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부터 여러 이름난 프로초이스 활동가들이 WLM의 정치와 명확히 선을 그었다. 이들은 여성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 특히 잠재적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임신중지를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임신중지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기보다는 무아적으로 내리는 선택이며, 자기결정, 신체의 온전성, 강제된 모성 같은 개념은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관계를 왜곡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이런 프로초이스의 수사를 ‘모성적maternal’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임신중지 여성은 잠재적 아이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어머니로 그려진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대중문화에서 급속히 ‘이기적’이라는 전형성을 얻었다.
‘이기적인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전형은 오늘날 임신중지의 성격을 반복적으로 특징짓는 과정에서 구성되었다. 미국 사법부의 말을 인용하면, 임신중지는 "편의에 따른 자의적인 결정"이다. ‘편안한 임신중지’라는 관념에는 여성이 하찮은 이유 때문에 임신중지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라는 수사는 태아의 생명에 주어져야 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심지어는 칭송한다. 이는 ALRA의 운동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WLM의 젠더정치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는 여성이 몸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겪은 임신 경험을 통해, 임신을 둘러싼 선택에서 태아중심의 프레임을 뒷받침한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활동가와 학자 들은 임신중지의 도덕률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를 철저히 태아중심적 용어로 규정한다. 캐슬린 맥도널의 다음 같은 평이 전형적인 예다.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임신중지에 관한 도덕적 논의가 일어날 때 직무를 유기해 왔다. 그리고 생명권 이데올로기가 그 빈 공간을 채웠다." 결과적으로 임신중지의 도덕률을 태아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프레이밍하는 일은 반임신중지 운동에 담론상 우세한 위치를 넘겨주었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정치는 페미니즘의 급진적 젠더비평과 거리를 두는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이다. 이는 선택의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오직 모성만이 임신한 여성의 진정한 선택임을 재확인함으로써 예전의 흐름을 되풀이한다. 로절린드 길과 크리스티나 샤프 Christina Scharff 는 포스트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 ‘고려되는’ 동시에 거부당하는 (···) 동시대 문화의 커다란 부분"을 특징짓는 감수성이라고 설명한다. 포스트페미니즘은 급진적 젠더정치에 대한 적대감을 수반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단순한 백래시 이상의 것이 된다.
젊은 여성의 여성성은 백인중심주의와 이성애규범으로 아로새겨지며 성적 매력을 갖추거나 남편감을 찾는 데 집중된다. 여성들이 이렇게 짜인 규범을 따르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나 금지 탓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처럼 비친다.
탈산업 경제에서 여성 노동이 갖는 중요성과 일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은 가정주부와 생계부양자라는 고도로 젠더화된 역할이 WLM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뜻했다. 그러나 모성은 여전히 여성성의 중심에 있다. 모성적 희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행동을 통제하며, 부모됨의 문화적 의미는 젠더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서는 ‘고학력자이지만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어머니를 높이 산다. 그러나 이는 파트너가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능력이 되는 백인 중산층 엘리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여성은 양육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직업적 삶을 조정해야 한다.
부모됨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은 몹시 젠더화되었는데, 이 젠더화는 ‘선택’이라는 수사 뒤에 주로 숨겨져 있다. 선택은 왜 여성이 아이를 갖고 또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하는 패턴을 바꾸는지를 묘사하는 데 가장 자주 쓰이는 설명적 도식이다.
개인의 선택이라는 수사는 일과 가족이라는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을 다르게 위치 짓는 구조적 장벽과 문화적 규범을 은폐한다. 그런 장벽ㆍ규범에는 돌봄의 젠더화, 높은 양육비와 양육시설 부족, 성별 임금격차, 가정과 재생산 영역의 책임에 얽매이지 않은 ‘이상적인 노동자’ 모델 등이 포함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즘은 오로지 개인의 커리어 발전에 관한 운동으로 치부되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여성이 형식적 평등과 선택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즘은
여성 대부분이 갖는 모성중심의 욕망과 접속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서로 얽힌 주장을 통해 ‘엄마 전쟁 mummy wars’이라는 문화적 표현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초국적인 서사로서 미디어에 통용되었다.
여성에게 선택은 모성 아니면 커리어,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가 따라오는 일로 재현되곤 한다. 각각의 선택은 여성이 무아적 감수성에 잘 들어섰는지, 아니면 여성답지 않게 자기 본위를 앞세웠는지를 나타낸다.
임신중지의 선택 가능성은 이 전반에 걸쳐, 포스트페미니즘이 모성적 정체성을 재각인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행복은 사람이나 대상에 깃든 속성이 아니다. 행복은 확실히 행복을 줄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에게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행복의 대상은 개인이 그것을 행복으로 경험하기도 전에 ‘행복’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행복은 일종의 약속처럼 기능한다. ‘당신은 이걸 하거나 이걸 가지면 행복이 따라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주며 개인을 이끈다.
행복이라는 약속은 사회규범을 사회적 선으로, 사회ㆍ문화적 규범성을 개인의 욕망으로 바꿔 놓는다. 또한 권력의 사회적ㆍ구조적ㆍ문화적 메커니즘을 개인화하고 탈정치화한다.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에서 돌고 도는 ‘여성의 행복’이라는 규범은 아이를 여성,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가장 큰 행복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렇듯 임신한 여성에게 (담론적으로 각인된) 태아란 ‘일단의 약속’으로 채워진 환상의 인물이다.n63n 태아는 여성의 행복, 개별적 성공, 개인적 성취와 관련된다. 행복, 그리고 아이(와 태아)를 행복의 대상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을 ‘자연발달 서사’로 정렬하는 계기를 준다.
모성적 프로초이스라는 수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행복의 대상인 자기 아이를 원하게 마련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되려는 욕망을 ‘아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이익을 위해 단념해야 한다.
여성이 임신중지라는 언뜻 역설적인 선택을 통해 모성 욕망을 표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잠재적 아이를 위해 자기 행복을 유예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 있다. 이런 판단은 모성적 행복을 인종ㆍ연령ㆍ계급 등 몇 가지 축에 따라 계층화하는 데 바탕을 둔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행복을 줄 때만 진정 행복하고 선하고(무아적이고) ‘좋은’ 사람이 된다. 선한 어머니는 사회계급이나 연령 같은 표식을 통해 다른 어머니들, 즉 어머니 될 자격이 없고, 미성숙하고, 나쁘거나 이기적인 이들과 구별된다. 여성 행복의 경제에서, 태아는 여성을 모성으로 이끄는 행복의 대상이자, ‘좋은 어머니’의 산물인 행복의 주체로 나타난다.
‘선택’이라는 수사를 통해 재생산노동과 가사노동이 개별화된다. 여기서 복지 혜택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실패자로 간주된다. 복지 혜택을 받는 어머니들에게 ‘일로 복귀하라’며 강요하는 고압적 국가정책에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맥로비는 "중산층이라는 괜찮은 위치에서는 일찍 엄마가 되지 않기를 요구한다"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젊은 여성이란 무릇 "어린 나이에는 모성을 뒤로 미뤄 둠으로써, 취업으로 얻는 경제 효과와 직업 정체성을 통해 복지 위기를 해결하는 데 기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성적 행복’의 경제는 어떻게 여성이 모성 욕망 때문에 임신중지에 이르는지를 보여 준다. 여성은 아이를 원한다. 그러나 이미 낳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장차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 필요해 보이는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임신중지를 한다.
법적 담론과 공적 담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의회 토론이 현시대의 두 가지 최고 권력을 뒷받침하는 모종의 근거에 대해 통찰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권력은 바로 사법권과 생산력이다. 사법권은 개인에게 부과되는 외부 제약으로서, 처벌의 위협을 통해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강제한다. 생산력은 규범적인 행동양식으로서, 개인이 사회적 기대와 이런 기대를 좇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게 한다.
임신중지 결정에 가해지는 제약은 여성 개인이 아니라 의료ㆍ법 등 남성이 전통적으로 지배해 온 사회제도의 통제를 (실제로는 아니더라도 형식적으로) 받는다. 법은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는 제도일 뿐 아니라, 사회의 규범적 도덕성을 규정하고 공식화한다. 따라서 의원들은 여성의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금지해야 하는지 여부를 토론하는 대신, 임신중지가 규범적이고 이상화된 세계관에 맞아떨어지는지 아닌지, 맞아떨어진다면 또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에 관심을 두곤 한다.
임신중지 관련 의회 토론을 고찰할 때는, 사실상 국가가 법으로 여성의 임신중지를 통제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 법은 임신중지의 빈도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오직 임신중지가 안전한지,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지, 이를 위해 어떤 방법을 채택할지에만 관여한다.
법안 지지자들은 이른바 ‘사회적’ 이유로 행하는 임신중지에 대해서도,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나 미래의 아이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고 보기를 고수했다. 그러면서 절박한 상황이 여성을 임신중지라는 결정으로 내몬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은 ‘절박한’ ‘심적 외상을 입히는’ ‘끔찍한’ ‘비극적인’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소름 끼치는’ ‘전혀 고려해 본 적 없고 자초하지 않은’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주로 여성을 임신중지로 모는 조건을 ‘결여’로 프레이밍했다.
국가가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중지를 강제하는 ‘문제와 우려’ 지점을 줄이겠다는 제안은, 임신한 여성 가운데서도 배아나 태아의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이 있을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는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어느 하원의원이 임신중지를 지지하며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 임신중지를 선택할 사람은 없다"라고 단언한 데서도 드러난다. 임신중지는 임신을 지속하려는 선택과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모든 여성에게 최후의 보루’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임신중지를 ‘끔찍한 일로 만들기’는 여전히 공고하다.
법안 지지자들은 여성 대다수에게 임신중지가 ‘지독히 어려운’ 결정이라고 주장하며, ‘고통’의 측면에서 접근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강제되었다’고 말할 근거로, 모성을 수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유형’의 여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십 대 여성이라든지, 아이를 기르는 데 국가의 보조가 필요한 여성의 임신중지는 극도로 가시화된다. 그에 반해 이성애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성인 중산층 여성의 임신중지는 비가시화된다.
임신중지의 법적 제약을 줄이는 데 지지를 표한 의원들은 여성을 자율적인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취약하고 무력한 상황의 피해자로 재현했다. 그런 이야기는 ALRA의 활동에 내재되었던 가부장주의와 흡사해 보인다. 이들은 여성이 임신중지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주장하며, 임신중지 선택을 정당화한다. 이 주장은 다소 역설적인데, 그때 임신중지란 선택이라기보다 필요이기 때문이다.
‘프로초이스’ 의원들은 임신중지의 원인을 외부 상황에 돌림으로써, 임신중지 여성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에 일시적으로 ‘제지된’ 상태로 재현했다. 임신중지 여성은 이상적인 상태에서 빗겨나 갈피를 잃은 존재다. "여성은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이탈할 때가 많다"거나 "이탈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정서는, 이미 ‘줄 세워진’ 질서(임신한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를 원하게 마련이라는 규범)에 임신중지 여성을 다시 들여놓는 재설정 기술이다.
반임신중지의 정치적 관점은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모성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신념에 보통 들어맞는다. 여성이 이기적인 이유로 임신중지를 한다는 법안 반대자들의 주장은 이 경향에 반하며, 오히려 모든 여성이 무아적으로 모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함의를 뒤집었다. 여성은 임신중지 지지자, 가족 구성원, 배우자에게 임신중지를 강요당한다. 여성은 임신중지라는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선택을 한다.
임신한 여성이 곧바로 임신하지 않은 몸이 되는 것, 아이가 없는 것, 혹은 더는 아이가 없는 것이 임신중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입 밖에 낼 수 없게 된다.
반대자들은 여성의 선택에 형식적 제약을 둠으로써 그 규범을 강화하려 하고, 지지자들은 여성이 이미 그리고 언제나 모성적 행복의 도식에 들어가 있으므로 제약이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지지와 반대 어느 쪽이든 모성 규범을 어기고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에 대한 처벌을 말한다. 지지자들에게 임신중지 여성은 항상 스스로를 벌주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반대자들에게 임신중지의 범죄화나 수술을 통한 임신중지는 임신중지가 쉽거나 편리하지 않음을 확실히 해 두는 조치다.
‘페미니스트’ 혹은 ‘이기적인 여성’과 ‘임신중지 여성’ 사이에 가로놓인 환유의 비탈은, 임신중지를 여성이 개인적 권력을 주장하고자 일으키는 행동으로 나타냈다. 법안 반대자 중 다수는 임신중지란 여성이 "그저 임신중지를 자기 권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여성 임파워링’이라며 비웃었다.
심지어 법안 지지자들조차 여성이 모든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극단적’인 접근이라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율성을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온건한 접근법은 이미 빅토리아 주 의회에서 논의된 법안에 명시되어 있었다. 해당 법안은 태아의 체외 생존 가능성을 기준으로 여성의 임신중지 선택권을 제한하는 내용인데, 기준선은 임신 24주였다.
유아적인 것과 성숙한 것,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은 페미니즘과 가톨릭주의를 구별짓는 명칭이었다. 그에 따라 각각은 여성을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이끄는 감정 각본에 따라 정렬되었다. 가톨릭주의에는 이 감정 각본이 공고히 뿌리내린 반면, 페미니즘은 거기서 일탈했다. 논쟁에서 ‘페미니스트’, ‘임신중지 여성’, ‘이기적인 여성’이라는 상은 전부 정서적 소외자로서, 비이성적인 존재다. 사라 아메드의 말을 빌리자면, 비이성적인 존재라 함은 이성적인 다수에게는 감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이들의 감정적 감수성이 "정서적 공동체의 경계 바깥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자기 본위의 결정을 내리는 자율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선택의 주체란 허상이다. 그런 존재는 아이돌봄자나 청소부 등 여성화된 노동자에게 외주를 주지 않고 일가족 단위 내에서 일어나는 무급 노동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때 무급 노동자도 대개 여성이며, 무아적이고 타인지향적이며 규범적인 여성성을 영구히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자유를 개인의 선택과 같게 놓을 수 있으려면, 규범적 여성성에 기본적으로 맞지 않는 자율적 주체가 필요하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모성적 행복’의 경제란, 모성이 ‘선택’을 통해 재자연화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라는 표현으로 재현되는 기술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토론에서는 ‘선택’이 임신한 여성에게 특히 강렬한 방식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열하고 또 해석한다. 이런 토론은 오늘날 규범적 여성성이라는 도식을 규명하고 질문하는 주요한 장이기도 하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정치는 태아를 임신중지 논쟁의 주체로 여기면서, 임신한 여성이 행복의 대상인 태아에게로 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임신을 중지할 때가 있다면, 그건 미래의 아이를 위시한 주변의 안녕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가족적 행복’의 경제는 어떤 여성이 임신중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모성 욕망을 표현한다고 볼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경제 내에서는 모성적 행복을 아이의 행복과 부합시킬 자원을 쥔 여성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모성적 행복이 사회적 선(무아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가 아이를 행복의 주체로 만들 능력이 있다고 여겨질 때만이다. 이렇게 ‘행복한 아이’를 재현함으로써 인종ㆍ계급ㆍ연령ㆍ섹슈얼리티라는 축을 따라 ‘좋은 어머니’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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