취당한exploited 여성’에서 ‘임신중지로 상처 입은hurt 여성’이 된 것이다. 많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반드시 그 뒤에 애통함을 느끼게 된다는 전제에서였다.

반임신중지 정치는 정부의 재정 지원과 공동체의 공감을 얻었고, 점점 더 많은 단체가 여성의 임신중지 접근권을 제한하겠다는 의제를 숨긴 채 등장했다. RTL의 태아중심 정치는 단체명에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WHBA가 초기에 세웠던, 태아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목표는 임신중지 여성에 대한 관심 뒤로 점점 숨어들었다. 그러나 WHBA는 태아중심적 의제를 겨우 감췄을 뿐이다. 아이와 엄마의 이미지는 단체 뉴스레터 곳곳에 가득했다.

‘진정한 선택Real Choices’은 2007년 설립된 반임신중지 단체의 이름이다. 이 단체는 자신들이 "직업교육과 훈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이지 "로비스트나 활동가 집단이 아니"라며, "종교나 정치적 연결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단체가 표방하는 중립성은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미치는 끔찍한 효과에 대한 메시지를 승인한다. 이런 식으로 여성에게 ‘진정한 지지와 진정한 선택’을 제공한다는 이른바 ‘진정한 정보’가 구성된다.

반임신중지 활동가들은 임신중지를 다시 범죄화해 여성의 선택을 막는 대신, 임신중지를 더 제약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법적 제약이 여성에게 ‘정보를 갖춘’ ‘진정한’ 선택을 가능케 하리라는 전제에서였다. 예를 들어 ‘고지된 동의informed consent’에 관한 법은, 임신중지 관련해 다퉈 볼 심리적ㆍ신체적 위험성을 의사가 여성에게 경고할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2017년 7월, 미국 35개 주에서 여성이 임신중지 전 상담을 받도록 의무화했다. 그 가운데 29개 주에서 상담자가 여성에게 제공할 정보의 내용을 구체화했으며, 27개 주에서 상담과 임신중지 절차 사이의 시차를 명시했다. 시차는 대개 24시간이었다. 또 25개 주에서 여성이 임신중지의 위험에 대한 정보를 받게 했는데, 여기에는 의료적으로 부정확한 정보가 포함되었다. 이를테면 임신중지가 이후 임신 가능성에 미치는 영향(4개 주), 유방암에 미치는 영향(5개 주), 그리고 여기서 가장 유의미한 증상인, 부정적인 감정적 영향(6개 주) 등이었다. 이제는 많은 주에서 여성들에게 배아나 태아의 초음파를 보게끔 하며, 2개 주에서는 의사가 초음파에서 무엇이 보이는지를 설명해야 한다.이런 법은 여성이 임신중지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배아/태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권리’가 있다는 구실로 정당화된다.

임신중지 결정 과정에 그 결과를 비롯한 정보가 갖춰져야 한다는 주장은 비교적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새로운 방식의 가부장주의를 만들어 낸다. ‘고지된 동의’에 관한 법은 이미 의료 행위를 통제하고 있으며, 임신중지는 의료 절차에 추가 단서가 붙는 매우 드문 경우다. 여성이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전제는 여성을 취약하고, 약하고, 착취당할 수 있는 잠재적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 이런 조치는 "여성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며, 여성이 임신중지를 적극적으로 바란다기보다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임신중지를 고려하는

여성은 상담을 받고 국가에서 주는 정보를 받아야 한다, 반면 임신을 지속할 여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런 식의 전제는 모성이 임신에서 문제없이 도출될 유일한 결과라는 규범적 관점을 반영하며, 이를 재차 말한다.

감정은 주체의 ‘진실’을 만들며, 주체에 깊이 내면화된 생각, 개인사, 미래를 향한 열망을 자동반사적으로 드러낸다고 흔히들 믿는다.

임신중지는 여성에게 감정이나 정신건강 면에서 예측할 만한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앞서 유산의 애통함을 연구한 학자들이 보여 주듯, 여성이 애통해하는 것은 곧 자율적 태아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전제에도 문제가 있다. 애통함이 꼭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애통함은 이상이나 신념의 상실에서도 온다. 따라서 만일 임신중지로 애통함을 경험한 여성이 있다면, 이는 임신에 대한 환상 때문일 수 있다. 그 환상에는 (어머니로서, 혹은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공동 양육자로서) 상상하던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 환상에는 여성이 태아를 자신과 분리된 존재로 그려 보았다는, 불가피하진 않은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애통함은 임신과 모성에 관해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의 결과일 수 있다.

임신중지의 애통함은 태아의 사망을 중심으로 발생하며 여성의 아이가 사망했다는 프레임으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이 경험에는 오직 하나의 각본, 하나의 설명만 제공된다. 레이스트와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은 ‘슬픔에 언어를 주는’ 대신, 슬픔에 거의 언어를 주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설명할 때, 임신중지는 "기억된 과거, 살고 있는 현재, 기대되는 미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진행 중이던 서사를 끊음으로써 자아를" 분열시키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모성은 임신중지가 끊어 놓은 자아감과 기대된 미래가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자연화된다.

과거를 떨칠 수 없는 멜랑콜리아의 속성, 또 그게 일상생활에 자꾸만 침입하는 현상은 프로이트가 정의한 트라우마와 유사하다. 그런데 멜랑콜리아가 일상적인 상실에서 비롯할 수 있는 반면, 트라우마는 대체로 "인간 경험치를 벗어난 사건"에서 비롯한다. 임신중지는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경험하는, 예외적이기보다 일상적인 사건이다.

임신중지가 본질적으로 애통하고 트라우마적이라는 설명은 다음의 순환논리를 만든다. 임신중지 여성은 태아의 어머니다, 따라서 임신중지는 본질적으로 트라우마적이다,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임신중지 여성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한쪽에는 여성의 자유에 관한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이 있다. 그 자유는 ‘선택’을 통해 활성화된다. 다른 한쪽에는 엄격히 제한된 젠더규범이 있다. 그 규범은 모성을 여성의 정박지로 고정한다. 따라서 태아중심적 애통함의 주된 기능은 ‘복구’다.

애통함은, 에릭 실의 말마따나 "아기를 낙태시키는 결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만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행동에 실패한 데 대해서도 속죄 혹은 처벌로 작동한다. 따라서 "애통해하는 임신중지 여성"은 "타락한 여성"의 현대적 각색일지 모른다.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품행이 단정치 않은 결과, 끔찍한 삶을 대가로 얻은 여성 말이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지지자들은 임신한 여성에게 태아를 ‘행복의 대상’으로 구체화하고, 태아의 생명을 임신중지 정치에서 유일하게 시급한 도덕적 이슈로 보는 관점을 강화한다. 이들은 태아중심적 애통함이 임신중지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일 뿐 아니라, 종종 단 하나의 윤리적 반응이라고 본다.

울프가 묘사한 임신중지는 PAS가 재현되는 방식과 유사한 데가 있다. 모성 욕망이 자연화되고, ‘태어나지 않은 존재’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가 되새겨지고, 추모와 기념은 임신중지를 속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1995년 나오미 울프의 기고는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에서 임신중지 경험을 성찰하고 논쟁할 기회를 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로초이스 평론가들은 울프가 임신중지를 묘사하는 방식이 윤리적ㆍ도덕적으로 의심스럽다며 강하게 반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주는 이로움을 칭송하진 않았다. 대신에 이들은 울프가 단언한, 여성이 임신중지를 애통해해야 한다는 주장과 반대로, 레슬리 캐널드의 말처럼 임신중지가 이미 그리고 피할 수 없이 ‘여성에게 크나큰 애통함과 고통’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페미니스트인 저메인 그리어와 나오미 울프가 캐널드의 『임신중지 신화』와 더불어 임신중지 이슈를 다시 꺼낸 일은, 1990년대 후반에 모성과 태아중심적 애통함이 서로를 강화하는 서사가 공적 담론과 프로초이스 정치를 지배했음을 보여 준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프로초이스와 반임신중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80년대부터 반임신중지 운동은 전략을 바꿔 태아에서 여성으로 중심을 옮겨 갔다. 그리하여 안티초이스와 프로초이스 지지자들은 계속되는 애통함과 트라우마를 임신중지의 불가피한 결과로 재현하는 데 골몰했다.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는 뚜렷한 정치 의제 없이도 지배적인 설명이 되었고, 개중엔 경험담이 많았다. 중립성을 가장해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정말로 어떠한지’를 묘사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한 것이다.

임신중지 뒤 끔찍하게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는 지난 30여 년간 신문에서 다뤄졌다. 임신중지에 대한 특정한 감정이 공론장에 할애되는 양상은 정치적 성격을 띤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단연 반임신중지 정치다.

논설에서 임신중지가 부정적 경험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에는 어떤 경우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는 함의도 있다. 그러나 임신중지에 계속 부정적 정서가 따라다니면서, ‘될 수 있다’에 깃든 불확실성은 가려졌다.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대상에게 돌리는 일은 단순히 특정 감정상태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여기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좋은가 해로운가 하는 판단이 들어 있다.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공리주의적 윤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라는 일상의 주문이 되었다.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는 2006년과 2008년 연방의회 토론과 빅토리아 주 의회 토론에서 눈에 띄는 주제였다. 법안 지지자들은 이 감정 각본을 인용해, 입법의 맥락과 별개로 여성은 임신중지가 일으킬 끔찍한 효과 때문에 그 조치를 피할 것이므로, 임신중지에 더 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통한 임신중지’와 ‘즐거운 모성’이라는 감정경제는 아이를 갖지 않은 여성을 ‘아이 없는childless’ 여성으로 부르는 식의 담론을 통해 힘을 얻는다. ‘아이로부터 자유로운childfree’이라는 대안적 명칭과 비교했을 때, ‘아이 없는’이라는 말에는 아이 없이 사는 삶이 상실과 불완전에 가깝고, 아이가 있어야 완전함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아이 없는’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붙는 형용사인데, 완전함에 관한 전제가 특별히 젠더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이로부터 자유로운’이라는 형용사는 양육할 때 생기는 시간ㆍ돈의 제약 조건을 인지하면서, 모성을 (이를테면 이전의 독립성에 대한) 상실로 다시 상상할 여지를 준다. 단언컨대 모성에 대한 후회나 상실은 사실상 입 밖에 낼 수 없는 감정이다.

임신중지를 애통해하는 여성이 후회하지 않는 여성보다 대중적 관심을 많이 받는다. 마찬가지로,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은 아이를 갈망하는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고 가임기를 마무리한 여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형이다. 생물학적으로, 그러니까 보편적이며 몰역사적으로 그려진 아이에 대한 욕망은 두 서사에 모두 힘을 싣는다.

오늘날 모성은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에게조차 여성이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모성적 행복과 임신중지의 애통함이라는 감정은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도리어 사실(수많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한다는 사실)을 이상ㆍ이데올로기(모성과 모성 욕망의 자연화)를 통해 담론적으로 복구했다. 이렇게 모성 욕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삶과 욕망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임신중지 선택의 감정경제는 임신과 임신한 주체에 대한 특정 시각에 바탕을 둔다. 그리하여 성취 혹은 파괴를 약속하며, 임신중지에 관한 선택으로써 여성에게 모성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여성은 모성적 행복이라는 환상을 벗어날 수 없다. 그 환상은 여성에게 용인되는 척도를 타인중심적 정체성과 모성중심적 열망으로 좁게 한정한다. 임신중지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하는 행위인데, 이마저 규범적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모성적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유연하고 강력한지를 보여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주 - 신연식 각본집
신연식 지음 / 시공아트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관에서 먹먹함에 한참을 머물렀던 기억이 났다. 진하게 남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인생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인다. 밤하늘의 별, 그리고 용정, 연희전문대, 교토대의 풍경들이 스친다. 2016년 혼란스러웠던 정국과 두 사람의 인생이 교차된 것은 아닌지.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8-20 10: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이 친구가 우지강변 윤동주 시비 제막식에서 시낭송을 했었어요. 일본인들 중에도 윤동주시인 좋아하시는 분들 많다고 그러더라고요. 영화 참 좋았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1:51   좋아요 3 | URL
와~ 시낭송 장면 생각하니 여러 감정이 듭니다. 설레기도 했겠지만 슬픔도 있었을 것 같아요. 네. 일본인들에게도 윤동주 시인은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5년 이후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몇 편 없는데도 이 영화는 무척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새파랑 2022-08-20 1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각본집에 손이 안가긴 하지만 이 책의 각본집은 가지고 싶네요 ^^ 오늘 중고검색 들어가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1:52   좋아요 3 | URL
ㅎㅎ 새파랑님. 각본집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신간이라 중고검색이 금방 뜰지는 모르겠네요^^; 새파랑님 get하시면 알려주세요~ㅎㅎㅎ

새파랑 2022-08-20 12:11   좋아요 3 | URL
요게 최신출간이어서 중고는 없어서 화가님께 땡투하고 새책으로 방금 구매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8-20 16:30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청아 2022-08-20 1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각본집이 나왔군요! 이 영화 보고싶었어요. 두 배우 다 연기도 매력있어서 기대됩니다.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가장 좋아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6:31   좋아요 3 | URL
미미님 이 영화를 보지 못하셨군요^^ 종종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 나왔던 것 같은데 기회 되면 보시면 좋겠네요. 두 배우 연기 모두 잘하죠^^ 각자의 매력들도 있고요. 저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랑 <병원>을 좋아해요.

scott 2022-08-22 0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윤동주의 사촌이 정말 싫었어요(중딩때 윤동주 평전 읽고 난후)


이제 미국(뉴욕)에서도 윤동주가 남긴 시들 낭송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 땅 떠날 때 오로지 윤동주 시집(한쿡말로 된 책)만 챙겨 갔어요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8-22 09:35   좋아요 2 | URL
그의 시는 아름다워서 어디에서도 통할 것 같아요^^ 이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네요.
오!!! 외국에서 읽는 윤동주 시집 남다를 것 같습니다. 향수를 채워줄 것 같기도 하고요. 평전은 담아놓았어요. 조만간 주문해야겠습니다^^*

그레이스 2022-08-22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https://youtu.be/JmA0HRUCrrs
베이스 김대영의 별헤는밤 너무 좋아요
눈물나요.

거리의화가 2022-08-22 16:4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덕분에 좋은 곡 듣게 되었습니다. 시가 그야말로 음악으로 승화된 경우군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제부터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근데 벌써 이틀이 지나다니 아쉬워지려고 한다.

그래도 다음주 월요일 하루 더 쉰다고 생각하면 괜찮다.


이틀간 딱히 많은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완전히 상반되는 책이건만 둘다 읽기는 무척 까다로운 책이다.


임신중지는 오늘로 2장까지 읽었다. 

집중력을 발휘하여 열독을 하였지만 여러 번 난관에 부딪친다.

'무아성' 같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용어들과 ALRA, WLM, RTL 등 낯선 이름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두 가지가 더 있다. 

임신과 임신중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나의 무경험적 위치, 그리고 미국, 호주, 영국 등에서 임신중지를 둘러싸고 일어난 갖은 논쟁에 대한 역사 때문인 듯하다.

그래도 1장보다는 2장이 더 읽기 수월했다. 

역시 계속 읽어가다보면 눈에 더 익겠지 생각하고 있다.


중국철학사 하는 경학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하필 시작이 음양가 사상과 역에 관련된 내용이다. 

8괘, 64괘 등 있지 않나. 나는 이게 왜 이리 눈에 안 들어오는지^^;;;

주역도 이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겠지만! 

음양의 조화를 강조하는 바가 딱히 납득이 안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인지도.



책들을 받았다. 2번에 걸쳐 받아서 이제야 인증샷을~ 참 소소한 책탑이다.



<동주>는 잠깐 훓어보면서 페이지 넘겨보다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중고 적립금 사용하려고 같이 포함시켰다. <링컨 하이웨이>가 붐을 일으켰었지만 나는 일단 이 책부터 읽어보려고 한다. 

<오랑캐의 역사>는 신간인데 작가가 항상 새로운 시선을 많이 던져주는 분이라 나오면 사모으고 있다^^

그와 더불어 <하얼빈>과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는 이번 휴가 때 읽을 계획이다^^




헤비타트에 독립운동가 후손 주거개선 프로젝트가 있어서 정기후원을 신청했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열악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하신 분들인데 그동안 정부는 이들을 위한 보상이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2-08-19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휴가 시작하셨었군요?
하루가 지면 아쉽겠지만, 책을 읽고 나면 또 뿌듯하실 것 같은 하루 하루가 되실 수도 있으시겠어요. 요즘 아침저녁으론 꽤나 선선하던데 저녁부터 본격적인 휴가 놀이? 잠깐 하시는 것도 괜찮으시겠어요ㅋㅋㅋ
맛있는 것도 남편분과 많이 잡수시고, 재충전 많이 많이 하세요^^
책탑 사진은 영롱하군요😍

거리의화가 2022-08-19 17:46   좋아요 3 | URL
네 늦은 휴가지만 어차피 어딜 갈 게 아니라서 소소하게 보내려고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많이 시원해져서 운동하기에도 좋아졌어요ㅋㅋ 옆지기는 먹는 것에 진심이라 휴가 내내 잘 챙겨먹을 듯하구요ㅎㅎㅎ

새파랑 2022-08-19 2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주> 영화 인상깊게 봤는데 책도 궁금하네요~!! 즐거운 휴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09:53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책에는 영화 대본이 들어가있고 감독의 인터뷰, 칼럼 등이 포함되어 있더군요. 스틸컷도 들어있어서 영화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조만간 한번 더 볼까 싶어요^^
휴가 잘 보내겠습니다!ㅎㅎㅎ

희선 2022-08-20 0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가군요 집에서 편안하게 책을 보시겠네요 벌써 이틀이 가다니... 쉴 때는 더 시간이 빨리 가지 않나 싶군요 책을 읽으면 더 빨리 갈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님 남은 날 편안하게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20 09:54   좋아요 1 | URL
네. 이번 휴가는 어디 가지 않고 집에서 소소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5일의 휴가 중 눈깜짝할 새 2일이 지나고 3일째가 되었네요. 시간이 후딱 갑니다ㅋㅋㅋ 남은 휴가도 알차게 보내야겠어요^^*

mini74 2022-08-20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ㅎㅎ 그 책 읽고 한동안 책상다리 유심히 봤습니다. ㅎㅎ 휴가 즐겁게 보내세요 화가님~ 전 오랑캐의 역사에 눈이 가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0 10:07   좋아요 1 | URL
ㅋㅋ 미니님^^ 모스크바의 신사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어요. 생각보다 두꺼워서 놀란ㅎㅎㅎ
오랑캐의 역사 재미날겁니다. 저는 작가님 블로그에서 글을 미리 몇 편 봤었어요. 남은 휴가 알차게 잘 보낼게요!

얄라알라 2022-08-20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임신 중지] 곧 합류하겠습니다. 꽂아두고, 눈길만 주고 있어요
정성들여 읽었던 책이지만 플친님들과 진도 맞춰 다시 읽으면 새로 배우는 게 클 것 같아 기대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6:35   좋아요 1 | URL
알라님도 시작하시는군요. 저는 역시 좀 어렵지만 그래도 읽을수록 익숙해지고는 있습니다ㅎㅎ 이번 책은 다른 분들의 소감을 통해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람돌이 2022-08-20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가가 월요일까지군요. 아 진짜 한국의 여름휴가는 너무 짧아요. 저도 예전에 중국 철학사 공부할 때 주역 나오면 뇌가 그냥 무념무상의 경지고 흘러가는.... 아 이것은 하늘의 소리구나, 어찌 인간인 내가 감히 이를 이해하려 들리오 뭐 이런 마인드로 넘겼습니다. ㅎㅎ
김기협선생 새 책이 나왔군요. 저도 이분의 해방일지와 뉴라이트 비판 같은 책들을 가지고 있는데 화가님 덕분에 새책을 놓치지않게 됐습니다. 아 그리고 저도 해비타트 후원해요. 화가님과 같은 이유로요. ^^

거리의화가 2022-08-20 21:58   좋아요 2 | URL
여름 휴가라기보다는 연차 몇개 더 쓴 휴가라고나 할까요. 눈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리네요ㅎㅎㅎ
주역 부분 빼고는 나름 재밌게 읽고 있어요. 그 부분은 저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그래야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
네. 따끈따끈한 책이에요^^ 저도 해방일지, 뉴라이트 비판으로 선생님의 책을 접했고 계속 이후에도 신간 나오면 사모으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실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오~ 해비타트 후원하시는군요. 동지가 생긴 것 같아 기분 좋습니다. 친일파 후손들은 잘만 먹고 사는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은...ㅠㅠ

레삭매냐 2022-08-20 2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랑캐의 역사 땡기네요.

<하얼빈>도 읽고 싶지만, 김훈
작가의 책은 사서 읽지 않기로
결심을 해서리... 도서관에서 빌
려서 보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1 16:36   좋아요 0 | URL
김훈 작가님 저도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안중근 관련 이야기라 궁금해져서^^;
기대하지 않고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ㅎㅎㅎ
 

임신중지 - 2장

1990년대 초부터 여러 이름난 프로초이스 활동가들이 WLM의 정치와 명확히 선을 그었다. 이들은 여성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 특히 잠재적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임신중지를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임신중지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기보다는 무아적으로 내리는 선택이며, 자기결정, 신체의 온전성, 강제된 모성 같은 개념은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관계를 왜곡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이런 프로초이스의 수사를 ‘모성적maternal’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임신중지 여성은 잠재적 아이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어머니로 그려진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대중문화에서 급속히 ‘이기적’이라는 전형성을 얻었다.

‘이기적인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전형은 오늘날 임신중지의 성격을 반복적으로 특징짓는 과정에서 구성되었다. 미국 사법부의 말을 인용하면, 임신중지는 "편의에 따른 자의적인 결정"이다. ‘편안한 임신중지’라는 관념에는 여성이 하찮은 이유 때문에 임신중지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라는 수사는 태아의 생명에 주어져야 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심지어는 칭송한다. 이는 ALRA의 운동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WLM의 젠더정치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는 여성이 몸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겪은 임신 경험을 통해, 임신을 둘러싼 선택에서 태아중심의 프레임을 뒷받침한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활동가와 학자 들은 임신중지의 도덕률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를 철저히 태아중심적 용어로 규정한다. 캐슬린 맥도널의 다음 같은 평이 전형적인 예다.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임신중지에 관한 도덕적 논의가 일어날 때 직무를 유기해 왔다. 그리고 생명권 이데올로기가 그 빈 공간을 채웠다." 결과적으로 임신중지의 도덕률을 태아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프레이밍하는 일은 반임신중지 운동에 담론상 우세한 위치를 넘겨주었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정치는 페미니즘의 급진적 젠더비평과 거리를 두는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이다. 이는 선택의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오직 모성만이 임신한 여성의 진정한 선택임을 재확인함으로써 예전의 흐름을 되풀이한다. 로절린드 길과 크리스티나 샤프 Christina Scharff 는 포스트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 ‘고려되는’ 동시에 거부당하는 (···) 동시대 문화의 커다란 부분"을 특징짓는 감수성이라고 설명한다. 포스트페미니즘은 급진적 젠더정치에 대한 적대감을 수반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단순한 백래시 이상의 것이 된다.

젊은 여성의 여성성은 백인중심주의와 이성애규범으로 아로새겨지며 성적 매력을 갖추거나 남편감을 찾는 데 집중된다. 여성들이 이렇게 짜인 규범을 따르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나 금지 탓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처럼 비친다.

탈산업 경제에서 여성 노동이 갖는 중요성과 일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은 가정주부와 생계부양자라는 고도로 젠더화된 역할이 WLM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뜻했다. 그러나 모성은 여전히 여성성의 중심에 있다. 모성적 희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행동을 통제하며, 부모됨의 문화적 의미는 젠더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서는 ‘고학력자이지만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어머니를 높이 산다. 그러나 이는 파트너가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능력이 되는 백인 중산층 엘리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여성은 양육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직업적 삶을 조정해야 한다.

부모됨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은 몹시 젠더화되었는데, 이 젠더화는 ‘선택’이라는 수사 뒤에 주로 숨겨져 있다. 선택은 왜 여성이 아이를 갖고 또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하는 패턴을 바꾸는지를 묘사하는 데 가장 자주 쓰이는 설명적 도식이다.

개인의 선택이라는 수사는 일과 가족이라는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을 다르게 위치 짓는 구조적 장벽과 문화적 규범을 은폐한다. 그런 장벽ㆍ규범에는 돌봄의 젠더화, 높은 양육비와 양육시설 부족, 성별 임금격차, 가정과 재생산 영역의 책임에 얽매이지 않은 ‘이상적인 노동자’ 모델 등이 포함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즘은 오로지 개인의 커리어 발전에 관한 운동으로 치부되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여성이 형식적 평등과 선택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즘은

여성 대부분이 갖는 모성중심의 욕망과 접속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서로 얽힌 주장을 통해 ‘엄마 전쟁 mummy wars’이라는 문화적 표현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초국적인 서사로서 미디어에 통용되었다.

여성에게 선택은 모성 아니면 커리어,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가 따라오는 일로 재현되곤 한다. 각각의 선택은 여성이 무아적 감수성에 잘 들어섰는지, 아니면 여성답지 않게 자기 본위를 앞세웠는지를 나타낸다.

임신중지의 선택 가능성은 이 전반에 걸쳐, 포스트페미니즘이 모성적 정체성을 재각인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행복은 사람이나 대상에 깃든 속성이 아니다. 행복은 확실히 행복을 줄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에게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행복의 대상은 개인이 그것을 행복으로 경험하기도 전에 ‘행복’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행복은 일종의 약속처럼 기능한다. ‘당신은 이걸 하거나 이걸 가지면 행복이 따라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주며 개인을 이끈다.

행복이라는 약속은 사회규범을 사회적 선으로, 사회ㆍ문화적 규범성을 개인의 욕망으로 바꿔 놓는다. 또한 권력의 사회적ㆍ구조적ㆍ문화적 메커니즘을 개인화하고 탈정치화한다.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에서 돌고 도는 ‘여성의 행복’이라는 규범은 아이를 여성,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가장 큰 행복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렇듯 임신한 여성에게 (담론적으로 각인된) 태아란 ‘일단의 약속’으로 채워진 환상의 인물이다.n63n 태아는 여성의 행복, 개별적 성공, 개인적 성취와 관련된다. 행복, 그리고 아이(와 태아)를 행복의 대상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을 ‘자연발달 서사’로 정렬하는 계기를 준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라는 수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행복의 대상인 자기 아이를 원하게 마련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되려는 욕망을 ‘아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이익을 위해 단념해야 한다.

여성이 임신중지라는 언뜻 역설적인 선택을 통해 모성 욕망을 표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잠재적 아이를 위해 자기 행복을 유예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 있다. 이런 판단은 모성적 행복을 인종ㆍ연령ㆍ계급 등 몇 가지 축에 따라 계층화하는 데 바탕을 둔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행복을 줄 때만 진정 행복하고 선하고(무아적이고) ‘좋은’ 사람이 된다. 선한 어머니는 사회계급이나 연령 같은 표식을 통해 다른 어머니들, 즉 어머니 될 자격이 없고, 미성숙하고, 나쁘거나 이기적인 이들과 구별된다. 여성 행복의 경제에서, 태아는 여성을 모성으로 이끄는 행복의 대상이자, ‘좋은 어머니’의 산물인 행복의 주체로 나타난다.

‘선택’이라는 수사를 통해 재생산노동과 가사노동이 개별화된다. 여기서 복지 혜택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실패자로 간주된다. 복지 혜택을 받는 어머니들에게 ‘일로 복귀하라’며 강요하는 고압적 국가정책에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맥로비는 "중산층이라는 괜찮은 위치에서는 일찍 엄마가 되지 않기를 요구한다"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젊은 여성이란 무릇 "어린 나이에는 모성을 뒤로 미뤄 둠으로써, 취업으로 얻는 경제 효과와 직업 정체성을 통해 복지 위기를 해결하는 데 기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성적 행복’의 경제는 어떻게 여성이 모성 욕망 때문에 임신중지에 이르는지를 보여 준다. 여성은 아이를 원한다. 그러나 이미 낳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장차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 필요해 보이는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임신중지를 한다.

법적 담론과 공적 담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의회 토론이 현시대의 두 가지 최고 권력을 뒷받침하는 모종의 근거에 대해 통찰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권력은 바로 사법권과 생산력이다. 사법권은 개인에게 부과되는 외부 제약으로서, 처벌의 위협을 통해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강제한다. 생산력은 규범적인 행동양식으로서, 개인이 사회적 기대와 이런 기대를 좇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게 한다.

임신중지 결정에 가해지는 제약은 여성 개인이 아니라 의료ㆍ법 등 남성이 전통적으로 지배해 온 사회제도의 통제를 (실제로는 아니더라도 형식적으로) 받는다. 법은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는 제도일 뿐 아니라, 사회의 규범적 도덕성을 규정하고 공식화한다. 따라서 의원들은 여성의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금지해야 하는지 여부를 토론하는 대신, 임신중지가 규범적이고 이상화된 세계관에 맞아떨어지는지 아닌지, 맞아떨어진다면 또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에 관심을 두곤 한다.

임신중지 관련 의회 토론을 고찰할 때는, 사실상 국가가 법으로 여성의 임신중지를 통제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 법은 임신중지의 빈도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오직 임신중지가 안전한지,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지, 이를 위해 어떤 방법을 채택할지에만 관여한다.

법안 지지자들은 이른바 ‘사회적’ 이유로 행하는 임신중지에 대해서도,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나 미래의 아이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고 보기를 고수했다. 그러면서 절박한 상황이 여성을 임신중지라는 결정으로 내몬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은 ‘절박한’ ‘심적 외상을 입히는’ ‘끔찍한’ ‘비극적인’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소름 끼치는’ ‘전혀 고려해 본 적 없고 자초하지 않은’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주로 여성을 임신중지로 모는 조건을 ‘결여’로 프레이밍했다.

국가가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중지를 강제하는 ‘문제와 우려’ 지점을 줄이겠다는 제안은, 임신한 여성 가운데서도 배아나 태아의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이 있을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는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어느 하원의원이 임신중지를 지지하며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 임신중지를 선택할 사람은 없다"라고 단언한 데서도 드러난다. 임신중지는 임신을 지속하려는 선택과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모든 여성에게 최후의 보루’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임신중지를 ‘끔찍한 일로 만들기’는 여전히 공고하다.

법안 지지자들은 여성 대다수에게 임신중지가 ‘지독히 어려운’ 결정이라고 주장하며, ‘고통’의 측면에서 접근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강제되었다’고 말할 근거로, 모성을 수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유형’의 여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십 대 여성이라든지, 아이를 기르는 데 국가의 보조가 필요한 여성의 임신중지는 극도로 가시화된다. 그에 반해 이성애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성인 중산층 여성의 임신중지는 비가시화된다.

임신중지의 법적 제약을 줄이는 데 지지를 표한 의원들은 여성을 자율적인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취약하고 무력한 상황의 피해자로 재현했다. 그런 이야기는 ALRA의 활동에 내재되었던 가부장주의와 흡사해 보인다. 이들은 여성이 임신중지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주장하며, 임신중지 선택을 정당화한다. 이 주장은 다소 역설적인데, 그때 임신중지란 선택이라기보다 필요이기 때문이다.

‘프로초이스’ 의원들은 임신중지의 원인을 외부 상황에 돌림으로써, 임신중지 여성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에 일시적으로 ‘제지된’ 상태로 재현했다. 임신중지 여성은 이상적인 상태에서 빗겨나 갈피를 잃은 존재다. "여성은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이탈할 때가 많다"거나 "이탈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정서는, 이미 ‘줄 세워진’ 질서(임신한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를 원하게 마련이라는 규범)에 임신중지 여성을 다시 들여놓는 재설정 기술이다.

반임신중지의 정치적 관점은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모성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신념에 보통 들어맞는다. 여성이 이기적인 이유로 임신중지를 한다는 법안 반대자들의 주장은 이 경향에 반하며, 오히려 모든 여성이 무아적으로 모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함의를 뒤집었다. 여성은 임신중지 지지자, 가족 구성원, 배우자에게 임신중지를 강요당한다. 여성은 임신중지라는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선택을 한다.

임신한 여성이 곧바로 임신하지 않은 몸이 되는 것, 아이가 없는 것, 혹은 더는 아이가 없는 것이 임신중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입 밖에 낼 수 없게 된다.

반대자들은 여성의 선택에 형식적 제약을 둠으로써 그 규범을 강화하려 하고, 지지자들은 여성이 이미 그리고 언제나 모성적 행복의 도식에 들어가 있으므로 제약이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지지와 반대 어느 쪽이든 모성 규범을 어기고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에 대한 처벌을 말한다. 지지자들에게 임신중지 여성은 항상 스스로를 벌주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반대자들에게 임신중지의 범죄화나 수술을 통한 임신중지는 임신중지가 쉽거나 편리하지 않음을 확실히 해 두는 조치다.

‘페미니스트’ 혹은 ‘이기적인 여성’과 ‘임신중지 여성’ 사이에 가로놓인 환유의 비탈은, 임신중지를 여성이 개인적 권력을 주장하고자 일으키는 행동으로 나타냈다. 법안 반대자 중 다수는 임신중지란 여성이 "그저 임신중지를 자기 권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여성 임파워링’이라며 비웃었다.

심지어 법안 지지자들조차 여성이 모든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극단적’인 접근이라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율성을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온건한 접근법은 이미 빅토리아 주 의회에서 논의된 법안에 명시되어 있었다. 해당 법안은 태아의 체외 생존 가능성을 기준으로 여성의 임신중지 선택권을 제한하는 내용인데, 기준선은 임신 24주였다.

유아적인 것과 성숙한 것,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은 페미니즘과 가톨릭주의를 구별짓는 명칭이었다. 그에 따라 각각은 여성을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이끄는 감정 각본에 따라 정렬되었다. 가톨릭주의에는 이 감정 각본이 공고히 뿌리내린 반면, 페미니즘은 거기서 일탈했다. 논쟁에서 ‘페미니스트’, ‘임신중지 여성’, ‘이기적인 여성’이라는 상은 전부 정서적 소외자로서, 비이성적인 존재다. 사라 아메드의 말을 빌리자면, 비이성적인 존재라 함은 이성적인 다수에게는 감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이들의 감정적 감수성이 "정서적 공동체의 경계 바깥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자기 본위의 결정을 내리는 자율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선택의 주체란 허상이다. 그런 존재는 아이돌봄자나 청소부 등 여성화된 노동자에게 외주를 주지 않고 일가족 단위 내에서 일어나는 무급 노동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때 무급 노동자도 대개 여성이며, 무아적이고 타인지향적이며 규범적인 여성성을 영구히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자유를 개인의 선택과 같게 놓을 수 있으려면, 규범적 여성성에 기본적으로 맞지 않는 자율적 주체가 필요하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모성적 행복’의 경제란, 모성이 ‘선택’을 통해 재자연화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라는 표현으로 재현되는 기술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토론에서는 ‘선택’이 임신한 여성에게 특히 강렬한 방식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열하고 또 해석한다. 이런 토론은 오늘날 규범적 여성성이라는 도식을 규명하고 질문하는 주요한 장이기도 하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정치는 태아를 임신중지 논쟁의 주체로 여기면서, 임신한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에게로 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임신을 중지할 때가 있다면, 그건 미래의 아이를 위시한 주변의 안녕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가족적 행복’의 경제는 어떤 여성이 임신중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모성 욕망을 표현한다고 볼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경제 내에서는 모성적 행복을 아이의 행복과 부합시킬 자원을 쥔 여성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모성적 행복이 사회적 선(무아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가 아이를 행복의 주체로 만들 능력이 있다고 여겨질 때만이다. 이렇게 ‘행복한 아이’를 재현함으로써 인종ㆍ계급ㆍ연령ㆍ섹슈얼리티라는 축을 따라 ‘좋은 어머니’가 만들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철학사

3장 양한 무렵의 참위와 상수학

중국의 상수학: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학설과 비슷

4장 고문경학과 양웅 왕충

전한시대 경학자들은 음양가의 말을 빌려 유가의 경전을 해석했다. 『역(易)』은 본시 시초점)에 쓰인 술수(數)의 일종이었던 만큼 그런 해석을 수용하기가 더욱 쉬웠다. 소위『역위(易緯)』가 바로 그 방향으로 『역』을 해석한 것으로서, 전한시대 중엽 이후 ‘위서(書)‘가 출현했다. 이른바 "위(緯 : 씨줄)"란 "경(經:날줄)"에 대한 말이다. 위서 외에 또 ‘참서(書)‘가 있다.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는 말한다. - P75

참이란 거짓으로 비밀스런 말을 꾸며 길흉을 예언한 것들을 말한다. 위란 경의 지류(支流)로서다른 의미로까지 부연한 것이다. - P76

이 학파의 한 철학자는 10원리를 논하여 두 항목으로 대립시켜 나열했다:
유한홀수하나오른쪽남성고요(靜)직선빛선정방(正方)
무한짝수다수왼쪽여성운동(動)곡선어둠악
장방(長方)"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 P78

그리스인이든 야만인이든 수가 10에 이르면 다시하나로 돌아감은 자연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은 피타고라스가 얻은 것이라고 인정해도 될 것 같다. 이 "삼각수"는 분명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데 그림으로 표시하면정수의 조화로 계속된다. 이 조화가 바로 "삼각수"이다. 같은 이치에 의해서 홀수의 조화를 계속한 것이 "정방수"이고 짝수의 조화를 계속한 것이 "장방수"이다. - P79

기와 형체와 바탕이 갖추어져 있으되 분리되지 않은 것이 바로 혼돈이다.
혼돈이란 만물이 서로 뒤섞여 있고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보아도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역(易)이라고했다. 역은 형체를 동반하지 않는다. - P81

사물은 개시, 장성, 종결의 3단계가 있다. 따라서 3획으로써 건(乾)을 구성했다. 건곤은 서로 어울려 생성한다. 사물에 음과 양이 있기 때문에 중복시켜6획으로써 괘를 만들었다.…………양은 전진하고 음은 퇴각한다. 따라서 양은 7, 음은 이 단)이다. 역이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될 때 합하여 15가 되는 것이 도(道)이다. 양이 7에서 9로 변하고, 음이 8에서 6으로 변하는 것 역시 합하여 15가 된다. 이처럼 단()과 변(變)의 수는 모두 동일하다. 이로부터5음(五音) 6률(六律) 7수(宿)이 생긴다. 따라서 위대한 연역의 수 50이면 변화를 완성하고 귀신도 부린다. 일(日) 십간(十干)은 5음에, 신(辰) 12는 6률에, 성(星) 28은 7숙에 상응한다. 이 50으로부터 만물은 생긴다. 공자는 "양은 3, 음은 4가 올바른 자리이다"고 말했다. - P82

공자는 말했다 : 역은 태극에서 시작한다. 태극은 둘로 나누어지므로 천지가 생겼다. 천지에 춘하추동의 구분이 있으므로 사계절이 생겼다. 사계절은각각 음양(陰陽)과 강유(剛柔)로 나누어지므로 8괘가 생겼다. 8괘가 배열되어 천지의 도가 수립되고 천둥, 바람, 물, 불, 산, 못의 상(象)이 정해져, 각자분포되어 작용을 일으킨다(用事). - P85

8괘의 기가 종결되면 사정(四正)과 사유(四維)의 분리가 명확해져 탄생, 생장, 수렴, 저장(生長收藏)의 도는 완비되어 음양의 본체가 정해지고 신명의덕이 통하여 만물은 저마다 그 유에 따라 성취된다. 이 모두가 역에 포괄된내용이니 지극하다! 역의 덕(德 : 역량)이여! - P85

공자는 말했다 : 건곤은 음양의 주인이다. 양은 해(亥)에서 개시하여 축(표)에서 모습을 갖추며, 건(乾)이 북서쪽에 자리하니 양은 미미한 기운에도시작의 기반을 둔다(祖微據始). 음은 사(巳)에서 개시하여 미(未)에서 모습을 갖추며, 바른 자리에다 기반을 두기 때문에 곤(坤)의 자리가 남서쪽에 있을 때 음은 바른 자리가 된다. (음기는 사에서 시작하여 오에서 생기고 미에서 모습을 갖추는데, 음의 도는 비하와 순종이므로 시작점에 근거함으로써감히 양과 필적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모습을 갖춘 자리에 기반을 둔다./정현) 임금의 도는 시작을 주창하는 것이고 신하의 도는 끝맺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의 자리는 해이지만 곤의 자리는 미이다. 이렇게 음양의직분을 밝히고 군신의 지위를 정했다. - P85

도는 인에서 흥하고 예에서 확립되며 의에서 다스려지고 신에서안정되며 지에서 완성된다. 이 다섯 가지는 도덕이 나뉜 것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天人之際)을 보여준다. 그것으로써 성인은 하늘의 뜻에 교통하고 인륜을 관장하고 지도(道)를 밝힌다. - P87

맹희, 초연수, 경방은 모두 이른바 음양의 재변으로써『역』을 논했다. 상세한 내용은 서로 다르기도 했겠지만 현재 책이 없으니 고증할 수 없다. 다만 그 요지는 음양가의 주장을 빌려 『역』을 해석한 것이었다. 괘기에 관한 각종 이론은 과연 『역위가 맹희와 경방의 설을 취한 것이었는지, 혹은 맹희와 경방이 『역위』의 설을 취한 것이었는지, 혹은 『역위』가 바로맹희와 경방 일파 역학자들의 저작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아무튼 그것은 전한 말기에 유행했던 일종의 상수학이었다./『신편』)일행의 설명을 보면 맹희도 감, 진, 이, 태가 사방과 사계를 각각주관하고 그 24효가 24절기를 각각 주관한다고 여겼다. - P93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그저 한 시대의 위대한 스승(大師)일 뿐이었으나, 『공양춘추』에서공자의 지위는 스승에서 왕으로 나아갔고, 참위서에서 공자는 다시왕에서 신으로 나아갔다. 각 시대사상의 변천을 여기서도 엿볼 수있다. - P105

음양가의 학설에 그러한 유폐가 있기는 했으나 중국과학의 맹아는 대체로 그 안에 있었다. 음양가의 주요 동기는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우주 만상을 포괄하고 또 그것을 설명하는 데에있었다. 비록 그 방법이 틀렸고 그 지식은 엉성했으나 우주간 여러사물을 체계화하여 우주간 여러 사물의 존재 이유(所以然)를 알려고 했으니 진실로 과학정신이 있었다. - P106

"고학"은 이른바 고문학파의 경학이다. 그것은 경을 해설할 때 위서나 참서 또는 기타 음양가의 말을 채용하지 않고 당시 "이상하고괴이한 주장"을 쓸어내고 공자를 "스승(師)"의 지위로 되돌렸다."
이런 경학자들은 실제 당시의 사상 혁명가였다. - P108

한대에 당시 정통 경학파 즉 이른바 금문경학파의 경전과그 해석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각기 그들이 보기에 공자의 정통이라고 생각되는 경전과 그 해석을 수립하게 되어, 이윽고 이른바 "고학"이 자연히 일어났다. 즉 한 시대의 사상계를 혁명할 대(大)운동은 결코 한 사람의 업적일 수 없었다.
"고학"이 유흠이 홀로 창안한 것은 아니나 유흠은 사실상 "고학"
을 제창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학"은 모두 민간에서 흥기했고 학관(學官)에 세워지지 못했다. - P109

『노자』와 『역』에서 말한 "사물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반전한다(物極則反 : 달이 차면 기운다)"는 이치를 서술한 것이다. 사실상 새로운 견해는 없지만, 당시 참서와 위가가 성행하던 무렵에 양웅이『노자』와『역』의 자연주의적 우주관과 인생관을 견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가히 혁명적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자』와 『역』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양웅은 『태현』을 지었다. - P112

『노자』에 대해서 양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자』의 도덕(道德)에 대한 논의는 받아들이지만,* 인의(仁義)를 배격하고 예절과 학문(禮學)을 멸절하는 관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가 외의 다른 학파를 논한 경우에 양웅은 이렇게 말했다.
장자와 양주는 제멋대로여서 법도가 없었고, 묵자와 안영은 검약을 중시했지만 예를 폐기했고, 신불해와 한비는 험악하여 교화를 무시했고, 추연은 허풍스럽고 진실이 없었다. - P120

사람의 성이란 선악이 뒤섞여 있다. 선한 부분을 연마하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부분을 연마하면 악한 사람이 된다. 즉 인성에 대한 맹자와 순자의 견해를 절충한 것이다. - P123

마침내 진일보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고대 사상 가운데 가장 술수(術數)와 무관한 것이 도가(道家)여서, 후한과 삼국 교체기에 도가학설 중의 자연주의가 점차 세력을 떨쳤는데, 왕충의『논형(論衡)』은 바로 도가의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당시 일반 사람들의 미신을비판한 것이었다. 『논형』은 당시의 미신적 분위기를 완전히 타파하고 일소한 업적을 세웠다. 다만 그 내용은 공격과 파괴가 많고 (대안의) 건설이 적은 만큼 그 책의 가치는 요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 - P125

자연의 운행은 만물을 낳으려고 하지 않아도 만물이 저절로 생기니 그것이 자연(自然)이다. 기를 베풀면서 만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만물이 저절로 만들어지니 그것이 무위(無爲)이다. 하늘이 자연무위(自然無爲)하다고함은 무엇인가? 기(氣)를 두고 하는 말이고, 염담(恬澹)하여 욕심이 없고 무위하여 아무 일도 꾸미지 않는다는 뜻이다. - P126

사람에게 총명함과 지혜가 있는 것은 오상의 기운(五常之氣)을 함유했기때문이고, 오상의 기운이 사람에게 존재하는 까닭은 오장(五藏)이 육체 안에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장이 상하지 않으면 사람의 지혜는 총명하고, 오장에병이 들면 사람은 혼미해지고 혼미해지면 흐리멍덩해진다. 사람이 죽어 오장이 썩어 오상이 의탁할 데가 없어지는 것은 지혜를 보관해줄 기관이 이미썩어 지혜를 생기게 하는 것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육체는 기에 의지하여 완성되고 기는 육체에 의지하여 의식을 지니거니와, 천하에 연료 없이)홀로 타는 불꽃이 없거늘 세상에 어찌 육체 없이 홀로 존재하는 정신(精 : 정령)이 있겠는가? - P132

유자들이 말한 성왕과 성왕의 정치는 사실상 일종의 이상일 뿐이고 고대의 실제 사실은 아니다. 반드시 그들이 말한 성왕이어야 비로소 성왕이라고 할 수 있다면 "성왕은 초월적이어서 본받을 수 없고", 그들이 말한 성왕의 정치라야 비로소 성왕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면
"태평성세는 절대적이어서 계승할 수 없다." - P134

실제와 서로 부합하지 않는 감각은 "허상"일 뿐이다. 따라서 감각내용은 다시 "마음의 사고"로써 분석 고찰하여 "마음의 사고"가실제와 부합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비로소 참된 사실이다. - P136

천도(天道)에는 천성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이 있다. 천성적인 것은 본디저절로 하늘과 상응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사람이 지혜와 노력을 들일 경우천성적인 것과 차이가 없게 된다. 54)용토이 역시 인성에 대한 맹자와 순자의 견해를 절충한 것이다. - P138

사람이 화를 입고 복을 받는 것은 순전히행운을 만나느냐 불행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왕충이 오로지 이점에 입각하여 입론(立論)했다면 자연주의적 우주관 및 인생관과서로 부합하고 또 사실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왕충의 입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이 만나는 행불행은 모두 "명" 속에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여겼다.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