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그때 전환되고 나를 맞추는 사람이 못됐다. 보석을 돋보이게 하는 금속 박편이나 미인의 시녀나기독교 왕국의 훌륭한 인물의 시종이 될 자질이 없었다. 베끄 부인과 나는 서로 동화되지 않았지만 서로를 잘 이해했다. 나는 부인의말상대도 그녀의 아이들의 가정교사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었으며 아무것에도, 그녀 자신이나 그녀의 이해관계에조차 매어두지 않았다. - P80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때때로 얼마나 상반된 특징들이 우리에게 부여되는가! 베끄 부인은 나를 박식하고 우울한 여자로, 팬쇼 양은 신랄하고 빈정대기 좋아하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홈 씨는 모범적인 선생에다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 즉다소 관습적이고 엄격하고 편협하며 까다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 - P84
정교사다운 정확성을 지닌 산 표본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 즉 뽈 에마뉘엘 같은 사람은 알다시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성격이 불같고 무모하며, 모험심이 강하고 고분고분하지 않고대담하다고 암시했다. 나는 그 모든 것에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꼬마 폴리나 메리였다. - P85
나는 알아줄 만한 곳에서 나를 알아주기만 하면 충분히 정신적인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나머지는 내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 관심사와 사고 속에 신분이니 사회적인 지위니 박식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같은 공간과 위치를 차지했다. 그것들은 나의 삼류 하숙생들이었고, 그것들에게나는 작은 거실과 후미진 작은 침실만 내주었다. 식당과 큰 거실이비어 있을 때조차도 그것들의 처지로 보아 작은 방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 사실을 비밀로 했다. 세상 사람들의 잣대는 아주다르다는 것을 곧 알게 되긴 했다. 그들의 견해도 나름대로 옳다고믿는다. 그러나 내 견해 역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리라. - P97
유약해도 잠시 동안은 꽃을 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꽃은 폭풍을 견딜 수도 없고 맑은 햇살 속에서도 곧 시들어버린다. 어떤 정령이 나타나 그 섬세한 처녀를 버티어주는 힘과 체력에 대해 속삭였으면 그레이엄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알고 있던 나는 그녀의 우아함이 현실이라는토양에 얼마나 단단하고 훌륭하고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 P104
"그녀만 한 미인은 없는 것 같은데요." "나도 같은 의견이오. 루시, 우리는 종종 의견과 취향, 아니 적어도 판단이 일치하는 것 같소." "그런가요?" 내가 다소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루시, 당신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면, 어머니의 대녀가 아니고 대자였다면 우리는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요. 우리는 늘의견이 일치했을 거요." - P106
지금의 나는 어떻소? 십년 전 과거의 나는 어땠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중하게 대하고, 아무에게도 불친절하게 굴거나 잔인하게 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죠." "그 점은 당신이 잘못 보았소. 예를 들면 내가 당신에게는 거의 짐승처럼 굴었던 것 같소." "짐승이라고요! 아니에요, 그레이엄, 짐승처럼 굴었으면 제가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이것만은 내가 기억하오. 조용한 루시 스노우를 정중하게대접하지 않았다는 것 말이오." "그렇다고 잔인하지도 않았어요." "아니, 내가 네로였어도 그림자처럼 거슬리지 않는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거요." - P108
"이제는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나오. 기억난 것을 그녀에게 다이야기해줄 수 있으면 좋겠소, 아니면 차라리 누군가가, 예를 들면당신이 그녀의 뒤로 가서 이 모든 것을 귀에 대고 속삭이고, 난 앉아서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즐겁게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소. 루시,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두고두고 감사하겠소. 그렇게 해주겠소?" "두고두고 감사하겠다고요?" 내가 말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꼭 깍지낀게 느껴졌다. 마음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반항적인 용기가 솟았다. 이런 문제에서는 존 선생의뜻대로 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제 나는 그가 내 성격과 본성을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고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늘 내게 나의 것이 아닌 역할을 부여하려고 했다. 나의본성은 그에게 반감을 느꼈다. - P110
너 스스로는 우울하고 엄숙한 편이라고 여기잖아! 팬쇼 양은 너를 제2의 디오게네스로 여기고, 바송삐에르 씨는 언젠가 여배우 와스디의 야성적인 재능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스노우 양이 불편해하는 것 같군‘ 하며 점잖게 말머리를 돌렸지. 존 브레턴 선생은 너를 ‘조용한루시‘라든가 ‘그림자처럼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고, ‘루시는 취향이나 태도가 너무 엄숙하고, 성격이나 습관이 밝지 못한 게 단점이오‘라고 한 적도 있잖아. 너 자신이나 친구들이 - P135
너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다 그렇지. 그런데 세상에! 어떤 작은 남자가 이 모든 견해와 정반대로, 너를 너무 경박하고 발랄하다고, 너무 쉽게 폭발하고 변덕스럽다고, 너무 화려하고 다채롭다고 비난하기 시작한 거야. 그 가혹한 작은 남자, 그 가차 없는 검열관이 불쌍한 이런저런 허영의 죄와 재수없는 분홍색 천과 작은 꽃 장식과 작은 리본 조각과 너의 멍청한 레이스, 그 모두를 모아서 하나씩 설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야. 너는 ‘인생‘의 햇빛 아래 그림자로 취급받는 데 아주 익숙해져 있는데 말이야. 네게서 뿜어져나오는 빛에 눈이 부셔 짜증을 내며 손으로 눈을 가리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야." - P136
드디어 나는 독사에게 물리고 말았다. 그는 사악하게 입맛을 다시며, 당시 유럽인들이 지니고 있던 가장 지 - P146
독하고 거짓된 역사의식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최악의 모욕적 언사였다. 젤리와 교실의 모든 학생들이 복수의 쾌감으로 다 함께 미소를 지었다. 이 라바스꾸르의 어릿광대들이 얼마나 은근히 영국을 증오하는지 알게 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침내 나는 책상을꽝 치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영국 만세, 영국 역사 만세, 영국 영웅 만세! 타도하자, 프랑스! 타도하자, 거짓말! 타도하자, 깡패들!"" 교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생각했을 것이다. 뽈 선생은 손수건을 들어 접고는 얼굴을 가리고악마처럼 웃었다. 작은 악마 같으니라고! - P147
그가 시곗줄을 꺼냈다. 값은 얼마 안됐지만, 비단으로 만들고 구슬을 꿰어 광택이 나고 반짝거렸다. 그는 시곗줄이 마음에 들어 어린아이처럼 스스럼없이 감탄했다. "날 위해서 만든 거요?" "네, 선생님을 위해서 만들었죠." "어젯밤에 만들던 게 이거였소?" "바로 이거예요." "오늘 아침에 완성했소?" "네, 그래요." "날 주려고 시작했단 말이오?" - P154
그는 늘 순종하기만 해선 안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그에게저항할 필요가 있었으며,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요구사항이 비합리적이고 그의 절대적인 권위가 독재에 가깝다고 말하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 특별한 재능이 최초로 싹을틔우면 이상하게 흥분하며 불안해하기까지 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뒷짐을 진 채 재능이 탄생하려고 애쓰는 것을 지켜보기만했다. "기운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봐라" 하는 듯했다. 하지만 전혀 도와주지는 않았다. - P161
어쨌든 그는다시 화해를 청했다. 어쩌면 너무 쉽게 화해했는지도 모른다. 더 버텨야 했으나 그가 친절하고 선량한 표정으로 다정하게 손을 내밀자 그에게 핍박받던 순간들이 내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화해는 늘 달콤한 것이니까! - P165
그에 의하면 "지적인 여성"은 일종의 "기형"으로, 불운한 우연이며 창조에서 차지할 위상이나 효용성이 없고 아내로나 노동자로나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여성의 최고 덕목이라고 여겼다. 사랑스럽고 온화하고 수동적이고평범한 여성이야말로 남성다운 사고와 분별로 골치가 아플 때 쉴수 있는 유일한 베개라고 마음 깊이 믿었다. 그리고 일에 대해서 - P168
말하자면, 남성의 정신만이 훌륭하고 실용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소? 이 "그렇지 않소?"는 내게서 반박이나 반대를 이끌어내기 위한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하고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문제네요"라고만 말하고 곧바로 "가도 되나요, 선생님?" 하고 물었다. - P169
가끔씩은 삶이라는 계좌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셈을 해보는 것이 좋다. 항목들을 계산하면서 자신을속이고 불행 항목에 행복이라고 써넣는다면 그는 불쌍한 사기꾼이다. 고뇌를 고뇌라고 부르고, 절망을 절망이라고 부르라. 단호하게힘주어 굵은 필치로 둘 다 써넣으라. 그러면 ‘운명‘에게 진 빚을 갚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거짓으로 적어보라. ‘고통‘이라고 써야할 곳에 ‘특권’이라고 써보라. 그런다고 완강한 채권자가 사기를눈감아주거나 당신이 내미는 가짜 동전을 받겠는가? 가장 강한 천사, 즉 가장 사악한 천사가 피를 요구하는데 물을 줘보라. 그가 순순히 받겠는가? 한방울의 붉은 피 대신 창백한 바다 전체를 주어도받지 않을 것이다. - P179
반은 대리석이고 반은명이며, 오직 한쪽에서만 진실이고 다른 쪽에서는 농담일 수도 있는 그 기묘하고 일방적인 우정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감정은 죽었는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매장되어 있었다. 때때로 나는 그 무덤이 조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상하게들썩이는 땅과 관의 갈라진 틈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금발 머리카락이 빠져나오는 꿈을 꾸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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