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ce, across the Aegean Sea, was a completely different kind of country. Ahtens and Sparta were the largest Greek cities, but the people of these two cities lived in very different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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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350~1750 - 세계 제국과 대양 하버드-C.H.베크 세계사
볼프강 라인하르트 지음, 이진모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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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룰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세계'는 아직 아무런 교류 없이 서로 분리된 채였다. 심지어 '대서양 세계'는 이 시기에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대서양의 동쪽 세계와 서쪽 세계는 서로 역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상호작용은 계속 증가해 점차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다루려는 다섯 세계의 역사는 전 지구적인 오늘날 세계의 전사(前史)다. 그리고 이 다섯 세계의 역사에 관한 서술은 모든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각각 그 지역들의 현재적(정치적·경제적) 관심사의 영향을 받게 된다. - P14

이 책의 목차를 먼저 살펴보자.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해 이슬람 세계, 남아시아와 인도양, 동남아시아와 대양, 가장 마지막이 유럽과 대서양 세계를 다룬다.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하는 것이 낯설 수 있지만 시기를 주목하면 이해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18세기는 몽골이 지나간 자리에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고(유럽까지) 서양이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찾으면서 대서양까지 확산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순서가 이렇게 배치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섯 세계의 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키워드는 상호성과 교류, 소통이다. 세계는 이어지고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때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만 주목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거나 도태된 많은 부족과 국가를 다룬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피해가 있었던 점을 보여주어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한 점이 좋았다.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친 어떤 과정들로 인해 이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 과정에는 공통의 기후 조건, 서로 연결된 지리와 농업 및 상업 생산방식, 공통의 사회적 상호작용 및 가족생활 관행이 포함된다. 가장 두드러지고 일반적인 두 경향은 제국들의 확장과 독립국가들의 강화였으며,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항하거나 도피한 사람들이 살던 국경 지대가 없어졌다. 또한 이에 수반해 핵심 지역과 변경 지역 모두를 향해 상업망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이 지역 전체는 신대륙에서 유래해 유입되는 은에 의해 추동되는 전 세계 교역망으로 연결되었다. - P77~78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이 지역을 하나의 전체로 논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19세기 및 20세기 민족국가의 국경에 의해 규정된 단위들에 집중해 왔다. 우리는 이 기간의 중국, 러시아, 일본의 수많은 개별 역사(역사 서술)와 한국과 베트남의 몇몇 개별 역사를 알지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개별 역사(역사 서술)들 중 이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연구는 이 더 큰 규모(이 지역 전체)의 변화를 묘사하는 중요한 개념적인 도구들을 실제로 제시했다. - P78

지금의 중앙유라시아 및 동유라시아라고 부르는 광대한 지역은 시베리아 삼림지대에서 아열대 농경 지대까지 뻗어 있고 세계 인구의 30퍼센트에서 40퍼센트가 살았다. 중국의 명과 청 두 제국은 중앙집권화 관료 체제로 주도적 위치를 점유했다.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모스크바 공국(후에 모스크바 국가가 됨)이 형성된 후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동방과 서유럽으로의 팽창을 이어간다. 중앙유라시아는 중국의 정책과 이슬람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사회를 일구었다. 일본은 16세기 이후 유럽의 해양 세력 및 육상 세력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발전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조공 체제를 받아들여 관료제적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안정을 꾀했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제 정부는 전 지역에 걸쳐 가차 없이 진보해, 행정 절차의 표준화를 심화하고 엘리트 문화와 대중 문화를 불러왔으며 광범위한 상업적 교환을 지지했다. 광대한 제국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더 작은 국가인 한국과 일본, 베트남은 더욱 효율적으로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영토 면적을 넓히고 대체로 인구 증가와 문화적 역동성을 경험했다. 그 나라들 중 그 어떤 나라도 정체해 있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제도는 탄력적이고 적응성이 있었으며, 신민들은 대부분 번성했다. 그러나 이는 군사적·환경적·문화적 상호작용 등 수많은 다양한 요인이 조건부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으며, 뒤이은 시기의 반전에 취약했다. - P262

터키의 역사 서술에서는 (프랑스의 관례와 비슷하게) '근대'로 표현되는 시기가 1453년에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1453년이 바로 그 시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기반이 되는 시대구분인 1350년에서 1750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들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일반적인 시대 구분에 따라, 아직 '중세적' 성격을 갖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초기 역사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이 제국은 대략 1300년 무렵에 북서아나톨리아 지방의 지역 군후국으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언제 끝나는가? 1768년에서 1774년까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이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바라볼 수 있다. 퀴취크 카이나르자 평화조약(1774)에서 오스만 제국은 이전까지는 금지했던 외국 선박의 흑해 운항을 허용해야 했다. 그 외에도 이 조약을 통해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와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몇 년 후 1783년에 러시아가 크림을 합병하며 종식되었다. - P265~266

이제는 오스만 제국 역사에 수백 년에 걸친 '지속적인 위기'가 있었다고 더는 전제하지 않는다. (...) 오늘날에는 다양한 지방 세력들이 18세기에 비교적 순탄하게 오스만 제국의 국가조직 안에 통합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18세기 후반의 위기 동안에 제국이 생존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0년대에조차 일상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방의 명망가들과 세력가들이 지배하던 지역을 근대 국민국가의 초기 형태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상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과 유럽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터키의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도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가 정치사에서 가장 발전된 통치 유형이라는 주장이 더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 P268

아나톨리아 지역에 티무르 제국이 무너진 이후 등장한 후계 제국들 중 오스만(수니파 이슬람)과 사파비(시아파 이슬람) 왕조는 군주가 왕권 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방지하고,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체제를 개발함으로써 안정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사파비 군주인 샤는 캅카스 출신 굴람들을 동원해 키질바시 에미르들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하게 하여 17세기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여 지배를 안정화하는 중요 토대를 만들었다.
오스만은 술탄이 나머지 형제들을 '예방 차원'에서 살해함으로써 후계 전쟁을 줄였고 15세기 후반 이후 베지르와 총독들을 배출했던 준노예들도 이란의 굴람에 해당하는 체제 안정 요소였다.
또 사파비와 오스만 군주는 아들들을 궁전 안에 가두고 성장하게 하면서 반란을 애초에 방지하여 왕위를 안정시켰다.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1400년을 전후해 유럽의 지위는 오히려 대단히 어둡게 나타난다. 세계무역을 지배했던 것은 무슬림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조직은 이 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그 형체가 조금도 파악되지 않은 정치적·문화적 통일체였던 중국이었다. 하지만 1480년에서 1620년까지의 시기에 유럽적 시각에서 팽창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의 이러한 팽창은 지구사의 관점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 유럽의 도약은 이 시점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된 무력이라는 현상 외에 별로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다주지 않았다. 후추 무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이후에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인도양에서 낯선 이방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역할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무제한적인 통행권을 보장해주는 이른바 보호장을 받음으로써 생겨난 역할이었다. - P460

근대 초기의 세계화 단계에서 인도양은 대서양을 거쳐 매우 광범위한 교환 체계에 연결되기는 했지만, 이 네트워크는 일차적으로 간접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런데도 이 단계는 일련의 방향 제시적인 변화를 수반했다. 기독교의 확산, 교역 언어로서 포르투갈어의 확산, 인도-포르투갈 공동체의 형성, 유럽인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를 띤 항구도시(예를 들어 고아, 마닐라, 바타비아, 퐁디셰리)의 대두, 희망봉을 거치는 유럽 교역의 증가가 이 변화에 속한다.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귀금속, 특히 은의 수입을 통해 유럽이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공간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유럽인들은 인도양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 P465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는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유럽에 관련된 아래에서 서술되엇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이래로 이루어진 세계의 발견과 정복, 지속적인 점유가 역사의 주요 골격이었다. 1494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이 시기 획기적인 경제 발전과 함께 유럽이 가진 무한 권력의 환상과 오만의 상징과도 같았다.
유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만큼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다르게 보였다. 남아시아가 북아프리카로 상품을 수출하고 여러 항구들이 개설되면서 인도양을 오갔다. 유럽은 당시까지만 해도 중심이 아니었고 이제 막 그 흐름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남아시아가 직물, 후추, 설탕 같은 상품을 레반트와 북아프리카로 수출한 것이 양 지역 사이의 교역에서 기본적인 구조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초지역적인 연결들이 이루어지는 심장부로서 기능했다. 인도양에서 이루어진 원거리 무역은 소규모의 해양 공간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던 무역로를 기반으로 했다. 이러한 무역 관계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던 항구도시들 사이의 해상무역로가 계속 엮인 것과 같았다. 근대 초의 세계 체제가 근대의 세계 체제와 달랐던 점은 근대 초에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핵심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비슷한 상업적 가치를 지닌 생산지가 도처에 많이 있었으며, 중심 역할을 하는 교역 중심도 여럿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위계적으로 조직된 생산 절차나 그 절차의 중심지도 없었다. 모든 지역은 각자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 알아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 P632

자연 공간적인 측면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볼 때 동남아시아와 대양들을 규정하는 특징은 언뜻 보면 다양성과 복합성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 지역을 하나씩 소개하며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지역들을 서로 연결하는 요소들은 매우 뚜렷하기 때문에 지역 간의 차이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유사성을 강조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일련의 공통성을 가지는 공간으로서, 내적으로는 서로를 결속시키면서 외적으로는 경계를 설정하는 공간으로서 남아시아와 대양들이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 P637

동남 아시아의 역사는 탈식민화 이후에도 지역에 있던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의 역사에 머물렀다. 동남아시아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에 독일의 민족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로베르트 폰 하이네겔데른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네겔데른은 1923년에 이 지역이 갖고 있는 민족적·언어적·문화적 공통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했다. 19세기에는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정복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로 명명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그의 일행들이 신대륙과 아시아 사이를 항해했을 때 바다가 너무 고요해 죽을 뻔 했던 것에서 '고요한 바다' 혹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을 가진 태평양의 명칭은 이것에서 나온 것이다. '오세아니'아라는 명칭도 바다의 엄청난 넓이와 규모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 최근의 연구 경향은 동남아시아를 점차 발전하던 세계 체제 안에 존재한 하나의 중요한 독자적인 지역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 P695

동인도,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태평양, 오세아니아라는 명칭 자체가 유럽인들의 인식과 용어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동남아시아에 있던 국가들은 인도양, 태평양을 아우르는 지역에 위치하면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의 나라와 수많은 교류를 이어갔다. 특히 1570년에서 1630년까지 동남아시아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유입된 은이 유럽 경제를 활성화하고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 상품을 구매하는 순환 고리를 만든 것이다. 과연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한가. 같은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술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유럽 역사학의 패러다임에서 분리하려는 시도에까지 이르는 여러 혁신적인 연구와 노력에도 그 지역들의 역사학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앞선 위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역사학의 초석을 놓은 선구적 학자들조차 유럽에서 교육받은 학자이거나 주로 유럽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연구를 주도해 가는 핵심 연구소나 중요한 연구 서적 대부분의 출판지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있으며, 아프리카 연구의 중심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인 상황이다. '대서양의 역사'라는 연구 주제도 미국과 유럽 사이의 학술 교류에서 대두했다.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와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는 연구를 위한 제도적 연속성과 재정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 - P840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유럽 출신이 대부분이고 사료들도 남아 있지 않거나 유럽이나 미국에 존재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유럽/북아메리카 시각의 서술에 입각해 있다.
이 시기 대서양 연안 아프리카의 역사는 인구 밀도가 증가하고 교역이 증가하면서 많은 제국이 건설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이 오기 훨씬 이전에 지중해까지 이르는 교역망을 구축하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당시에 남동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아직 인근 다른 세계와의 접촉 지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의 서술은 '라틴 유럽'으로 제한할 것이다. 오직 라틴 유럽만이 대서양의 공통점을 건설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인데, 우선은 서쪽의 식민 세력인 포르투갈, 카스티야, 네덜란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해당하며, 이들보다 좀 더 간접적으로는 그 밖의 남부, 중부, 북부의 유럽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17세기와 18세기에 형성된 유럽의 세계무역 체제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국가가 한편으로는 쿠를란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트리에스테에 있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 P874

서술하듯 여기서 말하는 라틴 아메리카는 남동 유럽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은 대서양을 누비며 교역을 이어갔다. 대서양을 통한 교류는 원거리를 거치는 접촉을 빈번하게 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영토를 점령하고 수많은 원주민 집단의 맥이 끊기게 함으로써 언어적·인종적·문화적 차이를 잃게 했다는 것이다. 식민 지배는 주민들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재조직하고, 새로운 부족들을 탄생시켰다.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고 부족의 고유성을 빼앗아가는 것은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5장은 아무래도 남아 있는 자료나 책이 유럽 중심이라 아무래도 제한이 있다.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

뒤에 주석을 빼고도 내용이 1058페이지에 달하여 거칠게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책은 직접 읽어봐야 내용 파악은 물론 자체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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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3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인 교류에 의해 세계사가 형성되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것 같은데 이 시기와 분야의 역사는 사실상 너무나도 방대하여 그걸 제대로 연결짓고 전체를 조망하는게 개인 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진짜 어려울듯해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통합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진짜 안되는게 일단 그런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ㅠ.ㅠ
요즘 공부사기 싫어하는 저는 보관함에 이 책을 넣어두지만 언제 읽을지는 솔직히..... ㅠ.ㅠ
화가님의 열공을 항상 응원합니다. ^^ 저는 음..... 반성만 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2-10-04 09:33   좋아요 0 | URL
시기의 범위도 넓은데다 세계 전체를 다루다 보니 역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챕터마다 저자가 다른 이유가 되는 것일테구요.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한국사와 세계사의 분리가 너무 심각하여 이를 조금씩이라도 통합하는 과정이 있어야할텐데 역시 사람이 없는 거군요^^;;; 하긴 통합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모두 공부해야 가능한 일일테니ㅎㅎ 저는 근대 이후 역사를 주로 읽어와서 이 시기에 대한 역사는 덜 주목한 측면이 있었는데요. 이 시기의 역사를 읽으니 근대의 시작과 자연스레 이어져서 공부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보관함에 담아둔 책 저도 너무 많아서 사실 죽을 때까지 읽고 갈까 싶어요. 그러니 읽고 싶어질 때 읽으시면 되죠. 그리고 그런 계기가 올 때가 오더라구요^^
 
전쟁과 목욕탕 - 일제가 남긴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야스다 고이치.카나이 마키 지음, 정영희 옮김 / 이유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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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을 가 본지 오래이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목욕탕을 몇 차례 가 본 뒤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에는 더 이상 목욕탕을 가지 않았다. 왜였을까. 목욕탕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우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에 노출한 몸으로 많은 이들과 부딪치는 게 어색했다. 특히 친구라도 만나는 날은 기분이 찜찜했다. 목욕탕에서는 주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이 탕에 들어가 내뱉는 소리는 놀라웠다. 그 때만 해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데 시원하다니 놀랍게만 생각했다.

이 책은 30대 이상이면 알 법한 목욕탕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은 목욕탕보다 찜질방이 훨씬 많아졌으나 예전에는 목욕탕 간판 기호가 길거리에 흔했다. 그만큼 우리 기억에 친숙한 존재가 목욕탕이다.
작가가 글을 쓰고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쓴 책이다. 최초에는 세계 곳곳에 있는 목욕탕을 기획했는데 첫 방문지였던 태국 노천 온천에 얽힌 사연을 알고 이후 여러 방문지를 경험하면서 제목처럼 기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만약 이 책을 최초의 기획처럼 출간했다면 나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뀐 의도가 내게 들어맞았던 셈이다.

카나이 마키 사마귀가 앞발을 치켜든다. 야스다 씨가 웃으며 말한다. "같이 만들까요?" 둘 다 목욕탕을 좋아하니까 이런저런 탕을 경험해보는 책은 어떨까? 수증기 너머에 있는 역사의 진실을 펼치는 거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역사수정주의! - P16~17

(작가 두분의 그림)


인터뷰를 한 이들, 방문한 장소들 담은 그림들은 아기자기하고 귀엽다. 다만 전쟁과 관련한 장소들은 아기자기한 그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목욕탕이라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으리라. 탕에 몸을 담그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처럼 인터뷰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열대 우림이 가득한 정글 노천탕 힌다드 온천으로 태국 중부 칸차나부리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녹음이 짙은 계곡과 미지근하고 질 좋은 온천수로 유명하다.
칸차나부리까지는 일반적으로 버스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들은 태국 국철 '남톡 지선' 철도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과거에는 '타이멘 철도'라 불렀는데 2차 세계대전 일본군이 인도 침공을 계획하면서 태국과 버마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철도였다. 일본군은 연합군 소속 포로들과 아시아 각국에서 징용된 노동자들을 비롯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공사 현장에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기아, 피로, 전염병, 감독관의 학대로 수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힌다드 온천은 일본군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와트 완카나이 온천은 사찰 안에서 솟는 온천을 뜻하여 기도도 하고 온천욕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장소다.

두 번째 목적지는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 마지막 남은 대중목욕탕인 나카노탕이다. 오키나와는 종전 후 귀향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고,전후 부흥기의 분위기에 맞물려 1960년대 초기 공중목욕탕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주택의 현대화로 가정용 욕조가 보급되고 1973년 오일쇼크로 연료비가 급등하면서 공중목욕탕의 숫자는 줄어든다. 그렇게 2014년을 기점으로 나카노탕은 오키나와현 내에 남은 마지막 공중목욕탕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듯 나카노탕은 몸 씻는 곳과 탈의실의 구분이 없다. 이것이 오키나와 스타일이란다. 그리고 수도도 온수와 냉수의 수도꼭지가 호스 하나로 연결되어 합류되어 나오는 구조로 특이하다. 약 알칼리성 광천수로 약간의 미끄덩한 느낌이 있어서 손님들 중에는 아무리 씻어도 비눗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기도 한다고 한다. 목욕비는 370엔, 하루 손님은 20명 남짓이고 관리비는 늘어만 가서 언제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계속 영업을 잇고 있는 주인장의 신념이 느껴졌다.
나카노탕에서 작가들이 만난 인상적인 이는 샤미센을 연주하는 다쿠시 야스마쓰 씨 이야기였다. 그는 매일같이 특공기가 오키나와에서 하늘을 향해 나는 모습을 보았다.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종전 후 1945년 미군이 만든 이시카와 수용소에서 가족들과 함께 수용되었다. 수용소에서는 미군이 버린 빈 깡통으로 몸통을, 낙하산의 가는 끈으로 줄을, 야전 침대 다리로 다리를, 젓가락으로 이음새를 만든 샤미센 연주 소리가 밤마다 울려퍼졌다고 한다. 수용소를 나와서도 샤미센을 잊지 못해 그는 샤미센을 배웠고 50년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가 샤미센의 연주 소리와 겹쳐 들린다. 평화의 목소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목적지는 한국이다. 한국은 목욕탕 문화가 급변한 곳이다. 오키나와처럼 가정에 욕조가 보급되면서 대중목욕탕의 숫자는 급격히 줄었다. 그 대신 찜질방 문화가 등장했다.


부산 해운대 일대는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진행되면서 온천지로 정비됐고 해방 후 외국 자본의 호텔이 진출하면서 리조트지로 성장했다. 해운대 온천센터는 일대 중 규모가 가장 큰 온천 시설로 그곳에서 만난 인터뷰이 최병대씨의 단골이기도 했다. 이 분의 인터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는 1929년생으로 일본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중앙정보부 전신인 CIC에 직장을 얻어 근무했다. 1965년 한일조약 체결로 일본 영사관이 개설된 후 현지 직원 1호로 채용되어 29년간 근무했다. 광주 항쟁이 벌어졌을 때 광주 일본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하는 임무도 하는 등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여러 가교 역할을 했다.
패전 후 약 5,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일본인 아내들을 위해 '부용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녀들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에 괴롭힘을 당하고 막상 한국에 오니 남편은 본처나 정혼자가 있어 훼방꾼 취급을 받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과거와 원한은 흘러간대도 흘려보낼 수 없는 은혜가 있지
남이 베풀어 준 인정 덕분에 내일로 노 저어 나가는 배도 있지
"이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산 내 심정이랄까." - P183~184

엔카를 부르고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이 분의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 분의 인생도 어렵게 살아왔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타일에 차이는 있겠지만 대중탕의 때밀이 문화는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때밀이가 적어도 일본의 산스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결이 거친 이태리타월로 때를 '모조리 벗겨내는' 모습에는, 똑같이 몸을 씻는게 목적인 슨스케에는 없는 박력이 존재한다. 뭐랄까, 공세를 가하는, 적극적인 돌파의 느낌이랄까. 이태리타월은 세포를 자극해 각성시킨다. 말하자면 모종의 '전투'와도 같다. - P209

한국 공중목욕탕에 가 본 사람 치고 때밀이를 경험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나도 몇 번 받았는데 그 때마다 무척 아팠던 통증만 뇌리에 떠오른다. 때밀이에 사용하는 이태리 타월은 부산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여러 설이 있는데 책에도 소개된다.

네 번째 목적지는 사무카와정이다. 가나가와현 코자군 사무카와정은 동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데 전쟁 후 수많은 귀환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귀환자들의 주택에 욕실이 없어 공중 목욕탕을 개설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만들어졌다. 작가들은 '스즈란탕'을 가려고 했으나 2014년까지 운영한 끝에 폐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설마 하며 갔지만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이대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어서 사무카와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과거에 귀환자 주택이 있기 전 해군 군수 공장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사가미 해군 군수 공장에서는 총 5,000톤의 독극물, 폭탄으로 치면 4만 3000여 개의 이페리트 폭탄이 제조됐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많았을 때는 3,000명 이상의 노무자가 군수 공장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 P265

"조선에서 온 소년공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독가스 공장에 있었을 거예요. 처음에는 지나칠 때마다 '안녕.' 하며 밝게 인사도 해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들은 땅만 보고 걸었습니다. 눈두덩이는 퉁퉁 붓고 얼굴은 검붉은 색깔로 변하고 옷도 완전히 누더기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들었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모습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사무카와 지역사 연구》 제6호(1993년) - P271


이페리트는 벨기에의 도시 '이페르'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이자 독일군이 처음으로 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던 곳이다. 피부에 닿으면 문드러지고 들이마시면 기관지와 폐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는 독가스다. 1차 대전 후 제네바 의정서에서 화학 무기 사용을 금지했지만 일본군은 아랑곳 않고 이페리트 폭탄을 제조했다.


다섯번 째 목적지는 오쿠노시마 섬이다. 히로미사 현 다케하라 시 항구에서 페리로 15분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토끼가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풍경에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과거 이 섬에는 거대한 독가스 무기 공장이 있었다. 여기서 만든 무기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작전에 사용됐다.


1938년 육군참모본부에서 작성한 근처 지도에 오쿠노시마는 지워지고 없다. 비밀 유지를 위해 지도에서 지운 것이다. 오쿠노시마는 종전 후 미군에 점령되었다가 1956년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그 후 방치되다가 1963년 대규모 휴양 시설로 문을 열면서 과거의 독가스에 대한 기억은 철저히 지운다.

"도쿄 신주쿠에 있던 육군 화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섬에서 토끼를 200마리 정도 기르고 있었습니다. 완성된 독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토끼의 털을 밀고 이페리트나 루이사이트를 피부에 발랐어요. 독약은 피부에 스며들었고, 토끼들은 보라색으로 변하며 죽어갔습니다. 사방 5미터 정도 되는 유리 가스실도 만들었습니다. 가스실에 토끼를 집어넣고 독을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게 하며 어느 정도의 살상 능력이 있는지 실험한 거지요."
패전 직후 제일 먼저 처분된 것도 바로 그 실험 결과들이었다. - P310~311

관동군 731부대가 실시한 생체 실험이 떠올랐다. 대체 이 광기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오쿠노시마 섬은 토끼가 뛰어나니는 자연 휴양지로만 소개되지 과거에 독가스 공장이 있었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오쿠노시마에서 생산된 독가스는 중국의 북동지역인 베이탄촌에서 학살 무기로 이용되었다.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이 곳은 지하도들이 많았는데 일본군은 이곳에 독가스를 던졌고 연기에 뛰쳐나오는 이들을 칼로 베고 총으로 쏘아 학살했다. 베이탄촌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민병과 촌민을 합쳐 8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종전 후 독가스 공장이 있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관련 시설물들을 태평양 바다 수중에 매장한 것이다.

오쿠노시마 섬 독가스 공장에서 일했던 한 후지모토 야스마 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잊지 않습니다. 괴물로 만들어진 것, 범죄자로 길러진 것,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만들어야 했던 것,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화학 방정식은 사람을 죽이는 방정식입니다. 독가스는 저의 몸을 파먹어 들어갔을 뿐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중국인을 죽였습니다. 그걸 위해 필요한 방정식이었습니다." - P360~361

그는 2004년 중국에 가서 피해자들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죄의 말을 건넨다고 해서 죽은 피해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내내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고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의 진정한 사과를 듣고 피해자들은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작가 모두가 일본이 전쟁 가해에 대한 책임을 사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는 태도를 갖고 있어 이해하는 데 편했다.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책이 목욕탕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아서 좋았다. 관련 역사, 지역에 대한 소개, 나아가 일제가 남긴 전쟁 피해에 대한 장소와 인물을 찾는데 이르기까지 여정을 보여주고 인물에 대한 인터뷰로 400여페이지인데도 불구하고 술술 읽히는 장점이 있다. 전쟁과 목욕탕에 대한 교집합이 궁금하다면 그렇지 않아도 동네 어른이 전해주는 옛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편안함으로 접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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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02 2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포시 데려갈게요^^ 부산 해운대 온천과 동래온천 쪽 녹천탕까지. 반가운 이름이 지도에 보이네요.

거리의화가 2022-10-03 06:55   좋아요 3 | URL
부산 분들은 반가우실 것 같아요. 저는 목욕탕 뿐 아니라 찜질방도 좋아하지 않아서 갈 일은 없을 듯한데도 이야기를 보니 궁금해지더라구요. 특히 녹천탕은 궁금해요ㅎㅎ 동래하면 온천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프레이야님도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희선 2022-10-03 03: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목욕탕이라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목욕탕만 하지 않고 거기에 전쟁을 넣어서 더 좋은 책이 됐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는 증거를 다 없애려 했다니... 그때 사람도 많이 죽였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0-03 06:57   좋아요 3 | URL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전쟁하고 목욕탕하고 무슨 상관이지 했거든요^^; 근데 목욕탕만 있었다면 제가 읽지를 않았을 겁니다. 전쟁 후 증거인멸의 사례는 수두룩하죠. 특히 일제는 철저했습니다ㅠㅠ 지금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는 없애고 입막음중이죠.

Vanessa 2022-10-03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사랑해요

Vanessa 2022-10-03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뽐뿌 해요

mini74 2022-10-03 12: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년들 이야기 너무 먹먹합니다. 그나마 양심있는 작가들이네요. 저도 이 책에 관심 많았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10-03 12:30   좋아요 2 | URL
일본 작가라 좀 걱정했는데 번역이 됐다는 것이 아무래도 그런 걱정을 덜게 했습니다^^; 이런 양심 있는 작가와 언론인들이 많아야 할텐데 극우주의자가 늘어나고 차별과 혐오가 심각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미니님 이 책 강추해요!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scott 2022-10-05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국 엄청난 노역 착취 무고한 청춘들을 희생시킨 온천 목욕탕
대만 온천들이 일제점령기에 만들어졌다고 대만친구들이 이야기 해줬는데 ...
일본 집요할정도로 악랄 ㅜ ㅜ

거리의화가 2022-10-05 17:00   좋아요 2 | URL
태국 목욕탕도 군인들 피로 푼다고 만들어졌는데 대만도 역시 그렇군요ㅠㅠ 물자 동원을 위해서 만들어진 태국 죽음의 철도 이야기가 너무 섬뜩했어요ㅠㅠ 거기서 얼마나 많은 인명의 희생됐는지... 일본제국주의의 그늘은 여전히 많은 곳에 남아있는 듯 싶습니다. 반성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공간 재편과 만철조사부 - 권력·공간·학문의 삼중주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4
박준형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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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일본 내각총리내신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는 미래의 공간들 사이의 관계를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주권선이란 국경을 의미하고, 이익선은 국경 밖에 있으면서 국가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20년 뒤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조선과 인접해 있던 만주는 이들에게 이익선으로 재인식되었다. 


제국의 팽창이 야기하는 ‘문제 공간‘의 끊임없는 생성은 결국 수목의 나이테처럼 제국의 중심과 주변이 연쇄적 관계를 갖는 동심원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제국의 법학자들은 동심원적 구조의 외연을이루는 ‘문제 공간‘에서의 국제적 분규나, 새롭게 획득한 공간과 기존 공간구조 사이의 정합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 P20


경성제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헌법학자 기요미야 시로(淸宮四郞, 1898~1989)는 ‘외지‘ 개념을 중심으로 제국 일본의 ‘문제 공간‘ 혹은 ‘문제 공간‘이었던 공간들에 대한 법적 규명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외지‘라는 말이 법률상의 용어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식민지‘라는 용어가 쓰였는데, ‘식민지‘는 정치·경제상의 용어일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착취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그 사용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 - P21


결론적으로 그는 ‘외지‘를 내지에 미편입된 이법영역(異法領域)"으로 정의했으며, 그에 따라 혼슈·시코쿠·규슈 홋카이도 · 남사할린 · 류큐 · 오가사와라를 ‘내지‘로, 조선 · 타이완 . 관동주 · 남양군도를 ‘외지‘로 각각 분류했다. - P22


기요미야는 '외지' 개념을 밝히기 위한 검토로 '외국', '조차지', '위임통치구역' 같은 주변 개념들과 비교 검토 끝에 외지를 법 밖의 영역으로 정의하였다.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4권으로 현대의 공간과 다른 '근대'의 공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공간의 변화를 밝히며 이를 이끈 권력의 실체와 배경 학문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저자가 검토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만철조사부이다. 만철 관련 연구를 위해 선택한 인물은 하타다 다카시인데 이는 그가 전후 조선사학을 이끈 인물이면서도 만철조사부에 참여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1940년부터 약 5년간 화북농촌관행조사(華北農村慣行調査)에 참여). 하타다 다카시는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권 만선사에서도 일본인 한국사 연구사로 소개된 바 있다.


그동안 읽었던 비판 총서들 중 가장 어려웠던 주제였다. 왜인가 생각해보니 공간 감각이 없는 내가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현대의 국경에 익숙해서 시대 상황과 권력의 구미에 맞게 변하는 공간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던 것도 있다. 하지만 독서가 의미 있었던 것은 공간과 권력, 이를 뒷받침하는 학문 간의 관계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 시기 조선의 내지는 조약상의 개항장 바깥에 해당하는 공간인 동시에, 적어도 경제상의 관세영역에서는 청국의 판도 내에 속한 공간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내지라는 하나의 공간에 대해 자주독립국화와 속방화라는 상반된 두 개의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을 둘러싼 각국 간의 세력 균형과 그로 인한 현상 유지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의 발발은 그 균형을 깨뜨렸고 일본은 동아시아에 새로운 공간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후 청국이 한국 내지를 다시 자신의 판도로 취급할 여지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의 ‘자주‘를 자명한 것으로 증명해줄 근거는 되지못했다. - P52


조선은 청의 조공 체제에 속해 있었으나 일본과의 개항, 특히 영국과의 통상 조약 이후 외국 열강들과의 잇따른 조약 체결로 세계 체제에 편입된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청을 중심으로 하던 조공체제를 깨뜨렸다. 조선은 청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했으나 열강과의 이익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당시 한국 정부와 통감부 모두 근대적법제 정비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긴 했지만, 한국 정부 측은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려 한 데 반해, 통감부 측은 관행적 거래를 통해 획득한 일본인의 소유 토지를 법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증명규칙은 통감부의 의도가 반영되어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장치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증명규칙」 제8조에서는 당사자의 일방 혹은 쌍방이 외국인인 경우의 증명수속을 정하고,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또한 토지 · 가옥을 매매·증여 · 교환 · 전당할 때에는 군수 또는 부윤의 증명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통감부령 제42호로 공포된 「토지건물증명규칙」에서는 당사자의 일방 혹은 쌍방이 외국인으로서 증명규칙에 의한 증명을 받은 자는 이사관의 사증도 받도록 규정했다. - P63


일본 정부는 "한국 내지를 개방하게 할 수단"으로 내지에서의 일본인의 토지 소유권이나 영대차지권 혹은 용지권을 강요하겠다는 계획 하에 1906년 10월 31일 「토지가옥증명규칙」을 공포했다. 이와 같이 내지에서도 외국인의 토지 가옥 소유가 공인되면서 내지와 조계 밖 10리 이내의 경계(간행리정)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제국헌법을 어느 영역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나, 한국의 보호국화와 식민지화라고 하는 일련의 사건 해석을 둘러싸고 일본의 법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근대적 학문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법적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제국 공간의 확장을 기정사실화하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 ·공간·학문의 삼중주가 펼쳐낼 앞으로의 이야기들에 대한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 P72


국제법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일본은 1894년 조약 개정을 통해 국제법상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1890년대 후반 한국 언론에서는 일본의 조약 개정을 독립국의 대등한 권리를 회복한 선례이자 본받아야 할 모델로 간주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아직 각국과 대등한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것이었다. 이즈음 일본 국내에서는 국경 밖 일본인에 대한 법률 적용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방면에서 검토가 이루어졌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국경 밖 지배 영역의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법학자들 간에 논쟁이 벌어진다. 논점은 국제법상 국가의 의사와 국내법상 국가의 의사의 관계, 국제법과 국내법의 관계, 주권과 통치권의 관계, 통치권과 영토권의 관계, 통치권이 이전 가능성이었다.


1909년 9월 4일 베이징에서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間島二關ㅈ八日淸協約)」, 즉 ‘간도협약‘이 조인되었다. 결과적으로 룽징춘(龍井村), 터우다오거우(頭道溝), 쥐쯔제(局子街), 바이차오거우(百草溝)의 4개소를 상부지로 개방하고, 상부지 안에서의 한인과 일본인의 거주를 승인했다(제2조). 상부지 밖에서도 한인의 거주권(제3조), 토지소유권(제5조) 등을 인정했으나, 다만 청국의 사법권에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문제 공간‘ 간도는 특수 공간인 ‘상부지‘와 그 바깥의 잡거 공간으로의 분할을 통해 ‘문제‘ 해소를 꾀했다. 그런데 이때 ‘만주문제‘에 관한 협약도 함께 체결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 공간‘은 이미 간도를 넘어 만주로 확장되어갔다. - P86


간도 문제를 둘러싼 청일 양국 간의 교섭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이루어졌다. 청국은 경계 문제 만이 아니라 청한 양국인의 생명 재산 및 사업의 보호, 재판 관할권 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말했다. 결과적으로 상부지와 바깥의 공간으로 분할하였다. 



러시아와 청국은 동맹관계를 수립하면서 철도 부설을 위해 러청은행이 철도회사를 설립하는데 합의했다. 또 회사 설립으로부터 회사를 회수할 권리가 청국에 부여되며, 무상으로 인도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이에 따라 설립된 것이 동청철도다. 동청철도는 1896년 12월 4일 창립되었다. 1897년 랴오둥반도를 점령한 러시아는 1898년 청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랴오둥반도와 그 주변 도서를 25년간 조차할 수 있게 되면서 하얼빈에서 뤼순까지 이어지는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을 손에 넣게 된다. 하지만 러일전쟁 결과 남만주에서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이 이어받게 된다. 


일본이 획득한 권익을 지배 영역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면, 조차지인 관동주와 철도 연선에 설정된 철도부속지로 다시 나눌 수 있다.

본래 ‘관동(關東)‘이란 말은 산하이관 동쪽을 의미하므로, 랴오둥반도 남단에 설정된 조차지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그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라 명명했고, 일본도 그를 따랐다. - P93


만주의 통치는 만철의 철도부속권을 시작으로 만주국 건립 이후에는 관동국의 행정권까지 아우르게 된다. 


중앙기관의 변천과는 별도로, 만주의 통치실상은 군부, 외무성, 관동청의 기관들뿐 아니라 철도부지 행정권을 갖는 만철까지 가세해 서로 착종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국 건립 이후인 1934년에는 만주에 관동국이 설치되어 행정의 일원적 운영을 꾀하게 되었으며, 그에 맞춰 1935년에 내각총리대신 소관의 타이완사무국을 설치하여 종래 척무대신이 소관하던바를 이관토록 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인 1942년에는 척무성과 타이완사무국을 모두 폐지하고, 내무대신과 신설된 대동아성(大東亞省) 대신이 각각 조선총독부 · 타이완총독부 · 가라후토청에 관한 사무와 관동국 및 남양청에 관한 사무를 나누어 관장하도록다. 이는 조선, 타이완, 사할린 등의 ‘외지‘에 대한 ‘내지‘화, 다시 말해 내 · 외지 행정의 일원화를 실현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동시에 관동주와 남양군도는 제국의 판도 내에서 ‘내지‘의 ‘외연‘으로 자리매김되었다. - P95~96


이는 마치 조약에 근거하여 외국인의 거류 및 무역을 위해 설치된 조계가 당초에는 일본인들의 한반도 침략 거점 역할을 했지만, 1910년 ‘한국병합‘ 이후로는 조선총독부의 일원적 지배를 방해하는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 상황과 유사하다. ‘문제 공간‘을 ‘통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통치의 예외성을 담보하는 그와 같은 공간들은 반드시 정리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1914년 4월 각국과의 협의 끝에 조계를 철폐하고 새로운 지방제도인 부제(制)실시를 통해 일원적인 통치를 실현했다. 만철의 철도부지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 즉, 1937년 11월 만철의 철도부속지가 철폐되고 그에 대한 행정권은 만주국에 이양되었다. - P103


한국병합 이후 조계 지역이 필요없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폐지하면서 일원적인 통치를 실현했다. 만철의 철도부속지가 폐지되고 행정권이 만주국에 이양되면서 일본이 만주 지역에서 행하는 행정 통치는 일원화되었다.



만철의 조사기관으로 만철조사부는 1907년 4월 설립된다. 만철 창립 당시 조사부는 총무부, 운수부, 광업부, 지방부 등과 함께 만철 본사의 중심 부서로 출발했다. 조사부 기구로는 조사부, 중앙시험소, 지질연구소 등이 있었다. 1908년 1월 만선역사지리조사부가 설치되었고 11월에는 동아경제조사국이 개설되었다. 


시라토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만한 지방에 대한 조사연구를 강조했다. 하나는 "만한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순연한 학술적 견지"에서이다. 전자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무릇 제반 사업이란 확실한 학술적 기초 위에서만 추진될수 있는 법인데,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만한 경영‘을 담임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를 뒷받침할 만한 학술적 기초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남만주의 권익 계승과 한국의보호국화로 일본 학자들이 해당 지역을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고, 게다가 해당 지역은 서구 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던 곳이므로, 일본 학자들이 "세계 학술"에 기여할 바도 크다는 설명이다. - P126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초기 '만한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와 '학술적 견지'의 입장에서 만철 사업이 도쿄제대로 이관된 후에는 '학술적 견지'의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만한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 입장은 제반 사업은 학술적 기초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술 기초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학술적 견지'는 남만주 지역이 서구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이 아니므로 일본학자들이 학술의 기여고다 크다는 입장이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시라토리 구라키치, 야나이 와타리, 이나바 이와키치, 미쓰이 히토시, 쓰다 소우키치, 와다 세이, 세노 우마쿠마, 이케우치 히로시 등이 있었다.


랑케와 마찬가지로 시라토리 또한 일본을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천황제에서 ‘국민의 이념‘의 근거를 구했다. 그러나 랑케에게 ‘국민의 이념‘이란 어떤 민족이 특정의 국민이 되기에 성공하는 한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국가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민족은 역사 이전의 암흑 속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랑케가 목격한 역사의 종언이 유럽이라는 경계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0세기 전환기에 시라토리가 목격한 세계는 랑케의 그것과 달랐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 혹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에 비유되곤 했던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시라토리가 그려낸 역사 과정은 무질서에서 조화로의 낙관적인 이행을 담보하지 못했다. 국제관계를 남과 북의 항시적인 투쟁 상태로 상정한 그의 남북이원론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 P151


이케우치의 실증주의는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훈도 아래 탄생하였고, 시라토리의 실증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루드비히 리스(1887~1902년 사학과 강의) 지도가 매개(랑케의 실증주의) 역할을 했다. 


이나바와 이케우치는 1세대의 시라토리와 마찬가지로 지리 중심적 시각을 공유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중국 및 만주의 영향을 크게 강조했다. 그러나 이나바는 선불가분론의 입장에서 한반도 제 민족을 중국 및 만주계로 전제한 뒤 현 시점에서 조선인의 만주 진출을 촉구하는 사회적 발언까지 이어갔으나, 이케우치는 중국및 만주와 구별되는 한족(韓族)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그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 P157


고야마 사토시(小山)는 일본에서 루드비히 리스를 통해 아카데미즘 사학이 수입될 때 실증주의 연구 방법만이 아니라 랑케적인 ‘세계사‘ 이념이 함께 들어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측면이 각각 일본사학. 동양사학과 서양사학 역사철학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말했는데, 전자를 비판한 후자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일본 근대사학이 수용했던 랑케 사학의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사료 비판을 사상(象)하고 세계사적 파악만을 강조했으며, 랑케가「강국론」에서 묘사한 경합하는 국민국가군으로 이루어진 체계인 세계사를 유럽적 세계로부터 세계적 세계로 확대함으로써 역사학에서 ‘근대의 초극‘이 가능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증과의 긴장을 결여한 채 정치적 실천 - 세계사를 창조하기 위한 ‘사상전‘으로 돌진한 교토학파의 역사철학은, 스스로 내건 세계사적 사명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 놓인 간격을 대상화하지 못한 채 공전함으로써 파탄했다.

"실증과의 긴장을 결여한 채" 랑케로부터 ‘세계사‘ 이념만을 수용한 서양사학과 역사철학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실증주의는 그러한 전쟁책임, 더 나아가 식민지 지배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 P166~167


이케우치의 합리주의는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합당한 자료들에 모두 부합되면 진리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하타다는 학문과 사상의 통일을 주창하며 기존의 학문의 순수성을 강조하던 사가들을 비판하였다. 하타다가 내세운 것은 일본의 '아시아'로의 복귀였다.


일찍이 신문기자이자 정치평론가로 활약한 우자키 로조(鴻崎鷺城, 1873~1934)는 1913년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한 「현시의 지나통(時支那通)」이라는 글에서 청일전쟁 이전의 ‘지나통‘을 ‘구지나통‘, 그 이후의 ‘지나통‘을 ‘신지나통‘으로 구분하고서는, 전자의 경우 학자가 많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반드시 학자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학자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신지나통‘을 다시 네 부류, 즉 외무성파·육군파·순실업파·낭인파로 구분했는데, 이들은 말하자면 특수 기술자나 중국사정 조사자 혹은 소개자 정도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181~182


'지나통'은 중국전문가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중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하며 중국 관계 생업에 종사하면서 그 방면에 아는 것이 많고 경험이 많은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다만 시기에 따라 '지나통'의 개념의 실체가 변화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과 대결을 하게 되면서 '구지나통', '신지나통'이 만든 지식은 소용없게 된다.


화북농촌관행조사는 1939년 10월 동아연구조 제6조사위원회 내 학술부위원회에서 '화북농촌관행조사계획'이 수립되면서 실시되었다. 만철조사부가 북지경제조사소에 관행 조사반을 조직하였고 조사원 1명이 조수 1명을 동반해 농민들과 질의응답하는 형태로 현지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내용을 그대로 수록하면서 날 것의 자료로 모순된 내용들도 존재했다. 


고바야시 히데오에 따르면, 만철조사부 내에는 리버럴한 분위기가 강하여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텍스트로 삼아 조사부원들이 독서회나 연구회를 열 정도였다. 그 때문에 세간에서는 만철조사부의 연구 경향을 가리켜 ‘만철 마르크스주의‘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타다 또한 만철조사부 시절을 "당시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회고했다.만철 입사 전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곳이 젊은 연구자들이 모인 역사학연구회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만철조사부가 그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가면서 희열을 느끼는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이 체득한 지식이나 방법론에 대해서 크게 비판을 받기도 했던 까닭에 분한 마음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 P196


하타다가 관행조사에 참여한 기간에 그가 맡았던 조사 대상은 '촌락'이었다. 그의 관심은 촌락공동체의 존재를 상정하고서 실태를 확인하는 데 있었고, 이는 당시까지 논의된 공동체 이론을 현지에서 검증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서 공동체 이론이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중국 사회의 특질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으로 공동체에 주목한 제반 논의들을 지칭하는 것인데, 중국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논의는 1920년대 후반 중국 혁명의 급격한 전개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중국에서 ‘공동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 히라노는 긍정하고 가이노는 부정했다. 이는 각각 ‘대아시아주의‘와 ‘탈아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때 ‘공동체‘는 그들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매개체이자 그들의 꿈이 투영되는 공통의 장소였는데, 공통의 장소를 대상으로 서로 다른 꿈을 꾸었다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논쟁은 ‘동상이몽‘이었다. - P204


하타다는 '히라노 가이노 논쟁'이라는 사례를 통해 연구 내용이 연구자의 시점이나 자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역사서술의 주체 문제는 역사상의 주체 문제와 함께 하타다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였다. 만철조사부는 역할이 축소되며 1939년 조사부로, 1943년 조사국으로 변화했다. 조사부의 활동은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유효성을 의심받으면서 군부는 '만철조사부 사건' 등을 일으키며 대조사부를 해체했다.


하타다의 ‘민족‘은 민족 내 계급 대립을 인정하고 있다는점에서 이시모다의 1953년 이후의 ‘민족‘ 개념을 선취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하타다는 전전의 경험에 비추어 전후 공간에서의 ‘민족‘의 복귀 또한 경계함에 따라 ‘전후 역사학‘과의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마에가 이시모다에게 행했던 비판, 즉 "이시모다의 논의는 근대를 넘어 역사를 관통하는 연속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것으로, 민족이라는 주체 그 자체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상화하지는 못했다"는 말은 하타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비록 하타다의 ‘민족‘이 사회적 조건에 제약을 받고 계급 대립을 내포하는 단위라고 할지라도, ‘민족‘ 자체는 그 성격을 바꾸어가면서도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지는 초역사적인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하타다의 논의가 갖는 한계점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타다의 ‘민족‘은 이시모다의 그것과 달리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일본 민족‘이 아니라 타자로서의 ‘조선 민족‘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P222~223


하타다의 전후 조선사학은 역사학연구회의 비판적 역사의식 속에서 탄생했고 이로 인해 역사학연구회가 창립되었다(1932년). 역사학연구회는 민족문제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패전 후 내셔널리즘이 쇠퇴하면서 민족주의의 소멸을 보증할 수 없었고 1951년부터 굴욕과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민족 문제가 대두되어 전쟁 가해 책임은 방기한 채 '민족'만이 복귀했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와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서로 조직원리를 달리하며 대결했다. 전자는 외국인으로서의 독자성을 주장했고, 후자는 일본 인민과 함께 일본 국가권력에 싸움으로써 일본 내 혁명운동을 담당하자 주장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10회에 걸쳐 일본에서의 조선 연구 결과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란 주제를 두고 10회에 걸쳐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하타다는 '전후 조선사학'이 이전 연구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했으나, 그 비판 자체가 철저하지 못했고 일본인의 조선관에는 이전 연구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다 주장했다. 이로써 이전 연구 결과를 철저히 검토해야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일본인의 대조선관 변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1960년대 후반 들어 일본 조선 사학계는 내재적 발전론이 새로운 방법론으로 대두한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일국/세계, 보편/특수, 경제/문화 중 어느 한쪽만 강조하는 대립 구도를 넘어선 내용를 심화하자는 움직임이었다. 


하타다가 말하는 ‘동양사의 전통적 사고방식‘이란, 현실과 거리 두기, 그러한 단절을 학문 성립의 요건으로까지 간주하는 연구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학문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P250


전전 '화북농촌관행조사'와 전후 '관행조사' 사이의 인적 구성과 방법론의 단절로 인해 관행 조사 평가는 긍정/부정으로 양분되었다. 


일본인에게도 조선인의 고뇌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으며, 공감의 노력은 해야 한다고생각합니다. 같은 입장에 몸을 두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상대를 인식하고 이해하여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전전의 조선사 연구에서는 매우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P252


하타다는 조선사의 문제 제기가 경솔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와의 공감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다만 역사의 체계적 인식을 방기한 연구자들은 학문의 순수성을 대가로 도리어 권력과 무책임하게 결합했다는 한계가 있다. 


공간은 지리적 영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 움직이는 권력이 있고 권력자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배경 지식을 만들게 되어 있다. 이 책은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공간 재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면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만철조사부의 활동의 변화와 하타다 다카시라는 인물의 발언과 활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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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2 10: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제시대 배경책 보면 외지인 내지인, 내지인이 되고싶다 뭐 이런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화가님 리뷰덕에 좀 더 자세하 알게되네요 ~ 잘 읽었습니다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2-10-02 21:16   좋아요 1 | URL
리뷰가 제가 쓰면서도 쉽게 풀기가 어렵더군요^^;;; 어려운 내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읽어야 책 근육이 단련되는 듯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10월이 시작되었다.

하도 서재를 정리 안했더니 보다 못해 좀 하고 책 읽고 하다보니 하루가 다 갔다^^;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에 소주! 언제나 실패하지 않는 조합이지만 요즘 물가가 올라 너무 비싸졌다. 그래서 나는 안 먹으려고 하는데 옆지기가 주기적으로 삼겹살을 사올 때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

어제 9월 마지막날 책과 커피를 주문했다. 근데 커피 출고일이 하루 늦는다고 해서 따로 시키는 바람에 여러 번 걸쳐 주문하게 되었다.(나중에 오는 책들은 오면 올리는 걸로)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는 바람돌이님 서재에서 보고 이건 꼭 사야겠다 싶어서 주문했다. 한국사에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건축은 너무 몰라서 유적지를 갈 때마다 아쉬움이 드는데 이 책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는 서재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여러 분들께서 읽고 올리셔서 좋다고 입소문이 난 검증이 된 책이다^^ 진작 사려고 했었는데 계속 미루다 이제야 사게 되었다.

<빌레뜨>는 브론테의 작품 중 제대로 읽은 게 없는 것 같아서 샀다. 표지가 예쁜 것은 덤!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도 샀고~(과연 내가 이해할 수 있을것인가.)

이오덕의 우리말 글쓰기 세트는 알릴레오에서 어제 소개가 된 책. 나는 부끄럽게도 처음 접해본다^^; 우리말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께 말처럼 글로 쓸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도움받을 수 있을 책일 것 같다.


지난 주말에 저녁에 나갔더니 산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아주 이른 시간에 나왔다.안개가 많이 낀 날이었고 사람이 역시 없어서 조용하게 걷고 달리고 그랬다.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공간 재편과 만철 조사부>를 완독했다. 생각했던 내용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250여페이지인데도 읽는데 좀 걸렸다. 뻔한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오판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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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0-02 0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풍경사진도 예쁘지만 역시 예쁜건 책탑사진 같아요 ^^
삽겹살에 소주는 진리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10-02 21:12   좋아요 1 | URL
이곳에서만큼은 책탑사진이 풍경사진을 이기는 듯합니다!ㅎㅎ
삼겹살에 소주 맛있었어요~ 너무 비싸서 이젠 자주 먹을 수 없을 듯하여 아쉽습니다.

mini74 2022-10-02 1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오덕샘 책 좋아요. 아이 어릴때 많이 읽었지요. 일하는 아이들 읽으며 마음 짠했던 기억납니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10-02 21:14   좋아요 1 | URL
저는 부끄럽게도 이오덕 선생님을 이번에야 알게 됐습니다. 이 책 궁금해서 샀는데 잠깐 보았지만 참 좋네요. 제 글 부끄러운 부분이 많아서 참고서로 옆에 두고 이용해보는 것으로 해야겠어요^^ 미니님도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2-10-02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삼겹살 가격에 저도 후덜거렸어요.
인플레이션이 요즘 들어 더 체험되네요.
거리의화가님의 역사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직업이 뭔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10-02 21:15   좋아요 2 | URL
이제는 삼겹살 나가서 사먹기는 힘들 듯합니다. 저는 집에서 먹었는데도 요새 마트 가격도 올라서 부담스럽네요^^;
ㅎㅎㅎ 직업은 역사하고 전혀 관련 없어요. 그저 취미인데 읽을수록 재밌어서 더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22-10-03 0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개가 낀 걸 보니 아침 일찍 나가셨나 봅니다 얼마전에 라디오 방송 중간에 나오는 날씨에서 안개 낀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예전에 이오덕 님 저 책 다 봤어요 책을 봤을 때는 잘 써야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는 그냥 쓰는군요 권정생 님하고 나눈 편지도 있군요 갑자기 그게 생각났습니다

이런저런 책 사셔서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책 즐겁게 만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0-03 07:00   좋아요 2 | URL
아주 일찍 나갔어요. 7시쯤 나갔는데 돌아올 때쯤 되니 안개가 서서히 걷히더라구요. 지난주 특히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았답니다.
이오덕 선생님을 이번에 알게 됐는데 참 좋은 일을 하신 분이더라구요. 우리말과 글이 말 따로 글 따로가 되 버렸는데 그 아쉬움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신 듯합니다. 한자, 일본어, 외국어 어느새 우리에게 깊숙이 들어와 우리글을 침범하게 되버렸습니다. 희선님 진작 읽으셨군요^^ 이오덕 선생님의 가르침 중 하나만 글에 적용해도 효과가 좋을 듯합니다.
희선님 10월 좋은 책들 만나고 즐겁게 보내시길~!

바람돌이 2022-10-03 16: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어마어마한 땡스투금액이 들어와서 뭔가 햇더니 화가님의 손길이....
감사합니다. 적립금부자에 마음까지 부자가 됐습니다. ㅎㅎ
안개낀 풍경도 멋지지만 저 정갈한 책탑사진 멋지네요. ^^

거리의화가 2022-10-03 19:27   좋아요 3 | URL
ㅎㅎㅎ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다만 정작 저 책들은 언제나 읽을 수 있을지… 너무 오래 기다리게하면 안될텐데요^^; 책탑 사진이 사랑받는 동네 알라딘 서재!ㅎㅎㅎ

scott 2022-10-04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집 방 두개 가득 책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잠자는 방에도 쌓아 둬서 자다가 책탑이 무너져서 깔릴 정도가 된적이 있었는데
서재방 정리 하는게
테니스 수영 만큼 힘들 다는 것!ㅎㅎ

화가님이 올리신 사진 영화속 스틸컷 같습니다!

비온뒤 서울 기온 뚝!
화가님 감기 조심
건강 잘 챙기세요 ^^

거리의화가 2022-10-04 10:57   좋아요 2 | URL
역시 스콧님 보유하신 장서수가 엄청나셨군요~ 저도 바닥까지 책이 침범한지 좀 됐습니다ㅜㅜ 이중 슬라이드 책장을 샀는데도 책은 안 줄고 더 늘기만 하네요ㅎㅎㅎ
이렇게 바람부는 날에는 머플러만한것이 없습니다^^ 머플러 칭칭 매고 왔어요. 스콧님도 건강 잘 챙기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