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말처럼 고전이 말해야 할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말하는 책이라면,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 사실상 모든 해설적 글쓰기의 고전이다. - P11
누구도 위대한 남성 작가들과 비교해 자신들을 ‘이류’로 경험한 19세기 여성 작가들을 그렇게 박학다식하고 광범위하게 연결시킨 적이 없었다. 글 쓰는 여성의 삶에 따라다닌 일상적 방해와 글 쓰는 일에 대한 출판업자 및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즉각적 저지를 집중적으로 다룬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내내 그런 비방이 여성들의 자기 평가를 형성했다. - P12
여성으로 젠더화된다는 말은 (특히 종교가 여전히 보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19세기의 여성 작가 모두가 타락과 인간의 모든 악은 이브 탓이라는 전통 속에서 작업했음을 의미한다. 길버트와 구바가 수두룩한 19세기 소설에 영향을 끼친 작품임을 보여준 밀턴의 『실낙원』에서, 이브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제멋대로 구는 일탈 본성(여자도 남자도 억누를 수 없고 물리치고 싶은 본성)을 지닌 전형적 인물이다. 이런 여성성의 양극화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이상화된 여성이란 성모 마리아, 19세기 집 안의 천사, 도덕성의 보유자, 법정에 선 순수하고 탈성애화된 무고한 사람 등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주춧돌을 무너뜨리면 괴물, 살인자, 물고기 꼬리를 지닌 인간으로 추락한다. 그런 문화 속 양극성이 개인에게 지울 수 있는 긴장은 지대하다. - P14
길버트와 구바는 여성 시인을 두고 ‘평범성과 교훈성‘ 둘 다를 못마땅해하고 ‘생각이 모자라 피상적이고 심오한 주제를 멜로드라마적으로 수행한다‘고 공격하는 ‘남성 우월주의자‘ 비평가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런 통찰을 더 깊게 밀고 나아갔다. - P16
길버트와 구바는 몸, 광기, 그리고 이들과 정신의 관계가 여성의 (따라서 불가피하게 남성의) 글을 읽어나갈 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학 영역의 토대를 구축했다. - P18
실제로 극단적으로 다른 장르에 속하는 여성문학을 연구할 때도 여성문학의 고유한 전통이라 할 법한 것을 발견했는데, 이미 많은 여성 독자들과 작가들이 그 전통을 연구하고 그 가치를 인정했지만 아직 누구도 그 전체상을 규명하진 못했다. 감금과 탈출 이미지, 미친 분신이 온순한 자아의 반사회적 대리인으로 기능했던 환상, 얼어붙은 풍경과 불길에 싸인 실내에 나타난 육체적 불편함에 대한 은유-이런 유형들은 대물림되며 거식증, 광장공포증, 폐소공포증 같은 질병의 강박적묘사와 함께 거듭 나타났다. - P19
19세기 여성문학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가 내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이고, 또 하나는 그들 자신의 독서 행위다. 우리가 연구한 예술가들은 삶과 예술 둘 다 실제로도 비유적으로도 감금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남성 지배 사회구조에 갇힌 여성 문인들은 거트루드 스타인이 ‘가부장적 시학‘이라고 말할 수밖에없던 문학 구조물에도 분명히 갇혀 있었다. 19세기 여성 작가는 남자들이 짓고 소유한 조상의 저택(또는 오두막)에 거주해야 했을 뿐 아니라, 남성 작가들이 고안해낸 소설의 집과 예술의 궁전에도 갇혀 제한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아·예술·사회를 전략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사회적 문학적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한 여성의 공통적인 투쟁 욕구를 들어 보이며, 여성문학에서 발견한 놀라운 일관성을 설명하기로 했다. - P20
나에게 ‘권위authority‘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의미들의 집합체다. (…) 이 단어에는 또한 저자authour, 즉 무엇을 생겨나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사람, 낳는 사람, 개시자, 아버지 또는 조상, 문서화된 성명서를 발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여기에 또 다른 의미 덩어리도 달라붙는데, 저자는 동사 ‘증식하다‘의 과거분사 ‘아욱투스auctus‘와 관련되어 있다. 에릭파트리지에 따르면 ‘아욱토르auctor‘는 글자 그대로 증식시키는사람, 즉 창립자다. ‘아욱토리타스Auctoritas‘에는 소유권이라는 의미 외에 생산, 발명, 원인이라는 뜻이 있다. 결국 그것은 연속 또는 계속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이런 의미는 모두 다음과 같은 개념에 기초한다. ① 한 개인이 창시하고 제정하고 확립하는 힘, 즉 시작의 힘. ② 이 힘과 이것에서 나온 산물은 이전보다 증식된다. ③ 이 힘을 휘두르는 사람은 힘의 결과와 파생을 통제한다. ④ 권위가이 과정이 지속되도록 지켜준다. - P75
『율리시스』에서 스티븐 디덜러스가 말했듯, 부권 개념 자체는 ‘합법적 허구’, ‘ 믿음까지는 아니어도 상상력을 요구한다. 남자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감각이나 이성으로 확인할 수없다. 자기 아이가 자신의 자녀라는 것은 그 아이의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되뇌는 말일 뿐이다. 그런 이야기속에 내재한 불안은 (가부장적 남존여비를 암시하는) 남성의 우월함에 대한 재확인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사이드가 묘사한 계보적 형상화가 구현한 허구처럼 말씀으로 보상하는 허구를 필요로 한다. - P76
‘문인‘은 저자이기에, 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이자 주인 또는 지배자이며 소유자다. 서구 사회가 그 용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르자면 그는 정신적 유형의 가부장이다. - P79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는 (사회학적으로도 생리학적으로도 불가능하기에) 여성이 문학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남성의 섹슈얼리티가 문학 권력과 끈끈하게 연관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19세기 사상가 오토 바이닝어의 표현에 의하면) ‘여성은‘ 문학 권력이 없기에 ‘존재론적 실재를 [남성과]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이어진다. 부권/창조성 은유가 나타내는 암시는 또 있다. 여성은 문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관능의 대상으로서 남성의 행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바이닝어와 사우디의 편지에 공히 드러나는) 생각이다. - P81
리처드 체이스가 ‘남성적 열정‘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거부하고 ‘여성성‘이 주는 비굴한 위안을 암암리에 거부하는 여성 문인 역시 이중적으로 ‘영‘이다. 왜냐하면 여성 문인은 (저메인 그리어가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 전체에게 적용했던 놀라운 비유를 사용하자면) 사실상 ‘거세된 남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앤서니 버지스는 제인 오스틴의 글이 ‘강력한 남성적 공격성‘이 부족해 실패했다고 말했으며, 윌리엄 가스 또한 여성 작가에게는 ‘그 모든 위대한 문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피가 끓어오르는듯한 생식적 충동이 부족하다‘고 한탄했다. - P82
역사상 소설을 소설로 반박할 수 있는 도구인 펜/페니스가 없었던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재산으로, 또 남성 텍스트에 갇힌 인물과 이미지로 환원되어왔다. 앤 엘리엇과 앤 핀치가말하듯, 여성은 그저 남성들의 요구와 생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성을 남성이 만들어낸 최고의 창조물로 당연시하는 생각도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와 마찬가지로 그 역사가 유구하고 복잡하다. 가부장적 신화는 이브를 비롯해 미네르바, 소피아, 갈라 - P87
테아 등의 여성이 남성에 의해, 남성으로부터, 남성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정의한다. 여성은 남성의 두뇌, 갈비뼈, 재능에서 나온 아이인 것이다. - P88
시, 창조 행위, 생명의 행위, 원형적 성행위. 섹슈얼리티는 시다. 여성은 우리의 창조물 내지 피그말리온의 조각품이다. 여성은 시다. [페트라르카의] 라우라는 실제로 시다.
은유와 원인론이 뒤섞인 이런 고정관념은 그야말로 서구 사회의 지독한 가부장적 구조를, 그리고 가혹한 가부장제가 딛고 서 있는 여성 혐오를 반영한 것이다. - P88
리가 말해주는 것은,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면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이 여성을 만들어냈다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P89
작가는 생명을 불어넣을 때조차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감금시키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독립적으로 말할 자율성을 박탈해 침묵시킨다. - P90
남성 작가들 자신이 ‘괴물 같은‘ 자율성을 지닌 여성 인물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작가/소유자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꾸짖는 것은 문학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 보면 ‘변덕‘은 고무적인 성격이자 덕성이다. (이중성을 수반하긴 해도) 변덕은 여성이 그 자신을 인격으로 창조할 능력, 더 나아가 거울/텍스트 반대쪽에 갇혀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까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P94
그러나 여성 작가는 문학적 자율성을 향해 거울을 통과하는 여정을 떠나기 전에 먼저 거울 표면에 있는 이미지와 타협해야한다. 그 이미지는 남성 예술가들이 여성의 ‘변덕‘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창조해낸 여성을 ‘영원한 여성의 전형‘과 동일시함으로써 더욱 철저하게 소유하기 위해 여성의 인간적인 얼굴에 단단히 씌워놓은 신화적 가면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여성 작가는 남성 작가가 만들어놓은 ‘천사’와 ‘괴물’이라는 양극단의 이미지를 특별히 더 읽어내고 적응하고 초월해야 한다. - P94
모든 작가에게 자아 정의는 자기주장보다 반드시 선행한다. 창조적인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면 언어화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에게 자아 정의의 본질적 과정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모든 가부장적 정의 때문에 복잡해진다. - P95
성모마리아에서 집 안의 천사로 이어지는 문학적 계승은 뚜렷하게 이어지는데, (몇명만 들어보면) 단테, 밀턴, 괴테를 꼽을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대부분의 신플라톤주의자처럼, 단테는 성모마리아의 순결한 수행원인 베아트리체를 알게 됨으로써 신과 그의 시녀 성모 마리아를 알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밀턴도 (나중에 검토하겠지만) 명백하게 여성 혐오를 드러내는 가운데서도 ‘천사가 된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보았다고 말한다. - P100
"아이히너는 괴테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가장 숭고한 여성성‘의 전형적이며 극단적인 예로 괴테의 후기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절』 등장인물 마카리에를 든다. 마카리에 묘사는 ‘집 안의 천사‘의 철학적 배경을 잘요약해 보여준다.
그녀는 […] 아주 순수한 명상적 삶을 영위해나간다. […] 시골 영지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이야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외적인 사건이 없는 삶을. 그녀의 존재가 쓸모없는 것은아니다. 그 반대다. [・・・] 그녀는 어두운 세계에서 횃불처럼 빛난다.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다른 여행자들이 방향을 잡을수 있게 움직이지 않는 등대처럼 빛난다. 감정과 행위로 뒤얽혀있는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녀는 충고와 위로를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타심과 순수한 마음의 본보기이자 이상형이다.
마카리에에게는 자기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와 위로’를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미소 짓고 공감해준다. 이런 특징은 마카리에가 서구 문화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여자들의 후손일 뿐 아니라, 코번트리 패트모어가 쓴 집 안의천사(이 명칭의 시조가 된, 19세기 중반의 가장 인기 있는 시집의 여자 주인공)의 직계 조상임을 보여준다. - P102
사회 역사학자들은 겸양, 우아, 순수, 섬세, 온순, 순종, 과묵, 순결, 상냥, 공손이라는 ‘영원히 여성적인‘ 미덕이 (이 모든 것이 오노리어의 천사 같은 순진함을 구성하고 있는 규범적 행실의 양상들이다) 어떻게 생겨났는지 충분히 탐구했다. 예의범절 책의 저자들은 여성에게 ‘우리의 모든행위에는 (심지어 우아하게 자는 법에 이르기까지) 법칙이 있다‘고 확신시켰고, 우아함이 남편 앞에서 지켜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여성의 존재 이유가 남자를 이롭게 하고 위로해주는것이라면 여성은 남자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 P105
예술품이 되든 성녀가 되든, 아름다운 천사-여자의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자신의 안락, 개인적 욕망, 혹은 둘 다를) 포기한다는 것이며, 그녀를 죽음과 천상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 - P107
로 이런 희생 행위다. 자아를 버리는 것은 고귀해지는 길일 뿐아니라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는 삶은 괴테의 마카리에의 삶처럼 사실상 죽은 삶이고 산 죽음이다. ‘명상적인 순수함‘의 이상은 결국 천상과 무덤 둘 다를 환기시킨다. - P108
전통적으로 남성 작가들은 비둘기의 단순함을 찬양하고, 뱀의 교활함은 늘 (적어도 교활함이 그녀 자신을 위해 쓰일 때는) 혹평한다. 마찬가지로 자기주장을 하고 공격성을 내보이는(’의미 있는 행동‘으로 가득 찬 남성적 삶의 모든 특성을 가진) 여성은 ‘괴물’로 묘사한다. 그런 특성은 ‘비여성적인’ 만큼 ‘명상적이며 순수한’ 부드러운 삶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 P112
테르툴리아누스나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기독교 교부의 여성 혐오 이후 르네상스와 왕정복고 시대의 문학(시드니의 세크로피아, 셰익스피어의 레이디 맥베스와 고릴과 리건, 밀턴의 [사탄의 딸] ‘죄‘와 나중에 논할 밀턴의 이브)에서 계승된 여성 괴물은 18세기 풍자가들의 작품을 채웠다. 여성들이 이제 막 ‘펜을 든’ 시기, 일군의 남성 작가들이 드러낸 여성 적대적 관점은 여성 독자들에게 특히 두려움을 안겼을 것이다.
여성의 입에서 어휘는 의미를 잃고 문장은 용해되어버리며 문학적 메시지는 왜곡되거나 파괴된다. 동시에 좀 더 교묘하게, 바로그 이유 때문에 더욱 더 의미심장한데, 남성 작가들은 여자 천사‘가 사실 여자 ‘악마‘였으며 귀감이 된 귀부인은 사실 숙녀답지 않은 괴물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교한 반反로맨스를 기어냈다. - P116
몇몇 비평가들은 스위프트가 만들어낸 여성들이 암시하는 여성 혐오가 단지 아이러니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 놓인 가장 분노에 찬 시들에서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공포, 육체를 구원하거나 변형시킬 수 없는 여성의 예술적 무능(무력함)에 대한 혐오가 드러난다. 따라서 스위프트에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시종일관 타락, 질병, 죽음과 동일하고 여성의 예술은 불가피한 종말을 앞당기려는 하찮은 시도일 뿐이다. - P117
여신은 고양이처럼 발톱이 있다. 그녀의 머리, 귀, 목소리는 당나귀를 닮았다. 이는 진작 빠져버렸고, 눈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듯 안쪽을 향해 있었다. 여신이 먹는 음식은 줄줄 흘러나온 자신의 쓸개즙이었다. 비장은 어찌나 큰지 훌륭하게 모양 잡힌 젖꼭지처럼 돌출되어 있어서 젖꼭지 모양 혹이라 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는데, 흉측스러운 괴물 무리가 모여서 그 사마귀 같은 것을 탐욕스럽게 빨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점은, 빠는 행동이 비장의 크기를 축소하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키운다는것이었다.
‘스펜서의 ‘에러‘나 밀턴의 ‘죄‘처럼 여신 비판은 새끼 치고 먹고 토하고 먹이고 다시 먹어 치우는 영원한 생물학적 순환과 관련되어 있다. 세 시인 모두 이런 순환이 초월적 지적 삶에 파괴적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각각의 괴물 같은 어머니가 만들어낸 창조물은 전부 그녀의 배설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배설물은 전부 그녀의 음식이자 무기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새끼와함께 자폐적인(서로를 잡아먹는 유아론적인)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다. 육체로 구현된 세계의 창조성은 파괴적이다. - P120
타자인 여자는 삶(파괴되도록 만들어진 삶의 우발성을 나타낸다. ‘남자가 여성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육체적 우발성에 대한 남성 자신의 공포‘라고 보부아르는 말한다. - P121
모든 괴물 여자와 연관되어 있는 성적 혐오는 왜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여성 신체에 대해 혐오감을(또는 적어도 불안감을 끊임없이 표현해왔는지 설명한다. (…) 더 의미심장한 것은 여성의 변덕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남몰래 품고 있던 여성에게는 위압적인 훈계의 이미지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이 이미지는 영원한 여성성 개념에 내재한 침묵하라는 경고를 강화시키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 P122
여성의 순종하는 삶, ‘명상적인 순수한‘ 삶은 침묵의 삶이요, 이야기도 없고 펜도 갖지 못한 삶인 반면, 반항하는 여성의 삶, ‘의미 있는 ‘행위‘의 삶은 침묵을 강요받고 괴물 같은 펜으로 끔찍한 이야기를 말하는 삶이다. 어느 쪽이든 여성 예술가가 자신을 찾기 위해 들여다보는 거울 위의 이미지는 여성 예술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여성 예술가는 누명을 쓰고 함정에 빠진, 고발되고 기소된 ‘영‘이라고, 또는 ‘영’이 되어야 한다고. - P124
디즈니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로 제목을 단 이 이야기는 사실상 ‘백설공주와 사악한계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핵심 행위(사실상 유일한 실제 행위)는 두 여성의 관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 이 두 여자의 갈등은 주로 투명하고 폐쇄된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 두 여성은 가부장제가 그들 스스로를 죽여서 예술로 만드는 데 사용하라고 권하는 도구(마법의 거울, 마법에 걸린 유리 관, 마법을 거는 유리관 등)를 무기로 휘두르며 솜씨를 부려 문자 그대로 서로를 죽이려 한다. - P125
여왕의 남편이자 백설 공주의 아버지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베텔하임에 의하면 이 두 여자는 왕의 주목을 받기 위해 여성 버전의 오이디푸스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사실은 이 이야기가 거울에 비친 어머니와 딸, 여자와여자, 자아와 자아 사이의 갈등에 숨 막힐 정도로 강렬하게 집 - P126
중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 거울의 목소리는 분명 왕의 목소리다. 그것은 여왕의(그리고 모든 여자의 자아 평가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가부장적인 목소리다. - P127
거울의 목소리가 여자들을 반목하게 만들기 때문에 여자들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서, 백설 공주에 대한 증오심을 야기한 것은 자아도취 의식을 행하는 여왕의 강한 절망인 것 같다(또는 증오심인 것 같다). (…)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우리는 여왕이 전략가, 술책가, 음모자, 마녀, 예술가, 분장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왕은 전통적으로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듯 거의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위트 있고 교활하며 자아도취적이다. 반면 절대적인 순결성, 얼어붙은 순수성, 사랑스러운 무라는 측면에서 백설 공주는 우리가 이미 논했던 ‘명상적인 순수성’의 이상(문자 그대로 여왕을 죽일 수 있는 이상)을 정확하게 표상한다. - P128
여왕은 자신을 내세우고 과장할 양으로 세이렌의 빗과 이브의 사과 같은 여성적 계략을 전복적으로 사용해 천사 같은 백설 공주를 죽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술수는 딸을 통해 자신이 실현하려던 바와는 정반대 효과를 낸다. 한마디로 백설 공주가 수동적인 처녀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공주를 영원히 아름답고 생명력 없는 예술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바로 가부장적 미학이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 P130
사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백설 공주가 드러내는 유일한 이기심은 변장한 살인자가 주는 코르셋의 끈과 빛과 사과에 대한 ‘자아도취적‘ 욕망이다. 베텔하임이 말했듯이, 이는 ‘계모의 유혹과 백설공주의 내적 욕망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암시한다. - P131
여왕의 계략으로 죽어서 예술품이 된 백설공주는 이전보다 더 ‘계모‘의 자율성에 위험한 존재가 된다. 백설공주는 몸과 마음 두 측면에서 모두 ‘계모‘의 자율성과 더욱 더 대립하기 때문이다. 죽어서 자아 없이 유리관 속에 누워 있는 백설 공주는 전시된 욕망의 대상물, 가부장제의 대리석 ‘작품‘, 모든 통치자가 자신의 거실을 꾸밀 때 쓰는 단아한 장식용 갈라테이아인 것이다. - P132
「노간주나무는 남자아이가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확신과 자기표현을 향한 성장이며 언어의 힘을 발전시키는 일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남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마법 거울에 의해 규정되거나 만들어진 침묵의 이미지로서, 혹은 비탄에 잠긴 침묵의 춤, 즉 말하기보다는 몸으로 공연하는 무용가로서) 침묵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 P134
18세기 말까지 여성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책 전반에서 우리가 보게 될 가장 중요한 현상인데) 가부장적인 이미지와 인습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허구의 세계를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앤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텍스트라는 유리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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