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북결산이다.




10월은 아마 개인 기록으로는 최고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다. 총 19권?
9월 아픈 탓에 독서에 집중할 수 없었던 탓에 10월은 더 열심히 집중하여 책을 읽었고 덕분에 결과도 따라온 것 같다.
특히 읽은 책들이 대부분 좋아서 더 만족스럽다.

그 중 <코펜하겐 삼부작>과 <이토록 평범한 미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이 좋았다.

<코펜하겐 삼부작>을 통해 토베 디틀레우센이라는 작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사람이 얼마나 감정이든, 사람에게든 휩쓸리기 쉬운 존재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단편소설의 장점을 한껏 살렸다. 위로와 공감, 따뜻함을 전달받아서 읽는 내내 행복했다. 

현재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750~1870>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이 이 달에 읽은 책들 중 가장 좋긴 하지만 완독은 며칠 지나서나 가능할 듯하다.




이번 달은 다미여가 있으니 이것만으로 일단 큰 부피를 차지하여 많이는 읽지 못할 것 같다^^; 그렇더라도 나만의 걸음으로 뚜벅뚜벅 지적 욕망을 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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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1 17: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10월 독서 꽉찬달
몇권 땡투 날렸어요
11월 화가님 책탑 기대^^기대^^

거리의화가 2022-11-02 09:01   좋아요 2 | URL
스콧님. 10월에는 에세이나 소설류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가능했던 숫자인 것 같아요. 이번달에는 두꺼운 책들이 있어서 아무래도 10권 미만이 될 것 같습니다ㅎㅎㅎ
아직 11월 구입을 안했는데 지난달 담아둔 땡투 도서들 포함하여 오늘 주문하려구요. 스콧님 것도 많이 여러 개 포함되어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2-11-01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엄청 많이 읽으셨어요, 거리의화가 님! 대박대박!!
저도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제 시작할 것인가... 보고 있습니다. 너무 두꺼우니 지금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갈까, 일단 11월 펑펑 놀고 12월 바싹 읽을까... 그런데 그러다가는 제시간에 못읽을 수도 있을 것 같죠? 어쨌든 11월 화이팅 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11-02 09:02   좋아요 1 | URL
다락방의 미친 여자 나누어서 읽는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너무 또 질질 끌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어서 저는 적정선을 찾아보려구요. 아무래도 12월은 평소보다 덜 읽을 것 같아서 11월에 좀 더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다락방님도 이번달 화이팅이요!

stella.K 2022-11-01 2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앞의 두 책은 화가님들 통해 알게 됐네요.
읽고 싶은데 일케 알게된 것만으로도...ㅠ

거리의화가 2022-11-02 09:03   좋아요 2 | URL
스텔라님 저도 알라딘 서재를 보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책들 볼 때 기분좋더라구요. 비록 당장은 읽지 못하더라도 간접 경험만으로 좋은 것 같아요. 나중에라도 읽게 되면 더 좋겠지만^^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1-01 2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19권! 대단하십니다~!! 전 10월에 역대 최저로 읽은거 같은데😅 11월에는 20권 기대해봅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02 09:04   좋아요 2 | URL
ㅋㅋ 새파랑님 20권은 제 생애 좀 힘든 숫자가 아닐까... 지난달은 특별 케이스인걸로^^;;;
이번달 새파랑님의 독서 리스트는 어떻게 꾸려질까 궁금합니다. 즐독하는 한달되세요!

mini74 2022-11-02 0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그렇죠 우리의 11월엔 다미여가 ㅎㅎ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읽고있는데 참 좋네요 화가님 좋은 꿈 꾸세요 *^^*

거리의화가 2022-11-02 09:06   좋아요 3 | URL
ㅎㅎㅎ 다미여가 아무래도 압도적이라 많이는 읽지 못할 것 같아요^^;;
미니님 김연수 작가님 소설 읽고 계시는군요. 책을 통한 위로와 공감이 좋죠. 평범한 일상이 유독 소중한 시기입니다. 항상 감사해요.

그레이스 2022-11-02 17: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를 시작해버려서 <다락방...>은 언제 읽나 싶네요;;
전 10월에 놀았나봐요^^

거리의화가 2022-11-02 17:05   좋아요 3 | URL
그 어렵다는 율리시스를 시작하셨군요~ 응원 듬뿍 드립니다!
 
빌레뜨 2 창비세계문학 82
샬롯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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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삶이라는 계좌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셈을 해보는 것이 좋다. 항목들을 계산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불행 항목에 행복이라고 써넣는다면 그는 불쌍한 사기꾼이다. 고뇌를 고뇌라고 부르고, 절망을 절망이라고 부르라. 단호하게 힘주어 굵은 필치로 둘 다 써넣으라. 그러면 ‘운명‘에게 진 빚을 갚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거짓으로 적어보라. ‘고통‘이라고 써야할 곳에 ‘특권’이라고 써보라. 그런다고 완강한 채권자가 사기를 눈감아주거나 당신이 내미는 가짜 동전을 받겠는가? 가장 강한 천사, 즉 가장 사악한 천사가 피를 요구하는데 물을 줘보라. 그가 순순히 받겠는가? 한 방울의 붉은 피 대신 창백한 바다 전체를 주어도 받지 않을 것이다. - P179


1권의 마지막에서 존의 편지를 기다리는 루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기다려본 일이  있는가. 편지를 쓸 때의 설레임, 두근거림. 편지를 보낼 때의 벅참. 그런 감정을 한 번이라도 느껴보았다면 루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와 이성의 양 극단에서 그는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이성을 선택한다. 그는 사랑보다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더 컸던 게 아닐까. 


존은 이후 폴리나와 이어진다. 존이 원했고 결국 선택한 여성상은 전형적인 모성애, 여자다움을 갖춘 이상향이다. 루시는 애당초 그런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루시는 폴리나를 선택하는 존, 존에게 선택당한 폴리나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자신의 내면이 혼란스럽다고 끊임없이 내뱉는다. 질투의 감정이 크겠지만 단언해서 질투만 존재한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복잡함이었다.


(이 괄호 속에서 단언하건대, ‘연심‘이 아닐까 하는 모든 의심을 극히 경멸하고 부인하겠다. 처음부터 그리고 교유하는 내내 그런 착각이 치명적으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확신이 드는 경우, 여자들은 그런 ‘연심‘을 품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거친 물결 위로 떠오르는 ‘희망‘의 별을 본 적이 없거나 꿈꾼 적도 없으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나와 ‘감정‘은 편지에 깊은 존경심과 끝없는 관심으로 찬 호감을 표현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고통을 모조리 내가 대신 감당해주고 싶다는 애정, 언제나 몹시 염려가 되는 상대방을 폭풍과 번개로부터 막아주려는 마음을 표현했다. 바로 그 순간, 마음의 문이 흔들리더니 빗장과 자물쇠가 열리고 앙심에 찬 ‘이성‘이 힘차게 뛰어들어와, 그 종이들을 모두 낚아채서 읽은 다음 비웃고 지우고 찢어버렸다. 그리고 ‘이성‘은 다시 한페이지밖에 안되는 간결하고 짧은 편지를 써서 접어 봉한 뒤 주소를 써서 부쳤다. ‘이성‘이 옳았다. - P9


지네브라 팬쇼는 어리고 젊은 걸 무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육체는 아름답고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안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충분한 그런 남자를 택함으로써 결혼에 투자한다. 루시는 자유분방하고 감정에 솔직한 팬쇼를 좋아했으면서도 그의 결혼 선택은 비판적으로 본다. 여기서도 감정과 이성의 갈등이 있었겠지만 이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겼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열망과 남성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충동의 갈등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뽈 선생과의 관계다. 뽈 선생은 전형적으로 여성을 가부장제 하에서 바라본다. 여성은 감성적이어서는 안되며 바르게 행동해야 하는 등 전형적인 성모마리아상을 바라고 있다. 둘을 가로막는 장벽은 이렇게 성차별적 성향이다. 

또 둘은 종교도 다르다. 기독교 구교인 뽈 선생과 신교인 루시. 결혼을 해보니 종교가 서로 다르면 유지하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한다. 책에서는 이 갈등이 잘 무마되는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지적인 여성"은 일종의 "기형"으로, 불운한 우연이며 창조에서 차지할 위상이나 효용성이 없고 아내로나 노동자로나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여성의 최고 덕목이라고 여겼다. 사랑스럽고 온화하고 수동적이고 평범한 여성이야말로 남성다운 사고와 분별로 골치가 아플 때 쉴 수 있는 유일한 베개라고 마음 깊이 믿었다. 그리고 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남성의 정신만이 훌륭하고 실용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소?

이 "그렇지 않소?"는 내게서 반박이나 반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하고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문제네요"라고만 말하고 곧바로 "가도 되나요, 선생님?" 하고 물었다. - P168~169


나는 그에게 우리 종교에선 신과 인간 사이에 격식이 없으며, 적당한 예식을 위해 필요한 예배 속에는 오직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본성만이 담겨 있다고 했다. '무한' 속에 거하시고 존재 자체가 '영원'이신 '그분'을 향해 고양된 내밀한 비전을 가지는데 집중해야 하는 그런 순간, 그런 상황에서 꽃이나 금박, 양초나 장식물이나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죄와 슬픔, 지상의 부패, 도덕적 타락, 지상에서의 비애를 생각하는 와중에, 찬송하는 신부나 입 다문 군인의 화려한 모습에 끌릴 순 없다고 했다. 존재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밀려올 때,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과 끝없는 의심이 눈앞에 떠오를 때, 그럴 때면 과학적인 논리나 사어가 된 박식한 라틴어로 된 기도는 "하느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울며 갈구하는 마음을 방해하고 괴롭힐 뿐이라고 했다. - P276~277


<빌레뜨>의 가장 큰 재미는 인물들의 성격을 상황을 통해 엿보고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주인공인 루시는 자신을 스스로 설명하기 보다는 다른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설명하려한다. 나는 특히 이 지점이 좋았다. 

누구든 자신을 스스로가 판단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부로부터, 비교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성격은 단편적이지 않고 A가 바라보는 나, B가 바라보는 나, C가 바라보는 나는 모두 다른 것처럼.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때때로 얼마나 상반된 특징들이 우리에게 부여되는가! 베끄 부인은 나를 박식하고 우울한 여자로, 팬쇼 양은 신랄하고 빈정대기 좋아하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홈 씨는 모범적인 선생에다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 즉 다소 관습적이고 엄격하고 편협하며 까다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정교사다운 정확성을 지닌 산 표본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 즉 뽈 에마뉘엘 같은 사람은 알다시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성격이 불같고 무모하며, 모험심이 강하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대담하다고 암시했다. 나는 그 모든 것에 웃음을 지었다. - P84~85


나는 둘러대거나 변명을 늘어놓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일시적인 현실 도피나 모든 것을 추월해 빠르게 달려오는 무서운 '사실'을 피해 비겁하게 도망가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사실'이라는 유일한 군주에게 복종하지 않으려고 유약하게 보류하거나 정복욕에 차 전진하는 '힘'앞에 얼버무리고 떨면서 저항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나는 '진실'을 배반하는 반역자와는 거리가 멀다. - P349



<제인에어>와 <빌레뜨> 두 작품을 비교하며 나는 어느 것이 더 완성형에 가까운가 생각했다. 공통점부터 찾아보자면 둘 다 대화가 적고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많아서 내겐 읽기가 편했다(나는 설명하는 문장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둘 다 그림처럼 문장이 아름답다. 비유도 탁월하고 재치가 돋보이는 문장들이 많다. 여성을 구속하는 가부장제, 종교에 대한 믿음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있다. 내가 보기에 <제인에어>는 좀 더 쉽고 대중적인 문장으로 쓰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비해 <빌레뜨>는 성경 속 인물이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많아 더 난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제인에어>가 대표작이 된 것에는 대중적 표현에 따른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완성형 작품으로는 어떤 것이 가치 있을까. 대부분의 독자가 <제인에어>에 손을 들 것이라 느꼈다. 주인공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간에 따라 심지가 더 단단해지는 등 성장 서사를 통해 완성형에 가까운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전히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 면에서 따진다면 나는 <빌레뜨>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 불완전성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고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적 흔들림을 참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스포를 최대한 자제했다. 결론도 기대처럼 평범하지 않았어서 뭐라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주관적인 감상기이니 직접 읽어보고 각자 판단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인생의 어떤 부분들은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시점, 어떤 위기, 어떤 감정, 즉 기쁨이나 슬픔이나 놀라움 등은 돌이켜보면 마구 빙빙 도는 바퀴처럼 희미한 물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물체처럼 떠오를 뿐이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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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01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빌레뜨 너무 재미있을 것 같잖아요!! 어쩐지 저도 제인 에어 보다 빌레뜨를 좋아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듭니다!!

거리의화가 2022-11-01 17:27   좋아요 2 | URL
주인공 자체로 따져봤을 때 감정이입이 더 되는 것이 빌레뜨였어요^^ 저와 좀 비슷한 면이 많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느꼈습니다. 인물들도 처음엔 비호감이다가 갈수록 피식하게 되는 것도 있어요. 1편보다 2편이 더 재밌었구요^^ 다락방님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mini74 2022-11-02 0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정적 흔들림을 잘 표현했다 하시니 관심이 갑니다. 읽다 만 책들이 쌓여있는데도 말이지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11-02 09:08   좋아요 2 | URL
읽고 있는 책들 하나씩 치워야 하는데 또 새로운 책 발견하면 읽고 싶은 충동이 일죠^^;
미니님 재미나게 읽으실 것 같아요. 저는 이 작품이 제인에어보다 더 좋더라구요ㅎㅎ

scott 2022-11-02 12: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빌레트를 가장 사랑합니다 브론테 작품 중에서!

제인에어 로체스터는 고구마 백만개!ㅎㅎ

화가님 리뷰 빌레트 리뷰 중 쵝오 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02 12:53   좋아요 3 | URL
스콧님도 빌레트 작품을 좋아하시는군요~ㅎㅎ
저도 로체스터 생각하면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못해서 안달난 스타일이라고할까~ㅋㅋ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11-02 16: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빌레뜨 리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거리의 화가님께서 좋은 글로 올려주시네요. 열시히 구해서 중고로 구입해놨는데, 아직 못읽었어요. 읽어봐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11-02 17:07   좋아요 3 | URL
브론테 작품 중 <빌레뜨>가 왜 인기가 덜할까 궁금해서 읽게 된 것도 있었습니다. 역시 읽어봐야 평가가 가능한 것 같아요^^ 그레이스님 감상평이 궁금해집니다^^

- 2022-11-03 1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빌레뜨 읽기로 마음 먹었어요 ㅋㅋㅋ 흐흐~

거리의화가 2022-11-03 12:59   좋아요 1 | URL
와. 쟝쟝님 결심하셨군요^^
다미여 벌써 서문 끝내셔서 부럽습니다ㅎㅎㅎ 빌레뜨 즐독하셔요!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고들 하지요. 고통스러운 일을 하나 겪고 나면 또다른 고통이 닥치는 방랑자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희망'이 그의 앞을 휙 지나가고는 너무나 오랫동안 가까이 날아오는 법도 없고 서성이는 법도 없어서 그는 한번도 희망을 잡을 기회조차 없었다고 해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지만 기쁨으로 거두지 못하고 엉뚱하게 곡식이 병충해로 죽어버리거나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멀리 날아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어요." 


어떤 일은 쉽사리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이 된다.

혼돈과 절망.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간 일에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냐며 무책임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모두 다 죽지 않는다.

조롱과 혐오를 내뱉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를 떠나서 애도를 표해야 마땅하거늘 이런 광경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참담한 심정이 밀려온다.

2022년 10월 29일은 상실과 아픔으로 기억되겠지.

부디 떠난 이도, 남은 이도 안식을 찾기를 소망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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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31 1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런 댓글들을 어떻게 다는지 ㅠㅠ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거리의화가 2022-10-31 10:16   좋아요 3 | URL
미니님.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ㅜㅜ 조롱하는 댓글, 자극적인 영상을 버젓이 올리는 사람들 너무 화가 나요.

페넬로페 2022-10-31 10: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 젊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넘 마음이 아픈데 댓글과 혐오를 보면서 더 마음이 찢어졌어요. 이 사회가 왜 이렇게 막 나가는지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0-31 11:22   좋아요 4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찬란한 청춘들이 이리도 허망하게 가버렸네요. 고인에 대한 존중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이들을 생각하니 화가 납니다.

새파랑 2022-10-31 12: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서 인터넷 댓글은 안보게 되더라구요. 여기저기 혐오와 냉소가 가득해서 안타깝습니다 ㅜㅜ

거리의화가 2022-10-31 13:00   좋아요 4 | URL
몇 개 보다가 더는 못보겠어서 현재는 안 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서로 보듬어야할 때인것 같아요.

하나의책장 2022-10-31 2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뉴스통해 봤는데 비난하는 댓글은 물론 사망하신 분들의 사진이랑 적나라한 사고영상들이 SNS에 지금도 올려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모자이크처리된 뉴스 영상만 봐도 가슴떨리고 무섭던데... 정말 믿겨지지 않는 끔찍한 사건이에요...
특히 CPR하고 있는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노래부르고 춤췄다는 뉴스가 제일 충격이었어요... 휴우... ㅠ

거리의화가 2022-11-01 09:26   좋아요 1 | URL
앞으로는 그런 사진이나 영상들 올리는 것을 필터링한다고 하네요. 2차 가해가 심각한데 진작 그랬어야할것을. 국가적 재난에 이슈 몰이라니 참담합니다.

그레이스 2022-11-02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세월호 유가족이 조언하는것을 들었습니다. 눈물나서 혼났습니다. 함께 모여 서로 위로하고 생각을 나눌수 있게 해주라는 말에서! 😭

거리의화가 2022-11-03 09:19   좋아요 1 | URL
세월호 가족분들은 이 참사를 보실 때 더 힘드실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위로하고 공감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8년이 지나 또 이런 참사가 일어나니 너무 마음이 힘듭니다. 흑흑
 

3부 세계적 변화의 문화사

새로운 시간 체계가 도입되고 유럽식 삼분법(고대, 중세, 근대)가 이때부터 자리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도 이때 정리된 것이었다.

종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와 변화도 체크하고 넘어간다.

문화적 차원은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경제나 기술, 제국주의가 움직이는 근저의 과정에 붙은 단 - P490

순한 부가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로 이 과정의 물질적 차원에만 집중하는 시각은 여러 곳에서 문화적 변화가 정치적 변화나 경제적 변화보다 훨씬 더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가린다. 인간의 시간관념과 공간 관념에 나타난 혁명적 변화, 수백 년간 존속한 세계관과 우주관에 대한 의심(몇몇 경우에는 통째로 내버리기), 종교적 확신에 대한 비판적 이의 제기,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이론의 정립,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인간의 견해에 나타난변화, 세계적 의식의 출현, 이 모든 것은 1900년의 세계가 더는 1750년의 세계와 비슷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대양 항해 증기선을 타 보지 않고 전보를 보내보지 않고 쥘 베른Jules Vern의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 P491

세계사의 서술은 지금까지 저마다 문화적 변화를 더 큰 맥락 속에 두는세 가지 표준적인 담론을 탄생시켰다. - P493

고립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유럽 중심적 견해를 취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 유럽인이 존재하는지를 한 나라의 ‘개방‘을판단하는 척도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 유럽인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입국이 허용되었지만, 그런데도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비록 엄격히 규제되기는 했어도 유지되었다. - P519

무수히 많은 일상적 교류와 이동, 상업활동의 형태가 19세기 말의 세계화한 제국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경우에 관련된 자들은 이러한 오래된 전통을 의식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연속성이 있는데도 이 글에서 논의하는 지역적 유형들의 출현이 근대 초기의 지역 세계가 과거의 역사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그 세계가 남긴 단순한 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중요하다. 19세기에 세계는 점점 더 심하게 뒤얽히면서 주요 지역들은 개조되고 재구성되었으며, 나아가 몇몇은 처음으로 출현했다. - P552

무슬림 통치자와 일본 개혁가들 사이의 동맹처럼 종교적 경계를 초월한 이러한 동맹은 유라시아의 충성과 정체성이 지정학적으로 재구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이 조정의 중요한 특징은, 동시에 지역주의의 정치적 도구화의 중요한 특징은 ‘범-’ 운동의 출현이었다. 이러한 운동들도 문화적 자기주장을 추구하면서 지역의 우주론을 자원 삼아 의지했다. 이러한 운동의 선구자들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으려는 열망에서 자주 헤르더와 그의 유기적 ‘문화’ 개념이나 먼로 독트린(1823)을 정치적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1880년대에 점차 악독해진 종족 담론과 임박한 ‘종족 전쟁‘의 풍설도 단연 새로운 중요한 요소였다.
‘법‘ 운동들은 비록 장기적인 역사적 연속성의 산물로 자처했지만, 이러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출현했다. 따라서 이 운동들과 관련된 지역들은 단순히 문 - P559

화적 자의식의 각성이 필요했던 기존 지역이 아니라 세계화한 세계가 세계적 상호 연결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된 결과물이었다. - P560

관례적으로 ‘계몽운동‘이라는 포괄적 용어로 총괄된 모든 것의 여러 시각과 양상이 보여 주는 전경은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된 그림이다.
현재 고정불변의 계몽운동 기획이라는 관념을 고수하는 역사가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80 지배적인 견해는 접근법과 태도의 큰 다양성과 큰 범위를 간파하는 것이다. ‘계몽운동‘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에는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에게 반대한 압도적으로 가톨릭 왕당파였던 자들의 투쟁 구호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81 그렇게 그 현상의 통일성은 그 반대자들이 만들어 주었다. 계몽운동이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에서 수용되고 채택되면서, 완전하고 통일성 있는 문화적 경향이라는 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계몽운동‘은 언제나 역사의 주역들이 쓴 개념이었다. 그들은 맞서 싸우거나 모방할 운동을 지칭하는 데 그 용어를 썼다. - P568

18세기의 계몽운동에 관한 논쟁은 세계적 상황에 대응하려는 시도의 산물이었다. 논쟁은 서유럽의 경계 너머까지 넓게 확장된 공간에서 일어났으며, - P568

논쟁의 형세는 새로운 여행 가능성과 도서와 지식의 유포, 세계적 인식의 전체적인 성장이 결정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 지리적 범위는 전혀 임의적이지 않지만 영 제국이나 교역망 안으로의 통합 같은 포괄적인 구조에 의해 촉진된 동시에 제한되었다. ‘계몽운동‘을 불러내는 것은, 비록 그 언급이 수사법에 그치고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고 해도, 유럽과의 모종의 관계를 전제한다. 계몽운동에 관한 논의들사이의 연결은 특히 대서양 권역에서 각별히 긴밀했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기도 했다. - P569

계몽운동은 처음부터 대서양 권역 내부에서 발생했지만, 그 안에서도 유럽이 유일한 발상지는 아니었다. 유럽은 개념들과 사상이 유포된 여러 방향의 하나였을 뿐이다. - P575

계몽운동이 절박하게 요구된 것은 주로 지정학적 세력 구조와 관련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계몽운동은 국가의 쇠락이나 식민화를 모면하기 위해 필요했다. 계몽운동의 수사법은 보편적 발전이라는 개념을 세계적 구조와 지역 현장의 개별적 조건에 대한 진단에 연결했다. 지역과 세계 사이의 연결은 19세기 세계를 바꾸어 놓은 세 가지 근본적인 과정, 즉 세계경제의 통합, 국제적 국민국가 체제의 출현, 제국주의의 공고화가 매개했다. - P593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종종 문화적 구축의 징후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새로운 시간성은 전통적인 우주론을 밀어내고 사실상 소멸시키는 외래 사고방식의 침투로 보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간 경험을 대충 보기만 해도 단순한 서구화론은 지지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새로운 시간 체제의 새로운 성격은 파리에서도 그 이후에 바타비아나 이스파한에서 느낀 것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서구 밖에서는 부득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유럽의 시간 체제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그것은 서구에서도 기묘하고 이상했다. 괴테가 1809년에 발표한 소설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의 주인공 에두아르트Eduard는 이렇게 외쳤다. "요즘에는 온 힘을 다해도 무엇이든 쉽게 배울 수 없다. 우리의 조상은 젊을 때 배운 것을 지킬 수 있었지만, 우리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5년마다 다시 배워야 한다."이 이행기에 작성된 많은 기록은 고통스러운 대체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증언한다. - P614

시간 혁명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관행과 세계질서에 나타난 광범위한 변화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많은 과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국민국가가 수행한 표준화 기획, 시간의 정밀한 계측을 촉진하는 동시에 시간의 우주론적 의미를 훼손한 자연과학의 발전, 증기기관 시대의 기술적 성취, 생산과 사회적 관계의 점진적인 자본주의적 변화, 마지막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변화하는 지정학적 질서. 이러한 과정들은 영국이나 세네갈, 오스만 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행위자들이 시계와 시간 엄수, 진보의 체제를 점차 자명하고 유익하며 나아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끼쳤다. - P627

제국주의는 새로운 시간 체제의 세계적 확산에 기여한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정의 하나였다. - P630

새로운 시간의 채택과 더불어 많은 사회에서 옛 시간의 재건, 즉 황금기의 탐색도 목격되었다. 그 전제는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삼분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간 체제의 산물이었다. 고대는 종종 문화가 꽃을 피운국면으로 표현되었다. 반면에 중세는 1830년대에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 - P648

기를 끌었는데도 쇠퇴의 시기이자 정치적·문화적 사망의 시기로 여겨졌다. 이러한 해석에서 근대는 고대 세계의 전통과 다시 연결되었고, 그로써 역사의순환이 완성되었다." 이 거대 담론은 르네상스 이래로 유럽 전통의 일부였으며, 그 뿌리는 유대-기독교적 시간의 이해였다. 그러나 유럽 밖의 다른 문화에적용되면 쇠퇴와 부활이라는 개념과 쉽게 연결되었다. - P649

18세기 말에 많은 종교에서,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또한 유교에서도 내부의 개혁주의 운동이 출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중 여럿이 개인의 직접적인 관여를 크게 강조했다. 다른 공통의특징은 종교의 고전적 텍스트에 거의 문헌학적으로 의지한 것과 ‘원형‘으로의복귀를 호소한 것이었다. - P666

이 새로운 종교적 네트워크는 19세기의 초국적 상호 연결의 전반적 확산과 맞물려 출현했다. - P679

18세기와 19세기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힘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웠던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은 7세기 이래로 이미 마그레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고, 11세기이후로는 가나를 비롯해 서아프리카의 다른 곳에서도 지배층에 서서히 퍼졌으며, 인도양 무역의 결과로 동아프리카 해안 지방을 따라 점점 더 많은 무슬림 집단이 발전했다. 그러나 수피교도 단체들과 상인들, 인쇄물의 확산으로 - P683

매우 다양한 기풍의 이슬람과 샤리아 율법학파들이 사하라사막 이남으로 전파되어 처음으로 그곳 주민의 큰 부분에 침투한 것은 18세기 말의 일이다. - P684

1882년부터 진행된 아프리카 쟁탈전은 아프리카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선교 활동은 새로운 기독교 사회의 성장을 낳았고, 동시에 유럽 사회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게다가 기독교 모델과 식민 국가의 관행은 비기독교 종교들이 자기들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규정해 서로 더욱 명확히 구분되는 과정에 이바지했다. 특히 중요했던것은 종교 개념이 식민 통치의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 P685

기독교 선교회는 승인된 기관이었으므로 식민지 국가의 필수 요소였지만, 종종 정부에 맞서(특히 유럽인 정착민들에 맞서 ‘토착민 ‘ 옹호자의 태도를 취했고, 식민주의의 추악함을 들춰냈으며 술과 아편, 노예제의 확산에 반대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453그렇더라도 기독교 선교회들은 유럽의 정치적 팽창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그러한 팽창이 없었다면 그들의 활동은 여러 지역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선교회가 식민주의의 필수 구성 요소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고, 그들의 비판이 식민지 사업 자체에 도전하는 진정으로 근본적인 비판인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프랑스 제국은 예외이지만) 거의 보편적으로 학교는 기독교 선교회가 확고히 장악했다. - P692

한국의 기독교화도 문화적 제국주의의 범주에 말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세계사에서 특별한 경우였다. 일찍이 1600년대에 조선의 외교관(주청사奏請使) 이광정李光庭이 북경에 갔다 오면서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책자를 들여왔다. 이것이 한국이 스스로 시작한,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의 아무런 개입 없이 중국어로 시작된 개종 프로그램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그 결과로 국가의 박해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그나라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80년대에 영국과 미국의 선교회들이 그때까지 서양의 접촉을 완전히 봉쇄했던 조선에 들어간 것, 즉 조선의 ‘개항‘이 기독교화의 두 번째 물결의 시작이었다. 유럽의 문명화 사명이라는가정이 강하게 스며든 이 운동은 프로테스탄트의 급속한 확산을 낳았다. - P694

종교에 공통된 종교적 진리라는 관념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종교의탐색은, 그 확실한 표현을 넘어 또 그 배후에서, 19세기에 근대의 진보 담론과결합했다. 진보 담론은 인간의 종교성이 자연 세계에 대한 단순한 물활론적형태의 신앙으로부터 주술과 범신론을 거쳐 기독교의 일신론으로, 높은 단계로 부단히 진화했다는 가정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 P713

점차 강화되는 세계의 상호 연결은 지구를 더욱 동질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경계선과 차이를 낳기도 했다. 세기 전환기의 세계화 과정은 내부적으로 국민국가와 제국, 거대 지역으로 분화한 국제 체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거대한 과정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작동했다. 국가와 지역의 정체성 강화와 유사하게, 공간적으로 구분되고 문화에 특정한 종교적 전통을 새롭게 강조한 것은 19세기의 마지막에 진행된 세계화 과정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720

종교 영역의 변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세계적 통합이라는 도전에 대한대응이었다. - P732

종교는 19세기의 마지막 몇십 년간진행된 세계의 지역화에서 필수적인 구성 부분이었다. 계몽운동과 종교학의확산 여파로, 여러 종교는 일부 학자가 말한 이른바 종교 시장 안에서 세계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 기존의 모든 구체적인 종교는 하나의공통된 원형 종교의 상이한 표현으로 여겨졌다. 20세기에 들어선 후에도 이보편주의적 접근은 한참 동안 유효했다. 그러나 19세기 막바지부터 그것은 한번 더 특정 지역과 문화를 연결한 종교 개념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다양한 종교적 ‘범‘ 운동에서 표현된, 이와 같은 종교와 지리·문화 사이의 연결의 귀환은 단순히 전근대 ‘문명‘의 전통을 상기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민족주의의 흥성과 거대 지역의 재출현을 포함한, 세기말에 일어난 세계적 변화의 결과이자 산물이었다. - 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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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풍요의 가능성과 빈곤의 지속성: 산업화와 국제무역

19세기 말 일본의 국가 주도 산업화 프로젝트는 20세기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로 복붙처럼 이어짐

장기 19세기 동안에, 즉 프랑스 혁명의 시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이르는 동안에 일어난 산업화 과정을 살펴보려면 유럽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산업화가 그곳에서 시작되었으며, 나아가 유럽은 산업화를 통해 사회적·정치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깊은 변화를 겪은 세계의 두 지역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의 경제적 과정이 시작된 곳이 유럽일뿐 아니라 19세기 말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해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나 보호령으로 만들었던 것도 유럽의 정치권력과 군사력이었기 때문이다. - P337

두 세기 동안 산업화를 겪은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는 미래에도 경제가 성장할 수 있을지에 관해 불안함을갖고 있다. 그동안 일부 사회가 탈산업화되었지만, 우리는 산업사회를 특징지었던 화석 에너지에 대한 만성적 의존 상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초기에는 석탄으로, 그리고 점차 석유와 천연가스로 추진되는 기계가 등장했으며, 20세기 말의 경제 발전 수준도 매일의 소비 욕구와 인간의욕망을 채워 주는 데 사용될 에너지의 양에 달려 있었다. - P337

필자는 중상주의적 상업자본주의가 특히 유럽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산업자본주의를 초래하지는 않았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업자본주의가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날 가능성을 매우 높이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경제적 산출을 보여 주는 양적 지표들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다만 천천히 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전체를 한 단위로 파악할 때, 우리의 목표는 장기적인 결과를 추적하는 것이지,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다. - P340

우리가 경제적으로 유용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게 한 조건 가운데 공급 측면으로부터 수요 측면으로 넘어가 영국뿐 아니라 네덜란드도 시야에 넣는다면, 석탄 사용에서 돌파구를 발견하게 한 기술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보다 유럽의 이 지역들에서 더 컸다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이 지역의 고임금은 노동에 드는 비용이 자본과의 관계에서 다른 지역보다 비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상은 특히 영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상업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두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자본의 이동을 쉽게 만드는 발전된 금융기관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기술 발전은 보통거대한 자본 투자가 필요한 새로운 기계 설비를 포함하므로 대개 고임금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유럽의 경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 P346

보호관세의 토대가 된 민족주의는 산업 엘리트와 농업 엘리트들에게서정치적으로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경제적 통합도 촉진했다. 당시에독일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특히 동부의 농업적 이해와 서부의 산업적 이해가 정치적으로 연결되고 경제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를 모방하고자 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정치권력과 경제 번영을 함께 달성하려는 논리는 국가의 부유층과 정부의 권력을 서로 연결해 주었던 중상주의 사상의 기본 개념을 연상시킨다." 경제와 정치의 엘리트들이 중요한 정책결정을 내릴 때 동원했던 각별한 확신은, 그리고 부와 권력의 실질적인 네트워크는 여전히 유럽의 정치와 경제의 질서에서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었다. 자기들의 자유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경제와 정치의 엘리트들이 보유하던 제도는 200~300년 전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힘을 합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내 경쟁은 이미 19세기 초에 유럽을 넘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드는 경쟁이 되었다. - P356

미국의 국민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국내적으로 견고하게 통합되었으며, 국제 네트워크도 확대되었다. 게다가 미국 경제는 미국 내 상품의 흐름 증가나해외무역이 증가하면서 얻은 이익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유입된 자본과 노동력으로부터도 혜택을 입었다. - P372

순수한 경제 논리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유럽산 산업 제품이나 미국산 산업 제품을 구 - P379

매한 대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이들은 유럽인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농산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내륙 국가들이 영국산 수입품을 대체하기 위해 자국 산업을 발전시킬 때사용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보호관세를 통해 아직 초기 단계인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고 했다. 예전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외국차관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긴급한 국가 수입을 조달하는 데 관세 제도를 사용했다. 산업 육성을 위한 보호관세는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수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국가에의한 경제 촉진 정책, 유럽의 자금 투자, 유럽인 노동자의 이주, 이 세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 19세기 말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농업 분야뿐 아니라 산업분야에서도 생산이 증가했다. - P380

서양은 19세기에 대서양 양편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제도에 토대를 둔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면서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뛰어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세기 말에 대서양 경제는 본질적으로 산업자본주의경제였는데, 산업 생산품뿐 아니라 농산물도 시장가격에 따라, 즉 수요와 공급이 형성하는 조건에 따라 대서양을 건너 오갔다.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대서양을 건너 오고 가는 더 강력하고 더 다양한결합으로서 대서양경제가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대서양 양편의 지역이 서로 같은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화와 경제, 정치도 여기에 속했다. 다소 변형된 부분이나 차이점이 있었지만, 서로 어떤 연속성이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였으며, 비유럽 세계에서 발견되는 이데올로기나 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대서양 양쪽의 지역들은 이렇게 공통된요소들을 기반으로 상대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을 시행한 결과 비슷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 P399

유럽과 미국에서 전개된 성공적인 산업화 과정과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오스만 제국에서 진행된 제한적인 발전을 나란히 펼쳐 놓고 살펴보면, 우리는 19세기에 훨씬 긍정적인 경제 발전을경험한 지역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되지만, 생활수준이나 삶의 질에서 이와 비슷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지역들에는 결여되어 있던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역을 촉진하고 경제활동이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효과적인 사회제도가필요했다. 둘째, 의도적이든 아니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해 주는 국가의 정책과 그 정책의 관철이 필요했다. 이는 항상 기존의 사회제도나 실현 방식을 보완하거나 변화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들 제도나 그 제도의 실행이 구체적으로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또한 아마 이것이 더중요할 텐데,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정부 정책은 유럽 내에서조차 다양했다. - P422

19세기 말에 유럽이 보인 경제적·정치적 역동성은 세계가 전 지구적인 산업자본주의의 첫 단계에 진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서양 사회가 겪은 물질적 변화를 통해 기타 세계의 대부분이 이득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도, 촉진하지도 않았다.
경제적 측면에서 19세기의 산업화에는 새로운 기술, 기계 도입을 위한 자 - P423

본,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이19세기 말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자본과 기계, 노동력을 제공한 원천이었다. 인도에서는 원주민들의 노동력과 국내외 자본이 서양 기술을 도입하고 산업 영역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 산업화가 발전하고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은 서양인들 때문이 아니다. 많은 부분이 지역적 조건과 관계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도 남아시아에도 수많은 지역을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로 통합하고 주민들을 거기에 많이 참여시킬 수 있는기존의 무역 체계가 없었다. 해외무역과 지역 교역을 연결하는 구조도 유럽이나 미국보다 덜 발달해 있었다. - P424

19세기 일본의 경제 발전을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19세기 일본 경제의 변화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점이 무엇인지를 오해한다. 둘째, 부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이 서양을 모방하면서 드러낸 덜 유 - P438

쾌하고 덜 평화적인 모습을,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침략국으로 등장하게한 모습을 간과한다. - P439

19세기 말에 동아시아의 국민경제는 근대 초의 근면 혁명이 남긴 유산을바탕으로 발전했다. 동아시아인들은 이미 있었던 무역 제도를 활용했으며, 서구에서 진행된 경제 변화와 점차 강해지는 그들의 정치권력이 자기들에게 문제와 동시에 기회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정부도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기업가들은 초기에 서구의 산업 기술을 도입해 소규모의 노동 집약적인 환경에 적용했던 반면에, 이와 동시에 그들의 정부는 근대적인 군대를 무장하는 데 필요한 중공업을 육성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일본 정부는기업가 집단과 효과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해서, 산업화와 국제무역은정부가 지원하고 통제하는 잘 조율된 프로젝트가 되었다. 학자들이 훗날 정부가 경제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일본식 발전 국가라고 명명한 제도의 토대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학자의 평가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이후에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기반도 일본식 발전 국가 모델에서나온 것이다. - P445

기계를 인간의 척도로 바라본 사람들은 물질문화의 기술적 측면을 기준으로 해서, 긴 역사를 갖고 세계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인류 문명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19세기에 일어난 경제적인 변화는 서구의문화적 관습과 신념을 받아들이면서 접하게 될 새로운 기술들이 각 지역의옛 사회들을 새로운 삶에 대해 각성하게 해서 변화를 꾀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유럽이나 특히 비유럽 세계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기대감에 단호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서구에서 근대사회를 형성한 문화적 토대는 기타 사회에서도 수용되어야 할 일련의 관습을 포함한다는 신념이 일종의 규범적인 기대가 되어 20세기까지 여전히 이어지는것이 사실이다. 이런 기대감은 1992년에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프랜시스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테제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만약 후쿠야마도 스스 - P449

로 그렇게 했듯이) 역사의 종말 같은 시나리오를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19세기에 산업화와 국제무역이 실제로 그런 방식대로 일어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변화에 대한 이해가 20세기에 뒤이어진 경제적 문제와 가능성들을 적절히 평가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어떻게 제시할 수있는지에 관한 문제 앞에 서 있다. - P450

19세기 말에 세계경제는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도 밀접하게 통합되어있었다. 산업 제품의 생산자와 농산물 또는 천연자원의 공급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경제적인 노동 분업이 이러한 통합의 토대였다. 또한 생산과 천연자원획득,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자본이 전 세계로 이동했다. 이러한 자본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려면 각국 정부가 각각 무역 파트너들이 사용하는 화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각 화폐가 가진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함으로써 이 조건은 충족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 덕분에 국제무역에서 관련 국가의 화폐가치가 동요한다고 해도 그것이 국제무역을 방해하는 심각한 불안 요소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서구 산업국가의 정부들은 19세기 말에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일부 국민에게서 정부가 화폐 공급을 늘려 수요를 진작하고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강한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안정된 국제무역에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던 다른 국민들은 화폐 공급을 늘릴 경우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는 이유에서 이에 반대했다. - P459

군사력을 통한 위협이나 군사력의 실질적인 동원을 통해, 그리고 행정적 통치와 이념적 호소를 통해 결국 성공에 도달한 일본의 정치적 팽창은 부와 권력을 향한 일본의 본래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러한 팽창은 이웃 국가의 경제활동을 상호 역할 분담의 구조로 통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서 역할은 일본의 정치 지도자와 경제 지도자들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분담되었다. 예를 들어 대만산 설탕이나 대만산 쌀 같은 농산물뿐 아니라 일본의 산업에 필요한 한국산 지하자원 등이 그 역할 분담 과정에 속했다. 일본의 정치권력이 거대해진 것은 경제성장 없이는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 P481

19세기가 20세기에 물려준 산업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는 대부분 물질적으로 좋아 보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판단할 야누스와같은 얼굴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사회는 사람과 정부들이 이렇게 두 가지 자본주의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가능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 왔다. 이 가능성들은 여전히 21세기 세계의 근본적인 경제적 특징으로 남아 있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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