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역사산책 -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만나는 한국 근현대사
김학규 지음 / 섬앤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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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의 길을 탐방하며 관련 인물과 그와 얽힌 한국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집 주변 공원을 산책하듯 서울현충원을 총 7개의 탐방로로 나누어 소개한다.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에는 국립 서울현충원을 한 번에 다 둘러보는 방식으로 하려 했으나 구역이 넓은 만큼 이야기거리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제별 길로 만들어 저자와 함께 여행한다는 느낌으로 만든 것이다. 또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국립서울현충원을 좀 더 가까이 느끼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도 담겼다. 나부터도 국립서울현충원을 부끄럽지만 가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순국 선열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로 다가와서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편집 방향을 영리하게 잘 잡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 책을 낸 데는 2005년 평양의 북한 '애국열사릉'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직접 방문한 곳은 '애국열사릉'이지만 영상물을 통해서 '혁명열사릉'을 보게 되었는데 둘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국립현충원은 어떤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궁금했다고 한다.


각 탐방로의 도입에 지도가 등장하는데 우리가 어느 유적지를 가던지 볼 수 있는 그런 탐방로 형식의 그림이다. 방문할 장소만 있지 않고 순서대로 루트를 그려놓아 책을 다 읽고 방문할 때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참으로 독자를 배려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내용도 대중서라 쉽게 쓰여져 있고 번호 주석과 관련한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참고 자료까지 바로 아래  확인할 수 있어 뒤를 뒤적거릴 필요 없이 바로 확인 가능하다.

현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군묘지로 출발했다.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 분단과 전쟁을 겪은 탓이다. 6.25 전쟁으로 많은 국군이 전사하자 이들을 수용할 묘지 조성이 시급했다. 1952년부터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여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9월 30일 이승만이 현 자리를 묘지 부지로 선정하고 1954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조성하면서 탄생됐다.
1965년에는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한다. 이때 독립유공자, 경찰관, 전직 대통령, 향토예비군도 안장 대상에 포함되었다. 1985년 대전에 국립묘지가 또 하나 준공되었고 1966년에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부르던 국립묘지는 2005년 7월 29일 「국립묘지법」이 제정되면서 2006년부터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완전히 분리된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1965년 애국지사 묘역이 조성되고 1975년 무후선열재단, 1993년 임시정부요인 묘역, 2002년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이 조성되거나 건립되었고, 이를 아울러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라고 엄밀히 적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충시설을 마련할 때 순국선열을 모시는 일을 미루고 남과 북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전사한 군인을 모시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분단과 전쟁이라는 상황이 있었겠지만 반공을 위시하며 몰고 간 정부의 책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독립운동가 길'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남북의 대결 구도와 반공의 강화로 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두 번째, '친일파 길'에서는 일제에 협력한 각종 인사들을 만날 수 있다. 국립묘지에 친일파가 묻혀 있음은 언론을 통해서 이미 많이 보도된 바가 있다.
세 번째, '여성 길'에서는 그동안 애국 여성들의 역할이 조명되지 못한 것을 성찰하며 그들을 만난다. 또 2021년 성평등 관점이 반영되어 독립운동자 묘역의 묘비가 개선되었는데 과거와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네 번째, '4.3길'에서는 제주 4.3 사건과 연관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제주를 가지 못하더라도 이 곳을 둘러본다면 당시의 역사를 다시 되새길 수 있다.
다섯 번째, '5월 길'에서는 5.18 계엄군의 묘를 확인할 수 있다. 2020년 12월 '전사'에서 '순직'으로 묘비가 바뀌게 된 변화도 있었는데 시민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여섯 번째, '대통령 길'에서는 4명의 역대 대통령의 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일곱 번째, '평화 ·통일 길'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미래를 고민해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책을 읽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어떤 인물이 있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 책을 들고 나들이를 가보고 싶을 것이다. 7코스 모두 둘러보기는 어렵다면 1코스씩이라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국립서울현충원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국립서울현충원은 여전히 6.25 한국전쟁 전후의 전쟁 영웅을 강조하는 공간이다. (...)

이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전쟁 영웅이 아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평화 영웅을 발굴하고 그 평화 영웅을 주요하게 배치하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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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6 2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중고등학생 역사 현장 답사에 참고 도서였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로 이런 현장 답사는 힘들어져서
현충원 찾는 이들도 줄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초딩때 현충원 가본게 처음이자 마지막 ^^

거리의화가 2022-11-07 09:00   좋아요 2 | URL
저도 읽으면서 그런 생각했어요. 현장답사 전 이 책을 읽고(지도 선생님께서) 가져가서 탐방할 때 이야기로 들려준다면 역사적 지식도 쌓으면서 체험학습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구요. 좋은 기획의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콧님은 가보신 적이 있군요ㅎㅎㅎ

바람돌이 2022-11-07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울을 그렇게 다녀도 현충원은 한번도 못가봤어요.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정치인들이 폼내듯 찾아가는 곳이라서 그런가?
저기 친일파들은 좀 걷어내고, 현충원을 무조건 엄숙한 장소로보다는 유럽의 무덤 지역처럼 공원화해서 좀더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싶어요. 부산의 경우 유엔묘지가 있는데 그런식으로의 접근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듯해서 보기 좋거든요.

거리의화가 2022-11-07 17:36   좋아요 2 | URL
현충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곳이어서 그동안 좀 거리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친일파들은 하루 빨리 다른 곳으로 이장했으면 좋겠고요. 말씀하신대로 동네 공원 산책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거리감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신성시(!)하는 느낌도 있고요^^;

mini74 2022-11-07 15: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예전에 현충원 한 번 가본적이 있어요. 남편이 현충원 의장대 ? 출신이라 군복무한 곳 보여준다고 ㅠㅠ 여성 길이 새로 생겼군요. 진짜 화가님 리뷰 읽고 가보면 또 다를거 같아요 ~

거리의화가 2022-11-07 17:40   좋아요 2 | URL
헉 의장대라니 남편분 멋지신데요!ㅎㅎㅎ 저 루트는 묘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그려놓은 거에요. 7개의 루트를 제목을 붙이고 저자분께서 그에 맞는 묘지 중 방문장소를 설정해놓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직접 이런 거 만들려고 하면 번거롭고 어렵잖아요. 여성 길은 저도 돋보이는 테마였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저도 방문하게 된다면 이 책 들고 가려구요~ㅎㅎㅎ

독서괭 2022-11-07 15: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 잘못 봐서 ‘현중원‘인 줄 알고 현중원이 뭐지 했네요 ㅋㅋㅋ 현충원 가본지 넘 오래됐어요. 애들 학교 들어가면 이런 책 읽어서 예습하고 데리고 가야겠네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11-07 17:4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괭님 덕분에 퇴근 전 한번 웃어제꼈습니다!ㅎㅎㅎ 현충원 가보신 적 있으시군요^^ 나중에 이 책 읽고 같이 가시면 좋은 추억되실 것 같습니다^^*

희선 2022-11-08 0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립서울현충원에 친일파도 묻혔군요 친일파도 기억하고 그렇게 되지 않기, 를 배우면 좀 낫겠습니다 무덤이라 해도 사람들이 편하게 갈 수 있다면 훨씬 좋겠네요 그곳에 가면 역사를 생각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08 09:01   좋아요 2 | URL
네. 여러 방송에서 다뤘죠. 이 곳에 친일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것도ㅠㅠ 하긴 대한민국 군과 경찰 조직의 뿌리가 친일과 무관하지 않으니 그런 것과도 연관이 깊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것이 강조되어 관련자들 외에는 국민이 이곳에 들르는 모습은 낯설죠. 여전히 이념이 강조되고 있다보니 그런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2장 감염된 문장 : 여성 작가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

문학사에 대한 블룸의 모델과 프로이트의 심리 분석의 가설이 주는 가부장적 구조

여성 작가의 이중의 속박 -> 여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하거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품이라서 더 저항하기 힘든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생각. 여성들이 이중으로 말해야 하는 조건 생산

거울 부수기 -> 감염된 문장의 수정이나 재창조

집 = 여성의 자아

밀러도 말했듯 최초이자 최고의 문학 심리사 연구가는 해럴드 블룸이었다. 블룸은 프로이트의 구조를 문학 계보학에 적용하면서 작가의 ‘영향에 대한 불안‘, 즉 자신이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고 선배들의 작품이 이미 자신을 넘어서서 존재하며 자신의 작품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할 것이라는 불안에서 문학사의 역동성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문학 부권 은유를 논의할 때 지적했듯이, 문인들의 순차적인 역사적 관계라는 블룸의 패러다임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특히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른 관계다. - P141

페미니즘 이론가 줄리엣 미첼은 프로이트에 대해 말하면서 ‘심리분석이란 가부장적 사회에 던지는 충고가 아니라 그 사회에 대한 분석‘이라고 말했다. 블룸의 문학사 모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사란 우리 문화의 주요 문예 운동에 깔려 있는 가부장적 시학(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불안)에 건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학을 분석하는 것이다. - P143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말과 사회생활을 배울 때 똑같이 아버지(블룸의 용어로 말하자면 선배)의 자리를 차지하기 원하지만, 남자아이만이 언젠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용받을 것이다. 더 나아가 두 성 모두 어머니를 욕망하도록 태어나는데,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은 아이 모습의 남근이기 때문에 남녀 아이는 모두 어머니를 위해 ‘팔루스‘가 되고자 욕망한다. 여기에서도 남자아이만 자기 자신을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으로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리하여 두 성 모두 여성성이 암시하는 것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여자아이는 ‘아버지의 법에 종속됨으로써 자신이 ‘자연‘과
‘섹슈얼리티‘, 즉 창조성의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인 혼돈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운다. 따라서 남성 예술가와 달리 여성 예술가는 먼저 사회화의 영향과 싸워야 한다. - P145

여성 예술가는 (남성) 선배의 세계를 읽는 시각이 아니라 자신을 읽는 시각과 싸운다. 자신을 작가로 정의하기 위해 여성 예술가는 자신의 사회화 조건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 P146

여성 예술가의 고독, 여성 선배와 후배에 대한 갈증과 남성 선배로부터의 소외감, 남성 독자의 반감을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 여성 독자에 대한 절박한 갈구, 문화적 조건 안의 자아를 극화시킬 때 튀어나오는 소심함, 예술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여성창조의 부적절함에 대한 불안 등등이 모든 ‘열등화‘ 현상은 여성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려는 분투의 표식이며, 자아 창조를 위한 그녀의 노력을 남성 작가와 구분해주는 현상이다. - P147

강한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라는 ‘남성적‘ 전통과 대조적으로, 작가 되기에 따른 여성의 불안은 여성을 심각하게 무력화한다. 이 불안은 한 여성에게서 다른 여성에게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엄격한 문학적 ‘아버지들‘에게서 모든 ‘열등화된‘ 여성 후손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것은 불편함, 적어도 불만, 방해, 불신 등 여러 가지 세균이다. 세균은 많은 여성문학의 구조와 문체, 특히 (이 책에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20세기 이전 여성문학 전반에 얼룩처럼 퍼져 있다. - P148

어떤 독자에게나, 특히 작가이기도 한 독자에게는 모든 텍스트가 은유적인 세균전에서 ‘판결(문장)‘이나 무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감염된 문장은 새끼를 친다‘는 말은 문학작품이 강제적이고 감금시키며 열병을 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문학은 독자의 내면을 강탈하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 대한 침해라는 디킨슨의 인식을 나타낸다.
(…)
‘우리‘는 한편으로 여성의 자율성과 권위를 부인하고자 하는 모든 가부장적 텍스트로부터 ‘절망을 들이마실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선배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로부터 (여 - P149

자 선배들은 혼란스러워하는 여성 후계자들에게 작가가 된다는 행위에 담긴 전통적인 불안을 공공연하고도 암암리에 전달하므로) ‘절망을 들이마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대대로 내려오는 은유적으로 모계적인 불안 때문에, 여성일 때는 텍스트의 창조자조차 텍스트 안에 (접힌 채, 그리고 ‘주름 잡힌 채‘) 감금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계속해서 말해주는 ‘영원한 솔기‘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것이다. - P150

프로이트가 정신과 몸의 역동적 관계를 밝힌 유명한 연구의 출발이 된 질병인 ‘히스테리‘는 원래 정의상 ‘여성의 질병‘이다. 히스테리의 명칭이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르hyster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실제로 19세기에는 자궁이 정서적 장애를 ‘야기한다고 생각했다) 히스테리라는 질환이 주로 19세기 말의 빈 여성들에게서 발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내내 다른 신경증과 마찬가지로 이 정신병도 여성의 생식기관 때문에 발병한다고 여겨졌다. 이런 발상은 여성성 자체가 결함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같다. - P152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고통받았던 ‘여성의 질병‘은 꼭 여성성 훈련이 낳은 부산물만은 아니었다. 그 질병이 바로 훈련 목표였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디어러 잉글리시가 보여주었듯, 19세기 내내 ‘상류층과 중상층 여성들은 ‘병든‘(허약한, 건강이 나쁜) 존재로 여겨졌으며, 노동자 계급 여성들은 ‘병들게 하는‘ (감염시키는, 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숙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숙녀란 약하고 병약한 존재라는 사회적 동의 - P153

가 있음’을, 그 결과 ‘여성의 병약함에 대한 숭배‘가 영국과 미국에서 발달했음을 지적한다. - P154

다시 말해 수동적인 천사들 능동적인 괴물이든 여성 작가는 문화가 제공하는, 여성을 쇠약하게 만드는 대안들 때문에 있는그대로의 의미에서든 비유적인 의미에서든 자신이 무능하다고느낀다. 여성이 처한 조건의 치명적인 효과는 여성 선배 문인들에게 이어받은 피 묻은 구두 속 죽음의 선고처럼 ‘퍼져나간다.‘ - P158

포프는 ‘변덕스러운‘ 우울의 ‘여왕‘이 ‘15세부터 50세까지의 여성‘
을 지배하기에 (여성 섹슈얼리티의 ‘전성기‘에 걸쳐 여자를 지배하며) 히스테리와 (여성) 시의 ‘부모‘가 된다고 말했다. 이 말에 핀치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대는 오만한 아내로서 허풍 떨며 예술을 말한다‘라고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포프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굴복하지 않은 여자는 그저 신경증적인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군주다운 남자는 제국을 통치하도록 태어난다‘고도 핀치는 말한다. 그러나 시에서 남자는 우울증을 앓는 여자에게 패배한다. 그는 ‘평화를 위해 타협한다. […] 여자는, 우울로 무장한 채, 노예처럼 복종한다.‘ 그러나 동시에 핀치는 자기 내부에서, 특히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신안에서, 우울의 가장 유해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 P163

여성 혐오는 브래드스트리트의 ‘삶에 대한 옹호’를 특징 짓는 요소였다.
(…)
캐번디시가 드러내는 젠더에 대한 태도와 자기 직업에 대한 의식이 보여준 모순은 그녀를 어떤 의미에서 ‘미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 P166

애프라 벤(사실상 영국 최초의 ‘전문‘ 여성 작가)처럼 아주 뻔뻔하고 사죄할 줄 모르는 반항아는 항상 의심할 바 없이 문란하고 방종하며 ‘음란한‘) ‘수상한 여자‘로 간주되었다. ‘판단력과 신성한 시를 금지당한 이 가련한 여자는 무엇을 했는가?‘ 벤은 솔직하게 질문했고, 또 솔직히 말하자면 왕정복고 시대 방탕자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마치 현실판 두에사처럼, 그녀는 진지한 문학의 정전에서뿐만 아니라 점잖은 사람들의응접실이나 도서관에서도 점차 가차 없이 추방(나아가 삭제)당했다. - P167

이 모든 선택, 즉 확실히 주류적인 것이 아니라 외관상 소품 같은것, 극적인 것이 아니라 가정적인 것,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 영광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은 것을 선택한 데는 의식적이거나 반의식적인 아이러니가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 P168

사실적이든 비유적이든 남성으로 분장하고 나자 이들은 처음에 남성을 모방한 이유였던 변덕이나 괴물 됨에 대한 공포와 동일한 공포가 되살아나는 동시에, ‘여성적인 저항‘을 해야 한다는 신경증적 강박 역시 생겨났을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 문인이 기억하는바, 그것은 결국 야망을 위해 자신의 ‘성을 제거‘해달라고 신에게 간청했던(셰익스피어의 여자 주인공 중 가장 고약한 인물인) 레이디 맥베스의 강박과 같다. - P171

고귀한 자는 결국 맥베스이고 레이디 맥베스는 괴물이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는 영웅이지만, 메데이아는 마녀일 뿐이다. 리어의 광기는 거룩하고 보편적이지만, 오필리아의 광기는 그저 측은할 따름이다. 비극의 구조가 가부장제의 구조를 반영하는 한(다시 말해 비극이 ‘고귀한‘ 인물의 ‘몰락‘ 이야기여야 하는 한) 비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 이야기를 단순히 사용한다기보다는 필요로 하는 것이다. - P175

여성 작가는 ‘작가의 정신분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질병에 특히 취약하다. 왜냐하면 여성 작가는 가부장적인 플롯이나 장르를 사용함으로써(그리고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이중성이나 불신에 불가피하게 연루된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암암리에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P176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양피지에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쓴 것 같은 문학작품을 생산했다. 이런 작품들의 외관은 표면의 무늬가 훨씬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더 어려운) 층위의 의미를 감추거나 흐려놓았다. 작가들은 이렇게 가부장적인 문학의 표준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여성문학의 권위에 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 - P183

흥미롭게도 최근 몇몇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남성 (기원의) 문화와 여성 (식민화된) 문학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프란츠 파농의 식민주의 모델을 활용했다. 그러나 영미의 여성 작가들은 그들이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식민화된 다른 지역의 여성작가들보다 애매하게 이중으로 말하기에 훨씬더 능란해야 했다. - P183

18세기와 19세기 여성 작가들은 남자에 의해,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구조에 갇힌 채 지배적인 미학에 반항하기보다는 순응할 수 없다는 데 죄의식을 느꼈다. 생명력 있는 여성 문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여성 작가들은 다른 (말하자면 남성) 작가들이 결코 느끼거나 표현하지 않았던 진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퍽 고통을 겪었다. 그들 자신의 권위를 의심할수 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디킨슨의 말마따나 ‘조롱거리가 되지않는‘ 것을 묘사하려 했던 여성 작가들은 사회를 향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적 회피나 은폐는 대부분 남성 작가들보다 훨씬 더 정교하다. 19세기 문학 문화의 가부장적 편견을 감안한다면, 여성 문인은 감추어야 할 중요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85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여성 작가는 우선 자신을 감염시켰던 문장(판결)을 쫓아내야 한다. 그녀는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주름진 창조자‘에게서 들이마신 절망을 벗어내어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여성작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조자의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이다. 다른 은유로 표현해보자면, ‘유리 표면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여성 문인은 모든 여성이 지켜야 했던 사회적 규범을 그토록 오랫동안 반영해온 거울을 박살내야 한다. - P187

미친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 자신의 불안과 분노의 이미지다. - P189

남성의 관점에서 가정생활의 순종적 침묵을 거부한 여성들은 무시무시한 대상(고르곤, 세이렌, 스킬라, 라미아, 죽음의 어머니, 밤의 여신)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괴물 여성은 자신을 표현할 힘을 구하는 여자일 뿐이다. - P191

의무에 얽매여 생활 속에 갇힌 채,
정신은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죄를 짓지 않고는 빠져나올 방도가 없네.
피해볼 도리도 없이 단지 살고, 일할 뿐.
청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부과된 의무,
자연의 법칙이라는 강력한 힘으로 옥죄고 있나니,
적대적인 생각의 압박,
마음속을 후비네, 매 시간,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인식이 그토록 어둡고 낮은 천장의 집,
무거운 서까래가 햇빛을 차단하고,
힘들이지 않고는 일어설 수도 없구나.
내면의 영혼이
무덤을 애원할 때까지… 더 넓은 무덤을. - P199

글자 그대로 집 안에 갇힌 채, 비유적으로는 한 ‘장소‘에 갇힌채, 응접실에 갇히고 텍스트에 넣어지고 부엌에 가두어지고 시 구절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에 여성 예술가들은 자연스럽게 어두운 내면을 묘사했으며, 집 안에 묶여 있다는 인식과 얽매인 의무에 대한 반항을 혼동했다. - P200

작품 속에서 감금과 탈출의 드라마를 강박적으로 재연한 여성들의 문장에서 감염은 지속적으로 퍼져나간다. 특히 여성의 질병으로 알려진 거식증과 광장공포증은 극의 패턴, 주제의 패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P201

물론 19세기의 많은 남성 작가들도 감금과 탈출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들이 진지하게 느꼈던 바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낸 감금 이미지 차이는 항상 그러했지만) 한편으로는 형이상학과 은유의 차이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사회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의 차이다. - P202

여성의 자궁은 확실히 늘 어디에서든 아이 최초의 집, 가장 만족스러운 집이자 음식의 원천, 어두운 보호소였다. 따라서 자궁은 신성한 동굴, 비밀스러운 성소, 성스러운 오두막 등으로 반복해서 형상화되는 신화적 낙원이었다. 그러나 여성 작가에게 집과 자아를 낡은 방식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여성 작가가 자신의 예술에 투사했던 갇힘에 대한 불안을 강화시켰던 듯하다.
(…)
여성 예술가는 자신의 자궁을 일종의 무덤으로 경험하지 않거나 아이가 그녀의 집/몸을 점유하는 것을 자신의 비인격화 경험으로 인식하지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자신이 순전히 인간 종의 생물학적 유용성에 의해서만 규정받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만다는 것이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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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 2022년 뉴베리상 100주년 대상 수상작 오늘의 클래식
도나 바르바 이게라 지음, 김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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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없는 세상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 P82

기억을 강제로 지우고 다른 기억을 채운다면? 과거를 잊고 살아가야 한다면? 나의 과거가 모두 끊어진다면?

기억은 총체적인 집합체이다.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내가 경험한 것일수도 있지만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나 지식도 기억을 구성하는 물질이 된다.

"나도 할머니처럼 되고 싶어요. 이야기 전달자요."
"이야기 전달자, 그래. 그건 네 핏속에 흐르지. 하지만 그냥 나처럼 되고 싶다고? 아니, 아가. 넌 네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해. 그리고 알아낼 거야."
"넌 이야기를 망칠 수 없어.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으니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거쳐 너를 찾아냈어. 이제 그걸 네 이야기로 만들렴."
나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엄마를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알까? 그 사람들을 뒤따르는 나는 누구일까? - P12

할머니를 제외하고 페트라 페냐의 가족은 우주선을 타고 태양계 밖의 세이건이라는 행성에 가게 되었다. 페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으라는 리타 할머니의 당부를 안고 두렵지만 발걸음을 내딛는다. 2061년 7월 28일 그렇게 그들은 지구를 떠났다. 우주선에는 모니터 요원들이 배치되고 실험 대상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끊임없는 감시가 이어진다.콜렉티브는 엔 코그니토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려 한다. 콜렉티브가 이야기한 것은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지울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벤을 비롯하여 우주선에 탄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콜렉티브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저항했다. 규칙과 단합, 동지애를 강요하며 사람들은 계속 희생당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최소한의 기억을 잡으려고 분투한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제 단 하나의 유닛입니다. 과거의 악은 없습니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새 역사를 창조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콜렉티브와 새로운 행성은 우리의 시초가 될 것입니다. 콜렉티브는 우리의 새로운 집을 훨씬 나은 곳으로 바꿀 것입니다." - P151

사람마다 다 다르다. 때로는 엉망진창이다. 그래도 다채롭고, 획일적이지 않으며, 아름답다. - P348

새로운 행성을 찾는다는 허울 같은 명분으로 사람들의 다양성은 철저히 무시된다. 그곳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내뱉지 못하는 우주선 안의 세계다. 페냐는 우주선 안에서도 그들에게 조용히 반항하며 할머니가 어릴 적부터 들려준 이야기(쿠엔토)를 친구들과 나눈다. 친구들은 이제 어느덧 페냐가 쿠엔토를 들려줄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이야기의 힘은 그런 것이다.

이야기가 전승되는 한 자신과 가족, 그 조상의 이야기는 먼 미래까지 이어질 것이다. 기록과 이야기는 자신의 책을 가지는 것과 같다.

책을 읽다가 감정이 점점 고조되었다. 자연스레 지구의 운명을 생각해보게 된다. 결말이 궁금해서 중간부분부터는 끝까지 한 번에 읽어내려갔다. 외로운데 외롭지 않은 느낌, 묘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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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5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뉴베리상 100주념 기념 수상작이라고 해서 킨들로 냉큼 구매 해 놓고 아직까지 터치 하지도 않았는데
화가님 리뷰 읽으니 마지막 문단에 여운이 !ㅎㅎ

거리의화가 2022-11-06 09:16   좋아요 2 | URL
원서는 킨들로 주문하려고 했는데 가격 확인해보니 쿠폰 쓰면 알라딘이 더 저렴하더라구요. 환율이 워낙 올라서 킨들 이북도 할인할 때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ㅠㅠ 암튼 은근히 여운이 가는 책이었어요.

희선 2022-11-06 02: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난날에 붙잡히는 건 안 좋겠지만, 지난날도 알아야 지금을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사와 다르지 않네요 한사람 한사람의 이야기는 중요하죠 지금 세상도 똑같기를 바라기도 하는군요 다른 것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06 09:17   좋아요 2 | URL
희선님 말씀처럼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겠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각자의 이야기가 모이면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되고 그런 것이겠죠.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킨다는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느끼게 했어요^^

호우 2022-11-06 09: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세상은 무섭죠. 세상은 혼돈 그 자체이지만 그래서 살만한 거겠지요.

거리의화가 2022-11-06 20:31   좋아요 3 | URL
대한민국 사회가 특히 갈등을 두려워하는 게 큰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모나고 튀는 것을 유별나다고 많이 이야기를 듣기도 하니까요. 이런 문화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우님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2-11-07 15: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SF군요?? 이야기의 힘이라.. 궁금합니다.
뉴베리상은 아동문학인데, 보니까 얇아보이진 않던데요. 그래도 아동문학이라 비교적 쉬운 편일까요?

거리의화가 2022-11-07 17:42   좋아요 1 | URL
네. 아동문학 치고 얇지는 않은데 스토리의 힘이라고 금방 읽혀요!ㅎㅎ 근데 단어는 좀 원서를 읽어보니 약간 용어들이 초등학교 수준은 아니고 5~6학년 이상 수준 정도인 것 같아요. 아니면 중학교?ㅎㅎ 암튼 그래도 문장 구조가 어렵지는 않아요.

mini74 2022-11-07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누베리상 책들은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거 같아요. 이야기의 힘은 정말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전달자 책도 생각나네요 ~

거리의화가 2022-11-07 17:43   좋아요 2 | URL
맞아요. 어른들 가끔 찌들 때 이런 책 한번씩 읽어주면 좋은 것 같습니다^^
기억전달자 책과 비슷한 거 맞아요. 역시 미니님!ㅎㅎㅎ
 
콜롬비아 엑셀소 디카페인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입안에 들어가면 산뜻함이 먼저 느껴지고 잠시 머물 때 전체적으로는 달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산미가 있다. 늦은 오후나 저녁에 마시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적절함이다. 역시 드립백보다 원두라서 내릴 때의 향긋함이 좋았고 부드러운 뒷맛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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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2-11-05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번에 이거 샀어요.^^

거리의화가 2022-11-05 20:15   좋아요 0 | URL
오! 난티나무님 평 궁금합니다^^ 향긋한 커피타임~!!!

scott 2022-11-05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원두로 구매해야 맛의 깊이를 느낄 수 있죠

전 한 번에 구매 할때 2킬로 그램씩 구매를 해놔서
알라딘 커피는 주로 드립백으로만 구입 하게 되네요 ^^

거리의화가 2022-11-06 09:13   좋아요 1 | URL
헉. 2킬로ㅋㅋㅋ 저도 커피를 많이 마셔서 원두를 쟁여놓는 편이긴 합니다. 알라딘 커피 쿠폰 써야 해서 매달 주문하는데 역시 드립백은 향이 좀 덜하고 그래서 원두가 낫더라구요. 물론 드립백은 편하지만ㅎㅎㅎ
 

[보급판 서문]

[초판 서문]
샌드라 길버트 - 밀턴에 대한 글, 교수와 제인 에어에 대한 에세이, 에밀리 디킨슨
수전 구바 - 제인 오스틴, 셜리와 빌레트에 대한 에세이, 조지 엘리엇


1부 페미니즘 시학을 향하여

[1장 여왕의 거울]
에드워드 사이드의 작가라는 단어에 담긴 창조자, 증식의 의미
남성이 생명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들
조너선 스위프트의 작품(특히 시)에 잠재되어 있는 여성혐오
백설공주에 담긴 두 얼굴의 세계와 은유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말처럼 고전이 말해야 할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말하는 책이라면,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 사실상 모든 해설적 글쓰기의 고전이다. - P11

누구도 위대한 남성 작가들과 비교해 자신들을 ‘이류’로 경험한 19세기 여성 작가들을 그렇게 박학다식하고 광범위하게 연결시킨 적이 없었다. 글 쓰는 여성의 삶에 따라다닌 일상적 방해와 글 쓰는 일에 대한 출판업자 및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즉각적 저지를 집중적으로 다룬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내내 그런 비방이 여성들의 자기 평가를 형성했다. - P12

여성으로 젠더화된다는 말은 (특히 종교가 여전히 보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19세기의 여성 작가 모두가 타락과 인간의 모든 악은 이브 탓이라는 전통 속에서 작업했음을 의미한다. 길버트와 구바가 수두룩한 19세기 소설에 영향을 끼친 작품임을 보여준 밀턴의 『실낙원』에서, 이브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제멋대로 구는 일탈 본성(여자도 남자도 억누를 수 없고 물리치고 싶은 본성)을 지닌 전형적 인물이다. 이런 여성성의 양극화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이상화된 여성이란 성모 마리아, 19세기 집 안의 천사, 도덕성의 보유자, 법정에 선 순수하고 탈성애화된 무고한 사람 등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주춧돌을 무너뜨리면 괴물, 살인자, 물고기 꼬리를 지닌 인간으로 추락한다. 그런 문화 속 양극성이 개인에게 지울 수 있는 긴장은 지대하다. - P14

길버트와 구바는 여성 시인을 두고 ‘평범성과 교훈성‘ 둘 다를 못마땅해하고 ‘생각이 모자라 피상적이고 심오한 주제를 멜로드라마적으로 수행한다‘고 공격하는 ‘남성 우월주의자‘ 비평가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런 통찰을 더 깊게 밀고 나아갔다. - P16

길버트와 구바는 몸, 광기, 그리고 이들과 정신의 관계가 여성의 (따라서 불가피하게 남성의) 글을 읽어나갈 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학 영역의 토대를 구축했다. - P18

실제로 극단적으로 다른 장르에 속하는 여성문학을 연구할 때도 여성문학의 고유한 전통이라 할 법한 것을 발견했는데, 이미 많은 여성 독자들과 작가들이 그 전통을 연구하고 그 가치를 인정했지만 아직 누구도 그 전체상을 규명하진 못했다. 감금과 탈출 이미지, 미친 분신이 온순한 자아의 반사회적 대리인으로 기능했던 환상, 얼어붙은 풍경과 불길에 싸인 실내에 나타난 육체적 불편함에 대한 은유-이런 유형들은 대물림되며 거식증, 광장공포증, 폐소공포증 같은 질병의 강박적묘사와 함께 거듭 나타났다. - P19

19세기 여성문학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가 내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이고, 또 하나는 그들 자신의 독서 행위다. 우리가 연구한 예술가들은 삶과 예술 둘 다 실제로도 비유적으로도 감금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남성 지배 사회구조에 갇힌 여성 문인들은 거트루드 스타인이 ‘가부장적 시학‘이라고 말할 수밖에없던 문학 구조물에도 분명히 갇혀 있었다. 19세기 여성 작가는 남자들이 짓고 소유한 조상의 저택(또는 오두막)에 거주해야 했을 뿐 아니라, 남성 작가들이 고안해낸 소설의 집과 예술의 궁전에도 갇혀 제한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아·예술·사회를 전략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사회적 문학적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한 여성의 공통적인 투쟁 욕구를 들어 보이며, 여성문학에서 발견한 놀라운 일관성을 설명하기로 했다. - P20

나에게 ‘권위authority‘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의미들의 집합체다. (…) 이 단어에는 또한 저자authour, 즉 무엇을 생겨나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사람, 낳는 사람, 개시자, 아버지 또는 조상, 문서화된 성명서를 발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여기에 또 다른 의미 덩어리도 달라붙는데, 저자는 동사 ‘증식하다‘의 과거분사 ‘아욱투스auctus‘와 관련되어 있다. 에릭파트리지에 따르면 ‘아욱토르auctor‘는 글자 그대로 증식시키는사람, 즉 창립자다. ‘아욱토리타스Auctoritas‘에는 소유권이라는 의미 외에 생산, 발명, 원인이라는 뜻이 있다. 결국 그것은 연속 또는 계속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이런 의미는 모두 다음과 같은 개념에 기초한다.
① 한 개인이 창시하고 제정하고 확립하는 힘, 즉 시작의 힘.
② 이 힘과 이것에서 나온 산물은 이전보다 증식된다.
③ 이 힘을 휘두르는 사람은 힘의 결과와 파생을 통제한다.
④ 권위가이 과정이 지속되도록 지켜준다. - P75

『율리시스』에서 스티븐 디덜러스가 말했듯, 부권 개념 자체는 ‘합법적 허구’, ‘ 믿음까지는 아니어도 상상력을 요구한다. 남자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감각이나 이성으로 확인할 수없다. 자기 아이가 자신의 자녀라는 것은 그 아이의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되뇌는 말일 뿐이다. 그런 이야기속에 내재한 불안은 (가부장적 남존여비를 암시하는) 남성의 우월함에 대한 재확인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사이드가 묘사한 계보적 형상화가 구현한 허구처럼 말씀으로 보상하는 허구를 필요로 한다. - P76

‘문인‘은 저자이기에, 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이자 주인 또는 지배자이며 소유자다. 서구 사회가 그 용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르자면 그는 정신적 유형의 가부장이다. - P79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는 (사회학적으로도 생리학적으로도 불가능하기에) 여성이 문학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남성의 섹슈얼리티가 문학 권력과 끈끈하게 연관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19세기 사상가 오토 바이닝어의 표현에 의하면) ‘여성은‘ 문학 권력이 없기에 ‘존재론적 실재를 [남성과]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이어진다.
부권/창조성 은유가 나타내는 암시는 또 있다. 여성은 문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관능의 대상으로서 남성의 행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바이닝어와 사우디의 편지에 공히 드러나는) 생각이다. - P81

리처드 체이스가 ‘남성적 열정‘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거부하고 ‘여성성‘이 주는 비굴한 위안을 암암리에 거부하는 여성 문인 역시 이중적으로 ‘영‘이다. 왜냐하면 여성 문인은 (저메인 그리어가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 전체에게 적용했던 놀라운 비유를 사용하자면) 사실상 ‘거세된 남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앤서니 버지스는 제인 오스틴의 글이 ‘강력한 남성적 공격성‘이 부족해 실패했다고 말했으며, 윌리엄 가스 또한 여성 작가에게는 ‘그 모든 위대한 문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피가 끓어오르는듯한 생식적 충동이 부족하다‘고 한탄했다. - P82

역사상 소설을 소설로 반박할 수 있는 도구인 펜/페니스가 없었던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재산으로, 또 남성 텍스트에 갇힌 인물과 이미지로 환원되어왔다. 앤 엘리엇과 앤 핀치가말하듯, 여성은 그저 남성들의 요구와 생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성을 남성이 만들어낸 최고의 창조물로 당연시하는 생각도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와 마찬가지로 그 역사가 유구하고 복잡하다. 가부장적 신화는 이브를 비롯해 미네르바, 소피아, 갈라 - P87

테아 등의 여성이 남성에 의해, 남성으로부터, 남성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정의한다. 여성은 남성의 두뇌, 갈비뼈, 재능에서 나온 아이인 것이다. - P88

시, 창조 행위, 생명의 행위, 원형적 성행위.
섹슈얼리티는 시다. 여성은 우리의 창조물 내지 피그말리온의 조각품이다. 여성은 시다. [페트라르카의] 라우라는 실제로 시다.

은유와 원인론이 뒤섞인 이런 고정관념은 그야말로 서구 사회의 지독한 가부장적 구조를, 그리고 가혹한 가부장제가 딛고 서 있는 여성 혐오를 반영한 것이다. - P88

리가 말해주는 것은,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면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이 여성을 만들어냈다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P89

작가는 생명을 불어넣을 때조차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감금시키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독립적으로 말할 자율성을 박탈해 침묵시킨다. - P90

남성 작가들 자신이 ‘괴물 같은‘ 자율성을 지닌 여성 인물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작가/소유자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꾸짖는 것은 문학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 보면 ‘변덕‘은 고무적인 성격이자 덕성이다. (이중성을 수반하긴 해도) 변덕은 여성이 그 자신을 인격으로 창조할 능력, 더 나아가 거울/텍스트 반대쪽에 갇혀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까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P94

그러나 여성 작가는 문학적 자율성을 향해 거울을 통과하는 여정을 떠나기 전에 먼저 거울 표면에 있는 이미지와 타협해야한다. 그 이미지는 남성 예술가들이 여성의 ‘변덕‘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창조해낸 여성을 ‘영원한 여성의 전형‘과 동일시함으로써 더욱 철저하게 소유하기 위해 여성의 인간적인 얼굴에 단단히 씌워놓은 신화적 가면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여성 작가는 남성 작가가 만들어놓은 ‘천사’와 ‘괴물’이라는 양극단의 이미지를 특별히 더 읽어내고 적응하고 초월해야 한다. - P94

모든 작가에게 자아 정의는 자기주장보다 반드시 선행한다.
창조적인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면 언어화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에게 자아 정의의 본질적 과정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모든 가부장적 정의 때문에 복잡해진다. - P95

성모마리아에서 집 안의 천사로 이어지는 문학적 계승은 뚜렷하게 이어지는데, (몇명만 들어보면) 단테, 밀턴, 괴테를 꼽을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대부분의 신플라톤주의자처럼, 단테는 성모마리아의 순결한 수행원인 베아트리체를 알게 됨으로써 신과 그의 시녀 성모 마리아를 알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밀턴도 (나중에 검토하겠지만) 명백하게 여성 혐오를 드러내는 가운데서도 ‘천사가 된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보았다고 말한다. - P100

"아이히너는 괴테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가장 숭고한 여성성‘의 전형적이며 극단적인 예로 괴테의 후기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절』 등장인물 마카리에를 든다. 마카리에 묘사는 ‘집 안의 천사‘의 철학적 배경을 잘요약해 보여준다.

그녀는 […] 아주 순수한 명상적 삶을 영위해나간다. […] 시골 영지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이야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외적인 사건이 없는 삶을. 그녀의 존재가 쓸모없는 것은아니다. 그 반대다. [・・・] 그녀는 어두운 세계에서 횃불처럼 빛난다.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다른 여행자들이 방향을 잡을수 있게 움직이지 않는 등대처럼 빛난다. 감정과 행위로 뒤얽혀있는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녀는 충고와 위로를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타심과 순수한 마음의 본보기이자 이상형이다.

마카리에에게는 자기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와 위로’를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미소 짓고 공감해준다. 이런 특징은 마카리에가 서구 문화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여자들의 후손일 뿐 아니라, 코번트리 패트모어가 쓴 집 안의천사(이 명칭의 시조가 된, 19세기 중반의 가장 인기 있는 시집의 여자 주인공)의 직계 조상임을 보여준다. - P102

사회 역사학자들은 겸양, 우아, 순수, 섬세, 온순, 순종, 과묵, 순결, 상냥, 공손이라는 ‘영원히 여성적인‘ 미덕이 (이 모든 것이 오노리어의 천사 같은 순진함을 구성하고 있는 규범적 행실의 양상들이다) 어떻게 생겨났는지 충분히 탐구했다. 예의범절 책의 저자들은 여성에게 ‘우리의 모든행위에는 (심지어 우아하게 자는 법에 이르기까지) 법칙이 있다‘고 확신시켰고, 우아함이 남편 앞에서 지켜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여성의 존재 이유가 남자를 이롭게 하고 위로해주는것이라면 여성은 남자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 P105

예술품이 되든 성녀가 되든, 아름다운 천사-여자의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자신의 안락, 개인적 욕망, 혹은 둘 다를) 포기한다는 것이며, 그녀를 죽음과 천상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 - P107

로 이런 희생 행위다. 자아를 버리는 것은 고귀해지는 길일 뿐아니라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는 삶은 괴테의 마카리에의 삶처럼 사실상 죽은 삶이고 산 죽음이다. ‘명상적인 순수함‘의 이상은 결국 천상과 무덤 둘 다를 환기시킨다. - P108

전통적으로 남성 작가들은 비둘기의 단순함을 찬양하고, 뱀의 교활함은 늘 (적어도 교활함이 그녀 자신을 위해 쓰일 때는) 혹평한다. 마찬가지로 자기주장을 하고 공격성을 내보이는(’의미 있는 행동‘으로 가득 찬 남성적 삶의 모든 특성을 가진) 여성은 ‘괴물’로 묘사한다. 그런 특성은 ‘비여성적인’ 만큼 ‘명상적이며 순수한’ 부드러운 삶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 P112

테르툴리아누스나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기독교 교부의 여성 혐오 이후 르네상스와 왕정복고 시대의 문학(시드니의 세크로피아, 셰익스피어의 레이디 맥베스와 고릴과 리건, 밀턴의 [사탄의 딸] ‘죄‘와 나중에 논할 밀턴의 이브)에서 계승된 여성 괴물은 18세기 풍자가들의 작품을 채웠다. 여성들이 이제 막 ‘펜을 든’ 시기, 일군의 남성 작가들이 드러낸 여성 적대적 관점은 여성 독자들에게 특히 두려움을 안겼을 것이다.

여성의 입에서 어휘는 의미를 잃고 문장은 용해되어버리며 문학적 메시지는 왜곡되거나 파괴된다. 동시에 좀 더 교묘하게, 바로그 이유 때문에 더욱 더 의미심장한데, 남성 작가들은 여자 천사‘가 사실 여자 ‘악마‘였으며 귀감이 된 귀부인은 사실 숙녀답지 않은 괴물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교한 반反로맨스를 기어냈다. - P116

몇몇 비평가들은 스위프트가 만들어낸 여성들이 암시하는 여성 혐오가 단지 아이러니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 놓인 가장 분노에 찬 시들에서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공포, 육체를 구원하거나 변형시킬 수 없는 여성의 예술적 무능(무력함)에 대한 혐오가 드러난다. 따라서 스위프트에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시종일관 타락, 질병, 죽음과 동일하고 여성의 예술은 불가피한 종말을 앞당기려는 하찮은 시도일 뿐이다. - P117

여신은 고양이처럼 발톱이 있다. 그녀의 머리, 귀, 목소리는 당나귀를 닮았다. 이는 진작 빠져버렸고, 눈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듯 안쪽을 향해 있었다. 여신이 먹는 음식은 줄줄 흘러나온 자신의 쓸개즙이었다. 비장은 어찌나 큰지 훌륭하게 모양 잡힌 젖꼭지처럼 돌출되어 있어서 젖꼭지 모양 혹이라 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는데, 흉측스러운 괴물 무리가 모여서 그 사마귀 같은 것을 탐욕스럽게 빨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점은, 빠는 행동이 비장의 크기를 축소하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키운다는것이었다.

‘스펜서의 ‘에러‘나 밀턴의 ‘죄‘처럼 여신 비판은 새끼 치고 먹고 토하고 먹이고 다시 먹어 치우는 영원한 생물학적 순환과 관련되어 있다. 세 시인 모두 이런 순환이 초월적 지적 삶에 파괴적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각각의 괴물 같은 어머니가 만들어낸 창조물은 전부 그녀의 배설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배설물은 전부 그녀의 음식이자 무기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새끼와함께 자폐적인(서로를 잡아먹는 유아론적인)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다. 육체로 구현된 세계의 창조성은 파괴적이다. - P120

타자인 여자는 삶(파괴되도록 만들어진 삶의 우발성을 나타낸다. ‘남자가 여성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육체적 우발성에 대한 남성 자신의 공포‘라고 보부아르는 말한다. - P121

모든 괴물 여자와 연관되어 있는 성적 혐오는 왜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여성 신체에 대해 혐오감을(또는 적어도 불안감을 끊임없이 표현해왔는지 설명한다. (…)
더 의미심장한 것은 여성의 변덕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남몰래 품고 있던 여성에게는 위압적인 훈계의 이미지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이 이미지는 영원한 여성성 개념에 내재한 침묵하라는 경고를 강화시키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 P122

여성의 순종하는 삶, ‘명상적인 순수한‘ 삶은 침묵의 삶이요, 이야기도 없고 펜도 갖지 못한 삶인 반면, 반항하는 여성의 삶, ‘의미 있는 ‘행위‘의 삶은 침묵을 강요받고 괴물 같은 펜으로 끔찍한 이야기를 말하는 삶이다. 어느 쪽이든 여성 예술가가 자신을 찾기 위해 들여다보는 거울 위의 이미지는 여성 예술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여성 예술가는 누명을 쓰고 함정에 빠진, 고발되고 기소된 ‘영‘이라고, 또는 ‘영’이 되어야 한다고. - P124

디즈니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로 제목을 단 이 이야기는 사실상 ‘백설공주와 사악한계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핵심 행위(사실상 유일한 실제 행위)는 두 여성의 관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
이 두 여자의 갈등은 주로 투명하고 폐쇄된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 두 여성은 가부장제가 그들 스스로를 죽여서 예술로 만드는 데 사용하라고 권하는 도구(마법의 거울, 마법에 걸린 유리 관, 마법을 거는 유리관 등)를 무기로 휘두르며 솜씨를 부려 문자 그대로 서로를 죽이려 한다. - P125

여왕의 남편이자 백설 공주의 아버지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베텔하임에 의하면 이 두 여자는 왕의 주목을 받기 위해 여성 버전의 오이디푸스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사실은 이 이야기가 거울에 비친 어머니와 딸, 여자와여자, 자아와 자아 사이의 갈등에 숨 막힐 정도로 강렬하게 집 - P126

중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 거울의 목소리는 분명 왕의 목소리다. 그것은 여왕의(그리고 모든 여자의 자아 평가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가부장적인 목소리다. - P127

거울의 목소리가 여자들을 반목하게 만들기 때문에 여자들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서, 백설 공주에 대한 증오심을 야기한 것은 자아도취 의식을 행하는 여왕의 강한 절망인 것 같다(또는 증오심인 것 같다).
(…)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우리는 여왕이 전략가, 술책가, 음모자, 마녀, 예술가, 분장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왕은 전통적으로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듯 거의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위트 있고 교활하며 자아도취적이다. 반면 절대적인 순결성, 얼어붙은 순수성, 사랑스러운 무라는 측면에서 백설 공주는 우리가 이미 논했던 ‘명상적인 순수성’의 이상(문자 그대로 여왕을 죽일 수 있는 이상)을 정확하게 표상한다. - P128

여왕은 자신을 내세우고 과장할 양으로 세이렌의 빗과 이브의 사과 같은 여성적 계략을 전복적으로 사용해 천사 같은 백설 공주를 죽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술수는 딸을 통해 자신이 실현하려던 바와는 정반대 효과를 낸다. 한마디로 백설 공주가 수동적인 처녀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공주를 영원히 아름답고 생명력 없는 예술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바로 가부장적 미학이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 P130

사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백설 공주가 드러내는 유일한 이기심은 변장한 살인자가 주는 코르셋의 끈과 빛과 사과에 대한 ‘자아도취적‘ 욕망이다. 베텔하임이 말했듯이, 이는 ‘계모의 유혹과 백설공주의 내적 욕망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암시한다. - P131

여왕의 계략으로 죽어서 예술품이 된 백설공주는 이전보다 더 ‘계모‘의 자율성에 위험한 존재가 된다. 백설공주는 몸과 마음 두 측면에서 모두 ‘계모‘의 자율성과 더욱 더 대립하기 때문이다. 죽어서 자아 없이 유리관 속에 누워 있는 백설 공주는 전시된 욕망의 대상물, 가부장제의 대리석 ‘작품‘, 모든 통치자가 자신의 거실을 꾸밀 때 쓰는 단아한 장식용 갈라테이아인 것이다. - P132

「노간주나무는 남자아이가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확신과 자기표현을 향한 성장이며 언어의 힘을 발전시키는 일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남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마법 거울에 의해 규정되거나 만들어진 침묵의 이미지로서, 혹은 비탄에 잠긴 침묵의 춤, 즉 말하기보다는 몸으로 공연하는 무용가로서) 침묵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 P134

18세기 말까지 여성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책 전반에서 우리가 보게 될 가장 중요한 현상인데) 가부장적인 이미지와 인습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허구의 세계를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앤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텍스트라는 유리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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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5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다 보면
이 책의 저자 두분 교수님에게 수업 듣고 싶어집니다 !
함께 문학 작품 읽고 토론 하면서 ^^

거리의화가 2022-11-06 09:1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스콧님은 진작 이 책 독파하셨지요^^ 읽다보니 문학 토론 수업듣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