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 지양으로서의 조선, 지향으로서의 동양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6
정준영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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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는 학문의 전당을  표방하면서 제국과 식민이 중첩된 공간 위에 서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국책(國策)과 학문 사이의 균열'이라는 모순된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다. 이런 균열의 간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메울 것이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 P18~19

그동안 대한민국 사학계를 지배해온 식민사관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제기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총서 지난 시리즈 5권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 편찬을 위해 자료 수집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 그들의 논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조작 및 왜곡을 얼마나 서슴없이 자행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여다본 바 있었다.
하지만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관점에 입각한 연구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그로 인해 진실과 거짓의 중간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수많은 일본인의 조선 연구가 충분한 고려 없이 더 교묘한 왜곡으로 미리 단정되기 일쑤였으며, 모호함 그 자체에 주목할 여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P9). 저자는 이런 기존의 한계를 넘어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을 검토하고자 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주의적 지향이 관철되는 공간인 동시에 학술적 연구가 허용된 제도적 공간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독특한 위치를 점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이 책은 경성제대 초대 총장과 법문학부 일본인 학자 5인을 기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식민지 조선 연구의 흐름을 살펴본다.

국책과 학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으로 경성제대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는 조선 연구, "동양 문화의 권위"라는 지향을 내세웠다. 이 관점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연구만으로는 안 되고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이 주도한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까지 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방향성을 위해 조선총독부와 날을 세우면서 자신의 입김에 맞게 대학의 인력을 구성했다.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2강좌' 초대 주임교수였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교과서 편찬과 각종 고적조사사업을 주관한 식민지 관료로 출발하였으나 1923년 조선사학회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비로소 역사학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사학회는 식민사학의 제도화라는 흐름에서 보면 과도기적 성격이 강했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전문 연구자를 본토에서 촉탁으로 끌어오는 것으로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무리였기에 경성제대 설립이 추진되었다. 또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도 기존의 조선 연구의 전환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조선사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사강좌』 발행을 주도하고 경성제대 창설 작업에 참여하며 대학 예과의 형태와 대학 학부의 구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식민주의 역사학은 식민지 조선에서 제도화되었으며, 경성제대는 이런 식민주의 역사학의 제도적 중심으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P89).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1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인 이마니시 류는 당시 일본 학계에서 조선사 연구를 대표했던 인물로, 조선 고서적을 광범하게 수집했던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오다 쇼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조선사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오다 쇼고는 식민지 관료 출신으로, 조선사학이라는 학문 영역의 제도적 정착에 지원을 한 인물인 반면, 이마니시 류는 일본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에서 '조선사학'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최초의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조선사학'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마니시는 조선 고대사를 중국 제국주의로의 종속의 역사로 보았다. 그는 한반도 속의 중국이었던 한사군과 낙랑군을 조선 민족의 종속화의 사례로 보았다. 그는 고대 중국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속성을 읽어내면서 서구의 제국주의와 중국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제국의 가능성을 조선 고대사, 고대 한일관계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조선 민족의 종속을 '중국화'에서 찾고 조선이 일제의 일부분이 되었고 이것이 영원하려면 중국화를 걷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조선인에게 '지나화'를 벗겨내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곧바로 강제로 '지나화'를 벗기는 폭력적 행위를 유발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는 동양학자들 그룹이 있었다. '지나철학 강좌', '지나어학 · 지나문학 강좌', '동양사학 강좌' 등의 강좌를 기본으로 삼아 연구하고 가르친 일본인들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나철학 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와 1941년 '지나철학 강좌' 후임을 맡은 아베 요시오가 있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교수 부임 이전 일본에서 중국 고전 경전에 대한 권위자였다. 그는 고증학을 중심으로 하는 청대 중국의 학술문화가 어떻게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 주변 세계로 확산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청대 중국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한 조선의 지식인들(홍대용, 박제가, 김정희)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의 고증학은 청조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인이 있었음에도 그들 개인의 업적에 그친 반면 일본의 고증학은 서구의 근대 학문과 연계하며 발전해 나갔다고 주장했다. 아베 요시오는 퇴계 이황과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적 혈연 관계를 통해 퇴계 사상의 흐름은 조선에서 제국대학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일본의 도학파에게 전해져 황도 철학으로 만개했다고 보았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국제공법 강좌'와 '외교사 강좌'를 맡은 '이즈미 아키라(1873~1943)가 있었다. 그는 경성제대 부임 전 국제주의를 준거로 강제적 동화주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비동화주의 식민정책을 주장하였다. 타이완 현지 지식인들이 그의 이론을 수용하고 적극 호응하며 1920년대 '타이완의회설립 청원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식민의 개념을 규정하면서 이주와 식민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식민은 "생애거주"의 목적, "집단적", "가족과 더불어", "본국은 아닌", "무소속의 토지나 자국의 영토"일 때만이고 그 이외는 이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점진적 진화론에 가까웠고 이상적인 방향이었으나 현실의 식민정책과는 때문에 타협이 어려웠다. 그는 일본 식민정책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반대를 주장한 이였지만 민족자결은 혁명의 자유나 식민지 독립운동과 어떤 관련도 없다고 주장하는 등 한계를 보였다. 1927년 경성제대 부임된 이후 그는 퇴임 때까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기존의 식민정책학자로서의 활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1928년 《외교시보》에 발표한 「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논문에서 비동화주의와 조선의 여러 분야의 문제를 분석한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이 발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으로 이즈미 사상에 문제를 삼아 교수 해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아무리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가 학문적 자율성과 과학적 엄밀성, 그리고 제국적 보편성을 지향한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그 배후에 식민지배의 폭력적 현실이 최종심급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조선 연구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자 핵심적인 배경이다. - P243

1930년대 만주 사변 후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는 '지나'에서 '대륙(만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31년 경성제대 제4대 총장으로 온 야마다는 사명을 변경하며 조선은 '만몽 개발'의 적임자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연구'라는 용어 대신 '개발'이라는 용어를 쓰고 '지나'는 '만몽'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경성제대는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으로 발돋움하였으며, 개별적인 전문 연구활동 대신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조선 연구는 경성제대에 의해서 비로소 제도화된 분과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고, 분과학문이 된 조선 연구가 체계적으로 양성해낸 인력들이 통치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 참여하여 식민권력에 이바지한다. 매번 전문가를 촉탁이라는 형태로 일본 본토에서 초빙해 학술 조사를 수행해야 했던 조선총독부의 처지에서도 경성제대의 설립은 인력 수급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했다. - P241

다만 이들은 여러 조선 연구 중에서 극히 일부를 담당했을 뿐이고, 시기적으로도 앞쪽에 치우쳐 있다. 저자는 이렇게 조선 연구의 해당 분야와 연구자 세대에 대한 편향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도한 바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먼저 일본인들이 수행한 조선 연구가 가진 특징을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경성제대 조선학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들과 자유주의적 식민정책학자로서 식민지 사정을 비판했던 이가 경성제대 조선학의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형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 연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기존 조선 사학계를 대표하는 오다 쇼고나 이마니시 류 말고 동양학자 그룹들의 학자였던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 국제법 학자인 이즈미 아키라의 주장이 흥미로웠다. 청대 고증학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 지식인들에 주목한 후지쓰카 지카시와 퇴계 이황에 주목한 아베 요시오, 그리고 비동화주의를 주장한 이즈미 아키라. 이런 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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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2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덕분에 요즘 새로 공부하는 기분이에요. ^^

거리의화가 2022-11-13 19:3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어릴 때 좀 이렇게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ㅎㅎㅎ 다늦게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나네요~ 항상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1-13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혹시 역사학과 교수님이신가요? ^^ 저도 언제나 화가님 글이랑 읽으시는 책들 보면 놀라게 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13 15:20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무슨 그런 말씀을...^^;;; 진짜 역사학과 교수님들께 돌날라오는 소리가 들립니다ㅠㅠ 새파랑님께 놀라움을 드렸다니 저는 그저 감사하죠.
 

Ⅳ. 지구화

[탈냉전과 기억의 지구화]
‘스톡홀름 선언‘(2000.1.28 공표): 홀로코스트가 보편적 의미를 지니며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되어야한다라고 명시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발족으로 동유럽에서 강제 노동된 노동자와 독일 내 강제수용소의 수감자와 유대인, 전쟁포로 등이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 법. 1953년 ‘런던채무협약‘으로 전후 배상 문제는 일괄 타결되었다고 간주해온 독일 정부 및 재계의 과거 입장과 비교하면 큰 진전이 이루어진 것 - 인권에 대한 보편적 관심의 확대
-> 한국 언론은 독일의 배상을 전례로 삼아 일본 정부와 재계에 식민지 조선인 강제노동 배상에 대한 촉구 - 지구적 기억 공간에도 큰 반향

[일본군 ‘위안부‘와 반인륜적 범죄]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여성 국제전범재판소(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2000.12 도쿄): 법적 구속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도덕적 목소리로 인해 정치적 의미가 컸음. 일본군 ‘위안부‘ 기억활동가들은 천황을 비롯한 일제 최고위 정치 군사 지도자 10명을 전쟁범죄와 반인륜 범죄로 기소. 생존자 증인 35명의 법정 증언과 비디오 증언을 증거로 채택. 법정은 위안부 제도 아래 자행된 강간과 성노예제가 ‘반인륜적 범죄‘라 판결 -> 아시아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여성에게 저지른 성범죄를 기억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지구적 기억의 문제가 되었음을 선포한 것
1994년 르완다와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벌어진 제노사이드가 ‘일본군 여성 국제전범재판‘에 영향을 주었음
1993년 빈 세계인권회의에서 여성의 권리는 인권 문제임이 강조, 같은 해 12월 유엔 총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 철폐 선언 채택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 로마 규정: ‘강간, 성노예제, 강요된 매춘‘을 전쟁범죄이자 반인륜적 범죄로 규정
20세기 성폭력은 제노사이드의 주요 수단 중 하나였고 생물학적 인구 재생산을 통제하는 제노사이드의 방법과 결합하면서 성폭력의 양상이 더 체계적이고 정교해짐.(가부장제와의 결합)
성폭력으로서의 강제 결혼이 반인륜적 범죄라는 최초의 판결은 ‘시에라리온특별재판소‘의 찰스 테일러 항소 법정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공개 증언 이후 양국 여성단체의 초국가적 연대와 북미 대륙의 한국계 이주민 여성들의 문제 제기로 ‘위안부‘ 문제는 전지구적 이슈로 발전 일본계 미국인 NGO 단체인 ‘인권과 배상을 위한 일본계 미국인(Nikkei for the Civil Rights and Redress, NCRR)‘의 활동: 일본군 위안부가 거짓이라 주장하고 백악관 청원과 의회 로비, 지방 정부에 대한 압력 등을 통해 ‘위안부‘ 기림비나 소녀상의 철거를 주장한 본국 정부와 일부 일본계 미국인의 원거리 민족주의와 대조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음
미국 내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기억활동가(글렌데일의 시의회 의원인 아라 나자리안, 자레 시나얀)와 일본군 ‘위안부‘ 기억활동가의 연대
글렌데일 시립도서관 안에 문을 연 갤러리 리플렉트스페이스에서 열린 기획 전시(2017.5) 개막전 ‘기억의 풍경‘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서 공식 역사와 생존자 증언의 관계를 묻는 전시, 두번째 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침묵과 대화에 대한 예술적 성찰‘
2005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박물관에서 열린 ‘나치 강제수용소와 강제 성노동‘ 전시: 강제 성매매의 문제를 기억의 공론장에서 논의하게 된 계기
2007년 9월 라벤스브뤼크 ‘전시 강제 성매매‘ 여름 대학: 일본군 위안부와 보스니아 그르바비차에서 벌어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이슬람 여성 집단 강간, 나치 수용소의 강제 성매매를 함께 다루면서 강제 성매매와 폭력을 같은 기억 공간에 배치

[검은 대서양과 홀로코스트]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기소한다> 유엔에 청원서 제출(1951):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미국의 인종주의적 박해가 지닌 공통점 지적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정치범들, 넬슨 만델라에게 인기가 높아
1920년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일로 이주한 ‘검은 독일인‘과 독일에서 태어난 자식 세대 역시 괴롭힘과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았음
《할런의 책(The Book of the Harlan)》(2016): 아프리카계 미국인 재즈 연주자 할런과 리저드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그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대한 묘사나 수용소 소장 부부에 대한 비역사적 설정, 아프리카계 독일인이나 유럽의 흑인보다 파리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홀로코스트의 주된 희생자로 그리는 등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 많은 문제점 노출
아실 음벰베 논쟁(2020): 아프리카의 탈식민주의적 기억과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만났을 때 누가 더 큰 희생자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한 갈등을 보여
다른 역사적 비극과의 비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홀로코스트를 절대화하고 홀로코스트가 도덕적 불문율로 탈역사화되어서는 안되

[68혁명과 기억의 연대]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베트남 반전 평화운동과의 결합)은 탈영토화된 지구적 기억구성체의 연대를 향한 역사적 배경
1971년 중일전쟁과 난징학살에 대한 일본 사회의 비판적 기억을 끌어낸 것은 1960년대 일본 베트남 반전운동인 ‘베트남평화시민연합’의 행위에 따른 결과 - 일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1968년 혁명은 실패했지만 기억 문화의 관점에서 실패라고 단언할 수 없다.
1961년 아이히만 재판,
파리 시가에서 반식민주의 시위에 나선 알제리 이민자들의 학살 피해, -> <두 개의 게토>(마르그리트 뒤라스): 바르샤바 게토 생존자와 알제리 노동자를 병치해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에 대한 기억의 연대 타진
아메리카 선주민에 대한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정착민 민주주의 체제가 권위적인 식민주의 체제보다 학살의 빈도와 강도가 훨씬 더 많고 높음)와 홀로코스트의 기억의 연대 ->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제노사이드의 기억은 서구에서 제노사이드나 홀로코스트가 발생할 수 없다는 서구중심주의의 역사적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표출. 서구 민주주의가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을 내장한 체제인 것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기억은 20세기의 제노사이드를 비판적으로 기억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든다다.
독일의 이슬람계 이주민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맺고 있는 기억의 연대: 소설 ‘위험한 유사성’(1998)에서 터키계 이슬람 독일인의 기억 속에서 홀로코스트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조우하게 하면서 기억의 민족적 경계를 뒤흔듬
베를린 노이쾰른구의 기억활동가들이 시도한 ‘노이쾰른 동네 어머니 프로젝트’

1989~1991년 소련 및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유주의 서구문명이 세계사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낙관주의에 취해 있을 때, 르완다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와 체계적 성폭력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역사의 반복‘임 - P173

을 일깨워주었다. 특히 인종 청소라는 이름으로 보스니아의 이슬람 여성에게 자행된 체계적인 집단 강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전 세계에 되살렸다. 또 거꾸로 르완다 및 유고슬라비아의 국제전범재판에서는 무력 충돌 때 발생한 체계적 강간에 대한법적 정의를 내리는 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참고하기도 했다. 국제노동기구 또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1930년 제정된 강제노동협약위반이라고 보았다. - P174

실제로 성폭력은 피해자인 여성은 물론이고 그 여성이 속해 있는공동체의 남성에게도 여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안겨준다는 점에서 가해자의 권력을 행사하고 과시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효율적인 지배 도구였다. - P174

성적 제노사이드의 가해자에 대한 단죄가 지체될수록 더는민족의 몸을 재현하지 못하는 성폭력 피해자는 외부의 가해자뿐 아니라 내부의 가부장적 민족주의자들의 비난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일본 전범에 대한 도쿄 재판에서 성범죄에 대한 고발과 처벌은 홀로코스트와 난징 학살, 연합군 포로 학대 등의 이슈에 밀려 주변화되었다.
반인륜적 범죄로서의 전시 성폭력이 전 세계 시민사회의 심각한 윤리적 의제로 등장한 것은 21세기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지구적 기억구성체의 형성과 더불어 지금까지는 타자화되었던 성폭력 희생자에대한 윤리적 감수성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 P175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트랜스내셔널한 억압의 기억 때문에트랜스내셔널한 페미니즘적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은 일본 제국의 파시스트 가부장주의, 전후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탈냉전기의 신민족주의의 결절점으로서 가해자 이데올로기의 연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일본 내부의기억 정치적 지형에서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은 페미니즘의 미투동에 대한 남성주의적 혐오와 연결되어 있다. - P180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다른 제노사이드의 기억과 경쟁하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 ‘다방향적인 기억‘ 또는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의 ‘비판적 상대화’를 통한 비교는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홀로코스트의 단일한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특권적 지위에 대한 헤게모니적 욕망을 제어하는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기억과 더불어 식민주의적 과거에 대한 망각이 전후 독일의 기억 문화를구성하는 다른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P194

1960년대의 반전운동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미국의 노예제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과 잔학행위에 대한 기억이 전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서로 만나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히 전지구적 시민운동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정치 동학의 관점에서는 68혁명이 실패한 혁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문화의 관점에서는 실패라고단정하기 어렵다. 1968년을 기점으로 국가권력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자기중심적 기억 문화의 코드를 흩트리고 국경을 넘어 타자의 고 - P198

통에 공감하는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과거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국민국가의 틀에서 구출하여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기억 문화의 코드를 바꾸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68혁명의 문화사적 의의는 실패한 정치혁명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 P199

민족공동체가 흔히 빠지기 쉬운 영토화된 민족주의적 기억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과거를 공유하지 않는 이질적 기억 주체의 참여가 필요하다. 예컨대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억은우파적 기억이냐 좌파적 기억이냐, 공식 기억이나 풀뿌리 기억이냐의구분을 넘어서 베트남계 이주민들이, 더 나아가서는 베트남의 침공을받은 캄보디아계 이주민들이 기억의 구성 과정에 참여할 때 급진적으
‘로 탈영토화될 것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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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승화

얼마 전 '국립 서울현충원'에 대한 책을 읽고 난 뒤라 그런지 특히 이 챕터의 내용이 눈에 확 들어왔다.(현충원에도 무명용사탑이 있다.) 전사자에 대한 숭배는 예전 같으면 일상적으로 국민 의례를 행하면서, 지금은 현충일 같은 특정 기념일에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바쳐 순국한 순교자로 대상화된다. 나는 이 과정이 정치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이 민족주의(에 대한 숭배)를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행위겠구나 하는 생각이 일었다. 의도치 않게 연결 읽기가 되고 있어서 더 의미가 있다.

[죽음의 민주화와 사자의 기억]
피해자=수동성, 희생자=능동성 or 주체성
비장한 선율에 숭고한 희생의 노랫말을 붙인 애국가요가 각종 국가 기념식에서 제창되는 것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를 놓고 벌어진 논쟁
국민국가의 의례 -> 고통의 기억을 동원하면서 공동체의 응집력을 극대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함께 나눈 고통이 기쁨보다 민족을 더 단결시키고, 민족적 기억을 위해서는 애도가 승리보다 나은 것이다."(by 에르네스트 르낭)
집단적 희생의 기억 - 정치 종교를 만들어내는 재료
전근대사회에서의 전사자 의례는 혼을 달래서 빨리 잠재워야 할 부정적인 존재 vs 근대 국가의 국민 의례는 전사를 위대한 행위로 간주하고 해석을 기록하여 후세가 추모하게 하는 숭배
근대 주체 -> 국민국가의 요청에 따라 다듬고 만들어진 주체. 명령에 복종하고 조국에 충성하고 군인의 미덕을 숭상하는 국민으로 프로그램화된 대중
17세기 영국의 휘그파는 고대 공화국의 시민과 자신을 동일시, 1750년대 프랑스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적 공화정을 이상적 공동체로 여겼음(공동 의지에 기초한 공동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헌신)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고전적 민족주의와 다른 점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 뿐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의 희생까지 민족의 이름으로 승화시킨다는 데 있다 - 죽음의 민주화

[숭고한 희생자와 순교의 국민화]
피해자와 희생자는 언어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이거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같은 언어에서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 순교자는 언어권의 경계를 넘어 그 의미가 거의 일치한다. 순교자는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을 위해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는 정치적 행위를 뜻한다.
"독재자는 죽는 순간 지배가 끝나지만, 순교자는 죽는 순간 지배가 시작된다."(by 쇠렌 키르케고르)
'이타적 자살'(by 에밀 뒤르켐): 자기 사회의 지배적 신념과 헤게모니적 가치체계를 체화한 구성원이 사회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자살을 결단함으로써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현상 -> ex) 이슬림 지하드 전사의 '자살 테러' or 팔레스타인 전사의 '자살 공격'
순교의 대중화 or 순교의 국민화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일상에 깊숙이 자리하게 돼 -> 무명용사의 숭배

[시민종교와 전사자 숭배]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는 삶의 우연성과 불멸성에 대한 숙명론적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민족주의는 민족의 영속적 삶이라는 관념을 통해 죽은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를 연결하고 죽은 자를 민족의 삶 속에서 부활시킨다고 주장
민족주의는 조국을 위해 죽어간 자들의 제사를 통해 영속된 운명공동체를 재확인
희생자에 대한 종교적 애도에서 중요한 것은 죽은 자의 관점이 아닌 살아서 애도하는 자의 관점. 애도의 주체가 산 자이기 때문.
1차 대전의 기억이 종교적 분위기를 부여하면서 순교와 부활이라는 믿음을 국가라는 시민종교에 투영
야스쿠니 신사의 전사자 숭배: '정치종교-시민종교-세속종교'
야스쿠니 신사가 정치종교의 성전이 된 기원
대한민국 전사자 의례는 제국 일본의 정치종교적 의례에서 기원한 것
강제 동원 희생자 집단의 복권 -> 기억의 지구화, 정치의 민주화로 가능해짐

[탈영병 기념비와 대항 기억]
전후 독일과 소련, 일본 사회는 탈영병의 존재를 사회적 기억에서 배제하면서 조국의 순교자 신화를 유지 가능했음. 따라서 탈영병의 존재는 오래도록 사회에서 잊힌 존재
정치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한계가 존재 - 조국을 위해 무모한 죽음보다는 전쟁에 반대하고 살아남는 게 애국이다라는 생각이 퍼지면서 정치종교의 세력이 약화된 것 -> 이는 현재 러시아 군인들의 강제징집 명령에 불복종, 포기하거나 탈출하는 현상과 오버랩됨.
탈영병을 위한 기념비(2014.10.24, in 오스트리아 빈): 나치 군사재판에 희생된 오스트리아 탈영병을 위한 기념비 - 정치종교의 전사자 숭배의례를 통해 고양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문화적 기억에 맞선 반헤게모니적 기억문화의 예
하인리히 뵐 - 2차 대전 당시 탈영병이자 투항자로서 비판을 많이 받았음
2007년 1월 새로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 조항이 없지만 국기에 대한 충성서약은 행정자치부 시행령으로 존속.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피해자가 희생자로 넘어가는 담론적 승화 과정에서 출현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수동적 피해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숭고한 희생자로 탈바꿈하는 순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가는 문이 열리는 것이다. 강제 폭력의 피해자가 자발적인 결단의 희생자로 미화되고, 의미없는 죽음이 의로운 죽음으로 신성화되고, 우연한 사고가 운명적 비극으로 신비화되고, 현실 속의 피해자가 기억 속의 희생자로 자리매김될때,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운명론적 초월성을 띠게 된다. 희생의 승화를 통해 조국, 민족, 혁명, 해방, 근대화 등을 꿈꾸는 세속의 이데올로기가 존재론적 운명의 차원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 P113

억울한 희생자의 고통과 고난을 민족적 기억의 주변에서 중심으로끌어올린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희생자는 과거 민족영웅이 누렸던 권위를 공유했다. 지구적 기억 공간이 만들어지고 피억압자의 인권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폭력의 희생자가 바로 그 희생때문에 도덕적 영웅이 된 것이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피해자가희생자로 승화되는 양상은 순교 개념을 축으로 한 영웅 민족주의와는크게 다르다.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 사이의 위계를 지우고 군인 전사자에게 국한된 죽음의 민주화를 민간인 희생자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공감을 얻는 세속종교의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죽음의 민주화가 정치종교의 민주화·대중화·국민화를 낳은 것이다. - P120

‘희생자‘라는 단어 뒤에 굳이 ‘의식‘을붙여 ‘희생자의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첫째, 피해자를 희생자로 승화시키는 기억의 전이 과정을 담기 위해서다. 피해자에게 희생자의 숭고미학을 덧씌우는 수사법의 정치학을 설명할 때 희생자 ‘의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다. 둘째, 실제 희생자가 아닌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가진 역사의식인 ‘세습적 희생자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하다." - P124

순교자의 지배가 시작되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도 기지개를 켠다.
그러나 순교자 숭배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선택된 순교자에서 다수의 집단적 순교자가 필요하다. 순교의 대중화 또는 순교의 국민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몇몇 선택받은 사람만이아니라 국민 전체가 순교자가 될 때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추상의이데올로기를 넘어 일상에 깊이 뿌리박는다. ‘그들‘의 순교가 아니라
‘우리‘의 순교가 되는 것이다. 이름 없는 영웅이 귀족적 영웅을 대체하는 죽음의 민주화는 특히 무명용사 숭배에서 잘 드러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뿌리박은 전통종교의 형식이 필요한 것도 이 대목에서다. - P126

전사자 숭배는 국가라는 종교에 순교자를 제공했고, 죽은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는 국가적 경배의 신전이 되었다. 전사자를 어떻게 매장하고 추모할지, 전쟁기념물에 어떤 상징성을 투영할지 등 전사자 묘역의건설과 관리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체계적으로 논의되고 의례도 더 정교해졌다. 전사자 숭배를 중심으로 구축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 문화의 회로판을 통과한 기독교의 순교 전통은 순국의 전통으로 탈바꿈했다. ‘신을 위해 죽는다(pro domino mori)‘는 가톨릭의 순교 정신이 ‘조국을 위해 죽는다(pro patria mori)‘는 순국의 정치적 도덕률로 바뀌면서 전사자 숭배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종교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순교가 순국으로 탈바꿈하고, ‘의사(義士)‘ 또는 ‘열사(烈士)‘가 ‘순교 성인‘을 대체하며,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목숨 걸고 싸운 말단 병사들이 순교자와 같은 반열에 오를 때, 애국적 순교자의 지배가 시작되고 조국과 민족을 신성화하고 숭배하는 정치종교는한껏 고양된다. - P129

전사자들을 ‘영령(英靈)‘으로 호명해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현창
‘하는 순간, 죽음은 민족의 영원한 삶 속에 스며들어 불멸의 지위를 얻는다. - P131

기독교의 종교적 기운과 결합할 때 전사자 숭배는 애도를 넘어 승화의 경지에 이르기 쉽다. 특히 세속적 진보의 비전을 잃어버린 채 종교적 주술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근대의 재주술화 과정에서 ‘도덕적 자본‘의 헤게모니가 강해지면, 국가가 추구하는 공식적 기억은 점점 더 종교적 상징에 의존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먼저 발전한 전사자 숭배와 정치종교가 좋은 예다. 특히 ‘희생자의식‘은 개념적 신축성으로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상호침투와 모순적 결합을 더 손쉽게 만들어주는경향이 있었다." 궁극적으로 전쟁에 대한 집단 기억은 국가가 만들고퍼뜨리는 역사 정책의 도덕적 층위를 결정한다. 국가가 구성한 공식기억의 주인공은 전쟁의 공포가 아니라 영광이었고, 희생자가 아니라영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신성한 경험으로 구성된 전쟁의 기억은 국가에 전례 없이 종교적 분위기를 부여하고, 피에타(Pieta) 모티브를 통해 전사자를 기억하는 양상에서 보듯이 순교와 부활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국가라는 전면적인 시민종교에 투영했다. - P133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태동하던 시절 해방공간의 한반도에서는
‘반공 영령‘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전사자를 대신해 현창과 숭배의대상이 되었다. 신의주학생사건의 희생자들을 시작으로 좌우익 폭력충돌 과정에서 희생된 우익 측 경찰, 군인, 군속, 철도원, 의용소방대,
민간 반공단체 회원이 전사자 의례의 중심이 된 것이다. ‘반공 전사자‘
들의 현창은 1949년 개성전투에서 숨진 이른바 ‘육탄10용사‘ 장례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명령에 따른 결사대‘였던 일본 제국의 육탄 3용사와 달리, 대한민국의 육탄10용사는 ‘자진하여 살신성인했다‘는신화를 전국에 퍼뜨렸다. ‘조국의 군신‘이자 ‘영원불멸의 정의의 봉화‘
인 반공 전사자 숭배 의례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 등을 거치며 발전을 거듭했다. 이들은 ‘애국지사‘, ‘순국열사‘ 등으로 호칭이 격상되어 독립투사와 같은 순교자의 위치로 올라갔다. 정작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하다가 희생된 순국열사들은 국가와 사회의 무관심 속에 잊혀갔다. - P144

제국 일본의 전사자 숭배와 정치종교의 의례는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동아시아 각국에서 살아남았다. 미군의 점령 아래 제국의 유산과총력전 체제를 부정해야만 했던 일본보다 국가 건설이 절실했던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에서 의례는 더 잘 보존되었다. - P141

매일매일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렵다. 비겁한 일상 대신 영웅적 죽음을 강변했던 이들은 생존의 어려움과 직면할 용기를 갖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적 비겁함과 일상의 용기가 대비되는 대목이다. 영웅주의적 민족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민족 담론으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웅처럼 장렬하게 산화한 자들이 아니라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이나 비루하게 살아남은 자들을 고귀하고 초월적인 추상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푸는가에 따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천차만별의 모습을 띤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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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산문 속에서 입 다물기

<노생거 사원>에 대한 이야기

제인 오스틴 작품 중 최근에 읽은 것은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이었다. <오만과 편견>은 오래 전에 읽었고.
그녀의 작품들 중에는 스토리의 탄탄함으로서는 <맨스필드 파크>나 <오만과 편견>을 골라야 겠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작품은 <노생거 사원>이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오스틴의 자기 의식이 가장 돋보이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그 부분은 내가 오스틴의 자기 의식을 뭐라 정의내리기 어려워서 넘어가야 할 것 같고 개인적으로 일단 다른 장편 소설들과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노생거 사원의 방문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지만 노생거 사원을 방문하기 전 이미 충분히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장치들이 숨어 있어 그런 것들을 찾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또 소설에 대한 토론이나 역사적 의식, 남성 권위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속이 시원했다.

『노생거 사원(1818)은 교양소설과 해학극이라는 두 장르의틀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면서 오스틴이 암호화, 숨기기, 의중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기에 그토록 매혹당한 한 가지 이유를공한다. 『노생거 사원』은 겉으로 보면 재미있고 거슬리지 않지만 결국 오스틴의 시대에는 적절하지도 않고 허용되지도 않았던 가부장제에 대한 고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초기 작품이(생전에는 이 작품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을 수 없었기에) 오 - P266

스틴 사후에 출간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가부장에 대한 가혹한묘사 때문에 아주 불편해했다. - P267

여자 주인공들은 인간처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괴물처럼 만들어지는듯 보인다. 또한 그들은 괴물처럼 자기 파괴의 길로 가는 운명을 짊어진 듯하다. 따라서 『노생거 사원』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찾는 한 소녀가 자신이 자신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괴물 같 - P268

은 허구의 덫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정확하게 묘사해나간다. - P269

오스틴은 소설이 신분을 박탈당한 장르임을 암시한다. 소설은 신분을 박탈당한 젠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소설을 열등한 문학으로 간주하는데, 소설이 이미 여성 작가와 빠르게 확산되는 여성 독자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 - P272

다. 우리는 소설이 캐서린을 잘못 교육하는 양상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즉 소설은 부풀려지고 과장된 상투어로 말하도록 캐서린을 가르치고,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동기가 훨씬 복잡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만큼 악하거나 선한 행동을 기대하게 만들며, 캐서린으로 하여금 동시대인의 세속적인 이기심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오스틴은 소설가들이 ‘상처받은 집단‘이었음을 선언하고, ‘오만, 무지, 유행‘ [1부 5장] 같은말로 부당하게 비난받아온 작가라는 종을 명백하게 옹호해나간다. - P273

오스틴은 생애 후기에 존엄한 코부르 집안의 역사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오스틴은 역사적 ‘실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자신은 서사시를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역사적 로맨스도 쓸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이나 사람들을 편하게 조롱하지 못하는 소설을 계속해서 써야 한다면, 첫 장을 끝내기도 전에 틀림없이 나가떨어질 거예요. - P275

역사상 남자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무시하면서 오스틴은역사란 남성의 가식으로 구성된 한결같은 드라마인 동시에 고딕적인 로맨스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허구(그것도 매우 해로울수 있는 허구)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여성이 역사에참여할 수도 없고 역사의 장에 거의 완전히 부재해왔기 때문에, 이 역사라는 허구는 결국 여자에게 무관심한 문제일 뿐임을 오스틴은 암시하고 있다.

오스틴은 자신이 풍자하는 고딕적 관습을 거부하기보다 그것에 권위를 다시 부여하기 위해 여성적 고닥을 매우 분명하게 비판한다. - P277

오스틴은 여성의 상처받기 쉬운 속성을 묘사하는 로맨스 작가들이 틀렸다기보다는 단순했다고 넌지시 내비친다. 그녀 스스로 고백한 무지 또는 실제 무지에도 불구하고, 오스틴은 이국적이고 멀리 떨어진 고딕적 장소의 악한을 당대 영국에 훌륭하게 재배치해냈다. - P279

오스틴은 자신의 모든 소설에서 재정 압박 때문에 결혼할 수밖에없는 여성의 무력함, 불공평한 상속법,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못한 여성들의 무지, 상속녀 과부의 심리적인 취약성, 이용당하는 독신녀의 의존 상태, 몰두할 일이 없는 여성의 권태를 탐색한다. - P280

여자 주인공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허구에 부자연스럽지만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여자 주인공이 되는 소녀는 미치지는 않더라도 병들 것이라고 오스틴은 암시한다. - P287

메리 셸리의 괴물처럼 캐서린은 마침내 누군가가 만들어낸 창조물로, 즉 마음에 들지 않은 플롯 안에 갇혀 있는 인물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메리 셸리의 괴물처럼 캐서린은 자신이 속한 문화의 기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캐서린의 좌절은 부분적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굶주리고 고통받는 틸니 부인에게반영되어 있다. 자신이 이 여성 수인을 해방시켜준다는 것도 망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 P288

오스틴의 초기 패러디물은 모두 독자들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에게 과중하게 의존함으로써 그녀의 후기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의 상상력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시사한다. 해럴드블룸은 (자신을 여성으로, 그리하여 이류로 정의한 것과 불가분하게 관련되어 있는 말)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했지만 오스틴이 자신의 의식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준 작품은 『노생거사원』이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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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9 21: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생거사원 좀 어슬퍼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별로였는데, 제인 오스틴의 자기의식이 돋보인다는 평가는 잘 모르겟네요. 제가 똑바로 안 읽어서 그럴까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11-10 09:26   좋아요 2 | URL
저는 어설퍼서 더 신선했던 것 같아요^^; 기존의 오스틴 소설들에서 느낄 수 없는 재미들이었거든요. 그리고 자기의식 평가는 저도 오스틴의 자기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난해해서요ㅎㅎㅎ 그리고 저도 작가가 저렇게까지 분석을 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는 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 부분도 있어요^^;

다락방 2022-11-10 07: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생거 사원을 읽은지 오래되어 내용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제인 오스틴의 자기 의식‘이라 하니 퍼뜩 책에 대해 등장인물이 주장을 펼치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아니, 다른 분들 다 읽고 계시는데.. 저는 어쩌죠?

저는 오늘 실낙원 읽으려고 꺼내왔다가 야.. 이거 못읽겠다 싶어서 한 열 장 읽고 덮었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11-10 09:28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이 책에서 노생거 사원에 대한 이야기의 분량이 제법 길더군요^^ 읽어두길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오스틴의 자기의식은 아직 와닿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저 몇개의 소설을 읽은 것만으로 오스틴 소설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일뿐이라서요.

실낙원 저도 구매는 해두었는데 읽을 시간이 없네요ㅎㅎㅎ 다락방님이 덮으셨다는 건 왜일까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scott 2022-11-10 16: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노생거 사원이 오스틴 작품 중 의외로 재밌고
나머지 주요 작품들 중심이 결혼과 사랑 그리고 돈, 재산 문제여서 ㅎㅎ

학계에서는 <이성과 감성>을 최고작으로
문학인들은 <엠마>,
나보코프는 <맨스필드 파크>

그리고 제 개인적인 기준으로 마지막 작품인 <설득>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10 17:38   좋아요 3 | URL
저도 노생거 사원이 그래서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엠마랑 설득은 아직 읽지를 못해서 평가가 어렵습니다만 설득이 마지막 작품이니 완성도가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예상은 해봅니다^^

레삭매냐 2022-11-10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인 오스틴의 소설 6편 중
에 만난 건 <설득> 꼴랑 하나
네요.

예전에 일본 여행 가서 그 책
을 들고 다니면서 읽을 것으로.

<오만과 편견>이랑 다른 책도
수배해 두긴 했는데...

거리의화가 2022-11-10 17:43   좋아요 2 | URL
매냐님 저는 설득하고 엠마만 못 읽었어요. 사실 문학소설은 잠시 그만 읽고 다른 책들을 읽고 싶어서 쉬는 중입니다ㅎㅎ 저는 결혼과 남편감 찾는 이야기가 지루해서 이입하기가 어렵더라구요ㅠ

mini74 2022-11-14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릴적엔 그냥저냥 재미나고 말 많고 귀에서 피나게 만드는 연애소설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다미여 읽으면서 오스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거 같아요.. 노생거 사원 저도 읽어야 하는데...

거리의화가 2022-11-14 17:3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저는 연애소설을 진짜 간지럽기도 하고 그래서 외면했거든요. 그래서 제인 오스틴에 대한 편견이 좀 심했는데 이번에 여러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편견에서 좀 벗어날 수 있게된 것 같습니다. 노생거 사원 저는 재밌었어요ㅎㅎ

독서괭 2022-11-18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저 4장 읽다보니 <노생거 사원> 미리 안 읽은 게 몹시 후회가 됩니다ㅠㅠ 12월에라도 구매해서 읽어야봐야겠어요. <빌레뜨> 사놔서 읽어야하는데 말이예요..!!

거리의화가 2022-11-20 19:18   좋아요 1 | URL
저는 오스틴은 일단 올해까지 <설득>만 읽어볼까 싶은데 소설은 잠시 쉬고 싶어서... 손놓고 있습니다. 3부 앞에서 멈춰서있는데 하필 밀턴이라 <실낙원> 잠시 읽어보니 역시 제 스타일이 아니네요ㅋㅋㅋ 아무래도 이건 도전못할 것 같아요. <노생거 사원>은 다미여에서 분량도 제법 되고 막상 읽어보니 재밌게 읽었었거든요. 아마 괭님도 나중에라도 읽으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Ⅱ. 계보

[도덕적 원죄와 희생의 그늘]
<가련한 폴란드인 게토를 바라보네>(얀 브원스키, 1987.1.17) 에세이 발표하자마자 논란의 중심에 서 - 2차 대전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 이웃에 대한 폴란드인의 숨겨진 죄의식(유대계 이웃이 나치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또는 고소하게 지켜본 폴란드인의 죄의식)을 들추어냈기 때문 -> 방관자 or 동조자 <-> 전후 폴란드의 기억 문화는 나치즘의 희생을 강조하는 당의 공식 입장과 스탈린주의의 희생을 강조하는 민중 입장의 두 축으로 구성

영화 <쇼아>(클로드 란츠만 감독, 1985) - 폴란드 국내에서 상영이 금지.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 공범자인양 잘못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보았기 때문. 이는 폴란드 공산당의 공식 입장(민족주의)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 현실사회주의는 인종주의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체제 위기를 넘어서려 했고, 반유대주의는 가장 손쉽게 동원 가능한 기제

숫자의 정치학 - 폴란드의 막대한 피해

폴란드 공산당은 2차 대전 이후 최초의 단일민족국가 수립을 당의 치적으로 선전했으나 폴란드인 대부분도 ‘유대인 없는 폴란드‘라는 새로운 국가 구성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당당함과 부끄러움 사이]
<가련한 폴란드인 게토를 바라보네>(얀 브원스키, 1987.1.17) 에세이는 1980년 체스와프 미워시의 시 <피오리 광장>(1943) 인용 - 1600년 2월 이단으로 몰려 로마의 피오리 광장에서 화형당하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 조르다노 브루노와 그의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흥겨운 일상을 즐기는 로마 시민들을 묘사

폴란드인의 반응은 변명과 성찰
변명: 서방 언론의 왜곡으로 일부 폴란드 농민과 프티 부르주아의 반유대주의 행위를 지나치게 일반화하여 부정적 여론 초래
성찰: 나치의 압도적 폭력 앞서 유대인 이웃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어도 죽게 내버려둔 데는 폴란드 이웃의 책임이 존재

[예드바브네 학살과 카인의 후예]
《이웃들 》(얀 그로스, 2000)은 홀로코스트 당시 폴란드인과 유대인 이웃의 관계가 도덕이나 양심, 부끄러움의 문제를 넘어 범죄의 문제임을 드러내 - 예드바브네라는 마을에서 폴란드 이웃들이 유대인 학살의 주역이자 공범자였다는 범죄행위가 드러남 -> 홀로코스트 방관자에서 가해자로 논의점이 변경됨

영화 <이다(Ida)>(파배우 파블리코프스키, 2013): 나치 점령 당시 부모를 죽인 폴란드 이웃 농민들에 의해 수녀원으로 넘겨져 가톨릭 수녀로 교육받은 이다가 이모와 함께 자신의 고향이자 부모의 주검이 묻힌 곳을 찾아가는 로드 무비 -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 비판 시달려

1990년대 폴란드는 나치 독일의 점령과 스탈린의 소련이 강요한 공산주의에 이중으로 희생된 자신들의 고통을 국제사회가 충분히 인정하지 않았다는 담론이 지배적. 따라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폴란드인의 죄의식이나 역사적 책임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음

민족주의적 변호론의 급진적 분파는 폴란드인이 유대인의 희생자였다고 강조. 독소전쟁 기간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유대인 빨갱이가 폴란드의 반공주의적이고 반러시아적인 애국자를 소련의 비밀경찰에 밀고하여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쫓겨나게 하는데 앞장섰다는 것. ->유대인은 배반자고 유대인이 받은 박해는 인과응보이다 주장.

바우만: ‘세습적 희생자의식(hereditary victimhood)‘ -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1968년 폴란드 공산당 민족주의 파르티잔파의 반시온주의 표적이 되어 이스라엘로 망명. 이스라엘에서 바우만은 공격적 시온주의(히브리어: ציונות, 영어: Zionism 시오니즘) 또는 유대주의, 유태주의(猶太主義, 문화어: 유태복고주의猶太復古主義)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의식을 자기 정당화의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목격. -> 전후 폴란드와 이스라엘 전후 세대가 자신들을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의식에 문제 제기

세습적 희생자라는 사회적 기억의 이면에는 또 다시 식민주의의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는 문제의식이 들어있다.

[원거리 민족주의]
《요코 이야기》: 일본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가전적 이야기로 2차 대전 일본이 패할 당시 11세 소녀인 작가와 가족이 생명의 위협, 기아, 성폭력의 공포 등을 겪으며 함경도 나남에서 일본으로 귀환할 때 겪은 경험을 그렸음. 1986년 미국에서 간행된 책은 2005년 4월 한국어로 번역되었음. - 2006년 9월 보스턴과 뉴욕의 한국계 미국인 학부모들이 학생을 위한 독서목록에 이 책이 포함되었다는 것에 문제 제기하면서 논쟁이 시작됨. 이들은 식민주의와 전쟁의 피해자인 한국인을 가해자로 묘사하고, 가해자인 일본인은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어 미국의 학생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이유.(민족주의적 사유)
실제 이 책은 개인적 고통은 담겨 있으나 역사적 맥락은 생략되어 있어 문제는 있지만 패전 일본인의 민간인은 실제로 위험에 노출된 집단이었다.
‘사이버외교사절단반크‘가 펴낸 만화책에서 요코 이야기의 거짓말을 밝히는 것에 주목적을 둠으로써 한국인의 존재론적 불안감을 드러냄 - <안네의 일기>와의 비교, 731부대의 만행, 미국의 수업 중단 요구와 출판사의 출판 중단 요구 등 -> 이런 과잉 반응으로 일본의 우익 성향 출판사에서 일본어로 출간되기에 이름. 2013년 출간되었으나 이후 일본 아마존 전쟁 수기 장르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인기 차지

폴란드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상 최초의 단일민족국가 수립을 당의 치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로 전체 유대계 인구의 90%인 300만 명을 잃고, 강제 이주 정책을 통해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독일인 등을 추방했다는 사실은 선전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당의 공식 정책과는 별도로 폴란드인 대부분도 ‘유대인 없는 폴란드‘라는 새로운 국가 구성에 암묵적으로 찬성하고 있었다.
마 안 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집을 점유하고 있던 폴란드 이웃의 반응은 "아직도 살아 있냐?"는 것이었다."
자기가 머무는 집의 원주인인 유대인 이웃이 살아 돌아온 게 전혀갑지 않다는 투였다. 대중적 지지 기반이 취약한 폴란드 공산당은 공 - P76

장, 주택, 토지 등 유대인의 부동산을 점거한 폴란드인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다. 폴란드 이웃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유대인의 재산을 나치의 패망 이후에도 불법 점유할 수 있었던 데는, 폴란드 공산당과 국민사이에 암묵적이지만 공공연한 공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 P77

나치가 만든 극히 비인간적인 이 세계에서 이성은 도덕의 적이었고, 합리성과 인간성은 충돌했다. 나치는 생존의 합리성에 비추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도덕성이 비합리적으로 보이게끔 인간의 법칙을 비틀었다. 이성적 판단은 나치 범죄에 동의하도록 강요했고 이웃의죽음에 눈을 감게 만들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라는 악령을 쫓아내는 데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문제의 핵심은 변호론자가 주장하는 영웅적 투쟁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과 성찰론자가 자책하듯이 더 많이 구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부끄러움을 느낌으로써 도덕적 정화를 시도했다는 자부심"과 "자부심에 취함으로써 도덕적 타락을 자초했다는 부끄러움 중 어느 쪽을선택하는가의 문제였다." - P88

일본 식민주의의 ‘세습적 희생자‘라는 자기규정에 갇혀 있는 한 잠재적 식민주의에 대한 내부 비판은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다. 세습적 희생자라는 사회적기억의 빗장을 풀고 슬쩍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하면 또다시 식민주의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숨어 있다. 그것은 식민주의가 강요한 제국-식민지의 지배 구도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 밑에는 제국으로 우뚝 서지 못하고 식민 - P95

지로 전락한 역사에 대한 회한이 자리 잡고 있다. 식민주의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제국이 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문제라는 사고방식이다. 분명한 반식민주의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세습적 희생자의식은 탈식민주의적 성찰을 가로막는다. - P96

원거리 민족주의는 대개 이민당시의 낡지만 강력한 민족주의 기풍을 그대로 간직해서 그동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온 본국의 민족주의보다 더 엄격하고 본질주의적인경향이 강하다. 본국의 민족주의는 역사적 조건과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데, 이들의 민족주의는 이민을 떠날 당시의모습 그대로 박제화되어 있다. 민족의 기억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한국계 미국인의 원거리 민족주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SET미국이라는 인종차별적 다문화 공간에서 날카로워진 한국계 미국인의 원거리 민족주의가 본국으로 역수입되어 한국의 민족주의적 기억 문화를 강화하는 이 경험은 민족주의가 트랜스내셔널한 현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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