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팽창이 야기하는 ‘문제 공간‘의 끊임없는 생성은 결국 수목의 나이테처럼 제국의 중심과 주변이 연쇄적 관계를 갖는 동심원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제국의 법학자들은 동심원적 구조의 외연을이루는 ‘문제 공간‘에서의 국제적 분규나, 새롭게 획득한 공간과 기 - P20

존 공간구조 사이의 정합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일례로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헌법학자 기요미야 시로(淸宮四郞,
1898~1989)는 『외지법서설(外地法序說)』(1944)에서 ‘외지‘ 개념을중심으로 제국 일본의 ‘문제 공간‘ 혹은 ‘문제 공간‘이었던 공간들에대한 법적 규명을 시도했다. 5그에 따르면, 당시 ‘외지‘라는 말이 법률상의 용어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식민지‘라는용어가 쓰였는데, ‘식민지‘는 정치·경제상의 용어일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착취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그 사용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용어 사용 문제는 1929년 척무성(省) 설치에 이르러서야 공론화되었다. 그와 함께 ‘외지‘라는 말이 ‘식민지‘를 대체할 용어로 대두했고, 이후 관청의 공문서부터 민간의 인쇄물에까지 널리보급됨에 따라, 최종적으로는 법률상의 용어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 P21

기요미야는 ‘외지‘ 개념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외국‘· ‘조차지‘· ‘위임통치구역‘ 같은 주변 개념들과 비교 검토에 나섰다. 결론 - P21

적으로 그는 ‘외지‘를 내지에 미편입된 이법영역(異法領域)"으로 정의했으며, 그에 따라 혼슈·시코쿠·규슈 홋카이도 · 남사할린 · 류큐 · 오가사와라를 ‘내지‘로, 조선 · 타이완 . 관동주 · 남양군도를 ‘외지‘로 각각 분류했다. - P22

이 시기 조선의 내지는 조약상의 개항장 바깥에 해당하는공간인 동시에, 적어도 경제상의 관세영역에서는 청국의 판도 내에속한 공간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내지라는 하나의 공간에 대해 자주독립국화와 방화라는 상반된 두 개의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을 둘러싼 각국 간의 세력 균형과 그로 인한 현상 유지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의 발발은 그 균형을 깨뜨렸고 일본은 동아시아에 새로운 공간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후청국이 한국 내지를 다시 자신의 판도로 취급할 여지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의 ‘자주‘를 자명한 것으로 증명해줄 근거는 되지못했다. - P52

이 당시 한국 정부와 통감부 모두 근대적법제 정비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긴 했지만, 한국 정부 측은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려 한 데 반해, 통감부 측은 관행적 거래를 통해 획득한 일본인의 소유 토지를 법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증명규칙은 통감부의 의도가 반영되어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장치가 되었다.64 구체적으로 「증명규칙」 제8조에서는 당사자의 일방 혹은 쌍방이 외국인인 경우의 증명수속을 정하고,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또한 토지 · 가옥을 매매·증여 · 교환 · 전당할 때에는군수 또는 부윤의 증명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65 그리고 같은 해11월에 통감부령 제42호로 공포된 「토지건물증명규칙」에서는 당사자의 일방 혹은 쌍방이 외국인으로서 증명규칙에 의한 증명을 받은자는 이사관의 사증도 받도록 규정했다. - P63

제국헌법을 어느 영역까지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나, 한국의 보호국화와 식민지화라고 하는 일련의 사건 해석을 둘러싸고 일본의 법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근대적 학문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법적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제국 공간의 확장을 기정사실화하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 ·공간·학문의 삼중주가 펼쳐낼 앞으로의 이야기들에 대한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 P72

청국 측은 간도 공간을 ‘상부지 안‘과 ‘상부지 밖‘으로 구분하고 일본의 관할권을 상부지안‘으로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간도문제‘와 관련해서 청일 양국 간 교섭 중 최종 논점이 되었던 것은 간도에 대한 영토권이 아니라 ‘잡거‘ 한인에 대한 사법권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공간 분할이 시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85

1909년 9월 4일 베이징에서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間島二關ㅈ八日淸協約)」, 즉 ‘간도협약‘이 조인되었다. 결과적으로 룽징춘(龍井村),
터우다오거우(頭道溝), 쥐쯔제(局子街), 바이차오거우(百草溝)의 4개소를 상부지로 개방하고, 상부지 안에서의 한인과 일본인의 거주를 승인했다(제2조). 상부지 밖에서도 한인의 거주권(제3조), 토지소유권(제5조) 등을 인정했으나, 다만 청국의 사법권에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문제 공간‘ 간도는 특수 공간인 ‘상부지‘와 그 바깥의 잡거 공간으로의 분할을 통해 ‘문제‘ 해소를 꾀했다. 그런데 이때 ‘만주문제‘에 관한 협약도 함께 체결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 공간‘은 이미 간도를 넘어 만주로 확장되어갔다. - P86

일본이 획득한 권익을 지배 영역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면, 조차지인 관동주와 철도 연선에 설정된 철도부속지로 다시 나눌 수 있다.
본래 ‘관동(關東)‘이란 말은 산하이관 동쪽을 의미하므로, 랴오둥반도 남단에 설정된 조차지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그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라 명명했고, 일본도 그를 따랐다. - P93

중앙기관의 변천과는 별도로, 만주의 통치실상은 군부, 외무성, 관동청의 기관들뿐 아니라 철도부지 행정권을 갖는 만철까지 가세해 서로 착종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국 건립 이후인 1934년에는 만주에 관동국이 설치되어 행정의 일원적 운영을 꾀하게 되었으며, 그에 맞춰 1935년에 내각총리대신 소관의 타이완사무국을 설치하여 종래 척무대신이 소관하던바를 이관토록 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인 1942년에는 척무성과 타이완사무국을 모두 폐지하고, 내무대신과 신설된 대동아 - P95

성(大東亞省) 대신이 각각 조선총독부 · 타이완총독부 · 가라후토청에관한 사무와 관동국 및 남양청에 관한 사무를 나누어 관장하도록다. 이는 조선, 타이완, 사할린 등의 ‘외지‘에 대한 ‘내지‘화, 다시 말해내 · 외지 행정의 일원화를 실현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동시에 관동주와 남양군도는 제국의 판도 내에서 ‘내지‘의 ‘외연‘으로 자리매김되었다. 25 - P96

이는 마치 조약에 근거하여 외국인의 거류 및 무역을 위해 설치된 조계가 당초에는 일본인들의 한반도 침략 거점 역할을 했지만,
1910년 ‘한국병합‘ 이후로는 조선총독부의 일원적 지배를 방해하는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 상황과 유사하다. ‘문제 공간‘을 ‘통치 공간‘
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통치의 예외성을 담보하는 그와 같은 공간들은 반드시 정리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1914년 4월각국과의 협의 끝에 조계를 철폐하고 새로운 지방제도인 부제(制)실시를 통해 일원적인 통치를 실현했다. 만철의 철도부지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 즉, 1937년 11월 철의 철도부속지가 철폐되고 그에 대한 행정권은 만주국에 이양되었다. - P103

고시자와 아키라(越澤明)는 이러한 고토의 평생 업적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그 첫번째가 일본의 체신과 철도 행정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이며, 두번째가 타이완총독부 민정장관과 만철 총재 시대의 경험으로 형성된 독자적인 국제감각을 바탕으로 중국 및 러시아(이후 소련)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그 관계의 전개에 크게 공헌했다는것, 그리고 세 번째가 도시계획을 제도화하고 ‘제도부흥(帝都復興)‘을실현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행적 덕분에 일본에서 고토는 ‘철도의 아버지‘, ‘도시계획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적어도 이러한 이름을 얻기까지 만철이라는 경력이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음또한 부정할 수 없다. - P114

시라토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만한 지방에 대한 조사연구를 - P125

강조했다. 하나는 "만한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순연한 학술적 견지"에서이다. 전자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무릇 제반 사업이란 확실한 학술적 기초 위에서만 추진될수 있는 법인데,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만한 경영‘을 담임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를 뒷받침할 만한 학술적 기초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남만주의 권익 계승과 한국의보호국화로 일본 학자들이 해당 지역을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고, 게다가 해당 지역은 서구 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던 곳이므로, 일본 학자들이 "세계 학술"에 기여할 바도 크다는 설명이다. - P126

랑케와 마찬가지로 시라토리 또한 일본을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천황제에서 ‘국민의 이념‘의 근거를 구했다. 그러나랑케에게 ‘국민의 이념‘이란 어떤 민족이 특정의 국민이 되기에 성공하는 한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국가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민족은 역사 이전의 암흑 속에 머물 수밖에없었다.15 이는 곧 랑케가 목격한 역사의 종언이 유럽이라는 경계를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0세기 전환기에 시라토리가 목격한 세계는 랑케의 그것과 달랐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 혹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에 비유되곤 했던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시라토리가 그려낸 역사 과정은 무질서에서 조화로의 낙관적인 이행을 담보하지 못했다. 국제관계를 남과 북의 항시적인 투쟁 상태로 상정한 그의 남북이원론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산물이었다. - P151

이나바와 이케우치는 1세대의 시라토리와 마찬가지로 지리 중심적 시각을 공유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중국 및 만주의 영향을 크게 강조했다. 그러나 이나바는 선불가분론의 입장에서 한반도 제 민족을 중국 및 만주계로 전제한 뒤 현 시점에서 조선인의 만주 진출을 촉구하는 사회적 발언까지 이어갔으나, 이케우치는 중국및 만주와 구별되는 한족(韓族)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그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 P157

고야마 사토시(小山)는 일본에서 루드비히 리스를 통해 아카데미즘 사학이 수입될 때 실증주의 연구 방법만이 아니라 랑케적인 ‘세계사‘ 이념이 함께 들어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측면이 각각 일본사학. 동양사학과 서양사학 역사철학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말했는데, 전자를 비판한 후자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일본 근대사학이 수용했던 랑케 사학의 두 가지 측면 가운데사료 비판을 사상(象)하고 세계사적 파악만을 강조했으며, 랑케가「강국론」에서 묘사한 경합하는 국민국가군으로 이루어진 체계인 세계사를 유럽적 세계로부터 세계적 세계로 확대함으로써 역사학에서
‘근대의 초극‘이 가능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증과의 긴장을 결여한 채 정치적 실천 - 세계사를 창조하기 위한 ‘사상전‘으로 돌진한 교토학파의 역사철학은, 스스로 내건 세계사적 사명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 놓인 간격을 대상화하지 못한 채 공전함으로써 파 - P166

탄했다.
"실증과의 긴장을 결여한 채" 랑케로부터 ‘세계사‘ 이념만을 수용한 서양사학과 역사철학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실증주의는 그러한 전쟁책임, 더 나아가 식민지 지배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 P167

일찍이 신문기자이자 정치평론가로 활약한 우자키 로조(鴻崎鷺城, 1873~1934)는 1913년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한 「현시의 지나통(時支那通)」이라는 글에서 청일 - P181

전쟁 이전의 ‘지나통‘을 ‘구지나통‘, 그 이후의 ‘지나통‘을 ‘신지나통‘
으로 구분하고서는, 전자의 경우 학자가 많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반드시 학자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학자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신지나통‘을 다시 네 부류, 즉 외무성파·육군파·순실업파·낭인파로 구분했는데, 이들은 말하자면 특수 기술자나 중국사정 조사자 혹은 소개자 정도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182

고바야시 히데오에 따르면, 만철조사부 내에는 리버럴한 분위기가 강하여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텍스트로 삼아조사부원들이 독서회나 연구회를 열 정도였다. 그 때문에 세간에서는 만철조사부의 연구 경향을 가리켜 ‘만철 마르크스주의‘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타다 또한 만철조사부 시절을 "당시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회고했다.만철 입사 전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곳이 젊은 연구자들이 모인 역사학연구회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철조사부가 그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가면서 희열을 느끼는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이 체득한 지식이나 방법론에 대해서 크게 비판을 받기도 했던 까닭에 분한 마음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 P196

중국에서 ‘공동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 히라노는 긍정하고 가이노는 부정했다. 이는 각각 ‘대아시아주의‘와 ‘탈아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때 ‘공동체‘는 그들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매개체이자 그들의 꿈이 투영되는 공통의 장소였는데, 공통의 장소를 대상으로 서로 다른 꿈을 꾸었다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논쟁은 ‘동상이몽‘이었다. - P204

하타다의 ‘민족‘은 민족 내 계급 대립을 인정하고 있다는점에서 이시모다의 1953년 이후의 ‘민족‘ 개념을 선취한 것으로도보인다. 그러나 하타다는 전전의 경험에 비추어 전후 공간에서의 ‘민 - P222

족‘의 복귀 또한 경계함에 따라 ‘전후 역사학‘과의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마에가 이시모다에게 행했던 비판, 즉
"이시모다의 논의는 근대를 넘어 역사를 관통하는 연속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것으로, 민족이라는 주체 그 자체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대상화하지는 못했다"는 말은 하타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비록 하타다의 ‘민족‘이 사회적 조건에 제약을 받고 계급 대립을내포하는 단위라고 할지라도, ‘민족‘ 자체는 그 성격을 바꾸어가면서도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지는 초역사적인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하타다의 논의가 갖는 한계점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타다의 ‘민족‘은 이시모다의 그것과 달리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일본 민족‘이 아니라 타자로서의 ‘조선 민족‘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P223

전회에 걸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것은 일본인의 대조선관, 혹은 조선에 대한 자세의 문제였다. 이것은, 전전의 조선 연구를 재검토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설사로서 정리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그 사람의 사상을 물어야 하는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기성의 연구자가 그 작업을 행하는 일은 비통한 자기비판을 그 안에 포함해야 하는 것이고(이를 명확하게 자각한 위에 주 보고를 수락하고 자신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경청해주신 모리타니 가쓰미선생님의 태도에는 배울 것이 많았다), 젊은 연구자 또한 유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게 내 안에 계승되어 있는 지배자 의식과 직접대결해야 하는 자기변혁의 과제를 내포한 것이었다. - P233

하타다가 말하는 ‘동양사의 전통적 사고방84식‘이란, 현실과 거리 두기, 그러한 단절을 학문 성립의 요건으로까지 간주하는 연구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학문과 권력의유착관계를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P250

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인에게도 조선인의 고뇌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으며, 공감의 노력은 해야 한다고생각합니다. 같은 입장에 몸을 두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상대를 인식하고 이해하여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전전의 조선사 연구에서는 매우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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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달의 북결산

오디오북으로 2권, 이북으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책들을 읽었고 나머지는 종이책으로 읽었다. 총 8권이다.



아플 때 들었던 탓인지 토지 3권은 들으면서도 아팠다. 내용이 역병과 흉년 때문에 사람들이 다 죽어나가는 내용이라 그랬는지 더 그랬던 것 같다. 토지 4권은 슬프기보다는 화가 나는 내용들이 많았다. 듣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지는데 작가님의 문장력이 좋아서 감탄하며 듣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래도 이 소설이 좋은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는 소설이라 내게 더 잘 읽힌다는 점이다.
제인 오스틴 장편 소설들을 에마와 설득 빼고는 다 읽었다. 11월에 읽게 될 여성주의 책을 읽기 전 준비 작업이었는데 오스틴이 왜 인기 작가인지 4권 정도 읽으니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다음 달에는 조지 엘리엇과 브론테 작품을 읽어볼 생각이다.
베크 세계사는 결국 리뷰를 작성하지 못하고 이 달을 넘기게 되었다. 근데 리뷰는 반드시 써야 할 것 같아서 금주 주말과 개천절 휴일을 노려봐야겠다.
읽었던 책들 중에서 베크 세계사와 오랑캐의 역사가 참 좋았고 기억에 남는다.


2. 이 달의 사건

이 달은 뭐니 뭐니 해도 코로나 확진이다. 확진 전후로 거의 2주일을 정신을 못 차렸다. 그 바람에 이 달은 반 이상이 날아가버렸다.
이달 초만 해도 추석 연휴가 짧기는 하지만 연휴도 끼어 있고 해서 책도 더 많이 읽을 생각이었건만 삶이란 역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평소 목이 좋지 않아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편인데 추석 연휴 시댁을 다녀온 것이 타격이 된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책에 집중을 못했고 강제 휴식을 했다. 코로나를 비켜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역시 아니었나보다. 이제 매를 맞았으니 면역이 생기려나 생각해야지.

매달 3개의 사건을 뽑아왔으나 이 달은 이 일 이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독서도, 공부도 만족스럽지 못한 한달이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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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9-30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사건 코로나 그래도 잘 지나가신 것 다행입니다. 저는 3월초에 지나갔는데 벌써 6개월이 지나서 자유로운 시간이 끝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제인 오스틴 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노생거 사원> 다시 읽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것도 읽어볼까 싶지만, 다른 책들이 진짜 눈크게 뜨고 기다리고 있어서요. 제인 오스틴은 그것 하나만 읽을까 싶습니다. (11월을 기다리는 이 간절한 마음 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2-09-30 17:35   좋아요 2 | URL
이놈의 코로나 여전히 3만명 가까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ㅠㅠ 이젠 바이러스가 지긋지긋한데 지구가 아파서 바이러스와 자주 친구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슬픕니다.
제인 오스틴 2권 다 읽어보려 했으나 역시 시간상 안될 것 같아 패스하려구요^^; 다음달은 역사책도 좀 많이 읽고 싶고 남은 작가들 책을 읽으려면 시간이 너무 없을 것 같아요ㅎㅎㅎ 오스틴 한두 작품 정도로도 충분할 듯 싶은데요? 저도 단발머리님 처럼 <노생거 사원>참 재미나게 읽었어요! 저도 11월이 기다려집니다~*^^*

scott 2022-09-30 18: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 토지처럼 현재 대한민국도 역병과 흉년
고물가 ㅠㅠ
화가님 담달은 독서보다 건강
코로나 완치후 안심하시면 안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09-30 20:47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ㅎ 스콧님 그러게요. 지금 대한민국 판국이 역병과 흉년으로 어지러운 것이 딱 똑같은 듯 싶습니다.
스콧님 말 명심해서 건강 잘 챙길게요^^*

청아 2022-09-30 18: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다음달은 좋은 컨디션으로 책 마음껏 읽으시길
바랍니다. 실외에서 마스크 안쓰게되어 그나마 다행이예요*^^*

거리의화가 2022-09-30 20:49   좋아요 2 | URL
네. 컨디션이 좋을 때랑 아닐 때랑 차이가 많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나마 저도 실외 마스크 해제되어서 산책할 때 마스크 벗고 다녀서 갑갑함이 덜하더라구요.

책읽는나무 2022-09-30 2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프신데도 이렇게나 열심히 읽으셔서 슬픈 달은 아니신 듯 합니다.
저 같음 책이 잘 읽히질 않아 일단 제껴뒀지 싶어요. 장하신 겁니다.
다음 달은 그래서 또 박차를 가할 수 있겠죠^^
오스틴은 많이 읽으셔서 부럽습니다.
전 아직 한 권밖에 못 읽었는데 벌써 10 월이 된다니...아!!!! 싶기도 하네요.ㅜㅜ
어쨌든 모두에게 희망 찬 10 월이 되었음 좋겠어요. 화가님께는 건강한 10 월을!!^^

거리의화가 2022-09-30 20:50   좋아요 2 | URL
아직 회복기일수도 있으니 그래도 몸사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무리는 안하려구요~ 이번 달은 너무 빨리 갔네요ㅠㅠ 이제 올해도 3개월밖에 안 남았다니 놀랐습니다. 다음 달은 모두들 건강하시면 좋겠어요!ㅎㅎㅎ

새파랑 2022-09-30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도 몸이 건강해야 잘 읽히는거 같아요 아프신데도 여덟권 읽고 들으셨다니 대단하신거 같아요~!!
10월은 만족하는 한달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9-30 20:51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그러게 말입니다. 몸이 안 좋으니 책읽기는 커녕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구요~ㅎㅎ 새파랑님도 10월 즐독하는 한달 되시길 바랄게요*^^*

독서괭 2022-09-30 20: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우 코로나 정말 고생하셨어요. 저도 8월말에 걸려서 ㅠㅠ 토지 4권 화나죠. 근데 진짜 박경리선생님 천재 같아요. 어쩜 이 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이렇게 생생하게.. 계속 감탄하고 있습니다. 10월엔 건강하게 많이 읽으세요~^^

거리의화가 2022-09-30 20:53   좋아요 2 | URL
괭님 고맙습니다. 저야 제 몸뚱아리만 건사하면 되는데 괭님은 그때 식구들까지 그래서 더욱 힘드셨을 것 같아요^^; 역시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토지 4권 중간쯤부터 점점 달아오르더니 열이 뻗쳐서ㅠㅠ 그만큼 작가님이 글을 잘 쓰시는 거라 생각은 하면서도 흑흑. 삼수도 조가 부부도 너무 화났습니다. 괭님도 10월 즐독하는 한달 되시길!

프레이야 2022-09-30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로 고생하셨군요 화가 님. ㅠ
그 와중에도 열독하시고요 !
전 안 걸린 사람 중 하나입니다만.
이제 진짜 석 달 남았네요 올해가.
시월, 기분 좋게 시작하기로 해요^^

거리의화가 2022-10-01 21:10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님 오!!! 코로나 지금껏 무사히 피해가셔서 다행입니다^^ 요즘 같이 일교차 클 때는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10월 기분 좋게 시작하셨나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갑니다. 3개월 남았다는게 믿어지지 않지만 알차게 보내야겠습니다^^

잠자냥 2022-10-01 0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플 땐 당연히 책도 안 읽혀요! 코로나 때문에 책 많이 못 읽었다고 자학 금지! 고생하셨어요. 후유증 없길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2022-10-01 21:11   좋아요 1 | URL
저는 코로나 무기력증 때문에 너무 힘들더라구요~ㅎㅎㅎ 약을 먹지 않았는데 약 먹고 난 뒤의 헤롱거림이 온종일 지속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흐흐~ 제가 좀 긍정적인 스타일은 아니라서!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mini74 2022-10-02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병의 시기에 역병의 책을 읽으시다니 찐독서가 이십니다 ㅎㅎ 후유증없이 건강한 10월 맞으시길 *^^*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 함께 책 열심히 읽어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10-02 21: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공교롭다고 하는 게 맞겠죠. 하필 아픈데 역병 관련 내용이라 더 기억에 남습니다.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경험일 듯 해요~
건강해야 독서에 무리가 없겠구나 여실히 느낀 9월이었습니다. 미니님도 저도 서재 친구 모든 분들이 건강하시면 좋겠어요.

희선 2022-10-03 0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플 때 아픈 이야기를 듣거나 보면 그게 배가 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책 많이 보셨네요 시월엔 거리의화가 님이 보고 싶은 책 다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쉴 때는 잘 쉬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0-03 07:01   좋아요 1 | URL
네. 쉴 때는 푹 쉬어야 하는데 제가 욕심이 많아서 생각이 실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하네요. 그러는 바람에 아픔을 겪은 듯합니다^^; 몸이 좀 허하다 싶으면 쉬는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희선님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랄게요!
 


삼월은 출산을 했다가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는다. 서희에게 유일하게 버팀목이 되었던 어른인 수동이가 죽으면서 서희는 나무를 잃는다. 삼수는 두리를 강간하고 삼월을 폭행하는 몹쓸 짓을 하고 김훈장은 조준구와 노선을 달리 하며 갈라선다. 조준구는 자신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삼수는 마을 사람들을 배신하며 조준구에 빌붙었지만 그는 이제 삼수가 더 이상 불필요하고 귀찮은 이로 간주될 뿐이다. 결국 삼수도 조준구에 입김에 의해 죽는다. 봉순이와 길상이가 안타까웠는데 둘은 다툼 이후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헤어지고 만다. 조선땅을 버리고 간도로 이동하게 된 평사리 사람들. 조준구 부부만 잘 먹고 잘 사게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4권의 역사적 배경은 러일전쟁,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고종의 강제 퇴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경제 침탈, 군대 해산에 이은 전국적인 의병 봉기이다.
이 중 토지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장면은 의병 봉기다. 이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국내 토지와 자본의 침탈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의 기반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농민이 토지를 뺏기는 것은 먹고 살 길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어찌 두고 보겠는가.
최참판 댁의 살림은 이미 조준구 부부가 차지하였고 그 밑에 있던 하인들은 부부의 입김에 따라 모두 쫓겨나거나 토지를 빼앗기고 만다. 이에 김훈장을 위시하여 이동진, 용이, 길상이 등은 분연히 들고 일어나지만 계란이 바위 치기라고 결과는 뒤집을 수 없었다. 조준구는 친일 관리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이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에 위협이 되는 세력들을 모두 제거한다. 악한 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잘만 사는 세상. 지금도 이는 바뀌지가 않는다는 게 씁쓸할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서울 가보니 여간 긴박한 상태가 아니었더란 말이오."
"대관절 싸움은 누가 한다는 거요."
"누가 하기는요? 아, 그것도 짐작이 안 가시오? 아라사하고 일본이지 누구긴.
김생원께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소.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그도 전라도 조그마한 고을에서 발단된 민란이 오늘날 일본과 아라사의 싸움 원인(遠因)이다. (...) 아무리 일본이 전승국이라고는 하나 대국 아라사와 불란서 독일의 삼국을 상대하여 이길 재간이 있었겠소? 문명이 앞서 있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그네들을 말이오. 게다가 영국하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부지리나 얻을까 싶어 관망하는 상태였으니 일본으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부터 일본은 아라사에 대해서 보복의 칼을 갈았던 게지요. 참으로 나라와 나라의 다툼이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이 다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성싶소. " - P36~38
"수구파다 개화파다 쌈질이나 했지 나라 생각을 했던가요? 한심한 일이외다. 김생원께서도 이거 실례의 말씀인지 모르겠소만 상투 자르고 양복 입는 것만 대역이요 불효막심한 이라고 할 게 아니라, 또 양이니 왜구니 하고 유아독존의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조선땅의 수백 배나 넓은 세계가 어찌 돌아가는지 그것을 아셔야 한다 그 말이오." - P39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러일전쟁이 왜 발발했는지 배경을 살펴보자. 일본인들이 전보국과 우체사를 점탈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러시아와 내통하여 군사 기밀을 누설할까 싶어 두 기관을 점령한 것이다. 청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한 뒤 러시아가 만주를 차지한다. 이에 영국 미국 독일이 청나라에 영토를 할양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일본은 여기에 보조를 맞추면서 반러시아 전선을 구축하며 1902년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었다. 러시아는 1902년 4월 8일 만주를 청나라에 반환하고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내용으로 청국과 협정을 맺었으나 러시아는 남하하면서 만주에 대한 독점권과 몽고에 대한 간섭권을 의미하는 새 요구를 청에 제시한 것이다. 러시아의 의지는 일본에게는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왔고 이는 전쟁의 불씨가 된다.


2월 8일<음력 12월 23일이다> 일본군 6천 명이 남양(南陽) 해안에 상륙했으며, 3천 명이 또 옥구(沃溝) 군산항으로 상륙하여 아산(牙山) 백석포를 향해 나아갔다. 또한 삼화(三和) 증남포항으로도 상륙했으며, 6천 명이 또 덕원(德源) 원산항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부산 창원 대구 세 곳의 전보사(電報司)를 점거했다.
일본 외무 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각국 공사 및 내외국 신문기자들에게 일본과 러시아가 교섭한 전말[日俄交涉始末]을 발표했다.『대한계년사 7권』 - P25
러시아 2등 순양함 와리야크호와 포함 코리에츠가 며칠 전 인천항에 와서 정박했다. 2월 8일 일본 군함 10여 척도 역시 팔미도에 도착해 정박했다.
2월 9일 인천항의 일본 영사가 러시아 군함에게 물러가라고 타이르기를, "거절한다면 오늘 오후 4시 이전에 물위에서 공격을 당할 것이다" 했다. 오전 7시쯤 일본 함대사령관이 러시아 군함에게 말하기를, "오후 4시 전까지는 인천항에서 물러가라" 하니, 러시아 함장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당장 팔미도 밖 해양으로 물러나가 전투를 벌이자" 했다. 러시아 포함이 먼저 닻을 거두어 올리고 순양함이 뒤이어 닾을 거둬 올려 출항했다. 오전 11시쯤 겨우 팔미도 밖으로 몇 리쯤 나갔는데, 한 발의 포 쏘는 소리가 쾅하고 굉음을 울리며 진동했다. 일본과 러시아 군함에서 나오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득 덮쳤다. 『대한계년사 7권』 - P25~26
같은 날 인천항 주재 러시아 영사가 인력거를 타고서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 왔다. 이날 오후 4시 일본 군함이 여순(旅順) 항구를 습격하여, 러시아 전투함 두 척과 2등 순양함 한 척을 격파했다. 2월 10일<음력 12월 25일이다> 일본이 전쟁을 알리는 황제의 지시를 내렸다. 『대한계년사 7권』 - P27


"뭐라구요? 우리나라가 왜국하고 공수동맹(功守同盟)하기로 의정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 말씀이오?"
어느 날 서울 소식을 말해주는 조준구를 보고 그가 도장을 찍은 당사자이기나 하듯 김훈장은 펄쩍 뛰면서 화를 냈다.
"일본군이 제물포에 상륙하자 아라사 공사인 파블로프는 창황히 달아나고 장안을 활보하는 것은 무장한 일본 병정이니 무슨 수로 대적하겠소. 아닌 게 아니라 서울에선 그 의정서 까닭으로 민심이 소란해졌다 하더구먼요. 이지용대감댁(외무대신 서리)에 폭탄을 던진 사건도 있었다 하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친로파의 거두 이용익(李容翊)을 잡아 일본으로 데려갔다 하고 아마 살해되었으리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특파대신(特波大臣)으로 내한하면서 일본에 아부하는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며 일군들이 주둔함으로써 넓은 땅이 군용지로 징발되고 통신망도 접수된 것은 이미 체결된 의정서에 의한 것이거니와 심지어는 군사행동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연해 어업권이며 전국에 흩어진 황무지의 개간 권리까지 일본 수중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전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 봉황성(鳳凰城)을 함락시켰고 여순항(旅順港)을 봉쇄했다는 것이다. - P46~48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제로 인해 한일의정서를 맺게 된다. 전문 6조로, 일본으로 하여금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증, 시설의 개선에 관한 권고 등을 비롯 일본군에 적극 협력하고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등의 조건이 들어가 있다. 이 중 4조의 내용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일본이 나아갈 길에 조선이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는 친선과 우의를 강조하나 이것이 어딜 봐서 친선국에 대한 행세인가? 조약을 빙자한 침탈이 아닐 수 없다.


제1조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오래도록 변함 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신하여 시정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제2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확실한 친선과 우의로써, 대한제국 황실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한다.
제3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을 당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생길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형편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행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 정부는 위의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앞 사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형편에 따라 수용할 수 있다.
제5조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서로 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는, 앞으로 본 협정의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 간에 맺을 수 없다.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되는 미비한 세부 조항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 대신간에 형편에 따라서 협의해 결정한다. 『대한계년사 7권』 - P45


"듣자니까 민대감[閔泳煥]이 자결하셨다 하지 않소."
"어디 민대감뿐이겠소. "
"조병세 대감께서도."
"팔십 노구를 이끌고 가평서 올라와 정청(庭請)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쫓겨났다 하오. 그래 가마 속에서 음독 자결하신 모양이오. 홍만식 참판도 자결하고, 자결할 사람이 앞으로도 속출할 것이오.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둥."
"찢어 죽일 놈들! 노약에 도장을 찍은 다섯 놈들을 밟아 죽여야 하오!"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지요. 일본은 오조약에 도장을 찍은 그 사람들 아니라도 얼마든지 오적(五賊)을 만들어낼 거요."
"세상에 협박 공갈하는 보호조약도 있답디까?" - P187~189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천황의 특사로 서울에 왔다. 그는 천황의 칙서를 들고 왔는데 거기엔 동양의 평화라느니 조선의 안전이라느니 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또 두 나라는 친선과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조선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일본은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고종은 이를 읽고 치를 떨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토는 며칠 뒤 한일협상조약을 내밀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에서 이를 대신하며 외교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인 통감(統監)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 조항이 다섯 가지여서 을사5조약이라고 부른다. 고종은 이토의 강압을 뿌리치고 서명을 거부했다.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9권』 - P164~165




11월 9일<음력 10월 13일이다>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로 들어왔다. 11월 10일 황제를 만나 뵙고 일본의 국서를 삼가 바쳤다. 그 글에 이르기를, "나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했으니, 한결같이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또 말하기를, "국가의 방비는 내가 튼튼히 할 것이요, 황실의 안녕도 보증한다." 했다. 나는 지금 천황 폐하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귀국과 네 가지 큰 안건의 조약 문서를 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그것을 내보였다. "하나, 황실을 안녕히 할 일. 둘, 한국의 외교권을 도쿄로 옮길 일. 셋, 한국을 통감부 아래에 둘 일. 넷, 통상조약은 예전대로 할 일."

'5조약'이 조인되었다는 말이 전파되어 나가자, 신사(紳士)와 인민 남녀 노소가 모두 매우 분격하여 치를 떨었다. 한숨을 쉬는 사람들과 길게 목놓아 통곡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대한계년사 7권』 - P133~170


을사조약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조선은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조선은 외국에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의 조서를 전달하며 고압적 자세를 유지하였고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갔다.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나서 백성들은 물론이고 많은 관료들이 울분에 차 자결하는 일이 일어났다.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은 일본제국으로 넘어갔고 새로운 실권자를 추종하는 새로운 세력군이 형성되는 혼돈 속에 권력과 동반하게 마련인 경제의 유동, 그 중에서도 후일 대다수의 농민들이 피땀에 전 땅을 버리고 남부여대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게 한 악명 높은 착취기관 동양척식회사 설립의 소지는 다져지고 있었다.
이런 내세에서 고고하게 현실에서 몸을 사리던 선비들이 그러나 강의(剛毅)하게 일어선 항쟁은 물거품이었고 1907년에 들어서서 헤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으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던 고종이 그나마 퇴위하는 비극과 훈련원에서의 조선 군대의 해산은 빈사의 목숨에 마지막 칼질이었다. 그로 인하여 참령 박승환(朴勝煥)은 자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무기고를 부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들은 남대문에서 일군과의 처참한 교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 서울로 일 갔었던 윤보가 뛰어들었던 것이다. - P338

1907년 7월 31일 이완용은 임금의 조칙을 날조해 군대 해산을 지시했다. 연성학교와 군악대까지 해산하도록 하고 시위대 1개 대대만 남겨 두었다. 서울에는 삼엄한 계엄이 펼쳐진 가운데 각 대장에게 8월 1일 오전 10시 맨손으로 군사 연습을 할 터이니 무기를 휴대하지 말고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인들이 병영을 떠나자 일본 군인들이 일본군 조교의 안내로 무기를 거두어 갔다. 시위대 제1대대장 박성환은 사태를 짐작하고 무기고에 굳게 자물쇠를 채우고는 무기를 일본 교관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는 훈련원에 가지 않고 남아 있다가 군대 해산식이 있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통곡을 하며 "나라가 망했다"고 외치면서 칼로 배를 찔러 자결했다. 이를 본 부하 장교 두 사람과 군졸 한 사람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결했다.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9권』 - P184~185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설립해 토지를 침탈하고 관리에 나서도록 했다. 말이 주식회사이지 실제로는 통감부의 지원을 받으며 반관(半官)의 역할을 맡았다. 이 회사는 서울에 본점을 두고 도쿄와 지방에 지점을 두었다. 설립 초기 전국에 10개의 지점을 두고 통감부에서 약탈한 국유지를 인계받아 관리했다. 이들 토지는 주로 일본인에게 불하했다. 1909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1만 2,064정보였다. 그러면 왜 도쿄에도 지점을 두었을까? 바로 일본인 농업이민을 주선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자본이 있거나 수완이 좋은 일본 농부는 농장주가 되어 많은 논밭을 가지고 조선인 노동자를 두고 농사를 짓거나 소작을 주어 소작료를 챙겼다. 이 무렵 일본인 농장주가 차지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보다 많은 3만여 정보를 헤아렸다. 일본 자본가들과 농장주들은 땅을 사서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다.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9권』 - P189

항일투쟁은 을사조약을 거친 뒤 고종의 양위, 정미7조약, 군대해산, 토지 탈취 등의 사건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고양되었다. 관동, 호서, 영남지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서울 동쪽 여러 고을에서도 일시에 호응했다. 왜인들이 연달아 정병을 뽑아 토벌하게 했으나 지리에 어두워 진격하고 후퇴할 적에 길을 잃었다. 의병들은 천리에 연이어 험한 산세를 의지해 나오고 사라졌기 때문에 왜군들은 피로에 지쳐 패전을 거듭했다.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9권』 - P203
일본 토벌대와 현지의 수비대들은 의병들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무고한 민간인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세가와 일본군 사령관은 "비도들과 연계해 도와 주는 고을은 불태워 버리고 온 동리 사람을 죽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1907년 8월부터 12월까지 다섯 달 동안 충청북도에서는 민가 1,078호, 경기도에서는 769호가 불탔으며 제천, 홍천 등지는 수를 헤아리지도 못할 지경으로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다 한다. 이렇게 일본군 토벌대가 포악해지자 주민들은 일본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모조리 산 속으로 숨었으며 토벌대의 신문을 받은 동네 아낙네들과 주막집 노파는 벌벌 떨며 거짓말을 보태 일러바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세가와는 토벌대를 증강하고 농촌에 수비대와 헌병분견소를 증설했으며 남해 일대에는 수뢰정, 경비정을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의병들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더욱 강력하게 펴서 마을을 고립시켰다. 이것이 남조선 대토벌작전의 전초였다.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9권』 - P205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시도를 했다가 일본의 입김에 의하여 강제 퇴위를 당하고 이후 정미 7조약, 군대 해산,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토지 침탈이 이루어지며 국내 정치, 경제를 잠식해갔다. 이에 유생을 비롯한 농민들은 의병을 일으켰으며 서울에서 시작된 것이 전국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초반에 의병의 세력들을 물리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의병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행위로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제 일본군은 조선 의병들을 해치우지 않고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남조선 대토벌작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4권을 마지막으로 평사리에 있었던 최참판댁 식구들은 조선 땅을 버리고 모두 간도로 이동하게 된다. 외국에서의 삶이 어찌 쉬울까. 안 봐도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과연 그들의 행적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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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9-30 17: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께서는 워낙 역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으셔서 토지를 읽으며 그 배경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역사가 숨가쁘게 흐르고 거기에 따른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 보여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9-30 17:28   좋아요 2 | URL
토지 읽으면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역시 더 재밌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개항기 이후 강제병합 직전까지의 역사가 워낙 역동적이어서 소설 속에서도 많은 사건들이 다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나라가 어려우니 백성의 삶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죠. 권력에 아부하고 빌붙은 이, 돈 많은 지주만 승승장구하는 세상이 되니 안타깝죠.

mini74 2022-10-02 1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지 읽으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가 그 시절 역사적 사건을 양반 민초 등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 화가님이 역사와 이야기를 오고가며 이렇게 리뷰 써 주시니 좋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10-02 21:19   좋아요 1 | URL
저는 인물에 대한 묘사를 통해 심리를 분석하고 이런 것은 영 안 되고 그래서 마침 역사 소설이라 관련 역사와 접목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정성을 알아주셔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적어나가려구요^^
 


귀녀에게 진심이었던 이는 강포수 뿐이었으나 그녀는 죽기 전까지도 그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말만 해댄다. 그러다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강포수에게 미안함을 전하는데 그 장면이 왜 그리 짠하던지. 강포수가 귀녀에게서 종국에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슨 죄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 귀복이와 한복이, 홍이 등이 그랬다. 부모의 잘못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났으나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고향에 돌아온 이들. 이 중 한복이는 참 잘 크고 있구나 싶었다. 어찌나 생각이 바른지. 부모가 다 죽고서도 그리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역병과 흉년으로 많은 이들이 죽는다. 천재지변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겠나. 하지만 내가 어려우면 주변을 배척하기 쉽다. 그걸 보듬고 함께 가는 이가 대단한 것이겠지. 마을의 인심이 사나워지고 흉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틈타 삼수 같은 놈은 지 살길 때문에 은혜를 베풀었던 이들을 배반하고 뒤통수를 친다. 어찌 보면 줄타기를 잘하는 처세에 능한 것이겠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게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 홍씨가 등장한다. 조준구의 본처답구나. 쓰레기 옆에는 쓰레기가~? 하는 생각을 절로 했다. 무너진 최씨 집안을 어떻게든 꿰차겠다는 부부의 행태는 똥물을 튀겨도 시원치 않은 일이었다. 삼수와 조가 부부가 등장할 때마다 울화통이 터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3권의 역사적 배경은 외국 열강에 하나 둘 이권을 뺏기는 조선의 상황이 드러난다. 거기에 서재필, 어윤중, 이용익, 이범윤 등의 인물을 통해 당시의 조선 내외의 혼란상을 엿볼 수 있다.

'각처에 왜인들 은행이라는 게 생겨서 한전(韓錢) 어음까지 떼는 판국이니 장차 어찌될지.... 노상 하는 말이오만 큰일이외다.'
'지각 없는 사람들은 서울 제물포 사이에 나는 듯한 철마가 달리고 종로 네거리에는 전등불이 휘황하며 한강에는 철교를 놓았다 하여 신기해들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을 우리네가 만들고 우리네 임의로 한다면야 반가운 일이지요. 우리들도 남들만큼 나라 사정이 달라져야 할 테니 말이오. 헌데 그 내막을 알고 보면 가슴을 칠 일이고 숫제 쓸개를 뽑아서 갖다 바친 꼴이지 뭐겠소? 듣자니 서울 제물포 간의 철도만 하더라도 그 권리를 얻기 위하여 미국인이 임금 관계 대신에게 막대한 금액을 헌납했다는구려. 나라에서 그네들에게 철도를 부설하는 땅을 빌려주었으면 정당한 임대료와 권리금을 떳떳하게 받아야 하거늘 상호 간의 약정서의 내용이라는 게 실로 해괴하다 하오. 또 하나 해괴한 일은 그 권리마저 이문을 붙여서 미국인이 왜인들에게 팔아넘겼고 왜인들이 그것을 성사했다 하지 않소?'
'어디 그뿐이겠소. 도처에서 우리 금광을 파헤쳐서 각 나라들이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다 하오. 허가도 없이 마구 덤벼서 도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오. 산의 나무들도 저희들 마음대로 베어 팔고 바다의 고기도 저희 마음대로 잡아가고 삼포(蔘圃)를 강점하는가 하면 조선옷 입은 왜인이 작당하여 수 년을 정성 들여 키운 삼을 모조리 뽑아가고 백성들 재물까지 약탈함이 다반사요.' - P60~62


1876년 개항 이후 1894년 사이에도 열강의 경제 침탈이 있었지만 1895년 이후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열강들은 수출을 통해 이득을 얻기보다 이권을 앗아가는 일에 더 역점을 두었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그들이었다. 이권을 차지한 나라들은 이권을 철저히 확보한 뒤 온갖 특권을 누렸다. 








주요한 이권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일본
1898년 서울-부산 사이 철도 부설권
1900년 직산금광 채굴권
1900년 경기도 연해 어업권
1901년 인삼 독점적 수출권
1903년 평양 무연탄 채굴권
  • 미국
1895년 운산금광 채굴권
1896년 서울-인천 사이 철도 부설권(뒷날 일본에 팖)
1898년 서울 전차, 전등 및 수도 경영권
1899년 서울-개성 사이 철도 부설궐
  • 러시아
1896년 경원과 종성금광 채굴권
1896년 경성 석탄 채굴권
1896년 두만강, 압록강 및 울릉도 산림 채벌권
1897년 해관 관리권
1899년 동해안 포경권
  • 영국
1896년 해관 관리권
1898년 은산금광 채굴권
  • 프랑스
1896년 서울-의주 사이 철도 부설권
1901년 창성금광 채굴권
  • 독일
1897년 금성금광 채굴권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권』 - P12~114

보면 알겠지만 조선에 남아 있는 이익이 이제 무엇이 다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 넘어간 것을 알 수가 있다. 철도 부설권은 일본이 거의 대부분 가져갔고 운산금광은 당시 순금이 터지는 잭팟 금광이여서 나오는 족족 금이 쏟아졌다고 한다. 러시아는 백두산 아래 나무들을 벌채하여 만주 철도를 부설하는 데 버팀목으로 사용하고자 했고 거기에 사용되는 석탄도 조선에서 공급하려 했다. 국경 지대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피폐해졌음이 틀림없다.


"그분이 돌아와서 외무대신 자리를 마다하고 신문을 만들고 몽매한 백성을 깨우치려 노력하였지만 실상 그분의 본업은 의학박사였단 말씀이오. 그런 양반이 이곳에 부질 못하고 돌아갔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소."
"글쎄올시다. 상감께서 지나치게 소심했기 때문이지요. 왕실을 없이하고 미국처럼 대통령을 뽑을까 두려워하신 나머지, 이래가지고는 나라가 안 망하고 어찌 견디겠소? 나라 꼴이 제대로 되려면 식자들이 먼저 깨달아야 하고 서재필이 그 양반과 같이 서양문물에 밝아서 반상(班常)의 구습부터 타파해야 할 것이오."
"서양문물에 밝은 것도 좋고 반상의 구습을 타파하는 것도 좋고, 허나 서재필인가 그 양반같이 되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소? 그 양반이 명문의 자제로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겠는데 이십 세의 약관으로 장사들을 이끌고 국사를 바로잡을 충심에서 거사한 것도 장하고 만리타국, 말조차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에 가서 빈주먹으로 의술을 배운 것도 장한 일이었소. 허나 그 양반이 어디 우리나라 백성이오? 이름 석자를 버리고 그곳 이름에다 그 나라 백성이 되었고 그 나라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근본이 잘못 되어버린 그 사람 본을 따는 것은, 글쎄올시다. 산간벽촌에서 침이나 꽂고 약방문이나 쓰는 늙은이 소견에는." - P142~144


서재필은 영은문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영은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개선문 같은 조선 독립의 상징물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과 함께 신문사 설립과 민권단체인 독립협회 결성을 서둘렀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에 창간되어 정부와 독립협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이라는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자주권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곧 전통적 사대질서를 거부하고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것이다. 이때의 독립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자는 의미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이해 가을부터 활발하게 토론회를 벌였다. 서재필과 윤치호 주도로 일요일마다 벌였던 토론회는 1년 동안 34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하급 벼슬아치, 유학을 다녀온 신청년, 각급 학교의 교사와 학생, 심지어 장사꾼들까지 참석해 자리를 메웠다. 토론장소는 서대문 언저리에 있는 예전 경기감영의 내아(內衙)나 독립관 등이었다.처음에는 머리를 깎아야 옳으냐" 따위, 사회 인습의 개량, 위생과 청결 등을 주제로 삼았으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문제 등을 다루어 친러파와 대립하기도 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권』 - P121~124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주역이었다. 김훈장의 시선은 이해할 만하다. 그는 미국인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다만 그가 독립협회를 만들고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점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이전 토지 2권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고종은 독립협회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고 보부상들의 단체인 황국협회를 뒤에 조종해서 독립협회를 탄압한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용납할 수 없었던 고종이었다.

"이십 년이 넘었구먼.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있을때 말이오. 그때 청나라 정부에서 도문강(圖們江) 동북에 있는 조선사람들을 쫓아내려 했었거든. 그래서 어윤중이 그 양반이 종성(鐘城)의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시켜서 백두산을 탐색하게 하고 정계비(定界碑)를 찾았는데 정계비가 있는 것은 도문강이 아니요 토문강(土門江)이었더란 말이오. 그 강은 북쪽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으로 빠지거든. 그러니 청나라 사람들 말문이 막혀버린 게요."
"어윤중이 그 양반은 착실한 살림꾼이었는데 백성들한테 맞아 죽다니, 그 양반 친일할 사람도 아니고 친로할 사람도 아니고 청나라하고 손잡을 사람도 아니요, 나라에 이득이 된다면 누구하고도 친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니겠소. 그걸 백성들이 알아야 하는데...." - P272~273

두만강 국경 관련하여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책을 통해서 살펴본 바가 있었다. 간도 지역은 1877년 조선인 14가구가 용정에 처음 정착했다. 본래 있었던 세금 폐해에 이 무렵 조선에 심각한 자연 재해가 발생하자 많은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워졌고 이에 자발적으로 간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했으나 이후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국경을 정하기 위한 청나라 측과의 회담이 열렸는데, 1차 회담에서는 백두산정계비에 기재된 토문강이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주장하는 청나라 측과 두 강은 서로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는 조선 측이 의견을 조율하지 못해 무산되었고, 2차 회담에서도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각각의 주장을 지도로 남기고 결국 국경을 확정하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어윤중은 이 협상에 참가한 당사자다. 을미사변 후 이어진 개혁에서 친일 내각이 탄생하고 어윤중은 탁지부 대신으로 임명된다. 고종과 친러파의 합작으로 아관파천이 이루어지고 기존 조정 인사들은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는 김홍집 등이 성난 군중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고향으로 피신하는 길에 사망한다.


제4차 김홍집 내각(친일 내각)은 내외의 비난 속에서도 급진적 개혁을 단행했다. 더욱이 민비시해사건으로 미우라가 소환되고 책임을 묻는 급박한 정세 아래 국가의 중대사가 연달아 결의되어 고종의 재가에 올려졌고 고종은 이들 안건에 수결을 놓기에 바빴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권』 - P58~59








전 탁지부 대신(前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이 귀향하다가 용인(龍仁)에 이르러 거주하는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 『고종실록』 建陽 원년(1896) 2월 16일


"이곳에서의 법이란 곧 주먹이야. 담판을 해야 한다구? 그건 한 시절 전의 체면이나마 생각하던 시절의 얘기 아닌가. 이부사가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줄일 수 없노라 했던, 그 시절 말일세."
이부사랑 1887년 도문강(圖們江)을 중심한 국경 분류로 인한 담판에 감계사(勘界使)로 참석했던 당시 안변부사(安邊府使)였던 이중하(李重夏)다.
"총 휘두르는 놈이 땅 한 치라도 더 먹게 돼 있지. 서울서 군병을 주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 나도 이부사 같이 내 목 내어놓고 사포대(私砲隊)를 모을 수밖에. 우선 병영(兵營)을 설치해놓고 힘으로 대항하는 게야. 우리 백성들이 남부여대하여 찾아와서 피땀으로 일궈놓은 땅을 왜 내놔? 어림없는 소리지." 이범윤의 말이었다.
'서울서 군병을 보내? 죽은 나무에 꽃 피기를 바라지. 유약한 상감, 파벌싸움에 영일이 없는 정상배들! 한 치 앞이 눈에 봬야 말이지. 하긴 나라 안도 지키지 못하는 마당에서. 대궐 안도 지키지 못하는... 결국 사포대를 만들어 그곳 백성 스스로가 힘을 뭉쳐 대항할 수밖에 없겠지.' - P293~294

이범윤(李範允, 1856년 12월 29일 ~ 1940년 10월 20일)은 구한말 시대 복벽주의 성향 독립운동가이다.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여 국내침공작전을 추진했다. 대한제국에서 변계경무서 예하 북변간도관리사 직책을 지냈다. 그는 간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1903년)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였다. 이범윤은 이 지역의 포수들로 자위적 성격의 군대인 사포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사포대가 향후 간도 지역 의병운동의 한 기반이 되었다. 「위키피디아 이범윤」

이범윤은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군대와 연대하여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6년 이범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망명했다. 이후 이 지역에 이미 기반을 잡고 있었던 최재형의 도움으로 기반을 닦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삶을 살았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다. 외국에 이권들은 넘어갔고 개항 이후 열강들과 차례로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이 강산은 무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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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리뷰로 100자평을 쓰기는 했지만 책의 내용 중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을 나누어야겠다 싶어서 더 늦기 전에 글을 쓴다. 나는 이론을 갖다 대거나 다른 책을 대기에는 공부가 부족하여 체험과 생각을 나누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디지털 미디어의 사례로 든 ASMR, 인스타그램, 유튜브, 웹툰 등등은 모두 내게 낯선 것들이었다. 그나마 게임 개발자의 챕터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이머들의 비율은 남성이 많은 편이고 게임 개발자도 압도적으로 남성 개발자들이 많다. 여성 개발자들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비율은 차이가 크다. 또 온라인 공간의 게임에서 여성 게이머들이 얼마나 많이 폭력에 노출될까. 한 회사에서 여성 개발자들이 얼마나 일할까 싶은데 그 안에서도 여성 개발자들간의 커뮤니티는 활발하지 못하다.

"MMORPG 게임은 거의 남성 중심의 게임이고, 기획, 개발자도 대부분 남성이었고, 조직 문화에서도 여성이 뭔가를 주도해서 하기는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조직 내에서 발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이었어요. 그래도 저는 여성 동료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 P295

IT 업계가 3D 직종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하는데 게임업계는 특히 그렇다. 게임 업계에 종사하는 지인이 있는데 그분은 개발자는 아니고 DBA다. 그분을 통해서 게임업계가 돌아가는 세계를 간접적으로 듣곤 했다.

요즘은 그나마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게임이 오픈할때쯤이면 게임 개발자들은 비상이라 밤샘 근무는 허다하고 주말에도 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밤에 갑자기 불려나가는 경우도 있다.
게임 오픈 후에는 더하다. 책에서도 개발자들의 체험 이야기가 실려 있지만 최소 6개월 정도는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팬더곰이 되기 십상이다.

책의 체험기들이 너무 생생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기혼인 여성 개발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커리어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얼마나 절절하던지. 그나마 대기업은 휴가 제도, 육아를 위한 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다지만 중소기업은 그런 제도들이 갖춰 있을리가 만무하다. 제도가 갖춰져 있다고 해도 여성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그 제도를 고스란히 잘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저는 일을 하면서 봤던 분 중에 유일하게 한 분이 결혼과 임신 이후에 게임 개발자 일을 계속했어요. 그 분은 팀장이었는데요. 예전에는 "저렇게까지 독하게 일을 해야 할까"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도 "회사의 구성원이 되려고,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P294

게임 업계는 아니지만 나는 IT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모든 직업인들이 겪는 고충이겠지만 개발자는 일명 버그(bug), 오류와의 싸움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오류는 단시간에 고쳐야 하고 오류는 가능하면 만들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제품이든 오류가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개발자들은 이 때문에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게임 업계는 게임이 오픈되면 수많은 게이머들로부터 폭탄 세례를 받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빨리는 일이다. 나도 어떤 제품을 만들어 팔지만 소수의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유로울수는 없겠지만 게임 개발자들의 고충을 보니 내 고충은 고충도 아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프라인에서 소비자들을 만나는 것처럼 온라인에서 직접 소비자들을 항시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게임은 자리 잡기 어려워요. 게임 출시 준비를 하는 1년 정도가 체력적으로 소모가 엄청 심한 시기에요. 이 시기를 잘 버티지 못하면, 게임 준비에 들인 노력이 모두 사라져요." - P289

"대박난 게임이 없으면 개발하다가 그 팀이 없어지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게임 테스트 과정에서 평가가 좋지 않으면 하루 아침에 그 팀이 없어지는 거죠. 게임이 드랍되면 개발자는 실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거고, 그럼 회사에서 나가야 해요. " - P292

또 하나 든 생각은 오래 업계에서 일한 여성 개발자일수록 잘못 쓴 계약서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것은 비단 여성 개발자라서 생기는 일이라기 보다는 보편적인 이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노동자의 생계와 직결되는 이슈다. 보통 회사와 계약을 하는 노동자들은 계약서의 세세한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신입 때는 그 내용을 잘 모르기도 하고 눈여겨 보기도 힘들다. 입사해서 들어왔는데 막상 자신이 상상하며 그리던 환경이 아닐 때가 너무나 많다. 1차 계약인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하도급으로 2차, 3차 계약인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수수료가 이중으로 떼이는 경우도 발생한다. 지금은 초봉이 좀 올랐겠지만 내가 처음 입사해서 받은 연봉은 말도 안되는 낮은 금액이었다. 그 때 그런 금액을 받고 일했고 심지어 불합리한 조건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퇴직금, 추가 노동에 대한 부분 등 수도 없다.

게임 개발의 성공에만 집중하는 회사의 조직 문화로 인해 게임 개발자들은 계약 과정에서의 문제를 인지하거나 개선을 요구하는 발언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개발자는 인센티브만을 바라보고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제 일을 그만두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이기 때문에 성과를 내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 P292

모든 노동 업계의 문제겠지만 여성 게임 개발자들의 처우가 더 나아지길 바라는 소망이 크다.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로 노동자를 사망 또는 사상에 이르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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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8 2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게임이나 IT업계에서 여성이 버티기가 더 힘들다는 느낌이 확 와닿네요. 저런 일은 진짜 육아나 가사노동을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여성들이 대신해주면서 남성 IT업계의 노동자들이 뼈를 갈아넣는 현실을 유지하는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성들은 그런 서포트를 못받으니 도태되고..... 이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저렇게 뼈를 갈라넣은 남자들도 나중에 보면 가족은 모두 떠나 있고 자신은 가정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는 지경이 될테고....
우리나라의 노동조건이 가장 첨단 산업에서 오히려 전근대에서 헤매고 있는 상황 자체를 문제삼아야 하는거 맞죠?
화가님도 IT업계에서 일하시느라 고생많으시겟어요. 에휴 토닥토닥 위로를 전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9-29 09:26   좋아요 3 | URL
네. 게임 업계는 특히나 여성개발자로 일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미혼도 힘들텐데 기혼은? 애까지 있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갑갑해집니다. 뼈를 갈아넣는다는 말씀이 맞아요. 저도 거의 대리급 정도까지는 밤샘 근무는 여사였어요. 사정을 봐주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게다가 젠더 인지 감수성도 굉장히 부족한 업계입니다. 성희롱과 성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_-; 저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게임 캐릭터들이 대부분이 소녀 캐릭터가 많은데 그런걸 보는 여성 개발자의 마음은 어떨까~ 저는 동공지진일어날 것 같더라구요. 게임이 좋고 게임 개발자가 하고 싶어서 들어간 여성 개발자들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2-09-29 0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부분 읽으면서 화가님은 괜찮으신가? 걱정되었습니다. IT업계에 일 하신다던데...직접 묻기도 그랬었는데 이렇게 리뷰를 읽으니 책에 나오는 게임 개발자들만큼은 아니라고 하셔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업무의 고충이 크실 듯 합니다.
예전에 90년도 후반쯤에도 남편의 중학 동창을 함께 만나 얘기를 했었는데 IT쪽 게임 개발업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때도 밤샘 근무를 밥 먹듯 하고 있어 늘 피곤해 하더니 결국 몇 년 못버티고 이직을 했다더라는 이야기도 생각났어요.
남자도 버티기 힘든 강도의 업무를 여성이 특히 기혼 여성들은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가히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특히나 게임 온라인상에서 여혐이 그렇게나 심각하다니...책을 읽으면서 충격이었어요.

거리의화가 2022-09-29 09:32   좋아요 3 | URL
아이고~ 나무님^^ 제 걱정을 다해주시고 감사합니다^^ 오류와의 싸움이죠. 사실 제품을 항시 만드는 것보다는 제품을 만들고 유지보수하는 기간이 더 길거든요. 그래서 욕을 항시 먹는 그런 직업입니다ㅠㅠ
기혼이고 육아까지 하는 여성 개발자들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나마 애가 없지만 만약 제가 애가 있었다면 다닐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온라인 게임 대부분이 채팅 기능이 있거든요. 저는 게임을 하지 않지만 옆지기가 게임 마니아라 옆에서 보다 보면 할말하않. 채팅 기능으로 얼마나 여성 게이머들이 폭력에 많이 노출될까 싶어요. 캐릭터의 문제도 있구요.

2022-09-28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9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9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9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2-09-29 09: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지만 딱히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부분이었거든요. 저도 노동자이기는 하지만 게임 개발을 전후로 그렇게나 미친듯이 일을 해야 한다니.. 그런데 거리의화가 님이 그 부분의 글을 써주셨네요. 같이읽기가 왜 좋은지 거리의화가 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습니다. 우린 한 권의 책을 같이 읽는데 읽는 사람마다 말하고 싶어지는 지점, 말할 수 있는 지점이 다르잖아요. 너무 좋네요, 화가 님. 잘 읽었습니다. 너무 좋아요! 거리의화가 님, 앞으로도 계속 함께 읽어주세요!

거리의화가 2022-09-29 09:43   좋아요 2 | URL
여성주의 책을 함께 읽으며 좋은 지점이 그것인 것 같아요. 제가 나눌 수 있는 부분은 경험이나 소감 나눔 정도지만 서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참 많은 도움이 되는 듯 싶어요.
다락방님이 리딩도 잘해주셔서 더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다음달 책 포르노랜드 읽으면서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을까 걱정은 됩니다만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mini74 2022-09-29 12: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린세스메이커란 게임 생각나요. 예전에 유행했던 게임인데 정말 싫었거든요. 키우는것도 결말도 ㅠㅠ 조카들 셋이 그쪽에서 일하는데 ㅠㅠ 여자조카 이야기 들어보면 ㅠㅠ 그렇습니다. 화가님도 고충이 많으시겠어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9-29 13:09   좋아요 2 | URL
여자조카 이야기. 안봐도 그려지는 듯합니다ㅠㅠ 게임들은 왜 다 캐릭터가 다 일률적이고 스토리도 그럴까요? 여성에 대한 비하나 차별이 보여서 너무 불편합니다.
고충은... 이제 제가 몇 년이나 이 업계에 있을지 모르겠어요. 남은 날까지 잘 버텨야지 그런 생각만 합니다^^;;;

독서괭 2022-09-30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방금 리뷰 쓰면서 이 꼭지에 관해서는 게임개발자 두명의 인터뷰만 있어서 아쉽고 연구가 더 진행되면 좋겠다고 썼는데, 화가님 글 보니 두명의 인터뷰어라도 여러 가지 내용을 풍부하게 담아냈구나 싶기도 하네요. 그렇지만 여성개발자가 회사에서/회사밖에서 당하는 차별이라든지 젠더폭력에 관해 좀더 깊이 써줬으면.. 했어요. 너무 중요한 부분인데요. 하긴 짧은 글들에 <레이디 크레딧> 같은 내용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요^^;; 갑자기 제 욕심이 과했다는 생각이. .횡설수설..
아무튼 화가님도 IT업계에서 일하시며 많이 고생을 하셨고/하고 계실 듯 합니다. 몸을 잘 챙기시길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9-30 18:22   좋아요 3 | URL
괭님 인터뷰어 숫자보다는 저도 젠더 차별과 폭력에 대해 깊이있게 다루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때문에 저도 제 체험 이야기를 두루뭉술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쉽습니다. 향후 이런 연구서가 나온다면 이 부분을 보강해주면 좋겠어요.

- 2022-10-04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IT, 온라인 노동은 정말인지 상시 노동이라는 게 가장 큰 힘듦인 것 같아요. 플랫폼 노동도 그렇고. 저도 할말 많은 프리랜서라서 할말이 진짜 많은데... 온라인 노동에는 퇴근이 없다..(출근도 없지만ㅋㅋㅋ)..... 진짜 그토록 한세기 넘게 빡세게 노동운동 하면서 얻어낸 노동법 다 쓰레기로 만드는 메타버스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다 새로운 기회 새로운 시장 돈벌자~ 와랄라랄라랄라라~이러고 있는 거 너무 슬프고...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돈벌어야 하는 내 신세 나도 슬프고...
암튼 이렇게 화가님의 입장에서 쓰인 글을 읽으니까 또 좋군요! 읽느라 일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0월에도 화이팅! ^^

거리의화가 2022-10-04 17:54   좋아요 1 | URL
온라인 노동... 생각만 해도 힘드네요^^; 퇴근이 없는 일이라니ㅠㅠ 쟝쟝님도 고생이 많으세요~ 먹고 사는 것은 왜 이리 고달픈가 싶네요~!
제가 볼 땐 있는 노동법 잘만 지켜도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기업에서는 법을 피하고 악용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니 화가 납니다. 이 달에 읽을 책이 저는 걱정되네요~ㅠㅠ 쟝쟝님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