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농 김가진은 1846년에 태어나 20세기 전후 시간대까지 76세 일생을 살며 관료, 외교관,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이력을 경험한 인물이다. 서예가로도 이름이 나 있지만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으나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주천진종사관 직함으로 5개월간 톈진에서 근무하고 주일본외교관으로 4년간 일본에서 근무하기까지 했다. 특히 4년 간의 일본 근무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과 교류하며 탈중국 개화론자로 변화한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교육 사업에 뛰어들기도 하고 대한자강회에 동참하는 등 여러 계몽 운동을 펼쳤으며 1908년 관직을 떠날 무렵 대한협회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대한협회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 체제를 구호로 표방하였고 조선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일본에서의 생활 때 그는 아시아주의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표적인 동양평화론자인데 그를 비롯해 동농이 시적으로 교류한 명사들은 아시아주의자들이 많았다. 일본은 아시아 근대화의 선두주자였다. 그가 본 일본의 모습은 근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한일 강제병합 이전까지 그는 여러 계몽운동과 실력 양성운동을 펼쳤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망망한 우주에 인종이 허다하거늘

이 나라 이 시대에 이 몸이 태어났단 말이냐?

우리 2천만 동포를 어찌 차마 바라보랴!

하루아침에 타는 불가마 속의 물고기 신세 된 것을


강제병합이 이루어진 뒤 그는 복잡한 심경을 시로 표현했다. '인종'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불가마 속의 물고기라... 결과적으로 본인이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셈이기도 한 것 같다.


그의 이력 중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것 때문이다. 작위를 받은 고관 대작이 해외로 망명을 결행함으로써 일제의 강제병합의 합법성을 반증하는 것이겠으나 그럼에도 그가 작위를 받은 것에 대해서 정당성이 부여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1919년 그는 아들인 김의한과 상해로 떠난다. 

연로하신 시아버님을 모시고자 하는 소박한 뜻에서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든 상해는 임시정부 정청에 나가 일선에서 직접 일을 하진 않더라도 나는 이미 그 현장의 일원이 되었다. 단신으로 서울을 떠난 것은 망명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으며, 웃어른을 모신다는 것은 곧 일종의 독립운동을 의미하기도 했다. 

정정화는 상해로 떠난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망명길에 올랐다(정정화의 용단이 대단하다). 개인적인 동기에서 떠난 일은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의 길이 되었다. 그는 시아버지인 동농 김가진이 3년 만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인 김의한과 중국 땅에 남아 임시정부의 여정을 같이 했다. 



나 무릉도원 찾은 것 아니요 포악한 세상 피해 여기 왔노라.

팔순의 늙은 몸을 털끝처럼 가벼이 여기고서

동아의 평화는 씻은 듯 사라졌고

청구의 우리 강토 살기가 하늘 끝에 닿는다.


(...)


죽기를 각오한 우리 국민, 오직 혈전이 있을 뿐

어찌 백만의 군대라 겁을 내리오.


이는 상해에 도착한 이듬해 지은 시로 그가 소망하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소망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한 회한과 마지막에는 일제에 대한 전투적 자세까지 엿보인다. 이로써 그가 일본(에 대한 희망)과 완전히 결별했다고 느껴진다.



동농 김가진 전집에는 그의 시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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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30 1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가진 이분은 처음들어보네요 ㅋ 덕분에 또 배우고 갑니다~!

화가님을 20년전에 알았더라면 한국사 100점을 받았을텐데 ^^

거리의화가 2022-11-30 11:32   좋아요 2 | URL
김가진 선생은 저도 기계적으로만 외웠던 분이었습니다. 한일병합 이전에 그의 이력도 제대로 파헤쳐본 적이 없었네요^^; 저도 이렇게 책을 읽어가며 배워나가고 있는 학생에 불과합니다ㅋㅋ
20년 전에는 제가 공부를 열심히 안할때라^^;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새파랑님.

mini74 2022-11-30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갑작스런 추위에도 이렇게 옹그라드는데 ㅠㅠ 추위와 굶주림과 목숨의 위태로움에도 견딜 수 있게 한 건 무엇인지 마음이 ㅠㅠ 저도 화가님덕에 한 분 더 알아갑니다.

거리의화가 2022-11-30 14:55   좋아요 2 | URL
그쵸. 저도 어떻게 그런 결행을 하실 수 있는건지 생각할수록 어렵다 싶습니다. 정정화님의 <장강일기> 완독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꼭 읽어봐야겠어요^^ 미니님 감사합니다.

희선 2022-12-01 04: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때 여러 가지 일을 한 사람이 많을 텐데,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군요 일본한테 작위를 받은 건, 아쉬운 일입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싶기도 합니다 아니 그렇다 해도 독립운동을 했다니 그런 점은 좋게 봐야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12-01 09:17   좋아요 1 | URL
독립운동에 가담한 분들 중 아는 이름보다는 모르는 이름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여전히 발굴되어야할 분들도 많죠^^;
그때 당시 고위층에 있었던 이들 중 작위를 거부한 사람은 몇 없는 걸로 압니다. 아쉬운 일이죠.
 

3부 이주와 소속감

- 다섯 가지 이주 체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유럽과 유럽 식민지들을 이어 준 대서양 이주 체계: 15세기 초 ~ 1950년대 중반
아프리카 노예 대서양 이주 체계: 1440~1870
영국 제국 혹은 여타 유럽 제국들, 미국의 식민지 투자자들의 권력 관계 틀에서 진행된 아시아 자유민 혹은 계약 노동자들의 이주 체계 ->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태평양 횡단 이주 체계
유럽 쪽 러시아 내에서 진행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 카스피해와 남부 시베리아 지역에의 정주, 북아메리카로의 소규모 이주, 서유럽으로부터의 이입 이주로 구성된 러시아 시베리아 이주 체계
북중국에서 진행된 만주로의 이주 체계: 1920~1930

1장 장기 지속의 관점
이주의 결정에 영향을 준 것은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른 투쟁, 인종화와 저항, ‘인간의 조건’에 대한 사고방식의 재정립

국가는 19세기와 그 이전 시대에서는 유용한 분석 단위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19세기 말과 특히 20세기의첫 20년 동안 여권이 도입되고 인종적 특징에 따라 배타적 정책도 쓸 수 있게되어 이주민의 출입국과 관련된 장치를 마련하거나 이주 제도를 수립하는 데서 국가의 역할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 P493

전 세계에 걸친 이주의 관점에서 보면 철도와 항구도시들이 연결되고1870년대에 증기선이 도입된 것이 여행의 속도를 높이고 이주민도 크게 늘어나게 한 요인이었다. 물론 인구 증가의 면에서 보면 이주율이 반드시 높아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운송수단과 통신수단의 발달도 유럽으로부터의 집단적 이출 이주, 아메리카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귀환 이주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집단 이주‘가 시작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주로 영국 제국이 부과한 일시적 속박 노동제 또한 인도양과 대농장 지대로 향한 프롤레타리아집단 이주를 급속히 증가시킨 요인이었다. 1800년대 초부터 1860년대까지 유럽의 농노제가 폐지되고 1880년대까지는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제가 폐지된것도 이동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으나, 이 경우에는 피부색이 제약으로 작용했다. 유럽의 백인들은 유럽 내에서 움직이는 지역적 이주, 대서양 횡단 이주,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이주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으나,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곳에서 인구가 증가한 것도 사람들이 ‘자유로운 곳, 다시 말해 인구 밀도가낮은 곳과 그보다도 임금노동이 가능한 곳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동아시 - P527

아에서는 동일한 이주의 개연성이 대규모 집단 이주의 결과로도 나타났다. 반면에 아프리카인 이주는 대부분 유럽 식민주의 국가와 투자자 혹은 그 직원들에 의해 제약을 받거나 통제받는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다. - P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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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신채호의 '텍스트'와 민중

'민중'이라는 단어는 1920년대 이후 통용되기 시작

1920년대 신채호의 사상에서 '민중'이 가진 의의는 사상적 의미가 아니라 텍스트의 장르적 차이의 구분(비학술적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을 드러내는 지표




· 이기백 역사학의 민족과 민중-자유 개념의 변주와 역사의 종언

이 제 민족의 세계는 틀림없이 인간에 의해 창출된 것이기 때문에(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의심할 여지 없는 근본원리이다), 그 양태는 우리 자신의 인간 정신 변화 양태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인간은 <있어야 했고, 있어야 하고, 있을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든 자 자신이 스스로 말하는 것만큼 정확한 역사는 없다.


이러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결국 정신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성으로 그런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행하는 것은 운명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선택을 바탕으로 하여 그런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또 우연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그렇게 행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는 영원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 잠바티스타 비코 『새로운 학문』, 동문선

-> 비코의 사상에는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당시 물리과학이 최고라고 자부하던 시대에 역사학이야말로 진리에 근접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실재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이기백은 1941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3년간 수학하며 역사주의 이론에 관한 다양한 저작을 만났다. 이 중 그에게 영향을 준 철학가는 랑케, 헤겔, 마이네케였다. 그들의 저작을 읽으며 세계사란 자유를 향하여 발전하는 것이고, 그 발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은 시대적 상황 안에서 상대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정리한다.



이기백은 민족에 신비성을 덧입히는 것을 경계하며 민족성을 역사적 과정에서 재고찰했다. '민족'을 한국사에 대입하면 그 중심에는 '민중'이 있었다고 정의한다.


그의 대표작인 <한국사신론>에서 그는 '지배 세력의 변화'에 따라 시대 구분을 나누었다. 개정이 됨에 따라 초반에 시대적 구분에 딱 들어맞지 않았던 측면을 수정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목차 >

1.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2. 원시공동체의 사회

3. 성읍국가와 연맹왕국

4.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발전

5. 전제왕권의 성립

6. 호족의 시대

7. 문벌귀족의 사회

8. 무인정권

9. 신흥사대부의 등장

10. 양반사회의 성립

11. 사림세력의 등장

12. 광작농민과 도고상인의 성장

13. 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

14. 개화세력의 성장

15.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16. 민족운동의 발전

17. 민주주의의 성장

18. 한국사의 발전과 지배세력


하지만 역사적으로 소수의 집권자였던 지배 세력 중심의 한국사적 시대 구분은 절대 다수인 민중을 역사 무대에 끌어올리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또 민중이 전면에 나서서 역사를 바꾼 경험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나타나는데 이전의 역사는 그럼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은 보이지 않는다. 

헤겔은 국가의 완성을 역사의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1987년 6월 혁명으로 한국 민중은 자유민주주의 완성 목표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멈춘다면 민중의 의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 주체 사관에서 인민과 민족의 자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유럽 중심)의 아시아 인식은 식민주의 역사학과 친화성을 지녔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는 한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반식민주의 역사학으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보았다. 식민주의 역사학인 정체성과 타율성론을 비판하고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한국사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백남운은 조선 민족은 특수한 전통을 지니지 않고 일반적 인간일 뿐이라 밝혔다(하지만 백남운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기계적으로 적용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백남운의 역사학은 민족이라는 근대 역사학의 전제를 옹호했다. 

1930년대 이병도의 실증사학이 해방 후 남한의 역사학의 토대가 되었다면, 백남운의 실증 사학은 북한의 역사학의 토대가 된다. 




민족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강조로 나타났다. 북한의 역사학은 '당성' 및 '역사주의' 원칙에 대한 강조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양립시키려 하였다.


1980년대 형성된 북한의 주체사관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결제 결정론과 계급투쟁 사관을 비판하고 인민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삼았다. 둘째, 인민대중은 당과 수령의 영도를 통해서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셋째, 민족주의가 더욱 강력한 형태로 다시 살아났다.


그 문제의식이란 신채호의 역사연구가 독립운동의 일환임을 지나치게 의식한 점, 그리고 그의 사상을 단일한 것으로 전제하는 태도, 또는 사상의 변화를 동시적이고 전면적이며 발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인식 등을 포괄한다. 이런 점을 좀 더 일반화하면, 각각은 ‘학문의 실천성‘, ‘주체의 동일성‘ 및 ‘총체적인 발전 구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P298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이기백 역사학을 상징하는 유명한 구절은 그의 민족주의적 입장 및 종교적 믿음을 잘 보여주지만, 여기에는 양자를 매개하는 논리로서 ‘민족=역사를 만들어가는 인간‘과 ‘진리=일관된 신의 섭리로서의 보편성‘을 등치시키는 역사주의의 발상이 존재한다. 또한 이기백은 실증을 "역사학의 기초조건‘으로 중시하면서도 이를 ‘실증사학‘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자연과학에 가까운 실증이 곧바로 역사학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기백은 만약 실증주의가 역사학 그 자체로 치환된다면 "역사학은 학문이기를 그만두고 취미로 전락해버리고" 만다고 경고한다. - P317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이고 그러한 인민은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국경을 넘어 동시대 비판적 역사학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그렇다면 주체사관의 고유한 특징은 혈통적 민족 개념을 도입하고 민족 자주성을 지키려는 면면한 투쟁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반식민주의 역사학이라는 북한 역사학의 원점이자 근대 역사학의 하나의 모습이었다. 주체사관을 주변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역사주의 실증사학의 흐름 속에 자리매김해야 하는 이유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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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9 1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딩 때 신채호의 조선사 연구 저서 읽으려고 드문드문 쓰여진 한자 찾기 위해 옥편 전자 사전을 광클 검색했었네요.


거리의화가 2022-11-29 11:34   좋아요 1 | URL
예전 책들은 국한문 혼용인 경우가 많아서 옥편 찾기는 필수죠^^ 근데 고딩 때 그 책을 읽으셨어요? 개인적으로 읽으신 거겠죠? 저희 학교에서는 국사 시간에 그저 외우라고 닦달하기만 했습니다ㅠ 역사 관련 소설도 좀 읽고 저서도 읽고 그랬으면 더 재미나게 배웠을텐데 말이죠.

mini74 2022-11-29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남운, 역사교과서에서 정말 짧은 문장으로 만났던 기억이 나요. 언젠가 읽어보고 싶단 책이 보입니다. 지배세력으로 시대를 구분한 한국사신론 궁금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30 10:14   좋아요 1 | URL
저도 백남운 그냥 외웠던 걸로 기억해요. 그의 저작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사신론은 한국통사의 고전 중 한 권입니다. 참 오래된 책인데 여전히 팔리는 걸 보면...ㅎㅎㅎ
 


~ 2부


- 리바이어던 2.0

근대 국가의 개념을 다루면서 리바이어던을 끌고 온 것이 눈에 띈다. 리바이어던 하면 토머스 홉스가 쓴 저작으로 예전에 얼핏 읽은 것도 같지만 생각해보니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어쨌든 토머스 홉스는 근대 사상계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베크 세계사에서는 리바이어던이 내놓은 국가의 개념을 초기 국가로 보고 1.0 버전으로 부른다. 그리고 1850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시기를 2.0 버전으로 부르겠다라고 논한다. 일단 나는 1945년이 아니라 1970년대까지를 범위로 설정했다는 것이 신선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타당해보인다. 1945년 2차 대전의 종식으로 탈제국, 탈식민이 종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해방은 한참을 이어서까지 진행되었다. 미소의 대결로 냉전이 격화되면서 체제와의 대결도 시작되었다. 체제의 경쟁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흐름이 진행된 바 있다. 

- 반둥회의의 재조명

1955년 반둥회의는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 비동맹운동, 나아가 제3세계 운동의 기원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 1954년 베트남의 종전과 분단을 다룬 1954년 제네바회담과 동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냉전, 식민 체제와 무관할 수 없었다. 탈식민 국가들이 냉전 질서에서 자신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논하였다.
베크 세계사에서는 반둥회의의 의의를 더 확장하여 나아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비단 아시아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영역에 걸쳐) 시간적으로도 확대시키는 모습이다. 20세기 초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제국주의-식민주의로 식민지 경쟁-저항 구도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역사는 반둥회의의 의제와 무관할 수가 없다는 논리라고 보인다. 아시아에서 큰 전쟁이 두 번이 끝나고 냉전이 막 시작될 무렵에 일어난 이 회의는 이 시기만이 아니라 이전부터 냉전의 종식 때까지 유효한 결정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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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에 이어 버마의 우 누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에 주목하자.(제3세계 운동의 기원으로서 한국전쟁-버마의 우 누의 중립주의를 연결고리로 by권헌익 in역사비평 138호) 우 누는 누구보다 냉전 체제 안의 중립주의가 중요함을 인지한 인물이다. 때문에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반둥회의를 살펴볼 때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_%EB%8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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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은 1950년대 냉전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심심하면 언급이 되는데 번역본이 없다. 

아무튼 여러 번 언급되니 언젠가 읽어보아야 할 작품!










초기 근대국가의 관념과 실천(토머스 홉스가 1651년에 쓴 현실적인 논문을 따라서 ‘리바이어던 1.0‘이라고부르자.)이 17세기에 출현하여 18세기 말에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가정하면,
이 국가들은 1850년 이후에 ‘리바이어던 2.0‘으로 재편되었다. 나는 그 재편과정이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려 한다. 그때근대국가의 체계가 다시 와해의 도정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 P55

"국경 너머의 시민들?" 그러나 그러한 초국적 공동체들을 위한 정부를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해체되어 인권에 전문가를 더한 것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웹에 떠다니는 정보와 대중매체나 구글Google 같은 민간 정보 제공자가 더 큰 공적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는 선거를 실시하고 군대를 보유하며동맹을 체결하고 무역이나 노동조건을 통제하려는 제도들이 지구를 뒤덮고있다. 20세기 말에 널리 쓰이게 되었고 여전히 사회과학자들과 재단들의 주목을 끄는거버넌스라는 용어는 ‘국가성stateness‘ 없는 정부를 바라는 마음의증거가 되고 있다. 마치 정책 수립이 더는 우선순위의 총합이나 이러저러한방안의 선택을 요구하지 않고 합의와 합리적인 토론의 힘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어느 주요 옹호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법원과 규제 기관들 같은 국가의 관청들을 해체해 ‘전 세계적 정부의 네트워크‘에 집어넣으라.
그러면 실제로 국가권력을 증강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재단들, 대학의 엘리트들, 사회과학자들, 선의의 남녀들은 거버넌스라는 개념을 사랑했다. 거버넌스 개념은 국가성 없고 눈물도 없는, 투명하고 스스로 정당성을 입증할수 있는 행정부를 제안했다. 거버넌스는 공공 정책학 석사들의 이상향이었다. - P321

1955년 4월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스물아홉 개 독립국가 대표자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 모여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륙 간 유색인 회의를 열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버마(미얀마)와 스리랑카,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의 후원으로 열린 반둥 회의는 식민지 해방에 뒤이어, 그리고 한국전쟁과 초강대국 소련과 미국의 야심이라는 배경 속에서 ‘제3세계‘의 미래에관한 유토피아적 희망의 표현이었다. 반둥 회의는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시기가 끝나고 10년이 지난 후에 열렸지만, 제국과 식민지적 만남, 식민지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학자라면 반제국 운동이 어떻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를 구축했는지는 물론 아프리카·아시아의연대와 비동맹이 어떻게 그리고 왜 식민지 해방 이후 냉전 시대의 표어가 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반둥 회의를 시금석으로 삼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론상의 목적에 도움이 된다. ******** - P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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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8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엄 그린!
한때 영국 정보부 MI 5요원으로 유럽 전역에서 조용히 활동 했던 경력이 있는 작가!

이분 작품 재밌습니다
화가님에게 사알 짝 추천^^

거리의화가 2022-11-28 16:22   좋아요 2 | URL
영국 정보부 요원이기도 했군요~^^ 심심하면 언급이 되는 작품이라 아무래도 읽어봐야할 듯 싶어요. 번역본도 있음 좋겠지만 수요상 나오긴 어려울듯ㅎㅎㅎ 감사합니다.
 
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2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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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독립운동 열전》 1권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잊힌 독립운동사와 한국근대사를 살펴보았다면 2권은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그래서 2권의 부제는 <잊힌 인물을 찾아서>이다. 1권은 목차가 부제와 착 들어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던 반면 2권은 부제에 맞게 목차도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이다.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김단야, 홍범도, 김창숙, 주세죽, 김마리아, 이동휘 정도를 제외하고 이 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낯설었다. 여전히 우리는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등 알려진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앞으로도 찾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많다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22년 조선공산당(내지당 또는 중립당)에 가담한 두 명의 인물이 있다. 김사국과 김한이다. 둘은 모두 당에서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사국의 경우 동생인 김사민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 놀라웠다(김사민은 신생활사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4년 7월 만기출옥했으나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평생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 김한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되어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하고 다량의 폭탄 국내 반입하려한 혐의로 형량 5년을 언도받는다. 그는 법정에서 총독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오 그 밖의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도 이 같은 총독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을 언급했다. 그는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P45)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내지당(조선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한은 시종일관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이 자신의 개인적 판단이었다고 진술했다. 덕분에 내지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P46)

유림 독립운동계의 거목인 김창숙 선생에 대한 일화는 감동적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북 경찰부를 통해 망명자 김창숙에게 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에 들어와 귀순한다면, 과거 '범행'을 모두 불문에 부치고 후대하겠다는 말이었다. 가옥을 새롭게 단장하고 논밭을 새로 사줘서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희 숙씨는 경상북도 경찰부의 내용을 받아들여 전향 권유 편지를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발송했다. 총독부 당국이 이처럼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니 이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권면하기까지 했다. 김창숙은 가까운 친족으로서 유교 고전학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던 사이였기에 실망감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김창숙은 바로 붓을 들고서 답장을 썼다. 절교 선언이었다. 그는 아들 환기에게도 사정을 전했다. 문중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김황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알리고, 내희 숙씨가 더 이상 일족의 일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P126~127) 자신의 일족의 잘못을 덮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내치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다. 이 일화야말로 대쪽 같은 선비의 꼿꼿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빨치산 대장들 박종근, 박영발, 방준표들이 있다.
박종근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 직이었다. 29세였다. 열일곱 살부터 반일운동에 참가했던 만큼 혁명운동 경력이 벌써 13년째였다. 사상범으로 투옥된 기간만 3년 7개월이나 됐다. 대중운동의 현장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 (...) 그뿐이랴. 해외유학도 나녀왔다. 모스크바 조선당학교 2년간의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배웠다. 실천과 이론,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잘 준비된 간부였다.(P199~200)
박영발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당과 노동조합 양 부문에서, 그리고 총파업 투쟁의 지휘 방면에서 없어서는 안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장래 당조직을 이끌 중견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최고위 간부교육을 이수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1948년 7월 그는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간부학교 입학대상자로 추천된 것이다.(P221~222)
9월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투쟁을 가리킨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지역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의 파업이 첫 출발점이었다. 경남도당 노동부장인 방준표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맞섰던 대상은 대한노총, 무장경찰, 미군 헌병 '3자의 합작적 공세'였다. 9~10월에 걸쳐 "장렬한 피투성이 반항투쟁에 직접 참가 지도하였다"고 기록했다.(P237)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 해방 이후 모스크바 유학을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의 노동 투쟁 이력이 유학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박종근은 12개의 과목 모두 5점 만점에 5점을 받을 정도였고 박영발도 그에 못지 않은 최상 레벨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박헌영의 좋은 평가까지 받은 것을 보면 실력자들이었음에 분명했던 것 같다.

여성 독립운동가 파트도 눈에 띄었다. 그 중 이덕요와 박신우, 송계월에 대해 말해보겠다.
이덕요는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함흥 자혜의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다 의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걸었고 해마다 신년에 신문사들이 개최하는 '여류 명사 초청 가정문제 좌담회'에 초대되어 여성 문제와 가정 문제에 대해 발언할 정도로 명사였다. 문필과 단체 활동 등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다. 우리가 잘 아는 여성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정치문화부에도 속해 있었다. 이덕요는 여성운동의 의의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 연관시켜 이해했다. 일간신문에 실은 한 기고문을 보자. 기고문에서 그는 오늘날 조선이 요구하는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 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을 실행함과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는 대중운동과 악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론 지면의 표현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관 지어 포착하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P275)
박신우는 <근우회>의 선전 조직부에 있으면서 책사 노릇을 했는데 기획력, 실행력 모두 출중했다고 한다. 남편 김규열과 박신우 모두 코민테른 제공 고등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는데 1928년 초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조선공산당의 해외 부문 사업을 맡게 되어 갔다. P-37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 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체포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 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P286)
송계월은 1930년 1월 제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을 주도적으로 모의한 혐의를 받았다. 글 실력이 출중해 문단에도 데뷔했고(<가두 연락의 첫날>) 잡지사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1933년 폐결핵으로 23살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래도 그녀의 전집이 두 권 남아 있어 다행이다.(<송계월 전집>) 그녀는 사상과 이론 문제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인 투사가 되곤 했다. 그녀와 교유하던 남녀 문인들은 말했다. "계월이는 그렇게 얌전하다가도 이론 투쟁에만 들어서면 여로하가 솟아오르는 기개가 있어 건드리기가 어렵다." 한걸음도 사양하지 않는 조리 있는 언변과 불길을 일으키는 듯한 열정으로 인해 무리 가운데 우뚝 섰다고 한다.(P292)

1962년 3.1절 일산 신문에 이채로운 보도 기사가 실렸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기로 예정된 한 인물의 자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다. 문제의 인물은 장재성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였다. 그에게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단장이란 포상 등급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1등 중장, 2등 복장에 뒤이은 3등 훈장이다. 해방 후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이었다.
왜 서훈을 취소했는가?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한 경우에는 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이었다.(P307~308)

이 사례 뿐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기준에 거부되거나 선정되었다 취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말 그대로 독립운동 이력이 있는 운동가에게 전달하는 훈장이다. 그것에 정치적 이유나 이념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이 아무쪼록 개정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서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중 한 둘이라도 더욱 깊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의 역할은 그 이상을 하는 셈이라 생각한다. 몰랐던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일대기 뒤에 숨겨진 뒷 이야기까지 만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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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11-27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을 정해서 역사만 읽는 달로 하고 싶었는데 오늘 이 리뷰를 보니 그 생각이 더욱..^^

거리의화가 2022-11-28 09:48   좋아요 1 | URL
역사만 읽는 달 좋은데요^^ 읽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읽을 거리가 늘어나서 저는 즐겁더라구요. 페크님의 역사 읽기를 응원합니다ㅎㅎㅎ

그레이스 2022-11-28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계신군요~♡
묵직한 제목때문에 나중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한 주제로 읽어야 할 욕구가 생길때 읽어봐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11-28 10:22   좋아요 1 | URL
제목은 묵직한데 내용은 사건과 인물에 얽힌 이야기라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많이 다루어서 좋았어요^^ 말씀처럼 구미가 당기실 때 한꺼번에 내리 읽으시면 더 깊이 보고 싶다라는 인물들도 생기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