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 동중서와 금문경학

동중서의 성: 공자, 맹자, 순자의 설의 융합
춘추는 공자가 하늘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므로 그 뜻은 넓은 범위를 포괄. 춘추에서 추구한 학문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밝힌 것이지만 불가사의함을 구현한 것

중세와 근대의 철학은 대체로 각 시기의 경학 또는 불학에서 찾아야 한다. 중세와 근대는 각 시기마다 경학이 달랐던 만큼 상이한철학이 생겼는데, 각 시기의 철학이 달랐기 때문에 상이한 경학이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경학과 불학 내의 각 종파는 대체로 각기 그 전성기가 있었다. 고대 자학시대의 사상은 횡적인 발전이 더두드러졌다면, 중세와 근대 경학시대의 사상은 종적인 발전이 더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 P6

서양의 학설이 처음 동쪽으로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 예컨대 강유위 무리는 여전히 그것을 경학에부회하여 낡은 병에 극히 그 새로운 술을 담으려고 했으나, 낡은 병은 용량을 늘리는 일이 이미 한계에 달한 데다가 또 새 술이 아주많고 극히 새로웠기 때문에 결국 터졌던 것이다. 경학의 낡은 병이터지자 철학사의 경학시대도 끝이 났다. - P7

전한(西漢:前漢)의 경사(經師)들은 모두 음양가의 언설을채용하여 경전을 해설했다. 금문학파의 경학이 바로 그런 특색을지녔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사상은 음양가의 분위기로 가득 차있었다. 천도와 인간사는 상호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전한시대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한유(漢儒)들은 늘 재이(災異)를논했고, 임금도 재난(災)을 만나면 늘 두려워했다. - P10

음양가는 오행(五行), 사방(四方), 사계(四時), 오음(五音), 십이월(十二月), 십이율(十二律), 천간(天干), 지지(地支)"와수 등을 서로 배합하여 하나의 우주 구조를 수립했고, 음양이 또 이것들 사이에 유행하여 그 구조를 운동, 변화시켜 만물을 낳는다고여겼다. 이러한 배합은 고대의 술수 속에 이미 존재했었다. - P11

동중서가 말한 하늘은 때로는 물질지천(物質之天) 즉 땅과 상대적인 하늘을 지칭하고, 때로는 ‘지력과 의지가 있는 자연‘을 지칭한다. ‘지력과 의지가 있는 자연‘이라는 명사 자체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중서가 말한 하늘은 실제로 지력과 의지를 지니지만 인격이 있는 하느님은 아니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일컬었다. - P16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음양의 기(공기)가 항상 사람을 적시고 있는것은 물이 항상 고기를 적시고 있는 경우와 같다. 다만 기가 물과 다른 점은물은 눈에 보이지만 기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고요하다는 점이다. - P17

○ 천지의 기운은 합하여 한몸이지만, 음양으로 나뉘고 사계절로 갈리고 오행으로 배열된다. 행(行)이란 운행한다(行)는 의미이다. 저마다의 운행이 같지 않으므로 오행(五行)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오행이란 다섯 가지 기능(官)의 뜻이고, 인접한 두 행은 상생관계(相生)이고, 하나 건너 두 행은 상극관계(間相勝)이다. - P19

목-화-금-수는 사계(四時: 四季)의 기운을 각각 주재하고 흙은중앙에서 그것들을 보좌한다. 사계의 기운이 교대로 성하고 쇠하기때문에 사계의 순환과 변화가 생긴다. 사계의 기운이 교대로 성쇠하는 까닭은 음양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 P20

천지의 상징과 음양의 대응물이 항상 우리 몸에 갖추어져 있다. 몸이 하늘과 같고 또 수(數)가 서로비견되기 때문에 명(命) 역시 서로 연계된다. - P28

심리 방면을 보면, 사람의 심리에는 성(性)·정(情)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하늘의 음(陰)·양(陽)에 상당한다. - P30

동중서의 성설(性說)은 한편으로 맹자와 순자를 조화시킨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동중서 역시 사람의 바탕에는 본디 선단(善端:선의실마리)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설은 사실상 맹자의 성선설과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동중서는 성 속에 겨우 선단만 있는 까닭에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 P32

사람의 바탕 속의 선단을 발전시켜 완전한 선이 되게 하려면 여러덕목을 실행해야 한다. 그중에서 개인 윤리에 관한 덕목은 인(仁: 사랑)·의(義: 의로움)가 가장 중요하다. - P35

하늘은 사람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일을 의도하므로 왕자는 그것을 본받아 역시 사람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일을 의도한다. 이 점은 묵자의 학설과 동일한 면이 있다.
동중서의 사회철학은 빈부를 균등히 하여 "(토지)겸병의 통로를봉쇄할 것"을 강조했다. - P48

인간의행위가 합당하지 않고 이상하면 하늘도 비상한 현상을 나타낸다. 하늘이 나타낸 그 비상한 현상이 이른바 재이(災異)이다. - P50

"천인합일"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하나의 "신의 희극"이다. 이 설은 우리에게는 명확히 거짓(不眞)으로 보이지만, 요컨대 철학사상 하나의 체계적인 역사철학임에는 틀림없다. - P62

『춘추』는 동중서가 말한 "천리"를 서술한 것으로 이른바 "하늘의 미묘함을 구현한 것"이다. 그 대의로는 "십지(十指)", "오시(五始)", "삼세(三世)" 등이 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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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를 둘러싸고 이리도 많은 history가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이 책이 낯선 이유는 임신을 해본 적이 없고 임신중지를 깊이 고려해본 적이 없는 나의 위치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아직 1장이지만 호주, 미국, 영국 등 임신중지를 둘러싼 1970~80년대의 배경이 나오다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단체 이름들도 처음 안 경우도 있었다.


낯선 용어들과 이야기 때문인지 문체 자체도 잘 읽히지는 않는 느낌이다.


아주 집중하여 읽으니 그나마 읽혔는데 정리는 안 되는 것 같다.


이 문장만 기억하고 간다.

'선택'이 감정이라는 기제로 작동하여 임신중지를 단속한다는 것.

감정은 임신중지를 단속한다. ‘임신중지 금지’를 대놓고 말하지 않되, 임신중지의 경험과 그 결과라는 각본에 따라 공유된 의미에 반反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이를테면 ‘여성이 임신중지 뒤에 깊은 슬픔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임신중지는 본래 애통함과 수치를 야기하는 절차로서 자리매김한다. 이는 여성이 간절히 원한다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분명 양립하지만, 한편으로 임신중지를 하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임신한 여성이 모성에 관해 결정할 때 행사하는 자유에는 ‘선택’이라는 수사가 붙는다. 이 표면적 자유는 임신중지에 대한 확고부동한 감정 각본을 은폐한다. 임신한 여성이 겪는 감정세계에 엄격하게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선택이 가능하려면 임신중지를 합당한 선택으로 인정하고, 임신한 여성이 더 이상 임신상태를 지속하고 싶지 않을 때 일상에서 문제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임신중지가 통계상 평범한 일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규범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나라에서조차 이는 여성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몹시 고통받고 성찰한 끝에 하는 선택으로 설명된다.

임신중지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조차 피해야 할 것, 여성에게 불가피한 고통을 안기는 것으로 지목되기 일쑤다. 임신중지가 끔찍한 일로 낙인찍힐 때, 모성은 임신에서 문제없이 도출되는 유일한 산물로 그려지며, 다시금 임신중지는 비정상적이고 여성에게 해로운 선택이 되고 만다. 이와 관련한 감정의 목록이 있다.

‘서양’이나 ‘서방 영어권’은 지리적 구분에 따른 개념이 아니라 꾸준히 반복ㆍ재생산된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선택’이라는 말은, 특히 여성과 관계해 쓰일 때는 ‘서양’을 ‘나머지’와 구별된 더 우월한 개념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똑같이 경험하리라는 가정은 ‘여성’을 자연적이고 몰역사적인 주체로 구성하는 한 방편이다.

페미니즘의 접근대로라면 여성이란 생물학적으로나 신경화학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성을 묘사하는 행위 안에서 구성된다.

오늘날 임신중지와 임신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배아를 태아 혹은 생존 가능한 태아, 출생 전후의 태아, 심지어 아기와 한데 묶는다. 배아는 임신 8주차에 들어서야 태아가 되는데도 말이다.

젠더화된 여성다움부터 임신과 출산에 이르는 자연발달의 서사는, 우리의 몸ㆍ정체성과 관련된 몇 안 되는 어휘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 이 서사는 아이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갖춘 순간부터 그 아이를 이성애적 각본에 넣고, 재생산하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하며, 여성으로서 달성해야 할 규범인 도구적 공감과 봉사라는 추상적 가치를 수행하는 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여성성을 몸의 자연적인 서사 과정이라는 틀에 짜 맞춘다.

배아와 태아의 정의에는 언제나 임신한 여성이 고려돼 있다. 여성은 스스로 존재하는 몸(자율적인 주체)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태아적 모성이라는

도식에서처럼 (자율성이 제한되거나 아예 없이)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 되기도 한다. 임신중지 정치에서 젠더, 특히 모성은 중심적인 위치를 단단히 차지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재생산과 결합하고, 모성은 여성의 기준점이 되며, 임신은 어머니가 독립적 개체로서의 아이와 맺는 관계라는 것이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중요한 건 태아적 모성이 인종ㆍ계급 등을 축으로 해 여성을 ‘착하고 책임감 있는 어머니’와 ‘나쁘고 무책임한 어머니’로 구별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임신중지 여성은 자신이 배태한 배아나 태아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하며, 임신에 대해 주체로서 자기 위치를 주장한다. 따라서 임신중지라는 선택은 태아적 모성이라는 규범과 그에 따른 숱한 문화적 산물에 균열을 내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중지가 그토록 논쟁적인 사회문제가 된 것이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의 모습에는 주체인 여성, 그리고 여성의 몸과 분리되지 않은, 몸의 일부인 태아가 상호 의존적으로 맺는 관계가 틀 짜여 있다. 이는 임신한 몸을 ‘하나도 둘도 아닌’ 것으로 보는 페미니즘적 묘사에 부합한다. 임신한 몸은 경계가 분명하고 자율적인 자아를 전제하는 서방의 존재론에 정면으로 맞선다. 따라서 임신한 여성의 몸을 하나로 보든 둘로 보든 모두 잘못 표현한 셈이다. 이 몸은 하나도 둘도 아니다.

여성이 경제ㆍ사회적 조건상 양육을 할 수 있을 때라야 임신중지 역시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임신중지의 권리와 더불어 유급 양육 휴가나 국가 양육 보조금 등의 조치를 얻기 위한 싸움이 함께 가야 한다.

태아적 모성을 둘러싼 제도는, 여성이 임신에 대해 내리는 선택을 노골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그 선택에 주어진 의미를 통해 여성들에게 정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선택이라는 담론은 현시대에 임신중지를 규제하는 핵심이 되었다. 선택이 가져오는 자유라는 환영이 없다면 감정의 규범적 효과 역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란 자기 삶을 이미 한 선택과 앞으로 할 선택의 연속으로 바라보고, 그 선택에 따른 사회ㆍ경제적 결과를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책임이라는 틀 안에서 "이른바 ‘잘못 관리된 삶’은 사회ㆍ경제적 힘을 탈정치화하는 새로운 양태가 되었다."

여성은 어떤 선택의 금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을 통해 규제되며, 이 때문에 권력과 불평등이 작동하는 바는 잘 보이지 않고 분석되기 어렵다.

선택은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선택은 현대사회에서 주체가 스스로를 마치 자유로운 양 여기도록 길러 내는 규제술이기도 하다. ‘선택’의 규제 효과는 지난 40여 년에 걸쳐 우세해진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합리성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다.

임신중지에 대해 가장 자주 회자되는 말은 이 주제가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경험이며 정치적 의제라는 것이다. 임신중지가 ‘감정’의 문제임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감정’의 범주는 사실 너무 넓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를 띨 수 없고, 몹시 다양하며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감정과 그 효과를 연구할 때는 임신중지 담론에서 언급된 바 있고 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감정을 밝혀야 한다. 임신중지가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경험이라고 하면서 감정을 단지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해석하면, 임신중지 정치가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비판의 목소리로 잘 들리지 않는다. 결국 임신중지는 여성성 규범에 대한 투쟁 같은 정치적 영역에서 감정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고 마는 것이다.

감정은 주체의 속 깊은 데서 나오는 무언가로 보이고,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영향받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중지 전후로 한 가지 특정한 감정을 경험하는 여성의 묘사가, 임신중지의 ‘진실’과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의 성격ㆍ욕망을 특히 더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의 감정생활에 대해, "모든 여성이 후회하는 면이 있다, 어떤 여성에게나 임신중지는 비극이다" 같은 단언으로 일반화하는 경향은 지극히 만연하다. 이럴 때 등장하는 감정이란 임신중지 여성을 전前 문화의 일원으로 묶어 놓는다. 여성이라면 다 똑같이 임신중지를 경험하리라고 보는 것은 ‘여성’ 주체와 임신중지를 자연화ㆍ탈정치화하는 설명을 뒷받침하고 강화한다.

역사상ㆍ맥락상 구체화된 ‘감정 규칙‘이 임신중지의 경험을 좌우한다. 어떤 감정은 옹호되거나 심지어 강요되고, 어떤 감정은 단념되거나 부정당한다. 감정은 개인과 사회규범 사이에 존재하는 회로, 즉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와 소통하게 해 주는 회로라 할 수 있다.

개인은 감정을 통해 다른 개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들과 멀어진다. 타자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과정에서 규범적 신체와 공동체가 형성된다. 감정을 구체화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감정들에 이름 붙이는 과정에는, 그 감정들로 구성되는 대상을 향한 여러 방향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감정은 임신중지에 관한 공적인 발화 안에서 순환하며,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표상을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낸다.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맥락은 다양할지언정, 임신에 관한 선택과 특정 선택을 하는 여성에게 더해지는 의미는 심하게 한정되어 있다.

감정경제는 개인의 주체성과 사회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의 효과다. 감정은 ‘행위’하며, 감정의 행위는 항상 사회규범과 관련이 있고, 개인 또한 여기서 소외되거나 여기 도달하거나 제지당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임신중지는 이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재현된다. 이 말인즉슨 여성이 어떻게 이 절차를 경험할지, 또 경험해야 하는지를 예측하는 내용으로 임신중지가 재현된다는 것이다. 임신중지는 끊임없이 수치와 연결되지만, 수치(실패한 여성성의 기호)에 불을 댕긴 규범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를 역사화하고 탈자연화할 수 있다. ‘임신중지 수치’는 여성이란 정숙하게 지내다가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던 시절의 규범적 궤도에서 나왔다. 오늘날 이 수치라는 감정은, 여성이 부지런히 효과적으로 피임을 해서 자신의 생식력을 미리 조절할 것이며, 그러니 일단 임신한 태아는 모두 낳을 것이라는 기대로부터 촉발된다. 따라서 여성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원치 않은 임신을 겪은 여성은 이미 무책임한 ‘실패자’라거나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한 ‘패배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여성의 선택이라는 수사와 그것이 함의한 자유에 대한 주장 뒤에는, 모든 여성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모성을 정규화하며 태아를 자율적인 주체(임신한 여성의 아기이자 국가의 미래 시민)로 상상케 하는 프레임이 작동한다. 그리고 이 프레임 안에서, 임신과 태아의 가치는 인종이나 계급처럼 정체성을 만드는 축에 따라 달리 매겨진다.

어떤 여성은 임신하고 싶지 않았으나 임신을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을 주체로서 인지하려면, 오늘날 임신중지를 이해하는 통로가 돼 온 감정들을 끊어 내야 한다.

세 캠페인이란 ALR AAbortion Law Reform Association(임신중지법개혁연합), WLM, RTL Right to Life(생명인권그룹)로 각각 그 문제를 임신중지에 대해 시민적 자유, 젠더정치, 태아의 권리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ALRA는 급진적이고 여성중심적이던 기존의 접근을 꺾고, 불법 임신중지가 공중보건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 안전한 임신중지에서 의사가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 안전한 의료 환경에서 실시되는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 간의 불평등을 부각했다. 임신중지를 의료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은 영국의료연합 British Medical Associationn에서 공식적으로 법 개혁을 지지하며 한층 강화되었다. 그 바탕에는 의사가 의료 절차와 결정을 판단하는 데 법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임신중지에 대한 공중보건적 접근에 따라 의사들이 심신의 건강을 근거로 임신중지를 실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ALRA가 구사한 정치는 당시로서 일면 무척이나 진보적이었다. 법적 규제 없는 임신중지라는 요구는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표였다. 독신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특정한 판단을 배제한 이런 주장은 여성의 정숙함에 관한 당시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도덕률을 표방했다. 하지만 ALRA는 임신중지를 당대에 지배적이던 사회ㆍ정치적 가치들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를 주장했다. 당대의 가치를 따르자면 임신중지는 부정적인 조치였으며 임신에서 비롯하는 결과 가운데 문제없는 것은 모성이 유일했다. 임신중지는 일탈적인 선택, 그러니까 다른 피임법이 실패했을 때만 요구되는, 필요하긴 하나 바람직하지 않은 절차로 여겨졌다. 임신중지 여성은 자율적인 선택의 주체라기보다 상황의 피해자로 묘사되곤 했다.

남성중심적 재현 체계는 여성을 어머니로 정의하고, 임신중지를 타인에게 숨겨야 하는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비밀로 여기도록 했다. WAAC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도덕이 태아의 생명과 피임 실패라는 관점에 치중해 있다고 보며, 이 도덕을 "우리 여성을 패는 몽둥이"라 일컬으면서 임신중지 이슈를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힘에 관한 것’으로 재구성했다.

세계 각지의 여성해방론자들은 운동에서 임신중지에 관한 선택이 재생산에 관한 선택과 손쉽게 결부된다는 비판에 대응하고자, 임신중지권과 더불어 ‘강제 불임수술 반대’를 요구했다. 이 요구를 할 때 여성해방론자들은 선주민 여성과 유색인 여성이 제공한 초기의 교차적 접근 대신에, 가부장제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나타내던 ‘자율적 선택’과 ‘자기결정권’이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1970년대 이래, 백인 중산층 이성애규범 바깥에 있던 여성들의 요구는 포괄적인 재생산 정의라는 프레임이 한층 성장했음을 입증해 왔다. 그 목표는 여성이 아이를 언제 낳을지, 혹은 낳을지 말지를 결정할 능력과 함께 아이를 가질 능력을 보장받는 것이다.

태아를 묘사할 때는 임신한 여성에 대한 재현이 늘 따라붙는다. 태아가 자율적 주체인 아기로서 상상될 때, 임신한 여성은 이미 어머니로 전제된다. 활동가들이 태아의 생명은 임신한 여성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여성은 타인의 생명을 실은 장치가 되고 만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RTL의 정치는 극도로 태아중심적이었으며, "생명을 선택하라"라든지 "모든 임신중지는 아기를 죽인다" 같은 슬로건을 이용했다. RTL은 임신중지를 살인으로 규정하면서, 정부에 인간 생명 보호의 범위를 태아까지로 확장하라는 청원을 했다.

선택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특정하고도 다양한 정치적 열망을 담을 수 있고, 선택은 개인의 역량이 되어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 선택의 주체를 구성해 낼 수 있다.

임신중지에 대한 공적 담론에서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부재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상황을 바라보며 로절린드 페체스키가 말했듯 "페미니스트들이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임신중지는 합법적으로 접근 가능했으나, 임신중지를 프레이밍하는 방식은 설레스트 콘딧의 말을 빌리면 "‘사회적으로 선한 용서’를 내리는 문제이지 여성의 바람과 욕망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고, 임신중지 활동가와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을 수세에 몰아 각각에게 그들의 결정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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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한국사 2 - 근현대편 시민의 한국사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돌베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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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은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2권으로 나눈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분량 문제이기도 한데 기존에 한국역사연구회가 1992년도에 펴낸 한국통사 저작인 한국역사는 1권으로 나와서 아무래도 내용상 압축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시민의 한국사의 압권은 2권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말 최근까지의 한국사를 담고 있다. 게다가 보수/수구 정권의 눈치에 은폐되거나 축소된 다양한 시민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때문에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2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감탄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를 찾으시면 좋겠다.


2권의 가장 큰 장점이 최근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한국사만으로 국한하지 않고 주변국의 정세를 비롯하여 세계사의 흐름을 담고 있어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근현대사는 특히나 세계 정세를 이해하지 않으면 역사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세계사의 흐름을 같이 다루어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생각된다. 


1권에서도 돋보였지만 2권은 더욱 그러한데 경제 파트를 상당히 많이 다룬다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식민지 시기 경제 파트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데 이를 시기별로 잘 다루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침탈하고 자본을 잠식했는지 농업과 공업 등 분야별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개항기는 유럽과 미국의 세력 경쟁이 외부로 본격 격화되는 시기였다. 청일/러일 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일본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조선의 개화 세력은 일본 or 청 or 러시아에 기대면서 자력으로 근대화를 추구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청이 영국과 아편전쟁 끝에 강제적으로 조약을 맺고 일본이 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구 국가들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 논리를 바탕으로 비서구 지역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서구가 아시아와 맺은 조약의 기반은 국제법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하는 체계였다. 국제법은 1648년 30년 간의 종교전쟁을 종결짓는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유럽 기독교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한 공법에서 출발한 것이다. 18세기 이후 서구 법학자들은 비서구와 비독교 국가의 법체계에 비문명 요소가 있다 판단하고 국제법은 서구 기독교 국가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럽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국제법 논리에 따라 비서구 비독교 국가에 거주하는 자국민에게 자국법을 적용하는 치외법권을 강요한 것이다. 서구열강은 청일본과의 조약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일본이 다른 국가에 이를 동일하게 적용하면서 불평등조약체제가 성립되었다. 


개항기 대표적인 민중 항쟁이라면 동학농민전쟁을 빼놓을 수가 없다. 동학농민군은 1, 2차로 나뉘어지는데 그 성격도 다르고 전쟁의 양상과 결과도 매우 달랐다. 1차 봉기는 1894년 2월부터 6월까지 지속되었고 동학농민군은 고부와 고창을 점령하고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한 후, 정읍과 태인,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에 긴장한 민씨 정부가 청에 도움을 청하면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잇달아 파병되는 결과를 낳는다. 동학농민군은 이에 관군과 6월 11일 전주화약을 체결하며 1차 봉기가 마무리된다. 2차 봉기는 189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되었다. 동학군이 공주를 총공세 목적지로 삼자, 동학군과 일본군은 11월 말부터 공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버텼으나 12월 10일 우금치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동학농민전쟁을 공부할 때마다 민씨 일가가 청군을 부른 것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다. 남의 나라에 손벌려놓고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닌가? 조선은 속방국이므로 조선을 보호해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청-일 간 맺어진 텐진 조약으로 청의 도움은 일본까지 끌어들이게 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동학농민군 제1차 봉기)



(동학농민군 제2차 봉기)


그렇게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청을 상대로 전쟁의 빌미로 이용했고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까지 근 1년 간 청일전쟁이 진행된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청과 일본의 주도권 싸움이었던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다. 게다가 청일전쟁의 결과는 혹독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은 친일 세력에 의해 일본의 입김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후 조선의 철도 등 많은 이권은 일본이 차지하게 된다. 



(청일전쟁)


개항기 파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부가 한 여러 시도들이었다. 아관파천(1896) 이후 강제 병합(1910) 이전 시기까지의 역사는 일본에 의해 어떻게 조선이 무너져 갔는가 하는데 주로 집중하여 외국에 의해 침탈되는 이권들에 주목한다. 그러나 비록 실패는 했을지언정 백성들도 정부도 여러 시도들을 했다. 

1720년(숙종 46) 정부는 양전 제도를 170여년 동안 시행했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않은 탓에 토지와 소유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조세 부과와 징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98년 7월 전국 단위의 양전사업에 착수했다.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서울은 외국인 전문가 주도하에 서양식으로 측량하고, 지방은 각 도 단위로 양무감리와 양무위원을 중심으로 결부제에 기초하여 측량하였다. 양전은 결부제를 바탕에 둔 전통 방식에 새로운 특징을 더했다. 전답을 소유한 주인인 시주와 소작인을 함께 기재해 납세 의무자 및 지주 전호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전답 위주의 기록이었던 이전과 달리 산림과 천택, 가사 등 모든 부동산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또 실제 면적을 기입하고 절대 면적을 표시하면서 객관적 파악을 하게 하였다. 양지아문은 1899년 6월 시작되었으나 1901년 흉년이 들며 12월에 중단되었다. 그때까지 양전이 실시된 지역은 대상 지역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범위였다. 

양전 사업으로 토지와 소유자를 조사하고 양안에 기재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때까지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보호해주는 제도는 없었다. 1901년 10월 지계아문이 설치되면서 오늘날의 등기부 같은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가 비로소 마련되었다. 양안처럼 전답 뿐 아니라 산림, 천택, 가사를 포함하고 개항장 외에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한다는 조항도 들어갔다. 1902년 4월 강원도부터 시작된 지계아문이 2년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전국의 3분의 2 정도 지역에 토지 측량이 이루어졌다. 다만 1904년 1월 지계아문이 축소되면서 양전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식민지 시기는 조선 뿐 아니라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열강의 이권 다툼에 희생양이 된 시기였다. 한국은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억압과 차별, 수탈을 당하였다. 또 일본의 대륙 침략의 기지와 일본 개인과 기업 자본의 활동에 적합한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대일 종속관계가 만들어지고 민족 간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레닌이 민족자결 원칙을 담은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했고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민족자결 조항을 포함시켰다. 다만 민족자결원칙은 1919년 1차 세계대전 결과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서 패전국의 일부 식민지에 적용되는 것이었으나 식민지와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던 전 세계 약소민족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은 일본에 맞서 비밀결사운동과 실력양성운동, 사회주의운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정부 구성 등 일본의 지배 시기에 따라 다양한 노선과 방식으로 꾸준한 항쟁을 벌였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비교할 만하다고 기술한 것이 눈에 띈다. 어째서인가. 영국도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부르지 않고 본국으로 취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1919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협상 끝에 1922년 아일랜드자유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1920~1930년대 자치를 거쳐 아일랜드가 독립으로 나아간데 반해 일본은 1945년 패전 때까지 조선의 자치와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종종 대만과 조선이 비교되고는 하지만 둘은 차이가 있다. 대만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였던 데 비해 조선은 경제적 식민지 이상으로 군사적 식민지의 성격이 강했다. 대만은 중국의 하나의 지방이었다면 조선은 오랜 독립국이었기에 일본은 조선인들의 많은 저항에 부딪쳤다.


일제는 조선의 농업 구조를 변화시킨다. 1910년대 개량 농법을 보급하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식민지 지주제가 정착되었다. 이는 쌀의 공급량을 늘려 안정적으로 일본 시장에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 조선은 쌀 생산량보다 반출량이 훨씬 컸는데 수확하자마자 일본인 미곡상이 사들여 일본으로 보내버렸고 밭을 논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작물의 재배 기회까지 줄어들면서 쌀 소비량이 급감하여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지주의 경제적인 힘이 커지면서 농촌 사회는 자작농의 비율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증가하여 양극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농가 경제는 자립성이 약화되고 외부 자극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 구조로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소작관계법이나 전시 농업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식민지 지주제가 둔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그런데 일본인 지주제는 일제 말기까지 성장세를 보인 반면 한국인 지주제는 1920년대 후반 이후 위축되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 일제 말기가 되면 식량 공출, 강제 저축, 강제 동원 등이 이루어지면서 농사를 기피하는 풍조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식민지 공업화는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조선에 일본의 자본이 들어와 공장을 설립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일본 기업이 경영하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자본가들에게 조선에 투자를 종용하였다. 금융과 세제 지원을 하고 공장 건설에 필요한 용지도 싼 가격에 이용 가능하게 했으며 원료 확보에도 편의를 제공했다. 하지만 노동자 보호를 위한 보호 장치가 적용되지 않았으며 노동자가 조직화하는 것을 철저히 탄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 자본이 들어간 회사는 점차 증가하였으나 조선인 공업회사는 대부분 영세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1년 말 기준 공업 분야 회사, 개인 기업의 자산 총액 중 일본인 사업체의 비중은 91.5%를 차지한 반면 한국인 기업의 비중은 8.5%에 불과했다. 조선인 공장은 주로 화학, 식품, 방직 분야에 많았으며 주로 생필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었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대부분 소략하게 다룬다. 때문에 조선공산당 책을 따로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후 전 세계를 강타했던 사회주의를 제외하고 식민지 시기를 결코 논할 수 없다. 일제의 치안법(1925)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강력한 탄압과 제재 속에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와 정당이 지하로 숨어들어가는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신간회의 좌우합작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국내는 사실상  독립운동의 동력이 상실된다.


1945년 조선의 해방 이후 6.25 전쟁 이전까지의 시간은 한국 현대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가 내세웠던 통일 정부와 민주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했으나 남한과 북한은 미소 하에 각기 다른 정부가 세워지면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전쟁의 인적, 물적 피해가 컸으나 이념의 갈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서로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태를 만들고 말았다. 


이 책의 현대사야말로 2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수면 아래 잠자던 시민의 역사가 요동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 1980년대 전두환 정부, 1990년대 노태우,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2000년대 노무현 정부, 뒤이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최근의 문재인 정부까지 짧은 역사인데도 워낙 역동성을 지녔기에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이는 대중이자 시민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수많은 시민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현대사는 이렇게 씌여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4월 혁명, 6.3항쟁, 3선 개헌 반대운동으로 이어진 1960년대 민주화 운동이 유신 반대운동, 재야민주화운동, 학생 운동 등 197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고, 그 흐름이 전태열 열사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민중노동운동으로 결합해 1979년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은 종식되었다. 신군부의 광주민주화운동 탄압은 3S를 통해서 대중의 눈을 돌리려 했으나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조직화된 민중의 힘을 보여주었다. 2000년대 들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미선이 효순이 사건, 광우병 파동 이후 중요 이슈가 나올 때마다 민중은 촛불을 들며 거리로 나왔다. 2016~2017년은 박근혜 정권의 적폐청산을 요구하며 거리를 나선 시민들의 힘이 승리하며 촛불혁명을 만들어냈다.

문화 파트에서는 IT의 발전 이후 대중문화가 미디어를 타고 성장하면서 만들어진 한류에 대해서도 다룬다. 동아시아에 국한되어 있던 한류의 붐이 이제는 BTS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한류 팬덤과 컨텐츠의 인기를 이끌어낼 정도로 성장하였다. 

마지막에 전후 북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 사회, 외교에 대해서도 정리해놓아 북한 사회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당연하겠지만 김정은 시기까지 포함시켜놓았다. 


100여년이 넘는 역사를 500여페이지에 걸쳐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다. 파트별로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다. 결론만 보여주지 않고 맥락을 제시하고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고 보여진다. 이 책시리즈를 통해 최신의 한국통사를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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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8-19 0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나라에 사는 한사람 한사람이 역사를 만들기도 하죠 이름 없이 살다간 사람... 그때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더 앞날 사람을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정치뿐 아니라 환경도 더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인류가 지구에서 살려면... 이건 지구 전체가 생각해야 하는 거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19 09:01   좋아요 2 | URL
네. 한국의 근현대사는 한 사람 한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역사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 역사가 씌여지고 있고^^ 말씀하신대로 앞으로가 중요하죠. 정치는 엉망인데 환경은 뒷전이 가고 있네요. 이번에 겪은 물난리를 보면 환경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ㅠㅠ 지구 전체가 고민할 문제인데 고물가 및 경제 리스크로 다시 후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8-19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권 가량의 분량이었을텐데 한 권에 근현대사를 다 담았군요? 그래서 책의 페이지 수도 만만찮습니다.^^
아픔의 역사 일제시대는ㅜㅜ 간혹 이 일본 침략이 없었더라면 우린 또 어떤 근대사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친일파 없는 근대사!!!...그래서 민주화는 좀 더 일찍 시작되고 있었으려나? 싶기도 하구요.
정치적 안정이 나라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었으니...또 지금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겠죠??
하지만 코로나 상황은 똑같겠죠??ㅋㅋㅋ

거리의화가 2022-08-19 12:15   좋아요 2 | URL
네. 그래서 1, 2권으로 나눈 것이 참 다행입니다. 분량은 500여페이지 정도 되는데 저는 생각보다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고 적당하게 느껴졌어요.
일제시기는 지금도 생각하면 여러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게 하죠. 하지만 그때 국제 정세도 그렇고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친일파는 이완용처럼 나라 팔아먹을려고 작정했던 매국노도 있고 지주나 기업처럼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돈벌어먹기 힘들어서 시작한 이들도 있을 겁니다.
우여 곡절이 있었으나 그리 어둡고 암울한 시기를 지나는 와중에도 끊임없는 민주화 시도를 한 시민들의 힘으로 여기까지나마 온 것 같습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아리차 #4(고소한 맛)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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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자체만으로 풍부한 향과 음미할수록 고소한 단맛이 느껴져서 좋다. 신맛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단맛만 있으면 가볍게 느껴지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서 묵직한 바디감으로 느껴진다. 시지 않아서 아침에도 마시기 편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목넘김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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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한국사 1 - 전근대편 시민의 한국사 1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돌베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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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 한국 통사를 읽게 되었다. 그 때 읽은 책들은 이제는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변태섭의 <한국사통론>, 한영우의 <다시 찾는 우리 역사>였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역사>는 사두기만 하고 시도는 하지 못했다. 


통사는 말 그대로 한국사 전체를 개괄식으로 훓어내려간 역사다. 어떤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그릇에 담긴 내용과 서술 방식이 달라진다. <한국사신론>은 지배층의 변화에 따른 역사 서술 방식을 취했고 <한국사통론>은 사회 내부의 발전에 따른 사건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 방식을 취했다.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비교적 최근까지(박근혜 정부) 개정을 거듭하였는데 선비 정신을 중요시하는 것이 눈에 띈다. 


<시민의 한국사>는 이 책들에 더해 한국통사의 고전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1권은 전근대편으로 조선 후기 개항 이전까지를 다루었다. 통사는 개론서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서술하지는 않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런 점을 보완했다고 느껴졌다. 역사 교과서의 사건-연도 단순 나열이 아닌 사건 전후의 과정을 기술하여 맥락을 확인할 수 있게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전근대는 사진이 없던 시기이므로 유물과 유적, 과거에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 역사를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상당히 많은 유물과 유적 사진, 지도, 도표 등을 싣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또 균형 잡힌 서술 방식이 눈에 띈다. 지배층의 변화에 따른 정치사 위주의 서술은 교과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지만 애써 찾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민중들의 기록은 확인하기 어려운에 이 책은 그런 빈 곳들이 채워져 있다. 특히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의 경우 따로 정리를 하여 독자들이 확인하고 향후 검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치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경제, 문화, 사회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서술이어서 좋았다.



우리에게는 삼국 시대 이전 낙랑군의 역사가 뚜렷하지 않다. 낙랑군은 중국 왕조의 변화에 따라 변화와 부침을 겪었고 대부분 중국사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더군다나 20세기 이후 일제 식민사관에서 낙랑군을 중국의 식민지라고 강조하면서 왜곡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낙랑군은 고조선을 기반으로 성립되었고, 삼한(마한, 진한, 변한)과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낙랑군(대방군도 마찬가지)은 한이 설치한 것이지만 한국사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세기 중반의 초기 국가들)


삼국시대 중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백제다. 백제는 백제국에서 출발하였다. 사실 역사를 처음 배울 때만 해도 고구려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현재는 백제로 마음이 기울었다. 백제 멸망 후 지배층을 비롯한 상당수의 백성이 당이나 일본으로 넘어가서 자리하였고 자체 기록은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백제 기록의 상당수는 일본이나 중국사에 의존하고 있어 축소되거나 왜곡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백제의 정복 군주하면 4세기 근초고왕을 떠올릴 것이다. 이 때 영토 확장이 이루어진 것은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 영토 확장을 했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다는 것을 책에 싣고 있다.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 마한의 남은 세력을 통합해 전라도 전역을 직접 지배했다는 견해. 둘째, 전북 지역까지만 직접 지배하고, 전남 지역은 간접 지배했다는 견해, 셋째, 전남 지역은 일시적인 복속에 그쳤고, 전북 지역까지만 간접 지배했다는 견해다. 논란은 있으나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적어도 충남 지역까지 직접 지배가 이루어졌고, 마한의 남은 세력에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통일신라 시기는 왜 이리 재미가 없을까. 정치사 위주로 배워서이지 않을까 싶은데(문화 파트는 상대적으로 재미있으니 넘어가자) 정치는 전제왕권 강화, 왕위 다툼 이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래도 책에서 경덕왕 이후 혼란스러운 왕실의 상황을 2~3페이지에 걸쳐 잘 소개해두고 있다. 이런 정리가 없으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을 뒤져봐야 하는 일이 생긴다. 물론 상세한 확인을 위해서는 기록을 뒤져봐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겠다. 


한편 통일신라와 함께 나란히 했던 발해가 있다. 기억나시는지. 발해는 고왕(대조영)-무왕-문왕-선왕 이 네 명의 왕을 제외하고는 기억에 없다. 문왕과 선왕 사이 25년간 6명의 왕이 교체되는 내분이 있었다. 그만큼 왕실은 혼란스러웠고 지방에 미치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심지어 백두산 폭발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 하지만 이런 내분기가 있었고 9세기 후반이 되면 동아시아가 요동치면서 정세가 혼란스러워진다. 중국은 5대 10국이 들어서며 혼란스러웠고 거란족이 부족을 통일하고 요를 세운다. 발해는 요의 성장에 따른 전략 변화, 기동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이는 내부적인 요인이 컸다. 발해는 요와는 한 차례 밖에 교섭하지 않으면서 중국 왕조와는 지속적인 친선 관계를 가졌다. 발해의 통제하에 있던 보로국(한반도 북부에 있던 여진의 소국)과 흑수, 달고(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말갈족 중 하나) 등이 독자적으로 당이나 신라 및 고려와 교섭하면서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발해의 지배층조차 백성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9세기 발해의 영역)


전근대 역사 중 가장 흥미로운 국가가 있다면 역시 고려다. 중국과 만주의 영역에서 많은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고려는 500년 가까이 왕조를 꿋꿋이 지켜낸 나라다. 11세기 거란, 12세기 여진, 13세기 몽골, 14세기 홍건적과 왜구까지 쉴 틈없는 외적에 대한 고려의 대처는 놀랍기만 하다. 이 중 가장 어려운 적은 역시 몽골이었을 것이다. 몽골의 항쟁은 총 70여년 간 이어졌는데 정권의 주체가 무신으로 변화되는 혼란 속에서 일어났고 정부군의 항쟁 뿐 아니라 곳곳에서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삼별초의 항쟁은 진도에서 제주도까지 옮겨가며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는 등 많은 피해가 있었다. 내가 고려를 좋아하는 것은 사회의 유연성 때문일 것이다. 유연한 외교와 사회 구조 등 여러 모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부계 위주의 가족 구조가 아닌 양가의 혈연의식에 기반한 가족친족 구조이기에 남편과 아내는 각자 자신의 혈연을 중심에 두고 상대의 혈연 이익도 존중하였다. 아들과 딸은 성별과 사회적 역할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가족 내에서는 동등한 지분을 지녔다는 것이 눈에 띈다. 



(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 및 피해)


조선은 양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국가다. 16세기 사림 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도전이 설계한 대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건강한 정치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과학 기술과 상공업에 대한 천대도 심하지 않았다. 사림 집권 이후 붕당이 심화되고 유교 중심의 국가가 되면서 사회의 폐쇄성이 짙어졌다. 사림의 중심 기관인 서원은 향교와 달리 양반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서원의 원생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뽑았기에 양반들은 더 많은 서원을 건립하고자 했고 집안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조상을 모시는 문중서원을 세우는 경우도 많아졌다. 조선 후기 양반들은 증가했으나 자리는 정해져 있었으므로 직함 없이 일생을 고향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양반의 지위로 군역을 면제 받으면서 양반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향교와 서원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 시기인 영/정조 시대를 지나고 세도정치기가 오면 부패와 학정으로 민란이 발생했다는 것으로만 기억하기 쉽다. 하지만 순조나 헌종 시기 국왕은 왕권 회복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순조는 만기요람을 편찬하여 국정 운영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고 헌종은 총융청을 총위영으로 바꾸면서 군사력을 확보하려고 했다. 물론 이 때 삼정의 문란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이들의 의지력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다. 삼정의 문란은 국가 재정 운영 방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지방재정 운영의 자율성이 확대되면서 심해진 탓이 컸다. 

조선 후기가 되면 강력했던 신분제에 변화가 생긴다. 양반이 분화되고 중인과 평민이 성장하며 노비가 급감한다. 개항기 이전 무렵이 되면 양반이 70%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하였으나 대부분이 세력 없는 지방 양반인 향반에 머물렀고 일부는 몰락한 잔반으로 소작이나 수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평민 중 일부는 상공업의 발전으로 부를 축적하여 양반의 위세를 능가하게 되었고 납속책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의 족보를 매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평민과 양반 사이의 간극은 좁아지게 된다. 


전근대 시기 답게 왕위계보도를 첨부해 놓았고 자료의 출처, 참고문헌, 찾아보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그리고 경제 파트를 많이 다루고 있어 도움이 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데 늘 정치나 문화 파트에 밀려 소홀한 경우가 많다. 민란의 대부분은 경제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를 놓치면 역사의 흐름 중 큰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단 한가지 이 책의 아쉬움은 책의 재질이다. 무광이어서 흠집에 민감한 듯하다. 책을 험하게 보는 나는 벌써 여러 군데 찍히고 긁혔다. 코팅을 하거나 유광 재질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이 책을 접한 소감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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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8-17 1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고민중이었는데 이러히게 딱 올려주시니 ㅎㅎㅎ 추천사가 좋더라고요 제목도 좋고..그러고보면 발해는 교과서에서도 네 명의 왕만 배운거 같아요. 낙랑은 낙랑공주? 맞나요 ~~

거리의화가 2022-08-17 17:42   좋아요 2 | URL
오 미니님 고민중이신 책이었군요^^ 제 리뷰가 추천에 도움이 되시면 좋겠네요^^*
ㅋㅋ 발해 진짜 네 명의 왕밖에 모르겠죠. 너무 간단하게 다뤄서 아쉽습니다. 고려 때 발해의 역사를 정리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두고 두고 아쉬워요. 낙랑은 더 정보가 없고요ㅠㅠ

바람돌이 2022-08-17 21:24   좋아요 3 | URL
낙랑공주의 낙랑에 대해서는 현재 통설이 없는 상태입니다. 한사군의 그 낙랑이라는 주장도 있고, 당시 고구려 주변의 별도로 있던 소국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저는 전자일거같은데 모르죠. ㅎㅎ
낙랑이 중국 한나라가 세운 일종의 점령군이었다보니 한국 고대사에서는 이 부분을 얼버무리고 잘 넘어갑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08-18 09:45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낙랑 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죠. 정설이 없다보니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다양한 가설을 소개해준다면 좋을텐데 그부분이 아쉽더라구요.

책읽는나무 2022-08-17 23: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해 땅은 보면 볼수록 위대합니다.
넓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지도를 보면 매번 놀랍니다^^
저렇게 넓고 활달한 나라였었는데 참 애통합니다.
낙랑이 한사군의 낙랑일 수도 있었다구요?
저는 고구려 땅 옆의 옥저 동예랑 같은 나라인 줄 알았는데 아녔군요? 아...그래서 낙랑군은 옥저와 동예에 비해 자세한 설명이 없었던 건가 봅니다. 위치상으로 중국이 가깝긴 합니다.
이 한 권의 책이 조선까지 역사를 아우르는군요.
경제사까지 다룬다니 저도 조금 땡기네요^^

거리의화가 2022-08-18 06:27   좋아요 3 | URL
그쵸. 저도 발해땅을 보고 나면 한반도 너머의 땅을 떠올리게 됩니다. 만주땅은 독립운동 장소로도 쓰여서인지 더 남다른 것 같아요.
낙랑군은 여전히 미지수의 나라입니다. 많은 가설들이 존재해서 어느 게 맞는지 정확하지가 않아요. 말씀하신대로 자세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것 같아요. 경제도 다루니 조선 후기 같은 경우는 지금 읽는 토지하고도 연결되더라구요. 경제를 잘 모르지만 역사 속 경제는 더 열심히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scott 2022-08-18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양 학자들 중 몽골 제국 연구자들에 의하면 제국을 점령하는데 가장 용맹하게 싸웠던 장군들이 고려 출신이나 후예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일명 현재 ~탄으로 끝나는 영토 지역을 정복 합병 통치 하기도 했고 유라시아 전역을 누볐고 백제 후예들은 일본땅으로 아주 많이 끌려 갔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18 09:38   좋아요 2 | URL
몽골도 고려가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였을 겁니다. 고려인들의 투지와 항전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게만 느껴지는 듯합니다. 100년마다 새로운 적과 싸운다는 게 어찌 가능한지 모르겠어요ㅠㅠ 사실상 고려 정권 내내 외적이 침입한건데 말이죠.
일본에 건너한 백제의 후예들이 많이 남아 있죠. 지금도 그들은 백제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하더라구요.

희선 2022-08-18 0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낙랑군이 있었군요 낙랑 하면 낙랑공주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이 낙랑공주는 나중 낙랑인가 봅니다 고구려가 멸망시켰다는 말이 있는 걸 보니... 조선이 오백년 이어졌다고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고려도 다르지 않더군요 고려는 여자도 남자도 살기에 좀 나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조선시대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18 09:42   좋아요 1 | URL
희선님. 고려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참 오래간 국가죠. 주변국들의 역사를 봐도 이리 오래 정권을 끈 역사가 드문데 말입니다^^
고려는 조선에 비해서 가족 안에서는 남녀가 평등했기 때문에 여성도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있는 사회였던 것 같아요. 조선이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많이 후퇴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이 부분에서는 박한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다락방 2022-08-18 09: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역사라면 전혀 모르는데 이걸로 시작해야겠어요. 덕분에 저도 도전해보겠습니다. 불끈!!

거리의화가 2022-08-18 09:44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어느 분야든 처음 시작은 어렵지만 조금씩 읽다보면 들어오는 것들이 많아지더군요. 저도 그랬고요. 이 책 저는 참 좋았어요. 생각보다 상세히 적혀 있어서 참고하기에도 좋은 책이었습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