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민음사 탐구 시리즈 4
임소연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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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 과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컴퓨터공학과, 남녀 성비는 대략 좀 더 보탠다고 해도 8:2 정도였다. 남자 과 동기들은 우스갯소리로 입학한 여자들은 꽃이라며 추켜세웠다. 그런데 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과학기술계의 성비 불균형 현상을 찾을 수 있다(P185)고 한다. 졸업 후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관련 일을 찾아 시작했는데 여자 동기들은 대부분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 동기들은 나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5~6년이 지나고 10년 쯤 지나도 이 일을 하는 나를 보고 동기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대학 졸업 후 과학기술인의 진로를 밟아 관리자 직책까지 올라가는 여성의 비율은 10.6퍼센트에 불과하다(P184).

내가 일하는 세계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이야기들한다. 실력이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관계 없다고 말한다. 나조차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는 실력만 있으면 여자든 남자든 누구라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과학자의 길을 단념하거나 힘겹게 과학자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못 본 체하는 말이다(P187)라고 말한다. 능력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과학기술계의 남녀 성비가 그렇게 꾸려진 것은 능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편견에 갇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10년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실력으로 꿇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이 견고한 성비 불균형의 바닥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뛰어난 여자들이 과학기술계에 진입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이 비율을 뒤집을 수 없다. 과학이 진정 변화하려면 잘하는 여학생이 아니라 평범한 여학생이 더 많이 필요하다(P190). 이는 내가 증인이다. 나는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어떻게 하다 보니까 공학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지금까지 일을 지속해서 하고 있다. 뛰어난 이들만 하라는 법 있나, 평범한 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뛰어난 여자들 몇 명이 과학기술계를 바꿀 수 있을까? 작가의 말처럼 평범한 다수의 여자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열어 젖혀야 견고하다고 믿는 이 과학기술계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이 만나는 여러 곳을 소개한다. 성염색체, 뇌과학, 임신, 난자 냉동, 인공지능, 로봇, 진화론, 사이보그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이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소개해본다.

성별 간의 능력이 다르다는 주장은 뇌의 성차 연구를 사용하여 논리적으로 뒷받침되어 왔다.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의 크기는 다르니 능력의 차이도 다른 것 아니냐는 오래된 주장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듯이 남성의 뇌가 여성의 뇌보다 대체로 크다는 것과 남성이 여성보다 더 똑똑하다는 주장은 빈약하다. 2020년 7월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발달 뇌 유전학자 아민 라즈나한 연구팀은 남녀 뇌의 차이를 해부학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남성의 뇌는 시각과 기억력에 관련된 부위의 뇌가 더 컸고, 여성의 뇌는 의사 결정과 미각, 자기 조절 등과 관련된 부위가 더 컸다(P40). 특정 부위가 크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뇌를 가진 사람이 관련 기능을 더 많이 학습한 증거는 되지만 해당 기능이 우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작가는 성별, 국가 등에 따른 뇌의 차이보다 호르몬 활동성, 신체 크기, 직업 등 세부 항목을 만들어 뇌의 성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P45). 성차로 구분하는 것은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새롭게 디자인하려면 '모자이크 뇌'라는 개념을 끌고 와야 한다. 실제 뇌는 남과 여가 구분되지 않고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되는 여러 특징이 중첩되며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나는 하는 행동도 모습도 남자 같아서 '선머슴' 또는 '톰보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의 범주에 갇히게 하고 젠더 정체성을 고정하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든 폭력이 될 수 있다.

젠더라는 신화는 내가 가진 시간과 돈을 어디에 투입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을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둘 것인가 등 삶의 모든 순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신화는 지금껏 과학적인 방법론과 언어로 충분히 규명되지 못했다. 젠더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화의 영역에 있는 젠더가 보다 적극적으로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모두가 각자의 모자이크 뇌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 P48

임신에 대해서 아버지의 역할에 주목하자는 저자의 말은 통쾌했다. 여성이 임신할 수 있는 시기는 20~30대로 경력이 중요시될 때이다. 30대 중반 이후 가임력이 떨어지므로 여성의 난자를 냉동하여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이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냉동 난자 산업이 등장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13~2015년 난자를 동결한 한국 여성들의 62퍼센트가 늦은 결혼 및 출산에 대비한다는 사회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P92). 같은 난자 냉동을 선택한 미국과 유럽 여성 응답자의 88퍼센트가 '현재 파트너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보통 나이가 많은 여성은 경력이 안정될 때쯤이면 좋은 파트너를 만날 확률이 낮아진다. 기껏 난자된 냉동을 꺼내쓸 수도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난자 냉동 시나리오에는 남성의 역할이 없다. 정작 냉동 난자를 써야할 때 남성의 나이에 대한 고려는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녀의 생식 세포 모두 노화의 영향을 받고 남성의 나이가 들수록 정자의 질이 떨어지고 가임력이 감소한다는 연구는 많다(P95). 임신에는 난자와 정자가 필요하듯 남성도 반드시 자기 역할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또한 여성은 임신을 한다고 해도 10개월의 시간을 태아에 좋은 것을 위해 노력하고 운동 및 식이 조절로 체중 감량을 해야 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자궁 속 태아는 어머니를 둘러싼 환경과도 연관이 있다. 빈곤한 환경이라면 부실한 영양 섭취로 제대로 된 몸 관리를 하기 어렵다. DNA 메틸화로 대표되는 후성유전학적 표지가 세대를 거쳐 전달된다는 보고가 있다. 지금까지의 사실을 보면 남성이 경험하는 환경이나 남성의 생활 습관이 정자 속 DNA의 메틸화 양상을 변화시키고, 이 변화가 수정된 배아는 물론 그 배아가 태어나 생산하는 생식 세포까지 전달된다(P83)고 한다. 아버지의 식습관이나 생애 경험이 태어날 아이의 습관이나 체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만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다. 신생 학문인 후성 유전학은 아직 밝혀지지 않거나 논쟁적인 부분이 특히 많다. 그럼에도 이 분야의 최신 연구는 유전자와 환경이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건강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지금껏 유전자를 전달하는 역할만 담당한 남성에게 태어날 아이의 건강을 위한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나의 몸은 어머니의 자궁 밖 아버지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 - P84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헤러웨이는 남성적 기술로 여겨지던 사이보그를 무조건 비판하지 않고 기술이 여성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기술을 통해 해방되기도 한다는 양면성에 주목하면서 기술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것에 여성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는 것에서 선구안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사이보그는 성형 수술의 현실로 나타난다. 성형 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부러움과 비판, 희화화의 대상이 되는데 정작 수술 이후의 효과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P164). 성형 수술 이후 변화한 몸과 적응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현실의 사이보그는 선언과 선택만으로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형 기술의 실제 작동은 다른외과 수술이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형 수술의 수행에는 의사 외에 간호 및 상담, 병원 경영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 필요하며, 수술중은 물론이고 수술전후 상담 및 회복 과정에 여러 약품과 도구, 장비, 공간 등이 동원된다. 성형 수술을 받는 여성이 사이보그가 되는 과정에는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의학 지식체계와 외모지상주의 담론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물질과 지식, 노동이 개입한다고 보아야 한다. - P162

과학기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일상에도 다양한 과학 기술이 존재한다. 자연과 사물, 육체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몸을 이해하는 것, 나를 둘러싼 세계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 나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눈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다는 것은 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배움에는 실패와 반복이 동반된다. 당연하고 익숙한 방식으로는 새로운 것을 볼 수 없다. 자연과 사물 그리고 그것들과 얽혀 있는 우리의 몸과 삶도 그럴 것이다(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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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7-10 10: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직 다 읽지못했지만 평범한 여성들도 과학기술계에 필요하다는 말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남성위주 분야도 마찬가지인것 같아요. ‘뛰어난 여성 인재가 없는 것이다‘라고들
말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닌거죠.
컴퓨터공학 전공하셨군요^^ 거리의화가님처럼 꿋꿋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갈수있는 여성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07-10 10:45   좋아요 3 | URL
저도 그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과학기술계에 몸담은 다수가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불만 자체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죠. 평범한 다수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에게도 힘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네. 계속 이 일을 하는 중입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초반에는 편견으로 참 힘들었네요. 여성들이 과학계, 공학계로 많은 이들이 나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7-10 1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떼 시절엔 정말 공학 계열은 남녀 성의 비율이 엄청나게 차이가 났었던 것 같아요. 건축, 토목 쪽은 여학생이 한, 두 명 있던 곳도 있었다는 후문도 있었습니다. 과에 한 명이었던 여학생은 적응 못하고 전과 하거나, 자퇴 했었다는 소문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을테지만, 그 시절엔 왜 평범한 여학생이 더 필요한 세상이라는 인식을 못했을까요? 어쩌면 지금도 전 과학기술 쪽 분야 종사자 여성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여성들일 것이란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기도 하구요.
저도 화가님이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하고 계신다니 그저 놀랍습니다^^
특히 IT쪽은 일단 남자들이랑 대등한 실력을 갖춰야 가능한 곳이 아닌가? 넘겨짚게 되는데, 화가님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보니, 대등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 동등하게 공부를 계속 해 왔다면, 어쩌면 어려울 것도 없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똑같은 시간의 똑같은 노력을 해 왔었다면 똑같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싶네요.
이 당연한 것을 우린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 탓에 어쩌면 지금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네요.
암튼 계속 화가님은 오래 다니셔서 기술계 전문직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어 주셨음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7-10 20:36   좋아요 2 | URL
저희 학교에도 토목공학과 있었는데 여학생 1~2명이었던 것 같아요^^; 입학할 때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애들이 하나 둘 흥미를 잃더니 졸업 이후에는 관련 일하는 애들이 없더라구요 안 그래도 여자애들은 수가 적었는데 이쪽일 아닌 곳으로 가는 경우가 훨 많았어요ㅡㅡ; 교육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요. 과학자나 공학자가 뭔가 대단하고 뛰어나야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잖아요. 박사님 이미지?ㅎㅎ 끈기가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포기하는 것이 싫은 것보다 그때는 어쨌든 빨리 돈을 벌어야했고 뭐라도 해야했어요. 나무님 응원 감사드려요*^^*

건수하 2022-07-11 11: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공학계열이시군요 저는 자연대.. 괜히 반갑습니다 ^^
저도 사두었는데 아직 펴보진 못했어요. 이번 달 내로 읽어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7-11 11:47   좋아요 2 | URL
오 수하님은 자연대생이셨군요^^
이 책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독자마다 꽂히는 파트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수하님은 어떤 부분에 꽂히실지 궁금해집니다^^

mini74 2022-07-11 12: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대학 공대나 건축계열쪽 예전엔 아예 여자화장실도 없었다고 하죠. 그래서 가정대쪽으로 막 뛰어가서 볼일 본 이야기들 읽은 적 있습니다. 평범한 여자들이 평범한 다수가 필요하다는 말 공감이 갑니다.

거리의화가 2022-07-11 12:49   좋아요 3 | URL
화장실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불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바꿀 의지는 갖지 못했어요. 소수의 여학생을 위해 화장실 늘려달라 개선해달라 하면 왜 오버냐 라는 소리 들을 것 같아서. 음~ 저조차도 갇힌 사고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ㅜㅜ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2-07-13 03: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만화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하는 게 바로 과학이다 했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기도 하네요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닌 평범한 여성이 과학을 해야 한다는 말 맞네요 앞으로는 늘면 좋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13 09:39   좋아요 2 | URL
네. 현실은 이상과는 다릅니다^^; 여전히 일상 속에서도 성평등이 잘 되지 않고 있는데 과학계라고 다를까요. 오히려 더 갈라치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ㅠㅠ 평범한 다수들이 많이 등장하길. 감사합니다.
 

~85p


읽으면서 몇 번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장면은 거창한 것이 아닌 평범한 일상. 일상을 뺏겨 버린 박탈감의 감정을 나도 느꼈다.

32페이지의 인용문. 그냥 뭉클했다.

39페이지의 인용문은 <구술로 본 한국현대사와 군>의 군인들 인터뷰가 떠올랐다. 같은 군인들인데 국방부에서 진행한 인터뷰와 시간이 흐른 뒤 민간 조사단 앞에서 진행한 인터뷰가 달랐다.

조국을 위해 충성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인이 되기 위해 며칠의 교육을 받고 나선 여성들.
남성 군인들 사이에서 비웃음과 멸시를 당하는 동안 더 악착같이 군인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걸 볼 때 이게 뭔가 싶었다.

전쟁에서 75명을 죽였다는 사람이 실린 사진 속 이미지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었다고.

전쟁은 과연 무엇인지.

전쟁이 끝난 뒤 내 어릴 적 시골마을은 여자들의 세상이었다. 여자들의 마을. 남자 목소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의 풍경은, 마을 여자들이 전쟁을 이야기하고, 흐느껴 울고, 흐느끼듯 노래하던 모습으로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P15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 P17

우리는 고통스러워할 줄도,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줄도 안다. 고통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아픔,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이다. - P20

사람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지나온 세월이 바로 자신의 삶이었으며, 이제 그 삶을 받아들이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상처받은 채 떠나고 싶지는 않은 법.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쫓기듯 황망히는 지난 삶을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속엔 자신의 이야기를들려주고 싶은 욕구뿐만 아니라 풀지 못한 삶의 비밀까지 알아내고픈 욕구도 숨어 있다. - P21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벽돌이 사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 P26

역사는 거리에 있다. 군중 속에 나는 우리 한 사람한 사람이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반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또 어떤 사람은 두세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우리는 함께 시간의 책을 써내려간다.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뉘앙스의 함정. 그래서 이 모든 진실의 외침을 명확히 들어야만한다. 이 모든 것 안에 녹아들고 이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거리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를 하나로 잘 버무려내야 한다. - P26

전쟁이라면 토할 것 같고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책을 쓸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쓰고 싶다. 장군들조차 전쟁이라면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책을⋯⋯⋯⋯남자동료들은 (여자동료들과는 달리) 그런 ‘여자‘의 논리에 기겁한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넌 전쟁터에 없었잖아‘라는 ‘남성‘의 논리를 듣게 된다. 어쩌면 내가 전쟁터에 없었던 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불같은 증오심‘은 나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될 수 있었고, 나는 군인의 관점도 남자의 관점도 아닌 보통 사람의 관점을 가지게되었으니까…… - P28

"남편은 내가 걱정됐나봐. 지금도 내가 엉뚱한 이야기를 할까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걸 해야 할 말만 해야 되는데 그러지 않을까봐서."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런 집이 한두 집이 아니었다. - P31

나는 ‘하찮은 이야기 따위는 필요 없소……… 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쓰시오.‘ 라는 추신이 덧붙여진 편지를 여러번 받았다. 하지만나에겐 바로 이 ‘하찮은 것‘들이 중요하다. 이 하찮은 것들이야말로 삶의 온기이자 빛이므로, 긴 머리 대신 뭉툭하게 잘려나간 짧은 앞머리,
뜨거운 죽냄비와 국그릇들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들을 기다리고 전투에나갔다 무사히 돌아오는 사람은 백명중에 일곱 명 정도였다는 이야기, 혹은 전쟁터에 다녀온 후로는 줄줄이 걸린 붉은 살점의 고기를 볼 수가없어서 시장에도 못 다니고, 심지어 붉은색이라면 사라사 천도 쳐다볼수가 없었다는 사연들・・・・・・ " - P32

이들은 여전히 그 시절에 애정을 느낀다. 이들에게 그 시절은단지 전쟁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젊음이었고 첫사랑이었다. - P34

내게 보내온 편지들마다 한결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당신을 만났을 때 다 털어놓지 못했어요. 그때는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는 시대가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도 침묵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당신을 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일을 입에 담아선 안 됐으니까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의사한테 들었어요. 내가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걸………… 모든 걸 털어놓고싶어요....." - P39

나도 그네들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승리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하나는 아주 멋진 얼굴,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얼굴. 하지만 둘 다 흉측한 상처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다. "육탄전에서는 상대방을 죽일 때 상대의 눈을 보게 돼. 그건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참호에 숨어서 총을 쏘는 것과는 다른 일이지." 그네들이 들려준 말이다. - P59

나를 이 집으로 이끈 건, ‘얼마 전 민스크에 있는 ‘돌격대‘라는 이름의도로장비 생산공장에서 선임회계원 마리야 이바노브나 모로조바의 은퇴식이 있었다‘는, 지역 일간지에 난 짤막한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그녀가 전쟁중에 저격병이었으며 무공훈장을 11개나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의 총에 죽어나간 적병의 수만 75명이라고도 했다. 이 여인이전쟁 때 맡았던 일과 현재의 평온한 직업을 일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봐도 그랬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보통 여인네였다. - P64

우리에게 ‘총도 쏠 줄 모르면서 어떻게 전선으로 가겠다는 건가?‘라고 묻더군. 그래서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한목소리로 ‘이미 배웠다‘고 대답했지…… 그러자 다시 ‘어디서? 어떻게 배웠다는 건가? 붕대는 감을 줄 아나?‘라고 물었어. 오호, 붕대 감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지. 군정치위원회 프로그램에서 우리 지역 의사한테 이미 배웠거든. 그제야 더이상 질문은 거두고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하더군. 게다가 우리에겐 숨겨둔 카드가 한 장 더 있었어. 그건 바로 우리가 한두 명이 아닌 무려 40명이나 된다는 점, 그뿐 아니라 모두 총을 쏠 줄 아는데다 응급처치까지 할 줄 안다는 것이었지.
마침내 ‘가서들 기다리시오. 당신들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
‘소‘라는 답을 받아냈어. 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결코 잊지 못할 거야・・・・・・ 그래, 그래... - P68

지금 기억으로 대령 이름이 브로트킨인가 그랬는데, 아무튼 지휘관인 그 대령이 우릴 보더니 버럭 화를 내는 거야. ‘성가시게 꼬맹이들이 달라붙었군. 이건 뭐, 여성무용단이라도 온 거야? 무슨 발레단이 온 거냐 말이야! 여긴 전쟁터지, 무도회장이 아니라고! - P70

우리의 사격 실력은 훌륭했어. 남자저격병들보다 더 뛰어날 정도였으니까. 최전선에서 불려와 고작 이틀간 훈련받은 게 다인 남자저격병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임무를 거뜬히 해내는걸 보고는 깜짝 놀랐지. 우리 같은 여자저격병들은 아마 평생 처음 보았을걸. 사격 시범에 이어위장술을 해 보였어………… 대령이 숲속 빈터로와서 주위를 살피며 서성이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 작은 둔덕에올라섰어. 그런데 갑자기 ‘작은 둔덕‘이 발밑에서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거야. ‘아, 대령 동지, 더이상 못 버티겠어요. 너무 무거워요.‘ 와, 웃음이터졌어! 대령은 그렇게 감쪽같은 위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고도 믿질못했어. 그러고는 ‘이제 이 꼬맹이들에 대한 내 말은 모두 취소한다‘고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령은 여전히 우리 때문에 힘들어했어……… 오래도록 우리에게 익숙해지지 못했지.. - P71

결국 그를 쓰기로 마음먹었지. 그래서 마음을 다지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사람이잖아. 비록 적이지만 저자도 사람이야.‘ 그러자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전율이 흐르면서 오한이 나기 시작했어. 무섭고………… 가끔 꿈속에서 그느낌이 되살아나.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 - P72

완전히 타버려서 새까만돌만 남아 있었지. 건물 터만 ……… 다들 근처에 가기를 꺼렸는데, 나는 왠지 가까이 가보고 싶은 거야………… 가서 보니잿더미 속에 사람 뼈들이 있고, 그 뼈들 사이로 까맣게 탄 별모양이 보이는데. 그건 거기서 불타 죽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부상병들이나포로들이었다는 의미였지. 그 일을 겪고 난 후로는 아무리 적병을 죽여도 더이상 괴롭지 않았어. 새까맣게 탄 별모양을 본 후로는…………..... - P74

나는 자다가도 ‘쿵‘ 하는 폭발음이 들리면 침대에서 뛰쳐나와 외투를 움켜쥐고는 문으로 달려갔어. 어서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으니까. 그러면 엄마가 나를 붙잡아 꼭 끌어안고는 달래주셨어.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차려. 전쟁은 끝났어. 너는 지금 집에 있잖아.‘ 엄마의 말에 정신이 들곤 했지. ‘그리고 엄마가 여기 있잖아. 엄마가 네 옆에………… 엄마는 조용조용히 말씀하셨어. 아주 작은 소리로… 큰소리로 이야기하면 내가 깜짝깜짝 놀랐거든………"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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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7-10 0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눈물이 차 올랐다!!
맞아요.
공감합니다ㅜㅜ

거리의화가 2022-07-10 07:06   좋아요 2 | URL
나무님 잘 읽고 계신가요^^ 대화문이 많아서 책이 잘 읽히기는 하는데 역시 마음이 아파오는 책입니다. 마지막까지 화이팅!
 

제1장 서론


중국철학사 사료 선택의 기준

- 토론한 내용이 철학에 존재하는 문제들의 범위 내에 있는 것

- 새로운 “소견”이 들어있는 저술

- 철학자의 소견, 즉 중심 관념이 있는 것

- 이지적 논변으로 표출되어야

- 한 철학자에 관한 서술 가운데 인격을 드러내는 것

그리스 철학자들은 철학을 대체로 다음의 세 부문으로 나누었다.
물리학(Physics), 윤리학(Ethics), 논리학(Logic).
이 시대의 물리학, 윤리학, 논리학은 그 범위가 현재 이 이름들이지칭하는 것보다 더 넓었다. 현재의 술어로는 다음의 세 부문을 포함한다.
우주론(宇宙論) - "세계에 관한 이론"의 탐구가 목적.
인간론(人生論) - "삶에 관한 이론"의 탐구가 목적.
인식론(知識論) - "지식(인식)에 관한 이론"의 탐구가 목적.
이 삼분법은 플라톤[427-347B.C.] 이후 중세 말까지 널리 유행했으며, 근대까지도 많이 사용되었다. - P3

철학이란 바로 이지적인 산물이며, 철학자는 이론을 수립하려고 할 때 반드시 논증으로써 그 성립을 증명한다. - P7

중국인은 "무엇이냐"를 중시했지 "무엇을 가졌느냐"는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을 중시하지 않았다. 중국에는 다만 과학의 싹은 있었으나 정식 과학은 없었는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 P10

중국인의 사상 속에는 한번도 "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한번도 "아"와 "비아"가 뚜렷이 분리된 적도 없었고, 따라서 인식의 문제(협의의)는 중국철학에서 한번도 큰문제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철학자는 논변하지 않으면 몰라도 변한다면 반드시 논리학을사용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중국철학자들은 대체로 주장을 수립하는 데에 진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진이른바 명가(名家)를 제외하고는, 사상과 논변의 과정 및 방법 자체를 의식적으로 문제시하거나 연구한 사람이 드물었다.
중국철학자는 또 인간사를 특별히 중시한 까닭에, 우주론에 대한 연구 역시 매우 간략했다. - P11

무릇 진정한 철학체계란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처럼 각 부분은 모두 수미일관한 일체를 이루고있다. 다시 말해서 한 그루의 나무같이 비록 가지, 잎, 뿌리, 줄기 등의 각 부분이 존재하지만 그 자체는 스스로 총체적이다. - P12

한 철학자의 철학이 철학으로 일컬어지려면 실질상의 체계는 필수적이다. 이른바 철학체계라고 할 때의 체계란 어떤 철학의 실질상의 체계를 가리킨다. - P14

과학이론은 온 세상이 인정하는 공언(言)이 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철학은 그저 한 개인의 말일 뿐이다. - P15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성정과 기질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유연한 마음(軟心:tender-minded)의 철학자들인데, 마음이 유연한 만큼 아무래도 우주간에 가치 있는 것들을 차마 무가치한 것으로 귀납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철학은 유심론적, 종교적, 자유의지론적, 일원론적이다.
또 하나는 강경한 마음(硬心: tough-minded)의 철학자들인데, 마음이 강경한 만큼 가차없이 우주간에 가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무가치한 것으로 귀납시켜버리기 때문에, 그들의 철학은 유물론적, 비종교적, 결정론적, 다원론적이다(『다원적 우주』). - P15

역사란 주인공들의 활동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 그 활동에 대한 역사가의 기술을 말하기도 한다. 만약 두 이름으로 이 두 뜻을 표시하려면, 사건 자체는 역사 혹은 객관적 역사라고 이름할 수 있고, 사건의 기술은 "쓰인 역사(寫的歷史)" 혹은 주관적 역사라고 이름할 수 있다. - P16

‘쓰인 역사‘의 목적은 서술하는 실제와의 상합을 추구하는데에 있고, 그것의 가치 역시 "신빙성"("信"字)을 얻었느냐에 달려있다. - P19

혹자는 생각하기를, 동중서나 왕양명 등이 논한 내용은 이전의 유가서적 내에 이미 그 단서가 있던 것이고 이들은 그것을 심화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니, 어떻게 자신의 철학일 수 있겠으며 언급할 만한공헌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설령 이 두 철학자가 심화 발전시킨 것에 불과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바로 그 심화 발전시킨 내용알 경시할 수 없다. 심화발전이 곧 진보이다. - P23

중국철학의 진보의 자취를 살피려면, 우선 각 시대의 자료는 바로 그 시대에 귀속시키고 아무개의 말은 바로 그 아무개에게 귀속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각 철학자의·철학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고, 중국철학의 진보 역시 뚜렷해질 것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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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화해하기

페미니즘 물리학의 도전

21세기 사이보그의 형상

인류세의 위기에 맞서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은 여성을 태어나는 존재로 여겨 온 현실을 겨냥한다. 여성이 어떤 몸으로 태어났는지 설명하는 생물학은 과학적사실을 기술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생물학이 충돌하는 진짜 이유는 생물학 지식이 성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뿌리에 인간의 가능성을 선천적 자질에제한하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페미니즘의 우려가 있다. - P128

왜 강간과 같은 성폭력 가해자는 주로 남성일까? 남성만 연구 대상으로 보는 생물학이 문제일까, 남성중심적 사회가 문제일까? 강간을 진화의 산물로 설명하는 진화생물학 연구가 있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과학이 실제 성범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우려 섞인 주장 역시 과학적 사실과 사회적 가치를 뒤섞어 보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 P130

미국진화론자 바버라 스머트는 다른 영장류 사회에 비교해 인간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성애 활동, 예를 들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성과 관계 맺는 행위를 통제하는 경향이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짚었다. 이는 인간 종이 다른 어떤종보다남성연합이 강하고 여성 연합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가설로이어진다. - P133

과거의 다윈주의 페미니스트와 가까운 오늘날의 페미니스트 진화론자들은 페미니즘과 진화론의결합이 서로에게 유용한 자원이 될 가능성을 알고있었다. 진화론이 발견한 지식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로 페미니스트 정치의 자원이 될 수 있다. 한편 페미니즘은 진화론 연구가 남녀와 인간 사회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정론의 논리에 오용되지 않도록 학계와 현실 사이의 균형을 맞춰줄 것이다. - P137

강간을 생물학의 문제로 보자는 제안은 강간을 남성의 본능으로 인정하자는 주장과 다르다.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신체적 개입을 고려하자는 주장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진화론이 강간을 정당화한다고 우려하는 이들을 사실과 가치를혼동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깎아내릴 일도 아니다. 현실은 사실과 가치가 말끔히 분리되기보다는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강간의 진화론은 성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을 보호하자는 지향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 P138

과학을 거대한 사다리에 비유하면 가장밑에는 심리학, 고고학, 인류학 등 사회 과학으로여겨지는 분과가, 그 중간즈음에는 생물학이나 의학이, 그 위로는 화학이나 지구과학이 배치될 것이다. 물리학, 천문학, 수학 등은 사다리의 꼭대기에가깝게 배치된다. 사다리 위쪽에 있는 분야는 보통사회적 영향을 덜 받는 과학이라고 간주된다. - P141

만약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보는 시각이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지 않았다면 근대 물리학은 세계를 설명하는이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참된 지식으로 수용되려면 사람들 사이에 먼저 사회적으로 익숙하고 합의된 자연의 상이 있어야 한다. - P143

덴마크 교육인류학자 카트리네 하세는 물리학의 양식이 남성화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과학의 양식이란 특정 과학을 교육받고 연구하는 데에 투여되는 감정과 상상, 경험 등을 아우른다. 물리학과 학부 교육 현장을 연구한 하세는남학생들은 수업 중 여학생들보다 수업을 방해하는 농담이나 장난을 더 많이 치지만 보통 그 행동이 용인된다고 분석했다. 교수의 의도를 거스르는남학생들은 예의 없고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질타의 대상이 되기보다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사람, 더나아가 유망한 물리학자가 될 잠재적 특성을 지닌인물로 여겨졌다. 남학생들의 돌발 행동이 물리학과의 중심 문화가 된다면 주로 수업 자체에 집중하는 여학생들은 자신의 능력과 물리학자로서의 진로를 회의하다가 학계를 떠날지 모른다. - P147

「사이보그 선언문」의 핵심 단어는 ‘모순‘이다.
해러웨이는 냉전에 복무하는 우주 전사를 상징했던 사이보그를 기술과의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는여성의 상징으로 바꿨다. 여성은 과학기술에 충실한 동시에 배반하는 모순의 전략을 택할 수 있다고본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억압 아니면 해방의 언어로 기술되어 온 여성과 기술의 경직된 관계를 전복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여성이 기술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은 기술의 소비와 생산에 대한 여성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 P157

현실의 사이보그는 선언과 선택만으로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형 기술의 실제 작동은 다른외과 수술이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형 수술의 수행에는 의사 외에 간호 및 상담, 병원 경영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 필요하며, 수술중은 물론이고 수술전후 상담 및 회복 과정에 여러 약품과 도구, 장비, 공간 등이 동원된다. 성형 수술을 받는 여성이 사이보그가 되는 과정에는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의학 지식체계와 외모지상주의 담론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물질과 지식,
노동이 개입한다고 보아야 한다. - P162

여성에게 엄격한 미의 기준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성형 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곧 동경과 비판,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작 성형 수술 논의에서 수술의 실제 효과에 대한 평가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 P163

현실의 사이보그는 기술을 통해 변화한 몸과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며 살아가야만 한다. 수술덕분에 더 예뻐졌는지, 수술결과가 내게 만족감을줬는지, 성형 후의 삶이 행복한지 등은 변화한 몸과 맺은 새로운 관계의 결과물이지 기술 자체의 결과가 아니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은 성공과 실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객관식 문제 풀이가 아니라 성공과 실패 사이를 오가는 긴 주관식 답안을 적은 과정과 비슷하다. - P164

한때 여신에 비견되는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근현대 사회를 거치면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용 가능한 대상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한편 가부장제 사회의 모성이데올로기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돌봄 등의 노동을 강요해 왔다. - P169

이것이 자연과 여성에 대한 유구한 착취의 역사다. 그러나 이는 인류와 지구를 되살릴 잠재력이 다름 아닌 여성에게 있다는 점을 역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생명력과 창조력을 빼앗긴 채 단절되었던 자연과 여성의 풍부한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면, 여성이 자연을 관리하는 주체로 나서서 우리 세상을 지속 가능하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은 20세기 말 환경 문제의 해결책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 P170

지금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 자연과여성을 동일시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을 여성의역할을 제한하고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에 복무하는 순진한 발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전통적인 여성상과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할 위험이 큰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여성의 본질을생물학적 몸에 제한하지 않고 여성의 범주를 확장하려 한 페미니즘의 기조와 맞지 않았다. 그 때문에 최근까지도 서양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핵심 논의에서 에코페미니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 P172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이 혹시 인간이 이룩한 찬란한 문명을 등지고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모호한 외침처럼 들리지 않는가? 초기 문제의식에는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서구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저히 비판한 머천트도 자연과 여성의 회복에 지역 생태 및지역민의 삶에 맞는 과학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은받아들인다. - P176

기후 위기와 감염병 대유행의 시대에 자연과인간이 공존하려면 경쟁과 지배의 전략 대신 돌봄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반다나 시바는 말했다." 경쟁과 지배를 우선하는 전략이 지질 시대를 왜곡하는 과학기술을 낳았다면, 돌봄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전략은 지구와 인류를 구출하는 과학기술을 만들 희망이다. - P180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괴짜 엔지니어가 아니라 에코페미니스트 엔지니어다. - P181

과학이 모든 지식의 꼭대기에 있다거나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믿음인 과학주의 과학만능주의는 과학이 신화화되었을 때 작동한다. 신비의 베일을 벗은 과학에는 그런 믿음이 통하지 않는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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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날만 흐리고 비는 계속 안 오는 마른 장마가 이어지고 있어서 습도도 높고 불쾌감만 높아져 기분까지 다운되는 듯하다.

그러다 그저께 퇴근길에 잠깐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드러났길래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파란 하늘과 구름들을 보니 우울감이 잠시나마 걷히는 기분이었다.

눈이라도 시원하도록 올려본다.








붙잡은 건 진작인데 한 챕터나 두 챕터씩 읽다보니 좀 걸렸다. 이제 거의 다 읽었다.


얇지만 알찬 책이다.

과학? 아니 공학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여러 모로 동감도 되고 새롭게 아는 사실들도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여성들이 평소 겪는 지적 무시와 오해하고 있는 과학이라고 믿는 가설들에 대해서 일침을 놓고 있기도 하다.

평소 과학과 친하지 않은 여성분들도 어렵지 않은 책이니 많이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도 이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이야기했다.





오늘 아침 읽은 맹자의 문장


孟子曰 欲貴者 人之同心也 人人 有貴於己者 弗思耳

맹자가 말하길 존귀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다 같은 마음이니 사람마다 자신에게 귀한 것이 있지만 그것을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통사가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되었다.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은데 읽고 나서 어떤 평가든 내려지겠지만 일단 최초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담아둔 책들.
















점심 먹고 기사 보다 깜짝 놀랐네. 아베 연설 중 피격 소식.


https://news.v.daum.net/v/2022070812363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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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08 1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눈이 시원해집니다. 여긴 막구름만 잔뜩입니다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7-08 10:27   좋아요 3 | URL
네 너무 꿉꿉하고 습도 높은 여름이네요 오늘 보니 예비 전력 수요가 얼마 남지 않아 2011년에 이어 정전될 확률이 높다고 하네요ㅡㅡ 8월도 되지 않았는데ㅎㅎ 암튼 눈이라도 시원해지셨으면 저야 감사하죠^^ 오늘은 그나마 덜 덥네요ㅠ 즐거운 하루되세요.

새파랑 2022-07-08 1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혹시


미국 사시나요? ^^ 하늘스케일이 다르네요 ~!!! 아 정말 덥습니다 ㅜㅜ

거리의화가 2022-07-08 10:36   좋아요 2 | URL
ㅋㅋ 설마요 미국 아니고 한국입니다 진짜 찰나의 파란하늘이었습니다ㅎㅎ 계속 우중충한 회색빛만 보다가 이런 하늘이 반가워 찍어봤어요^^ 덥죠. 아직 초복도 안 지났다는 게ㅠㅠ

레삭매냐 2022-07-08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하늘이 정말 푸르르네요.

일단 제가 얼마 전에 만난
<폴과 비르지니>가 반갑네요.

부오나파르테 나폴레오네의
책도 땡깁니다.

그래도 저의 원픽은 아마 에이모
토울스의 <링컨 하이웨이>가 되
지 않을까 싶네요.

거리의화가 2022-07-08 10:53   좋아요 2 | URL
네 <링컨 하이웨이> 지금 서재 지수 1등이던데요~ㅎㅎ 저는 읽을 책들이 많아서 그 책은 후순위로 밀릴 것 같아요. 요새 저런 하늘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잠시나마 기분 전환이 되었습니다^^ <폴과 비르지니>는 레삭매냐님 서재에서 보고 픽한 책이니. 저 표지가 좋아서 저 출판사걸로 사려구요ㅎㅎㅎ 즐거운 하루 되세요~

책읽는나무 2022-07-08 1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요즘 저 우영우 변호사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요. 거기서 우영우 변호사가 고래 이야기를 계속 하거든요.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고래가 바닷속을 헤엄치며 뛰어 오르는 장면들 자주 나오던데..그래서인지, 오른쪽 구름은 꼭 고래 꼬리 같다는..ㅋㅋㅋ
멋집니다. 눈이 절로 시원해져요^^
요즘 구름 참 예쁘다는 생각 많이 하고 있어요.

근데 아베 진짠가요??
순간 믿어지지 않아서~
총에 맞다니....

거리의화가 2022-07-08 14:24   좋아요 2 | URL
앗 그러고 보니 고래 모양 비슷하게 보이네요?ㅎㅎ 찍을 때도 몰랐고 찍고 나서 본 사진에서도 별 느낌 없었는데 말이죠. 저 요즘 한국 드라마는 보는 게 없는데 해방일지 이후 우영우가 떴다는 소식을 들었어요ㅋㅋ

아베는 음... 어쨌든 후속 소식이 나와봐야 알 것 같아요. 피격 당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상태는 알 수 없으니 말이죠^^

stella.K 2022-07-08 1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엇, 화가님의 사진 보다가 아베 소식 듣고 좀 놀랐네요.
그런데 이후에 드는 생각은 아주 안타깝지마는 않다는 느낌인데
나도 한쿡 사람 맞구나 싶네요. 아베가 울나라는 좀 후렸어야지요.

거리의화가 2022-07-09 21:48   좋아요 2 | URL
아베 피격 소식 듣고 양가 감정이 들더군요^^; 저는 사실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던 것 같아요. 혹시 재일조선인이나 한국인이면 어떡하지~ 관련 단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퇴근 즈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음... 앞으로 한일관계가 더 난항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래도 악화일로였는데 일본 정계도 그렇고 일본 국민들도 우경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어요-_-;
여러 가지로 올해는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전쟁이다 뭐다 해서 복잡한 사건들이 발생한 해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희선 2022-07-09 0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새 덥기는 해도 하늘이 맑고 구름도 예쁘더군요 그저께뿐 아니라 어제도 그런 생각을 했네요 구름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종류가 떠 있군요 며칠 전에 구름 보고 요새는 구름을 별로 안 봤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리의화가 님이 담은 구름 사진 멋지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09 21:50   좋아요 1 | URL
찰나의 구름과 하늘. 좋았어요^^ 점점 사진 찍는 횟수가 주는데 이렇게 가끔 만나는 풍경들이 좋습니다.
희선님께도 좋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